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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과 - 그들의 열매로 알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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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등불과기름 작성일09-12-27 21:26 조회4,57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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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01월02일(안) 일몰 오후5시25분

제1과 "그들의 열매로 알리라"

(핵심본문: 마 7:20) / (연구범위: 눅 13:7~9, 요 11:4, 12:28, 15:1~10, 딤후 3:5)

<기억절(記憶節)>
“이러므로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마 7:20)

<모두 이야기>
오늘의 기억절(記憶節)과 금주의 제1과의 제목(題目)에서 말하고자 하는 핵심은 열매에 의한 판단(判斷)이다. 판단은 다음의 두 가지 면에서 유효하다

⑴ 나무의 존재 의의(意義)는 그 열매이다.
나무를 심기는 쉬우나 그 나무가 자라서 결실을 맺기에는 오랜 인내가 요구 된다.
즉 말(言)이나, 결단(結團)이나, 선택(選擇)은 쉽지만, 행동과 실천(實踐)은 매우 어렵다.

⑵ 나무에 따라서 이미 그 열매의 종류와 질(質)이 정해져 있다.
바꿔 말하면, 열매를 보고서 그 나무를 알 수가 있다.
이는 끊임없는 성실과 인내(忍耐)로 열매 맺는 삶을 살아야 함을 교훈해 준다.
이 말은 회개(悔改)와 결단(結團)이 무의미(無意味)하다는 것이 아니라,
회개와 중생의 결단은 열매로 맺어져야 참으로 유효(有效)하다는 것이다.

<요점(要點)>
그리스도인의 성장의 경험에는 시간이 걸린다.
성장의 동력을 무시하면 침체(沈滯)가 이르러 오고 마침내 파멸(破滅)을 맛보게 된다. 자아(自我)를 바라보는 대신 예수님을 바라볼 때 우리는 용기(勇氣)와 확신(確信)을 갖게 된다.

일요일(12월 27일)
<“나무는 그 열매로 아나니”(눅 6:44)

⑴ 아름다운 열매 (좋은 열매)
좋은 외관, 좋은 향기, 좋은 맛을 가진 열매를 말한다.
그것은 모든 점에서 매력적이다. "성령의 열매"는 갈라디아서 5장22-23절에 나타난다.
☞ 좋은 나무 → 품성이 건전한 사람은 자동적으로 말과 행동으로 그 품성을 나타낼 것이다.
오직 선한 성품이 "선한 것을 내고" 좋은 나무는 언제든지 그 좋은 실과로 알려지고

⑵ 나쁜 열매 (못된 열매)
나쁜 열매는 육체의 일로 갈라디아서 5장 19-21절에 나열되어 있다.
이사야 선지자가 말씀하는 여호와의 포도원 비유에 나타난 "들 포도" (사 5:1-7)와,
예레미아 선지자가 말씀하는 극히 악(惡)하여 먹을 수 없는 "무화과"(렘 24:2, 8)를 참고하여 보자.
악한 성품은 "악한 것을"낸다. "썩은 나무"는 "악한 실과"로 알려진다.

<성령의 열매와 육체의 열매>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매일매일 죄를 이겨 승리하는 생활을 하게하며,
육체는 우리를 죄에 얽매어 놓는다.

<십자가와 세상> 십자가는 사랑과 희생을 의미하며, 세상은 세력과 이기심을 나타낸다.
<성경 디모데후서 3장5절에는>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이 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라고 기록 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닮은 품성으로의 변화보다는 눈에 보이는 이적 행함을 성령 충만의 증거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이 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딤후 3:5)

“못된 열매 맺는 좋은 나무가 없고 또 좋은 열매 맺는 못된 나무가 없느니라. 나무는 각각 그 열매로 아나니 가시나무에서 무화과를, 또는 찔레에서 포도를 따지 못하느니라.”(눅 6:43~44)

나무는 그 열매로 알 수 있다고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사람은 그 자신이 고백하는 바를 통해서보다는 그의 됨됨이를 통해서 나타난다. 봉사를 위해 성령의 선물들이 교회에 주어졌다. 성령의 열매가 하나님의 자녀에게 주어질 때 삶에는 변화가 일어난다.

참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과 좋은 열매를 맺는다는 것은 그 됨됨이를 강조한 말이다. 훌륭한 배우가 마하트마 간디 역을 맡아 멋진 연기를 펼칠 수 있겠지만 결코 실제의 마하트마 간디가 될 수는 없다. 우리는 선하게 보일 수 있고 선한 말을 할 수 있으며, 심지어 선한 행동을 나타내 보일 수 있을지 모르지만 성령께서 우리에게 새 마음을 주시지 않으면 우리는 결코 선한 사람이 될 수 없다.

◉ <좋은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듯이>
“마치 좋은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듯이 참으로 주의 정원에 심겨진 나무는 영생에 이르는 선한 열매를 맺는다. 그를 두르고 있는 죄들을 이기고 마음에는 악한 생각들을 용납하지 않으며, 영혼의 전에서 악한 습관들을 말끔히 씻어낸다. 악한 쪽으로 치우친 성향들은 옳은 방향으로 돌이킨다. 나쁜 성벽들과 감정들은 변하여 새로운 행동 원칙이 생기고 품성은 새 표준을 갖게 된다. 이제 그리스도인이라는 나무에는 거룩한 기질들과 성화된 감정이라는 열매가 열린다. 온전한 변화가 일어난다. 이것이 성령께서 하시는 일이다.”(재림교 성경주석, 6권, 1080)

◉ 나무는 그 열매로 알듯이 사람도 그 행실의 열매로 알 수 있다.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으로 다른 사람을 속일 수는 있으나 하나님을 속일 수는 없다.

월요일(12월 28일)
<“나를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느니라.”(요 15:5)>

◈ 가전제품이 아무리 성품이 좋아도, 아무리 멋진 전구 등(燈)이라도 발전소에서부터 공급 받는 전원(電源)과 연결이 되어 있지 않으면 그 기능은 정상적으로 발휘될 수 없는 것과 같이,
온갖 나무의 열매들도 원 줄기에 매달려 있지 않으면 움이 돋고 잎이 나고 꽃이 필수가 없으며, 당연히 열매를 맺을 수가 없다. 그러므로 포도열매가 포도나무에 매달려 있는 것만으로 포도 열매가 맺은 것이지 가지가 스스로 무슨 노력을 해서 포도 열매가 맺은 것이 아니다.

◈ 한번 이루어진 예수님과의 연합은 지속되어야 하는데 이것은 우연한 접촉이나 연결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가지는 산포도 나무의 한 부분인 것을 말한다. 뿌리에서 가지로 생명과 힘과 과실의 풍성함을 전달하는 일은 끊임없이 계속 되어야 한다. 포도나무에 붙지 않는 가지는 살수가 없는 것이다. 즉 이 말씀은 너희가 나에게서 받은 생명은 계속적인 교통을 통해서만 유지 될 수 있다는 말씀이며. 예수님이 없이는 단 하나의 죄도 이길 수 없고 조그마한 유혹이라도 물리칠 수가 없다는 말씀이다. 예수님 안에 거한다는 것은 그분의 성령을 계속적으로 받아들여 그분에게 봉사하는 일에 전적으로 복종하는 생애를 의미하는 것을 말한다. 교통의 통로는 인간과 하나님사이에 계속적으로 열려있어야 한다. 포도나무 가지가 산 포도나무에서 수액(樹液)을 계속적으로 빨아올리는 것처럼 우리도 예수님께 매달려서 믿음으로 능력과 그분의 품성의 완전하심을 그분에게서 받아야 한다. 뿌리는 가지를 통하여 가장 먼 가지에 이르기 까지 영양분을 공급한다. 그와 같이 예수님께서는 모든 신자(信者)들에게 영적능력의 흐름을 전달하신다. 영혼이 그리스도께 연결되어 있는 한, 시들어 버리거나 부패할 위험은 없다. 포도나무의 생명은 가지들에 달린 향기로운 열매 가운데 명백히 나타날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살 때에 성령의 열매가 우리의 생애 가운데 나타나 보일 것이며 한 사람도 잃어버린바 되지 않을 것이다.
믿음으로 말미암는 참된 연합이 없이 그리스도와의 외형적인 연결이 있을 수도 있다.
신앙 고백이 사람들을 교회에서 자리를 차지하게 하지만 그러나 품성과 행동은 그들이 그리스도와 연결이 되어 있는지를 보일 것이다. (소망의 소망, 제73장(영) 675-677)

◈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롬 8:7)
사람은 자력으로 자신이 빠진 죄의 구렁에서 탈출하여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맺을 수 없다. (정로의 계단 18 참조) 자신의행위로 자신을 구원할 수 있다는 원칙을 고수하는 자는 누구든지 죄를 막을 어떤 방벽도 가질 수 없다. (시대의 소망 35-36 참조) 사람이 예수님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어떠한 결과가 초래될까?
이 조건은 "한번 은혜 안에 있으면 영원히 은혜 안에 있다"는 기만을 배격한다.
그리스도 안에 계속 거해온 사람들일지라도 그와의 관계를 끊고 잃어버림을 당할 수 있다. (히 6:4-6 참조)
구원(救援)은 끝까지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데에 달려있다. 는 말씀이다.

즉 잘린 가지로 대표되는 그리스도인은 종교의 형식은 지니고 있을지 모르지만, 활력은 부족하다. (딤후 3:5)
시험과 시련을 받을 때 그의 공언의 천박(淺薄)함이 드러난다. 잘린 가지들은 결국 모아서 태우듯이 열매를 맺지 않는 그리스도인은 신앙을 공언하지 않는 자들과 더불어 결국 멸망할 것이다. (마 10:28; 13:38-40; 25:41, 46)
여기서는 어떤 공공연한 불순종의 행위가 아니라, 단순히 태만의 죄를 언급하고 있다. 양과 염소의 비유를 살펴보라 (마 25:31-46). 왕의 왼편에 있는 자들은 실제적인 그리스도인의 의무를 태만히 했다는 이유로 왕국에서 제외된다.

<너희가 내안에 거(居)하고>
사람들이 그리스도 안에 거할 때 그리스도는 그들 안에 거하며 그들은 신의 성품에 참여하게 된다. (벧후 1:4)
그들의 생각은 하나님의 뜻과 일치하여 그들은 그 뜻에 조화되는 요청만을 하게 된다.
(참조 요일 5:14; 시대의 소망 668). 더욱이 적절한 응답을 방해하는 어떤 죄도 끼어들지 않는다.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그리스도의 내주(內住)는 전적으로 신비적이거나 불가해한 경험이 아님을 보여준다.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받아들임으로써 그를 받아들인다. 그들이 그 말씀을 먹을 때 그것은 마음을 계몽 시킨다. 그리고 그들이 그 말씀을 따르려는 지성적인 선택을 하고 가능케 하시는 하늘의 능력을 통하여 전적으로 순종할 때 영광의 소망인 그리스도가 마음속에 거하게 된다. (골 1:27). 더 나아가서 이 경험이 계속 되게 하려면 그들은 말씀을 날마다 먹어야 한다. <본교 성경주석(한) 5권687-688 p>

<과실을 많이 맺으려면>
과원 지기는 자기가 돌보는 포도나무에 열매가 많이 맺힐 때 영광을 얻는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형상이 하나님을 따르는 자들의 생애 속에 반영될 때 그분께 영광이 이르러 온다.
사단은 하나님의 요구 사항들은 너무 가혹하며, 따라서 사람들이 그리스도인 완전의 이상에 도달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하나님의 품성은 사람들이 그분의 은혜를 통하여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될 때 옹호 된다.

<나의 사랑 안에>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것은 그의 사랑의 피난처 안에 거하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에 대한 그리스도의 사랑이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만큼이나 항구적임을 알면 마음에 위안이 된다.
더욱이 하나님은 아들을 사랑하시는 그 동일한 사랑으로 "친히 너희를 사랑하심이니라" (요 16:27 R. H 1890.11.4) <본교 성경주석(한) 5권687-688 p>

◉ 예수께서는 '참' 포도나무라고 강조하신 이유는 사단은 우리가 참 포도나무이신 예수님께 접근하는 것을 방해하기 위해 온갖 종류의 거짓 포도나무를 세상에 두었다. 거짓이 무성한 이 세상에서 진리를 찾기 위해서는 탁월한 영적 식별력이 필요하다.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이어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게 하리라.”(마 24:24)

요한복음 15:5에 따르면, 예수께서는 우리를 가지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과 연결되어 있지 않은 삶은 열매 맺지 못하는 삶이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 15:5)

◉ <“내 안에 거하라”는 말씀의 의미>
“가지가 산 포도나무의 한 부분이 된다. 뿌리에서 가지로 생명과 힘과 과실의 풍성함을 전달하는 일은 끊임없이 계속된다. 포도나무에 붙지 않은 가지는 살 수 없다. 예수께서는 너희가 나를 떠나서는 살 수 없으리라고 말씀하셨다. 너희가 나에게서 받은 생명은 계속적인 교통을 통해서만 유지될 수 있다. 내가 없이는 너희는 단 하나의 죄도 이길 수 없고 조그마한 유혹이라도 물리칠 수 없다.”(시대의 소망, 675)

◉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않는 한 다른 어떤 조건이 충족되어도 결코 열매를 맺을 수 없듯이 우리는 예수님과 연결되어 있어야만 열매 맺는 생애를 살 수 있다.

화요일(12월 29일)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요 15:8)>

◈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갈 6:7)
우리가 성령(聖靈)을 위하여 심으면 영적(靈的)인 것을 거둘 것이요, 육체(肉體)를 위하여 심으면 도덕적(道德的)으로 연약(軟弱)한 것을 그 결실로 거둘 것이다. (갈 6:7-8)
우리가 씨를 얼마나 뿌렸느냐에 따라 추수의 양(量)은 결정된다. 비록 우리가 마음의 창고(倉庫)속에 많은 씨를 가지고 있을지라도, 그것을 적당한 땅에 심지 않는 이상 좋은 수확을 얻을 수 는 없다.

우리의 생각의 씨를 말과 행동으로 심어 보라. 하나님의 말씀은 언제나 그 말씀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다.
우리의 생활의 씨를 육체의 땅에 심지 말고 성령의 땅에 심으라. 성령의 땅에 심어진 씨는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할 것이나, 육체의 땅에 떨어진 씨는 썩은 열매를 내 놓을 뿐이다. 성령은 좋은 열매만을 맺는다. 육체는 악(惡)한 열매만을 맺는다. 많은 사람은 "내가 무엇을 심든 성실한 마음으로 심기만 하면 된다."고 자신을 기만(欺瞞) 한다. 자기중심의 생활은 결코 성령의 열매를 맺지 못한다. 씨를 뿌린 다든가 거둔 다든가 하는 말은 농사(農事)에 관한 말이다. 그리스도의 일꾼은 장사꾼이나 기계공장과 같이 사거나 팔거나 고치는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농사꾼과 같이 심고 거두는 일을 한다. 우리는 영혼(靈魂)을 대할 때 망가진 것을 고치는 것이 아니고, 다만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심는 것이다.

◈ “옛날에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모세는 저희의 겸손과 지혜를 가지고, 여호수아는 여러 재능을 가지고 하나님의 사업에 참가하였다. 미리암의 음악, 드보라의 용기와 믿음, 룻의 효성, 사무엘의 순종과 충성, 엘리야의 견인 불발의 충절, 엘리사의 부드러운 감화력 등 이 모든 것이 다 주의 사업에 필요했다. 이와 같이 오늘날에도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모든 사람이 실제적인 봉사를 통해 이 사업에 응해야 한다. 모든 선물은 당신의 나라의 발전과 당신의 성호를 영화롭게 하기 위하여 사용되어야 한다.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주로 받아들이는 모든 사람은 복음의 진리와 그것이 생애에 미치는 구원의 능력을 나타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성취할 수 있는 대책을 마련하지 않고는 아무것도 요구하지 아니하신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은혜를 힘입어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은 무엇이든지 이룰 수 있다. 하늘의 모든 부요함이 하나님의 백성을 통해 나타나야 한다.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가 내 제자가 되리라”(요 15:8). 하나님께서는 온 세상을 당신의 포도원이라고 주장하신다.”(실물, 301)

◉ (요 15:8)의 말씀은 예수님 안에 거할 때 자연스런 결과로서 열매가 맺히는데, 이는 우리 자신이 아닌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이 된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나타내는 것이 된다. 이유는 하나님이 포도원 농부이기 때문이다.

◉ <아버지께 영광을 돌림>
“하나님께서는 그대를 통하여 당신의 품성의 거룩함과 자비와 동정을 나타내기를 원하신다. 그러나 구주께서는 제자들에게 열매를 맺으려고 노력하라고 명령하지 않으신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고 예수께서는 말씀하신다. 말씀을 통하여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추종자들 속에 거하신다. 이것은 그분의 살을 먹고 그분의 피를 마시는 것으로 나타난바 된 그와 같은 긴요한 연합이다. 그리스도의 말씀은 영이요 생명이다. 말씀을 받아들임으로 그대들은 포도나무의 생명을 받는다.”(시대의 소망, 677)

◉ 우리가 성령의 열매를 맺는 궁극적인 목표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 우리는 잘못된 동기를 가지고 옳은 일을 행하고 있지는 않은지 성찰해 보아야 한다.

수요일(12월 30일)
<“더 많은 과실을 맺게 하려 하여”(요 15:2)>

◈ 옛 말에 손주를 귀여워하면 할아버지의 턱 에 수염이 남아나지 않는 다는 말이 있다.
자녀가 너무나 사랑스러워서 초달(楚撻)을 못하는 부모는 그 자녀를 버리는 결과를 초래한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다. 잠언에 (참조 : 잠언 13:24; 29:17; 10:17; 12:1; 15:10; 19:18; 22:15절)등등 많은 부모들이 자녀들에게 징계와 회초리를 망각하여 오냐 오냐 길어온 자녀들이 집밖에 나가서 물의를 빚게 되며 학교나 특히나 교회에서도 도무지 어른들의 말을 듣지 않는 지금의 풍조들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한국에서는 동방예의지국(東方禮義之國))이라 하여 참으로 아름다운 미풍양속(美風良俗)이라는 말들이 우리의 삶속에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나이 많이 드신 분들이 하나 같이 느끼는 것은, 그러한 일들을 거의 찾아 볼 수 없는 현 세태를 절감하며 살고 있으며, 또한 마음먹기를 포기했다고 할까요? 외면 한다고 할까요? 체념했다고 표현 할까요?
참으로 많이 변해있는 것이 사실이다.

☞ 전자(前字)에 서술한 일예(一例)는 오늘 요한복음15장2절의 전정(剪定)에 해당하는 예(例)로 인용하고 싶어서입니다. 시련과 전정(剪定)을 허락하시는 하나님의 교훈을 깊이 새기며 농부가 전정(剪定)을 하는 이유를 깊이 우리의 삶에서 적용합시다.

◈ <전정(剪定)>
만일 그들이 과실을 맺지 않으면 그들은 거짓 가지들이다.
그들이 그리스도에게서 분리되는 것은 죽은 가지에서 예증된 바와 같이 완전한 멸망을 의미한다.
“무릇 과실을 맺는 가지는 더 과실을 맺게 하려 하여 이를 깨끗하게 하시느니라.” 예수님을 따라 다닌 선택받은 열 두 제자로부터 한 제자는 시들어진 가지로서 곧 찍어 버림을 당할 것이었으며 나머지 제자들은 전정하는 칼의 쓰라린 시련을 통과해야만 하였다.

예수께서는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께서는 그대를 통하여 당신의 품성의 거룩함과 자비와 동정을 나타내기를 원하신다. 그러나 구주께서는 제자들에게 열매를 맺으려고 노력하라고 명령하지 않으신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고 예수께서는 말씀하신다. 말씀을 통하여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추종자들 속에 거하신다. 이것은 그분의 살을 먹고 그분의 피를 마시는 것으로 나타난바 된 그와 같은 긴요한 연합이 다. 그리스도의 말씀은 영이요 생명이다. 말씀을 받아들임으로 그대들은 포도나무의 생명을 받는다. 그대들은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마 4:4) 살 것이다. 그대들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생명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처럼 같은 열매를 생산한다. 그리스도 안에 살고 그리스도에게 부착되어 그리스도의 공급을 받으며 그리스도에게서 영양분을 흡수한다면 그대들은 그리스도와 같은 열매를 맺을 것이다.”(소망의 소망, 제73장(영) 675-677)

◉ 추수의 계절이 끝나면 농부는 포도밭에서 대부분의 포도나무를 전정한다. 다음 해의 수확은 어떤 가지를 남겨 두느냐에 달려 있기 때문에 농부는 신중하여야 한다. 전정의 비결은, 수확과 포도나무 사이에 균형을 이루는 것이다. 가지를 너무 많이 남겨 두거나 너무 적게 남겨 두어도 안 된다. 전정을 충분히 하지 않으므로 열매가 너무 많이 맺히게 되면, 그 이듬해 포도나무의 성장은 약해지고 수확량도 떨어지게 된다. 적절한 균형을 찾는 것이 기술이다.

◉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시험의 자리에 두심으로 그들이 위로부터 오는 능력을 신뢰하는지를 보고자 하신다. 그분께서는 사람이 보는 것처럼 보지 않으신다. 그분은 자주 인간적인 연결을 끊으시고 사람들이 스스로 완벽하다고 생각하는 계획을 변경시키신다. 사람이 생각하는 것은 그의 영적 혹은 세속적 관심사로 인해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기 위해 가져야 할 경험과 모순이 될 수도 있다. 그가 가치 있게 여기는 정로에서 멀리 벗어나 있을 수도 있다.

◉ 시험은 이 땅에서 천국에 이르는 날까지 계속 따라다닐 것이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천국에 이르는 길을 좁은 길이라 부른다. 성품은 시험 받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종교의 외형을 붙잡고 있는 많은 명목상의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성향 즉 자신의 길과 교만과 야망을 고집하는 성향에 의해 방해받게 될 것이다. 주님의 허락에 의해 매서운 시험이 그들에게 닥칠 때 그들은 참된 신앙의 결핍과 그리스도의 온유함과 겸손함의 부족을 느끼고 성령의 필요를 절감하게 될 것이다.”(하늘 처소에서, 266)

◉ <하나님의 손에 들린 전정(剪定)의 칼>
“예수께서는 엄숙하고도 친절하게 농부의 의도를 설명하셨다. 가지를 치는 일은 고통을 유발할 것이지만 칼을 대시는 분은 아버지시다. 아버지께서는 난폭한 손으로나 무관심한 마음으로 일하지 않으신다. 땅에 늘어지는 가지들이 있다. 이것들은 줄기가 땅에 붙지 않도록 잘라 버려야 한다. 그것들은 하늘로 뻗어 나아가야 하며 그들을 지탱해 주는 것을 하나님 안에서 찾아야 한다. 과실에 전달해야 할 수액을 소모해 버리는 지나치게 무성한 잎들은 잘라 버려야 한다. 너무 자란 것들은 잘리움을 받아서 의의 태양이 치료하는 광선을 발하도록 기회를 주어야 한다. 농부는 과실이 더욱 알차고 더욱 많이 열리도록 하기 위하여 해롭게 자라나는 곳을 잘라 버린다.”(시대의 소망, 676)

열매 맺지 않는 가지를 잘라내는 것은 심판과 관련된 말씀이다.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리워 말라지나니 사람들이 이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요15:6) 그러므로 가지를 자른다는 것을 개인이 가진 부적절한 것들을 자른다는 것에만 적용하는 것은 이 본문을 올바르게 적용한 것이라고 볼 수 없다.

그러나 이미 말한 대로 개인에게도 적용할 수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므로 모든 내용을 잘 검토하여 기본적 적용과 부수적 적용을 바르게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더 많은 열매를 맺게 하시려고 시련의 전정을 허락하시는데, 이것은 궁극적으로 우리의 영적 유익을 위한 것이다.

목요일(12월 31일)
<“실과(實果)가 열면 좋으려니와 그렇지 않으면 …” (눅 13:9)>

◈ 누가복음 13장6-9절의 무화과나무 비유는
예수님께서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를 보고서 저주 하시자,
그 나무가 말라버린 사건(마 21:19-20; 막 11:12-14, 20-21절)을 연상 시켜준다.
여기서 무화과나무는 유대인들(오늘날 영적(靈的) 이스라엘 백성들)을 말한다, (눅 8:21).
또한 열매는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이미 얻은 구원(救援)의 결과가 밖으로 드러나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리고 주인은 하나님을, 포도원 지기는 예수님 자신을 상징한다.
⑴ 이 세상 끝날 에는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이 있을 것이며 (마 25:31-46)
⑵ 하나님께선 모든 사람들이 회개(悔改)하고 하나님에게로 돌아와,
그 같은 심판을 면(免)하게 되기를 원하시나 (겔 33:11)
⑶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에도 분명하게 정해진 시한(時限)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이를 명심해야 할 것이다.

◈ 1. “좋은 포도 맺기를 바랐더니 들 포도를 맺혔도다”(사 5:2). 그리스도 당시의 사람들은 그 전 시대의 유대인들보다 더 경건한 체는 했으나 오히려 하나님의 영의 감화는 결핍되어 있었다. 요셉의 생애를 그처럼 향내나게 하고 아름답게 한 보배로운 품성의 열매는 유대 백성 중에서는 나타나지 않았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을 보내사 열매를 찾으셨으나 얻지 못하셨다. 이스라엘 백성은 땅을 폐하는 자들이었다. 이 백성의 존재가 오히려 저주가 되었다. 그 이유는 이 백성이 열매맺을 다른 나무가 차지할 자리를 대신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백성이 하나님께서 세상에 주시는 축복을 빼앗아갔다. 이스라엘 백성은 세상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올바로 소개하지 못했다. 그들은 단순히 쓸데없는 물건이 되었을 뿐 아니라 하나의 결정적인 방해물이 되었다. 그들의 종교는 사람들을 너무나 잘못 인도해서 그들을 구원하는 대신에 멸망시키고 있었다.

2. 비유 속에서 포도원지기는 그 나무가 열매를 맺지 않으면 찍어 버리겠다는 선고에 대하여 아무런 이의도 제기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그 열매 없는 나무에 대하여 포도원 주인의 관심을 알고 있었을 뿐 아니라 그도 관심을 갖고 있었다. 그 나무가 잘 자라서 열매를 많이 맺는 것을 보는 것보다 그를 더 기쁘게 해주는 것은 없었다. 그는 그 포도원 주인의 요구에 대답하여 말하기를 “주인이여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내가 두루 파고 거름을 주리니 이후에 만일 실과가 열면 이어니와”라고 하였다.

3. 과원지기는 그처럼 희망이 없어 보이는 나무이지만 가꾸기를 거절하지 않았다. 그는 나무에 더 많은 손질을 서슴지 않았다. 그는 포도원의 환경을 가장 좋게 만들고 온갖 주의를 다 기울일 것이다.
포도원 주인과 포도원지기는 무화과나무에 대하여 같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이와같이 하늘 아버지와 아들의 선민(選民) 즉 이스라엘에 대한 사랑은 동일하였다. 그리스도께서는 청중들에게 좀더 기회가 주어질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들로 하여금 세상에 축복이 될 열매를 맺는 의의 나무가 되도록 하나님의 사랑이 고안해 낼 수 있는 온갖 방법이 다 동원될 것이다.

4. 예수께서는 비유 속에서 과원지기의 수고의 결과에 대해서는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다. 거기서 그의 이야기는 중단된다. 이 이야기의 결론은 그분의 말씀을 들은 세대에게 맡겨졌다. 즉 그들은 “그렇지 않으면 찍어 버리”라는 경고를 받았다. 다시는 철회될 수 없는 그 선고가 발해지느냐 그렇지 않느냐의 여부는 그들에게 달려 있었다. 그 진노의 날은 매우 가까왔다. 포도원지기는 자비롭게도 이미 이스라엘 백성에게 내린 재난을 통하여 열매 맺지 않는 나무의 멸망에 대하여 미리 경고하셨다.

5. 발해진 경고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적용되는 것이다. 무관심한 자들이여, 그대들은 주의 포도원의 열매 없는 나무가 아닌가? 운명을 결정하는 말이 오래지 않아 그대들을 향하여 선고되지 않겠는가? 그대들은 얼마나 오랫동안 하나님의 선물을 받아왔는가? 또 주께서는 얼마나 오랫동안 그대의 사랑의 보답을 바라고 기다려 오셨는가? 하나님의 포도원에 심겨지고 포도원지기의 주의 깊은 돌봄을 받아온 그대의 특권은 얼마나 놀라운 것인가! 얼마나 자주 부드러운 복음의 기별이 그대의 마음에 감동을 주었던가! 그대는 그리스도의 이름을 지니고 있으며 외적으로는 예수의 몸된 교회의 일원이지만 오히려 크신 사랑의 마음과는 연결되어 있지 않은 자이다. 그리스도의 생명의 조류가 그대를 통해 흐르지 않고 있다. 그리스도의 품성의 아름다운 덕성인 “성령의 열매”가 그대의 생애에서 보이지 않는다.

6. 열매 맺지 않은 나무도 비와 햇빛과 과원지기의 돌봄을 받고 있다. 그 나무는 땅에서 양분을 빨아들인다. 그러나 열매 맺지 않는 가지는 땅을 어둡게 하기 때문에 열매를 맺을 나무도 그 그늘 때문에 번성할 수 없게 된다. 이와같이 그대에게 아낌없이 부어주신 하나님의 선물도 세상에 아무런 축복을 나누어 주지 못한다. 그대가 없었다면 응당 다른 사람에게 돌아갈 특권을 그대는 빼앗고 있다.

7. 그대는 아마 희미하게나마 그대가 땅만 못쓰게 하는 자임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몹시 자비로우시기 때문에 아직 그대를 찍어 버리지 않고 계신다. 그는 그대를 냉정한 눈으로 보시지 않으신다. 그는 무관심하게 그대에게서 돌아서지 아니하시며 그대가 죽도록 내버려 두지도 아니하신다. 그분은 그대를 바라보시며 수백년 전에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 외치시던 말씀 곧 “에브라임이여 내가 어찌 너를 놓겠느냐 이스라엘이여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 내가 나의 맹렬한 진노를 발하지 아니하며 내가 다시는 에브라임을 멸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내가 사람이 아니요 하나님임이라”(호 11:8, 9)는 말씀을 외치신다. 긍휼이 많으신 구주께서는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내가 두루 파고 거름을 주겠나이다”라고 그대들을 위하여 대언하시고 계시다.

8. 이 연장된 은혜의 기간중에 그칠 줄 모르는 꾸준한 사랑으로 그리스도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어떠한 봉사를 하셨는지 생각해 보라. 그는 십자가상에서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 23:34)라고 기도하셨다. 그분의 승천 후에 복음은 먼저 예루살렘에 전파되었다. 거기서 성령을 부어 주셨고 거기서 초대 교회가 부활하신 구주의 권능을 나타냈다. 거기서 스데반이 “천사의 얼굴과 같”(행 6:15)은 얼굴로 주를 증거한 후에 죽었다. 하늘이 줄 수 있는 것은 모두 주어졌다. 그리스도께서는 “내 포도원을 위하여 행한 것 외에 무엇을 더할 것이 있었으랴”(사 5:4)고 말씀하셨다. 그처럼 그대를 위한 그분의 돌보심과 수고는 줄지 않고 오히려 늘어났다. 그는 아직도 “나 여호와는 포도원지기가 됨이여 때때로 물을 주며 밤낮으로 간수하여 아무든지 상해하지 못하게 하리로다”(사 27:3)라고 말씀하신다.

9. “이 후에 만일 실과가 열면이어니와 그렇지 않으면”―
성령의 역사에 반응을 나타내지 않는 사람은 점점 완고해져서 마침내는 성령의 감화를 전혀 감지할 수 없게된다. 바로 그렇게 되었을 때에 “찍어버리라 어찌 땅만 버리느냐”는 선고가 내려진다.
주께서 오늘 그대를 부르신다.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 , 내가 저희의 패역을 고치고 즐거이 저희를 사랑하리니 … 내가 이스라엘에게 이슬과 같으리니 저가 백합화같이 피겠고 레바논 백향목같이 뿌리가 박힐 것이라 … 그 그늘 아래 거하는 자가 돌아올지라 저희는 곡식같이 소성할 것이며 포도나무같이 꽃이 필 것이며 … 네가 나로 말미암아 열매를 얻으리라”(호 14:1-8).”(실물, 214-218)

◉ 이 비유(譬喩)의 핵심은 열매를 맺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것이 아닌데, 그것은 행함으로 말미암는 구원의 한 형태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맺는 열매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이미 그분 안에서 소유한 구원의 실체를 드러내 준다. 열매를 맺는 것은 받은 구원에 대한 외적 표현이다. 그것은 구원 얻는 수단이 아니다. 우리가 이 차이점을 이해하는 것은 중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조만간 놀라운 열매를 거두었다는 생각 때문에 교만해지거나 우리의 수확이 보잘 것 없다는 생각 때문에 실망하고 포기하게 될 것이다.

◉ <저주받은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것은 행동화된 비유였다. 바로 그리스도의 면전에서 무성한 잎사귀로 의기양양하던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는 유대 민족의 상징이었다. … 그들은 하나님의 특별하신 총애를 받아왔으며 다른 모든 백성들보다 의로움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세상을 사랑하고 물질을 탐냄으로써 부패하였다. 그들은 지식을 자랑하였으나 하나님의 요구에는 무식하였고 위선으로 충만하였다. 열매 없는 나무와 같이 그들은 거만한 가지들을 높이 뻗고, 외모로는 화려하고 눈에는 아름다웠으나 ‘잎사귀 외에 아무것도 없’었다. 장엄한 성전과 신성한 제단, 관을 쓴 제사장들, 인상 깊은 의식들을 가진 유대인의 종교는 과연 외모로는 아름다웠으나 겸손과 사랑과 자비는 부족하였다.”(시대의 소망, 582)
◉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자들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 우리가 맺는 열매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얻은 구원의 결과가 밖으로 드러나는 것뿐이다.

◉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마 7:20)고 구주께서는 말씀하셨다. 모든 참된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열매를 맺는다. 저들의 생애는 성령의 역사를 통하여 선한 일이 이뤄진 것과 성결에 이르는 열매를 맺은 사실을 증거할 것이다. 저들의 생애는 향상될 것이며 순결하게 변화될 것이다. 바른 행실은 참된 경건의 틀림없는 열매이며 이런 열매를 맺지 못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일에 대한 경험이 전혀 없음을 여실히 드러낸다. 저들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않다. 예수께서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 15:4~5)고 말씀하셨다.”(부모와 교사와 학생에게 보내는 권면, 329)

◉ “교회와 연합했으나 주님과 결합하지 않은 모든 자들은 자신들의 진정한 품성을 드러낼 때가 있을 것이다. ‘그 열매로 그들을 알’ 것이다(마 7:16). 그들은 경건의 소중한 열매인 절제, 인내, 친절, 사랑, 자선을 나타내지 않는다. 그들은 오직 가시와 엉겅퀴만을 맺는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공언으로 인해 모든 사람들 앞에서 모욕을 받으신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사는 삶, 90)

<결론(結論)>
좋고 나쁜 나무는 열매로 결과가 나온다.
올바른 신앙생활은 성령의 9가지 열매로 나타난다.
그 9가지는 은혜(恩惠)인데
⑴ 하나님에 대하여는 '사랑', '희락', '화평'과
⑵ 사람들에 대하여는 '오래 참음', '자비', '양선'과
⑶ 내 자신에 대하여는 '충성', '온유', '절제'로 나타나는 열매를 맺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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