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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3과 도피성(안교교과강해)-폴쵸 조춘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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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paulcho 작성일09-12-20 17:17 조회5,09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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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3과 도피성
12월 26일 안식일 (일몰: 오후 5시 20분)

도입)
도피성이란 말 그대로 도망가서 피하는 성이다. 도망가는 사람은 누군가에게 쫓겨서일 것이고 그렇게 쫓기는 데는 이유가 있어서이다. 고대 이스라엘의 법 제도는 아주 간단했다. 한 마디로 ‘눈에는 눈, 이에는 이’였다. 그러니 사람을 죽였다면 그 사람은 당연히 죽어야 마땅했다. 그런데 인간의 문제란 그리 단순한 게 아니다. 하나님이 그런 인간을 잘 아셨다. 살다 보면 원치 않는 실수를 할 수도 있고 때로는 누명을 쓸 수도 있다. 하나님이 그런 예를 신명기 19장에 잘 들어 놓으셨다. 가령 어떤 사람이 이웃과 함께 숲에 나무를 하러 갔는데, 도끼질을 하다가 도끼날이 자루에서 빠지는 수가 있지 않겠는가? 도피성은 쫓기는 사람들, 죄인들이 가는 곳이다. 인생이 편안한 사람들에겐 그리 유용하지 않다. 그리고 가까운 곳에 있어서 맘만 먹으면 금방 찾아갈 수 있다. 어떤 환경, 어떤 처지에 있든 상관없다. 가는 길은 잘 닦여 있고 표지판도 잘 돼 있어서 별 장애가 없다. 밤이든 낮이든 문은 열려 있고, 경과야 어떻든 성문 안으로만 들어가면 방법이 있다. 그곳은 또 안락하다.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이 잘 돌봐 준다. 또 합법적으로만 있다면 자기를 해칠 사람은 아무도 없다. 무엇보다 그곳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이다. 똑같은 상처와 똑같은 삶의 무게를 지고 있다. 서로 이해해 주고 작으나마 서로 관심 써 줄 수 있는 동료들이다. 그리고 한 사람이 죽으면 대신 자기는 살아난다. 자! 이런 곳이 도피성인데 지금으로 말하면 이런 곳은 어디일까? 바로 교회이다. 도피성은 교회를 예표하는 곳이고 궁극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지향하고 있다.

기억절: “앞에 있는 소망을 얻으려고 피하여 가는 우리로 큰 안위를 받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가 이 소망이 있는 것은 영혼의 닻 같아서 튼튼하고 견고하여”(히 6:18~19)

연구범위: 민 33~36장, 수 20:1~7, 엡 2장.

안식일 오후
하나님께서는 언약을 신실히 지키셨으나 1세대의 이스라엘 백성은 신실하지 못하였고, 그들에게 주어진 땅을 유업으로 얻는 대신에 거친 광야에서 죽었다. 그 일은 일어나지 말았어야 했던 비극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많은 복을 주셨건만 그들은 신뢰하기를 거부하였다. 그들은 우리 대부분이 결코 목격하지 못했고 또한 목격하지 못할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의 기적을 목격하였다. 그러나 믿음으로 행하기를 거부하였다.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그들을 멸하지 않으셨다. 결코 그러지 않으셨다. 성경에 반복해서 나타나는 주제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약속을 성취하시리라는 것이다. 여호와께서는 당신의 구속받은 백성을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인도하실 것이다. 이것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다만 문제는 이것이다. 과연 우리는 그곳에 들어가기 위해 준비하고 있는가, 아니면 이스라엘의 1세대처럼 그들을 위해 행해진 그 모든 기적에도 불구하고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기를 거부하고 있는가?
이번 주에 우리는 민수기 연구의 마지막 과를 공부하면서, 이스라엘 자손이 약속의 유업을 얻기 위해 최종적으로 준비하던 과정에 대해 몇 가지 살펴볼 것이다.
일요일(12월 20일)
역사의 교훈(민 33장)

도입)
32장에서는 갓 자손과 르우벤 자손과 므낫세 반 지파에게 요단 동편 땅을 기업으로 주게 되는 과정을 소개하고, 33장에 와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나안 땅을 분배하기에 앞서서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올 때의 모습을 소개하면서 "모세와 아론의 관할 하에 그 항오대로"라고 하고 있다. 여기에 "관할 하에" 라는 말은 브야드(בְּיַד)라고 한다. 즉 "손 안에" 라는 말이다. 모세와 아론의 손의 지도함을 받아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나오게 되었다는 것이다. 여기에 "손 안에"라는 말은 많은 의미가 있다. 모세와 아론의 손에 들려진 지팡이, 그리고 그것으로 인하여 나타나게 된 능력과 역사로 인하여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을 나올 수 있었음을 생각하게 한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올 때에 "그 항오대로" 나오게 된다. 그 항오대로(르찌브오탐, לְצִבְאֹתָם) 라는 말은 "with the armies" 즉 "그 군대와 함께"라는 말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미 출발 전부터 영적 싸움을 위한 군대였던 것이다. 그들은 그저 국고성이나 짓고 있던 초라한 사람들이었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군대로 여기셨고, 군대의 행진과 같이 움직였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와의 명대로 그 노정을 따라 진행했고, 그 과정을 3절 이하에서 기록하고 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을 모세와 아론의 손에 맡겨 애굽에서 나오게 하셨다. 비록 그들은 성을 쌓는 일에 노예처럼 쓰임을 받은 자들이지만 애굽에서 나올 때에는 군대와 같이 행진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은 군대로 여기셨다는 것이다. 그리고 가나안땅을 향해 도전하도록 하셨음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그들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명을 따라 애굽을 나와 가나안으로 향하였던 것이다. 믿음의 사람들은 영적 군대다. 하나님의 명을 따라 세상을 정복하는 영적 군대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1. 민수기 33장을 읽으십시오. 왜 여호와께서는 모세로 하여금 그들이 진행해 온 여정을 하나하나 기록하게 하셨을까요? 그렇게 하신 목적은 무엇이었을까요?
답:
참으로 믿어지지 않는 역사이다. 수백 년 동안 다른 민족의 노예로 살아왔던 민족이 그 억압의 사슬을 끊고 탈출하여 40년 동안이나 시내 광야라는 황량한 사막에서 살아남았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과 기적에 의해서만 가능한 일이었다. 또한 주목할 것은, 민수기 33:2에 그들이 “여호와의 명대로” 이곳저곳을 옮겨 다녔다는 사실이다. 여호와께서는 광야를 옮겨 다닌 히브리 민족의 모든 이야기 배후에 당신께서 계셨음을 그들과 그들의 후손들이 잊지 않기를 바라셨다. 그 이야기는 하나님께서 죄 많은 인류를 구원하여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시기 위해 어떻게 역사하시는지를 보여 준다.
이스라엘 민족이 광야를 방황한 이야기는 참으로 놀라운 이야기이다. 하지만 오늘날 성경학자들 중에는 노예였던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을 탈출한 사실을 부인하는 이들이 있다. 또는 그 사건이 실제로 있었다 할지라도 순전히 자연적인 상황에 의한 것이었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 모든 사건의 중심에 계셨음을 잊어버리고 있는 것이다.

2. 민수기 33:50~56을 읽으십시오. 직접적인 역사적 배경을 제쳐놓고라도 우리는 이 구절들에서 어떤 중요한 영적인 원칙을 발견할 수 있습니까? 옛날 이스라엘 백성이 그 땅에 정착한 후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를 상기해 볼 때, 이 사람들을 다 몰아내라고 하신 명령은 왜 그렇게 중요한 것이었습니까?
답:
세상과 타협하는 것은 계속해서 여호와의 백성에게 “눈에 가시와 옆구리에 찌르는 것”(55절)이 될 것이었다. 우리가 세상의 악한 감화와 주변 문화로부터 스스로를 방어하지 않으면 언제든지 믿음을 잃고 타락할 위험 가운데 놓이게 된다.

교훈: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출애굽의 여정을 자세히 기록하게 하신 까닭은 그분의 섭리와 보호가 아니었다면 그 여정이 불가능했음을 기억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부가적용)
민수기 33장에서는 출애굽해서 현재까지 지나온 모든 경로들을 회상하고 있다. 별로 멀지도 않은 거리를 삥삥 둘러 40년이란 긴 시간을 흘려보내며 걸어왔던 길이었고, 그 곳곳에는 원망하고 불평하며 불신했던 크고 작은 흔적들이 널려있다. 이 모두가 하나님의 약속을 온전히 믿지 못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허물이요 죄악의 자취이다. 지나온 길을 되돌아보도록 하시면서 더 이상은 그런 어리석음에 빠지지 말 것을 강한 어조로 말씀하고 계신 것이다. 환경을 의지하고 인간의 지혜를 믿는 것은 결코 출애굽의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며, 그런 자들은 광야에서 다 죽어야 합당하다는 크나큰 교훈을 남기신 것이다. 끝으로 가나안에 들어가서 해야 할 일들을 일러 주셨다.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은 가나안의 거민들을 몰아내는 것이다. 거주민들이 가나안의 주인인 것 같으나 그들은 진멸의 대상이요, 심판 받아 마땅한 자들이다. 그러기에 그들을 가나안 땅에 남겨둘 수 없고 모조리 추방해야 한다. 여호와가 누구신지 모르고, 그분의 은혜와 긍휼에 눈이 어두운 자들이 은혜의 땅에 거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아울러 그곳에 세워진 우상의 잔재들을 모두 훼파해야 한다. 새긴 석상과 부어 만든 우상, 세워진 산당 등, 우상의 자취는 완전히 없애도록 지시하셨다. 이 땅은 오직 여호와의 이름만 찬양되어야 할 곳이기 때문이다. 만약 가나안에 사는 자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하고 살아간다면 그가 누구이든 그곳에서 추방될 수밖에 없는 그런 곳이다. 가나안!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그곳은 이스라엘 사람들의 땅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백성들의 땅이기 때문이다.

월요일(12월 21일)
레위인들의 성읍들(민 35:1~8)

도입)
하나님은 가나안에서 모든 지파들이 서로 평화하기를 원하셨다. 이를 이루기 위한 하나가 도피성 제도이고, 다른 하나가 레위 지파에게 가나안 전역에서 48개의 성읍을 주도록 하는 것이었다(21장, 민35:1-5). 도피성은 레위 지파에게 준 48개 성읍 중에서 택했다(민35:6-7). 하나님은 도피성과 레위 지파를 마치 누룩처럼 이스라엘 전역에 골고루 배치하심으로써 가나안이 피의 보복이라는 악순환으로(민35:6-12), 그리고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며 사는 거룩함 없이 무너지는 것을 원치 않으신 것이다. 보통 어떤 곳에서든 가까운 도피성까지의 거리가 하룻길(50km 미만)이고, 또 길이 잘 닦여져 있는데 이는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누구든지 도피성으로 가는 길을 발견하여 피하기에 좋은, 그리고 빠른 길이어야 하기 때문이다(신19:2). 하나님은 실수로 살인한 죄인들에게 그 죄 값을 자신이 친히 감당하지 않도록 배려하심으로써 사회적인 약자(弱者)들의 인권이 보호되도록 하신 것이다.

레위인들은 시내 광야에서 하나님께 충성심을 나타냈으므로 그분께서 그들의 유업이 되시는 귀한 보상을 받았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유업이 되심에도 불구하고 그분께서는 그들로 하여금 백성들 가운데서 살아갈 수 있도록 특별한 대비책을 마련해 주셨다.

1. 레위인들을 위한 어떤 대비책이 마련되었습니까? 이 사실은 레위인들이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을 말해 줍니까?(레 35:1~8)
답:
모든 지파들이 어떻게 레위인들에게 땅이 주어졌는지 주목해 보라. 적은 땅을 분배 받은 지파는 적은 땅을, 많이 분배 받은 지파는 많은 땅을 내어놓아야 했다. 그러므로 여기서도 형평성의 원칙이 잘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모든 지파는 “그들의 얻은 기업에서”(민 35:2) 레위인들에게 성읍들을 주어야 했다. 모든 지파의 사람들이 레위인들을 돌보는 일을 분담하여야 했다. 여호와께서는 이 일을 통해 각 지파가 레위인들을 돌볼 책임이 있음을 알기 원하셨다. 어떤 의미에서 많이 가진 자는 적게 가진 자보다 더 많은 십일조를 드린다는 동일한 원칙이 여기서도 적용되었다.
한편 레위인들은 다른 지파들로부터 성읍을 제공 받았다는 사실 때문에 그들이 백성을 위해 신실하게 섬겨야 할 책임이 있음을 끊임없이 상기하였을 것이다.
레위인들은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들 가운데 흩어져 살아야만 했다. 즉 그들은 어떤 특정한 지역에 모여 살지 않았다. 금송아지를 숭배하는 배교가 있을 동안에 이들의 조상이 신실하였다는 사실을 상기시키기 위해 이들은 백성들 가운데 살아야 했다. 이렇게 함으로써 이들은 신실함과 거룩함이 무엇인지를 백성에게 끊임없이 증거할 수 있었다. 레위인들은 그들 가운데 살면서 공동체의 일부가 되고 그들의 괴로움과 슬픔과 기쁨을 함께 나누면서 동족에게 축복이 될 수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섬기는 공동체로부터 떨어져 삶으로써 배타적이거나 거만한 엘리트가 되어서는 안 되었다. 그들은 섬김을 받는 대신 섬겨야 했다. 참된 섬김에 대한 얼마나 귀한 모본인가!

교훈: 레위인들은 이스라엘 모든 지파들 가운데 흩어져 살면서 그들을 섬겼는데, 그들의 존재 자체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좋은 감화와 모본이 되었다.

부가적용)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각 지파들에게 기업을 나누게 하시고 각자의 받은 기업 중에서 레위인이 거할 성읍을 나누어주게 하셨다. 또한 레위인은 그 성읍에 도피성을 만들어야 할 것을 말씀하셨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생활을 할 때에 레위인들은 성막 주위에 진을 쳐 성막을 보호할 뿐 아니라 성막에 함부로 접근하는 자들을 막게 하여 그들로 재앙을 받지 않도록 하셨다(민8:19). 이제 가나안 땅에 들어와서는 각 지파들의 기업 중에서 성읍과 그 성읍의 성벽으로부터 사면의 들 이천 규빗을 얻게 하였다. 레위인들은 가축과 물산과 짐승들을 그 곳에 두고 각 지파들의 생활권 안에서 각기 흩어져 기거하도록 하셨다. 과거에 시므온과 레위가 디나의 일로 인하여 세겜에 거주하던 하몰과 그의 아들 세겜을 비롯하여 그 성에 거하던 모든 남자를 칼로 죽였을 뿐 아니라, 재산을 빼앗고 그 자녀와 아내들을 사로잡았던 일이 있다(창34:1-31). 이 일로 야곱은 자손들을 축복할 때에 레위에게는 "내가 그들을 야곱 중에서 나누며 이스라엘 중에서 흩으리로다"(창49:7)라고 저주에 가까운 기도를 한다. 그러나 이 기도는 후에 레위인들이 각 지파들의 기업 안에 흩어져 살게 됨으로써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의 선한 법도의 가르침을 받게 되는"(신33:10) 계기가 된다. 하나님은 레위인들에게 열두 지파로부터 받은 48 성읍 중에서 여섯 개의 성읍은 반드시 도피성으로 만들라고 말씀하신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레위인들에게 성읍을 나누어주는 것은 자신들의 기업의 일부를 떼어 주는 것으로 손해를 보는 것 같이 여길 수 있으나, 이는 자신들의 삶 속에 피난처를 만들게 하는 은택이 되게 하신 것이다. 성경은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갈6:6)고 말씀하신다. 이는 나누는 것이 자신에게 더 큰 복이 된다는 것을 알게 하신 것이다. 하나님은 각 지파의 산업에서 레위인에게 나누어주어야 할 분깃을 많이 얻은 자에게는 많이 취하여야 할 것이며, 적게 얻은 자에게는 적게 취하여야 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일을 공평하게 행하시는 분이시다.

화요일(12월 22일)
도피성-1(민 35:6, 9~12)

도입)
하나님께서 도피성을 세운 이유는 무엇인가? 모세의 율법은 준엄하고 엄격했다. 마치 예리하고 날카롭게 날이 선 칼로 물건을 내리치는 단호함이다. 누구도 이런 율법의 냉정함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인간을 아무도 없다. 율법이 이렇게 엄격하다보니 위엄을 세우고 규율을 지키는 효과가 있다. 그런데 그 법 때문에 억울하고 애매하게 희생되는 사람도 있다. 때로는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해 보지도 못하고 그 자리에서 죽기도 한다. 또는 의도적으로 사람(원수)을 죽이기 위해 율법을 오용, 남용하기도 한다. 왜 도피성은 동/서에 3개씩인가? 모든 지파의 사람들이 가장 손쉽게 접근할 수 있는 곳에 위치시켰다. 이 도피성은 어디에서든지 32km 이내에 거리에 위치한다. 부득이 도피성으로 피해야 할 경우 하루 안에 도착할 수 있도록 한다. 도피성을 향한 도로는 폭을 14m 이상이 되도록 넓게 닦아 놓았다. 또 길을 잃지 않도록 미클라트(도피성)이라는 안내판도 곳곳에 세워 놓았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의 깊으신 긍휼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 한 생명이라도 길 잃지 않고, 죽지 않고 안전지대에 이르기 바라신다. 한 영혼을 소중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느낄 수 있다.

1. 민수기 35:6, 9~12을 읽으십시오. 도피성을 지정한 이유는 무엇이었습니까?
답:
이때 당시에 이스라엘에는 사법제도가 확립되어 있지 않았다. 만약 어떤 사람이 부지중에 혹은 고의로 사람을 죽였다면 희생자의 가장 가까운 친족이 공의를 행사함으로 그 “피의 보수자”(신 19:12)가 되었다. 공의를 그릇 행사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레위인들의 여섯 성읍이 특별히 지정되었는데 살인자는 그곳으로 도피할 수 있었다.(수 20:1~7)
민수기 35:12에는 중요한 핵심이 기록되어 있다. 그 성읍으로 도망하는 것이 자동적으로 영구적인 도피처를 제공해주지는 못했다. 어떤 경우에 그것은 “살인자가 회중 앞에 서서 판결을 받기까지” 일시적인 피난처가 되어 주었다. 즉 그 사건의 진상이 확인될 때까지 만이었다. 이 성읍들은 오늘날 외교관이 면책 특권을 갖는 그와 같은 영구적인 치외법권(治外法權) 지역 같은 기능을 제공하지는 않았다. 이 성읍들은 공의를 그릇 행사할 수 있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설치되었다.

2. 민수기 35:9~21을 읽으십시오. 복음에 비추어 볼 때 이와 같은 형태의 처벌을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답:
어떤 이들은 이와 같은 구절이 용서에 관한 성경 말씀이나 다른 뺨을 돌려 대라는 말씀과 조화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사회적인 범죄라는 차원에서 문제를 다루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신 용서와 은혜의 복음은 특히 비열한 살인과 같은 범죄가 사회에 의해 처벌되지 않아도 된다는 의미가 아니다. 살인자가 하나님 앞에 회개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범죄가 징벌되지 않는다면 사회가 어떤 역할을 할 수 있겠는가? 여기서는 살인과 같은 가장 심각한 범죄를 하나님께서 어떻게 공평하고 공정하게 다루시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교훈: 부지중에 살인한 자는 도피성에 피함으로 자신의 생명을 보존할 수 있었는데, 이는 그러한 자를 보호하기 위한 일시적 피난처를 주기 위함이었다.

부가적용)
이스라엘 자손이 약속의 가나안 땅에 정착한 이후, 도피성을 두어 실수로 살인한 자들을 보호하도록 하게 하는 제도이다. 도피성은 어디서든지 쉽게 도달할 수 있도록 교통이 좋은 곳에 위치하여야 한다 (신명기 19:3 참조). 그리고 실수로 살인한 자들을 영접하여 그들을 보호해 주어야 한다. 도피성에 피하여 죽음을 면하게 된 살인자는 우선 회중의 판결에 넘어간다. 그리하여 그가 실수로 살인한 것이 판명되면, 그는 다시 도피성에 돌려보내져서 거기서 평생을 살아야 한다. 그리고 그는 도피성 안에서는 보호를 받을 수 있으나, 도피성 밖으로 나가는 순간부터 일체의 보호 권리를 상실하고 만다. 따라서 피살자의 가족이나 친척이 그 살인자를 도피성 밖에서 발견하고 원수를 갚을 경우 이는 정당한 행위로 간주되어 전혀 법적 제재를 받지 아니한다 (민수기 35:22-27). 이 살인자가 도피성을 빠져 나와 안전하게 고향으로 돌아가서 살 수 있는 유일한 기회가 있다. 그것은 바로 ‘거룩한 기름 부음을 받은 대제사장이 죽게 될 경우’이다 (민수기 35:25, 28). 이스라엘에서는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당대의 책임을 맡은 대제사장은 오직 한 사람뿐이었다. 이 오직 한 사람, ‘거룩한 기름 부음을 받은 대제사장’이 죽어야만 도피성에 갇혀 나갈 수 없는 비운의 살인자가 그 성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이다. 이상에서 설명한 도피성 제도는 우리 인간의 진정한 모습을 잘 그려주고 있다고 하겠다. 인간은 마치 실수로 살인한 자와도 같다. 살인 자체는 분명히 죽음을 면치 못하는 죄이다. 그러나 이 엄중한 죄가 애초에 본인의 의도로 저질러지지 않았다는 데에 그에 대한 형벌을 재고할 필요성이 있게 된 것이다. 하나님은 이들 죽음에 직면한 인간에게 율법을 주시었다. 율법은 마치 도피성과도 같이 그 안에 피하러 들어온 사람을 보호하는 구실을 한다. 그러나 율법의 능력에는 한계가 있어서, 그 보호 범위를 벗어나는 자를 죽음에서 구해낼 수 없으며, 그리고 보호받으러 그 안에 들어온 자일지라도, 진정 그의 문제를 해결 한다기 보다는, 그를 임시로 죽음에서 보호할 뿐이지, 결국은 그의 자유를 빼앗는 구실을 하고 있는 것이다. 율법 안에는 진정한 자유가 없다. 율법 안에 사는 한, 인간은 자신의 죄를 늘 기억하게 되며 (로마서 3:20), 율법이 제공하는 ’보호‘라고 불리우는 부자유 속에서 평생을 보내게 되는 것이다.
수요일(12월 23일)
도피성-2(민 35:22~34)

도입)
도피성에서 인간의 진정한 자유를 찾을 수 없듯이, 율법 안에서는 죄로부터의 진정한 해방이 있을 수 없다. 율법은 일시적인 보호만을 제공해줄 뿐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대제사장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이 모든 문제가 쉽게 해결된다는 점이다. 마치 예수 그리스도 (‘기름 부음 받은 자’라는 뜻임)의 죽음이 인간의 죄 문제를 완벽하게 해결하여 온전한 자유를 주는 것처럼. 예수의 죽음은 율법에 갇힌 인간을 풀어준다. 진정한 자유를 그에게 준다. 유대인들은 율법에 머물고자 고집하고 있다. 거기서 진정한 자유를 누리고자 안간 힘을 쓴다. 율법도 ‘하나님의 의(義)’임에는 틀림이 없다 (로마서 3:21). 그러나 그것은 ‘대제사장의 죽음’이 있기까지 인간을 죽음에서 보호하기 위한 하나님의 은혜인 것이다. 이제는 이미 ‘거룩한 기름 부음을 받은 대제사장‘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셨다. 도피성을 나와도 안전한 때가 이른 것이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너무나 오랫동안 도피성 (=율법)에 머물러 있으면서, 도피성 밖에는 죽음이 있다는 강박 관념 속에서 살아왔기 때문에, 대제사장이 죽었으므로 이제는 안전하다는 ‘복음’을 믿으려 하고 있지 않다. 이들은 아직도 도피성의 노예로 안주(安住)하고자 하는 것이다. 유대인은 이제 대제사장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미 죽으신 것과 또 이 일을 통하여 그들이 이제까지 안주해온 도피성 곧 율법에서 해방되어 진정한 자유를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율법이나 또는 특정 계명에 안주하고자 하는 경향은 유대인뿐만이 아니라 일부 기독교인들 중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지나치게 제도화된 교회의 틀에 묶여서 교인 노릇하는 이들은 도피성에 갇혀있는 자와 다를 바가 없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요한 복음 8:32).

민수기 35:22~34을 읽고 다음 질문들에 답하십시오.

1. 이 상황을 처리함에 있어 어떻게 온 회중이 동참하였습니까? 그들의 참여는 왜 중요하였습니까?
답:

2. 고의적인 살인자와 부지중의 살인자 사이를 무엇으로 구분했습니까?
답:

3. 비록 부지중에 살인이 저질러졌을지라도 가해자는 보호를 받기 위해 여전히 도피성에 머물러야만 했습니다. 주어진 문맥을 고려해 볼 때, 그렇게 한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답:

4. 우리는 민수기 전체를 통하여 특히 배교와 죄와 반역이 일어난 경우에 하나님께서 초자연적으로 개입하신 사실을 반복해서 보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여호와께서는 직접 개입하여 판단해 주시는 대신 사람들이 유죄와 무죄를 결정하는 책임을 맡는 사법제도를 세우셨다고 생각합니까?
답:

5. 왜 단 한 사람의 증언만으로는 살인자를 죽음에 처할 수 없었습니까? 이 사실은 사형 제도를 보다 신중하게 생각해야 함에 대해 무엇을 말해 줍니까?
답:

교훈: 고의적으로 살인한 자와 부지중에 살인한 자를 구분한 까닭은 실수로 사람을 죽인 자를 계획적인 살인자와 동일하게 취급하지 않기 위함이었다.

부가적용)
죄인은 자신의 죄가 고의적이 아니었음이 밝혀졌다 할지라도 여전히 그는 도피성의 보호를 받아야 한다. 무죄함이 밝혀졌다고 하더라도 그는 도피성 밖으로 마음대로 나갈 수 없다. 제사장이 죽어야만, 그러니까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셔야만 속죄는 그 효력을 발휘한다. 이것이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을 가장 잘 설명할 수 있는 도피성 제도의 영적 의미들이다. 내가 사는 것이 나의 의 때문이 아님을 아는 만큼 이제는 주를 위해 사는 것, 이것이 나의 도피성 되신 주님이 나를 향하신 뜻이다 :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2:20) 이제 주님이 나의 도피성 되심으로 자격 없는 나를 보호하시고 지켜주셨듯이 나 역시 주님의 뜻을 이루는 조그만 도피성으로 살아야겠다. 이것이 나를 부르신 하나님의 거룩하신 부르심이다. 일단 어떤 사람이 이렇게 해서 도피성으로 피하면 재판을 받고, 고의가 아니면 도피성에서 대제사장이 죽을 때까지 보호를 받다가(민35:28), 대제사장이 죽으면 자유의 몸이 된다(6). 하지만 그 이전에 도피성을 자기 마음대로 떠나면 피해자 측에 의해 죽임을 당해도 법적으로 보호를 받을 수 없게 된다(민35:25-28). 또한 만일 고의로 살인한 것이 밝혀지면 그는 피해자 측에 인도되어 죽임을 당해야만 했다(민35:11-12). 실수와 고의는 가려지게 되어있다.

목요일(12월 24일)
우리의 도피성이신 그리스도(삼하 22:3)

도입)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11:28) 진정한 도피성은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시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우리 모두의 진정한 도피성, 즉 피난처이시기 때문이다. 내 죄 때문에 내가 죽어야 하는, 아무도 나의 생명을 보장(보증)해 줄 수 없는, 그래서 죄 가운데 이미 죽었던(엡2:1) 나를 살리셨다. 그분은 탕자의 아버지로서 나의 돌아옴을 받아주신다. 내가 영원한 안식과 쉼을 얻고, 또 누릴 수 있게 된 것은 그분의 받아주심(용납하심)이다. 내가 내 의지와 상관없이 할 수 있는 일까지도 의(義)가 아니라 죄(罪)다. 그분은 어디서나, 언제나 나를 기다리신다. 내가 그분에게만 돌아간다면 주께서 나를 맞아주지 않을 형편이란 없다. 이스라엘은 비록 고의가 아닐지라도 가나안에 할 일이 사람을 죽이는, 그런 의미의 미숙함과 연약함밖엔 없다. 하지만 하나님은 당신이 아브라함에게서부터 꿈꾸셨던 가나안에의 영광을 인간의 죄와 과오 때문에 무너지는 것을 원치 아니하신다. 너무 확장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오늘날도 역시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피 값으로 세우신, 비록 희미할지라도 도피성의 한 모형(typology)일 수 있다. 때문에 교회는 이렇듯 사회적 약자(弱者)와 소외된 자들을 그리스도의 은혜의 품으로 품을 수 있어야 하고, 저들이 원하기만 하면 그리스도의 은총을 맛볼 수 있도록 해 주어야 할 책임이 있다.

1. 사무엘하 22:3은 도피성이 우리에게 무엇을 제공한다고 말합니까?
답:

2. 도피성으로 피신한 자들과 같이 우리도 그리스도 안에서 어떤 종류의 피난처와 보호를 발견하게 됩니까?(참조 요 8:10~11, 엡 1:7, 골 1:14, 히 6:18)
답:
“옛날 하나님의 백성을 위해 지정된 도피성은 그리스도 안에 준비된 피난처의 상징이었다. 이 땅에 도피성을 마련하셨던 동일한 자비의 구주께서는 당신의 보혈을 흘리심으로 하나님의 율법을 범한 자들로 하여금 둘째 사망에서 피하여 안전함을 얻을 수 있는 확실한 피난처를 준비하셨다. 어떠한 권세도 용서를 받기 위하여 그리스도께 나아가는 영혼을 그분의 손에서 빼앗을 수 없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롬 8:1, 34; 히 6:18)
도피성으로 도망하는 자는 조금도 지체할 수 없었다. 가족과 직업을 모두 버려야 했다.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작별을 고할 시간도 없었다. 생명이 위태롭기 때문에 안전한 땅으로 피하는 이 한 가지 목적을 위하여 다른 모든 이해관계를 포기해야 하였다. 피로도 잊고 어려움도 돌아보지 않았다. 도피자는 그 성벽 안에 도달하기까지는 감히 한 순간도 발걸음을 늦출 수 없었다.”(부조와 선지자, 516~517)
하지만 도피성도 십자가에 대한 완전한 상징은 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십자가는 고의적인 죄, 심지어 살인죄라 할지라도 주님에 의하여 용서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교훈: 도피성은 우리의 피난처이신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그러나 고살자(故殺者)를 보호할 수 없었던 도피성과는 달리 그리스도께서는 회개하는 모든 죄인을 용서하신다.

부가적용)
오늘 성경에 나오는 피의 보수자(고엘)는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친족에 대한 책임을 지고 살해자를 죽일 의무와 권리가 있는 사람이다. 이들이 복수를 하게 되어 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적의 없이 실수로 죽인 사람은 복수하지 못하게 하였다. 그의 죄를 용서받고 생명을 보존할 수 있는 제도를 만든 것이다. 도피성을 만드신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은혜로 가능하게 하신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가 되신다. 피할 길을 주신 하나님, 덮으시는 하나님을 보게 된다. 하나님은 무고한 생명이 희생되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 하나님은 외적 결과만 보시지 않으시고 중심을 보시는 분이시다. 그런데 근본적으로 죄를 용서하기 위해, 오늘날 하나님의 사랑을 표현한 것이 무엇인가? 그리스도의 십자가이다. 공의와 사랑을 동시에 성취한 것이다. 이 도피성은 그리스도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이 도피성은 장차 오실 그리스도의 그림자요 상징인 것을 우리는 알 수 있다. 대제사장 예표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다(히9:11-15). “저가 저 대제사장들이 먼저 자기 죄를 위하고 다음에 백성의 죄를 위하여 날마다 제사 드리는 것과 같이 할 필요가 없으니 이는 저가 단번에 자기를 드려 이루셨음이니라 (히 7:27)”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입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의 믿는 도리의 사도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히 3:1)” 대제사장은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히브리서 기자가 히브리서 4:14에서 증거 한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는 만인의 죄를 대신 속하기 위해 우리 인간들의 대제사장이 되신 분이시다.

금요일(12월 25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독서 과제: 부조와 선지자, 제48장 '가나안의 분배'(510~520)

“죄인은 그리스도 안에서 은신처를 찾을 때까지는 영원한 사망을 당할 수밖에 없다. 도피자가 불필요한 배회나 부주의로 인하여 살 수 있는 유일한 기회를 빼앗기는 것처럼 지체함과 무관심이 영혼의 파멸을 가져올 수 있다. 대적 사단은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을 범하는 모든 사람들을 추적하고 있다. 사단의 위험에 민감하지 못하고 영원한 피난처에서 보호를 받으려고 열렬히 노력하지 않는 자들은 파괴자 사단의 제물이 될 것이다.
언제든지 도피성 밖으로 나가는 죄인은 복수자의 손에 빠졌다. 그러므로 백성은 그들의 안전을 위하여 무한히 지혜로우신 하나님께서 정하신 방법을 따라야 했다. 그와 마찬가지로 죄인이 죄사함을 얻기 위해서도 그리스도를 믿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죄인은 믿음과 순종으로 그리스도 안에 거하여야 한다.”(부조와 선지자, 517)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1. 여호와께서 과거에 우리를 인도하셨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은 왜 그렇게 중요합니까? 우리가 과거를 잊어버릴 때 어떤 위험에 빠질 수 있습니까? 한편 우리가 바꿀 수 없는 과거에만 얽매이는 것은 왜 위험합니까? 어떻게 이 둘 사이에 균형을 유지할 수 있을까요?

2. 오늘날 교회에서는 징계가 어떻게 시행되고 있습니까? 주님께 욕을 돌리는 제멋대로인 교인들을 우리는 어떻게 처리해야 합니까? 한편 어떻게 하면 그들을 정죄하지 않는 태도로 대할 수 있을까요?

3. 이번 한 기 동안 공부한 내용을 간단히 요약해 보십시오. 배운 내용 중에서 가장 감명 깊었던 것은 무엇이며, 내 삶에 일어난 한 가지 분명한 변화는 무엇입니까?

요약: 이스라엘 자손들은 약속의 땅 변경에서 하나님이 어떻게 그들을 인도하셨는지 요약적인 설명을 들었다. 여호와께서는 그들이 들어가기 전에 도피성을 지정해 주셨는데, 이는 우리 죄인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할 수 있는 보호를 독특한 방법으로 보여 주신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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