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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과 축복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찬양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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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paulcho 작성일10-03-25 16:04 조회4,32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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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 과 축복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찬양하라

도입)
아프리카 콩고에서 물이 귀해 오염된 물만 먹고 살던 한 콩고인이 미국여행 중에 호텔에 묵게 되었다. 호텔에 있는 수도꼭지를 돌리니까 깨끗한 물이 한없이 쏟아졌다. 그러자 콩고 사람은 이렇게 생각했다. ‘내가 저것을 고향에 선물로 가져가야 되겠다. 저것만 있으면 물 걱정은 없으리라.’ 그래서 밖에서 렌치를 사가지고 와 수도꼭지를 뜯어내 가방에 넣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동네 사람들을 다 모았다. “내가 이제부터 우리 동네의 물 문제를 해결하겠다”며 그는 수도꼭지를 돌렸다. 그러나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수원지와 분리된 수도꼭지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던 것이다. 우리는 축복의 근원이신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어야 한다. 날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과 연결될 때에만 하나님은 우리에게 풍성한 복을 부어주실 것이다.

4월 3일
일몰:오후 6시 56분
안식일오후

기억절: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그 성호를 송축하라”(시 103:1).

연구 범위: 마 22:37~38, 롬 12:1, 엡 2:8~9, 5:2, 골 3:13, 딤후 1:9, 요일 4:10.
중심 사상: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과 위엄에 대한 감사한다면 최악의 상황에서도 찬양하게 된다.

허블 망원경의 발명으로 인류는 더 넓은 우주를 탐색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그만큼 미지의 세계는 더욱 확장되었다. 인간의 이성이 무한한 우주를 파악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하물며 세상의 창조자를 우리가 어떻게 다 파악할 수 있겠는가. 창조자는 창조된 세계보다 필연적으로 더 복잡한 존재일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우주를 다 파악할 수 없다면, 그것은 창조자를 다 파악할 수 없다는 뜻이다.
나아마 사람 소발이 욥에게 물었다. “네가 하나님의 오묘함을 어찌 능히 측량하며 전능자를 어찌 능히 완전히 알겠느냐?”(욥 11:7).
그런데 하나님은 이 엄청난 세상을 창조하신 것으로 충분하지 않으셨던 모양이다. 그분은 인간 예수가 되셔서 우리의 인성을 입고 우리의 죄까지 짊어지셨다.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영생을 주시려고 죄의 형벌을 당하셨다.
우리 앞에 제시된 진실을 바라보라. 이런 사실을 알고도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으며, 그분께 최고의 경배와 찬양을 드리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일요일
3월28일
사랑의 우리 하나님

도입)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설명한다는 것은 세계를 일주한 사람이 모든 나라에서 체험한 것들을 5분 만에 설명한다는 것과 같을 것이다. 이 말은 하나님의 사랑을 다 표현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말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너무나 크기에 19세기 찰스 스펄전이나 4세기 황금의 입이라 불리는 요한 크리소스톰과 같은 설교의 대가들이 나서서 온갖 문학적 수사를 동원하더라도 제대로 설명할 수 없다. 14세기 영국 놀위치의 줄리안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은 우리의 영혼을 너무나 사랑하신다. 그 사랑은 모든 피조물의 이해력을 초월할 정도로 특별하다. 창조주가 우리를 얼마나 많이 그리고 감미롭고 부드럽게 사랑하시는지 완전히 이해할 수 있는 피조물은 없다.”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도덕적 자유의지를 가진 존재로 창조하셨다. 그리고 자신에게 순종할지, 불순종할지 선택할 능력을 주셨다. 그뿐 아니라 인간들이 자유를 가지고 잘못된 선택을 했을 때 발생할 수 있는 잠재적인 결과에 대하여 대비책까지 마련하셨다. 그 대비책이란 다름 아닌 복음이다. 복음이란 인간이 원래 소유했던 영원한 생명을 회복시키기 위해 예수께서 특별한 일을 행하셨다는 기쁜 소식이다.

1. 딤후 1:9을 읽으십시오. 하나님께서 세상을 만드시기 전에 구원의 계획을 준비하셨다는 사실을 묵상하십시오. 이 말씀은 우리가 존재하기도 전에 구원의 길을 예비하신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에 대하여 어떻게 설명하고 있습니까? 그대는 이 말씀을 통해 은혜에 관하여 무엇을 깨달았습니까?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과 은혜는 우리가 존재하기 전부터 역사하고 있었다. 복음은 어떤 면에서 우리 영혼에 대한 보증과 같은 것이다. 하나님은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고 계셨으며, 그분의 사랑과 지혜로 앞으로 닥칠 위기에 대처하여 적절한 구원의 계획을 세우셨다. 그리고 그 계획의 중심에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실 예수님의 희생이 자리 잡고 있었다. 십자가는 타락한 상태에 있는 우리가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십자가에서 하나님은 인간이 되셨고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형벌을 받으셨다. 그러므로 십자가 외에는 그 무엇도 우리의 구원을 만족시킬 수 없다. 왜냐하면 십자가의 혹독함을 무릅쓰고 예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기꺼이 대가를 치르셨기 때문이다.

2. 우리를 위한 그와 같은 사랑에 대하여 우리는 어떻게 반응해야 합니까? 엡 4:32, 5:2, 빌 2:5~8, 골 3:13. 이 성경절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기본 메시지는 무엇입니까?

교훈: 하나님은 우리가 타락하기도 전에 구원의 계획을 세우셨고, 직접 인간이 되셔서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죽으실 만큼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이다.

부가적용)
하나님은 근원은 바로 사랑이시다. 아버지는 아들을 사랑하고, 아들은 아버지를 사랑하고, 성령께서 그 연결자가 되셔서 삼위의 하나님은 영원 전 부터 영원까지 사랑하신다. 이것이 하나님의 가장 큰 가치이고, 기쁨이다. 놀라운 것은 이런 하나님의 가장 큰 가치를 인간의 죄를 속량하기 위해 잠시 끊으셨다는 것이다. 십자가의 희생은 아들이 하나님 아버지의 인간의 죄에 대한 모든 진노를 대신 받은 것이다.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고통이었을 것이다. 이는 또한 아버지의 고통이기도 하다. 영원한 사랑인 아들에게, 그 공의의 죄에 대한 진노를 쏟아 부어야만 했기 때문이다. 우리의 구원은 우리에게는 거저일지 몰라도, 바로 이 죄사함은 하나님의 크신 희생의 결과이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은 이런 희생을 치루면서 까지 이 일을 하셨을까? 이 일은 이미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갖도록 설계하는 순간부터 예견된 것이다. 자율적인 인간은 그가 갖고 있는 자유의지 때문에 하나님의 의지에 반하여 죄를 지을 개연성이 언제나 존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자유의지를 지닌 인간을 창조하신 이유는 하나님이 자율적인 인간과의 바른 사랑의 관계를 무척이나 원하셨고, 그것이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성취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도전정신이시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죄를 지을 가능성에 대한 대비책이 이미 창세 전에 준비 되었었다.(엡1:4) 그 해결책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런데 한 가지 문제는, 하나님 당신이 자신의 최고의 가치를 희생해 가면서, 인간을 사랑할 가치가 있느냐는 것이다. 만약 가치 없는 것을 위해 가치 있는 것을 희생한다면, 그것은 결코 의로운 일이 아니다. 하나님이 의롭지 못한 일을 한다는 것은 또한 모순이시다. 그렇다면, 적어도 인간에 대한 사랑이 하나님의 최고의 가치를 희생할 정도의 가치와 동일한 가치를 지니지 않는 다면 안되는 것이다. 과연 하나님께서는 피조물인 우리 인간을 그렇게 사랑하실 가치가 있을까? 결론은 "그렇다" 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가치를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부여 하셨다는 것이다.

월요일
3월29일
은혜의 하나님

도입)
은혜는 하나님의 nickname(별명)이시다. 하나님은 스스로 자신의 닉네임을 "은혜"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은 "은혜" 라는 닉네임을 사용하기를 좋아하신다. 그래서 하나님의 이름에는 은혜라는 말이 많이 따라 나온다. 그리고 하나님의 하신 일에도 은혜라는 말이 많이 따라 나온다. 사람들은 대개 닉네임을 가지고 있다. 이 닉네임은 그 사람의 성품을 잘 나타내 주는 것이다. 성경에는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은혜를 주신 후에 주신 닉네임이 많이 있다. 아브람에게는 아브라함이라는 닉네임을 주셨는데 이는 "열국의 아비"라는 뜻이다. 자식 하나도 아직 없는 아브람에게 "너는 열국의 아비다" 라고 이름을 주신 것,-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이다. 야곱에게는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주셨는데 이는 하나님의 왕자 라는 뜻이다. 인간적으로 보면 야곱은 간교하고 도덕적으로 흠도 많은 사람이라서 인간적으로 보면 별로 가치 있는 인물 같지 않은데 하나님께서는 "너는 하나님의 왕자" 라고 하는 별명을 주셨으니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이다. 시몬에게는 베드로라고 하는 이름을 주셨는데 이는 반석이라는 뜻이다. 이것 역시 하나님의 은혜이다. 여러분은 어떤 닉네임을 받기를 원하는가?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엡 2:8~9).

❶ 구원은 왜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은혜로 말미암는 것입니까? 왜 행위는 우리를 구원할 수 없습니까?

간질을 앓고 있는 소년이 뉴욕의 지하철에서 경련을 일으키다가 선로로 떨어졌다. 마침 지하철이 역에 막 진입하고 있었다. 그때 한 남자가 지체 없이 몸부림치고 있는 소년 위로 몸을 던졌다. 전동차가 굉음을 내며 그들 앞에 급정거할 때까지 그는 소년을 붙들고 바짝 엎드려 있었다. 그리고 이렇게 외쳤다. “우리는 괜찮습니다!” 죽을 수밖에 없었던 소년을 살린 것은 오직 자아를 부정하고 위험을 무릅쓴 그 남자의 행동 때문이었다.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 과분한 호의와 은혜를 베풀어 주신 예수님을 떠올리게 한다. 이 소년은 앞으로 그 남자에게 감사한 마음으로 살게 될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를 위해 행하신 일들을 생각하면서, 우리도 주님께 더욱 감사해야 한다.
우리가 얼마나 감사한 마음으로 살고 있는지 확인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예수님께 얼마나 감사하는지, 그분께서 행하신 일 때문에 하나님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고백하는 것도 중요한 일이지만, 우리에게 더 중요한 것은 우리의 신앙생활이 구원을 얻기 위한 행위가 아니라, 예수께서 이미 주시고 약속하신 구원에 대한 찬양과 감사로 가득 찬 심령에서 비롯된 것임을 확인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행하신 일들을 감사히 여기기란 정말 쉽지 않다. 학생반에서 구원의 계획을 설명했더니 한 학생이 자신은 죽어야 할 일을 한 적이 없다고 말했다. 그날의 핵심은 우리가 죽어 마땅하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누군가 이런 식으로 질문했다면 더 좋았을 것이다. 그대는 살아야 할 무슨 일을 했는가? 그대는 영생을 얻을 만한 무슨 일을 했는가?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기꺼이 수많은 고난을 겪으셨는데, 그대는 무엇을 했는가?

교훈: 우리는 그리스도께 과분한 은혜를 받았기 때문에 항상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

부가적용)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시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주신다. 하나님의 은혜 속에 모든 좋은 것이 다 들어있다. "은혜"는 하나님의 종합선물 package 라고 말할 수 있다. 이 은혜 속에 우리의 생명과 모든 필요와 축복이 다 들어있고 모든 신령한 복이 다 들어있다 (엡 1:3-6) 당신이 받은 것은 모두 은혜로 받은 것이지 당신의 공로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서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다(약 1:7). 그러므로 하나님이 당신에게 좋은 것을 주시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주시는 것이지 당신의 조건 때문에 주시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결코 당신이 선하기 때문이나 당신이 예쁜 짓을 해서 주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은혜가 많으신 분이기 때문에 모든 것을 값없이 은혜로 주신다. 우리의 순종은 은혜의 조건이 아니라 은혜의 결과이다. 우리는 은혜의 결과로 순종하게 된다. 당신의 생명이 그저 주신 것이요 당신이 누리는 자연 -공기, 햇빛, 물, 그저 주시는 것이 아닌가? 당신이 받은 구원이 그저 주신 것 아닌가? 당신이 지금 누리고 있는 것이 하나님께 받지 않은 것이 있는가? 이제 당신이 할 일은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값 주고 사려고 하지 말고 믿음으로 받아서 누리면 되는 것이다. 당신은 은혜의 하나님을 믿는가? 아니면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믿는가? 당신이 어떤 하나님을 믿는가에 따라서 당신의 영적 삶이 달라진다. 당신이 은혜의 하나님을 믿으면 당신이 은혜의 삶을 살아가게 될 것이고 그렇지 않고 보응하시는 하나님,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믿는다면 은혜를 가로막는 두려움과 의무감의 속박 속에 살아가게 될 것이다. 당신이 은혜의 하나님을 믿고 살면 기쁨과 평강과 자유함을 누리게 될 것이다.

화요일
3월30일
사랑의 관계

도입)
인생을 살아가게 힘은 사랑에 있다. 사랑이 식어지면 아무 것도 할 수 없게 된다.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이 사람에 대한 도리를 다하듯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에 대한 계명을 지키게 되는 것이다. 사랑은 힘(에너지)이다. 우리 안에 있는 생명력은 믿음 소망 사랑이라는 구체적인 형태로 나타난다. 우리 안에 생명이 크면 사랑도 크다. 하나님과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은 모든 율법을 다 이룬 사람이다.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다. 사랑은 생명의 구체적인 표현이다. 어머니가 자식을 사랑한다면 자식에 대하여 어머니로서의 도리를 다하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다. 사랑한다면 자식에 대하여 어머니로서 마땅히 해야 할 도리를 다할 것이다. 남편이 아내를 사랑한다면 남편으로서 아내에 대하여 지켜야 할 도리를 지키려고 애쓰거나 수고할 필요가 없다. 사랑한다면 모든 계명은 저절로 지켜지는 것이다. 요한복음 14:21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요한복음 14;23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저에게 와서 거처를 저와 함께 하리라 나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내 말을 지키지 아니하나니 너희의 듣는 말은 내 말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면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지 말라고 해도 지킨다. 그러나 사랑이 식어졌기에 아무리 계명을 지키려 수고하고 애써도 지킬 수가 없게 된다. 마음에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힘이 없는 데 어떻게 지킬 수 있겠는가? 형제자매들이여, 계명을 지킬 힘이 사랑인 것을 알지 못는가? 그러므로 사랑의 은사를 구하라. 우리 마음이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불탈 때 에너지가 발생되는 것이며 어떤 고난도 기쁘게 통과할 수 있는 것이다.

1. 무엇이 가장 중요한 계명인지 질문을 받고,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되는 계명이요”(마 22:37~38). 이 말씀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예수께서 여기서 명령하시는 바를 우리는 어떻게 실행할 수 있습니까?

이 말씀이 암시하는 엄청난 의미들을 생각해보라. 예수님의 말씀에 따르면, 모든 계명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안식일 준수도, 살인이나 도둑질을 금지하는 계명도 아니다. 가장 중요한 계명은 우리 마음과 영혼에 관한 것이다. 계명이 다루려는 영역은 외적으로 나타난 행위보다 우리 마음속이다.
만약 가장 중요한 계명이 진실로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에 관한 것이라면, 모든 계명들의 기초는 관계에 관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가 위에 계신 하나님과 모든 사람들, 그 외의 모든 것들을 사랑하는 것은 결국 관계에 관한 설명이기 때문이다.

2. 그렇다면 왜 모든 관계에 있어서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가장 중요합니까? 왜 그 사랑이 가장 근본적인 것입니까? 만약 우리가 하나님 외에 다른 것을 더욱 사랑한다면 영적으로 무엇이 잘못된 것입니까?

사실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목적하신 바는 인간들이 하나님과의 특별한 관계를 누리도록 하는 것이었다. 그분의 뜻은 지구상에 다른 생명체들보다 인간들에게 좀 더 높은 수준의 경험을 제공하는 것이었다. 이런 사실은 창 1:26에 나타난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어떤 피조물도 그분의 형상으로 창조되지 않았다. 어떤 피조물에게도 인간에게 부여된 책임이 주어지지 않았다. 인간은 단순히 매우 진화된 유인원이 아니다. 인류와 이 땅의 다른 피조물 사이에는 엄청난 질적 간격이 존재한다. 우리는 특별하다. 그리고 그러한 특별함은 동물이나 식물들은 경험할 수 없는 사람과 하나님 사이의 사랑의 관계 속에서 나타나 있다.

교훈: 사랑은 관계에 대한 것인데, 인간이 특별한 것은 하나님과의 특별한 사랑의 관계 때문이다.

부가적용)
주님과 우리의 관계에 있어 기억해야 할 것은 주님께서는 우리 각자를 모두 개인적으로 관계하신다는 것이다. 때때로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숫자에 근거하여 대하신다고 착각할 때가 있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들은 자신을 위하여 더 많은 사람들이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더 빨리 응답하실 것이라고 믿고 있다. 이러한 사람들은 성경에 대하여 무지한 것이다. 99마리의 양을 두고 한 마리를 찾아 올인 하셨던 예수님처럼 내가 속한 그룹의 크기에 따라서 당신과 관계하지 않으시고 당신의 믿음에 따라 관계하신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은 오직 나와 당신의 개인적인 믿음에 달려있다. 그것은 숫자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 또 다른 사람들은 숫자에 대하여 다른 각도로 생각한다. 그들은 고난을 겪고 있는 사람이 자신들 혼자만이 아님을 알 때 안도감을 느낀다. 당신은 그런 사람들이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을 것이다. “우리 20명이 그 회사에서 해고 당했어” “또는 우리 반에서 많은 숫자가 합격하지 못했어.” 이것은 올바르지 못하다. 당신은 그러한 관점에서 인생을 봐서는 안된다. 당신의 구원과 하나님과의 관계처럼 인생도 개인적인 것이다. 당신의 삶의 흐름을 결정하는데 다른 사람들의 경험을 사용하지 말라. 당신이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듣고 반응하는 것이 중요하다. 하나님은 당신을 개인적으로 사랑하신다. 그분은 당신의 이름을 알고 계시며, 당신을 독특하게 개별적으로 관계하신다. 당신이 태어나기도 전에도 당신과 같은 사람은 없었고, 지금도 전 세계에도, 또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하나님께 있어서, 당신은 이전에도 앞으로도 유일한 존재이다. 당신은 그분께 개인적이며 특별하다. 이런 까닭에 하나님께서는 당신과 개인적으로 교제하시는 것을 좋아하신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세상에 홀로 있는 것처럼 당신을 사랑하신다.

수요일
3월31일
주님을 찬양함

도입)
예레미야 보로스는 “감사함 또는 만족함은 진귀한 보석과 같다”고 말했다. 만족함과 감사함으로 사는 것은 진귀한 보석을 가진 것처럼 귀한 것을 품고 사는 삶을 말한다. 또 다른 의미는 진귀한 보석처럼 쉽게 가질 수 없는 삶이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히브리 사람들은 감사를 '야다'(Yadah)라고 했다. 야다라는 뜻은 '손을 펴서 경배하다, 찬양하다, 예배하다'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감사란 구원받은 사람들이 손을 펴서 예배하며 찬양하는 것이다. 또한 진정한 감사는 겸손한 자만이 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을 알고 그분의 은혜를 아는 자만이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마음에 참 평안함과 기쁨과 더욱 충만함을 주신다. 아무리 이 세상에서 잘 된다 하더라도 하나님을 모른다면 참 행복은 누릴 수 없다. 반대로 이 세상에서 다른 것은 좀 부족하다 하더라도 하나님을 바로 알고 믿는다면 진정한 행복을 누릴 수 있다.

1. “하나님 안에서 기뻐하라. 그리스도는 빛이시며, 그분에게는 어둠이 전혀 없다. 빛을 바라보라.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에 스스로 친숙해져라. 다른 이들을 행복하게 하라. 이것이 그대의 첫 번째 일이다. 그렇게 하면 품성의 가장 훌륭한 특징들이 살아난다. 하늘을 향하여 마음의 창을 활짝 열라. 그리고 그리스도의 의의 빛이 들어오게 하라. 그러면 밤이나 낮이나 그대의 마음은 하늘의 밝은 빛으로 충만하게 될 것이다.”(애드밴트 리뷰 앤 새버스 헤럴드, 1904. 4. 7) 이 말씀은 우리의 삶에 어떻게 실현될 수 있습니까?

분명히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을 찬양해야 할 여러 가지 이유를 가지고 있다. 우리에게 고난과 두려움, 고통과 실망이 있을지라도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해야 할 충분한 조건을 가지고 있다. 이것을 생각해 보라. 그리스도께서 약속하신 영생의 소망은 우리의 눈앞의 현실과 상관없다. 지금 보고 있는 것들은 모두 사라질 것이다. 그리고 더 이상 죽음도 없고 슬픔도, 눈물도, 고통도 없는 세상이 올 것이다(계 21:4). 이것만으로도 찬양해야 되지 않을까?

2. 그대가 현재 겪고 있는 곤란과 상관없이 하나님을 찬양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하나님께 감사해야 하는 이유와 조건들의 목록을 적어 봅시다.

진심으로 찬양하고 싶다면, 우리는 먼저 주님의 선하심을 개인적으로 경험할 필요가 있다. 우리 스스로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우리를 위한 그분의 사랑이 정말 무엇인지 알 필요가 있다. 주님은 누구든지 열린 마음으로 그분의 인도를 따르기 원하는 자에게 이 일이 가능하게 하신다. 하나님의 선하심과 사랑을 스스로 깨닫지 못하는 것은 단지 우리의 완고한 마음과 욕망 때문이다. 우리가 그분의 사랑과 선하심을 한번만 알게 된다면 어떻게 주님을 찬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교훈: 우리는 현실적으로 많은 어려움을 가지고 있지만,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직접 체험한다면 그분을 찬양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부가적용)
성경 주석가 메튜 헨리(Matthew Henry)가 이렇게 말했다. “감사는 더하기(+)와 같아서 모든 것에 감사하면 거기에 하나님의 축복이 더해진다. 어떤 일이든지, 어디서든지 감사하면 플러스의 축복이 주어진다. 그러나 반대로 원망과 불평은 빼기(-)와 같아서 있는 것까지 빼앗기고 없어진다.” 지금 감사하는 삶을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더하시는 은혜를 주신다. 아브라함 링컨(Abraham Lincoln)이 말했다.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 발전한다.” 칼 힐티(Karl Hilty)는 “감사하는 사람이 젊어진다.”고 말했다. 예수님을 믿으면 과거에 여러 가지 어렵고 괴로웠던 것이 모두다 감사로 변화되기 시작한다. 그런 고통이 있었기 때문에 오늘날 여러 분이 예수님을 더욱 잘 믿고 은혜 가운데 거하게 된 것이다. 이러므로 과거의 감사할 것을 찾아내 감사하고 하나님께 찬양할 때 우리 의 마음은 밝고 맑고 환해진다. 또한 우리의 환경 가운데 감사할 것을 찾아야 한다. 우리가 남편 에게,아내에게, 부모에게, 자녀에게 감사할 것을 찾아내고 또한 현재 환경에서도 감사할 것을 찾아내 감사하면 계속적으로 긍정적인 태도를 가질 수 있다. 사람이 불평을 하려면 얼마든지 불평할 것을 찾아 낼 수 있다. 그러나 또 감사할 것을 찾아내면 감사할 것이 그렇게 많을 수가 없다. 이러므로 우리는 결심하고 감사할 것을 찾아내 감사해야 한다. 하나님 앞에 감사하고 찬양하고 이웃에 감사하고 찬양해야 한다. 그럴 때 우리의 마음속이 그 감사와 찬양을 통하여 어두움에서 빛으로, 절망에서 소망으로, 우울에서 쾌활하게 되고 믿음 소망 사랑으로 꽉 들어찬 상태로 변화된다.

목요일
4월 1일
합당한 제사(롬 12:1)

도입)
기독교 신앙은 ‘믿음으로 의롭게 됨’에 기초하고 있는데, 롬1:17 ‘의’란..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의미한다. 즉, 기독교 신앙은 믿음으로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갖는 것이다. 아마 당신은 주님과의 친밀하고 개인적인 시간, 특별히 기도와 경배를 향한 당신의 열정이 쇠퇴했을 지도 모른다. 한때 갈급했던 말씀을 향한 굶주림과 열정이 언제부터인가.. 이제는 거의 다 사라졌을지도 모른다. 존 G. 레이크는 실족하는 모든 사람의 첫 징후는 말씀을 향한 열정이 식어 가는 것이라고 말했고, ‘레오나드 레이븐힐’은 실족이란 기도의 실족에서 시작한다고 자주 이야기한다. 어떤 것도 ‘나와 주님과의 관계’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 설교도 목회도사역도 이것보다 중요하지는 않다. 그 어떤 것도.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 죄는. 본질적으로 바로 이 부분을 공격한다. 이 때문에 죄는 우리의 삶에서 뿌리째 뽑혀져야 한다. 이 때문에 우리는 죄를 미워하고 거절해야 한다. 죄가 있는 사람은 주님과의 관계가 멀어진다. 죄의 목적은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도둑질한다. 죄의 목적은.. 우리를 구세주이신 예수님으로부터 떼어놓으려는 것이다. 죄로 하여금 이 일에 성공하게 내버려두지 말라!

지금까지 우리는 하나님께서 사랑과 은혜의 하나님이시며, 지구상의 다른 생명체는 누릴 수 없는 특별한 관계를 우리와 맺기 원하신다는 사실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그 관계의 중심에는 십자가와 구원의 계획이 자리 잡고 있었다. 십자가는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해야 하는 모든 이유 가운데 최고의 위치에 있다.

1.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요일 4:10). 이 말씀에서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의 핵심 의미를 파악해 보십시오.

그대가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칭찬(찬양)과 감사의 말이 저절로 나올 것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주님께 마음을 드릴 때, 성령을 선물로 받고 감사의 마음으로 충만하게 된다. 그러한 감사함 때문에 하나님을 찬양하고 송축하는 마음이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많은 성도들이 놓치고 있는 중요한 부분이 있다. 그것은 하나님께 드리는 진정한 찬양은 전인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의 찬양은 영적, 정서적, 정신적 차원뿐 아니라 육체적 차원까지 포함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가 명철하고 균형 잡힌 인물이 되기 위해서는 건강한 생활 습관을 실천해야 한다.
과학자들은 우리의 습관적인 행동이 뇌에 물질적인 변화를 일으킨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예를 들면 마약은 우리 뇌에 견고한 진을 형성하고 강력한 중독현상이 일어나도록 변화를 일으킨다. 게다가 혈관의 변성으로 뇌기능까지 저하된다. 알츠하이머와 같은 질병은 뇌세포가 손상된 결과이다. 이로 보건대 건강한 정신적, 정서적, 영적 관계를 누리는 일은 분명 우리의 육체적 상태에 의존되어 있는 것이다. 매우 드물게 섭취하는 음식과 음료의 영향은 측정치로 나타나지 않지만, 나쁜 습관과 결합하면 문제가 발생한다.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찬양은 온전한 삶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며, 산 제사는 삶의 모든 영역을 다 바치는 것임을 잊지 말자.

교훈: 우리를 구원해 주신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해서 우리는 온전한 삶을 바쳐야 하며, 절대 육체적 건강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부가적용)
우리는 친구를 잃고도 축복을 받을 수 있다. 우리는 가진 재산을 잃고도 여전히 부요할 수 있다. 우리는 건강을 잃고서도 여전히 풍성할 수 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예수님과의 관계를 잃는다면, 만일 우리가 주님과의 교제를 잃는다면, 그 때는 이 세상에서의 모든 친구도/ 모든 소유도/ 모든 육체적 건강도/ 우리에게 한 순간의 기쁨도.. 내게 참된 만족을 갖다 주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뿌리에서부터 말라질 것이다. 우리는 생명샘을 버렸기 때문이다. 그때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 그때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나? 우리의 최고의 목표는 무엇이 되어야 하며, 인생의 가장 첫 번째는 무엇이 되어야 하나? 대답은 간단하다. 우리는 주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되찾아야 한다. 주님을 알고, 주님과 함께 걷는 것이 우리의 최고의 목표, 우리의 첫 번째 소중한 것이 되어야 하며, 우리의 힘과 관심의 초점이 되어야 한다. 복을 갈망하는 것이 인간의 본능이며, 기복적 소원을 갖는 것이 크게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예수님에 대한 갈망’을 빼앗아가 버리고, ‘예수님 자리’에 ‘기복적 갈망’이 대치해서 터를 잡고 앉아버리니까 이런 경우, 기독교 신앙이 뿌리째 흔들거리며, 심한 경우.. 기독교가 아닌 게 된다. 모든 사역과 영적인 활동, 모든 은사와 능력도 우리와 하나님과의 일대일의 관계를 대신하는 것이 될 수 없다. 실제로, 사역/ 헌신 /봉사는 만일 그것이 하나님과의 친밀한 동행에서부터 흘러나오지 않는다면 단순한 행위나, 과시나, 그저 선행일 뿐이다. 그래서 밴스 하브너(Vance Havner)는 ‘선교사의 첫 번째 자격은 우리가 흔히 듣듯이 영혼을 위한 사랑이기에 앞서 주님을 향한 사랑이다.’ 라고 날카롭게 지적했던 것이다. 우리가 행하는 모든 것―기도, 공부, 영혼구원, 제자훈련, 예배, 설교, 교육, 영적 자녀를 돌보는 것, 봉사, 구제 등―은 하나님 사랑으로부터 흘러나와야 한다. 하나님이 모든 것의 원천이 되셔야 한다. 하나님이 모든 것의 동기가 되셔야 한다. 하나님이 모든 것의 기반이 되셔야 한다.

금요일
4월2일

독서 과제 : 부조와 선지자, 637~642

“다윗은 아름다움과 활력이 넘치던 청년 시대에 세상에서 가장 고귀한 자들과 함께 높은 지위를 차지할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하나님의 귀중한 선물인 그의 재능은 그것을 주신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하는 데 사용되었다. 그의 명상과 묵상의 기회는 그를 지혜와 경건으로 부요하게 하여 하나님과 천사들의 사랑을 받게 하였다. 창조주의 완전하심을 그가 명상할 때에 하나님께 대한 더 분명한 개념이 마음에 전개되었다. 모호한 주제들이 명백하여지고 난제들이 풀리고 난처한 일들은 잘 조화되어, 새로운 빛의 모든 광선은 새로운 환희와 보다 아름다운 헌신의 찬송을 불러일으켜서 하나님과 구세주께 영광을 돌리게 하였다. 그를 감동시킨 사랑, 그를 둘러싼 슬픔, 그에게 수반된 승리는 모두 그의 적극적인 생각의 주제였다. 그리고 그가 자기의 생애에 대한 모든 섭리 중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바라볼 때에, 그의 마음은 보다 더 뜨거운 경모와 감사로 고동쳤고 그의 입술에서는 더 아름다운 곡조가 흘러나왔다. 그는 수금을 기쁨으로 뜯었다. 그리하여 양치기 소년은 힘에 힘을 더하고 지식에 지식을 더하게 되었는데 이는 여호와의 성령이 그와 함께 하심이었다.”(부조와 선지자, 642)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1.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다른 사람이나 사물을 사랑하는 것과는 어떻게 다릅니까?


2. 하나님께 찬양하는 것이 왜 그토록 중요합니까? 찬양과 예배가 우리를 어떻게 하나님께 가까이 이르도록 만듭니까?


3. 어떻게 하면 행위로 구원을 얻는다는 잘못된 덫에 걸리지 않으면서 동시에 우리의 행위를 통해 하나님을 찬양하고 우리의 사랑을 나타낼 수 있습니까?


4. 이번 주 교과를 통해 영적으로 새롭게 깨달은 내용이나 한 주일 동안 실천하고 싶은 일은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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