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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과 - 성령의 열매인 온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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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등불과기름 작성일10-02-21 16:52 조회5,66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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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02월27일(안) (일몰: 오후 6시 23분)

제9과 성령의 열매인 온유(溫柔)

<연구범위> : 창 50:20, 마 5:5, 11:29, 롬 12:3, 갈 6:1, 빌 2:2~3, 벧전 3:4.
<핵심본문> : 마 11:29

<기억절(記憶節)>
“온유(溫柔)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마 5:5)

<온유(溫柔)에 대한 한마디>

팔복의 말씀 가운데 세 번째 복은 온유(溫柔)한 사람은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차지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온유하다는 것은 예(禮)가 아니라 도(道)의 영역으로 존재에 관련된 된 것입니다.
외형적 부드러움이나 예절이 바른 공손함이 아니라
본질적인 내면적 부드러움과 겸손함을 뜻합니다.
이러한 온유는 신의 성품(divinity)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스스로 “나는 온유하고 겸손하다”고 하셨습니다.
이러한 온유는 하나님과의 일체(一體)된 의식(意識)의 반영입니다.
온유는 하나님의 뜻에 자신을 순복시키는 ‘위를 향한 사랑’의 열망으로 인하여 자기가 사라지면서
하나님과 공명이 이루어질 때에 성취됩니다.
그러기에 이러한 온유는 타고난 천성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사랑으로 연결되어 영적(靈的)생명력이 임할 때에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예수께서 하나님과 사랑의 일치에 이르므로 온유와 겸손에 이르렀듯이,
우리 또한 예수와 연결됨으로 온유에 이르게 됩니다.
포도나무 비유가 이를 말해 줍니다. (참조 요한15장)
포도나무 가지가 그 나무에 붙어 있을 때에 말라 죽지 않고 부드러운 가지로서 살아 있듯이,
우리의 영혼이 주님과 연결되어 있을 때에 온유함이 유지됩니다.
이 부드러움이 굳고 강함을 이기고, 마침내 땅을 차지하게 됩니다.
여린 싹이 굳고 단단한 대지(大地)를 뚫고 마침내 땅을 차지하듯이.
공격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오늘날의 문화에서 온유는 거의 잊혀져가는 성령의 열매이다. 사람들은 온유를 연약함으로 생각하며, 대부분의 경우 온유한 사람을 존경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는 온유한 사람으로 불려야만 한다.
온유란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께 겸손하고 사람들에게 부드러운 태도를 가리킨다. 하나님께서 통치하고 계심을 인식할 때 우리는 그분을 신뢰할 수 있으며, 심지어 우리가 자주 경험하듯이 우리가 원치 않는 방향으로 일이 꼬여갈 때에도 그분을 의지할 수 있다. 온유한 사람이 되려면 자신에 대한 확신이 아닌 주님께 대한 확신이 있어야 한다. 연약함과 온유함은 비슷해 보이긴 하지만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없다. 연약함은 힘이 없거나 용기가 부족할 때와 같은 부정적인 상황에서 기인된다. 연약함은,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마 11:29)고 말씀하신 예수님을 묘사하기에는 적절하지 못하다.
이에 반해 온유함이란 사람이 자신의 길로 밀고 나가기로 고집하는 대신,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분을 의지하기로 선택할 때 생겨난다. 따라서 온유는 약함이 아닌 강함에서 오는 것이다.

<학습목표(學習目標)>
Ⅰ. <깨닫기> : 그리스도의 온유하심
온유함이란 소심함이나 연약함이 아니라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임을 깨닫는다.

II. <느끼기> : 온유하게 행동하는 것에서 오는 평온함을 느낌
그리스도의 온유함을 우리 삶에 실천함으로 쉼과 확신을 경험한다.

III. <행하기> : 온유한 자에게 주어진 약속은 하나님의 낙원에서 사는 것임
난관과 투쟁의 순간에도 성숙함을 나타내기로 결심한다.

<요점(要點)>
그리스도인들이 화(禍)나는 상황에서 온유하게 대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닮은 행동을 하는 것이다.
온유함은 소심함이 아니다.
온유함을 나타내는 것은 우리가 하늘에서의 삶을 준비하고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온유는 적개심(敵愾心)을 누그러뜨리고 화평과 조화를 일으킨다. 그것은 자기중심적 태도에 대한 해독제이다.

일요일(2월 21일)
<온유(溫柔)하고 겸손(謙遜)한 마음 (마 11:29)>

◈ 교육학(敎育學)에 "하아로우의 실험"이라는 것이 등장합니다.
실험 내용은 이렇습니다.
젖을 먹는 아기 원숭이들 앞에 엄마 원숭이 대신 두 개의 인형을 만들어 놓습니다.
한 가지는 철사(鐵絲)로 만들어진 엄마 모형에 우유병이 꽂혀 있고,
또 다른 하나는 부드러운 천(布)으로 만들어진 엄마 모형(模型)에 우유병이 꽂혀 있습니다.
첫째 날, 아기 원숭이들은 두 인형 모두의 우유를 빨아먹었습니다.
그러나 다음날부터는 천으로 만든 인형에게만 모여들었다고 합니다.
이 실험을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동물들도 부드러운 것을 좋아한다는 것입니다.
인간관계도 똑같습니다.
딱딱하고 매정한 사람보다 부드럽고 온유(溫柔)한 사람들이 많은 사람들과 어울립니다.
사회에서도 같은 능력을 가진 사람이라면 온유한 사람이 쓰임을 받습니다.
성경(聖經)속에서 온유한 마음은 팔 복 가운데 하나입니다.
<아브라함, 다윗, 요셉, 모세,>를 비롯해서
온유함의 가장 위대한 모본이신(마11:29) 예수님의 모본을 우리는 받아야 할 것입니다.
온유함으로 하나님과 사람 앞에 큰 사랑을 받는 삶을 사십시오.
나는 다른 사람들이 마음 열고 다가올 수 있는 따뜻한 온유한 사람입니까?
주님! 온유한 주님의 종이 될 수 있도록 복 내려 주옵소서.

◈ 예수님이 주신 산상보훈 가운데도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라고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1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친히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은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사야 42장에는 장차 오실 메시야에 대해서 예언하는 가운데 장차 오실 분은 "상한 갈대도 꺾지 아니하시고 꺼져가는 등불도 끄지 아니 하시겠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온유하신 성품을 가리킨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침례 요한도 예수 그리스도를 보면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 하였습니다.
예수님을 어린양과 같이 온유하신 분으로 비유해서 소개하였습니다.
우리가 성령을 충만히 받게 되면 자연히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 그리스도의 성품이 우리의 성품 가운데 나타나야 할 것입니다.
온유는 전적인 신뢰와도 통한다.
하나님께 무거운 짐을 맡기고 그분을 신뢰할 때 참다운 쉼이 이르러 온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라.(마 11:29)

◈ 온유라는 말은 길들여진 가축에 대해서 사용된 단어로서 "연약함"이란 뜻이 아니라,
⑴ 하나님께 길들여진 마음.
⑵ 자신은 강하지만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지 않는 성품을 의미한다. (창 13:7-18; 민 12:3; 마 11:29)
온유함은 거만함과 이기심이 그리스도인의 행위와 반대되는 것임을 강조한다.

◉ <온유와 겸손이 안식을 가져다줌>
“만약 우리가 그리스도의 학교에서 마음의 온유와 겸손을 즐거운 마음으로 배우면 그분은 우리에게 틀림없이 평화와 안식을 주실 것이다. 우리의 뜻과 방법을 포기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투쟁이다. 그러나 우리가 이 교훈을 배우면 우리는 평화와 안식을 발견할 것이다. 우리는 교만과 이기심과 야망을 극복해야 한다. 우리의 뜻은 그리스도의 뜻 안에 삼켜져야 한다.”(성경주석, 5권, 1091)

◉ 많은 사람들이 온유함을 연약(軟弱)함과 혼동(混同)하지만,
참된 온유함이란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가운데 믿음과 용기(勇氣)를 가질 때 생겨난다.

월요일(2월 22일)
<온유(溫柔)함의 모본(模本)들 (민 12:3)>

◈ 온유한 성품(性稟)의 소유자(所有者)는 어떻습니까?
온유한 사람은 하나님께 대하여 겸손(謙遜)합니다.
우리가 얼른 생각하기에 "하나님께 대하여 누가 겸손하지 않을까?"라고 할 수도 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들 가운데 하나님께 대하여 겸손하지 않은 사람이 많고,
또 겸손하지 않은 행동을 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겸손한 사람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대하여 원망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서 내게 어떠한 불행, 실패, 고난, 슬픔이 온다고 할지라도
온유한 사람은 불평하지 아니합니다.
"왜 내게 이런 어려움을 허락하시나" 하며 원망하고 반항하지 아니합니다.
자포자기(自暴自棄)하지 아니합니다. 낙심하지 아니합니다.
어떠한 환경을 당하든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면 조용히 참고 견디는 것이 온유한 사람들의 하나님께 대한 태도입니다.
온유한 사람은 하나님의 뜻이면 그저 순종합니다.

요셉을 보세요. 그렇게 형들에게 팔려서 애굽에 가서 종살이하며 고생하고 말할 수 없이 억울한 환경 가운데 있었지만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한 번도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형들에게 원한을 품지 아니하였습니다.
그저 그곳에서 순종하고 자기의 일을 했을 뿐입니다.
욥 같은 사람을 보아도 그렇습니다. 전혀 그의 책임은 아닌데다가 전혀 알지 못하는 이유에 의해서 갑자기 모든 재산이 다 없어지고 심지어 사랑하는 자녀 십남매까지 없어진 때에도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욥은 하나님께 반항하지 않았습니다.
"여호와께서 주시고 여호와께서 거두시니 오직 여호와의 이름을 찬송하리로다." 하였습니다.

이렇게 온유한 성품의 소유자는 하나님의 하시는 일에 대하여 원망하거나 불평하거나 반항하지 아니하고,
낙심하지 아니하고, 참고 견디며 모든 일에 순종합니다.
하나님의 뜻이면 무엇이든 순종하는 사람이 온유한 사람입니다.
온유한 성품은 근본적으로 그리스도의 성품입니다.
예수님도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아버지, 할 수만 있거든 이 잔을 내게서 떠나게 해 주옵소서.
그러나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이루어 주옵소서."하고 기도하셨습니다.

온유한 사람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합니다.
온유한 사람은 하나님께 대해서만 아니라 사람에게도 온유합니다.
성경에도 "유순한 대답은 분노를 쉬게 한다."고 하였습니다.
우리나라에 내려오는 말 중에도 "말이란 툭해서 다르고 탁해서 다르다"고 하지요.
같은 말을 해도 다른 사람의 기분을 건드리고, 분위기를 싸늘하게 만드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마음이 온유하지 못해서 그럽니다.
사람을 볼 때도 같은 눈으로 보지만 다정한 눈길로 볼 수도 있고 눈에서 칼이 나오는 것처럼 볼 수도 있습니다. 그 마음에 달려 있습니다. 온유한 사람은 사람을 부드럽게 대합니다.

따라서 온유한 사람은 다른 사람을 용서할 줄 압니다.
에베소서 4장 2절에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하였습니다.
다른 사람을 책망하고 비판하기에만 급급하고 위로하기에는 인색한 것이 현대인의 특색입니다.
그러나 온유와 너그러움, 용서는 우리 사회에 없어서 안 될 요소입니다.
디도서 3장 2절에도 "아무도 훼방하지 말며…
관용하며 범사에 온유함을 나타낼 것을 기억하게 하라"고 하였습니다.
다른 사람의 결점부터 보며, 장점을 보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행복이 있을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누가 혹시 뉘게 혐의가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에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과 같이 너희도 그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브라함이 조카 롯과 더불어 땅을 분배할 때 직면했던 어려운 순간을 기억하는가?(참조 창 13:8~9).
하나님께서 그의 자손으로 큰 나라를 만드시겠다고 약속하셨으므로,
아브라함은 자신이 좋은 편을 택하는 것이 합당하다고 생각하기가 얼마나 쉬웠겠는가?
그러나 그는 조카 롯에게 먼저 선택권을 주고 자신은 남는 것을 취하겠다고 했다.
이 행동은 온유함에 대한 얼마나 귀한 본보기인가?
요셉이 형제들에 의해 애굽에 종으로 팔려간 이야기를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이제 애굽의 총리가 된 요셉에게 곡식을 살 수 있게 해달라고 형제들이 간청하는 장면을 다시 읽어 보라(창 45장). 온유함의 소유자인 요셉은 그의 형제들을 어떻게 대했는가?
만일 그가 온유한 사람이 아니었다면 어떻게 했을까?
창세기 50:20에 나오는 요셉의 온유함은 세상적인 관점의 온유함과 어떻게 대조를 이루는가?
젊은 다윗은 이스라엘의 다음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았다.
사울 왕은 수년 동안 다윗을 질투하여 그를 잡아 죽이려고 뒤쫓아 다녔다.
다윗은 두 번이나 사울을 죽일 수 있는 기회를 가졌었다(삼상 24:3~7, 26:7~12).
만약 다윗이 온유한 사람이 아니었다면, 사울을 죽이는 것에 대해 어떻게 합리화할 수 있었겠는가?
우리가 자신의 유익을 위해 어떤 일을 행하면서 영적으로 변명하기란 얼마나 쉬운가?
민수기 12:3에서 모세는 당대에 가장 온유한 사람으로 묘사되어 있다.
그러나 어떤 결정적인 행동들은 그가 온유한 사람이 아닌 것처럼 보이게 한다. 그
는 바로에게 이스라엘 백성을 내보내라고 강력한 말과 행동으로 주장하였다.
이스라엘이 금송아지를 숭배했을 때 그는 ‘대노’하여 금송아지를 불살라 부수어 마시게 하였다(출 32:19~20).
우리는 모세의 온유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물론 예수님은 온유함의 가장 위대한 모본이시다(마 11:29).
다음에 열거하는 사례들은 그분의 온유하심에 대해 무엇을 말해주는가?
예를 들어 요한복음 18:21~23에서 그분의 온유함은 어떻게 나타났는가?
또한 마태복음 26:39에서는 어떻게 나타났는가?
한편 그분의 행적 가운데 성전에서 돈 바꾸는 자들을 쫓아내시고,
바리새인들의 위선을 견책하신 것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 “요셉이 불공평과 압제 하에서도 참고 온유(溫柔)하게 행한 일과 인륜(人倫)을 어긴 그의 형들을 기꺼이 용서해주고 고상한 자비심을 베푼 일은 구주께서 악인들의 악행과 능욕을 불평 없이 참으시고 당신을 살해한 자들뿐 아니라 당신께 나아와 그들의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는 자들을 모두 용서해 주실 것을 예표 한다.”(부조, 239)

◈ “모세는 그들의 비난을 불평 없이 침묵으로 참았다. 모세가 백성들의 불신과 불평, 그의 변함없는 조력자가 되어야 할 사람들의 교만과 시기에 대하여 참을 수 있는 준비를 갖춘 것은 미디안에서의 수고와 기다리는 세월동안에 얻은 경험 곧 그 곳에서 계발한 겸손과 인내의 정신이었다.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였다. 바로 이것이 그로 하여금 다른 모든 사람 위에 뛰어나게 하나님의 지혜와 지도를 받게 한 이유이다. 성경은 “온유한 자를 공의로 지도하심이여 온유한 자에게 그 도를 가르치시리로다.”(시 25:9)고 말한다. 온유한 사람들은 가르치기 쉽고 가르침을 받기 원하기 때문에 여호와께서 그들을 지도하신다. 그들은 하나님의 뜻을 알고 행하고자 하는 진지한 욕망을 가지고 있다. 구주께서는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이 교훈을… 알리라”(요 7:17)고 약속하신다.”(부조와 선지자, 384)

◉ <온유함과 단호함의 조화>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섬기는 모든 사람들이 원칙에 관해서는 바위와 같이 변함이 없되,
그리스도와 같이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을 갖기를 원하신다.”(증언보감, 2권, 423)

◈ 온유와 겸손은 성공과 승리의 조건들이다.
영광의 면류관은 십자가 아래서 머리 숙이는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다.”(선지자와 왕, 590)

◉ 아브라함, 요셉, 모세, 다윗, 특히 예수님은 우리가 본받아야 할 위대한 온유함의 모본들이다.
온유함에는 담대함과 정의로움이 배제되지 않는다.

화요일(2월 23일)
<온유(溫柔)함의 중요성(重要性) (습 2:3)>

◈ 미국의 경우, 살인사건의 60% 이상이 분노를 다스리지 못해서 저질러진 것이라는 통계가 있습니다.
의사들은 최소한도 50여 가지의 질병이 분노하는 문제와 직접적으로 연관이 있다는 임상분석을 내려 줍니다.
현대인의 정신 건강에서 가장 심각한 문제는 분노입니다.
심장병, 위장병, 각종 암과 중풍, 고혈압 여러 종류의 정신질환은 대체적으로 분노의 감정에서부터 시작된다고 말합니다. 옛날 우리 조상들이 사용했던 단어로는 모두가 다 화병(火病)입니다.

그래서 잠언 기자는 매우 실제적인 교훈을 말씀해 줍니다.
"노(怒)하기를 더디 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城)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잠16:32)
"좀처럼 성을 내지 않는 사람은 매우 명철한 사람이지만, 성미가 급한 사람은 어리석음만을 드러낸다."(잠14:29)
"자기의 기분을 자제하지 못하는 사람은, 성(城)이 무너져 성벽이 없는 것과 같다"(잠25:28)
오늘 우리 주님께서 우리에게 이러한 감정을 잘 다스릴 수 있는 온유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실 우리 인간이 다스리기 가장 어려운 대상이 누구입니까? 바로 자기 자신이 아닙니까?
그 중에서도 특히 기질적(氣質的)으로 타고 난 감정(感情)입니다.
자기의 감정을 다스리고 조절할 줄 아는 자가 오늘 주님이 말씀하고 있는 온유(溫柔)한 입니다.
온유(溫柔)라는 말은 헬라어 원어 "프라우스"입니다. (뜻)
1. 온유는 자신의 감정을 조절하고 억제하고 다스릴 수 있는 사람을 뜻할 때 사용된 단어입니다.
"분노(憤怒)할 때만 분노하고 분노치 말아야 할 때는 분노(憤怒)치 않는 자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언제가 분노할 때이고 언제가 분노해서는 안 될 때입니까? 온유함은 그것의 원칙을 정하고 있습니다.
1)나 자신에게 어떤 불이익이나 피해가 있다고 할지라도 화를 내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에게 이렇게 가르칩니다.
“왼 뺨을 친자에게 오른 뺨을, 겉옷을 달라하는 자에게 속옷을, 5리를 가고 자하는 자에게 10리를 가주라”
2)그러나 반대로 타인에게 어떤 불이익이나 억울함이 미칠 때에는 우리는 목소리를 높일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이기적인 분노는 언제나 죄이고 비이기적인 분노는 이 세상의 위대한 도덕의 힘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그랬습니다. 성전에서 매매(賣買)하는 사람들에게 의분(義憤)을 내시면서 쫓아 내셨습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2. 온유의 또 다른 뜻은 훈련되어진 사람입니다.
원래 이 "프라우스"는 사람이 아니라 사나운 짐승을 훈련시키는 과정에서 사용되었습니다.
사나운 짐승을 훈련시켜 길들였을 때 이 "프라우스"라는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개나 사자나 야생마를 잡아 훈련을 시킴으로 그 엄청난 힘이 잘 조절되어 유익한 목적을 위하여 사용되어지는 상태를 말합니다. (훈련된 짐승 = 주인 앞에서 순종하고, 사냥할 때는 강함)
주님은 우리가 주님에 의해 잘 길들여진 하나님의 군사(軍士)가 되길 원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온유한 자란 어떤 사람을 뜻하실 까요?
한마디로,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받을 줄 아는 사람입니다.
육신(肉身)의 소욕(所欲)에서 벗어나서 성령의 다스리심을 받으며,
내가 나를 지배(支配)하지 않고 그리스도께서 나를 다스리심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훈련이 필요합니다.
(모세=궁궐(宮闕)에서 40년, 광야(廣野)에서 40년간 합 80년 훈련,
이스라엘백성=40년간 광야에서 훈련, 제자들=3년간 훈련)
(개= 길들여진 늑대이다)
(베드로=급한 성격, 요한=우뢰(천둥 번개)/ 훈련시켜 제자가 됨

3. 온유는 또 겸허한 사람을 지칭할 때 사용되었습니다.
이 말은 가르침을 잘 받는 사람을 말합니다.
온유한 사람은 언제나 듣고 배울 준비가 되어 있는 겸손한 자입니다.
창세기 15장에 아브라함과 롯이 나옵니다. 롯은 아브라함의 조카입니다.
아브라함은 롯을 아들처럼 키웠습니다. 그런데 롯은 욕심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땅의 분배를 생각했고 그는 땅 선택권의 우선순위를 조카 롯에게 양보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백성의 온유입니다.
연장자요, 큰아버지요, 은공(恩功)을 베푼 자로서 모든 우선권이 있었지만 아브라함은 양보했습니다.
조카 롯은 요단 동편의 초원지대를 금싸라기 땅을 차지합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나머지 척박(瘠薄)한 땅 사막을 갖게 됩니다.
여러분 이러한 양보의 힘은 무엇입니까? 온유함에서 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내 인생의 감독자임을 아는 사람만이 이런 온유한 행동을 할 수 있고
끊임없이 양보할 수 있으며 그것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100% 신뢰하는 믿음의 힘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기에 사막이 변하여 옥토가 될 줄 믿습니다. 결과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롯이 선택한 소돔과 고모라는 죄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아 불바다가 되었습니다.
축복은 아브라함이 받았습니다.
창26장에 아브라함의 아들이삭의 온유함을 목격합니다.
이삭은 가나안의 흉년으로 블레셋의 땅 그랄 지방에 거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이삭에게 복을 주었는데 그 해 농사가 보통보다 100배나 잘되었습니다.
이 때 블레셋 사람들이 시기(猜忌)하게 되었고 이삭의 우물을 빼앗고 메우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우물은 한나라의 상징이며 생명의 근원이었으며 한 개의 우물을 파는 일은 엄청난 시간과 힘이
소요되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삭은 무려 5번이나 우물을 빼앗는 블레셋 사람들에게 양보를 합니다.
우리 같으면 난리가 났을 것입니다. 니 죽고 내 죽는 대판 싸움이 벌어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온유한 사람이었습니다. 언제나 화내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좇아 양보했습니다.
항상 자신의 삶에 감독자가 하나님이심을 인식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럴 때마다 하나님은 또 다른 우물의 생성지(生成地)를 주었고 풍년(豊年)을 주었습니다.
이것이 온유한 자가 누리는 축복입니다. 성경의 기록을 보십시오.
"이삭이 거기서 옮겨 다른 우물을 팠더니 그들이 다투지 아니하였으므로 그 이름을 르호봇이라 하여 가로되 이제는 여호와께서 우리의 장소를 넓게 하셨으니 이 땅에서 우리가 번성하리로다. 하였더라. 이삭이 거기서부터 브엘세바로 올라갔더니 그 밤에 여호와께서 그에게 나타나 가라사대 나는 네 아비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니 두려워 말라 내 종 아브라함을 위하여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어 네 자손으로 번성케 하리라 하신지라"(창세기 26장 22-24절)

◉ “여호와의 규례를 지키는 세상의 모든 겸손한 자들아 너희는 여호와를 찾으며 공의와 겸손을 구하라.
너희가 혹시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숨김을 얻으리라.”(습 2:3)

◉ 온유의 반대는 교만이다. 오늘날 자긍심에 대해 많이 강조한다.
자긍심이 그 도를 넘어 교만으로 변하는 순간은 언제인가? 온유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데 필수적이다.
“능히 너희 영혼을 구원할 바 마음에 심긴 도를 온유함으로 받으라.”(약 1:21)
겸손한 마음을 갖지 않은 사람은 관심사가 다르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받지 못한다. 왜 그런가?

◉ 온유는 효과적인 증인이 되는 데 필수적이다.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라.(벧전 3:15)
“다른 이에게 끼치는 감화는 우리의 말보다 사람 됨됨이에 더 크게 좌우된다.
사람들은 우리의 논리에 도전하고 반박하고 우리의 호소에 반대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심 없는 사랑의 생애는 그들이 반박할 수 없는 논증이다.
그리스도의 온유하심으로 특징지어진 언행일치의 생활은 세상에서 하나의 능력이 된다.”(시대의 소망, 141~142)

◉ 온유함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베드로는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니라.”(벧전 3:4)고 말한다. “아름다움을 사랑하고 그것을 갈망하는 것은 옳은 일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최고의 미, 즉 썩지 아니할 것을 먼저 사랑하고 찾기를 바라신다. 어떤 외모의 단장도 가치나 사랑스러움에 있어서 세상의 모든 거룩한 사람들이 입을 ‘희고 깨끗한 세마포’인 ‘온유하고 안전한 심령’과 비교할 수 없다(계 19:14). 이 세마포 옷은 이 세상에서도 그들을 아름답고 사랑스럽게 하며 그들이 하나님의 영원한 왕궁에 들어갈 수 있는 표가 된다. 하나님께서는 ‘흰 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 그들은 합당한 자인 연고라’고 약속하신다.”(사도행적, 523~524)

◉ <하나님이 쓰시는 온유한 사람 >
“모세는 하나님의 백성의 지도자로 세움을 입었던 사람들 중에서도 가장 위대한 사람이었다. 그는 하나님께로부터 크게 존귀를 입은 사람이었다. 그 까닭은 그가 애굽의 궁정에서 얻은 경험 때문이 아니라 그가 사람들 가운데서 가장 온유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그와 담론하시기를 사람이 친구와 말하듯이 얼굴과 얼굴을 마주 대하여 말씀하셨다. 하나님께 높임을 받기 원하는가? 그러면 겸손하게 되라. 하나님의 사업을 추진해 가는 사람들은 그들의 겸비함으로 모든 다른 사람과 구별되어야 한다. 뛰어나게 겸손한 사람에 대하여 그리스도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그는 믿을만한 사람이다. 그를 통하여 내 자신을 세상에 나타낼 수가 있겠다. 그는 단 한 올의 이기심의 실도 그 피륙에 짜 넣지 않을 것이다. 내가 세상에 내 자신을 나타내지 않았을지라도 그에게는 내 자신을 나타내겠다.’(성경주석, 1권, 1113)

◉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게 하고,
다른 이들에게 선한 감화를 끼치게 하며, 하나님 앞에 값진 것으로 여겨지는 것이므로 중요하다.

수요일(2월 24일)
<온유(溫柔)의 열매를 실천(實踐)함(마 5:39)>

◈ 온유한 사람은?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 순종이며 사람에 대해서는 절대 선의(善意)를 행하는 사람입니다.
이러한 사람에게 하나님은 땅을 기업으로 주십니다.
온유한 사람이 받는 복?
온유는 세계정복의 원리입니다. 무력으로 이 세상을 지배한자는 모두 불안전했음을 역사는 증명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온유한 예수님의 정복은 오늘도 계속되어지지 않습니까?

세계 2차 대전의 중심인물인 히틀러, 무솔리니, 처칠을 풍자한 이야기입니다.
어느 날 이들은 잘 가꾸어진 정원의 연못에 있는 물고기 잡기 내기를 걸었습니다.
제일 먼저 히틀러는 권총을 뽑아 발사를 했습니다.
그러나 제일 손쉽고 강한 방법처럼 보였지만 총알은 물고기를 맞추지 못했습니다.
히틀러의 실패를 본 무솔리니는 연못에 직접 들어가 고기를 잡기를 했지만 물속의 고기가 사람보다 빠르니 역시 실패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처칠 차례가 되었습니다.
처칠은 연못의 물을 퍼냈습니다. 물고기는 가장 부드러운 방법을 사용한 처칠에게 잡혔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의 결과는 어떠합니까?
강자였던 히틀러, 무솔리니는 패자가 되었고 그들 생애의 마지막은 비참했고 지금까지 단죄의 소리가 높지 않습니까? 그러나 처칠은 국가 유공자로서 영국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그 이름이 새겨져 있고 런던 피커딜리 공원에 동상까지 서 있습니다.

동물의 세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유순한 짐승들은 땅을 차지하고 사나운 짐승들은 멸종위기에 있습니다.
(곰, 늑대, 호랑이 // 토끼, 고양이 쥐 등)
사람의 인체도 마찬가지입니다.
(딱딱한 치아=썩고 빠지고…….물렁한 혀=오래간다)
자연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잔잔한 태양과 사나운 바람 = 신사의 모자와 옷을 벗기는 내기)
우리가 약할 때 오히려 강하다…….온유한 자에게 영과 육의 땅을 기업으로 주십니다.
온유한 자는 결국 새 하늘과 새 땅(영원한 하늘나라)을 선물로 받을 것입니다.
온유한 사람은?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 순종이며 사람에 대해서는 절대 선의(善意)를 행하는 사람입니다.
이러한 사람에게 하나님은 땅을 기업으로 주십니다.
온유한 사람이 받는 복?
온유는 세계정복의 원리입니다. 무력으로 이 세상을 지배한자는 모두 불안전했음을 역사는 증명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온유한 예수님의 정복은 오늘도 계속되어지지 않습니까?
세계 2차 대전의 중심인물인 히틀러, 무솔리니, 처칠을 풍자한 이야기입니다.
어느 날 이들은 잘 가꾸어진 정원의 연못에 있는 물고기 잡기 내기를 걸었습니다.
제일 먼저 히틀러는 권총을 뽑아 발사를 했습니다.
그러나 제일 손쉽고 강한 방법처럼 보였지만 총알은 물고기를 맞추지 못했습니다.
히틀러의 실패를 본 무솔리니는 연못에 직접 들어가 고기를 잡기를 했지만 물속의 고기가 사람보다 빠르니 역시 실패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처칠 차례가 되었습니다.
처칠은 연못의 물을 퍼냈습니다. 물고기는 가장 부드러운 방법을 사용한 처칠에게 잡혔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의 결과는 어떠합니까?
강자였던 히틀러, 무솔리니는 패자가 되었고 그들 생애의 마지막은 비참했고 지금까지 단죄의 소리가 높지 않습니까? 그러나 처칠은 국가 유공자로서 영국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그 이름이 새겨져 있고 런던 피커딜리 공원에 동상까지 서 있습니다.

◉ 온유는 우리가 다른 이들과 맺는 관계 속에서 나타난다.
즉 그것은 실제적인 것으로서, 우리의 말과 태도와 행동 가운데 드러나게 된다.
우리가 스스로 온유하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천되는 온유함이 진짜이다.

◉ <온유와 겸손을 실천함>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을 연구하고 그 거룩한 원칙을 우리의 생애에 실천 하자.
하나님 앞에 온유와 겸손으로 행하며 날마다 우리의 허물을 고치자.
이기적 교만으로 말미암아 영혼을 하나님과 분리시키지 말자.
스스로 남보다 낫다고 생각하면서 높은 우월감을 가지지 말자.”(청년에게 보내는 기별, 73)

◈ 행복은 어디에 있습니까?
마음에 있습니다. 마음이 없는 성공이 옵니까?
좋은 마음을 품고 가는 사람은 좋은 길이 열리고,
우리가 하늘나라를 마음에 사모하고 살기 때문에 천국으로 가는 것이고,
사람이 잘되고 못되는 것, 아니 모든 것이 어디에 있습니까?
세상에 있습니까? 물질에 있습니까? 아닙니다.
마음에 있는 겁니다. 마음에 나쁜 마음을 품고 고민(苦悶)하면 그것이 다 병(病)이 되고,
그 아무것도 아닌 것에 몇 개월 전에 한 번 성질부리고 걱정한 것이
그 다음부터는 이것이 몸을 오랫동안 망가뜨리고 삶과 그로 인해서 질병이 오게 되는 것입니다.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라도 심령의 근심은 뼈로 마르게 하느니라."(잠 17:22)

교회에 나와서 예수님을 생명의 구주(救主)로 영접하여 믿고 기도(祈禱)하니까 돈이 하늘에서 떨어집니까?
그런 것은 아닙니다.
내 마음이 변화되고, 주님이 내안에 오시니 내 마음이 생각이 바뀌니 모든 것이 바뀌어 집니다.
♬주님이 내 맘에 들어와 계신 후 변하여 새사람 되고 내가늘 바라던 참 빛을 찾으니 내 마음 눈 밝아졌네♬
(찬미가 391장). 내 마음에 주님이 오시는 것입니다.
교회에 가니까 금방 대단한 일이 벌어집니까? 아닙니다.
우리 마음을 씻는 것이고, 마음에 은혜를 담는 것입니다.
마음이 변화되는 것이고, 새 마음을 품는 것입니다.
마음의 자원(資源)만 넉넉하면 우리 삶의 자원은 무한(無限)하게 되어 집니다.
마음만 부유(富裕)하면 모든 것이 부유하게 되어져 있습니다.
마음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잘되는 것도 마음이고, 못 되는 것도 마음입니다.
망(亡)하는 것도 마음이고, 복(福) 받는 것도 마음입니다.

◉ 온유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성령의 열매이다.
이 열매를 맺기 위해 우리는 참된 능력의 근원되시는 주님께 의지하고 자아를 그분께 굴복시켜야 한다.

목요일(2월 25일)
<온유(溫柔)에 대한 보상(補償)(시 25:9)>

◈ 하나님의 말씀인 히브리서는 어떻게 기록되어 있느냐 하면 예수님은 모든 것보다 우월(優越)하다는 겁니다.
그래서 성경에 나오는 구약의 모든 사건(事件)과 인물을 비교해서 말씀한 것이 히브리서 전체입니다.
예를 들어 히브리서 1장, 2장에는 예수님은 천사(天使)보다 훨씬 우월하다.
히브리서 3장에는 모세도 지도자(指導者)이고 예수님도 지도자인데, 모세보다 우월(優越)하다.
멜기세덱보다, 아브라함보다, 제사장보다 우월하다. 계속 우월한데 대해서 말씀합니다.

히브리서 3장에는 구약(舊約)의 참 지도자(指導者)가 한분이 있는데 그분이 바로 모세입니다.
모세가 얼마나 훌륭한 지도자인지 신구약(新舊約)에 모세 같은 지도자는 다시 안 나왔다고 그랬습니다.
전(前)에나 이후에나 제일 훌륭한 분이 모세라고 신명기 34장 10절에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런 지도자가 없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지도자인데 모세 같은 지도자다,
모세는 예수님의 그림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모세가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원(救援)한 것처럼 예수님은 온 인류를 구원하셨다는 겁니다.
모세가 바로의 쇠사슬에 있는 민족을 인도하여 가나안에 갔다면,
예수님은 죄(罪)와 마귀(魔鬼)와 저주(詛呪)에 잡힌,
우리 인류를 구원(救援)하여 영원한 하늘나라의 백성으로 인도하신다는 겁니다.
그래서 계속해서 비교합니다.
이스라엘의 지도자는 모세요, 온 인류의 구원(救援)의 참 지도자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겁니다.
계속해서 예수님과 모세도 충성한 분이고,
모세가 충성한 것 같이 예수님도 하나님 집에서 충성한 분이라는 겁니다. 닮았다는 겁니다.
그럼 모세와 예수님, 두 지도자가 어떻게 해서 이렇게 큰일을 하셨느냐?
예수님 같이 온 인류를 품으시고, 하늘과 땅을 다 품으시는 능력이 어디에 있느냐?
두 분 다 지도자인데, 어디에 있겠습니까? 총칼에 있겠습니까? 군대(軍隊)가 많았겠습니까?
조직(組織)을 잘 해서이겠습니까? 아니라는 겁니다. 어디에 있습니까?
그의 성품(性稟)에 있다는 겁니다. 온유(溫柔)한 데 있다는 겁니다.
모세가 많이 배워서 훌륭한 일을 했습니까?
지도자(指導者)가 됐습니까? 경험이 많아서? 배경이 좋아서? 아니라는 겁니다.

민수기 12장 3절에 보면 모세를 한마디로 하나님께서 이렇게 소개를 합니다.
모세를 백성들이 자꾸 원망하고 시기(猜忌)하며,
누나까지 형제들까지 별 것 아닌데 왜 모세만 쓰시느냐고 그러니까 하나님이 변명하는 겁니다.
“내가 왜 모세만 쓰느냐, 내가 왜 모세에게 이 백성을 맡겼느냐 하면…….”
모세를 통하여 일하시고 영광 받으시는 하나님이 모세를 오히려 변명합니다.
“내가 왜 모세를 쓰느냐?
모세는 이 지상에 있는 사람 가운데에 온유(溫柔)함이 제일 크다.”라는 겁니다.
믿음이 크다는 것이 아닙니다. 온유함이 크다는 겁니다. 기도 많이 한다? 아닙니다.
기도(祈禱)는 모세보다 더 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믿음 있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나 지도자(指導者)는 온유(溫柔)함이 있어야 훌륭한 지도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어떠냐하고 예수님은 본인이 직접 자기를 소개했습니다.
마태복음 11장 29절에 보면 예수님은 “나는 마음이 온유(溫柔)하고 겸손(謙遜)하다.”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온유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다 내게 와서 나를 배우라.”고 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쓰임을 받는 귀한 분들은 온유한 분들이어야 하고 신약이나 구약이나,
하나님 앞이나 세상나라에서 큰 일할 수 있다는 겁니다.
가정(家庭)이나 삶에 어떤 친구를 만나고, 어떤 사람이 훌륭한 사람입니까? 온유해야 됩니다.
이 온유라는 말을 오늘 여러분이 종일 들으실 겁니다.
온유가 그냥 우리가 먹을 수 있는 마음이 아닙니다.
누구나 온유해 질 수가 없습니다.
온유가 얼마나 어려운지, 온유한 사람이 나오면 모두가 잘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나라도 온유한 성품을 가진 분이 나라를 통치할 때,
예를 들어 세종대왕처럼 어진 분이, 온유한 분이 다스릴 때 나라가 잘 되었습니다.
과학이 발전하고 나라가 안정이 됐습니다.
미국에는 링컨 대통령이 제일 온유했답니다.
온유한 분이 역사에 큰일을 합니다.
빅토리아 여왕이 온유할 때 전 세계에 영국이 일어났습니다.
성경에 다윗 왕이 온유할 때 나라를 잘 다스리고,
모세가 온유하니까 광야 같은 곳에 2백만 명을 데리고 40년을 가도 무사히 갈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아무 능력이, 그런 것이 없었습니다. 군대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온유하신 주님이 온 인류를 다스립니다.
중국에는 요나라의 왕이 온유할 때 중국 역대에 가장 큰 평화가 왔습니다.
온유라는 말은 헬라어 "프라우스"라는 데서 온 말이며 "프라오테스"라고 하는데, 이 말은 부드러움이라는 뜻입니다. 온화하고 부드러우며, 친절하고 동정심이 많은 마음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 마음이 부드럽고 온유하며,
온화하고 남을 배려하며, 동정하고 긍휼을 베푸는 이런 마음이면 그 삶이 잘됩니다.

온유한 자를 하나님이 높이십니다.
하나님은 온유하신 하나님.
하나님께서도 자기를 말하실 때 그랬습니다.
“나는 자비를 베풀고 인자하며, 긍휼이 한이 없다”고 말씀했습니다.
수천 대에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
우리는 좋으신 하나님이라고 그러지 않습니까?
우리에게 향하신 여호와의 인자(仁慈)하심이 크고 크도다. 라고 찬양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온유하십니다. 예수님도 온유하십니다.
성령이 우리 안에 오시면 어떻습니까? 성령의 은사가 다 무엇입니까?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다 온유한 것입니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마음들입니다.
그러니까 잘됩니다.

여러분은 잘 모르시지만 농사를 지어보면 밭이 부드러워야 됩니다.
그래야 곡식이 잘됩니다. 30배, 60배, 100배가 되는 겁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13장에 땅이 가시떨기 같고, 자갈밭 같으면 안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예수를 믿으면 우리 인간은 마음이 밭인데, 이 밭이 잘되려면 부드러워야 됩니다.
우리가 어떻게 부드럽게 할 수 있습니까?
우리는 부드럽게 할 수 없습니다.
주님이 내 안에 오시고, 성령이 내안에 오시고, 예수 믿고 죄 사함 받으면,
주님의 은혜로 우리 마음은 부드러워 집니다.

부드러운 땅에는 다 잘 됩니다.
곡식이 잘됩니다. 잘 자라납니다.
부드러운 땅은 곡식만 잘되는 것이 아닙니다.
일하는 사람도 쉽습니다.
부드러우면 밭매기도 김매기도 다 쉽습니다.
그러나 땅이 딱딱하면 자기만 딱딱하고 자기만 안 되는 것이 아니라 주변에 있는 분도 다 힘듭니다.
마음이 강퍅하면 본인도 살기 어렵습니다. 그러면 주변도 다 힘듭니다.
강퍅한 사람이 있는 나라는 안 됩니다.
강퍅한 지도자, 강퍅한 가정, 강퍅한 부모가 되면 안 됩니다.
온유하고 부드럽고. 봄이 되면 따뜻해지고 땅은 부드러워 집니다.
온유하다, 따뜻하다는 말은 "프라우스"라는 말인데, 따뜻하면 모든 생명이 살아나지 않습니까?
그러나 겨울처럼, 차가워 보십시오. 잎이 다 떨어지고, 생명이 다 죽습니다.


헐스(E. D. Hulse)는 이런 말을 했다. “겸손이란 참 이상한 것이다. 자신이 겸손하다고 생각하는 바로 그 순간에 겸손은 사라진다.”
미국의 어느 작은 도시에서 가장 겸손한 시민을 찾아내어 상을 주기로 했다. 그 작은 공동체는 조사를 실시하여 마침내 적합한 사람을 찾아냈다. 모든 주요 인사들이 참석한 행사장에 가장 겸손한 사람도 가슴에 리본을 달고 참석하였는데 그 리본에는 ‘이 도시에서 가장 겸손한 사람’이라고 새겨져 있었다. 그러나 다음날 사람들은 그에게서 ‘가장 겸손한 사람’의 자격을 박탈할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그가 리본을 달고 있었기 때문에!

◉ <성경에 언급된 약속(約束)과 보상(報償)들>
(시 22:26)
겸손한 자는 먹고 배부를 것이며 여호와를 찾는 자는 그를 찬송할 것이라 너희 마음은 영원히 살지어다.
겸손한 자는 배부를 것이며 여호와를 찾는 자는 찬송할 것이다.
(시 25:9) 온유한 자를 공의로 지도하심이여 온유한 자에게 그 도를 가르치시리로다.
여호와께서는 온유한 자를 공의로 지도하시고 그 도를 가르치신다.
(시 37:11) 오직 온유한 자는 땅을 차지하며 풍부한 화평으로 즐기리로다.
오직 온유한 자는 땅을 차지하며 풍부한 화평으로 즐길 것이다.
(시 147:6) 여호와께서 겸손한 자는 붙드시고 악인은 땅에 엎드러뜨리시는 도다.
여호와께서 겸손한 자는 붙드시고 악인은 땅에 엎드러뜨리신다.
(사 29:19) 겸손한 자가 여호와를 인하여 기쁨이 더하겠고
사람 중 빈핍한 자가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를 인하여 즐거워하리니.
겸손한 자는 여호와를 인하여 기쁨을 더하게 된다.
(마 5:5)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온유한 자는 땅을 기업으로 받는 복을 누린다.

온유한 자가 상급을 받을 때가 있음을 말해 주는 이 구절들에서 우리는 위안을 얻는다.
그러나 우리는 이 공부를 통해서 배웠듯이 온유한 사람은 다른 이들 앞에서 자신을 높이는 대신에 하나님을 높인다. 그 결과로 하나님께서는 온유한 자를 높이시겠다고 약속하신다.
이와 같은 보상을 이 세상에서 받을 수도 있지만 영원한 새 하늘과 새 땅에서는 확실히 받게 된다.

◉ <온유한 자가 땅을 차지함>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우리의 첫 조상이 아름다운 이 지상 곧 그들의 나라를 다스리는 통치권을 잃어버리게 된 것은 자아를 높이고자 한 욕망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잃어버린 것을 속량하는 것은 자기희생을 통해서이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이 그렇게 하신 것처럼 우리도 승리해야 한다고 말씀하신다(계 3:21). ‘온유한 자가 땅을 차지하’게 될 때(시 37:11), 우리는 겸손과 극기를 통하여 그분의 후사가 될 수 있다.”(산상보훈, 17)

◉ 온유하고 겸손한 자가 비록 이 세상에서는 인정받지 못할지 모르지만
겸손한 자를 높이시는 하나님께서 새 하늘과 새 땅에서 분명히 보상해 주신다.

◉ “우리는 그리스도를 거룩하고 아름답고 탐스런 보화처럼 오직 자신만 즐기기 위해 마음속에 감추어두고 자물쇠로 채워두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영생하도록 솟아나고 우리와 접촉하는 모든 사람에게 생기를 주는 샘물로 여겨야 한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공공연히 용감하게 고백해야 하며, 사람들이 그분의 성결의 아름다움에 매료될 때까지 그분의 온유와 겸손과 사랑을 우리의 품성을 통해 드러내야 한다. 마치 향기가 나가지 못하도록 병을 밀봉하는 것처럼, 우리의 신앙을 보존하는 것은 최선의 길이 아니다.”(건강에 관한 권면, 400)

◉ “돈으로 살 수 없고 빛나는 재능이나 지성으로도 획득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평강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거룩한 원칙들이 매일의 삶에 실천되지 못할 때 그리스도의 종교가 얼마나 큰 손실을 당하는지 다 설명할 수 있겠는가? 그리스도의 온유하심과 겸손하심은 그리스도인의 능력이다. 그것은 지적인 능력으로 고안할 수 없고 돈으로도 살 수 없는 참으로 귀중한 보물이다. 사람들이 갈구하고 간직하고자 하는 모든 것들 중에 순결한 마음, 곧 감사와 평화가 깃든 품성만큼 하나님께서 귀히 보시는 것은 없다.”(건강에 관한 권면, 403)

<초점(焦點)>
온유는 하나님의 뜻에 자신을 순복시키는 "위를 향(向)한 사랑"의 열망(熱望)으로 인하여
자기가 사라지면서 하나님과 공명(共鳴)이 이루어 질 때에 성취(成就)됩니다.
진정한 온유함은 힘 있는 자의 특성일지도 모른다.
그들은 자기 자신을 주장할 수 있지만 그렇게 하지 않기로 정한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온유한 사람은 순종(順從)합니다.
온유한 사람은 다른 사람을 용서(容恕)할 줄 압니다.
온유한 사람은 인내(忍耐)합니다.
온유한 사람은 하나님을 가슴으로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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