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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과 성령의 열매인 의(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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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paulcho 작성일10-03-06 00:09 조회3,54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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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과 성령의 열매인 의(義)
3월 13일 안식일 (일몰: 오후 6시 37분)

도입)
수 년 동안 조련사에게 훈련을 받고 조련사와 동거동락 했던 곰이 어느 날 조련사를 물어 죽이는 사건이 있었다. 곰은 그 일로 사살되었다. 왜 곰이 가족과 같이 자신을 돌보아 주고 길러 주었던 조련사를 죽였을까? 조련사가 자신에게 고되게 하고 환경을 불편하게 해서일까? 아니다. 곰에게는 맹수의 본성이 있기 때문이다. 곰의 생명 안에는 맹수의 본성과 기질이 있었기 때문에 그 생명의 본성이 곰을 그렇게 하도록 한 것이다. 사실 곰은 잘못한 것이 전혀 없다.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의 생명이 없는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고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수 없는 것이다. 교회를 열심히 오래 다닌다고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는 것이 아니다. 성경공부 많이 하고 교회 일 열심히 한다고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게 되는 것이 아니다. 오직 하나님의 생명만이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는 것이다.

기억절: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마 5:6)

연구범위: 마 23:25~28, 롬 3:28, 8:4, 10:3, 갈 3:6, 요일 2:3~6, 5:1~3.

안식일 오후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갈 5:22~23)에 대한 공부를 지난주까지 마쳤다. 앞으로 두 주 동안 우리는 두 가지 열매를 더 공부할 것이다.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엡 5:9). 이 성경절에서 바울은 착함 또는 양선에 대해 다시 반복한 다음 ‘의’와 ‘진리’를 추가하였다. 이번 주에 우리는 의(義)가 무엇인지에 대해 살펴볼 것이다.
우리는 의를 두 가지로 이해한다. 첫째는 그리스도의 입혀주시는 의인데, 이는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행하신 것으로써 우리를 덮어주시는 의이며, 하늘가는 자격을 부여하는 것이다. 둘째는 그리스도의 나눠주시는 의인데, 이는 그분께서 성령을 통해 우리 속에서 행하시는 활동으로서 우리를 그분의 형상으로 꼴 지으시는 과정이다. 우리로 하여금 구원의 소망을 가질 수 있게 하는 유일한 의는 무엇인가? 그것은 오직 그리스도의 의(義)뿐이며, 서로 분리할 수 없는 두 가지 의가 있는 것으로 이해된다.

일요일(3월 7일)
의의 필요성(마 6:33)

도입)
사람들이 자신들의 타락한 본성과 죄에 대해서 절망하기 전까지는 결코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찾지 않을 것이다. 성도는 반드시 죄를 이기고 성결한 승리의 삶을 살아야 한다. 그러나 동시에, 나는 어쩔 수 없이 죄를 이길 수 없으며, 그래서 오직 주님의 십자가의 사죄의 은총만을 간절히 붙드는 '겸손함'이 있어야 한다. 다윗은 시편 63:5절에 그의 고백 속에 이렇게 고백하고 있다. “죄악이 나를 이기었사오니... 우리의 죄과를 주께서 사하시리이다!(시편 63:5)” 사람에게 그리스도가 필요할 때는 도저히 자기 죄악을 그 스스로가 이길 수 없다는 '죄에 대한 절망감'을 가질 때이다. 그럴 때 그리스도의 필요를 느끼게 될 것이다. 그래서 간절히, 겸손히 하나님께 용서를 부탁해야 한다. 최선을 다해 회개하고 성결한 삶을 살되, 자기가 스스로 꽤 도덕적인 사람이라는 교만을 버리고, '나는 어쩔 수 없는 죄인이오니, 받아주소서!' 하는 이런 겸손한 자세가 신자에겐 꼭 필요하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용서해 주실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롬 3:28). “여호와는 의로우사 의로운 일을 좋아하시나니 정직한 자는 그 얼굴을 뵈오리로다”(시 11:7). “악인의 길은 여호와께서 미워하셔도 의를 따라가는 자는 그가 사랑하시느니라”(잠 15:9).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벧전 2:24).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롬 8:4).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 “너희가 그의 의로우신 줄을 알면 의를 행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줄을 알리라.”(요일 2:29)

1. 위의 인용 구절들에 근거해 볼 때, 만일 우리가 율법에 의해 의롭게 될 수 없다면 어떻게 의롭게 될 수 있습니까?
답:

2. 하나님은 죄를 미워하시되 죄인은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알지만 우리는 어떤 잘못된 결론에 이르는 것을 피해야 합니까?
답:

3.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한다는 말씀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우리는 율법의 요구를 이룰 수 있을 만큼 율법을 지킬 수 있습니까? 아니면 바울이 다른 어떤 것을 말하고 있다면 그 의미는 무엇입니까?
답:

4.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를 먼저 구할 때 우리 삶에 어떤 변화가 일어나게 됩니까?
답:

교훈: 우리에게는 의가 없으므로 그리스도의 의를 받아야만 한다. 그분께서는 간절한 마음으로 의를 구하는 자들에게 그것을 나누어 주기를 기뻐하신다.

부가적용)
“은사는 많은 범죄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에 이름이니라.”(롬5:16~17) 인간은 인류 전체로나 개인적으로나 ‘많은 죄를 범한 후에라야’ 예수님의 십자가 구원이 그 온전한 효력을 갖게 된다는 말이다. 하나님은 자기 죄가 누더기처럼 온 몸에 잔뜩 붙어 있어서 자기 힘으로는 도저히 떼어내려 해도 떼어 버릴 수 없을 만큼 많다고 고백하는 자를 구원해주신다. 우리는 마치 자기가 다 회개하고, 스스로 다 완전히 고침 받을 수 있을 것 같은 ‘영적 교만’에 빠져서는 안 된다. 자기 힘으로는 도저히 안 된다는 겸손한 깊은 좌절의 고백이 있어야 한다. 그런 사람이 깊은 사죄의 은혜를 체험한다. 이 말은, 그가 남들 보다 특별히 더 많은 죄를 지었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사람은 모두 다 대동소이한 똑같은 죄인이다. 그러나 그는 ‘자기 죄에 대해 남들보다 특별히 더 좌절하고 괴로워서 몸부림치는' 신자이다. 이런 사람이야말로, 다윗처럼, 깊은 사죄의 은총을 체험한다. 예수님의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는 말씀도, 본인이 ‘자기 죄를 무거운 짐이라고 처절하게 깨닫는 자’를 오라고 한 것이다. 다시 말해 죄를 내가 도무지 이길 수 없고 죄에 완전히 졌다는 처절한 실토이다. 그러므로 그 죄를 이길 수 있고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예수님의 십자가뿐이라는 확신이다. 내 잘난 의지와 도덕성이 아닌 것이다.

월요일(3월 8일)
스스로 만들어낸 의(롬 10:3)

도입)
인간이 어느 정도로 자기 행함에서 선이 나올 수 없는지를 유대인이나 이방이나 다 죄 아래 태어났다고 말한다. 로마서 3:9-18절을 보자. “그러면 어떠하뇨 우리는 나으뇨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 기록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저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베풀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 발은 피 흘리는데 빠른지라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저희 눈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함과 같으니라” 이 말씀을 인정하는가? 이런 상태가 바로 죄와 사망이 왕 노릇하는 세계에서 태어났다는 것이다. 이런 세계에서 인간스스로 탈출이 불가능하다. 인간 스스로 어떤 의도 만들어 낼 수가 없다. 스스로 만들어 낸 의, 율법을 지켜서 만들어 내었다는 그 의가 율법 외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를 배척하였다는 것이 성경이 증거 하고 있는 인간의 죄의 실상인 것이다.

1. 오늘의 본문에서 바울은 무엇을 말하고 있다고 생각합니까? 그는 누구에 관해 말하고 있습니까? '자기의 의'를 세우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은 어떤 시도를 하였습니까? 인간의 죄된 본성에 비추어 볼 때 그것은 왜 불가능한 일입니까?
답:
‘손수 하는’(do-it-yourself) 활동은 개인이 (목수 일이나 자기 집 수리 등) 전문적인 훈련이나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지 않고 스스로 하는 것을 말한다. 그것은 넓은 의미에서 개인이 손수 하는 일이나 자신이 주도하여 하는 일을 가리킨다. 우리는 때때로 특히 성공적인 사람을 가리켜 ‘자수성가’한 사람이라 부른다. 그러나 성경에 따르면, ‘자기 스스로’ 참된 의에 이르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리가 아무리 힘쓰고 애써도 하나님 앞에 스스로 의롭게 될 수는 없다.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사 64:6)과 같다. 사실상 스스로 의에 이르려고 하는 노력은 종종 정반대의 결과를 낳는다.

2. 마태복음 5:20과 23:25~28을 읽으십시오. 예수께서는 스스로 의롭게 되려는 자들의 어떤 문제점을 지적해 내셨습니까?
답:
그리스도인들이 이해해야 할 중요한 사실은 그들이 의를 얻기 위해 전적으로 그리스도께 의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들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되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위해 행하신 일 때문이지 그들 자신이 행한 일 때문이 아니다. 누구든지 이 진리에서 시선을 놓치는 순간 교만과 함께 내면의 부패가 수반되는 자기 의에 빠지기가 너무나도 쉽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를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경우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그들은 자신들의 외적인 경건의 행위에 치중한 나머지 진정한 문제에 대해서는 시선을 놓치고 말았다.

교훈: 우리의 의는 “더러운 옷”과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스스로 의를 이루려는 노력을 포기하고 참된 의를 얻기 위해 전적으로 그리스도께 의지해야 한다.

부가적용)
인간 스스로가 그 자신을 통제를 해서 그 스스로의 기준으로 삼는 義(의)에 도달하려는 것은 하나님의 요구를 충족하지 못한다. 오로지 하나님의 義(의)는 하나님만이 만족하게 할 수 있다는 원리가 바로 기독교의 義(의)의 원리이다. 때문에 예수의 피로 용서를 받아야 하고, 그것은 하나님이 요구하는 義(의)의 기준이기 때문이고, 그 다음에는 하나님과의 연합으로 인해 기름부음의 지배를 받는 것이어야 한다. 그것이 하나님이 요구하는 義(의)의 기준이다. 인간이 스스로 만들어 낸 의는 자기만족은 가능하나 하나님의 기준에 차지 못하게 된다. 이는 하나님의 통제로 나온 의가 아니기 때문이다. 영혼의 배고픔은 의에 주리고 목말라 하는 것인데, 여기서 의라는 것은 곧 예수와의 한 몸 곧 아가페 사랑과 한 몸이 되는 것을 말한다.

화요일(3월 9일)
그리스도, 우리의 의(롬 5:17)

도입)
고린도후서 5:21에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하셨다. 이 말씀은 그리스어 원문에 보면, 15 단어 밖에 안 된다. 하지만, 이 15 단어는 대속의 교리(the doctrine of substitution)를 성경의 어느 말씀보다도 잘 표현하고 있다. 이 “대속의 교리”는 복음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죄를 알지도 못하는 자(He who knew no sin)”는 누구를 말하는가? 죄를 알지도 못하고 살았던 사람은 오직 한 사람 밖에 없다. 곧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하나님은 죄를 알지도 못한 예수님을 우리를 위해 죄가 되게 하셨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예수님으로 하여금 죄가 되게 하셨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어떤 사람은 예수님은 정말 십자가 위에서 죄인이 되셨기 때문에 십자가 위에서 형벌을 받았다고 가르친다. 또 어떤 사람은 예수님은 죄가 되셨기 때문에 3일 동안 지옥에 가셔야만 했으며, 그의 죄값을 모두 치른 후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을 받았다고 한다. 이 모든 가르침은 올바르지 않다.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은 흠 없는 양으로서 온전한 희생 제물이 되셔야만 했다.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은 여전히 흠이 없으셨다. 예수님은 인간으로 태어나시기 전부터 영원 안에서 거룩하신 분이었다. 그리고 예수님은 거룩한 삶을 사셨다. 지금도 예수님은 영원 안에서 거룩하신 분으로 존재하신다. 온전한 하나님이시요, 동시에 온전한 인간으로 존재하기 위하여, 예수님은 거룩한 분으로, 더렵혀지지 않도록, 죄인들과 구별되게 존재하셔야만 한다.

1. 로마서 5:17~19을 읽고 여기서 바울이 한 말을 자신의 말로 요약해 보십시오. 우리는 어떻게 정죄를 받으며, 또 어떻게 의롭게 됩니까?
답:

2. 만일 예수님의 의가 ‘선물’이라면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받을 수 있습니까?(갈 3:6, 약 2:23)
답:
로마서 5:19에는 순종과 불순종에 대한 강조가 나온다. 한 사람 즉 아담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모든 인류가 죄인이 되었다. 이것은 성경의 기본적인 가르침이다. 아담의 죄는 인류의 타락을 가져왔다. 우리 각자는 매일의 삶을 통해 그 죄의 결과를 겪으며 살아간다. 아무도 예외가 없다.
그러나 같은 절에는 순종에 관하여도 언급되어 있다. 누구의 순종인가? 물론 유일하게 구원에 필요한 의를 가지신 그리스도의 순종이다. 그분의 순종은 “은혜의 풍성함”을 받게 될 모든 자들에게 주어지는 의다. 바울은 같은 절에서 말하기를, 이 은혜를 받는 자들은 “의의 선물”을 얻게 된다고 하였다. 그것이 선물이라는 사실을 주목하라. 선물이라면 노력으로 얻는 것이 아니며, 또한 과분한 은총임에 틀림없다. 그것을 노력으로 얻으려고 하거나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은혜가 되지 못한다.(롬 4:4)
그러나 그것은 무턱대고 주는 선물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의는 모든 이들에게 자동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롬 5:17). 그 의는 받아들이는 자들에게만 주어진다고 바울은 분명히 말한다. 즉 하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고 여겨진 바 된 아브라함과 같이(갈 3:6) 그것을 믿음으로 주장하는 자들에게 그 의가 주어진다.

교훈: 무엇보다도 우리에게 절실히 필요한 것은 그리스도의 의이다. 이 의는 아브라함과 같이 그것을 믿음으로 주장하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선물이다.

부가적용)
히브리서 4:14-16절 말씀을 보라.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있으니 승천하신 자 곧 하나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 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이 말씀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단어는 16절에 나오는 “그러므로(therefore)”라는 단어이다. “그러므로”라는 말은 앞에 나오는 말을 결론짓는 말이다. 앞에 나오는 말이 무슨 말인가? “예수님은 죄가 없으시다”는 것 아닌가? 예수님은 우리와 똑 같이 인간성을 입은 연약한 사람이어서 우리가 받는 시험을 받으시는 분이지만, 그분은 “죄가 없으시다”는 것 아닌가? “그러므로”라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 그분은 죄가 없으시기 때문에” 이 말이다. “죄가 없으시기 때문에 우리는 그분의 긍휼하심과 은혜를 얻기 위하여 그분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죄가 없으시다”는 말은 예수님께서 우리의 구원의 주님이 되시기에 없어서는 안 될 아주 중요한 요소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셨다”는 말은 “그리스도께서는 죄가 없으신 분인데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그를 죄인처럼 취급하셨다”는 뜻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하나님은 예수님께서 어떤 죄도 짓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모든 사람이 지은 모든 죄를 그분이 지은 것으로 다루신 것이다. 이것이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셨다”는 말씀의 뜻이다. NKJV에는 이 말씀이 “to be sin for us”이라고 “죄가 되게 하셨다”고 했다. NLT 성경에 보면 “to be the offering for our sin”이라고 “우리의 죄를 위하여 드려지는 제물이 되게 하셨다”라고 좀 더 그 말씀의 의미를 담아서 표현했다. 그리고 footnote를 달아서 이 말은 “to become sin itself”이라고, “죄 자체가 되었다”고 표현할 수도 있다”라고 했다. 바로, 이것이 신학자들이 어려운 말로 설명하는 “theory of atonement,” “대속의 이론”이다. 죄가 없으신 예수님은 이렇게 우리 죄를 대신 속죄하기 위한 대속물이 되어 우리가 받을 죄의 형벌을 받으신 것이다. 하나님은 예수님이 아들이셨을지라도 우리의 죄에 대한 형벌을 그에게 내리신 것이다.

수요일(3월 10일)
의와 순종(요일 2:29)

도입)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셔서 처음 30년은 도대체 무슨 일을 하셨을까? 예수님은 왜 이 세상에 오셔서 33년을 사셨는가? 예수님의 생애에 있어서 공생애 3년을 제외한 30년이라는 세월은 무슨 의미가 있는가? 그 해답은 이렇다. 예수님께서 침례를 받으셨을 때, 자신이 하나님의 모든 의를 이루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마태복음 3:15). 예수님은 완전히 의로운 삶을 사시면서 하나님의 의를 이루셨다. 히브리서 4:15 말씀에 나온 그대로이다. 예수님은 모든 면에서 우리와 똑 같으신 분이었지만 단 한 가지 죄가 없으셨다. 예수님은 나면서부터 청소년 시절을 거쳐, 청년 시절을 보내시기 까지 완전히 의로운 삶을 사셨다. 예수님은 우리와 똑 같은 인간성을 입으셨기 때문에 시험도 받으시고, 유혹도 받으셨지만, 그 유혹에 넘어가 죄를 짓는 일은 없으셨다. 이 말씀의 의미가 무엇인가? 예수님의 완전한 무죄함이 우리에게 주어지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나면서부터 유년 시절을 거쳐, 청소년, 아니 청년에 이르기까지 그 분이 사셨던 “죄가 없으신 의로운 삶”이 우리에게 주어지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예수님의 삶처럼 의로운 삶을 주시기 위해서, 예수님으로 하여금 “죄가 없으신” 삶을 살게 하셨다. 이사야 53장 말씀을 기억하고 있지 않는가?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이 말씀을 꼼꼼하게 생각해 보면 우리가 나음을 입은 것은 그분이 채찍에 맞으셨기 때문이다. 우리가 평화를 누리게 된 것은 그분이 징계를 받으셨기 때문이다. 그가 찔린 덕분에 우리의 허물은 용서를 받았고, 그가 상하셨기에 우리의 죄악은 용서를 받았다. 그가 징벌을 받으셨기에, 그가 고난을 받으셨기에, 그가 우리의 질고를 짊어 지셨기에, 그가 우리의 슬픔을 당하셨기에, 우리가 의롭게 되었다.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의 의로 가리움을 받는다 할지라도 그 의는 우리의 삶을 통해 나타나야 한다. 의는 단지 법적인 선언만이 아니다. 그것은 또한 의를 소유한 사람의 삶에서 실현되어야 한다.
우리는 요한의 말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자녀들아 아무도 너희를 미혹하지 못하게 하라. 의를 행하는 자는 그의 의로우심과 같이 의롭고….”(요일 3:7)

1. 의롭게 된다는 말을 우리는 어떻게 오해할 수 있습니까?
답:
의는 순종과 연결된 성령의 열매이다. 어떤 사람들은 순종이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과 조화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가끔 우리는 “이제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했으니, 그분을 주님으로도 영접하지 않겠습니까?” 라는 말을 듣는다. 이 말 속에 내포된 의미는 마치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 우리의 구원 문제와 따로 분리된 문제인 것처럼 들리게 한다. 그것은 구원의 의미를 극단적으로 잘못 해석한 것이다. 의로운 삶을 사는 것은 구원을 받았다는 것을 입증하는 표식이라고 요한은 기록하고 있다.

2. 요한일서 2:3~6에서 요한이 말하려는 핵심은 무엇입니까?
답:
순종이라는 주제가 제기될 때마다 ‘우리는 행함으로 구원 받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하는 이들이 있는데, 물론 그 말은 틀린 말이 아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루스벨을 하늘에 두신 것은 그가 순종의 덕을 쌓았기 때문이 아니었다는 것도 분명하지만, 그가 하늘에서 쫓겨난 것은 그의 불순종 때문이었다는 것도 분명하다. 아담과 하와도 마찬가지다. 그들이 순종한 공로로 에덴동산에 있게 된 것은 아니었지만, 그들의 불순종은 에덴동산에서 쫓겨나는 원인이 되었다.
“의란 옳은 일을 행하는 것을 의미한다. 모든 사람은 자기의 행위로써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우리의 품성은 행위로 나타난다. 우리의 행위는 믿음의 진실한 여부를 보여 준다.”(실물교훈, 312)

교훈: 순종의 공로로 구원 받을 사람도 없지만, 불순종하고 구원 받을 사람도 없다. 불순종은 우리의 믿음이 진실하지 않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다.

부가적용)
한번은 큰 병원을 책임을 맡고 있는 어떤 외과 의사에게 목사님이 헌신과 순종의 필요성과 의미를 설명해 주려고 하는데 의사는 이해를 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마침내 목사님은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가령 선생님께서 회진 하다가 만난 한 환자는 자기 병을 잘 진료하여 꼭 낫게 해달라고 선생님께 간청하더니 자신의 증상에 대해 말해 주기도 거부하고 선생님께서 처방해 준 모든 약을 거부하고 ‘나는 어떤 것에 대해서는 선생님의 지시를 기꺼이 따르겠어요 그것은 내 마음에 들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떤 문제들에서는 나 스스로 판단하고 내 방식을 따르도록 하겠어요.’ 라고 말한다면 선생님께서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의사는 분개하면서 “말도 안됩니다!” 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였다. “ 나는 그런 사람은 자신이 알아서 치료하라고 하겠습니다. 그가 자기 병 치료를 완전히 내 손에 일임하며 절대적으로 내 지시를 따르지 않는다면 나는 그를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의사들이 치료를 하려면 환자들이 지시에 따르는 것이 필요하다는 말인가요?” 하고 목사님이 물었다. “절대적으로 따라야 합니다.”라고 그는 힘주어 말했다. “그런 것이 바로 헌신입니다. 우리는 조금도 남김없이 이것을 하나님의 손에 일임해야 하며 그분의 지시를 절대적으로 따라야 합니다.” “무슨 말씀인지 알았습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지금부터는 하나님께 저의 모든 것을 일임하겠습니다.” 지혜로운 이 의사와는 달리 우리 중에는 하나님께서 심각하게 여기시는 것을 가볍게 여기는 사람들이 많다. 하나님의 명령들을 무슨 장난감처럼 가볍게 여긴다. 그 명령에 불순종하면 너무나 파괴적인 결과를 가져오며 우리의 영적 삶을 산산조각으로 만든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목요일(3월 11일)
의로운 생애(요일 5:1~3)

도입)
원숭이가 아무리 훈련을 많이 한다고 해도 사람처럼 살 수 없다. 원숭이가 사람이 될 수 있는 방법은 아무것도 없다. 그 이유는 단 하나 원숭이에게 사람의 생명이 없기 때문이다. 살아있는 모든 각 생물에게는 각각마다 고유의 생명(씨. 육적DNA)이 있다. 그리고 그 각각의 고유한 생명으로 살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원숭이가 사는 것은 원숭이 안에 있는 생명이 원숭이를 원숭이로 살게 하는 것이며, 그 안에 있는 생명이 사는 것이다. 각각의 생물들DMS 자신들의 고유한 생명(씨,DNA)생명으로 보고, 듣고, 말하고, 행하고, 추구하고, 생각하고, 감정을 품고, 목적을 갖는 것이다. 이렇게 나타나는 것들은 곧 그 생물 안에 있는 생명이 사는 것이다. 사람은 두 종류의 생명(영적DNA)으로 분류된다. 그것은 영적 생명의 분류이다. 자연인들은 이 영적 생명의 분류를 모른다. 그러나 성경은 사람 생명을 영적으로 두 종류로 분류하며, 이 두 분류의 영적 생명에 대한 이야기를 성경은 하고 있는 것이다. 천국과 지옥도 사람의 두 분류에 대한 결과이다. 성경에서 사람을 두 영적 생명으로 분류하는데, 곧 하나님의 생명과 마귀의 생명이다(요일3:10).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의 생명을 가진 자를 말하며, 마귀 자녀는 마귀의 생명, 즉 하나님의 생명이 없는 자를 말하는 것이다. 하늘에 속한 생명과 땅에 속한 생명이 있다. 빛의 자녀, 빛의 생명이 있고, 어둠의 자녀, 어둠의 생명이 있다. 엡5:8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이처럼 사람이 어떤 생명 안에 있느냐에 따라 그 생명으로 살게 되는 것이다. 그 사람 안에 있는 생명이 그 사람 안에서 사는 것이다. 요8:44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아비’는 무엇인가? 생명의 근원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라는 말은 마귀의 생명을 가졌다는 뜻이며,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는 말은 그 생명으로 살게 된다는 뜻이다. 그 사람 안에 있는 생명이 원하는 것을 보고 듣고 말하고 생각하고 추구하게 되어 있다. 믿는 자도 마찬가지이다. 믿는 자는 하나님의 자녀이다. 즉 하나님에게서 난 자요, 하나님의 생명이 있는 자이다. 그러므로 믿는 자는 그 하나님의 생명이 원하는 것을 보고 듣고 말하고 생각하고 행하고 추구하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의 생명을 받은 자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 신앙생활이 무엇인가.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으로 사는 것이다.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이 우리를 살게 하는 것이 믿는 것이요, 하나님의 생명으로 사는 것이 신앙생활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으로 사는 것은 우리가 교회를 오래 다니고 열심히 다녀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게 되는 것이 아니다. 교회 일을 열심히 하고 전도하고 성경공부 많이 하고 기도 많이 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람으로 사는 것이 아니다. 물론 이런 것들이 무용하다는 것이 절대 아니다. 단 문제는 사람들이 이런 것들을 해야 믿는 것이요, 이런 것들을 하는 것이 신앙생활이라고 착각하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계명들을 지킬 때에 이로써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 사랑하는 줄을 아느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요일 5:2~3)

1. 동료 신자들을 사랑하는 것과 아울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어떻게 계명들을 지키는 것과 연결됩니까?
답:
“하나님께서 지키기를 요구하셨기 때문에 그의 계명을 단지 의무감에서 지키는 자들은 결코 순종의 기쁨을 맛보지 못할 것이다. 이러한 사람들은 계명을 순종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계명이 사람의 성향과 충돌되기 때문에 그것을 무거운 짐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의 생애는 진정한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의 생애라고 할 수 없다. 참된 순종은 마음속에 간직한 원칙이 행동으로 실행되는 것을 말한다. 그러한 순종은 의를 사랑하고 하나님의 율법을 사랑하는 데서 생긴다. 우리의 구속주에 대한 충성이 모든 의의 진수이다. 이 충성심이 우리를 의로운 행위로 이끌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의로운 행위를 기뻐하시기 때문이다.”(실물교훈, 97~98)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치르신 그분의 엄청난 희생을 숙고하는 것보다 하나님께 대한 충성심을 일으키는 더 좋은 방법이 무엇이겠는가? 사람들에게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말하는 것에는 설득력이 없다. 사람들에게 우리를 위한 예수님의 대속적인 죽음을 전하는 데서 능력이 나온다. 죄인들로 하여금 그들의 죄가 예수님을 통해 용서받을 수 있으며 그리스도의 의의 두루마기를 입음으로 하나님 앞에 완전하게 설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하는 데서 권능이 나온다.
하나님의 사랑, 그리고 지옥과 정죄에 대한 두려움이 없다는 사실이 우리 삶에 동기를 유발시키는 원동력이 되어야 한다. 십자가와 그것을 통해 우리에게 주어진 풍성한 약속에 초점을 맞추는 것 외에 다른 어떤 것도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지는 못할 것이다.

교훈: 하나님께 대한 참된 사랑은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것으로 나타나며, 계명에 대한 참된 존경심은 그분의 사랑을 진심으로 깨달을 때 이르러 온다.

부가적용)
인간의 의가 개별적 사회의 도덕기준과 각각의 집단의 윤리기준과 연결되어 있다면 하나님의 의는 동시대를 사는 인간의 공동체들이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기준을 넘어서는 파격적인 것일 수도 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은 대표적인 것이다. 이 설교를 들었던 당시 인간들의 관념에 따르자면 의로움이란 즉 그들의 마음과 생각 차원의 의는 무엇이든 받은 대로 갚기이고 이것은 복수하기를 포함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의-의로움은 예수에게서 거듭 확인되듯이 용서이다. 이웃과 만물의 존재와 행위를 포용하며 그들과 합일의 차원으로 의식의 확대를 간절히 원하는 사람이라야 그런 용서를 할 수 있다. 그런 용서가 의로움이고 그런 의로움을 배고파하고 목말라하듯 구하는 자 즉 가장 긴요하고 기본적인 음식과 물을 원하듯 용서할 수 있는 의식 수준을 간절히 구하는 자에게는 축복의 약속이 주어진다. 그런 자는 자기가 간구하던 ‘의로움(righteousness)으로 채워질 것이다. 여기서 ‘의로움’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자격을 갖춘 것으로 평가되는 자질적 특성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상식적인 인간사회의 의로움과 하나님의 나라의 의로움은 다를 수 있다. 의식의 성장을 원하는 자는 다른 물질적이고 현실적인 소원을 구하는 자에게는 결코 주어진 적이 없는 축복의 약속이 주어진다. 그들의 구함은 채워진다. 그들의 의식성장은 일어나고야 만다는 것이다. 주리고 목마를 정도로 에너지를 쏟아야 배가 채워질 만큼의 에너지가 결실한다. 죄에 대하여 죽은 자는 의에 대하여 산 자, 즉 하나님의 생명을 받은 자들을 말한다. 그런데 그 하나님의 생명이 하나님의 사람으로 하여금 더 이상 죄 가운데 살게 하지 못하도록 하며 하나님의 법을 지키게 한다. 구원 받은 자 안에 있는 생명이 그렇게 한다는 것이다. 요일4:9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그도 범죄 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났음이라’ 이 말씀을 보면 하나님의 씨(생명)가 있는 자는 범죄하고 싶어도 못한다고 말하다. 왜 인가? 그것이 하나님의 생명의 본성, 본질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 하나님의 생명 안에 죄를 짓지 못하도록 하는 본성과 본질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법정에 혹 서게 된다면 가장 중요한 것 중에 하나가 바로 증거이다. 아무리 내가 옳다고 주장하여도 증거가 없다면 결코 인정받기가 쉽지 않다. 성경에서는 반복해서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하는 자에게 그 증거로 형제 사랑을 이야기 하고 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서서 자신들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여러 가지를 했다고 주장한 자들을 향하여 나는 도무지 너희를 알지 못한다고 한 것을 기억한다면 오늘 이 말씀도 우리가 경히 여겨서는 안되는 말씀이다. 바꾸어 말하면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나는 참으로 하나님을 사랑하였습니다. 라고 고백한다고 해도 하나님께서는 그 증거로 형제사랑을 요구하게 된다는 말과 같기 때문이다. 이러므로 우리가 형제를 사랑하는 일은 그를 위한 사랑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을 사랑함의 증거로 드러낼 수 있는 나를 위한 행동임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형제 사랑하는 자가 잘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형제를 사랑하지 못하는 자가 잘못된 자임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금요일(3월 12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예수님은 협잡꾼이 아니며, 성경은 공교히 꾸며낸 이야기가 아니라고 믿는 것만으로는 넉넉지 않다. 비록 우리가 천하 인간에 오직 예수님의 이름만이 사람들에게 구원을 줄 수 있는 유일한 이름으로 믿는다 할지라도 우리는 그분을 개인의 구주로 받아들이지 않을 수 있다. 진리의 이론만을 믿는 것으로는 넉넉지 않다.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공언(公言)하는 것만으로 넉넉지 않고 우리 이름이 교회 녹명책에 기록되는 것만으로도 넉넉지 않다.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자는 주 안에 거하고 주는 저 안에 거하시나니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우리가 아느니라’(요일 3:24).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저를 아는 줄을 알 것이요’(요일 2:3). 이것이 참된 거듭남의 증거이다. 우리가 어떠한 공언을 하든지 간에 우리의 옳은 행실로 그리스도를 드러내지 않을 것 같으면 그 공언은 아무 소용이 없다.”(실물교훈, 312~313)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1. 어떻게 하면 우리는 행위로 구원을 얻는다고 생각하는 율법주의와, 우리가 행하는 모든 행위는 우리의 구원과 아무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는 ‘값싼 은혜’의 함정을 피할 수 있을까요? 어떻게 이 둘 사이에서 균형을 유지할 수 있을까요? 나는 ‘값싼 은혜’와 율법주의 중 어느 쪽으로 기우는 경향이 있습니까?

2. 욕구가 생길 때만 선을 행하는 것에는 어떤 위험이 내재되어 있습니까? 이러한 삶은 우리를 어디로 이끌 수 있습니까?

3. 내가 아는 사람들 중에 ‘의로운’ 사람이라 생각되는 이는 누구입니까? 그의 말과 행동은 어떠하며, 사람들과의 관계는 어떠합니까? 그 사람에게서 배울 점은 무엇입니까?

4. 우리는 개인적으로 뿐 아니라 공동체로서 ‘의로운’ 교회가 될 수는 없습니까? 의로운 교회가 된다면 어떤 모습일까요?

5. 이번 주 교과를 통해 새롭게 깨달은 영적 교훈이나, 한 주일을 살아가면서 꼭 실천하고 싶은 내용은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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