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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8과 성령의 열매인 충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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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paulcho 작성일10-02-12 12:00 조회4,74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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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8과 성령의 열매인 충성
2월 20일 안식일 (일몰: 오후 6시 16분)

도입)
성경에서 충성이라는 말이 나오면 “믿을만한 사람, 믿을 수 있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돈을 잃는 것은 조금 잃는 것이다. 친구를 잃는 것은 많이 잃는 것이다. 신뢰를 잃어버리는 것은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것이다”라는 말이 있다. 충성의 열매를 맺는다는 것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나의 신용등급을 높이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믿을 수 있는 사람,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우리가 어떻게 하면 이렇게 될 수 있는가? 성령의 열매라는 말이다. 우리가 성령이 충만하면 이런 삶을 살아갈 수 있다. 충성과 온유와 절제는 하나님께 대하여 표현된 그리스도인으로 품성으로서,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가는 성도의 일반적인 행동강령이다. 충성(忠誠)이란 ‘참마음에서 우러나는 정성’이라는 뜻이다. 주로 나라에, 또는 임금에게 몸과 마음을 다 바치는 것이나, 직장에, 또는 상관 등에게 몸과 마음을 바쳐 봉사하는 것을 말한다. ‘사랑한다’는 의미는 ‘충성을 다한다’는 것으로 표현된다. 충성은 두 마음이 아닌 한 마음의 진실한 자세를 말한다. 곧 말과 혀로만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한다는 의미이다(요일 3:18).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요일 3:18). 헬라어에서 충성이란 흔히 신뢰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충성은 믿을만한 사람이 지니고 있는 특성이기 때문이다. 충성이란 남들로 하여금 자신을 신뢰하거나 의지할 수 있게 만드는 속성이다(눅 16:10-12).

기억절: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갈 6:9)

연구범위: 마 25:1~13, 눅 16:10, 살전 5:23~24, 딤후 3:1~5, 히 11장

안식일 오후
‘충성’이라는 성령의 열매는 ‘신실함’으로도 불릴 수 있다. 그것은 특히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목적한 바에 대해 흔들림 없이 굳게 서는 것을 말한다.
충성은 변함없이 믿음을 고수(固守)하는 것을 의미한다. 다른 동의어로는 흐트러짐이 없이 신의를 지키는 ‘충절’, 믿는 바를 확신하고 정로에 머무르는 ‘지조’, 변경할 수 없는 원칙이나 목적에 대해 충실하는 ‘정절’, 결정한 것에 대해 흔들리지 않고 밀고 나아가는 ‘결의’(決意) 등이 포함된다.
‘믿음’(faith)과 ‘충성’(faithfulness)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지만 동일한 것은 아니다.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의 실체를 믿을 수 있게 해 주는 말할 수 없는 능력이며,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선물이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이다(히 11:1). 충성은 이와 반대로 내적인 믿음의 체계 밖에서 활동한다. 우리가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가질 때 그 믿음의 방식에 따라 행동한다. 우리의 믿음은 충성이라는 행위로 나타난다. 그러한 행위는 우리의 믿음과 행동의 체계를 함께 묶어주는 밧줄과 같다.

일요일(2월 14일)
하나님은 신실하심(시 89:9)

도입)
‘하나님이 신실하시다’라는 명제만큼 분명한 신학적 사실은 없다. 그렇지만 엉키고 뒤틀린 삶 속에서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의지하며 사는 방법을 배우는 것은 우리가 마주한 가장 어려운 과제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는 기쁨을 배우기까지는 거의 한 평생이 걸렸다. 그렇지만 결국 아브라함은 배웠다. 마침내 하나님이 그에게 자신의 유일한 후사인 이삭을 바치라고 명하셨을 때 그는 하나님의 계획과 모든 일을 가능하게 하는 그분의 능력을 신뢰했다. 이 사람이 누구인가? 살기 위해 애굽의 바로 왕에게 자신의 아내를 누이라고 거짓말해서 아내의 정절을 위험에 빠뜨린 사람이었다. 하나님이 약속한 아들을 아내 사라에게 주시지 않을 것처럼 보이자 아내의 여종을 임신시켰던 사람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사라의 잉태를 통해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깨달았다. 믿음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모든 것을 거는 것이다. 믿음은 믿음에 의지할 수 없다. 왜냐하면 믿음의 근원은 믿음 밖에 있기 때문이다. 믿음의 발휘는 지속적으로 믿는 우리의 능력에 있지도 않다. 만약 그렇다면 더 열심히 노력할수록 더 많은 믿음을 가질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런 것이 아님을 알고 있다. 믿음은 언제나 하나님의 사랑과 신실하심에 대한 우리의 반응일 뿐이다. 따라서 믿음은 선물이다. 그것은 우리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우리의 삶을 만질 때 생겨난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의지하면, 우리의 삶이 의존적인 삶으로 전락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소망하고 신뢰하는 삶으로 인도된다. 그분은 우리가 책임과 용기를 가지고 삶에 직면하도록 격려하시기 때문이다.

“여호와 만군의 하나님이여 주와 같이 능한 자 누구리이까? 여호와여 주의 성실하심이 주를 둘렀나이다.”(시 89:8)

다른 성령의 열매도 마찬가지지만, 우리가 연구할 신실함의 모본도 하나님 자신이시다. 하나님은 지구를 창조하시기 수억만 년 전이나 지금이나 한결같이 신실하시다. 그분은 과거에 그러하셨듯이 수억만 년 후에도 변함없이 신실하실 것이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대해 주목해 보라.
*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멀리까지 미친다. - “주의 성실하심이 공중에 사무쳤으며”(시 36:5)
*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확실하다. - “나의 성실함도 폐하지 아니하며”(시 89:33)
*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크다. - “주의 성실이 크도소이다”(애 3:23)
*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하늘에 기초를 두고 있다. - “주의 성실하심을 하늘에서 견고히 하시리라”(시 89:2)

1. 하나님의 신실하심의 결과로 우리에게 어떤 축복이 이르러옵니까?
고전 10:13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살전 5:23~24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살후 3:3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히 10:23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교훈: 우리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의지함으로 모든 시험을 이기고, 거룩함을 입으며, 악한 자에게서 지키실 것을 확신할 수 있다. 하나님의 약속을 끝까지 굳게 잡자.

부가적용)
하나님의 신실함은 우리가 부인할 수 없는 신앙고백이다. 다니엘이 사자 굴에 던져졌을 때 다리오 왕은 “네가 항상 섬기는 너의 하나님이 너를 구원하시리라”(단 6:16절)고 말했다. 하나님에 대한 다니엘의 신앙고백은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 대신에 자기를 경배하기를 원하는 왕에게까지도 잘 알려진 사실이었다(단 6:1∼4절). 다리오 왕도 다니엘의 삶 속에서 다니엘에게 평생 신실하신 하나님을 보고 느낄 수 있었다. 또 다니엘 자신도 하나님에게 변함없는 믿음과 헌신을 통해 자신의 신실함을 보여주었다. 하나님은 우리의 신실함을 보상해 주신다. 다니엘은 “자기의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에”(단 6:23절) 죽지 않았다. 그 결과 왕은 백성들에게 다니엘의 하나님을 믿으라고 명하였다. 다니엘은 다리오 왕이 통치하는 동안 형통한 삶을 살았다(단 6:28절). 믿는 사람의 가장 큰 특징은 신실함이다. 관계에 있어서 꾸준한 일관성이 있는 것을 신실함이라고 한다. 주님께서 주시는 우리의 마지막 칭찬도 “착하고 신실한 종아”라는 말이다. 삶의 어려움과 긴장 속에서 우리의 실낱같은 믿음이 끊어진다 해도 하나님의 신실하신 굵은 밧줄은 어떤 폭풍우라도 흔들리지 않는다. 하나님은 자신의 신실하심을 의지하도록 하기 위해 때때로 우리의 믿음을 시험하시기도 하신다.

월요일(2월 15일)
불신실함: 말세의 징조(눅 18:8)

도입)
주님은 세상 끝에는 노아시대와 같이 된다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을 무관심하고 등지고 조롱하고 불순종하고 배척한다. 하나님의 심판과 회개를 외쳐도 믿지 않는다. 오히려 세계적으로 향락과 타락이 보편화된다. 큰 홍수가 나서 다 죽기까지 깨닫지 못함같이, 주님의 심판이 임박해도 깨닫지 못한다. 성도들은 분별하고 근신하여 하나님을 사랑함과 그의 말씀대로 순종하며 살아야 한다. 이 험한 불신앙과 죄악의 시대에 거룩한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 주님께서 오시기 전까지는 인간의 불신실함과 악한 일들은 끊임없이 일어날 것이다. 우리는 이런 세상의 불신실함과 악한 일들로부터 성별하고, 그것을 책망하고 경고해야 한다. 그리고 성경의 예언의 성취를 바라보며 다가오는 재림을 소망해야 한다. 세상은 점점 죄로 충만해지고 있다(롬 11:25). 세상이 점점 악해져서 인간의 노력으로 더 이상 어떻게 손쓸 수 없을 때,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셔서 모든 것을 바꾸실 것이다. 우리는 그 날을 소망한다.

1. 누가복음 18:8을 읽으십시오. 여기 예수님의 질문에는 무엇이 암시되어 있습니까?
답:
사도 바울은 “악한 사람들과 속이는 자들은 더욱 악하여져서 속이기도 하고 속기도 하나니”(딤후 3:13)라고 기록하였다. 오늘날 사람들도 모세가 모세오경을 기록할 때나 바울이 그의 서신들을 기록할 때와 다를 바 없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 사회는 죄를 짓기가 더 쉬울 뿐 아니라 죄 짓기를 권장하기까지 한다고 주장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처한 환경은 과거 어느 때보다도 합법적으로 죄를 지을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의 타락한 인간 본성은 자연히 그것을 이용하게 된다는 것이다. 자기중심적인 성향이 끊임없이 조장된다. 광고는 우리 자신들을 기쁘게 하기 위해 끈질기게 우리의 시선을 끈다. 자기를 부인하거나 희생할 필요가 무엇이며, 남들도 다 하는 일인데 망설일 필요가 어디 있느냐고 재촉한다. 우리가 계속 듣게 되는 말은 “자신의 욕망을 만족시켜라. 충분히 그럴 자격이 있지 않은가?”이다.

2. 디모데후서 3:1~5에서 말세에 있을 특징 중 맨 첫 번째로 등장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오늘날 이러한 성향은 얼마나 공공연하게 표출되고 있습니까?
답:
사람들이 이기적인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지만, 오늘날의 세대는 사실상 이기심을 부추기고 있다는 점에서 독특하다. “일등을 추구하라.” “자신을 먼저 챙기라.” 이것이 오늘날 사람들의 부르짖음이다. 자기중심적인 성향은 무책임이라는 또 다른 현상을 낳는다. 이 세대는 다음의 성경 구절로 잘 묘사될 수 있을 것이다. “아비를 저주하며 어미를 축복하지 아니하는 무리가 있느니라. 스스로 깨끗한 자로 여기면서 오히려 그 더러운 것을 씻지 아니하는 무리가 있느니라”(잠 30:11~12). 자신의 실수나 잘못을 다른 사람의 탓으로 돌리는데, 대체로 부모의 탓으로 돌리는 경향이 강하다.

교훈: 마지막 때가 가까울수록 사람들은 하나님을 바라보는 대신 자기중심적이 된다. 우리는 세속의 물결에 휩쓸리지 말고 이타적이고 책임감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되자.

부가적용)
주님은 악한 종들, 불신실한 종들은 "주인이 더디 올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말씀하셨다. "더디온다"는 말은 '시간이 오래 걸린다', '지체한다'의 뜻을 가진 말이다. 악한 종들은 항상 주님의 재림이 먼 미래의 일이라고 생각하며 살아갈 것이다. 주님은 악한 종들이 이러한 생각을 갖고 "노비를 때리고, 먹고 마시며 취할 것"이라고 하셨다. 그들은 주님이 오실 때가 아직 멀었다고 생각하면서 맡겨진 일을 불성실하게 감당할 것이다. 폭력, 무절제, 방탕스러움 등은 청지기로서의 임무를 올바르게 감당하지 못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주님은 이러한 불신실한 종들에게 "그들이 생각하지 못한 날"과 "그들이 알지 못하는 시간"에 오실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그들을 "엄히 때리고 신실치 못한 자가 받는 징계를 그들에게 내릴 것"이라고 경고하셨다. 여기에서 "엄히 때린다"는 말(디코토메세이)은 '토막으로 자른다'는 뜻을 가진 말이다. 이 말은 구약에서 재물을 토막내는데 사용되었으며(출 29:17), 참혹한 처형을 표현하는 말로 사용되었다. 뒤에 이어지는 구절로 보면(47-48), 이 말은 아마도 매우 준엄한 형벌을 의미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맡겨진 직분을 충실하게 수행하지 않고, 불의한 삶을 사는 청지기에게 내려질 형벌은 매우 엄한 형벌이 될 것이다

화요일(2월 16일)
충성의 모본들(히 11장)

도입)
충성의 한문은 忠誠(정성 성)으로 마음 중심으로 정성을 다해 일하는 것을 의미한다. 누가 알아주면 충성하고 아무도 알아주지 않으면 충성하지 않는 수준의 충성은 옳지 않다. 하나님만 내 충성을 알아주면 된다는 믿음을 갖고 충성하여야 한다. 큰일이든, 작은 일이든 하나님이 교회를 통해, 목회자를 통해 맡겨 주신대로 충성하라. 교회가 나에게 직분을 지금 당장 주지 않는다고, 차별대우 한다고 생각지 마라. 그런 삐뚤어진 마음으로 충성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신다. 일본 고지 교회 다가오 장로는 1889년부터 네 차례나 국회의장을 지낸 분이다. 그의 사회적 신분은 대단했지만 예배일에는 항상 교인들의 신발을 정리하고 안내를 했다. 국회의장을 지낸 분이 교회에서 신발 정리를 하고 교인들을 섬겼다. 하나님의 일을 할 때에는 무슨 일이 맡겨지든 간에 충성하라. 하나님의 일은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작은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1. 충성의 모본을 보여준 인물들이 대거 나오는 히브리서 11장을 읽으십시오. 이 가운데 세 사람을 뽑아 그들이 시련과 고난과 유혹 중에도 어떻게 충성하였는지 적어보십시오. 즉 그들이 겪은 시련과 고난과 유혹은 무엇이었으며, 그들은 충성을 다하기 위해 어떤 일을 행하였습니까? 비록 환경은 다르지만, 히브리서의 인물들처럼 오늘날 우리도 마음에 간직해야 할 원칙들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1)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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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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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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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람들이 얼마나 실망하기 쉬웠을지 생각해보라. 감옥에 던져졌던 요셉을 생각해 보라. 약속의 아들을 낳기까지 수많은 세월을 기다려야 했던 사라를 생각해 보라. 애굽의 부귀영화에 유혹을 받았으나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택하였던 모세(히 11:25)를 생각해 보라. 우리는 때때로 이 사람들을 초인적인 존재로 생각하기 쉽지만, 이들도 우리와 똑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죄에 대해 취약하고 의심을 품거나 두려워하거나 타락하기 쉬운 존재들이었다. 그러나 자신들의 연약함과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충성을 나타냈으며 그들이 공언한 믿음에 따라 행동했고, 하나님에 의해 쓰임을 받아 놀라운 일들을 행하였다.

교훈: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위대한 믿음의 영웅들은 우리와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들이었으나 끝까지 충성을 다함으로 하나님께 쓰임 받을 수 있었다.

부가적용)
믿음의 선진들이 보여주었던 믿음에 대해 생각해보자. 하나님껜 믿음이란 말이 필요 없다. 용기와 결단, 의지가 필요한 것 인간이다. 믿음의 장인 히브리 11:6절을 통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믿음임을 알 수 있다. 키 크고 잘 생기고 능력 있는 돈 많은 것으로 사람을 하나님이 편애하지 않으신다. 흑인이냐 백인이냐 사람의 색깔과 조건도 필요 없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조건은 바로 믿음뿐이다. 왜 그럴까? 은혜는 하나님이 베푸시는 것이지 인간이 베푸는 게 아니다. 사랑 또한 인간의 사랑은 에로스 이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아가페이다. 인간의 사랑이 조건적이라면 하나님의 사랑은 무조건적이다. 진짜 사랑은 하나님께 있다. 거룩과 정의도 인간에게 있지 않고 하나님께 있다. 충성에 대한 참된 포인트는 무엇일까? 아벨은 믿음의 사람이다. 하나님께는 행위나 업적이 아니라 그 사람의 내면적이고 영적인 태도에 따라 달라진다. 헌금을 내도 외형이 아닌 과부의 옆전 두 닢을 보신다. 금식하는 얼굴표정보다 숨어서 기도하는 그 마음을 평가한다. 그 사람의 믿음이 있어 보여도 하나님 보시기에는 아닐 수 있다. 이처럼 하나님의 기준은 다르다. 하나님은 내적인 태도를 보기 때문이다. 살인한 사람은 없어도 분노를 품는 사람은 많다. 분노를 품는 마음은 살인과 같다. 욕심의 형태나 외형이 아닌 믿음의 내면을 보신다. 사람의 겉모양이 같을 지라도 참회하며 진실한 마음의 눈물을 흘리는 자에게 하나님은 관심을 가지신다. 진정한 충성은 그 사람의 마음의 충성에서부터 시작이 되기 때문이다.

수요일(2월 17일)
일상의 삶에서의 충성(눅 16:10)

도입)
예수님은 작은 일에 충성하는 일꾼을 좋아하신다. 예수님은 작은 일에 충성하는 일꾼에게 많은 것을 맡기신다(마 25:21). 우리는 작은 것, 작은 일, 그리고 작은 섬김을 소홀히 하거나 하찮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사소한 일은 있을지 몰라도 하찮은 것은 없다. 엄밀한 의미에서 모든 것은 귀하다. 그 이유는 작은 차이가 큰 차이를 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작은 일을 대하는 일꾼의 태도에 관심이 많으시다. 작은 일에 임하는 자세를 보면 그 사람의 미래를 알 수 있다. 일꾼의 자세는 마치 영화의 예고편과 같다. 예고편을 통해 본영화의 줄거리를 예측할 수 있듯이 일꾼이 일하는 것을 보면 그 일꾼의 미래를 예측할 수 있다. 작은 일에 충성하는 사람의 미래는 밝다. 그래서 사람을 분별할 때 재능이나 능력이 아니라 그의 자세로 분별하는 것이다. 우리의 충성은 하나님을 향한 충성과 이웃을 향한 충성이 되어야 한다. 성공적인 삶의 자세는 매일매일 자신을 반성하고 계산하는 생활을 하는 것이다. 우리는 언젠가는 하나님 앞에 서게 될 것인데, 그날에 부끄럼 없이 주님 앞에 서기 위해서는 매일매일 자기반성의 시간이 필요하다. 하나님께서는 각자에게 달란트를 주셨는데 생명, 재능, 건강, 자녀, 시간, 물질 등 이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은 달란트이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달란트를 주신 재능에 따라 충성해야 한다. 어떤 것, 얼마를 맡았는가보다는 어떻게 살고 있는가를 하나님께서는 보신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어떤 달란트, 얼마를 맡겼든지 상관하지 않고 주신 재능대로 일해야 한다.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니라.”(눅 16:10)

1. 위의 구절에 언급된 원리가 자신의 삶에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보았습니까? 결국 우리가 작은 일에 충성하면 큰 것에도 충성하게 되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답:
“인류의 가장 큰 결핍은 인물의 부족이다. 그 인물이란 매매되지 않는 사람, 심령이 진실하고 정직한 사람, 죄를 그대로 죄라고 부르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 마치 나침반의 바늘이 틀림없이 남북을 가리키듯이 양심이 그 의무에 충실한 사람, 비록 하늘이 무너질지라도 옳은 일을 위하여 굳게 서는 그런 사람들이다.”(교육, 57)
다음의 용어들은 충성의 구성요소들이다.
믿음직함 - 믿음직함이란 사람들에게 신뢰감을 주는 것을 의미한다. 최근에 누군가 나를 저버린 적이 있는가? 그때 기분이 어떠했는가? 나에게 신뢰감이 부족했다면 그것은 나의 성품에 대해 무엇을 말해 주는가?
정직 - 정직은 신뢰할만함을 뜻한다. 그것은 내가 거짓말을 하거나 속이거나 훔치지 않을 것임을 의미한다. 정직은 강인한 성품의 중요한 성분이요 매일의 삶에서 실천되어야할 요소이다.
성실 - 성실은 명예를 얻는 규칙과 같다. 만일 내가 성실하다면 나에게는 삶의 가치관이 있음을 의미한다. 여기에는 또한 다른 사람의 가치관을 존중해 주는 것도 포함된다. 성실은 품성의 중요 요소 중 하나이다.
충절 - 충절은 신의(信義)이다. 그것은 누군가 힘겨운 시기를 보낼 때 곁에 있어주는 것을 말한다. 충절이란 우정의 중요한 부분이다. 그러나 충절이 지나쳐 친구를 그릇된 방향으로 이끌 수도 있는가? 충절에도 적정선이 있는가? 충절이 지나치면 어떻게 되는가?

교훈: 만일 우리가 일상의 삶 속에서 언제나 양심에 충실하고 정직하게 행한다면 사람들에게 믿음을 심어주고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충성스런 사람이 될 것이다.

부가적용)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니라 너희가 만일 불의한 재물에 충성치 아니하면 누가 참된 것으로 너희에게 맡기겠느냐 너희가 만일 남의 것에 충성치 아니하면 누가 너희의 것을 너희에게 주겠느냐” 작은 충성 가운데 작은 섬김이 있다. 작은 섬김은 영광스러운 선교보다 어려울 수도 있다. 오스왈드 챔버스는 “한 번의 영광스러운 순교보다 작은 섬김을 지속하는 것이 더 어렵다”고 말했다. 작은 일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 되자. 작은 일에 신실 하는 것이 큰일이다. 허드슨 테일러는 “작은 일은 작은 일이다. 하지만 작은 일에 신실한 것은 큰일이다”고 말했다. 마더 테레사는 “나는 큰일을 하지 않는다. 나는 작은 일을 큰 사랑으로 한다”고 말했다. 그런 까닭에 나는 날마다 작은 일에 소홀했던 적은 없었는지 자신을 성찰하곤 한다.

목요일(2월 18일)
끝까지 충성함(마 25:1~13)

도입)
처음에는 뜨겁게 사랑하던 사람들이 나중에는 아주 사소한 문제를 가지고 매우 심하게 다투거나 헤어지는 모습을 보게 된다. 그들이 다투는 진짜 이유는 사랑 때문이다. 사랑이 식으면 문제가 늘어난다. 예수님은 늘 교회 사이에(일곱 금촛대 사이에 거니시는) 계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교회의 상황이나 형편들을 잘 알고 계신다. 에베소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기꺼이 고난을 당했고, 잘못된 가르침을 거절했기 때문에 칭찬을 받았다. 하지만 에베소 교회는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일에는 끝까지 충성하지 못했다. 하나님께 끝까지 충성하리라’는 각오를 늘 다짐하고 자신의 믿음을 굳게 세우는 사람들은 어떠한 시련의 바람이 불어와도 무너지지 않고 오로지 하나님만 의지하여 자신이 가진 신앙의 자세를 흩트리지 않는다. 그러한 사람들은 시련과 고난이 다가오면 다가올수록 오히려 더 굳고 튼튼한 믿음으로 우뚝 서서 마지막 날 성령과 신부에게 생명의 면류관을 받아쓰는 영광의 이름들이 될 것이다.

우리는 또 다른 대실망(Great Disappointment)으로 고통당할 수 있지 않을까? 예수께서 오실 또 다른 날짜를 정함으로써가 아니라, 재림이 우리가 기대하는 것처럼 지금 당장 일어나지 않는다는 이유로 너무 등한히 함으로써 과거에 못지않은 실망을 경험할 수도 있지 않을까?

1. 마태복음 25:1~13을 읽으십시오. 신랑을 기다리던 모든 이들이 잠에 빠졌었다는 사실을 주목해 보십시오. 마침내 신랑이 왔을 때 모두 깨어났지만, 이들 중 다섯은 너무 늦었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는 어떤 면에서 그와 같은 위험에 빠질 수 있습니까?
답:

2. 마태복음 24:44~50을 읽으십시오. 주인이 기대했던 것보다 늦게 오리라고 확신한 악한 종은 어떻게 자신의 생활 방식을 바꾸었습니까? 예수님의 오심이 지체되고 있다고 느끼는 우리에게 어떤 메시지를 던져 줍니까?
답:
기대했던 일들은 우리가 생각했던 만큼 속히 일어나지 않았으나 갈라디아서 6:9에 기록된 약속에서 우리는 위안을 얻는다.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갈 6:9)
21세기를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이 직면한 문제는 “하나님께서 신실하실 것인가?”가 아니다. 그분께서 약속하신 바를 신실하게 지키실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중요한 문제는 “과연 우리가 끝까지 신실할 것인가?”이다.

교훈: 하나님은 약속하신 것에 대해 신실하신 분이시다. 그분께서는 약속대로 때 맞춰 오실 것이다. 그때까지 우리는 충성스럽게 기다려야 한다.

부가적용)
하나님께서는 충성된 사람을 찾고 계신다. “많은 사람이 각기 자기의 인자함을 자랑하나니 충성된 자를 누가 만날 수 있으라”(잠 20:6) “내 눈이 이 땅의 충성된 자를 살펴 나와 함께 거하게 하리니 완전한 길에 행하는 자가 나를 수종하리로다”(시 101:16)라고 했다. 사람이 저지르는 과오 중에 가장 비열한 것이 은혜 베푼 사람에게 배신을 하는 것이다. 하지만 충성은 자기 자신을 희생하면서도 끝까지 상대방을 배신하지 않는 것을 의미하는 말이다. 세상에서 우리 그리스도인이 어떤 자세로 살아야 하는지 오늘 말씀을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 성경에 기록된 수많은 인물들을 세 종류의 사람들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첫째, 어떤 사람은 평생을 변함없이 끝까지 충성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둘째, 어떤 사람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쉽게 배신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셋째, 어떤 사람은 거기에 동조하거나 거기에 협력해 주는 사람이 있다. 잠언 기자는 충성된 사자는 그를 보낸 이에게 마치 추수하는 날의 얼음물 같아서 능히 그 주인의 마음을 시원하게 한다고 했다. 일꾼은 성실해야 한다. 착하고 충성스런 종이 있는 반면 악하고 게으른 종도 있다. 일꾼은 성실이 최고의 덕목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일꾼은 진실해야 한다. 진리의 사람은 마땅히 진실해야 한다.

금요일(2월 19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별들이 정해진 길을 따라 광활한 궤도를 운행하는 것과 같이 하나님의 경륜은 조급하거나 지체되는 법이 없다. 하나님께서는 빽빽한 흑암과 연기 나는 풀무의 표상을 통하여 아브라함에게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종노릇할 것을 보여 주셨으며 그들이 4백 년간 거기서 머무르게 될 것이라고 밝히셨다. 하나님께서는 ‘그 후에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창 15:14)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에 맞서서 바로의 거만스런 제국이 총력을 기울여 싸웠지만 헛수고였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바로 ‘그날에 여호와의 군대가 다 애굽 땅에서 나왔’다(출 12:41). 이와 같이 하늘의 회의에서 그리스도의 강림의 시간이 작정되었던 것이다. 때를 알리는 대시계(大時計)가 그 시각을 가리켰을 때 예수께서 베들레헴에 탄생하셨다.”(시대의 소망, 32)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1. 우리가 속한 문화에서 예수님께 충성하려 할 때에 도전이 되는 일들로는 어떤 것이 있습니까? 그러한 도전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요? 그런 일로 고투하고 있는 이들을 어떻게 도울 수 있을까요?

2. 지난 24시간 동안 읽고 보고 들은 것들은 나의 믿음에 도움이 되는 것들이었습니까, 아니면 믿음을 저해하는 것들이었습니까? 나의 대답 속에는 어떤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까?

3. 사람에게 충성을 다하는 것이 하나님께는 불충성이 되는 경우로는 어떤 것이 있습니까?

4. 우리가 교회에서나 가정에서 재림의 긴박성을 인식하면서 살아갈 수 있는 실제적인 방법은 무엇입니까? 기다림의 시간이 길어질수록 재림에 대해 잊어버리고 그릇된 습관과 사상의 방식으로 빠져들기가 쉬운 것이 사실입니다. 특히 교회를 다닌 지 오래 된 이들이 어떻게 하면 열정적으로 재림의 약속을 붙잡을 수 있을까요?

5. 이번 주 교과를 통해 새롭게 깨달은 영적 교훈이나, 한 주일을 살아가면서 꼭 실천하고 싶은 일은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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