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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7 과 응분의 벌 (하나님 품성 중심의 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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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박용범 작성일16-11-07 12:51 조회2,30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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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7 과 응분의 벌

 

 

기억절 : “네가 하나님의 오묘함을 어찌 능히 측량하며 전능자를 어찌 능히 완전히 알겠느냐”(욥 11:7)

 

 

첫째 날(일) 계속되는 책망

 

*도입질문: 빌닷이 엘리바스보다도 더 심한 책망을 욥에게 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교과를 통해 답을 생각해보기

 

빌닷이 욥을 책망했던 이유는 빌닷이 하나님의 품성을 오해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빌닷이 알고 있었던 하나님의 품성은 조건적 사랑을 하는 품성이었습니다.

빌닷은 욥에게 있었던 시련과 고통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고, 하나님께서 시련과 고통을 주신 이유는 욥이나 아들들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조건에 맞지 않은 삶을 살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욥8:4)

 

그러므로 빌닷은 욥에게 자신이 알고 있는 확신에 따라 욥 자신의 행위에 하나님께 무슨 잘 못을 행했는지를 살펴보기를 원했고, 그것을 해결해야만 하나님께서 욥에게 주신 시련과 고통을 거두시고 복을 주실 것이라고 생각하고 욥에게 강력하게 말한 것입니다.(욥8:5-7)

 

욥과 그 가족에게 행한 자는 사단임에도 불구하고 빌닷이나 엘리바스는 이 모든 것을 행한 분이 하나님이라고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알고 또한 믿고 있었던 하나님은 조건적 사랑을 하시는 분으로 오해하고 있었으므로, 욥과 자녀들의 행위로 인해 하나님께서 벌을 주신 것이므로 무엇을 잘 못하였는지를 찾아서 회개하고 돌이킨다면 벌이 그치고 복이 오리라 믿었기에 친구로서 욥에게 강력하게 호소한 것입니다.

 

빌닷이나 엘리바스는 친구인 욥을 진정으로 위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아무리 자신의 양심과 신앙에 진정성을 갖고 행하는 말이나 호소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품성에 대한 오해로 인해 만들어진 양심과 신앙은 그 출발부터 잘 못된 것입니다. 오히려 출발부터 잘못된 상태에서는 양심적일수록, 자신의 신앙의 진정성에 대한 확신일 클수록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과는 더 멀리 나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 서기관들의 양심과 신앙의 진정성은 의심할 바 없는 순수하고 확고한 것이었지만, 그들이 하나님의 품성을 오해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순수성과 확고함의 크기만큼 예수님을 배척하였던 사실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속도나 진정성이나 양심보다 더 중요한 것은 어떤 하나님을 알고 믿고 있느냐 입니다.(고후11:4) 다른 품성의 하나님을 알고 있다면 아무리 종교적이고 양심적이고 순수하고 신앙적이라 할지라도 생명과는 단절되어진 상태 속에서 행하는 일이므로 하나님 보시기에는 죄(사망)입니다.(롬14:23)

 

 

둘째 날(월) 그대의 죄과 보다 덜한

 

*도입질문: 소발이 갖고 있었던 하나님 관은 무엇이었고 무엇을 바르게, 무엇을 그리게 이해하고 있었을까요?

 

**교과를 통해 답을 생각해보기

 

욥기 11장에는 소발의 주장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소발의 주장을 살펴보면 그가 어떤 하나님을 믿고 있었는지를 추정할 수 있습니다. 소발은 하나님의 창조주 되심을 믿고 있었습니다.(욥11:7-9) 그런데 하나님을 창조주로 믿고 있었으나 창조주의 품성에 대하여서는 오해하고 있었습니다.(욥11:10-11 하나님을 엄격하고 무서운 재판관으로 알고 있었고, 하나님은 사람들의 행위를 안 보는 듯 하지만 다 보시고는 하나님이 가지신 조건에 따라 사람들을 잡아 가두고 재판을 한다고 오해하였습니다.)

 

소발이 가진 생각 역시 하나님의 품성을 조건적 사랑을 하시는 분으로 오해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품성을 오해하고 있는 상황 속에서 욥이 고난과 고통을 당하는 것의 원인은 욥이 무언가 하나님께 잘 못한 것이 있기 때문이고, 그 벌을 그치게 하고 복을 받기 위해서는 무엇을 잘못했는지를 찾아내서 해결을 해야 한다고 주장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은 창조하실 수 있는 전능함 때문에 사람들을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의 품성이 사랑이기 때문에 그 사랑을 나눌 대상을 위해 창조하신 것입니다. 사랑을 나눌 대상을 창조하신 것이기 때문에 사람은 창조주의 사랑의 대상이며, 창조주의 능동적 행위로 창조되었으므로 조건 없는 사랑, 조건 없는 생명을 주셔야만 창조된 존재들이 그 존재를 이어갑니다.

 

사랑이 생명이고, 사랑을 강제하는 순간 사랑이 깨어짐으로 선택의 자유를 주셔야 하고, 선택의 자유를 주셨다는 것은 어떤 선택을 하든지 그 선택의 최종적 책임은 하나님께서 대신 지시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입니다.(롬5:8)

 

 

셋째 날(화) 하나님의 보응

 

*도입질문: 하나님께서 직접 심판을 집행하시고 벌을 내리시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인가요?

 

**교과를 통해 답을 생각해보기

 

하나님께서 심판하신다는 말의 의미는 선언하신다는 의미입니다. 사람들이 어떤 결정을 내렸는지를 확인하시고 그 결정이 더 이상 시간이 주어진다 할지라도, 즉 성령께서 역사하신다 할지라도 더 이상의 변경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확정되었을 때의 시점이 심판의 시점이고 선언하시는 시점입니다.(계14:7)

 

사람들이 성령의 은혜로 인해 하나님을 자신의 창조주와 구주로 선택하고 확정하고 고정하면 하나님의 자녀로 선언하시고,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거절하고 하나님을 자신의 창조주와 구원자로 받아들이기를 거절하고 확정하고 고정되면 강제하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품성에 따라 그들이 선택대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졌다고 선언하십니다.

 

하나님과 연결되는 선택을 한 하나님의 자녀들은 그들의 선택대로 그 즉시 하나님과 생명이 연결되고(요5:24), 죽어도 예수님 재림 때에 생명의 부활이 됨으로 산 자라고 선언됩니다.(마22:32)

반면에, 하나님과의 분리를 선택한 사람들은 스스로가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사망에 이르게 됩니다.(시34:21)- 이 일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를 길로 인도할 때에 네가 나를 떠남으로 이를 자취함”(렘2:17)으로 인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생명의 길로 오도록 성령을 통해 호소하지만 끝끝내 하나님을 떠나 스스로 사망의 길로 자취할 때 하나님은 강제하실 수 없는 사랑의 특성대로 그 선택을 인정하실 수밖에 없게 되고, 자신의 유익대로가 아닌 사람의 선택대로 인정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입니다.

 

이런 논리로 창6장의 노아와 홍수 이야기를 생각해보면, 당시에 사람들은 이미 스스로 하나님을 완전히 떠났습니다.(창6:5) 성령께서도 완전히 거절을 당하셨습니다.(창6:3) 그들의 선택이 성령께서 아무리 호소하셔도 더 이상의 돌이킴이 없는 시점이 되었을 때 하나님의 사랑은 더 이상 강제하실 수가 없게 되어 그들의 선택대로 인정하셔야만 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공의입니다.- 공의를 선언할 때 하나님은 너무나 고통스러우셨지만,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는 사랑의 특성대로 고통을 참으시면서 사람들의 선택을 인정하실 수밖에 없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상황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완전히 거절하는 것이고, 스스로의 생명이 없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생명력으로만 사는 존재들이 하나님을 거절하는 것이므로 그것은 반드시 사망에 이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사망을 벌로 주시기 때문이 아니라 생명을 떠난 것의 결과가 사망인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노아 당시의 사람들이 하나님을 떠난 결과로 인해 사망이 왔음에도 불구하고 또한 사람들이 하나님을 창조주로 인정하지 않음으로 창조주로서 행하신 물을 가르시고 공간을 유지하고 계신 일을 그들의 선택대로 인정하셔서 위의 물과 아래의 물을 잡고 계셨던 손을 놓으셔야만 하셨습니다. 그래서 창조 전의 지구의 모습처럼 물이 합쳐진 것이 홍수였습니다. 당시의 홍수는 하늘에서만 내린 것이 아니라 땅 밑에서 큰 깊음의 샘들이 터져서 형성된 것입니다.(창7:11)

 

하나님의 변함없는 사랑은 사람들의 선택의 결과로 인한 것들도 그들의 선택의 결과대로 행한다 라고 말씀하지 아니하시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다 죽인다라고 말씀하셔서 사람들이 선택한 모든 것들도 사람들을 창조하신 하나님 자신이 모든 것들을 책임지는 표현법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넷째 날(수) 하나님이 새 일을 행하신다면

 

*도입질문: 하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절하고 순종치 않으면 벌을 주시고 치실까요?

 

**교과를 통해 답을 생각해보기

 

너희가 만일 여호와의 목소리를 듣지 아니하고 여호와의 명령을 거역하면 여호와의 손이 너희의 조상들을 치신 것같이 너희를 치실 것이라”(삼상 12:15) 이 말씀을 글자대로 받아들이면 성경 전체의 사상과 충돌을 일으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선택의 자유를 주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목소리를 듣지 아니하고 명령을 거역하는 선택을 한다 할지라도 벌을 주시지 않습니다.(요12:47) 만약 벌을 주신다면 그것은 선택의 자유를 주지 않은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삼상12:15의 말씀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선택하지 않고 자신의 본성에 따라 선택하게 되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고 그 결과는 고통이고 악입니다.(렘2:13, 17, 18)

 

사람들이 하나님을 떠난 선택의 결과가 악이고 고통이지만 하나님은 그것을 사람의 선택의 결과로 이야기 하지 아니하시고 하나님께서 직접 그들을 치시는 것으로 말씀하심으로 사람들의 선택의 결과를 하나님 자신의 책임으로 돌리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논리적으로는 맞지 않지만, 사랑 안에서만 쓸 수 있는 말씀입니다. 사람들도 자녀의 잘못에 대하여 자녀의 부모가 자신이 한 것처럼 이야기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길을 떠나 자신의 본성의 길을 고집하여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게 되면 그 결과가 사망이므로 하나님은 더 큰 은혜와 사랑을 주시기 위하여(롬5:20) 그를 찾아가십니다.(요12:47)

 

사랑을 받아들이고 생명 속에 있기를 강력하게 호소하십니다. 그러나 사람이 끝까지 자신의 생각을 고집하여 하나님의 호소를 거절하게 되고, 하나님의 입장에서도 더 이상의 시간을 준다 할지라도 사람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못한다는 것을 아실 때 그 사람의 선택대로 인정하실 수밖에 없게 됩니다. 이 시점이 심판의 시점입니다. 이 시점에 사람의 선택대로 인정하시게 되면 사람은 생명과 분리되어 죽게 됩니다. 생명과 분리되어 죽게 되는 시점에서도 하나님의 그에 대한 사랑은 변함이 없어서 그 죽음의 순간에도 그가 생명에 대한 생각으로 돌이키기를 간절히 원하셔서 최선을 다하십니다.

 

사람은 본래 아담이 하나님을 떠날 그 때 모든 사람이 함께 다 죽었습니다.(고전15:22) 그러나 예수님의 대속을 담보로 모든 사람들이 유예의 삶을 삽니다. 유예된 시간동안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여 하나님과의 관계가 생명으로 회복되게 하기 위해 하나님은 최고의 일들을 행하십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사망이지만 아직 하나님과의 관계를 완전히 끊어버린 것이 아니기 때문에 망(亡)의 상태는 아닙니다.

망(亡)이란 단어는 도망하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즉 하나님과의 관계를 끊어버리고 도망갈 때 생명으로부터 떠나가는 것이므로 그 때를 망 즉 멸망(창조 전의 무가 되는 것)이라고 합니다.

 

모든 사람들이 사망 속에서 살고 있지만 대속의 은혜로 인해 멸망의 상태는 아닌 채로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이 선택대로 하나님을 거절함으로 정말 사(死)로 가려고 할 때 하나님이 허락하시면서 한 가지 기대하시는 것은 사(死)로 향하여 가는 그 사람이 사와 반대되는 생명에 대한 간절한 소망을 가져 생명이신 하나님을 받아들일 수 있는 최후의 순간으로 삼으시는 것입니다. 선택한대로 사(死)로 접어들지만, 생명에 대한 간절한 소망을 주셔서 생명을 선택하도록 호소하십니다. 이 마지막 호소에 사람이 생명을 선택하면 생명이 연결되지만, 여전히 사망을 선택하게 되면 하나님의 생명으로부터 도망하는 선택이므로 영원한 멸망이 되어버립니다.

 

 

다섯째 날(목) 둘째 사망

 

*도입질문: 둘째 사망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교과를 통해 답을 생각해보기

 

둘째 사망은 하나님의 최후의 호소도 다 거절하여 망(亡)의 상태가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생명에서 도망가서 영원한 사망 즉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창3:19) 최후의 순간까지 생명을 선택하도록 호소하셨지만 끝까지 사망을 선택함으로 인한 결과입니다.

 

이때에도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하나님의 공의가 나타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거절하여 영원히 없어지는 사람들을 여전히 사랑하셔서 구원하고 싶어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강제하지 아니하고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 함으로 구원하고자 하는 간절한 하나님의 소망을 포기하시고, 사랑하는 자를 잃은 슬픔을 오래 참고 감당하심으로 그 사람의 선택을 인정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공의는 하나님의 품성대로 행할 때 일어납니다. 둘째 사망에서도 하나님의 사랑은 드러나고,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둘째 사망이 행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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