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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과 그리스도인 품성의 진수인 성령의 열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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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paulcho 작성일10-03-21 07:40 조회4,16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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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과 그리스도인 품성의 진수인 성령의 열매
3월 27일 안식일 (일몰: 오후 6시 50분)

도입)
성령의 열매가 하나님의 자녀에게 주어질 때 삶에는 변화가 일어난다. 참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과 좋은 열매를 맺는다 것은 그 됨됨이를 강조한 말이다. 훌륭한 배우가 마하트마 간디 역을 맡아 멋진 연기를 펼칠 수 있겠지만 결코 실제의 마하트마 간디가 될 수는 없다. 우리는 선하게 보일 수 있고 선한 말을 할 수 있으며, 심지어 선한 행동을 나타내 보일 수 있을지 모르지만 성령께서 우리에게 새 마음을 주시지 않으면 우리는 결코 선한 사람이 될 수 없다.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마 7:20)고 구주께서는 말씀하셨다. 모든 참된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열매를 맺는다. 저들의 생애는 성령의 역사를 통하여 선한 일이 이뤄진 것과 성결에 이르는 열매를 맺은 사실을 증거할 것이다. 저들의 생애는 향상될 것이며 순결하게 변화될 것이다. 바른 행실은 참된 경건의 틀림없는 열매이며 이런 열매를 맺지 못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일에 대한 경험이 전혀 없음을 여실히 드러내는 것이다. 구원은 잃어버린 하나님 형상의 재창조이며 창조는 절대성을 가진 말씀의 성취인 것이다. 주님은 말씀을 통하여 그분의 추종자들의 마음에 내재하신다. 그분의 살을 먹고(삶) 피(정신)를 마시는 성육신으로 당신과 연합하게 하신다. 저주받은 무화과는 세상 끝 날의 심판을 가르치며 우리가 누구의 말에 순종하던지 심는 대로 거들 것이다.

기억절: “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이 비밀의 영광이 이방인 가운데 어떻게 풍성한 것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골 1:27)

연구범위: 마 6:33, 요 15:8, 롬 3:20~26, 14:17, 딤전 6:11, 요일 2:15.

안식일 오후
모세가 하나님께 그분의 영광을 보여 달라고 간청했을 때, 여호와께서 그에게 나타내 보이신 것은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출 34:6) 그분의 품성이었다.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고후 3:18)
“그리스도께서 구속하신 타락한 인류는 그분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을 얻게 되고 모든 불의에서 영혼이 정결케 됨을 맛보게 된다. 그런 다음에는 그리스도와 같은 품성이 나타나게 된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바라봄으로써 영광에서 영광으로, 품성에서 품성으로 저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된다. 선한 열매가 맺힌다. 품성은 점점 더 하나님을 닮은 품성으로 계발되며, 고결하고 정직하며 진실하고 자비로운 품성을 나타내게 된다.”(엘렌 G. 화잇, 오늘의 나의 생애, 54)

일요일(3월 21일)
먼저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라(마 16:26)

도입)
우리 신앙인들의 궁극적인 관심은 "하나님 나라, 천국"이다. 그 나라에 각서 누릴 삶이 곧 우리 신앙인들의 궁극적인 목표이다 천국이 없다면 우리가 이렇게 고되게 신앙생활을 할 이유가 없다. 그 나라 때문에 우리가 지금 이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다. 일제시대에 주기철 목사는 온갖 고문을 다하면서도 끝까지 항복하지 않고 죽기를 한하며 고집을 피웠다. 그러자 경찰이 물었다. "왜 그렇게 죽으려고 하느냐" 이 말을 들은 주기철 목사는 짤막하게 대답했다. "나에게는 그 나라가 있기 때문이다" 순간 듣던 모든 사람들이 숙연해 졌다고 한다. 그 나라를 소유하고 있다는 것이 신앙인으로 하여금 이렇게 자신감을 가지고 살아가게 만드는 것이다. 마 6장 33절에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고 하신다.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하면 우리의 염려와 필요성을 주님께서 채워 주시겠다고 약속하신다. 생존의 문제, 미래의 염려, 인생의 고통에서 우리를 자유하게 하시며 행복한 인생을 약속하고 계신 것이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먹고, 입고, 마시는 것에 대한 염려와 근심은 이방인들이 하는 것이니 그리스도인들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에 대한 염려를 버리라고 하시며 생존의 문제에서 자유 하라고 말씀하셨다. 또한 다가올 미래의 고통을 미리 염려하지 말라고 하셨으며 그리고 불필요한 염려를 하지 말라고 하셨다. 성도는 영생을 향해 살아가는 인생이니 썩어지고 사라질 것을 창고에 모으는 어리석은 시도를 버려야한다.

너무나도 자주 우리의 기도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보다는 우리가 ‘가질 수 있는 것’에 치중한다. 우리 자신의 기도를 돌아보고, 다른 사람들의 기도를 들어보라. 물론 그렇게 기도하는 데는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겠지만, 우리의 기도는 어느 쪽으로 치우치는가? 우리가 ‘가질 수 있는 것’에 있는가, 우리가 ‘되어야 하는 것’에 있는가? 예수님의 다음 말씀에 비추어 볼 때 우리는 이러한 경향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

1. 하나님께서 당신의 나라를 '먼저' 구하라고 말씀하신 것은 어떤 의미입니까? 우리는 왜 하나님의 나라를 먼저 구해야 합니까(참조, 마 16:26)
답:

2. 로마서 14:17은 하나님의 나라가 무엇이라고 말해 줍니까?
답:
의와 평강과 희락이 성령의 열매라는 사실을 주목해 보라.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어떤 것을 구하기 전에 성령의 열매를 먼저 구해야 한다. 세상이 제공하는 모든 것을 가질 수 있게 된다 할지라도 의와 평강과 희락을 소유하지 못한다면 그것들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만일 누군가, “이 말씀은 예수께서 우리의 육신적 안녕이나 재정적 안정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는 말입니까?”라고 묻는다면, 육신적 혹은 물질적 필요를 구하기 전에 먼저 성령의 열매를 구하라는 그리스도의 명령에 비추어 어떻게 대답하겠는가?
한 어머니가 걱정스런 모습으로 물었다. “목사님, 우리 아들을 위해 기도해 주세요. 이 아이가 믿음도 없고 직업도 잃고 말았어요. 직장을 다시 얻도록 기도해 주세요.” 이 걱정하는 어머니는 아들을 위해 하나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를 먼저 구했는가? 그리스도인의 우선순위는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되어야 하는 것’임을 생각할 때, 그 어머니는 무엇을 요청했어야 했는가?
교훈: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 곧 의와 평강과 기쁨을 먼저 얻지 못한다면 비록 물질적인 필요가 충족된다 하더라도 무의미하다. 우리는 바른 우선순위를 가져야겠다.

부가적용)
우리 신앙인들은 무엇보다도 천국적 삶의 요소를 중시하면서 살아야 한다. 얼마나 부하게, 잘 먹고 잘 입고 잘 누리며 살아가느냐 하는 문제는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또한 얼마나 건강하게 오래 사느냐 하는 문제 역시 중요하지 않다. 얼마나 큰집에서 살고 잘 꾸며 놓고 살아가느냐 하는 문제도 근본적인 문제는 아니다. 그것들은 모두 부차적인 문제들이다. 인간이 풍족하고 넉넉하며 건강하게 오래 사는 것은 축복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삶의 한 수단이고 약간의 편리함을 주는 요소일 뿐이지 삶의 근본적인 문제는 아닌 것이다. 보다 더 중요하고 근본적인 문제는 사람이 의와 평강과 희락을 소유하고 사는가 하는 것이다. 즉 현재 나의 삶에 하나님의 주권이 행사되고 성령께서 나의 삶을 지배하고 계셔서 나의 삶에 의와 평강과 희락이 있는가가 더 소중한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불의 하면서 세상적으로 성공하고 출세했다고 한다. 그 삶에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사람이 다른 사람들을 속이면서 원수를 맺고 부유하게 살고 있다고 생각해 보라. 그 부는 무슨 행복을 가져다주는가? 마음속에 희락이 없고 매일 불편하게 살면서 겉으로만 크고 화려하게 살면 무슨 소용이 있으며 그 삶이 구체적으로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잠언에 "채소를 먹으면서 화목하게 살아가는 것이 고기를 먹으면서 불화한 것보다 낫다"고 했다. 또한 "큰 집에서 다투며 사는 것보다 움막에서 평화롭게 혼자 사는 것이 낫다"고 했다. 이 말씀은 의와 평강과 희락을 잃은 생활은 지옥이라는 말이기도 하다. 따라서 천국은 의와 평강과 희락이 있는 곳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천국은 하나님이 주권을 행사하는 곳"이기에 천국이다. 그리고, 지옥은 "지옥은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곳"이라는 뜻도 된다. 다시 말하면 천국은 넉넉하고 호화롭고 좋은 환경으로 만들어진 곳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이 행사되는 곳을 말하는 것이다. 우리들은 천국에 대해 많은 오해를 하고 있다. 사람들은 흔히 금과 보석으로 꾸며진 찬란한 곳이라고 알고 있다. 그런 곳은 세상에 얼마든지 있다. 아랍의 부자들이나 왕궁에만 가더라도 사람들을 놀라게 할만큼 호화찬란하게 꾸며 놓았다. 과연 그곳이 천국이겠는가? 천국이 그런 곳이기에 우리들이 이토록 그 나라를 기대하고 숱한 어려움과 고난을 이겨가면서 집착하는 것인가? 아니다! 천국은 "하나님의 주권이 행사되는 곳이기 때문에 천국"인 것이다. 따라서 천국에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 있다고 했다. 이것은 천국의 요소들이다.

월요일(3월 22일)
성령의 다른 열매들(갈 5:22~23)

도입)
사랑의 요소는 사랑의 열매(고전13:4~7)와 성령의 열매(갈5:22~23)에서 보듯 오래 참음, 친절함, 시기하지 않음, 자랑하지 않음, 교만하지 않음, 무례히 행치 않음, 사욕(私慾)을 품지 않음, 화를 내지 않음, 앙심을 품지 않음, 이기적이지 않음, 모든 불의(不義)를 물리침, 항상 기뻐함, 화평을 사랑함, 선행을 좋아함, 거짓과 꾸밈없이 진실함, 모든 사람에게 너그러움 그리고 모든 덕을 위해 절제의 생활을 함 등이다. 성경은, 의롭게 되는 것은 오직 예수님을 믿음으로만 가능하다고 가르치고 있다. 여기서 '의롭게' 된다는 것은 '정의롭게 된다' 또는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 된다'는 뜻이며 바로 이런 사람이 구원을 얻을 수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갈라디아서 5:22~23과 에베소서 5:9에만 그리스도인 품성의 진수인 성령의 열매들이 나오는 것이 아니다. 많은 열매가 디모데전서 6:11과 디모데후서 3:10에도 반복적으로 나타나며, 베드로후서 1:5~7에는 경건, 덕, 지식 등이 추가적으로 제시되어 있다. 또한 고린도전서 13:4~8에 사랑의 많은 특성이 ‘~아니하며’라는 부정적인 용어를 통해 나타나 있다는 사실 또한 흥미롭다. “사랑은 …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이제 성령의 열매를 공식적으로 언급한 곳이 한 곳 뿐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알았을 것이다. 여러 곳에 그리스도인 품성의 다양한 면들과 특질들이 제시되어 있다. 사도들이 각각 성령의 열매를 언급한 것은 특별히 그 당시의 독자들에게 적용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바울이 갈라디아서에 많은 성령의 열매를 기록한 것은 그가 편지하고 있는 회중의 특정한 필요를 알았기 때문이다.
디모데전서 6:11에는 ‘경건’의 열매가 언급되어 있는데, 원어상으로 ‘경건’이라는 단어는 존경, 경의, 하나님께 대한 충성심 등을 의미한다. 로마서 5:4~5에는 ‘소망’이라는 속성이 나온다. 소망이 그리스도인 품성 형성에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지 생각해 보라.
베드로후서 1:5~7에 ‘덕’이라는 열매가 나오는데, 이는 갈라디아서 5:22~23에는 나오지 않는 것이다. 덕은 도덕적인 선량함, 정숙, 순결 등과 연관되어 있다. 왜 이 속성이 그리스도인 삶에 필수적인가? 이 특성은 일곱째 계명과 어떻게 연결되는가?
같은 구절에는 ‘지식’이라는 특성이 추가되어 있다. 지식을 나타내는 단어인 그노시스(gnosis)는 성령 충만한 생애에 맺히는 열매인 총체적인 지식과 깨달음을 가리키는데, 지식은 과연 어떤 역할을 하는가? 이를테면, 지식은 분별의 은사와 어떻게 연결되는가?
베드로는 여기에 열거한 목록을 성령의 열매로 부르지는 않았으나 본질적으로 그것들은 성령의 열매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에게서 나타나야 할 특성이기 때문이다.

교훈: 갈라디아서 5장에 나오는 성령의 열매들 외에 경건, 지식, 덕, 소망 등 여러 속성들이 다른 곳에 나온다. 나에게 절실히 필요한 열매는 무엇인가?

부가적용)
나무의 열매는 그 뿌리가 결정하듯이 우리 믿음의 열매 역시 내 안에 무엇이 있느냐로 결정 된다. 내 안에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님의 은혜 즉 성령이 믿음의 뿌리로 존재한다면 당연히 성령의 열매가 맺어지게 될 것이다(마7:20, 갈5:22~23). 성령의 열매는 본래 사랑이며 그 사랑 안에 기쁨과 화평함과 오래 참음과 친절과 선행과 진실함과 온유 그리고 절제 등을 포함하고 있다. 이 같은 열매들은 종교성과는 전혀 상관없이 일상생활 속에서 드러나야 할 덕목이며 하나님의 형상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영성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덕목이 자신에게는 내적인 심성이요 인격이며 동시에 외적으로는 이웃을 향한 배려이기도 하다. 우리에게 각양 성령의 은사들(고전12:8~11)이 있고 교회 직분도 있으며 신령한 능력도 있고 내 몸과 물질까지도 아낌없이 교회를 위해서 헌신 했을지라도 근본적으로 사랑 없이 행해지어 하나님께 영광이 아닌 사람에게 자랑과 기쁨과 고마움이 된다면 그 모든 행위는 하나님 앞에서 물거품이 되고 말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심판대에 설 때에 안식일 준수와 헌금과 헌신 등 충성도로 심판을 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찾으며 살았는가를 묻게 될 것이다. 그리고 긍휼과 사랑을 나누며 산 자는 영생에 나누지 못한 자는 영벌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화요일(3월 23일)
믿음 안에서 견딤(롬 3:20~26)

도입)
우리가 구원을 얻는 것은 전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으로만 가능하다. 구원은 우리의 종교적인 모든 행위나 윤리적인 선행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만일 예수 외에 이방 종교나 율법의 행위나 선행으로도 구원이 가능하다면, 이는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무가치하고 미련하게 만드는 이단의 사상이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진정한 제자의 모습으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 그것은 가난한 마음에서 가능할 수 있는 사랑의 사람으로 거듭나야 하는 것이다.(요13:34~35) 사랑은 믿음의 전부요 모든 인생의 해답이기 때문이다. 교회 성장의 해답도 여기서 찾아야 할 것이다.(행2:43~47) 만일 거듭나지 못한 채 교회 생활을 계속한다면 결국 우리는 하나님나라를 상실하고 말 것이다(마7:21~27).

어제의 토의에 이어, 오늘은 우리의 열매 맺음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일임을 기억하면서, 과연 우리는 이 열매들을 얼마나 잘 맺고 있는가 하는 주제로 넘어가 보자. 아마도 이 모든 품성의 특성들을 바라보고 자신의 실상과 비교해 볼 때 분명히 낙심하기가 쉬울 것이다. “어쨌든 우리는 더 많은 열매를 맺어야 하는 것 아닌가?”
물론 맞는 말이다. 우리 모두가 진지하게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이다.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라(고후 13:5). 우리는 어떤 삶을 살고 있으며, 세상을 향해 어떤 증거를 하고 있는지 우리 자신을 평가해 볼 필요가 있다.
하지만 이와 동시에 우리는 자칫 위험에 빠질 수 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땅에 살았던 사람들 중에 유일하게 죄가 없으신 예수님을 모본으로 삼고 있다. 우리 자신을 그분과 비교해 볼 때, 얼마나 낙담하기가 쉬운가? 우리의 죄 많고 연약한 속성과 완전히 대조되는 그분의 무죄하고 완전하신 속성을 보며 실망하기가 얼마나 쉬운가? 우리에게는 따라야 할 완전한 표준과, 순종해야 할 완전한 율법과, 닮아가야 할 완전한 구주가 있다. 우리 모두는 종종 표준과 율법과 구주의 모본에 훨씬 못 미치는 자신을 보게 된다. 실패를 거듭하고 원하는 만큼의 영적인 성장을 갖지 못할 때 실망하고, 심지어 포기하고 싶은 지점에까지 이르러서는 ‘고민하면 뭐해? 해 봤자 되지도 않는 걸?’하고 생각해 버리기가 얼마나 쉬운가?
바로 여기에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충분히 이해할 필요성이 대두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의 구원이 어디에 놓여 있는지 깨달을 필요가 있으며, 우리를 위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무엇을 성취하셨는지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1. 로마서 3:20~26을 읽으십시오. 이 구절들은 구원에 관하여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줍니까? 특히 우리가 맺은 보잘것없는 열매를 바라보고 낙심할 때에 이 진리를 굳게 붙잡는 것은 얼마나 중요합니까?
답:

교훈: 때때로 우리는 자신의 믿음이 자라지 않고 풍성한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을 보며 낙심하기 쉽다. 그러나 이럴 때일수록 믿음 안에서 견뎌야 한다.

부가적용)
우리는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되며 또한 사랑(행위)으로 영생에 들어가게 된다.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며 '사랑'은 하나님의 형상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영성이다. 그러므로 우리 믿음의 기준은 언제나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께 두어 항상 기뻐하고 감사하며 그 은혜의 보답으로 이웃을 향한 사랑과 봉사의 삶으로 일관하는 '작은 예수'의 삶을 살아야 한다. 사랑은 구원의 완성이며 영생으로 들어가는 유일한 문이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구원과 영생의 길을 몸소 보여 주셨는데 믿음을 나의 기복과 구원을 얻는데 이기적으로 사용하고 있다면 우리는 그 분의 뜻과 역행하는 길을 가는 것이다. 우리는 믿음으로 구원을 얻으며 사랑으로 영생에 들어간다. 믿음과 사랑(행위)은 처음부터 하나였다. 그런데 우리가 분리시키고 믿음만을 붙들어 왔다. 사랑(행위)이 없는 믿음은 사단을 숭배하는 이방 종교의 실체이다. 사랑이 없으면 믿음도 없는 것이며, 인생 자체도 의미가 없으며 영생도 없다.

수요일(3월 24일)
세상의 도전(요일 2:15)

도입)
그리스도인들의 생활이 죄로 더럽혀지는 것보다 더 심각한 것은 세상에 사로잡히고 세상에 빠져서 하나님을 떠나서 사는 것이다. 주님의 임재가 없고 주님을 체험하지 못하는 그리스도인들 그리스도가 없는 그리스도인들이 가장 큰 문제이다. 교회에서 수많은 설교가들이 죄에 대하여 승리하는 것을 강조하고 있지만 성경에서는 세상에 대한 승리를 한층 더 강조하고 있다(요일 5:14). 지금 우리에게는 세상을 이기는 것이 한층 더 필요한 때이다. 우리가 주님을 체험하고 주님께 헌신하고 우리의 영적인 생명이 자라기 위해서는 우리를 사로잡는 세상을 사랑하지 말고 이 세상을 처리하고자 노력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진정한 행복을 누리지 못하는 것은 아직도 주님보다 세상을 더 사랑하고 있기 때문이다.

1. 오늘의 본문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주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사랑하는 자들을 사랑하지 않으신다는 말입니까? 아니면 세상을 사랑하는 자들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말입니까?
답:
“때때로 많은 사람들이 심령을 성결케 하고 천국에 들어가기를 사모하지만 그들은 세상의 시끄러운 소리를 떠나 장엄하고 위엄 있는 성령의 음성을 들을 시간이 없다. 영원한 사물은 부차적인 것이 되고 세속적인 사물이 으뜸으로 여겨진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의 씨가 열매를 맺을 수 없다. 그 이유는 심령의 활력이 세속의 가시떨기를 자라게 하는 데 사용되기 때문이다.”(실물교훈, 51)
우리는 율법주의의 위험을 인식해야 하는 한편, 고대 이스라엘 백성이 주변 나라들과 타협하려 할 때는 언제나 타락에 빠지고 말았음을 기억해야 한다. 요한일서 2:15은 우리가 세상을 사랑하면 하나님을 온 마음으로 사랑하는 것이 불가능해진다고 경고한다. 한 교회로서 우리가 세상을 향해 선교를 하려 할 때 분명히 조심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세상에 미혹되거나 세상 속으로 휩쓸리지 말고 모든 것을 주님의 이름 안에서 행해야 한다!

2. 우리가 하나님보다 세상을 더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어떤 징후를 포착할 수 있습니까?
답:
하나님보다 세상을 더 사랑하는 것에 대한 위험성을 야고보서 4:4에는 새로운 의미로 강조한다. “간음하는 여자들이여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의 원수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게 하는 것이니라.” 왜 야고보는 교인들이 세상으로 휩쓸려 가는 것을 간음에 비유했는가? 요한도 이 문제에 있어서는 재론의 여지를 남기지 않았다(요일 2:15). 하나님을 사랑하든지 세상을 사랑하든지 하나를 택해야 한다.

교훈: 우리는 하나님과 세상을 동시에 사랑할 수 없다. 성경은 우리가 세상과 벗삼으려 할 때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고 경고한다. 선택은 우리의 몫이다.

부가적용)
일반적인 사람들에게 하나님에 대한 개념이 결여되고 있고 단지 도덕적인 개념만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죄를 짓고 윤리 도덕을 거스리는 더러움은 쉽게 인식하는데 하나님을 대적한 세상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할 뿐 아니라 자신이 세상에 탈취당하는 것도 전혀 의식하지 못하고 살아간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술 먹고 방탕하고 음란하고 욕심이 가득찬 사람이라면 부도덕하게 생각되고 많은 사람에게 정죄를 받는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매일 시와 독서에 심취되고 문학에 몰두하여 하나님에게는 전혀 관심도 없고 예수도 안 믿는 사람이라면 적어도 나쁜 사람이라고 욕은 먹지 않을 것이고 오히려 멋진 사람으로 칭찬을 받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사람은 자신에 세상에 탈취 당했다고 생각하지도 않을 것이다. 사탄이 세상으로 사람을 탈취한 것을 모르는 것이다. 성경은 죄보다 우리가 세상을 사랑하는 것을 훨씬 더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다. 어떤 사람이 죄를 범하였어도 반드시 세상에 포로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세상에 점령당한 사람은 세상에 빠진 사람은 틀림없이 죄에 오염되어 있다.

목요일(3월 25일)
성령의 열매를 자라게 하는 비결(요 15:8)

도입)
우리 속담에 “빈집에 도둑 든다”는 말이 있다. 어떤 사람은 그렇게 신앙생활을 열심히 한다고 했는데 시험에 빠질까? 마음속에 성령을 통해 오는 기쁨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주신 기쁨을 세상에다 내 버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마음이 공허하고 메말라 버렸다. 문제는 그 마음이 공허하고 메말라 버리면 다른 것이 채워지게 된다. 사랑이 없으면 미움이 채워지고 은혜가 떨어지면 시험이 오듯이 기쁨의 근원인 성령의 마음이 사라지면 그 안에 마귀가 들어와 차지하게 된다. 그러므로 기쁨을 잃어버린 사람의 표정이 굳어지고 일그러지고 어둠이 끼어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우리는 비록 씨앗이 자라게 할 수는 없지만, 그것이 열매를 맺기까지 자라도록 도울 수는 있다. 그것은 바로 성령 충만한 삶을 살 때 가능해진다. 신자의 마음에 역사하시는 성령의 사역은 그 자체가 위대한 생명의 신비이다. 그러나 성경은 어떻게 그 자라남을 도울 수 있는지 분명히 지시하고 있다. 이같이 하여 우리는 많은 열매를 맺음으로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요 15:8)는 예수님의 소망을 이루어드릴 수 있게 된다.

성령의 열매가 자라도록 장려하는 몇 가지 방법을 주목해 보자.
1.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함으로. 성경의 유익성에 대해 디모데후서 3:16은 무엇이라고 선언하는가? 성경 연구는 우리 삶에 어떤 결과를 가져다주는가?(참조, 딤후 3:17, 시 119:105)
2. 기도를 통하여. “기도는 영혼의 호흡이며 영적 힘을 얻는 비결이다. 이 외에 어떠한 은사라도 기도를 대신하지 못하며 영혼의 건강을 유지하게 하지 못한다. 기도는 사람의 마음을 생명의 샘이신 그리스도와 접촉하게 하며 영적 경험을 더욱 굳건하게 만든다. 기도를 게을리 하거나 또 형편에 따라 기도를 가끔 중단하였다 계속하였다 하면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잃게 된다. 그리고 영적 기능이 마비되며, 영적 경험은 원기를 잃고 허약해진다.”(복음 교역자, 254)
3. 바른 생각을 함으로써. “종말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할 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할 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빌 4:8). 어떻게 하면 우리의 마음속에 고상한 생각을 간직하게 할 수 있는가?
4. 그리스도인의 증거를 통하여. 귀신들렸다 고침 받은 사람이 예수님께 함께 가기를 청하였을 때, 그분께서는 그 요청을 거절하시면서 그가 살던 고향으로 돌아가 주께서 그에게 행하신 일을 전하라고 말씀하셨다(막 5:18~20). 믿음을 나누는 일은 우리 삶 속에 성령의 열매를 자라게 하는 데 어떤 역할을 하는가?

교훈: 우리의 삶에 성령의 열매를 맺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지만, 우리는 말씀 연구와 기도, 바른 생각과 전도를 통해 그 열매가 자라도록 도울 수 있다.

부가적용)
우리가 원한다고 좋은 열매가 풍성하게 열리는 것은 아니다. 좋은 열매 열리는 원리가 있다. 그 원리를 알아야 한다. 그리고 그 원리를 따라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철저히 해야 하는 것이다. 마치 농부가 열심히 농사를 짓는데 그냥 되는대로 짓는 것이 아니라 농작의 원리를 따른 따르는 것과 같다. 성령의 열매를 맺는 비결이 있다. 그것은 그렇게 행동하려고 노력해서 되는 것이 아니다. 가지의 생명은 나무에 달려 있다. 가지는 결코 독립하여 존재할 수 없고 원 나무에 붙어있어 계속해서 영양분을 공급받아야 열매를 맺을 수 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말씀과 기도를 통해 예수님과의 밀접한 관계를 통해 삶의 자양분을 얻어야 한다. 그분으로부터 오는 능력을 덧입어야 한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요 15:7) 이 말씀에서 볼 때 말씀과 기도가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보게 된다. 말씀을 떠나서 기도하면 자기중심적이고 욕심을 채우는 기도나 카타르시스적인 기도를 하기 쉽다. 우리의 기도가 응답을 받으려면 말씀 안에 거하며 자기를 부인하고 예수님의 소원을 영접해야 한다. 우리가 말씀 안에 거하고 기도할 때 주님께서 이를 기뻐 받으시고 친히 능력으로 역사해 주신다. 이와 같은 삶은 그리스도를 힘 있게 증거 하는 삶으로 나타나게 될 것이며 바른 정신을 가지고 살도록 이끌게 될 것이다.

금요일(3월 26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하나님께서는 우리 마음을 웅대한 사상과 순결한 생각으로 가득 채우라고 명하신다. 그분께서는 우리가 그분의 사랑과 자비를 묵상하고, 구원의 대 경륜에 나타난 그분의 기이한 역사를 연구하기를 바라신다. 그렇게 할 때에 우리는 진리를 더욱 명확하게 파악할 수 있게 될 것이며, 마음의 순결과 사상의 명료함을 바라는 우리의 욕구는 더욱 고상하고 거룩하게 될 것이다. 거룩하고 순결한 분위기에 젖어 있는 심령은 성경 연구와 하나님과의 교통을 통해 변화될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들은 순종의 열매를 맺게 될 것이다. 마음속에 받아들인 하나님의 말씀은 그들의 선행(善行) 속에 나타날 것이다. 그 결과로 그리스도와 같은 품성과 생애가 그들의 품성과 생애에 나타나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당신 자신에 대하여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의 뜻 행하기를 즐기오니 주의 법이 나의 심중에 있나이다”(시 40:8). “나의 원대로 하려 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이의 원대로 하려”한다(요 5:30)고 말씀하셨다. 또 성경은 “저 안에 거한다 하는 자는 그의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할지니라.”(요일 2:6)고 말한다.”(실물교훈, 60)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1. 우리의 사명은 세 천사의 기별을 세상에 전하는 것인데, 종종 우리의 기별과 우리가 처한 문화적 상황 사이에서 접촉점을 찾기가 어려울 때가 있습니다. 그러한 노력에는 어떤 위험성이 내재되어 있습니까? 역사적으로 볼 때, 교회가 세상을 변화시키기보다는 교회가 세상을 따라 변질된 사례가 많았습니다. 우리 재림교회는 어떻습니까? 우리에게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스스로 위로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미 그런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 징후가 보이지는 않습니까? 만일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2. 우리의 품성계발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3. 이번 한 기의 교과를 간단히 요약해 보십시오. 내 삶에 맺히기를 원하는 성령의 열매는 무엇이며, 그것을 방해하는 요소는 무엇입니까? 이번 한 기 동안 내 삶에 일어난 큰 변화는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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