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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과 성령의 열매인 화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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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paulcho 작성일10-01-15 10:31 조회4,55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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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과 성령의 열매인 화평
1월 23일 안식일 (일몰: 오후 5시 45분)

도입)
어느 날 어린 아이 여섯 명이 노는 것을 보고 있던 러시아 자가 마르샤크가 아이들에게 물었다. “너희들 무엇을 하고 노니?” 그러자 아이들이 “우리는 전쟁놀이를 하고 있어요?”라고 대답했다. 그 말을 들은 마르샤크는 이렇게 제안을 했다. “왜 전쟁놀이를 하지? 너희들도 전쟁이 얼마나 끔찍한 것인지 잘 알고 있잖아, 차라리 평화놀이를 하는 편이 좋지 않겠니?” 그 제안을 들은 아이들은 좋은 생각이라고 대답하고는 서로 상의를 하다가 한 아이가 되물어왔다. “할아버지! 그런데 평화놀이는 어떻게 하는 거죠”? 라고 말이다. 화평(평안)을 위해서는 배움과 헌신, 그리고 실천이 동시에 필요하다. 특별히 화평을 위해서는 숙달된 조교가 있어야만 악을 선으로 이기는 방법을 배울 수 있고, 참된 평안도 누릴 수가 있다. 막힌 담을 허신 예수님을 본받아 막힌 관계의 담을 허무는 그리스도인이 어떤 모습인지 우리는 배워야 한다.

기억절: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 14:27)

연구범위: 마 8:23~27 11:28~29, 롬 5:1~11, 12:9~21, 골 3:13~15, 히 12:14.

안식일 오후
평안의 챔피언이었던 바울은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엡 4:3)고 기록했다. 여기서 “힘써”로 번역된 헬라어는 명령형으로 어떤 수동성이나 ‘기다려 보자’는 태도를 배제하는 단어이다. 우리는 적극적으로 행동하여야 한다. 만약 집에서 말다툼을 한다면, 만약 교회에서 편 가르기를 한다면, 만약 서로 사랑하고 존경하기를 거절한다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확립하신 하나님의 평안을 부인하는 것이다.
‘평화를 위해 투쟁한다’는 말은 얼마나 아이러니한 말인가?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의 부인 엘리너 루즈벨트(Eleaner Roosevelt) 여사는 ‘미국의 목소리’라는 라디오 방송에서 이렇게 말했다. “평화에 대해 말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습니다. 그것을 믿어야 합니다. 그것을 믿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습니다. 그것을 실천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이루신 평안은 부단한 노력과 끊임없는 자기 성찰을 요구한다.
이번 주 교과를 공부하면서 우리는 다음과 같이 자문해 보아야 한다. ‘나는 과연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나를 위해 쟁취하신 그 평안을 누릴 가치가 있는가? 성령께서 평안을 매일의 나의 삶에 적용하시도록 그분과 어떻게 협력할 수 있는가?’

일요일(1월 17일)
하나님과 더불어 누리는 화평(롬 5:1)

도입)
화평(和平)이란 “마음이 평안한 것 혹은 나라 사이가 화목하고 평화스러운 것”을 말한다. 사랑이 있는 집에는 참된 안식과 평안이 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머무는 곳에는 어느 곳이든지 천국이 된다. 그러나 세상을 보고 사람을 보고, 사건과 환경 속에서 격동을 받으면 주님을 잃고 만다. 참된 사랑, 즉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사람이라면 바로 이러한 화평이 있다. 진정한 휴식과 안식이 있는 것이다. 화평은 하나님의 사랑과 영적인 기쁨을 체험한데서 우러나는 내, 외적 평안의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화평은 예수 그리스도의 선물이다(요 14:27). 그것은 역경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내적 안식과 평정이며 인간의 이해를 뛰어넘는 것이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 14:27). 여기서는 우리의 모든 나날들이 하나님의 손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모든 의식에서부터 오는 마음의 평온함과 안온함을 의미한다. 우리의 마음이 늘 하나님을 향하고 상호간에 사랑의 교제를 누린다면, 사랑과 희락 위에 화평이 임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롬 5:1)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을 누리는 것은 그분의 임재 안에서 평안함을 느끼는 것 이상을 의미한다. 그것은 “전에 악한 행실로 멀리 떠나 마음으로 원수가 되었던”(골 1:21) 우리가 그분과 더불어 화목한 관계를 회복했음을 뜻한다. 전에는 하나님과 더불어 불화하였고 그분과 원수 되었던 우리가 이제는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으로 말미암아 그분의 친구가 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어떤 의미에서 이 화평은 작게 시작하여 조금씩 커지는 그런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단번에 이루어진 하나님과의 화목이다. 이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 하나님과의 화평은 점점 증대되어 나가는 것이기도 하다. 우리가 하나님의 길을 더욱 분명히 깨닫고 그 길을 걸으면 걸을수록 우리는 그분의 자녀로 살아가는 능력을 더 많이 받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과의 화평은 참으로 성령의 열매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성숙해질 때 그분의 왕국에서 살아가는 축복과 은혜를 더 많이 경험하게 된다. 이와 같은 성장은 계속되어 마침내 우리는, “주의 법을 사랑하는 자에게는 큰 평안이 있으니 저희에게 장애물이 없으리이다.”(시 119:165)라고 말할 수 있게 된다.
골로새서 1:20~22은 죄가 세상에 들어옴으로 비로소 하나님께서 자비롭고 관대한 분이 되신 것이 아니라, 그분은 영원 전부터 그런 속성을 지니고 계셨음을 말해 준다. 구원의 계획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처음부터 우리를 용서해 주기를 원하셨음을 보여준다.

1. 로마서 5:1~11에서 중요한 핵심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자신의 말로 요약해 보십시오.
답:

교훈: 우리 하나님께서는 죄인과 더불어 화목하기를 원하셔서 예수 그리스도를 화목제물로 보내주셨다. 우리는 그분 안에서 참된 평안을 누릴 수 있다.

부가적용)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과 화평을 누릴 수 있겠는가? 우리의 모든 죄가 용서받았을 때이다. 어떻게 우리의 죄가 용서를 받는가? 돈으로나 참회와 단식의 고통을 통해서는 안된다. 루터는 죄 용서와 마음의 평안을 얻기 위해서, 로마교황청의 계단을 무릎으로 기어 올라가기도 하였다. 롬 5:1절에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여기에 비밀이 있다. 우리의 죄와 허물을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 누구도 자신을 변화시킬 수 없고 누구도 하나님과 참된 평화를 가질 수 없는데 오직 십자가의 주님을 만날 때에 변화가 된다. 그리고 참된 평안이 그 속에서 이루어지게 된다.

월요일(1월 18일)
평안을 발견함 - 1 (마 11:28~29)

도입)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사랑하는 자에게 참된 평안을 주기를 원하시는 것이 중심의 사랑이다. 하나님 자체가 평안의 하나님인 동시에 사람에게 참된 평안을 주기 위한 활동은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역사이다. 하나님께서 천지 만물을 창조하시고 사람을 낸 것은 당신에게 있는 평강을 같이 누리자는 것이 창조주의 목적이다. 사람이 이마에 땀을 흘리지 않고도 평안히 살 수 있게 한 것이 에덴동산의 축복이요, 사람으로 하여금 영원히 죽지 않고 생명과를 먹게 하자는 것이 인생에게 주시는 약속의 말씀이었다. 간단히 말하자면 세계인류는 참된 평안을 요구하는 것이 동일한 소망일 것이다. 그리나 어리석은 인간들은 이 평안을 어디 가서 찾느냐 하는 것을 깨닫지 못하므로 평안을 구하다가 죄를 짓고 마는 것이다.

숫자 1을 ‘매우 불안함’, 10을 ‘매우 평안함’으로 할 때, 당신은 이 척도에서 숫자 어디에 해당하는가? 사람들은 개인적 평안을 찾는 일에 점점 더 실망감을 느끼고 있다. 마태복음 11:28~29에 기록된 예수님의 초청에는 비록 ‘평안’이라는 단어가 나오지는 않지만, 쉼을 주고 새롭게 하며, 평안을 주시겠다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1.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라(마 11:28~29)는 말씀을 숙고해 보십시오. 예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우리는 어떻게 이 놀라운 약속의 실체를 경험할 수 있습니까?
답:
예수께서는 이 구절에서, 우리에게 평안을 선물로 주시겠다고 하셨는가, 아니면 단지 그것을 얻는 방법을 보여주시겠다고 하셨는가? 그분께서는 개인적인 평안이 어떤 원인의 결과로 주어지는지 말씀하시면서 쉼을 주시겠다고 초청하지 않으셨는가?
“불안이 일어나는 것은 자기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 그리스도의 말씀을 믿고 전적으로 예수님의 보호하심에 영혼을 맡기고 또 그분의 명령에 생애를 맡기는 자들은 평강과 평온함을 얻을 것이다. 예수께서 당신의 임재로서 그들을 기쁘게 하실 때에는 세상의 아무것도 그들을 슬프게 하지 못한다. 완전한 순종에는 완전한 쉼이 있다. ‘주께서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에 평강으로 지키시리니 이는 그가 주를 의뢰함이니이다’(사 26:3).”(시대의 소망, 330~331)

2.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 어떻게 우리를 불안과 불행으로 이끌어 갑니까?
답:

교훈: 예수 그리스도께 온전히 맡기고 순종할 때 진정한 쉼과 평안이 이르러 온다. 우리는 자신을 의존하는 대신 예수님을 전적으로 의뢰함으로 참된 쉼을 누리자.

부가적용)
1862년 2월 링컨 대통령의 아들 '윌리'가 죽은 지 얼마 못 가 다른 아들 '데드'가 심각한 병에 걸리고 말았다. 병원을 찾은 링컨은 '내 생애에 가장 큰 어려움이구나. 도대체 무엇 때문일까?'라고 중얼거렸다. 그 말을 들은 크리스챤 간호원은 자신은 남편과 두 아들을 모두 잃은 미망인이라고 밝히며, 그러한 시련 후에 오히려 하나님의 능력을 더욱 알게 되었다고 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죠?' '모든 것을 이미 잘 알고 계시는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함으로 가능하죠'. '처음 불행이 닥쳤을 때도 완전히 복종했나요?'. '아니요. 하지만 불행이 닥칠수록 신뢰를 가지게 되었고 완전히 복종할 수 있었어요'. 며칠 후 그녀를 찾아온 링컨은 '그때 참 고마웠습니다. 이제 어린아이와 같은 심정으로 하나님을 신뢰하게 되었습니다'라고 고백하였다고 한다. 만일 기독교의 신앙이 어떤 세상 정치에 국한된 것이라면 참된 평안을 보전할 수 없다. 이 평안은 세상 나라에 속한 것이 아니고 하늘나라의 지배를 받는 평안이라는 것이니 세상 임금이라는 것은 자체에 평안을 줄 만한 인격이 없는 임금이 되기 때문이다. 우리 자신과 세계 평화의 완전한 평안을 주시고 이룰 수 있는 분은 오직 그리스도밖에 없다는 사실을 믿을 것 같으면 참된 쉼을 얻게 될 것이다.

화요일(1월 19일)
평안을 발견함 - 2 (요 14:27)

도입)
독일의 대 문학가였던 괴테는 80세에 이런 고백을 했다. “나는 인생을 살면서 단 몇 주 동안이라도 행복한 마음을 가진 적이 없었다.” 평안과 행복을 느끼고자 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는 것이다. 이전에 나폴레옹도 유럽을 정복하려다가 실패한 후 마지막 그의 노년에 외딴 섬에 유배되었다. 그러한 그에게 어떤 기자가 인터뷰를 하였다. “지난날을 회상할 때 가장 행복했던 순간은 언제였습니까?” 나폴레옹은 이렇게 말을 했다. “알프스 산맥을 넘을 때였지. 잠시 전투가 그친 어느 주일날. 산 아래 교회에서 은은한 종소리가 울려왔지. 그 소리에 이끌려 교회로 들어갔다네. 나는 그때 눈물을 흘리며 인생 최고의 평안함을 맛보았다네. 그러나 그 때 외에는 참 평안을 누리지 못했다네.” 그렇다. 사람들은 행복을 얻기 위해 세상의 권력, 명예, 부귀를 얻으려 애쓰지만 다 허무하게 된다. 이런 유명한 글이 있다. “돈으로 약은 살 수 있으나 건강은 살 수 없으며 돈으로 침대는 살 수 있으나 평안한 잠은 살 수 없다.” 그렇다. 불안하면 행복한 것이 아니다. 불안은 걱정의 어머니이다. 불안하면 걱정이 많다. 애들은 애들대로, 사업은 사업대로, 현재도, 미래도 걱정이다. 불안하면 마음도 각박해진다. 스트레스가 많아지고 건강도 해친다. 불안이 많으면 가정에서도 싸움이 잦아진다. 불안하면 누구든 참 만족과 기쁨과 행복을 누리지 못하는 것이다. 반대로 평안하면 마음에 만족과 기쁨이 생긴다. 만사에 걱정이 없고 사는 것이 즐겁다. 우동만 먹어도 자장면만 먹어도 기쁘다.

두 명의 화가가 있었다. 이들은 ‘평안’이라는 주제로 각각 자신이 생각하는 바를 그림으로 표현했다. 한 사람은 먼 산 그림자가 은은히 잠겨 있는 고요한 호수의 풍경을 그렸다. 그런데 다른 한 사람은 억수같이 쏟아지는 폭포 아래 휘어져 있는 자작나무 가지에 둥지를 틀고 물보라에 거의 젖은 채 쉬고 있는 한 마리의 새를 그렸다.
어느 그림이 평안의 진수를 묘사했는가? 이 세상의 소용돌이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는 고적한 산속의 호수와 같은 쉼을 찾기가 어렵다. 오히려 우리는 현실의 삶의 소란함 가운데서 쉼을 찾아야할 때가 더 많다.

1. 마태복음 8:23~27에서 큰 폭풍을 잔잔하게 하신 예수님의 이야기를 읽으십시오(참조 막 4:35~41, 눅 8:22~25). 그 상황이 독특하긴 하지만 이 이야기에서 우리를 위한 어떤 교훈을 이끌어낼 수 있을까요? 즉 우리를 위한 메시지는 무엇이며, 이 사건을 어떻게 우리의 다양한 삶에 적용할 수 있을까요?
답:
왜 예수께서는 당신의 제자들이 평안을 갖는 것에 관심을 가지셨다고 생각하는가?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평안에 대한 아름다운 약속을 남기셨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요 14:27). 세상이 주는 평안과 예수께서 제공하시는 평안은 어떻게 다른가?
우리는 결코 평안을 ‘전혀 문제가 없는 삶’으로 오해하지 말아야 한다. 아무리 신실한 그리스도인이라 할지라도 아무런 시험과 고통과 시련을 겪지 않는 사람은 없다. 참으로 어떤 이들은 더 많은 시련을 당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평안을 가진 사람은 그 상황에 압도당하지 않고 그러한 상황에 대처할 줄을 안다. 평안은 우리를 사랑으로 돌보시는 하나님에 대한 깊은 신뢰에서 나오는데, 그분은 우리가 어떤 시련을 통과할지를 아시며 어떤 일이 닥치더라도 우리를 버리지 않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이다.

교훈: 예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평안은 세상이 주는 평안과 비교할 수 없다. 우리는 그분을 전적으로 의지함으로써 이 평안을 소유해야겠다.

부가적용)
어머니 품에서 잠든 아기의 얼굴은 무척 평안하다. 어디에서도 불안이나 근심, 두려움은 찾아볼 수 없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참된 평안을 누리려면 평안의 주인이신 그리스도께 다가가야 한다. 요한복음 14장 27절을 보면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참된 평안은 오직 위로부터 하나님께서 주셔야만 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임하는 것이다. 자신이 '어디에서 와서 무엇 때문에 살며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사람들은 어떤 일이 생기면 근심 걱정하며 참 평안을 얻지 못하고 고통 가운데 살아갈 수밖에 없다. 심지어는 자포자기하여 허랑방탕한 삶을 택한다. 그러나 삶의 목적을 분명히 아는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 사람의 본분을 찾아 참된 평안을 누리며 가치 있는 삶을 영위하게 되는 것이다.

수요일(1월 20일)
가정에서의 화평(히 12:14)

도입)
"마른 떡 한 조각만 있고도 화목하는 것이 육선이 집에 가득하고 다투는 것보다 나으니라“(잠17:1) 어느 마을에 화평한 가정이 있었다. 하루는 친구가 와서 화평하게 사는 방법을 물었다. 주인은 곧 큰 아들을 불러서 밭에 이삭이 갓 패인 보리를 베어 묶어세우라고 하였다. 그러자 아들은 보리를 벨 때가 아니지만 아버지가 하라는 대로 하였다. 그런데 아버지는 그것을 중단시키고 이제는 소를 지붕위로 올리라고 하니 아들은 또 소를 지붕에다 끌어올리려고 애썼다. 이것을 본 친구는 '화평의 비결이 이것이구나'하고 깨닫게 되었다. 물론 이 아버지는 자녀들이나 가족에게 그만한 신뢰를 주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본 친구가 곧장 집으로 가서 아들을 불러서 "보리를 베어 묶어라"라고 하자 아들이 대답하기를 "아버지 식전에 어디 갔다 오시더니 노망이 들었소?"하며 말을 듣지 않았다. 이것을 본 아버지는 "우리 가정은 화평하긴 틀렸구나."하며 한탄하였단다. 우리 행복의 근원은 정신적인 것에 있지 물질적인 환경에 있는 것이 아니다. 부부간에 갈등 없이 서로 신뢰하고 사랑하며, 부모 자식 간에 서로 사랑하고 존경하고 사는 가정에 흐르는 훈훈한 분위기는 실로 그 무엇으로도 살 수 없는 행복이다. 가정의 행복이야말로 가장 큰 재산이라는 것을 알고 화목하고 행복한 가정을 이루는 데 힘써야겠다. 평안은 성경 헬라어로 에이레네라고 부른다. 이 말은 ‘결합하다’, ‘연결되다’ 라는 뜻이다. 평안함은 곧 사랑으로 함께 하시는 하나님과 연결될 때에 비로소 생겨나게 되는 것이다. 사실 평안이란 충분한 자원이 있을 때 생긴다. 누구든 그 마음과 삶에 자신을 사랑으로 도울 수 있는 완전한 자원, 다함이 없는 자원이 있다면 평안할 수 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 세상의 어떤 사람도, 어떤 것도 우리를 완전하게 도울 수 없다. 그래서 사람들은 한정된 자원, 한계들 앞에서 불안해하는 것이다. 사람은 영원하신 하나님 안에 있을 때만이, 하나님의 그 품 안에 있어 하나님과 연결될 때만이 평안하다.

1.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히 12:14).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롬 12:18). 우리는 예수님의 생애를 통해 위의 두 성경절이 삶 속에 어떻게 적용될 수 있음을 배웁니까? 우리로 하여금 그러한 교훈을 우리의 실생활에서 실천하기 어렵게 만드는 요인은 무엇입니까?
답: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그리스도인이 되기에 가장 힘든 곳은 가정이다. 가정이 세상에서 가장 평화로운 곳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 참으로 안타깝다.
두 젊은이가 월남전에 참전하였다. 총알이 날아다니고 포탄이 터지는 상황이 전개되었다. 그런데 그런 맹렬한 전투 중에도 한 병사는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아니, 어떻게 그렇게 차분할 수 있지?”하고 동료가 묻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집에서 늘 겪던 상황인데 뭐!”

2. 로마서 12:9~12을 연구하십시오. 만일 실행하기만 하면 가정에 화평을 가져오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내용은 무엇입니까? 자신이 선택한 구절을 직접 실천해 봅시다.
답: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이 친히 제시하신 대단히 높은 표준을 따르도록 요청받고 있다. 우리 모두는 그 표준에 미치지 못했다. 이 말은, 우리가 예수님의 삶을 통해 나타난 원칙들 곧 사랑과 자아 희생의 원칙, 죄악과 더불어 타협하지 않는 자세 등을 나타낼 수 없다는 의미는 아니다.

교훈: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가정은 화평을 실천하는 훈련장이다. 가까운 가족들과 더불어 진정한 화평의 관계를 맺을 때 우리는 평화의 사자들이 될 수 있다.

부가적용)
집안 방에 있는 네 아내는 열매 많이 맺는 포도나무와 같고 상에  둘러앉은 네 아이들은 올리브나무의 묘목과도 같다.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이와 같이 복을 받는다.(시편 128:3-4) 가정은 하나님이 주신 축복의 요람이다. 가정은 사랑의 보금자리이다. 가정은 지친 몸을 쉴 수 있는  안식처이다. 남편은 아내를 위로해 주고 아내는 남편을 격려해 주고 부모는 자식을 사랑해주고 자녀는 부모님을 공경하는 가정은 행복한 가정이다. 이러한 가정은  이미 하나님 나라를 경험하고 있는 것이다. 가정을 화평하게 하는 것이 예수 믿는 사람의 의무이다.

목요일(1월 21일)
교회에서의 화평(마 5:23~24)

도입)
화평을 지키기 위해 매년 얼마나 막대한 돈이 들어가는 것을 알고 있는가? 많은 가정이 가족의 화평을 지키려고 전문 상담가들에게 많은 돈을 지불한다. 국제 관계에서 평화를 세우려 얼마나 많은 재정을 투자하는가? 북한의 핵 문제로 얼마나 많은 돈이 들어가고 있는가? 법원은 개인과 회사 간의 화평이 깨지며 늘어나는 소송문제로 업무가 마비될 지경이다. 세상은 화평하지 않으므로 고통당하고 있다. 싸우고 괴로워하는 삶이 너무 힘들기에 화평을 지키려고 안간힘을 쓴다. 그리스도인들은 화평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을 능력의 하나님, 창조의 하나님, 심판의 하나님으로 알고 있지만, 그와 동시에 화평의 하나님으로 여러 차례 말씀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은 주도적으로 반역자인 인간과 화평을 이루셨다. 하나님은 사람관계에서뿐 아니라 개개인의 화평의 창조자이시다. 하나님은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화평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그 화평을 받아 화평케 하는 삶을 세상에서 실천하라고 명령하셨다. 하나님의 은혜로 거듭나 하나님을 닮아가는 성도라면 당연히 화평, 하나님의 성품이 드러나야 한다. 화평은 성령의 열매이다. 화평케 하는 사람들은 성령님이 그들 안에서 일하고 계신 증거이다. 교회에서는 당연히 이러한 화평을 이루어내야 한다.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 들을 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마 5:23~24).

1. 이 구절에서 예수께서는 어떤 기본적인 원칙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계십니까? 그런데 우리의 삶에서 이러한 원칙을 실행하기가 왜 그렇게도 어렵습니까?
답:
예수께서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우리의 관계들을 중요하게 여기시는 것이 분명하다. 교인들 간에도 수년 동안 분노와 쓴 감정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드물지 않다. 만일 우리 모두가 이 가르침을 따른다면 얼마나 놀라운 변화가 일어날지 상상해 보라.

2. 마태복음 5:9에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가져야 할 어떤 특성들이 기록되어 있습니까? 그 의미는 무엇입니까?
답:

3. 골로새서 3:13~15에는 교인들 상호간에 관계를 맺는 3가지 방법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각각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답:
야고보서 3:17에 나타나 있는 그리스도인의 충만한 은혜의 물결을 주목해 보라.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벽과 거짓이 없나니, 화평케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약 3:17~18). 만일 우리가 성령께서 우리의 관계에 이러한 특성들을 배양하시도록 허락한다면 우리의 교회들은 어떤 모습으로 변하겠는가? 어떤 일들이 현저하게 사라지겠는가?

교훈: 예수께서는 형제와 화목하는 일이 하나님께 예배하는 일보다 선행되어야 함을 말씀하셨다. 성도간의 화목을 위해 작은 일부터 내가 먼저 실천해 보자.

부가적용)
성도들 간에 갈등을 풀지 않고 불화하게 지내는 것은 죄이다. 그것은 심각하고 큰 죄이다. 갈등을 제거하지 않으면 암처럼 삽시간에 온 교회에 퍼져 심각한 사태에 이르고 말 것이다. 그렇기에 불화케 만든 죄 문제는 빨리 대처할수록 좋은 것이다. 성도는 성도 사이에 화평을 세우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왜냐하면 성도는 한 몸이기 때문이다. 화평해야 주님이 기뻐하시고 주님께 영광을 돌리기 때문이다. 서로 물고 뜯을 때, 주님의 영광과 교회는 심각하게 상처를 입게 된다. 또 주님과 나의 관계가 깨어져 영적으로 치명적인 손해를 보게 된다. 그러므로 화평을 세우는 일은 누가 먼저가 아니라, 내가 먼저 해야 한다. 성도와의 갈등은 한 몸이므로 내가 먼저 화해하고 화목해야 한다. 만약 성도인 내가 어떤 불신자에게 잘못을 범했다면, 화평을 회복하기 위한 책임은 전적으로 내게 있다. 이때는 불화를 겪고 있는 성도에게 용서를 구하러 갈 때보다 더 자신을 낮추어야 한다. 불신자는 자비와 용서의 태도를 보이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용서하든 그렇지 않든 우리가 적극적으로 자신을 낮추어 용서를 빌어야 할 이유는,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삶을 계속 하려면 화평의 관계를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반대로 불신자가 내게 잘못을 했을 때에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우리는 잘못하고도 뻔뻔한 불신자에게 미워하여 복수할 방법을 찾아서는 안 된다. 성경은 성도들이 친히 복수하지 말라고 하신다. 롬 12;19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금요일(1월 22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독서과제: 시 4:3, 119:165, 사 26:3, 롬 8:6, 빌 4:7.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직전에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에게 평화의 유산을 위탁하셨다. 그분은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 14:27)고 말씀하셨다. 이 평화는 세상과 타협함으로써 얻는 평화가 아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결코 악과 타협함으로 평화를 얻지 않으셨다.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제자들에게 맡기신 평화는 외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내적인 것으로서, 그분의 증인들이 시련과 난관을 통과할 때 그들과 항상 함께 할 평안이었다.”(사도행적, 84)
“으뜸이 되려는 투쟁은 마침내 하늘 왕국에서 제외될 자들의 정신을 나타낸다. 단순히 상대편 사역자가 내가 제일 좋다고 생각하는 방법대로 일하지 않거나 나의 수고를 알아주지 않는다고 하여 상대방을 비난하고 허물을 찾는 마음에는 그리스도의 평강이 깃들 수 없다. 자기 형제들을 비난하고 비판하는 자는 사단의 일을 하는 자이므로 주님께서는 그를 결코 축복해 주실 수 없다.”(복음전도, 102)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1. 내가 출석하는 교회에 불가피하게 긴장과 불화가 생겨났을 때 교인들 간에 화평을 유지하기 위해 나는 어떤 일을 할 수 있을까요?

2. 매일의 삶에서 우리의 화평을 위협하는 어떤 상황들에 직면하게 됩니까? 그러한 때에 성경의 어떤 약속들을 주장할 수 있습니까?

3. 어떤 상황에서든지 주님을 신뢰하면 마침내 화평이 생겨난다고 말하기는 쉽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우리의 선택의 결과로 불편과 두려움이 초래되는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화평을 어렵게 만드는 상황을 타개해 나갈 수 있는 어떤 구체적인 단계들이 있을까요?

4. 이번 주 교과를 통해 새롭게 깨달은 영적 교훈이나, 한 주일을 살아가면서 꼭 실천하고 싶은 내용은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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