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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6과 성령의 열매인 자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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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paulcho 작성일10-01-28 04:51 조회4,71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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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6과 성령의 열매인 자비
2월 6일 안식일 (일몰: 오후 6시 1분)

도입)
자비란 친절로서 사람을 대하는 것이다. 사랑의 가장 단순한 표현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친절’이다. 이것은 서로 인사 나누는 것, 그리고 한 번 웃어 주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누가 먼저 해야 한다고 말하지 말고, 내가 먼저 사랑을 실천하되, 친절한 언행이 되도록 해야 한다. 반드시 하나님께서 그 심령에 평안이 넘치도록 해 주시고, 영․육간에 넘치는 복을 쏟아 부어 주실 것을 믿어야 한다. 자비의 전체적인 의미는 ‘친절한 선의(善意)’에 있다. 자비는 친절하고, 달콤하고, 매우 사랑스러운 말이다. 자비롭다는 것은 양선과 같은 의미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따라서 자비란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보여주신 것과 같은 박애적 행위를 가리킨다. 하나님께서 죄인들에게 자비로우시므로(롬 2:4; 엡 2:7), 그리스도인들도 동일한 덕행을 드러내야 한다(고후 6:6).25)

기억절: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의 택하신 거룩하고 사랑하신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입고.”(골 3:12)

연구범위: 삼하 9:1~13, 잠 15:1~5, 25:11~15, 마 5:43~48, 눅 6:35, 38, 엡 4:32, 골 3:12~14.

안식일 오후
바울은 사랑이 어떻게 역사하는지를 말할 때, 맨 먼저 ‘오래 참음’을 떠올렸다. “사랑은 오래 참고…”(고전 13:4). 그는 오래 참음 즉 인내에 대해 말한 다음, 이어서 “사랑은 친절합니다.”(고전 13:4, 현대어 성경)라고 말함으로써 사랑과 자비 혹은 친절은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시사했다. 친절이 빠진 행동은 참으로 사랑의 행동이라 할 수 없다.
앞에서 보았듯이 인내는 참는 사랑이다. 그러나 친절은 활동적인 사랑을 나타낸다. 종종 인내는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나지만, 친절은 우리가 무엇을 말하고 행동하느냐, 더 나아가서 그것을 어떻게 말하고 행하느냐, 그리고 가장 중요한 사실로서 그것을 왜 말하고 행하느냐로 나타난다.
누구나 친절을 나타낼 수 있겠지만, 시간과 정력을 기울이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친절은 여러 형태로 나타나는 동사(動詞)이다. 그리고 친절은 사랑과 가까운 ‘사촌’으로서 실로 엄청난 힘을 내포하고 있다. 자비 혹은 친절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보여준다.

일요일(1월 31일)
자비의 표준(마 5:43~48)

도입)
친절은 그리스도인 삶의 유니폼이다(골3:12). 무례함은 다른 사람의 마음을 찢고 상처를 입힌다. 성경에 "서로 인자하게 하며"라고 말한 것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엡4:32). 신약성경에서는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라"고 했다. 이러한 자비는 삶의 기초 단계에서 실천되어야 한다. 가정에서 부모들은 자녀들을 자비롭게 대해야 한다. 그러면 자녀들도 부모를 향한 자비를 배운다. 직장인들은 서로 인자하게 대해야 한다. 고용주와 고용인의 관계는 자비와 존중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자비는 교회와 모든 위원회로 확장되어야 한다. 의견이 일치하지 않는다고 해서 서로 인자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겨서는 안 된다. 자비는 유용함, 유효성, 사교적인성향, 관대한 성격을 의미한다. 자비는 작은 일들 속에서 나타나는 사랑이다. 그것은 다른 사람의 감정과 개성을 존중해 주는 것이다. 행동으로 나타나는 사려 깊은 태도이다. 격할 수 있는 상황에서 사랑과 연합을 일으키는 마음이다. 자비는 슬픔과 죄악이 만연한 곳에 축복과 기쁨을 가져다준다. 자비는 곤경에 처한 사람을 사랑하고 도와주는 것이다. 다른 사람의 좋은 자질에 주의를 기울이는 대화이다. 그것은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거나 인격을 의심하는 말을 하지 않는다. 그리고 악한 말을 하지 않는다. 자비로운 마음은 누군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 도움과 치유의 손길을 내민다. 그것은 물 한잔이나 차, 또는 우유 한 잔속에 나타날 수도 있다. 우리의 삶속에 있는 자비라는 성령의 열매는 우리 주변에 살고 있거나 일하고 있는 사람들을 유쾌하게 해줄 수 있다. 자비로운 행위는 사람들을 그리스도께 이끌고 그들을 영원히 영화롭게 하는 성령의 도구가 될 수 있다. 자비는 다른 사람들의 영원을 결정지을 수 있다. 그들이 하나님의 가족이 되도록 이끌 수 있다.

예수께서는 산상수훈에서 하나님의 자비에 대해 분명히 예증해 주셨습니다. 마태복음 5:43~48을 읽고 다음 질문들에 답하십시오.

1. 여기 예수께서는 우리를 얼마나 높은 표준으로 초청하십니까?
답:

2. 우리를 이와 같은 높은 표준으로 부르신 까닭은 무엇입니까?
답:

3. 48절에 그리스도께서 ‘완전’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신 것을 주목해 보십시오. 여기서 ‘완전’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이 단어의 용례를 살펴볼 때 우리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의 완전하심 같이 완전하라는 말씀의 의미는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답:
하나님의 자비로운 은사란 그야말로 자애로운 선물이다. 어떤 사람도 그것을 획득할 수 없고, 공로로 얻을 수 없다. 모든 인간은 그분께 스스로 죄를 범했고 그분을 멸시하고 무시하였다. 이 점에 있어서는 가장 큰 죄인이거나 가장 거룩한 성도이거나 마찬가지다. 아무도 하나님이 우리 모두에게 베푸시는 자비하심과 선하심을 받을 가치가 없다.
이 구절들에서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완전하심과 같이 완전하라고 호소하신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한가? 원수를 사랑하고 우리를 학대하는 자들을 위해 기도하며 우리에게 친절히 대하지 않는 자들에게 친절히 대하라. 이것이 바로 예수께서 정의하신 ‘완전하게 되는 길’이다. 우리가 철저히 자아에 대해 죽고 실제로 그런 방식으로 살아간다면 우리의 교회와 가정은 어떤 모습이 될지 상상해 보라. 우리는 지옥의 문이 결코 정복할 수 없는 능력과 증거를 갖게 될 것이다. 우리로 하여금 이것을 멈추게 하는 유일한 장애물은 무엇인가? 그것은 다름 아닌, 우리로 하여금 ‘세리’처럼 행동하게 하며, 죄악으로 가득하고 복수심으로 불타는 마음뿐이다.

교훈: 자비와 친절에 대한 높은 표준이 예수님의 산상수훈에 잘 나타나 있는데, 이 귀한 특성은 원수를 사랑하고 위하여 기도하는 적극적인 행동으로 나타난다.

부가적용)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자비의 본을 보이셨다. "우리도 전에는 어리석은 자요 순종치 아니한 자요 속은 자요 각색 정욕과 행락에 종노릇한 자요 악독과 투기로 지낸 자요 가증스러운 자요 피차 미워한 자이었으나 우리 구주 하나님의 자비와 사람 사랑하심을 나타내실 때에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성령을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풍성히 부어 주사"(딛3:3-6)". 성경은 "사랑은 온유하다"고 한다(고전13:4). 예수님이 곧 우리의 자비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자비를 베풀어 그것을 나타내야 한다. 자비는 무례함의 반대이다. "친절은 모든 곳에 필요하고 어디서나 행할 수 있는 은혜이다. 다른 사람들은 다 불평하고 무례하게 굴어도, 훌륭한 영혼들은 진실하게 자비를 베푼다." 자비는 성령의 열매이며, 우리와 예수 그리스도의 관계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것은 인간의 능력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과실을 맺는 나무처럼 자비의 영이 자라나야 한다. 자비는 하나님의 말씀을 공급받고 하나님의 성령에 의해 자라나야 한다.

월요일(2월 1일)
“죽은 개”에게 나타낸 친절(삼하 9:1~13)

도입)
자신을 죽이려고 15년간을 괴롭힌 원수의 피붙이에게 파격적인 은총을 베푼 기록은 거의 찾을 수 없다. 그러나 다윗은 므비보셋에게 놀라운 은총을 베푼다. 이 사건은, 죄로 멸망해야 하는 사람들을 향한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보여주는 것이다. 하나님이 놀라운 은혜를 우리의 작은 두뇌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측량할 조차 할 수 없다.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를 세어본다면, 우리들은 찬양을 하고 또 해도 부족할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생각한다면 하나님께 대한 존경이 한 없이 솟아오를 것이다. 그분을 경배하는데, 일생을 다 바쳐도 부족할 것이다. 가련한 도망자요 절름발이였던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을 로드발에서 불러들여, 왕의 가족으로 인정하고, 다윗과 함께 먹는 특권을 베풀었을 때, 므비보셋의 심정은 어떠했을 것이라 생각하는가? 그는 몸 둘 바를 몰랐을 것이다. 사탄의 포로가 되어 마귀가 끄는 대로 온갖 죄악을 저질러 당연히 멸망 받아야 할 나를 위해 주님이 오셔서 사탄의 포로에서 건져내셨다. 주님은 자신의 목숨을 바쳐서 우리를 죄의 속박에서 자유하게 하셨다. 하늘나라의 잔치에 참여하여 영원토록 하나님의 자녀의 즐거움과 영광을 누리게 하셨다. 주님처럼 하늘나라의 상속자가 되게 하셨다. 하나님의 보좌에 앉아 영원토록 다스릴 왕 같은 제사장이 되게 하셨다. 주님 때문에 우리들이 받은 은혜가 얼마나 놀라운가? 우리가 받은 은혜를 생각하면 므비보셋처럼 몸 둘 바를 모를 것이다. 그 은혜에 합당한 예배를 드리려면 영원한 시간도 모자랄 것이다.

1. 사무엘하 9:1~13에서 다윗은 어떻게 친절을 나타냈습니까? 그의 행동을 통해 하나님의 품성이 어떻게 드러났습니까?
답:
“므비보셋은 다윗의 원수들의 보고를 통하여 다윗이 왕위의 찬탈자란 강력한 편견을 품고 있었다. 그러나 왕이 그를 관대하고 정중하게 영접해주고 끊임없이 친절을 베풀어 주자 이 젊은이의 마음은 감동을 받았고, 다윗을 아버지 요나단처럼 열렬히 사랑하게 되어 자기의 이해관계가 하나님께서 택하신 왕의 이해관계와 하나임을 느꼈다.”(부조와 선지자, 713)
사울의 집에 나타낸 다윗의 친절은 그가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표본으로 삼아 그렇게 행하였음을 보여준다. 우리와 같은 죄인이었던 다윗은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과분한 은총과 자비를 받았음을 깨닫고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나타내고자 하였다.

2. 우리가 하나님의 자비를 다른 이들에게 전달하기 전에 먼저 알아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참조 눅 7:47). 여기에 다른 사람들에게 자비를 베푸는 일에 대해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어떤 중요한 원칙이 나타나 있습니까?
답:
하나님께서 나에게 베푸신 선하심과 자비하심에 대해 잠시 생각해 보라. 나는 그것을 받을 자격이 있는가? 하나님은 나에게 그렇게 하실 의무가 있으신가? 나의 생각과 행동과 말은 너무나도 이타적이고 거룩하고 사랑스럽고 합당해서 내가 다른 사람에게 행한 대로 하나님도 나에게 그렇게 하셔야 하는가? 대답은 분명히 ‘아니다.’이다. 그리고 여기에 중요한 핵심이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셨다는 사실을 인식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됨됨이와 행동에도 불구하고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우리는 참으로 자비와 사랑을 받을 가치가 없는 자들에게 베푸시는 자비와 사랑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하게 된다. 우리 각자가 십자가의 의미를 마음에 새기고 그것을 항상 기억하는 것은 참으로 중요하다!

교훈: 하나님의 선하심과 자비하심은 그것을 받을 만한 자격을 갖춘 자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겸손한 마음으로 그분을 앙망하는 죄인들에게 주어진다.

부가적용)
므비보셋은 자신의 할아버지 사울이 다윗을 얼마나 무자비하게 박해했었는지 알고 있었다. 그 다윗 앞에 무릎을 꿇고 엎드려 절했다. 두려움에 온몸과 사지를 얼마나 떨었겠는가? 그의 목숨은 다윗의 말 한마디에 달려 있었다. 므비보셋이 예상했던 말은 “단 칼에 이 역적의 손자를 죽여라”는 무서운 명령이었을 것이다. 하나님 앞에 불려온 죄인들이 처음으로 느끼는 공포도 이와 같을 것이다. 므비보셋은 자신이 전혀 기대하지 못했던 예상 밖의 너무 놀라운 음성을 들었다. “다윗이 이르되 므비보셋이여”라고 친절하고 부드럽게 그를 불렀다. 이것은 자신의 죄 때문에 심각한 두려움에 질려 무릎을 꿇고 덜덜 떠는 가련한 자기 백성에게 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예표한 것이다. 하나님은 다윗과 같이 그분의 발 앞에 소환되어 무릎을 꿇은 우리를 그렇게 부르신다. “므비보셋이여” 얼마나 다정하게 부르는 소리인가? 얼마나 친절한 소리인가? 하나님은 창세기로부터 오늘까지 하나님께 불려가 두려움에 무릎 꿇은 죄인들을 그렇게 부르셨다. “아브라함아” 불타는 떨기나무 앞에서 “모세야”, 뽕나무에 올라가 있을 때 “삭개오야”, 주님의 무덤 앞에서 울며 있던 여인에게 “마리아야”, 교회를 핍박하려고 말을 달리던 자에게 “사울아 사울아”, 주님이 우리들도 얼마나 다정하게 부르셨는가? 우리 교회 찬미의 가사는 이렇게 노래한다. “예수가 우리를 부르는 소리 그 음성 부드러워” 그러나 다윗의 그 다음 말이 더 복되다. 다윗은 엎드린 절름발이를 향해 “무서워하지 말라”고 말한다. 다윗은 “너는 왜 이처럼 오랫동안 나를 피해 도망 다녔냐?” 고 비난하지 않았다. “네가 사울의 후손이란 말이지 꼴좋다”망신시키지도 않았다. 오히려 다윗은 므비보셋을 부드럽게 부르며 안심시켜 준다. 이것은 참회하는 영혼들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위로의 음성을 예표하는 것이다. 주님의 발 앞에 무릎을 꿇고 회개하면 우리는 안심할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음성은 즉시 두려움을 제거해 준다.

화요일(2월 2일)
친절한 말(엡 4:32)

도입)
강건한 그리스도인은 다른 사람들을 부드럽고 상냥하게 대함으로 점점 더 자비를 키워 간다. 그들은 상냥하고 친절하다. 그들은 판단하는 자리에서 내려와 자비의 자리로 나아간다. 만일 다른 사람들을 가혹하게 대한다면, 연약한 그리스도인임을 나타내는 것이다. 자비의 열매에 자양분이 부족하다는 신호이다. 만일 다른 사람에게 가혹하게, 또는 무례하게 대했다면, 그것을 죄로 여기고 하나님께 고백하라. 당신의 잘못을 인정하라. 그러면 당신도 자비를 키워 가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의 택하신 거룩하고 사랑하신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입고"(골3:12). 그리스도인들은 자비의 모범을 보이고 지도자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종종 비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 보다 더 친절한 것을 보게 된다. 예를 들어, 종종 식당에서 바쁘게 식사하는 그리스도인은 비그리스도인 보다 더 만족시키기가 힘들다. 때로는 비그리스도인 종업원이 그리스도인보다 더 친절하다. 이것은 하나님의 명예를 훼손시키는 것이다. 자비의 옷을 입고, 매일매일 자비를 더하며, 당신의 창조주를 영화롭게 하라. 그러면 어떻게 자비를 실천하는가? 삶의 작은 영역에서 자비를 실천해 보라. 동물들에게도 친절해 보라. 사람들에게도 친절하고 부드럽게 말하라. 배우자, 자녀, 어머니, 아버지에게도 친절하라. 노인들에게 친절하지 않은 사람은 친절한 사람이라 할 수 없다. 자비는 무례한 대접을 받는 곳에서 자라난다. 그것은 하루하루의 삶에서 자라난다. 사소한 일들에서 자라난다. 우리의 삶에 힘들거나 불쾌한 일이 닥칠 때 자비롭게 반응하기로 선택함으로써, 그리스도인의 자비의 은혜가 성장해 가는 것이다. 자비는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약한 모습이 아니다. 무례함은 폭력을 사용하고, 약한 사람에 의해 나오지만, 자비는 실제로 강한 능력이다.

에베소서 4:32은 “서로 인자하게 하며”(엡 4:32)라는 말로 시작된다. 이 구절은 어제 우리가 살펴본 대로, 하나님이 우리를 대하신 것처럼 우리도 다른 사람을 대하라는 말씀과 완전히 조화를 이룬다.
그리스도인들은 언제나 인자한 태도를 나타내야 한다. 그러나 특히 우리가 친절히 대해야 할 세 부류의 사람들이 있다.
첫째, 우리는 영적인 갓난아기들에게 친절을 나타내야 한다. “오직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유순한 자 되어 유모가 자기 자녀를 기름과 같이 하였으니”(살전 2:7)
둘째, 우리는 연약한 자들에게 친절과 격려를 보여주어야 한다. “우리 강한 자가 마땅히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롬 15:1)
셋째, 우리는 영적으로 병든 자들을 섬기고 보살펴야 한다. “마땅히 주의 종은 다투지 아니하고 모든 사람을 대하여 온유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참으며, 거역하는 자를 온유함으로 징계할지니 혹 하나님이 저희에게 회개함을 주사 진리를 알게 하”시리라.(딤후 2:24~25)
어떤 사업가가 말하기를, “나는 온 종일 친절을 베푸느라 지쳤기 때문에 집에 와서는 더 이상 친절을 베풀 기력이 없다!”라고 했다. 얼마나 서글픈 인생의 태도인가?
친절, 특히 가정에서의 친절은 매우 중요하다. 그리고 우리가 가정에서 친절을 나타낼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방법 중 하나는 서로 대화하는 것이다. 가정의 분위기는 우리가 하는 말에 의해 크게 좌우된다. 우리가 무엇을 말하느냐 뿐 아니라 그것을 어떻게 말하느냐에 조심한다면 우리는 수많은 문제와 상처와 긴장과 다툼을 피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어떤 말을 할 때에 상대방에게 큰 상처를 입히고 화나게 말할 수도 있고, 같은 말을 할지라도 정반대의 기분이 들게 말할 수도 있다. 열쇠는 우리가 어떻게 말하느냐에 달려 있다. 인간의 언어는 단어의 의미 그 이상의 것을 통해 전달되는데 어조, 얼굴 표정, 몸짓, 억양 등은 우리의 생각과 감정을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는 방편들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친절한 태도로 말함으로써 다른 사람을 상하지 않게 해야겠다.

교훈: 친절한 말 한 마디는 상대방의 마음에 기쁨을 선사하고 희망과 용기를 불어넣어 준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상하지 않게 하는 친절한 말을 익히자.

부가적용)
회사에서 가장 싸움을 좋아하고 비판적인 상사 밑에서 일하는 한 젊은 여자가 있었다. 그 사람 밑에서 일하는 것은 참기 힘들었다. 그녀는 그 '심술쟁이 영감'한테 매일 한 가지씩 칭찬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첫째 날은 "양복이 매우 멋지군요"라고 했다. 그의 성품이 아니라, 양복을 칭찬한 것이다. 그렇게 날마다 어떤 것에 대해 그를 칭찬해 주었다. 그리고 그 비판적인 사람에게 친절하게 대했다. 마침내, 전혀 사랑스럽지 않던 그 상사는 사랑스러운 사람이 되었고, 후에 그녀의 남편이 되었다. "따뜻한 칭찬은 오래간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자비를 배운다. 거기서 그들은 삶이 변하고 자비를 실천하기 시작한다. 그들은 점점 더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 갈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자비를 나타내야 한다. 하나님은 자비이시다. "그러므로 서로 자비하라."

수요일(2월 3일)
친절은 되돌아온다(눅 6:38)

도입)
기독교는 은혜를 강조하지만 나쁜 언어와 행실을 무조건 감싸고돌지 않는다. 좋은 언어와 행실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다. 인생은 거울과 같다. 거울을 보며 화난 얼굴을 하면 자신의 모습이 화난 모습으로 비춰지고 기분이 저하되고 울적해진다. 반면에 거울을 보며 웃는 얼굴을 하면 자신의 모습이 밝아 보여 기분이 좋아진다. 세상을 살 때 거울을 보듯 하여야 할 것이다. 친절을 주면 친절을 받을 것이고, 악을 주면 악을 받을 것이다. 상대방의 행동을 보며 자신의 모습을 보라. 남이 내게 불친절하거든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남에게 불친절 했구나!”라고 생각하고, 남이 내게 섭섭한 말을 하거든 “내가 모르는 사이에 저 사람에게 섭섭한 말을 했구나!”라고 생각해야 한다. 남에게 악한 대접을 받거든 “내가 심어 놓은 악이 내게 되돌아오는구나.”라고 생각해야 한다. 물론 인과응보는 기독교의 진리가 아닌 것 같다. 특히 구원과는 더욱 상관없는 것 같다. 왜냐하면 내가 비록 죄가 있다고 할지라도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피를 흘리셨고, 주님을 믿으면 구원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 복음이니까 복음과 인과응보는 180도 다른 것 같다. 그러나 좀 더 깊이 생각해 보면 인과응보를 부인하면 십자가도 있을 필요가 없다. 십자가의 대가가 있었기에 죄인이 살아난 것이기 때문이다. 구원의 은혜가 무조건 희생이 없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나의 희생이 없었다는 것뿐이지 주님의 희생이 있었기에 구원의 은혜가 있게 된 것이다. 하나님은 무조건 사랑만 베푸시는 분이 아니다. 하나님의 공의는 절대로 침해될 수 없고 묵과될 수 없다. 사랑한다고 해서 죄를 거저 봐주고, 용서한다고 해서 죄를 거저 넘어가지 않는다. 죗값을 지불해야 용서가 있고, 희생의 대가를 지불해야 사랑이 있다.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눅 6:38)

1. 위의 구절에서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은 무엇입니까? 그분은 인생의 어떤 원리를 말씀하고 계십니까?
답:
우리가 다른 사람을 대접한 것은 얼마나 자주 우리 자신에게 되돌아오는가! 우리가 다른 사람을 친절히 대할 때 그도 우리에게 친절히 대한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인데, 우리가 다른 사람을 불친절하게 대하면 그도 우리에게 불친절하게 대한다.
물론 항상 이런 식으로 일이 전개되는 것만은 아니다. 예수께서 어떤 취급을 당하셨는지 보라. 그러나 결과가 어떠하든 간에 어떤 의미에서 그것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항상 친절해야 하며, 그 친절이 되돌아오지 않는 때에라도 친절해야 한다. 사실상 우리가 살펴보았듯이 우리에게 불친절한 자들에게 친절을 베푸는 것이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의 특성이다. 아무튼 대개의 경우 우리가 다른 사람을 대하는 태도는 그들이 우리를 대하는 태도에 영향을 미친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마 7:12)

2. 누가복음 6:35을 읽으십시오. 이것은 우리가 이번 주에 이야기한 내용과 어떻게 조화를 이룹니까?
답:
우리에게 유익을 줄 수 있는 사람을 친절히 대하는 것은 언제나 쉽다. 누구나 그렇게 한다. 그러나 특히 나에게 되갚을 수 없는 사람을 위해 희생을 치르는 일은 쉽지 않다. 그것이 진정한 친절의 시금석이다.

교훈: 우리가 누군가에게 친절을 베풀 때 아무런 대가를 기대하지 않고 무아적인 희생을 나타낸다면 그것은 참으로 예수님의 모본을 따르는 일이 된다.

부가적용)
친절은 아무리 작은 것도 사람을 감동시킨다. 친절은 또 다른 친절을 낳는다. 친절은 반드시 되돌아온다. 친절은 지극히 작은 것이라도 상대방을 기쁘고 유쾌하게 한다. 미국의 아더 스미스는 당신의 친절이 다른 사람들에게 끼친 유쾌함은 훗날 반드시 당신에게 되돌아올 것이며 가끔은 이자까지 붙어서 되돌아오기도 할 것이다. 폭풍우가 심하게 몰아치던 어느 날 밤 어떤 노부부가 작은 호텔에 들어와 방을 찾았다. 그러나 호텔 방은 이미 만원이었다. 노부부는 바람이 세차게 불어대는 밤거리로 다시 나아가야만 한다는 사실에 무척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우두커니 서 있었다. 다른 호텔들도 모두 만원이었기에 더 이상 갈 곳도 없는 터였다. 그때 노부부 앞으로 다가온 볼트라는 젊은 종업원은 방을 구해 드리지 못한 것이 자기의 잘못이라도 되는 것처럼 걱정하면서 말했다. 이렇게 날씨 사나운 밤에 나이 드신 어른을 마냥 서성이게 해서 죄송합니다. 괜찮으시다면 오늘은 제 방에서 주무십시오. 노부부는 한동안 망설였지만 종업원의 간곡한 권유로 그의 방에서 묵었다. 다음날 아침 노부부는 계산을 하면서 종업원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당신을 위해 미국에서 제일 좋은 호텔을 지어 주겠소. 종업원은 뜻밖에 제의를 받았으나 조용히 웃는 얼굴로 답하였다. 몇 년이 지난 후 이 젊은 종업원은 노부부로부터 뉴욕으로 초청하는 편지를 받았다. 종업원이 도착하자 노부부는 웅장한 새 건물이 서 있는 5번가와 34번가가 교차되는 길 모퉁이로 그를 데리고 갔다. 이것이 바로 내가 당신에게 지어 주기로 약속한 호텔이오 이 노인은 윌리엄 월토프 아스토였고 바로 그 유명한 월토프 아스토리아 호텔이었다. 종업원 볼트가 이 호텔의 첫 관리인이 된 것은 두 말할 필요가 없다. 친절과 사랑은 그리스도인의 최고 윤리요 모든 계명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

목요일(2월 4일)
자비를 옷입으라(골 3:12~14)

도입)
그리스도인들이 입어야 할 옷이 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이 다섯 벌의 옷이 있어야 된다. 당신에게 긍휼의 옷이 있는가? 당신에게 자비의 옷이 있는가? 당신에게 겸손의 옷이 있는가? 당신에게 온유의 옷이 있는가? 당신에게 오래 참음의 옷이 있는가? 자비를 경험한 사람은 진리를 안다. 이웃에게 자비를 베풂으로 그 의미를 알게 되기 전에는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지 진정으로 깨달을 수 없다. 이웃에 대한 자비의 행위가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사랑하도록 직접적으로 가르치기보다는 우리 삶 안에 살아 있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통해 역동적으로 이웃으로 뻗어 나감으로써 우리 영혼 안에 그리스도를 제시하게 된다. 이웃에 대한 사랑과 연민이 없다면, 그리스도께 대한 우리의 '사랑'은 꾸며 낸 것에 지나지 않는다. 빛 속에 있다고 말하면서 자기 형제를 미워하는 사람은 아직도 어둠 속에 있는 자이다. 자기 형제를 사랑하는 사람은 빛 속에 머무르고, 그에게는 걸림돌이 없을 것이다.

1. 골로새서 3:12~14을 읽고 자신의 말로 다시 정리해 보십시오. 이 구절들은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것의 핵심적인 의미를 어떻게 나타내 줍니까? 특히 '온전'이라는 용어의 사용에 주목해 보십시오. 또한 이 말 대로 실행한다면 우리가 세상에 증거하는 일이 얼마나 힘이 있을지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십시오.
답:
19세기 후반 영국의 목사였던 알렉산더 매클래런(Alexander Maclaren)은 이렇게 기록하였다. “자비는 세상에서 가장 강한 힘이다. 아무리 훌륭한 증기 해머를 동원해서 빙산(氷山)을 부순다 할지라도 한 번의 내리침으로 생기는 비교적 적은 양의 열로 작은 부분만을 녹일 뿐 빙산은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빙산을 따스한 햇볕이 내리쬐어 살인적인 냉기를 내쫓는 남쪽으로 흘려보내면 빙산은 따뜻한 바다 속으로 녹아버릴 것이다. 자비는 정복한다.”

재림교인들은 우리의 신학적 입장과 신조에 대해 매우 강력한 성경적 근거를 가지고 있다. 물론 그것도 중요하다. 하지만 우리는 바른 교리를 갖는 것 이상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은가?
“만일 우리가 하나님 앞에 스스로를 낮추고 친절하고 예모 있고 부드럽고 동정적일 것 같으면 오늘날 단 한 사람 밖에 없는 곳에 백 명의 사람이 진리로 돌아오게 될 것이다.”(교회증언, 9권, 189)
우리가 교회의 교리들을 가르칠 때 안식일, 죽은 자의 상태, 죄의 기원, 그리고 다른 확실한 신조들을 포함시킨다. 그러나 우리는 산상수훈과 고린도전서 13장과 더불어 친절과 성령의 다른 열매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데는 주의를 얼마나 기울이고 있는가? 안식일은 일곱째 날이고, 죽은 자들은 부활 때까지 잠자며, 그리스도의 의가 현재뿐 아니라 심판의 날에도 우리를 덮어준다는 것을 아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그러나 지식만을 가지는 것이 예수님 안에 있는 진리(요 14:6)를 아는 것과 같은 것은 아니다. 진리는 우리를 자유케 한다(요 8:32). 즉 진리는 우리를 변화시키고 그리스도를 닮게 해 준다. 그렇다면 진리이신 예수님께 가납되지 않는다면 우리가 참으로 진리를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교훈: 우리가 가진 진리는 참으로 소중하다. 그러나 진리이신 예수님을 닮아 친절과 자비를 나타내지 않는다면 우리가 가진 진리는 빛을 발할 수 없다.

부가적용)
친절은 하나님이 우리를 대하신 것과 같은 방식, 즉 긍휼(compassion)과 너그러움(generosity)으로 다른 사람들을 대하는 것을 의미한다. 측은히 여기는 마음과 깊은 동정이 그것이다.

♥ 그리스도인의 친절 십계명♥ 마더 데레사
친절함이 있는 곳에는 거룩함도 빨리 자라납니다. 친절한 이가 길을 잃고 방황한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병든 이들을 위해서 많은 의약품과 치료제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 안에서 이것을 내어주는 친절한 손길과 너그러운 마음씨가 없다면 사랑 받지 못하는 데서 오는 극심한 질병은 결코 치유되지 못할 것입니다. 한 가닥의 작은 미소, 짧은 시간의 방문, 시각장애인을 위해 편지를 써 주는 것, 노인들에게 신문을 읽어 주는 것… 이와 같은 아주 작은 일들을 통해서도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구체적으로 실천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에 가득 찬 친절은 다양한 방법들로 표현됩니다.

1. 함께 살고 있는 이들에게 일상생활의 단조로움에 미소를 잃지 마세요.
2. 이웃의 잘못을 잘 타일러 주세요.
3. 칭찬을 아끼지 마세요.
4. 아랫사람에게 무엇이든지 도움이 되어 주세요.
5. 슬퍼하는 이들의 손을 따뜻하게 잡아 주세요.
6. 고통으로 예민한 이들에게 사랑과 애정으로 돌보아 주세요.
7. 잘못을 인정하고 용서를 청하세요.
8. 보잘 것 없는 이들과도 인사를 나누세요.
9. 성가신 이들과 참을성 없는 이들에게도 온순하게 대하세요.
10. 연만한 이들을 부모님처럼 생각하세요.

금요일(2월 5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각 그리스도인 가정으로부터 거룩한 빛이 비쳐 나와야 한다. 사랑은 행동에 나타나야 한다. 그것은 모든 가족들 상호간의 교제에서 흘러 나가야 하며, 또 사랑 그 자체가 사려 깊은 친절과 상냥함으로 이기심이 없는 예모로 나타나야 한다. 이런 원칙이 실행되는 가정은 하나님께서 경배를 받으시는 가정이요 가장 참된 사랑이 지배하는 가정이다. 이런 가정들로부터는 아침과 저녁에 기도가 아름다운 향기처럼 하나님께로 올라가고 하나님의 자비와 축복이 아침 이슬처럼 그 간원하는 자들 위에 내린다.”(재림신도의 가정, 37)
“많은 사람들은 사랑을 표현하는 것을 유약(柔弱)함으로 생각하여 다른 이들이 감히 접근할 수 없는 딱딱한 태도를 취한다. 이 정신이 동정심의 발로를 방해한다. 사교적이고 관대한 생각들이 억제될 때 그들은 메말라서 차갑고 쌀쌀하게 된다. 우리는 이러한 잘못에 빠질까 주의해야 한다. 표현되지 않는 사랑은 오래 지속되지 못한다. 그대와 관련된 사람들의 마음이 친절과 동정의 결핍으로 굶주리지 않게 하라.”(재림신도의 가정, 107)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1. 목요일 교과의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 질문을 음미해 보십시오. “진리이신 예수님께 가납되지 않는다면 우리가 참으로 진리를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2. “표현되지 않는 사랑은 오래 지속될 수 없다”는 말의 의미는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이 원칙은 우리에게 왜 그렇게 중요합니까?

3. ‘완전하게’ 된다는 말의 의미를 되새겨 봅시다. 흔히 이 말의 의미를 어떻게 오해하는 경우가 있습니까?

4. 나를 대하는 다른 성도의 태도가 신앙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 것을 경험했습니까? 나의 친절은 다른 이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칩니까? 친절한 태도로 전도하는 것은 왜 그렇게 중요합니까?

5. 이번 주 교과를 통해 새롭게 깨달은 영적 교훈은 무엇이며, 한 주일을 살아가면서 꼭 실천하고 싶은 내용은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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