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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9과 성령의 열매인 온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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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paulcho 작성일10-02-19 07:13 조회4,85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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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과 성령의 열매인 온유
2월 27일 안식일 (일몰: 오후 6시 23분)

도입)
어떤 목사님이 교회에서 제직 세미나를 하면서 "나는 며느리 깜을 고를 때, 믿음보다는 성격을 더 보겠다"고 말하여 깜짝 놀라게 했단다. 그런데 그 이유를 듣고 보니 한편 이해가 되었다. '믿음은 데려다가 기르면 되지만, 사람의 기본 바탕인 성격이 잘못돼 있으면 그것은 어찌해볼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물론 믿음도 마음대로 갖게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목사 집안에 시집올 여자라면 최소한의 믿음의 자세는 갖춰있지 않겠느냐는 것이고, 그 믿음도 성격에 따라 바르고 성실하게 믿기도 하고, 마음이 신실하지 못하면 믿음도 제대로 갖지 못하더라고 하였다. 나름대로 일리가 있다고 여겨진다. 오랜 세월을 함께 산 인생의 선배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외모 같은 것은 연애할 때 잠깐이고, 재산이라는 것도 행복에는 극히 부분적인 요소밖에 되지 못한 것으로, 둘이 살아가면서 행복과 불행을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바로 성격이라고 말한다. 좀 가난하거나 못 배운 사람하고는 살아도, 성격 더러운 사람하고는 정말 못 산다는 것이다. 성격이란 그 사람의 존재 자체이기 때문에, 외부적인 어떤 모습이나 조건 같은 것과는 결코 비할 바가 못 된다.

기억절: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마 5:5)

연구범위: 창 50:20, 마 5:5, 11:29, 롬 12:3, 갈 6:1, 빌 2:2~3, 벧전 3:4.

안식일 오후
공격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오늘날의 문화에서 온유는 거의 잊혀져가는 성령의 열매이다. 사람들은 온유를 연약함으로 생각하며, 대부분의 경우 온유한 사람을 존경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는 온유한 사람으로 불려야만 한다.
온유란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께 겸손하고 사람들에게 부드러운 태도를 가리킨다. 하나님께서 통치하고 계심을 인식할 때 우리는 그분을 신뢰할 수 있으며, 심지어 우리가 자주 경험하듯이 우리가 원치 않는 방향으로 일이 꼬여갈 때에도 그분을 의지할 수 있다. 온유한 사람이 되려면 자신에 대한 확신이 아닌 주님께 대한 확신이 있어야 한다.
연약함과 온유함은 비슷해 보이긴 하지만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없다. 연약함은 힘이 없거나 용기가 부족할 때와 같은 부정적인 상황에서 기인된다. 연약함은,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마 11:29)고 말씀하신 예수님을 묘사하기에는 적절하지 못하다. 이에 반해 온유함이란 사람이 자신의 길로 밀고 나가기로 고집하는 대신,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분을 의지하기로 선택할 때 생겨난다. 따라서 온유는 약함이 아닌 강함에서 오는 것이다.

일요일(2월 21일)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마 11:29)

도입)
"오직 온유한 자는 땅을 차지하며 풍부한 화평으로 즐기리로다"(시 37:11)라고 말씀한다. 여기서 말하는 '온유한 자'란 히브리어 '아바나'라는 단어로 자기 안에 있는 감정을 잘 통제하고 있는 모습이다. 헬라어로는 '프라우테스'라는 단어인데, 사나운 야생마가 잘 길들어서 주인의 뜻에 고분고분 순종하는 상태를 말한다. 이 온유는 세 가지 특성으로 설명할 수 있다. 첫째, '중용(中庸)'의 뜻이 있다. 극단(extreme)이 아닌 언제나 중용을 취한다. 오늘날의 우리 사회가 혼란한 것도 극단주의자들 때문이다. 흑백논리, 폭력, 갈등, 조급함, 원한, 이러한 것들이 전부 극단에서 비롯된다. 좀 더 온유하게, 좀 더 부드럽게 받아들여야 한다. 둘째, 자제(自制, self-control)이다. 내 마음을 다스리고 제어(制御)하는 것이다. 자신을 다스리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크게 기대할 것이 없다. 자기와의 싸움에서 이기는 것이 온유이다. 셋째, '겸손'의 의미이다. 온유와 겸손은 쌍둥이이며, 손바닥의 안팎과 같다. 겸손이란 스스로 낮추는 마음이요, 온유는 스스로 높이지 않는 마음이다. 또 겸손이 소극적인 마음이면, 온유는 적극적인 행위인데, 억울하게 욕을 먹을 때 잘 참고 견디면 겸손이요, 자기 페이스를 잃지 않고 슬퍼하지 않으며 도리어 웃는 사람은 온유이다. 여유로움과 부드러움이 온유로서 위대한 능력이며 인격의 힘이다.

1. 오늘의 본문에서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바는 무엇입니까?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한 것이 어떻게 우리에게 쉼을 가져다줍니까?
답:
온유함이란 자신의 계획을 위해 투쟁하기를 완전히 멈추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싸워주실 것을 믿는 것이다. 온유는 자기 주장을 내세우거나 자신의 유익을 추구하는 것과 반대되는 개념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신뢰할 때 생겨나며 그분께서 상황을 통제하실 것이라는 믿음을 가질 때 생겨난다. 온유한 사람은 자신에게 사로잡혀 있지 않는데(참조 눅 22:42) 이러한 태도가 바로 마음에 쉼을 찾게 하는 열쇠이다. 결국 우리가 겪는 온갖 소란과 소동은 자아를 먼저 생각하고 자신이 원하는 바를 추구하는 데서 기인하지 않는가? 진정한 의미에서 온유한 사람이란 자아에 대해 죽는 법을 배운 사람이며, 세상이 말하는 유약함이 아닌 참다운 믿음과 용기와 인내심을 갖는 사람이다.

2. 로마서 12:3을 읽으십시오. 여기에 온유함의 개념이 어떻게 나타나 있습니까? 어떤 면에서 이것이 온유함의 열쇠가 됩니까?
답:
온유함이 무엇인지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는 또 다른 성경절은 에베소서 4:2이다. 이 구절이 로마서 12:3절과 어떻게 연결되는지 주목해 보라. 이 구절들은 모두 거만함과 이기심이 그리스도인의 행위와 반대되는 것임을 강조한다. 왜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경우에도 거만한 자세를 취해서는 안 되는가? 우리는 모두 죄인이 아닌가? 만일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돌아가시지 않았다면 우리는 영원히 멸망당할 수밖에 없는 존재가 아니었는가? 우리가 호흡하는 매 순간, 심장이 박동하는 매 순간, 우리는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존되어 있지 않은가? 우리가 가진 모든 은사와 달란트는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 아닌가? 우리가 자랑할 것이 어디 있는가? 아무 것도 없다! 참으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치러진 이 모든 일들을 고려해 볼 때, 그리스도인들은 이 지상에서 가장 온유하고 겸손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교훈: 많은 사람들이 온유함을 연약함과 혼동하지만, 참된 온유함이란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가운데 믿음과 용기를 가질 때 생겨난다.

부가적용)
참된 그리스도인은 어떤 사람인가? 그리스도를 가장 많이 닮은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스도를 닮는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마음을 닮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마음은 어떤 마음인가?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셨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마11:29). 그렇다. 예수님의 마음은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이다. 그러기에 참된 그리스도인이라면 마땅히 예수님을 닮아 그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해야만 한다. 초대 교회 문서에 보면 [그리스도인]이라는 단어를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이라는 의미와 함께 '작은 그리스도'라는 의미로도 해석했다. 오늘 우리의 이웃들은 우리를 바라보면서 과연 그리스도를 느낄 만큼 온유하고 겸손한 모습이 있다고 느끼겠는가? 그런데 세상 사람들의 관점에서 보면 '온유한 사람'은 별로 매력이 없어 보인다. 대신 강하고 사나운 사람들이 세상에서 인정받고 또 승리하게 된다고 생각한다. 중국을 공산화 시켰던 모택동은 "모든 권력은 총구로부터 나온다"고 했다. 또 [군주론]을 쓴 마키아벨리는 "태초에 힘(권력)이 있었다"고 하여, 세상은 힘에 의해 다스려지고 움직여 왔다고 주장했다. 세상 사람들은 힘 있고 능력 있고 자신만만하고 공격적이고 도전적인 사람을 높이 평가한다. 인류의 역사를 뒤돌아보면 온유한 사람보다 강력한 통치력을 휘두른 사람들이 많은 땅을 차지했고 성공한 인생을 살았던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영국의 기독교 사상가인 말콤 머거리치는 "바로 이것이야말로 현대 정신사의 타락의 징후이다"라고 지적하였다. 과연 세상은 힘 있고 강한 자만 살아남고, 이들만이 승리하도록 되어 있을까? 펠로폰네소스 전쟁은 고대 아테네와 스파르타 두 도시의 패권전쟁이다. 스파르타는 어릴 적부터 철저히 훈련시키고 일사불란한 조직 체계를 가지고 전쟁을 수행한 군국주의 국가였고, 아테네는 자유를 존중하고 민주적인 절차를 밟아 운영하는 민주주의 국가였다. 두 나라가 싸우면 당연히 강한 스파르타가 이길 줄 알았는데, 놀랍게도 부드럽고 유약한 아테네가 승리하였다. 아테네가 스파르타를 이긴 승리의 의미는 완악함에 대한 온유의 승리, 경직성에 대한 유연성의 승리, 타율성에 대한 자율성의 승리, 맹목적의 복종에 대한 창조성의 승리라고 할 수 있다. 가장 강한 것 힘을 추구하던 로마제국은 가장 유약해 보이던 온유함의 신앙을 지닌 기독교에 의해 그 국운이 넘어갔다. 예수님이 하신 12제자훈련은 가장 효용성이 떨어지는 것 같았으나 이 비효율적인 온유함의 신앙과 사랑의 집단이 생명을 던져 헌신하였을 때에 세계를 정복할 수 있었다. 온유함의 신앙을 간직한 이 비효율적인 교회공동체가 결국에는 가장 영향력 있는 공동체가 되고 있다.

월요일(2월 22일)
온유함의 모본들(민 12:3)

도입)
온유(πραυτης, gentleness, meekness, 부드러움, 순함, 친절, 정다움, 과격하지 않음)는 ‘자기를 잊는 사랑’(love's forgetfulness)이다. 온유(溫柔)란 “온화하고 부드럽다”는 의미이다. 하지만 성경적인 의미에서 온유란 “하나님의 뜻에 대한 절대적인 순종”을 의미한다. 사람의 마음과 성격은 그 사람의 인격 자체를 나타낸다. 그래서 성경은 "대저 그 마음의 생각이 어떠하면 그 위인도 그러하다"(잠23:7)고 했다. 마음이 착한 사람이 좋은 사람이고, 마음이 악한 사람은 나쁜 사람이다. 마음이 정직한 사람은 진실한 사람이고, 마음이 진실치 못한 사람은 거짓된 사람이다. 마음이 청결한 사람이 깨끗한 사람이요, 마음이 불결한 사람은 더러운 사람이다. 백범 김 구 선생은 자기가 성공할 상이 되지 못하다는 말을 듣고 늘 탄식하였는데 '얼굴 좋음이 몸 좋음만 못하고, 몸 좋음이 마음 좋음만 못하다'는 말에 용기를 얻고 좋은 마음 갖기에 힘써 훌륭한 인물이 되었다고 한다. 사도 바울은 5척 단신에다 머리는 벗겨져 대머리였고 체격이 왜소한 그의 모습은 참으로 볼품이 없었지만, 그러나 그는 늘 마음속에 그리스도를 본받고, 마음속에 거룩한 뜻을 품고 살았기에 세계 역사에 가장 위대한 발자취를 남긴 인물이 될 수 있었다.

아브라함이 조카 롯과 더불어 땅을 분배할 때 직면했던 어려운 순간을 기억하는가?(참조 창 13:8~9). 하나님께서 그의 자손으로 큰 나라를 만드시겠다고 약속하셨으므로, 아브라함은 자신이 좋은 편을 택하는 것이 합당하다고 생각하기가 얼마나 쉬웠겠는가? 그러나 그는 조카 롯에게 먼저 선택권을 주고 자신은 남는 것을 취하겠다고 했다. 이 행동은 온유함에 대한 얼마나 귀한 본보기인가?
요셉이 형제들에 의해 애굽에 종으로 팔려간 이야기를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이제 애굽의 총리가 된 요셉에게 곡식을 살 수 있게 해달라고 형제들이 간청하는 장면을 다시 읽어 보라(창 45장). 온유함의 소유자인 요셉은 그의 형제들을 어떻게 대했는가? 만일 그가 온유한 사람이 아니었다면 어떻게 했을까? 창세기 50:20에 나오는 요셉의 온유함은 세상적인 관점의 온유함과 어떻게 대조를 이루는가?
젊은 다윗은 이스라엘의 다음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았다. 사울 왕은 수년 동안 다윗을 질투하여 그를 잡아 죽이려고 뒤쫓아 다녔다. 다윗은 두 번이나 사울을 죽일 수 있는 기회를 가졌었다(삼상 24:3~7, 26:7~12). 만약 다윗이 온유한 사람이 아니었다면, 사울을 죽이는 것에 대해 어떻게 합리화할 수 있었겠는가? 우리가 자신의 유익을 위해 어떤 일을 행하면서 영적으로 변명하기란 얼마나 쉬운가?
민수기 12:3에서 모세는 당대에 가장 온유한 사람으로 묘사되어 있다. 그러나 어떤 결정적인 행동들은 그가 온유한 사람이 아닌 것처럼 보이게 한다. 그는 바로에게 이스라엘 백성을 내보내라고 강력한 말과 행동으로 주장하였다. 이스라엘이 금송아지를 숭배했을 때 그는 ‘대노’하여 금송아지를 불살라 부수어 마시게 하였다(출 32:19~20). 우리는 모세의 온유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물론 예수님은 온유함의 가장 위대한 모본이시다(마 11:29). 다음에 열거하는 사례들은 그분의 온유하심에 대해 무엇을 말해주는가? 예를 들어 요한복음 18:21~23에서 그분의 온유함은 어떻게 나타났는가? 또한 마태복음 26:39에서는 어떻게 나타났는가? 한편 그분의 행적 가운데 성전에서 돈 바꾸는 자들을 쫓아내시고, 바리새인들의 위선을 견책하신 것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교훈: 아브라함, 요셉, 모세, 다윗, 특히 예수님은 우리가 본받아야 할 위대한 온유함의 모본들이다. 온유함에는 담대함과 정의로움이 배제되지 않는다.

부가적용)
우리가 다윗의 생애를 보면, 그가 사울 왕에게 얼마나 억울하고 부당한 고난을 당했는지를 안다. 그는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수많은 날들을 사울에게 쫓겨 다녀야만 했다. 그러다가 두 번이나 찾아온 복수의 기회가 있었다. 그야말로 단칼이면 사울의 목을 베고 스스로 이스라엘의 왕이 될 수 있는 기회였으나, 그런 순간에도 다윗은 사울을 해치지 않고, 모든 판단을 하나님께 맡긴다. 다윗은 '아무리 사울 왕이 내게 잘못했고, 또 내가 억울하다 하더라도, 이 모든 잘잘못에 대한 시비의 판단은 하나님이 하실 것이다'고 생각하고 하나님께 맡겼다. 이런 모습을 보시고 하나님은 사울을 폐하시고 다윗을 왕으로 삼으셨다. 가장 온유한 자에 대해서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더라"(민12:3). 모세가 나이 백세가 넘어서 구스 여자를 소실로 취하자, 그의 형 아론과 누나 미리암이 이 일을 가지고 모세를 비방하며, "여호와께서 모세와만 말씀하셨느냐? 우리와도 말씀하지 아니하셨느냐?"(민12:2)며, 그의 리더십까지도 공격한다. 이때 모세는 그 억울한 말을 들으면서도 원망하지 않았다. 모세는 하나님과 직접 대면하여 말씀을 들었고, 그의 얼굴에는 광채가 나서 수건으로 얼굴을 가리기까지 했던(출34:29-35) 권능의 사람이었지만, 상대방을 대적하지 않고, 온유하게 침묵하며 참았다. 하나님은 모세의 이 모습을 보시고 모세의 편을 드셨다. 그리고 미리암을 문둥병으로 치시고, 온유한 마음으로 이 참기 힘든 비난을 참았던 모세를 더욱 높이 세워주셨다. 그러면 우리는 누구에 대하여 온유함을 지켜야 할까? 첫째는 하나님 앞에 온유해야 한다. 주께서 말씀하시는 대로, 그 말씀이 내 뜻에 맞든지 맞지 않든지, 그대로 순종하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화요일(2월 23일)
온유함의 중요성(습 2:3)

도입)
중국의 유명한 사상가인 노자가 스승 상창이 늙어서 죽게 되자, 노자는 스승을 찾아가서 "사부님, 사부님께서 세상을 뜨실 날이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습니다. 제게 마지막 가르침을 주십시오."하고 부탁을 하였다. 상창은 얼마 동안 노자의 얼굴을 보더니 입을 열고는 "내 이빨이 있느냐?"하고 물었다. 노자는 "없습니다"라고 대답하자, 상창은 "내 혀는 있느냐?"라고 물었다. 노자는 "사부님, 혀는 있습니다"라고 대답하자 상창은 "자, 이제 알겠느냐?"고 말했다. 노자는 "사부님, 알겠습니다. 사부님 감사합니다"하고 큰절을 드리고는 물러 나왔다고 한다. 노자가 무엇을 알고 무엇을 깨달았다는 것일까? 세상에서 이빨처럼 굳고 강하고 단단해서 입술과 혀를 물어서 피를 내는 것은 부러지고 깨지고 빠져나가고 없어지지만, 혀처럼 무력하게 이빨에게 물리고 피가 나는 부드러운 것은 살아남게 된다는 것이다. 이렇듯 이빨과 같이 강하고 단단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고통과 피해를 주는 사람은 도태되지만, 혀와 같이 온유하고 겸손한 사람은 오래도록 남는다는 진리를 깨달았던 것이다. 세상은 그냥 보기에는 약한 자가 먹히는 것 같아 보이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그래서 다윈(Darwin)이나 마르크스(Marx)의 주장대로, 얼핏 동물의 세계를 볼 때에는 약육강식의 이론이 꼭 맞는 것 같다. 그러나 그냥 생각하기에는 약한 동물은 다 잡아먹히고 강한 동물만 남을 것 같은데 사실은 그와는 정반대의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우리가 쉬운 예로 호랑이와 토끼를 두고 보아도 그렇지 않은가? 이 토끼는 완전히 호랑이의 밥인데도 이상한 것은 호랑이는 점점 더 멸종되어 가고 토끼나 양은 점점 무서운 숫자로 번식되어 가고 있다. 오늘날에 와서는 맹수들이 거의 멸종되어 가고 있기에, 오히려 사람들이 보호를 하지 않으면 맹수라는 자체가 아주 없어지고 말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세계이다. 사나운 것은 도태되고, 온유한 것이 번성하게 되는 것이다.

“여호와의 규례를 지키는 세상의 모든 겸손한 자들아 너희는 여호와를 찾으며 공의와 겸손을 구하라. 너희가 혹시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숨김을 얻으리라.”(습 2:3)

온유의 반대는 교만이다. 오늘날 자긍심에 대해 많이 강조한다. 자긍심이 그 도를 넘어 교만으로 변하는 순간은 언제인가?
온유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데 필수적이다. “능히 너희 영혼을 구원할 바 마음에 심긴 도를 온유함으로 받으라”(약 1:21). 겸손한 마음을 갖지 않은 사람은 관심사가 다르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받지 못한다. 왜 그런가?
온유는 효과적인 증인이 되는 데 필수적이다.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라(벧전 3:15). “다른 이에게 끼치는 감화는 우리의 말보다 사람 됨됨이에 더 크게 좌우된다. 사람들은 우리의 논리에 도전하고 반박하고 우리의 호소에 반대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심 없는 사랑의 생애는 그들이 반박할 수 없는 논증이다. 그리스도의 온유하심으로 특징지어진 언행일치의 생활은 세상에서 하나의 능력이 된다.”(시대의 소망, 141~142)
온유함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베드로는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니라”(벧전 3:4)고 말한다. “아름다움을 사랑하고 그것을 갈망하는 것은 옳은 일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최고의 미, 즉 썩지 아니할 것을 먼저 사랑하고 찾기를 바라신다. 어떤 외모의 단장도 가치나 사랑스러움에 있어서 세상의 모든 거룩한 사람들이 입을 ‘희고 깨끗한 세마포’인 ‘온유하고 안전한 심령’과 비교할 수 없다(계 19:14). 이 세마포 옷은 이 세상에서도 그들을 아름답고 사랑스럽게 하며 그들이 하나님의 영원한 왕궁에 들어갈 수 있는 표가 된다. 하나님께서는 ‘흰 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 그들은 합당한 자인 연고라’고 약속하신다.”(사도행적, 523~524)

교훈: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게 하고, 다른 이들에게 선한 감화를 끼치게 하며, 하나님 앞에 값진 것으로 여겨지는 것이므로 중요하다.

부가적용)
"유능제강"(柔能制剛)이라는 말이 있다. '온유한 것이 강한 것을 능히 이긴다'는 말이다. 온유한 사람들이 가장 강한 사람들이며, 가장 강한 것을 능히 이길 수 있다. 여름에 태풍이 불면 나무가 꺾이거나 뿌리째 뽑히지만, 버드나무 같은 줄기가 부드러운 나무는 바람이 조금만 불어도 휘청거리기는 해도 부러지지 않고 그 모진 태풍을 견뎌낸다. 이런 이유로 초고층 빌딩을 지을 때, 건물 상단이 100m당 50cm 정도 휠 수 있도록 설계한다. 건물이 휘어지면 외부를 감싸고 있는 유리에도 비틀림이 생기는데, 만일 유리를 볼트와 너트를 사용해 건물 외벽에 고정시켜 놓으면, 건물이 휘어질 때 유리창은 깨지게 된다. 그렇게 되면 파손된 유리창이 아래로 떨어져 도심 한복판이 순식간에 재앙의 진원지로 돌변할 수 있다. 이 때문에 유리를 실리콘으로 건물에 부착시키는데, 실리콘은 원래 상태를 유지하려는 유리와 뒤틀리는 건물 사이에서 완충제 역할을 하는 것이다. 살다 보면 예의도 없고 말과 행동이 거칠고 사리에 맞지도 않은 막돼먹은 사람에게 수모를 겪는 때가 있다. 다시 안 만나도 좋은 사람이라면, 그를 멀리하여 다시 안 만나면 되지만, 늘 함께 지내야 하는 사람 중에 그런 사람이 있으면 여간 견디기 힘들지가 않다. 맹자(孟子)는 이런 경우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사람이 내게 함부로 덤빌 때는 내가 사랑이 모자랐던가 아니면 예의가 모자랐던가를 살펴 고친다. 그런데도 다름이 없으면 스스로 충성됨이 모자랐던가를 반성한다. 그래서 잘못이 없다고 생각되는데도 함부로 덤비면 이것은 새, 짐승과 같은 것이다. 금수를 어찌 상대할 것이며 또 어찌 나무라겠는가?" 무례한 사람을 대하면, 우선 자신을 살펴보라고 한다. 자신은 예의를 다하고 사랑으로 대했는데도 역시 상대방이 달라지지 않으면, 또 자신에게 성실하지 못한 태도는 있지 않았나 살펴보라고 한다. 그래도 마찬가지로 거칠고 야비하다면 그건 금수처럼 대해 마땅하니 이런 사람은 무시해 버리라는 것이다. 때때로 이런 야비한 사람들이 있어 견디기 어려울 때가 있다.

수요일(2월 24일)
온유의 열매를 실천함
(마 5:39)

도입)
센디 에즈린의 글 가운데 [손해 본 것은 없다]는 제목의 이런 내용이 있다. "조그만 친절이라구? 흐음! 손해 볼 것은 없겠지. 남편에게 사랑한다고 말했다. 손해 본 것은 없다. 아들의 도시락 가방에다 '너는 정말 특별한 아이다'라는 쪽지를 써넣었다. 손해 본 건 없다. 슈퍼마켓에서 휠체어를 탄 여인을 위해 문을 열어주었다. 손해 본 건 없다. 동생에게 전화를 걸어서 보고 싶다고 말했다. 동생도 내가 보고 싶단다. 시장님께 정치를 잘해주셔서 고맙다는 편지를 보냈다. 손해 본 건 없다. 양로원의 노인들에게 꽃을 사다드렸다. 손해 본 건 없다. 병이 들어 누워 있는 친구에게 국을 끓여다 주었다. 손해 본 건 없다. 딸과 게임을 하고 놀았다. 나도 재미있었다. 슈퍼마켓에서 일하시는 아주머니께 고맙다는 말씀을 드렸다. 손해 본 건 없다. 비서에게 하루 유급 휴가를 주었다. 조금밖에 손해 보지 않았다. 우리집 개와 공놀이를 했다. 내 기분도 좋아졌다. 운전할 줄 모르는 이웃을 데리고 나가서 점심을 사주고 영화를 보여 주었다. 손해 본 건 없다. 안마를 받았다. 구름을 탄 기분이었다. 조그만 친절이라구? 흐음, 올해 내내 이렇게 살아야겠는데." 이런 친절도 즐길 줄 알아야 한다.

온유는 우리가 다른 이들과 맺는 관계 속에서 나타난다. 즉 그것은 실제적인 것으로서, 우리의 말과 태도와 행동 가운데 드러나게 된다. 우리가 스스로 온유하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실천되는 온유함이 진짜이다.

1. 다음 구절들은 우리의 삶 속에서 온유함이 어떻게 나타날 수 있음을 보여줍니까? 이러한 상황들 속에서 온유함은 왜 그렇게 중요합니까?
마 5:39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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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18:21~22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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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 6:1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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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 2:2~3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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딤후 2:24~25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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딛 3:2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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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계속 말해 왔듯이 사람들은 이상하게도 온유함을 연약함과 연결시킨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실제로 오늘 우리가 살펴본 구절들을 보면, 온유함에는 힘이 요구되는데, 대부분의 경우에 온유함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영적인 힘이 요구됨을 알 수 있다.
물론 온유함이 성령의 열매라면 그것은 우리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이어야 한다. 따라서 우리는 날마다 주님께 자신을 굴복시킬 필요가 있다. 우리의 삶에서 이와 같은 온유가 나타나려면 날마다 믿음으로 기꺼이 순종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교훈: 온유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성령의 열매이다. 이 열매를 맺기 위해 우리는 참된 능력의 근원되시는 주님께 의지하고 자아를 그분께 굴복시켜야 한다.

부가적용)
[온유한 선지자 존 칼뱅]이라는 글이 있다. 칼뱅은 젊었을 때에 조용하게 공부할 생각으로 프랑스의 스트라스부르그로 가던 중 제네바에 들르게 되었다. 거기서 그는 월리엄 파렐(William Farel)과 아는 교인들로부터 "이곳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 주시고, 이 제네바를 바로잡아주십시오"하는 간절히 요청을 받았다. 칼뱅은 결국 공부할 것을 중단하고 그곳에서 3년 동안 열심히 일한다. 일주일에 세 번이 아니라 하루에 세 번씩 설교를 했다. 정치가로, 종교개혁자로, 목사로, 제네바를 위해 정성을 다했다. 너무도 열심을 내어 일하다보니 부작용도 생겨, 3년 후 제네바 의회가 공식으로 칼뱅에게 추방 명령을 내렸다. 그러자 그는 하던 일을 다 중단하고 스트라스부르그에 가서 조용히 연구생활을 했다. 칼뱅이 떠나자 제네바는 엉망이 되었다. 의회는 다시 그를 모셔 와야 되겠다는 결정을 하고 제발 와달라고 사정을 한다. 웬만한 사람 같으면 "언제는 내쫓더니 이제는 다시 오라고 하느냐?"며 안갈 것이다. 그러나 칼뱅 선생은 "하나님께서 부르시면 가야지요"하며, 온유한 마음으로 자기를 필요로 하는 곳에 서슴없이 돌아갔다. 돌아가서 평생토록 복음을 전하고 오늘의 세계의 낙원 제네바를 만든 것이다.

목요일(2월 25일)
온유에 대한 보상(시 25:9)

도입)
우리는 지금 위험한 세대를 살아가고 있다. 이는 생태계의 질서가 파괴되었다고 하는 때문이 아니다. 또한 가공할 만한 무기가 발명되어 저장되고 보다 더 큰 힘의 균형을 이어가며 살아간다는 그것 때문도 아니다. 우리가 정말로 무서워하는 것은, 바로 사람의 마음 때문이다. 그 기술과 그 무기를 손에 쥐고 있는 사람 때문이란 말이다. 예로부터 밤길에 제일 무서운 것이 사람이라고 하지 않는가? 최근에는 테러(terror)의 시대, 혹은 폭력의 시대라는 말을 듣는다. 인간성이 더 없이 포악해져서, 어떤 동물보다도 더 잔인해져 가고 있다. 그 생각이 점점 사악해지고 행동은 날이 갈수록 거칠어만 가기에 세상이 불안하고 두려운 것이다. 그런데, 이런 폭력이 세상을 이기는 것이 아니다. 온유가 세상을 이긴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마하트마 간디(M.Gandhi)는 키가 5척 밖에 되지 않는 볼품없는 모습에 무명옷을 입고 생활했지만, 그는 그의 유명한 '무저항주의'를 통하여 인도를 영국으로부터 독립하게 했다. 1930년 3월 12일, 그를 따르는 온유한 무리들과 소금 전매법을 반대하며, 소금을 만드는 곳을 향하여 인도의 독립을 외치며 나아가는 이른바 '소금의 행진'을 했다. 그는 수차 투옥되었고, 나중에는 암살까지 당했다. 그러나 그는 바늘 하나 들어보지 않고, 돌 하나 던지지 않고, 3백 년 동안 지배하고 있던 영국으로부터 인도를 독립시켰다. 온유한 자가 땅을 차지하는 것은 하나님의 섭리이다. 온유한 자와 겸손 자의 마음에 평화가 깃들게 된다.

헐스(E. D. Hulse)는 이런 말을 했다. “겸손이란 참 이상한 것이다. 자신이 겸손하다고 생각하는 바로 그 순간에 겸손은 사라진다.”
미국의 어느 작은 도시에서 가장 겸손한 시민을 찾아내어 상을 주기로 했다. 그 작은 공동체는 조사를 실시하여 마침내 적합한 사람을 찾아냈다. 모든 주요 인사들이 참석한 행사장에 가장 겸손한 사람도 가슴에 리본을 달고 참석하였는데 그 리본에는 ‘이 도시에서 가장 겸손한 사람’이라고 새겨져 있었다. 그러나 다음날 사람들은 그에게서 ‘가장 겸손한 사람’의 자격을 박탈할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그가 리본을 달고 있었기 때문에!

1. 다음 구절들에 언급된 약속과 보상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시 22:26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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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25:9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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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37:11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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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147:6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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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 29:19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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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5:5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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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유한 자가 상급을 받을 때가 있음을 말해 주는 이 구절들에서 우리는 위안을 얻는다. 그러나 우리는 이 공부를 통해서 배웠듯이 온유한 사람은 다른 이들 앞에서 자신을 높이는 대신에 하나님을 높인다. 그 결과로 하나님께서는 온유한 자를 높이시겠다고 약속하신다. 이와 같은 보상을 이 세상에서 받을 수도 있지만 영원한 새 하늘과 새 땅에서는 확실히 받게 된다.

교훈: 온유하고 겸손한 자가 비록 이 세상에서는 인정받지 못할지 모르지만 겸손한 자를 높이시는 하나님께서 새 하늘과 새 땅에서 분명히 보상해 주신다.

부가적용)
미국에서 처음으로 흑인 프로야구선수가 된 제키 라빈슨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1940년 대 그토록 인종 차별이 심한 미국의 프로야구 세계에 이 사람이 최초로 들어온다. 지금은 프로 야구나 농구에 흑인 선수들이 많지만 그 당시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런데 1947년대 브루클린 다저스의 최고 책임자였던 리키라는 사람이 이 제키 라빈슨에게 [거룩한 실험]을 하나 해보자고 한다. 그는 라빈슨을 불러 이야기하였다. 라빈슨은 독실한 크리스천이었다. 그러나 성미가 대단한 사람이라 주먹 싸움도 잘하고 권투도 잘하는 사람이었다. 야구는 잘하지만 사고를 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리키는 그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였다. "라빈슨, 너 이 책을 읽어라." 그 책제목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였다. "너는 이제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처럼 살아야 한다. 앞으로 야구 선수가 되면 너를 향해 수많은 모멸과 조소가 쏟아질 것이다. 게임을 뛸 때마다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들을 수 없는 욕설이 쏟아질 텐데, 너는 결코 거기에 반응해서는 안 된다. 같이 욕해서도 안되고, 싸워서도 안 된다. 반드시 명심할 것은 앞으로 모든 흑인 선수들의 미래가 너의 행동에 전적으로 달려있다는 것이다." 1947년 그날부터 제키 라빈슨은 그 약속을 실천하였다. 정말 구단주 리키가 말한 대로 라빈슨이 가는 곳마다 백인 관중들은 돌멩이를 던지고, 라빈슨이 공 하나를 놓치면 "저런 놈을 왜 세웠느냐?"며 마구 욕설을 퍼부어 댔다. 팀의 동료 선수들도 라커에서 "라빈슨과는 같이 샤워하지 못한다. 흑인이랑 같이는 샤워할 수 없다."하며 그를 짐승 취급했다. 이런 모멸 속에 있었던 그를 아는 사람들은, 후에 그에 대해 이렇게 표현하였다. "그는 그라운드에서 가장 외로운 사람이었다. 아무도 그와 이야기하려 하지 않았고, 팀 동료들로부터 따돌림을 당했으며, 가는 곳마다 욕설과 조소를 당했다. 그러나 그런 혹독한 멸시와 압박을 받으면서도 그처럼 보복하지 않는 사람은 처음 보았다." 라빈슨은 그 와중에서도 10년 동안 6번이나 다저스 팀을 우승으로 올려놓았다. 내셔널리그 최고의 신인상을 받고, MVP로 선정이 되고, 올스타 게임 6번, 월드 시리즈 6번 출전, 1962년에는 미국 야구의 명예의 전당에 기록되는 신화를 낳았다. 그의 거룩한 희생을 통해서 그 후로부터 수 백 수천의 흑인 선수들이 미국 프로야구계에 입문하게 되었고, 농구계와 미식 축구계에 들어갔다. 그 때 홈런 왕 행크 아론이 "자기 인생의 가장 큰 영웅이 누구냐?"는 질문에 서슴없이 라빈슨을 들면서 이런 말을 했다. "라빈슨은 모든 흑인 선수들에게 꺼지지 않는 횃불을 남겨 주었다. 그가 아니었다면, 미국의 프로 스포츠 세계에서 언제 인종차별이 무너졌을지 아무도 모를 일이다. 내가 최고의 홈런 기록을 세울 수 있었던 것도 바로 그의 거룩한 희생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예수님 닮은 희생이 모든 흑인 선수들의 길을 열어놓은 것이다." 제키 라빈슨이 이처럼 매 게임마다 그 수많은 관중의 조소와 억울한 욕설에도 결코 분노하거나 마음이 격동되지 않은 것은, 당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원수들을 향해서도 저들을 미워하거나 보복하지 않고, 욕설과 피 흘림과 십자가 고통 속에서도 분노하지 않으셨던, 예수님의 온유함을 배웠기 때문이었다. 라빈슨의 온유함의 희생 뒤에는 수많은 흑인 선수들의 길을 열어놓는 기막힌 역사가 있었다. 오늘 우리도 이런 온유함과 겸손함을 배워야 하지 않겠는가?

금요일 (2월 26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우리는 그리스도를 거룩하고 아름답고 탐스런 보화처럼 오직 자신만 즐기기 위해 마음속에 감추어두고 자물쇠로 채워두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영생하도록 솟아나고 우리와 접촉하는 모든 사람에게 생기를 주는 샘물로 여겨야 한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공공연히 용감하게 고백해야 하며, 사람들이 그분의 성결의 아름다움에 매료될 때까지 그분의 온유와 겸손과 사랑을 우리의 품성을 통해 드러내야 한다. 마치 향기가 나가지 못하도록 병을 밀봉하는 것처럼, 우리의 신앙을 보존하는 것은 최선의 길이 아니다.”(엘렌 G. 화잇, 건강에 관한 권면, 400)
“돈으로 살 수 없고 빛나는 재능이나 지성으로도 획득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평강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거룩한 원칙들이 매일의 삶에 실천되지 못할 때 그리스도의 종교가 얼마나 큰 손실을 당하는지 다 설명할 수 있겠는가? 그리스도의 온유하심과 겸손하심은 그리스도인의 능력이다. 그것은 지적인 능력으로 고안할 수 없고 돈으로도 살 수 없는 참으로 귀중한 보물이다. 사람들이 갈구하고 간직하고자 하는 모든 것들 중에 순결한 마음, 곧 감사와 평화가 깃든 품성만큼 하나님께서 귀히 보시는 것은 없다.”(엘렌 G. 화잇, 건강에 관한 권면, 403)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1. 하나님께서는 온유한 사람들의 삶에 기쁨을 더하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온유한 사람들이 기뻐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우리는 일상 속에서 어떻게 온유를 증대시킬 수 있을까요?

2. 그리스도인들은 온유함을 나타내야 하기 때문에 결코 자신의 권리를 주장해서는 안 됩니까? 자신의 답을 교과반에서 나누십시오.

3. 니체(1844~1900)는 “그리스도교는 힘이 없는 유약한 자들에게서 나온 종교다. 그들은 자신을 좋게 보이려고 온유와 겸손을 나타낸다.”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에 대해 어떻게 대답하겠습니까?

5. 이번 주 교과를 통해 새롭게 깨달은 영적 교훈이나, 한 주일을 살아가면서 꼭 실천하고 싶은 내용은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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