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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과 - 성령의 열매인 양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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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등불과기름 작성일10-02-07 22:02 조회5,52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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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2월13일 안식일 (일몰: 오후 6시 9분)

제7과 성령(聖靈)의 열매인 양선(良善)

◈ <양선(良善)에 대한 이야기>
'양선(良善)'을 글자 그대로 풀면 '어질고 착하다'는 뜻입니다.
영적(靈的)으로는 성령 안에서 선을 추구하는 마음, 곧 진리 안에서 선을 좇아 행하는 마음입니다.
이 양선의 열매가 온전히 맺히면 흠도 티도 없이 깨끗한 주님의 마음이 되지요.
세상 사람들이 선악을 분별하는 기준은 '양심'입니다.
성령의 열매인 양선(良善)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이 '양심' 에 대해 알아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기 양심에 따라 '이것은 선하다, 혹은 악하다' 분별하고 평가합니다.
스스로 양심에 비춰 거리낌 없이 살았다면 나름대로 선하고 의로운 사람이라고 자부하지요.
그런데 이 양심은 사람마다 다릅니다. 양심이 만들어지는 과정이 각각 다르기 때문입니다.

양심이란 '본성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선악을 판단하는 기준'입니다.
사람의 본성은 어떤 기를 받고 태어나는가,
또 어떤 환경에서 자라는 가 등에 따라 달라지지요.
선한 부모의 기를 받고 태어난 자녀는 비교적 본성이 선합니다.
또 태어나면서부터 좋은 환경 속에서 선한 것을 많이 보고 듣고 자란 사람은
양심이 선하게 만들어지기가 쉽지요.
반면, 악한 부모의 기를 받고 태어나서 악한 것을 많이 보고 듣고 접하면 본성과 양심이 악해지기 쉽습니다.

예를 들어 정직을 중요하게 교육받은 아이는 작은 거짓말을 하고도 양심에 가책이 되어 어쩔 줄을 모릅니다. 늘 거짓말하는 사람들 속에서 자란 아이는 습관적으로 거짓말을 하면서도 태연하지요.
양심이 그만큼 악에 물들어 있어서 '그럴 수도 있지' 하는 정도로 양심에 가책을 받지 않는 것이지요.
또 똑같은 부모와 환경 속에 교육을 받아도 아이들이 교육을 받아들이는 결과는 다릅니다.

어떤 아이는 부모가 가르치는 대로 잘 순종하지만 어떤 아이는 자기주장이 강해서 가르치는 대로 순종하지 않으려 하지요. 그렇다면 같은 부모 아래서 자랐다 해도 이 두 아이의 양심은 다르게 만들어질 것입니다. 이렇게 사람마다 본성이 다를 뿐 아니라 시대와 지역에 따라서도 교양과 지식, 가치관이 다릅니다. 어떤 가치관 아래에서 성장하는가에 따라서도 사람들의 양심은 달라집니다. 이 사회와 저 사회의 가치관이 다르며 100년 전과 50년 전, 또 오늘날의 기준이 다르지요. 나라마다 다르고요.

예를 들어,
노예를 부리던 시대에는 노예에게 매질을 하고 강제로 일을 시켜도 그것이 잘못이라고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또 30년 전만 해도 우리 사회에서는 여성들이 요즘처럼 몸을 다 드러내는 복장으로 방송에 나오면 큰일 나는 줄 알았습니다. 이렇게 양심은 사람마다, 지역과 시대마다, 서로 달라집니다.

그래서 나름대로 양심적이라 생각하는 사람도 결국 '자기 보기에 선한 것' 을 추구할 뿐이지 절대적으로 선한 사람이라 할 수는 없지요. 그런데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에게는 선악과 시비를 구별하는 기준이 항상 동일합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히 변함없는 진리, 곧 하나님의 말씀이 그 기준이기 때문이지요.
하나님이 바로 양선의 근원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진리'를 기준 삼아 행하려는 마음이 바로 양선입니다.
성령의 소욕을 좇아 선을 추구하는 마음이지요.
그런데 선을 추구하는 마음만 간절하다 해서 양선의 열매를 맺었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선을 간절히 사모하는 그 마음이 행함으로 드러나야 '열매'가 맺혔다 할 수 있지요.

󰁾 마태복음 12장 35절 전반절에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낸다" 했습니다.
또 잠언 22장 11절에는 "마음의 정결을 사모하는 자의 입술에는 덕이 있으므로 임금이 그의 친구가 되느니라." 했습니다. 이런 말씀들처럼 진정으로 선을 추구하는 사람은 외면적으로도 자연스럽게 선이 배어나옵니다.
어디를 가도 누구를 만나도 선한 말과 선한 행실로 덕과 사랑을 베풀지요.
그래서 향수를 뿌린 사람에게서 좋은 향기가 나듯이 양선한 사람에게서도 그리스도의 향기가 납니다.
여러분이 잘 분별해 보시기 바랍니다.
어떤 사람들은 영으로 들어가기를 사모하여 영적인 사람들을 열심히 따르며 개인적인 사귐도 갖기를 원합니다. 진리를 듣고 배우기를 즐겨하며 은혜도 잘 받고 감동의 눈물도 잘 흘리지요.
그러나 이런 사모함만 있다 해서 영으로 들어가는 것은 아닙니다.
보고 듣고 배웠으면 그것을 반드시 자기 마음에 이뤄야 하고 직접 영적인 행함을 실천해야 하지요.
예를 들어 선한 사람 가까이에 있는 것만 좋아하고 선하지 않은 사람은 멀리 한다면 이것이 정말 선을 사모하는 마음일까요? 혹은 선에 대해서 듣기는 열심히 듣고 자신의 부족함을 깨우치기도 하는데 막상 선을 행하려는 노력이 부족하다면 정녕 선을 사모한다 할 수 있겠는지요?
혹여 여러분 중에 선을 사모한다 하면서 직접 선을 행동으로 실천하는 모습이 부족하지 않은지 잘 점검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성령 안에서, 진리 안에서 선' 을 좇는 양선이 어떤 것인지 지금부터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사실 양선이라는 것은 어찌 보면 매우 광범위한 개념이지요.
하나님의 속성 자체가 선이시기 때문에 성경의 말씀 전반에 그 선이 배어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양선의 향을 진하게 느낄 수 있는 구절 중에 하나가 빌립보서 2장 1~4절 말씀이지요.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 사랑에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 마음을 품어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아볼 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케 하라"
주 안에서 선을 추구하는 사람은 내 생각과 내 성품에 안 맞는 일에도 마음과 뜻을 모아줍니다.
겸손하고 자신을 드러내고자 하거나 인정받으려 하는 허영심도 없습니다.
자신의 일을 성실히 감당하는 것은 물론이고, 다른 사람의 일까지도 마음을 써 줍니다.

누가복음 10장에 보면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가 나옵니다.
어떤 사람이 여행길에 강도를 만나므로 거의 죽어 가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이때 한 제사장이지나가다가 이렇게 죽어 가고 있는 사람을 보았지만 제사장은 그냥 피해서 가 버렸습니다. 한 레위인도 그를 보았지만 그냥 지나쳐 버렸지요. 제사장이나 레위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잘 알고 하나님을 열심히 섬긴다는 사람들입니다. 백성들보다 율법을 많이 알고 나름대로 하나님을 잘 섬긴다는 자부심이 있는 사람들이지요. 그러나 이들은 정작 결정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해야 할 순간에 그 행함을 보이지 못했습니다. 물론 돕지 못할 만한 이유가 있었다 하겠지요. 그러나 양선의 마음이 있다면 자신의 도움이 절실하게 필요한 사람을 외면하고 가 버릴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후에, 한 사마리아 사람이 그곳을 지나가다가 강도 만난 사람을 보았습니다.
사마리아 사람은 그를 불쌍히 여겨 가까이 다가갔고 상처를 싸매 주었지요.
그리고 짐승에 태워서 주막에 데려가 돌봐 준 후에 주막 주인에게 그를 돌봐 달라고 부탁합니다.
그 비용은 자신이 돌아오는 길에 지불하겠다고 약속까지 하면서 떠났지요.
사마리아 사람이 이기적인 입장에서 생각한다면 이렇게까지 해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내 갈 길도 바쁜데 관계도 없는 사람의 일에 끼어들었다가는 자기 시간과 물질을 손해 볼 수도 있습니다.
또 대략적인 치료는 해 줄 수도 있지만 굳이 앞으로의 비용까지 대겠다고 하면서
주막에 부탁해야 할 책임도 없지요.

그러나 그에게는 양선의 마음이 있었기에 죽어 가는 사람을 외면할 수가 없었습니다. 내 물질이나 시간에 손해를 본다 해도 아무리 갈 길이 바쁘다 해도 내 도움이 절실하게 필요한 사람을 차마 버리고 갈 수는 없었지요. 자기가 할 수 없는 상황에서는 다른 사람에게 부탁해서라도 돕고자 했습니다. 만약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 해서 그냥 지나쳤다면 이 사마리아 사람의 마음에는 그 일이 두고두고 무거운 짐으로 남았을 것입니다.

"그 다친 사람은 어찌 되었을까, 내가 손해를 보더라도 그를 구해 주었어야 하는데 하나님께서 보고 계시는데 내가 어찌 그럴 수 있었는가," 이렇게 계속 자책하게 되지요. 마치 누군가가 발목을 붙잡고 끌어당기는 것처럼 선을 택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는 마음 그래서 범사에 선한 것을 택해 나가는 마음 바로 이것이 양선입니다.

양선의 빛깔이 강하게 드러나는 또 다른 성구는 마태복음 12장 19~20절 말씀입니다.
이는 우리 예수님의 양선에 대한 내용이지요. 먼저 19절에
"그가 다투지도 아니하며 들레지도 아니하리니 아무도 길에서 그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 했습니다. 흔히 "저 사람은 참 착하다, 참 선하다",
이런 말을 듣는 사람들을 보면 누구와도 걸리거나 부딪히는 일이 없습니다.
"아무도 길에서 그 소리를 듣지 못했다" 는 말씀처럼 "거기 있는 줄도 몰랐다" 할 정도로 조용하여 다투는 일도 없지요. 상대의 티나 허물을 드러내어 말하지 않습니다.
자신을 드러내어 높임 받으려 하지도 않고 경우에 맞지 않는 일을 당한다 해서 불평하지도 않습니다.

다음으로 20절에는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한다" 했습니다.
일반적으로 나무나 화초를 키울 때 상한 잎이나 가지가 매달려 있으면 깨끗하게 잘라내어 버리기 마련입니다. 또한, 심지가 꺼져 갈 때는 그 빛도 밝지 않고 그을음이 심해집니다.
그러니 사람들은 아예 불을 꺼 버리지요. 그러나 양선의 마음이 있으면 상한 갈대도 꺾지 않고 꺼져 가는 심지도 끄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만의 하나라도 회생할 가능성이 있다면 차마, 단호하게 그 생명을 끊어버리지 못하므로 어찌하든 살 길을 열어 주고자 하지요. 여기서 '상한 갈대' 란, 영적으로 '세상의 죄와 악으로 가득 찬사람' 을 말합니다. '꺼져 가는 심지' 란 '마음이 악으로 심하게 물들어서 그 영혼의 등불이 꺼져 가고 있는 사람' 이지요. 이런 상한 갈대와 꺼져 가는 심지 같은 사람들은 주님을 영접하기가 어렵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 해도 그 행함을 보면 세상 사람과 다를 바가 없고 오히려 성령을 거역하며 하나님을 대적하기 쉽지요. 예수님 당시에도 그 놀라운 권능을 보면서도 여전히 믿지 않고 악을 발하며 성령의 역사를 대적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런 사람들도 끝까지 믿음으로 바라보며 구원받을 기회를 열어 주셨지요.
오늘날 교회 안에서도 종종 상한 갈대와 같고 꺼져 가는 심지와 같은 영혼들이 있습니다.
입으로는 '주여 주여' 하면서도 여전히 죄 가운데 사는 사람, 심지어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믿음이 연약하므로 시험 환난에 넘어져서 교회에 나오지 못하는 경우도 있고, 교회 안에서 어떤 악을 행하고 나서 스스로 민망하고 부끄러워서 교회를 떠나는 경우도 있습니다.

양선의 마음이 있으면 이런 영혼들에게도 먼저 손을 내밀어 줄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교회 안에서 사랑받고 인정받기 원하는데 그렇게 되지 않으니 오히려 악을 발하기도 합니다. 성도들의 사랑받는 사람들, 영적으로 앞서 가는 사람들을 시기하여 그들을 비난하거나 험담하지요. 또 자신이 주도하는 일이 아니면 마음을 함께 모아 주지 않고 사사건건 트집을 잡으려 들기도 합니다. 이럴 때도 양선의 열매가 맺힌 사람은 이런 악을 발하는 사람들을 품어 줍니다. 굳이 시비를 따져 상대의 잘못을 드러내거나 상대를 꺾어 버리고자 하지 않습니다. 진실한 마음으로 선대하여 그들을 녹이고 오히려 감동을 주는 것이 양선이지요.

물론 상대가 너무나 악하므로 내 편에서 아무리 선하게 대해도 결국 사망의 길로 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런 경우라도 내 편에서 먼저 '여기까지만 참자' 하는 한계를 두고 그 선을 넘으면 외면해 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살리고자 애쓰는 것이 양선의 마음이지요.

마지막 심판의 날이 이르기 전까지는 어찌하든 구원을 받을 수 있도록 계속해서 기회를 주고 소망 중에 바라봐 주는 것입니다.

여기까지 들으시면서 조금 혼동이 되는 분들도 있을 수 있습니다.
진리 안에서 선을 좇아 행하는 양선이 다른 영적인 덕목들과 어떻게 구별되는지 이해가 잘 안 가는 것이지요. 곧 앞서 설명한 내용 중에 사마리아 사람이 강도 만난 사람을 도와준 것은 구제와 긍휼의 마음이 아닌가, 또 다투지도 않고 들레지도 않는다면 화평과 겸손의 마음이 아닌가, 그렇다면 이런 것들이 다 양선에 포함 되는가 이런 의문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물론 구제와 긍휼도, 자비, 화평, 겸손도 이 각각이 결국 선에 포함되는 덕목입니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선' 은 하나님의 속성 자체이기 때문에 그 영역이 광범위하지요.
그러나 '양선' 에서 더 부각되는 측면은 그러한 선을 행하고자 하는 마음과 실제로 선을 좇아 행할 수 있는 힘에 대한 것입니다.

상대의 어려움을 불쌍히 여기고 도와주는 '긍휼' 에 초점을 두는 것이 아니라 마땅히 긍휼히 여겨야 할 상황에서 그냥 지나칠 수 없었던 선의 마음을 말하지요.
또 다투지도 들레지도 않는 것은 물론 화평의 마음이요 겸손한 마음입니다.
그러나 이때도 양선에서 설명하는 것은 선하기 때문에 상대와 화평을 깰 수 없는 마음, 인정받으려고 들레기보다는 내가 낮아지더라도 겸비한 것을 더 좋아하는 선한 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다른 예를 들어, 충성을 한다 해도 양선의 열매가 맺히면 어느 한 분야만 아니라 온 집에 충성하게 됩니다. 만약 자신이 감당해야 할 분야 중에 하나라도 소홀히 하면 그로 인해 고통 받는 사람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잘 이뤄지지 않을 수도 있지요. 선한 마음이 있으면 스스로 불편해서라도 이렇게 놔둘 수가 없기 때문에 어찌하든 온 집에 다 충성하려고 애쓰는 것입니다. 그 밖에 여러 가지 항목들도 다 이렇게 적용하시면 이해가 될 것입니다. 악한 사람은 악을 발하지 않으면 마음이 불편합니다.
상대에게 상처를 주거나 힘들게 한다 해도 일단 자신이 원하는 것을 이뤄내야 평안합니다.
그러나 선한 사람은 이와 반대입니다. 오히려 선을 좇지 못했을 때는 자기가 손해를 본 것보다 더 불편하며 두고두고 마음이 쓰이지요.
그래서 내가 좀 손해를 보더라도 남들에게 폐를 끼치지 않으려 하고 내가 좀 불편하더라도 규칙을 지키려고 합니다. 내가 고기 먹을 믿음이 된다고 해도 상대를 실족시키지 않기 위해서라면 평생 고기를 먹지 않을 수도 있다는 바울의 고백에서도 이런 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내가 얼마든지 누릴 수 있는 일도 상대를 불편하게 한다면 내가 누리지 않는 편이 더 마음이 편안하고 행복한 것입니다. 사람에게도 민망한 일을 하지 못하는데 하물며 자기 안의 성령께서 탄식할 일은 도무지 할 수가 없습니다. 이런 사람이 어떻게 악을 행하겠습니까?

이렇게 범사에 선을 좇아 행하는 사람이 바로 양선의 열매를 맺은 사람입니다.
여러분도 양선의 열매를 온전히 맺으면 우리 주님의 형상을 이루어 가게 됩니다.
소자를 실족시키거나 남에게 폐를 끼치는 행동을 하지 않고 외면적으로도 선과 겸손이 풍겨납니다. 주의 교양으로 범사에 존경받을 만하며 걸음걸이나 몸가짐, 언어 습관 등이 다 온전해지지요. 누가 봐도 존중할 만한 아름다운 모습으로 그리스도의 향을 발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속히 양선의 열매를 온전히 맺으므로 세상에 그리스도의 향을 발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범사에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하나님의 형상을 꼭 닮은 자녀들로 인정받으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일요일(2월 7일)
<하나님은 선(善)하시다(출 33:19)>

◈ 선(善)하다는 단어(單語)나 개념은 오직 하나님에게만 속한다.
그 이유는 선(善)과 악(惡)의 기준은 사람들마다의 식견(識見)의 척도(尺度)로 판단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척도가 되는 시금석(試金石)은 오직 천지만물(天地萬物)을 창조하시고 운행하시는 창조주 의
속성(屬性)외에는 그 근거를 둘 수가 없다.
하나님의 선하심은 그분의 창조사역과 구속사역(救贖使役)에 가장 잘 나타났으며,
무엇보다도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成肉身)과 십자가(十字架)의 희생에서 절정을 이루었다.
또한 인간을 보호하시기 위하여 주신 십계명과,
죄로 멸망 받을 인간을 구속(救贖)하시기 위한 십자가에서 증명할 수가 있다.

★ 하나님께서 주신 십계명은 금지 사항들은 순종할 경우 행복에 대한 확실한 보증이 된다.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받아들여지게 될 때, 영원한 세대를 통하여 우리에게 기쁨을 가져다줄 품성의 순결을 이루어준다. 그것은 순종할 때에 보호벽이 된다. 우리는 그 안에서 의의 불변하는 원칙들을 인간에게 계시하심으로 그들을 범법의 결과인 악으로부터 지켜주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본다."*”(교리, 220)

★ “하나님의 율법은 사람에게 구속력이 없다고 가르치는 많은 사람들이 그 율법의 법도를 순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것이 사실이라면, 아담은 왜 범죄의 형벌을 당하였는가? 우리의 최초의 부모의 죄는 이 세상에 죄책과 슬픔을 가져왔으며, 하나님의 선하심과 자비하심이 없었더라면 인류는 속절없이 절망 가운데 빠졌을 것이다. 아무도 스스로 속이지 말라. “죄의 삯은 사망이요”(롬 6:23). 인류의 시조가 범죄하여 사형의 선고를 받을 때와 똑같이 오늘날도 하나님의 율법을 범하고 벌을 받지 않을 수는 없다.”(부조, 61)

★ “하나님께서는 “큰 권능과 강한 손으로”(출 32:11) 당신의 택한 백성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셨다. “또 그 종 모세와 그 택하신 아론을 보내시니 저희가 그 백성 중에 여호와의 표징을 보이고 함 땅에서 기사를 행하였도다. “이에 홍해를 꾸짖으시니 곧 마르매 저희를 인도하여 바다 지나기를 광야를 지남 같”(시 105:26, 27; 106:9)이 하였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아름다운 땅 곧 당신의 섭리에 따라 그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피난처로 인도하시고자 그들을 노예 상태에서 구출하셨다. 그 분께서는 그들을 당신께로 인도하사 그의 영원한 팔로 두르고자 하셨다. 반면에 그들은 하나님의 선하심과 자비하심에 대한 보답으로 이 땅에서 그분의 이름을 높이고 영화롭게 해야만 하였다.”(선지, 16)

★ 하나님의 선하심과 자비하심을 옳게 평가할 수 있게 하기 위하여 예수께서는 선한 사람에게나 악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주시는 고요히 내리는 이슬과 촉촉이 적시는 소낙비와 밝은 햇빛에 청중들의 관심이 집중되도록 하셨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인간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관심을 사람들이 더욱 충분히 깨닫기를 원하셨다.”(소망, 524)

★ “십계명의 율법은 금제(禁制)의 면에서보다도 자비의 면에서 고찰되어야 한다. 율법의 금제성(禁制性)은 순종에 따르는 행복의 확실한 보장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받아들일 때에 율법은 영원한 세대를 통하여 우리에게 기쁨을 줄 품성의 순결성을 이루도록 역사할 것이다. 순종하는 이들에게 율법은 보호의 장벽이 된다. 우리는 이 율법 안에서 인간에게 의의 불변의 원칙을 나타내시고 범죄의 열매인 악에서 인간을 보호하시려고 노력하시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바라보게 된다.”(1기별, 235)

★ “안식일은 사람을 위하여 만들어 졌으며, 그의 마음을 세속적 노동에서 돌이켜 하나님의 선하심과 영광을 명상함으로 그에게 축복이 되도록 제정되었다.”(1보감, 279)

★ “우리는 어떻게 우리 스스로 하나님의 선하심과 그분의 사랑을 알 수 있는가?
시편 기자는 우리에게<듣고 알 것이 아니고, 읽고 알 것이 아니고, 믿고 알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시 34:8)라고 말한다.
다른 사람의 말에 의존하는 대신에 그대들 스스로 맛을 보라.”(5증언, 221)

★ “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선하심과 자비와 인내하심에 대해 참으로 이해하였다면, 그분의 성호에 명예와 영광을 돌리는 노래가 우리의 입술에서 더 많이 흘러나왔다면…….더 큰 능력이 나타날 수 있었다. 우리는 영혼의 열기를 더 진작시켜야 한다. 주께서 말씀하신다.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시 50:23).”(6증언, 62)

★ “모든 소리는 하나님의 음성과 조화된 음악이었다. 죄가 하나님의 완전한 작품을 망가뜨렸다는 것을 보여 주라. 가시와 엉겅퀴와, 슬픔과 고통과 죽음은 다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의 결과임을 알려 주라. 비록 죄의 저주로 손상되었지만 지구가 아직도 하나님의 선하심을 드러내고 있음을 그들에게 말해 주라. 푸른 들, 키 큰 나무들, 빛나는 햇살, 구름, 이슬, 밤의 적막함, 밤하늘에 빛나는 별들, 아름다운 달, 이 모든 것들이 창조주를 증거 한다. 떨어지는 빗방울 하나, 감사할 줄 모르는 세상을 비추는 한줄기의 빛이라도 하나님의 사랑과 오래 참으심을 증거 하지 아니함이 없다.”(6증언, 358)

★ “하나님의 자녀라고 공언하는 모든 사람에게 나는 시편 105편, 106편, 107편에 기록된 이스라엘의 역사를 깊이 생각하도록 권하는 바이다. 이 성경 말씀을 깊이 연구함으로써 우리는 우리 하나님의 선하심과 자비하심과 사랑을 더욱 깊이 깨닫게 될 것이다.”(8증언, 107)

★ “하나님의 선하심과, 긍휼과 사랑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모세에게 선포되었다. 이것은 하나님의 품성이었다.” (목사, 362)

★ “우리의 시조(始祖)는 뱀이 그들에게 아무런 사랑의 징표도 주지 아니하였는데도 저희가 생각한 대로 뱀의 말을 믿기로 선택했다…….하나님을 믿고 신뢰하는 대신에 하와는 비루(鄙陋)하게도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지 않고 사단의 말을 중히 여겼다.”(살아, 37)

★ “하나님의 선하심을 의심하는 것은 마치 나쁜 씨와 같아서 죄와 재난의 쓴 열매를 맺게 된다. 그러므로 그의 본성이 완전히 드러나기까지 악의 장본인을 그대로 놔두셨던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긴 세월을 통하여 악의 역사를 바라보아야 하는 고통을 견디어 오셨다. 그리고 그분은 사람이 마귀의 악선전에 미혹되도록 버려두지 않으시고 오히려 무한한 갈바리의 선물을 주셨다. 이는 귀한 곡식이 뽑힐 위험이 있기 때문에 가라지를 뽑을 수 없었던 것이다.”(실물, 72)

★ “주님께서는 다른 어떤 목적보다도 인간들에게 자비와 사랑, 그리고 피조물들의 구원과 행복을 위해 준비하시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나타내 보이시려고 인성을 쓰셨던 것이다. 그분께서 돌아가신 것도 바로 이 목적을 위한 것이었다.”(안교, 108)

★“ 하나님의 선하심, 자비, 공의 및 당신의 교회에 나타내신 사랑을 바라봄으로써 이 세상이 당신의 품성에 대한 상징을 보게 하셨다. 이처럼 하나님의 율법이 생애로써 예증될 때 세상 사람들까지라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두려워하며 공경하는 자들이 다른 사람들보다도 훨씬 뛰어나다는 것을 인정하게 될 것이다.”(부모, 321)

★ “ 만물은 여전히 하나님의 선(善)하심에 대하여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자녀, 47)

★ “하나님의 선하심과 자비와 사랑에 탐닉될 때, 진리에 대한 지각은 훨씬 더 예민해지고, 순결한 마음과 명석한 사상을 얻고자 하는 열망은 더욱 높고 고상해질 것이다. 거룩한 사상의 순결한 분위기 가운데 거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과 교통함으로 변화를 얻게 된다. 진리는 너무도 크고, 너무도 원대하고, 너무도 깊고, 너무도 넓기 때문에 자아를 잃어버리게 된다. 마음은 부드러워져서 겸손과 친절과 사랑으로 바뀌어진다.”(치료, 465)

◉ <우리의 선(善)하신 창조주(創造主)와 구속주(救贖主)>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시고, 사람의 마음을 지으신 것은 기이한 일이다. 하나님의 영광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신 창조와 구속 가운데 나타나도록 되어 있다. 한 영혼의 가치는 천하보다도 귀하다. 하나님은 인간의 모든 정신 기능이 하나님의 마음과 같게 하시려고 사람을 창조하셨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존재의 창조주시요, 우리의 구속주(救贖主)이시기도 하다.”(성경주석, 6권, 1105)

◉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그분의 창조의 손길에서 풍성히 느낄 수 있다.
그러나 그분의 선하심이 가장 명백히 드러난 곳은 예수님의 십자가이다.

월요일(2월 8일)
<모든 사람이 죄(罪)를 범(犯)하였음. (롬 3:12~20)>

◈ 1> 한 교회에서 17년 동안이나 기쁜 마음으로 꽃꽂이를 자비로 해왔다.
그런데 꽃꽂이 젊은 강사님이 어느 날부터 같은 교회에 출석을 하게 되었고,
얼마 후 17년 동안이나 꽃꽂이 봉사를 하던 집사님이 가정의 일로 안식일에 결석을 하게 되었다. 마침 새로 오신 꽃꽂이 강사가 교회의 사정을 알고 멋지게 안식일에 꽃꽂이 봉사를 했고, 교회의 많은 교우들이 꽃꽂이 에 대한 칭찬이 식을 줄을 모르고, 심지어 어느 성도(聖徒)들은 계속해서 꽃꽂이 봉사를 요구하기도 했다.
이를 지켜보던 17년 동안 즐거운 마음으로 꽃꽂이 봉사를 하던 집사님은
은근히 새로 온 꽃꽂이 강사가 미워지기 시작했고 ……. 점점 교회에 출석하기도 싫어졌다.

2> 교회에 큰마음을 먹고 멋진 피아노를 헌물 하였다.
교회에 갈 때 마다 기뻤고 자부심이 대단했다.
세월이 몇 년 흘렀고 피아노는 낡았고, 마침 재력이 있는 성도가 그랜드 피아노를 헌납하겠다고 한다.
먼저 피아노를 버리고 새로운 피아노로 교체한다고 직원회의에서 결의했고,
먼저 있던 피아노를 교회 밖에 방치해서 고물취급을 하고 있다.
전에 헌물(獻物)한 장로(집사)님의 마음은 어떨까? 왜 섭섭하고 기분이 언짢을까?

3>. 갓난아기가 연년생 동생을 보고 자라면서
막내에 엄마가 관심을 더 많이 주면 어린 아이이지만 동생 꼬마를 할퀴고 때린다. 왜 그럴까?

4> 말씀도 많이 보고, 설교도 잘하고, 정말로 신앙심이 대단 하다고 자부하는 재림성도님들이.
교회의 매년 치루는 재직 선거를 마치고 나면 섭섭한 마음과 불쾌한 행동들이 왜 생겨날까? 연합회, 합회, 교회 할 것 없이 매년 반복되는 목회자 인사인동이 있고난 후에의 후유증은 왜 생길까?

󰁾 교과 공부에서 한번쯤 깊이 생각하고 나 자신에게 적용해 봅시다. ^^

◉ <극복되어야 할 악(惡)한 성향(性向)>
“마음은 연단을 받고 교육을 받으며 훈련을 받아야 한다. 우리는 타고난 기질과는 반대되는 방법으로 하나님을 위해 봉사해야 하기 때문이다. 반드시 정복되어야 할 선천적으로, 후천적으로 악으로 기울어지는 기질들이 있다. … 우리는 유혹을 저항할 수 있게 해 줄 생각의 습관을 형성해야 한다. 우리는 위를 향해 쳐다보는 법을 배워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의 원칙들, 하늘처럼 높고, 영원을 획득하는 원칙들을 우리는 일상생활과 관련지어 모든 면에서 이해해야 한다. 모든 행동, 모든 말, 모든 생각은 이 원칙들과 일치되어야 한다.”(교회증언, 8권, 314)

◉ 성경에 기록된 대로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므로 인간의 내면은 부패되어 있다.
흉악한 범죄자들도 겉으로는 친절한 행동을 보여줄 수 있다.

화요일(2월 9일)
<하나님의 선(善)한 율법(律法) (롬 7:7~12)>

◈ 율법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의(義)와 행복을 도모하기위해 선(善)한 의도로 주신 것으로 근본적으로 악(惡)한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율법이 인간을 정죄하는 기능을 감당할 수밖에 없는 것은 바로 타락한 인류의 죄 된 본성과 범죄 행위 때문이다. 율법자체는 선(善)도 악(惡)도 아니며 다만 선과 악의 분별(分別)기준만 되는 것이다. 즉 악하면 그 죄가 악한 것이지 죄를 죄라고 하는 율법이 악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율법은 악을 악으로 보여줌으로서 선한 기능을 다하고 있는 것이다.

◈ <율법(律法)과 복음(福音)>
○ <율법(律法)>
율법은 글자 그대로 법이다.
율법이 인간에게 주어짐으로 해서 인간은 자기가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게 됨과 동시에
죄의 책임을 져야 하며 전적으로 타락한 힘으로는 도저히 구원(救援)받을 수 없음을 깨닫게 되었다.
그 결과 율법은 인간이 죄인임을 드러내었고
형벌을 요구함으로서 구원(救援)의 필요성을 각성시켰으나 구원(救援)을 주지는 못했다.

○ <복음(福音)>
복음은 율법을 통하여 인간이 죄인임을 보여주신 하나님께서는 이제 예수님의 희생을 통하여 무조건적 용서와 사랑을 실천하셨다.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율법이 예수님이 왜 우리의 구주(救主)이며 예수님의 구원(救援)이 왜 필요한 것인지를 로마서를 통하여 가르쳐 주고 있으며 이처럼 인간의 구원이라는 공통된 목적을 위하여 각각 다른 역할을 수행하여 상호 보완했던 것이다. 따라서 냉엄하며 비정한 듯이 보이는 율법에는 사실 복음이 소개해주는 구원의 사랑이 내포되어 있으며 복음의 뜨거운 희생과 사랑 뒤에는 그 복음을 믿기를 거부하는 자를 향한 율법의 경고가 있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 율법과 복음의 각각 다른 역할은 도표로 설명해 보자.

구분 : 율법조문의 율법 생명의 복음
목적 : 죄를 깨달음(롬 3:20) 구원 (갈 1:4)
결과 : 심판의 요구 (갈 3:10) 율법의 요구를 충족(갈 3:13)
속성 : 공의 (갈 3:19) 사랑 (요일 4:9-10)
의의방법 : 자기의 의(義)(갈 3:12) 위로부터 오는 하나님의 의(義)(롬 8:30)
상호관계 ; 원인 (갈 3:24) 결과 (갈 3:25)
형식 : 율법 조문, 형식적 내적, 영적 (히 8:10)
성격 : 예표 적, 그림자 적,
일시적이며 준비 적 실체적, 완성적, 영구적 (히 9:15)
대상 : 혈통적 이스라엘 (출 19:5-6) 영적 이스라엘 (롬 9:6-13)

◉ 구원(救援)의 계획에 있어서 율법은 중요한 역할을 한다.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해주고, 구주(救主)에 대한 필요성을 느끼게 한다.
“이로 보건대 율법(律法)도 거룩하며 계명(誡命)도 거룩하며 의(義)로우며 선(善)하도다.”(롬 7:12)
많은 이들이 율법을 부담스러운 금지조항으로 생각하여 할 수만 있으면 지키지 않으려고 피한다.
그러나 다윗은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의 뜻 행하기를 즐기오니 주의 법이 나의 심중에 있나이다.”(시 40:8)라고 노래하였다.

◉ <율법의 존엄성(尊嚴性)은 지속(持續)됨 >
“구속의 경륜이 끝날 때까지 율법은 그 존엄성을 견지하면서 계속하여 죄인으로 하여금 죄를 깨닫게 한다. 그리고 죄인은 그리스도의 속죄를 믿음으로 구원받을 수 있다. … 율법은 과거의 모습 그대로 거룩하고 의로우며 선한 그대로 남아 있다”(재림교 성경주석, 6권, 1076)

◉ 하나님의 율법에는 우리를 향한 그분의 선하신 뜻이 기록되어 있다.
그분께서 금하신 것이라면 분명히 우리에게 유익하지 않을 것임을 믿자.

수요일(2월 10일)
<양선(良善) 안에서 행(行)함. (렘 13:23)>

◈ 흑인인 구수인 곧 에티오피아 사람들의 피부가 결코 희어질 수 없으며, 표범이 그의 반점을 제거할 수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교만으로 인한 인간들의 죄악 또한 돌이킬 수 없게 되었다는 뜻이다.
죄로 오염된 인간이 자신의 의지로는 죄악에서 돌이킨다는 것은 참으로 불가능 하다. 하나님의 창조원리를 변개할 수 없듯이 인간들의 죄악은 치명적인 것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능력으로는 가능하다. 왜냐 하면 아무리 인간의 성품이 죄의 유전으로 악해졌다고 하더라도 십자가에서 흘린 그리스도의 피는 그 모든 더러움을 눈보다 더 희게 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사 1:18; 벧전 1:18-19)

◉ 양선(良善)은 성령의 은사(恩賜)이며 하나님의 선물(膳物)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삼가므로 깨끗한 행실을 갖게 된다.
우리는 스스로 선을 행할 능력이 없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는 선을 행할 수 있다.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롬 7:18)
사도바울의 탄식처럼 우리 인간은 그 누구도 선하다고 할 수가 없다,
오직 의로운 사람으로 변화 될 수 있는 비결은 오직 성령(聖靈)안에서 행하는 것뿐이다.

◉ <마음의 동기를 살피시는 하나님 >
“우리의 매일의 행위가 양심이 인정하는지 혹은 정죄하는지를 곰곰이 생각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품성의 완성에 이르고자 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이다. 선행이라고 여겨지는 많은 행위들도 면밀히 살펴보면 그릇된 동기에서 나온 것들이 많음을 알게 된다. 많은 이들이 그들이 가지고 있지 않은 덕성으로 칭찬을 듣는다.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는 동기를 살피신다.”(교회증언, 2권, 511)

◉ 우리가 경건하고 의로운 사람으로 변화될 수 있는 비결은 성령 안에서 행하는 것인데, 성령님은 언제나 말씀의 수레를 타고 우리에게 오심을 기억하자.

목요일(2월 11일)
<선(善)한 행위를 나타냄(엡 2:10)>

◈ 우리는 선(善)한 행위로는 구원을 받을 수 없지만,
은혜로 구원(救援) 받은 사람에게는 선(善)한 행위를 나타내야 한다.
그 이유는 나무는 그 열매로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구원(救援)받은 사람의 삶에는 선행(善行)의 열매가 맺히기 때문이다.

○ 구원(救援)은 단순히 용서받은 것에 그치지 않고,
부활(復活)과 재창조의 특별한 사건의 하나님의 은혜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구원 받은 성도들은 "허물과 죄"로부터의 재창조의 진리와
거룩(롬 4:24)으로 선(善)한 행위를 나타낼 수가 있는 것이다.

★ “구원(救援)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믿음을 통하여 은혜로 말미암아 이르러오는 선물이다(엡 2:8).
"율법의 그 어떤 행위도, 아무리 칭찬받을 만한 노력이나 선(善)한 행위도
<그것이 많든 적든, 희생적이든 아니든 간에>결코 죄인을 의롭게 만들 수 없다"(교리, 226)

★ “사람들이 소유하고 있는 모든 좋은 자질들은 하나님의 선물이며 그들의 선한 행위는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은혜로 이루어진다…….성경의 취지는 인간의 능력을 의지하지 않도록 가르치는 동시에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도록 격려하는 것이다.”(부조, 717)

★ “좋은 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을 것이다. 만일 과실이 맛없고 가치가 없다면 그 나무는 나쁜 나무이다. 그와 같이 생애 가운데 열리는 열매는 마음의 상태와 품성의 탁월성에 대하여 증언해 준다. 선한 행위로 결코 구원을 살 수 없지만 그것은 사랑으로 행하고 심령을 깨끗하게 하는 믿음의 증거이다. 그리고 영원한 상급은 우리의 공로 때문에 주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그리스도의 은혜를 힘입어 행하여진 행위에 비례될 것이다.”(소망, 314)

★ “ 하늘나라에 영접될 자들에 의하여 이루어진 선한 행위는 그리스도의 고난 받는 백성들을 통하여 그리스도께 한 것이었다.”(1증언, 679)

★ “신중히 연구하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순종한 영감의 말씀은 철저하게 모든 선한 행위를 자아내게 할 것이다.”(2기별, 46)

★ <구원(救援)에 있어서의 믿음과 행함>
“그대의 모든 선한 행위가 그대를 구원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대가 선한 행위 없이 구원받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리스도를 위한 모든 희생이 그대의 영원한 이득을 위한 것이 될 것이다.
<리뷰 앤드 헤럴드, 1878년 3월21일자.”(3기별, 147)>

★ “자신을 바라보지 말라. 자신에 대하여 생각하고 말하지 말라. 그대는 그대가 행하는 어떤 선한 행위로도 스스로를 구원시킬 수 없다. 주 예수께서 그대를 죄를 지고 가는 자로 삼지 않으셨다. 그분께서는 어떤 인간이나 천사들이 죄를 질 수 있게 하지 않으셨다. 그분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말씀하신다. 그대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믿지 않는가? 그분은 다음과 같이 명하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3기별, 325)

◉ <세상에 빛이 되는 선한 행실 >
“하나님과 진정으로 연결된 사람은 하늘의 빛을 반사함으로써 세상과 교회에서 구원하는 능력을 갖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선한 행위, 믿음직한 행위의 향기는, 심지어 우리 믿음 안에 있지 않은 사람들 중에서도 그들에게 좋은 평판을 얻게 해 줄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은 그런 품성을 가진 사람들을 존중하고 영예롭게 할 것이며, 우리 믿음의 대적들조차도 매일의 사업에서 그리스도의 영과 생명이 나타나는 것을 볼 때, 그들의 힘과 영예의 근원이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될 것이다.”(교회증언, 4권, 356)

★ “우리는 이 세상에서 영혼들을 구주께 인도하기 위해서 살아야 한다. 만일 우리가 다른 이들을 해하게 되면, 우리는 자신도 해하게 된다. 만일 우리가 다른 사람을 축복한다면, 우리는 또한 우리 자신도 축복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선한 행위의 감화는 우리 자신의 심령에 반사되기 때문이다.”(4증언, 71)

★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와 고통당하는 자들에 대한 친절한 말, 자비로운 행동, 부드러운 관심과 같은 선한 행위들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맺히기를 요구하시는 열매들이다”(구호, 35)

★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의 진리를 가지고 있다는 증거로써 우리의 엄격한 자기희생의 생애가 보여 져야 할 것이다…….우리의 선한행위의 빛이 세상에 비치도록 각자가 최선을 다하기로 결심하자. 교회증언 9권 69, 70(1909)”(문전, 3)

★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사람들은 사람들이 그들의 선한 행위를 보고 창조주와 구속자께 영화를 돌리도록 일하라. ─ BE, 1901. 6. 10.”(선교, 26)

★ “재물(財物)을 내세로 가져갈 수 없다. 거기에는 재물이 필요치 않다.
그러나 영혼들을 그리스도께 인도하기 위해 행한 선한 행위는 하늘조정으로 가지고 갈 수 있다.”(선교, 220)

★ “하나님의 말씀은 귀중한 진리의 보석으로 가득 차 있다.
그러므로 부모들은 그 보석들을 그 상자에서 집어내어 자녀들 앞에 그 보석들의 참된 영광을 제시할 것이다. … 그대는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귀중품들을 끌어낼 수 있는 보고를 얻는다.
그리고 그대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모든 선한 행위로 자신을 갖추어야 할 것이다. ― ST, 1894. 9. 10.”(자녀, 505)

★ “사람들의 모든 행위들에 대한 기록이 하나님의 기억 책에 보존되어 있다.
생애의 모든 선한 행위들, 모든 악한 행위들이 기록된다.”(행실, 89)

◉ 아무도 행위로 구원 받을 수는 없지만, 구원 받은 사람에게는 선한 삶의 모습이 반드시 나타난다.
구원받은 사람의 삶에는 선행의 열매가 맺히기 때문이다.

◉ “우리가 하나님의 증인이 되는 것은 다만 진리를 전하거나 문서를 보급함으로써만이 아니다. 그리스도교를 전진시킬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논증은 그리스도처럼 생애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값싼 품성은 이 세상에서 세속적인 사람의 품성보다 더 큰 해를 끼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교회증언, 9권, 21)
“그리스도교의 휘장(徽章)은 겉으로 보여 주는 표지가 아니며, 십자가나 면류관을 달고 다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사람이 하나님과 연합함으로 나타내 주는 것이다. 성품의 변화에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의 능력을 통하여, 세상은 하나님께서 그분의 아들을 세상의 구속주로 보내셨다는 사실을 확신하게 된다. 인간의 심령을 감싸 줄 수 있는 어떤 감화력도 이타적인 생애의 감화력보다 강력할 수는 없다. 복음을 위한 가장 강력한 논증은 상냥하고 친절한 그리스도인이다.”(치료봉사, 470)


◉ <요점(要點)>
무아적(無我的)인 선행(善行)은 그것을 행하는 자와 그 혜택을 받는 자 모두에게 축복이 된다.
비록 작은 일이라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행해진 일은 큰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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