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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1과 믿음으로 살아감(교사들을 위한 강해와 예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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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조춘호 작성일15-03-06 07:31 조회4,93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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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제 11과 믿음으로 살아감

 

3월 14일 안식일

일몰:오후 6시 38분

 

기억절 : “사람을 두려워하면 올무에 걸리게 되거니와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안전하리라”(잠 29:25).

 

도입)

사람을 두려워하면 올무에 빠진다고 말합니다. 참으로 두려워할 분은 하나님뿐이라는 말입니다. 사람을 두려워할 때 우리는 자칫 하나님을 잊게 됩니다. 우리의 관심이 온통 두려워하는 그 사람에게만 집중되기 쉽습니다. 사람들은 권력과 부를 가진 사람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권력과 부를 가진 사람들에게 잘 보이려고 온갖 노력을 기울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한 없이 연약한 피조물에 불과합니다. 그러므로 사람을 의지하는 자는 결정적인 순간에 보호자를 잃고 넘어집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덫(올무)에 빠지는 결과를 가져올 뿐입니다. 또 우리는 권력을 가진 사람들의 호의를 얻어 두려움을 면하려 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권력자의 호의를 얻었다 해서 안전하거나 두려움이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 권력자와 아무런 관계없이 공평과 진리로 다스리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일을 이루게도 하시고 망하게도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의 자비와 은총을 기대하며 그분을 두려워하며 바라봅니다. 모든 일을 결정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은 이 세상과 내세에서 안전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 사람들은 앗수르의 공격에 대비하여 마병들이 많은 애굽 사람들을 의지하였습니다(사 31:1) 이를 본 이사야 선지자는 다음과 같이 경고했습니다. "애굽은 사람이요 신이 아니며 그 말들은 육체요 영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그 손을 드시면 돕는 자도 넘어지며 도움을 받는 자도 엎드러져서 다 멸망하리라"(사 31:3) 사람들은 전쟁에 필요한 말 때문에 애굽을 의지하지만 그 말들은 하나님이 만든 피조물일 뿐 신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이나 동물을 도구로 사용하실 때만이 그들은 힘을 발휘할 수 있으며 하나님이 버리시면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시편기자도 사람을 의지하는 어리석음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방백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찌니 그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당일에 그 도모가 소멸하리로다 야곱의 하나님으로 도움을 삼으며 여호와 자기 하나님에게 그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 (시 146:3-5) 솔로몬 역시 그러한 진리를 터득하고 다음과 같이 충고했습니다. "사람을 두려워하면 올무에 걸리게 되거니와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안전하리라. 주권자에게 은혜를 구하는 자가 많으나 사람의 일의 작정은 여호와께로 말미암느니라"(잠 29:25-26) 모든 일의 결정권은 하나님에게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만을 의뢰해야 올무에 걸리지 않습니다.

 

연구 범위 : 잠 28:4, 7, 9, 롬 1:16~17, 갈 3:24, 잠 28:5, 요일 2:15~17, 잠 29:13.

 

우리를 부르는 수많은 음성이 사방에서 들려온다. 하지만 무엇이 옳고 그른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해답은 하나님과 기록된 그분의 계시 속에 있다. 우리는 하나님께 의지하고 그분의 법에 순종할 줄 알아야 한다. 그러면 나머지는 저절로 따라온다.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마 6:33)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이 공급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을 때 예수님은 이러한 진리를 우리에게 알려주셨던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따르는 일을 우리의 우선순위로 삼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다른 것이 우선순위를 차지하는데 바로 이것이 우상숭배이다. 우리는 믿음의 삶을 살아야만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게 된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행보란 하나님이 우리에게 명하신 것들을 행하기로 선택하고 그 결과에 대해서는 하나님께 맡기는 것이다.

 

*교과반이 서로 기도해 주고 돌봐 주는 친밀한 모임이 되도록 노력합시다.

 

안교 활동반과 교과 토의

 

※ 학습 목표

➊ 깨닫기 :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에 바탕을 둔 잠언의 가치를 인식한다.

➋ 느끼기 : 순종의 복을 깨달음으로 하나님의 실질적인 권면을 소중히 여긴다.

➌ 행하기 : 죄악 세상에서 분명한 교훈을 제시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찬양하며 그분의 거룩한 교훈에 따라 살기로 결심한다.

 

기억절 : Part 1. 인사 안교 반장 또는 소그룹 리더

서로 인사를 나누고 손님을 환영해 줍니다.

출석과 공부를 확인하고 안교헌금을 걷습니다.

결석자와 구도자에 대한 보고를 듣고 방문 계획을 세웁니다.

 

Part 2. 나눔 안교 교사 또는 소그룹 리더(A나 B 중 하나를 선택하십시오.)

A. ❶ 순종이 가장 좋은 선택이었다고 느꼈던 적이 있으면 이야기해 보십시오.

❷ 어떻게 믿음과 율법에 대한 순종이 지혜와 관계가 있을까요?

❸ 하나님을 만나야 더 높은 진리에 이른다는 사실을 경험을 바탕으로 설명해 보십시오.

❹ 지혜로운 삶을 살기 위해 어떻게 하나님을 믿고 그분의 말씀에 순종해야 할지 서로 결심을 나눠 봅시다.

 

B. ❶ 부자가 되면 좋은 것과 나쁜 것은 무엇일까요?

❷ 부유한 신자가 명심해야 할 성경적인 가르침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❸ 잠언의 가르침에 따르면 우리가 가난하더라도 어떤 마음과 자세로 살아야 합니까?

❹ 무엇보다 진리의 사랑을 받으려면 우리 자신과 자녀 교육을 위해 무엇에 더욱 힘써야 할까요?

 

결론 : 잠언에서 하나님의 법과 지혜는 우리의 삶의 지침으로써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분별력을 요구하는 최고의 지혜는 하나님의 뜻에 순복함에서 비롯됩니다.

 

Part 3. 실천 안교 반장 또는 소그룹(예비) 리더

❶ 지난 안식일 첫 오후 활동에 대한 소감을 듣고 오늘의 활동 계획을 이야기합니다.

❷ 오늘(또는 내일) 있는 친교 모임에 참여하도록 권장합니다.

❸ 지속적인 안식일 오후 활동을 위해 기도합니다.

 

첫째날(일) 3월 8일 율법을 지키라

 

“율법을 버린 자는 악인을 칭찬하나 율법을 지키는 자는 악인을 대적하느니라…율법을 지키는 자는 지혜로운 아들이요 음식을 탐하는 자와 사귀는 자는 아비를 욕되게 하는 자니라…사람이 귀를 돌려 율법을 듣지 아니하면 그의 기도도 가증하니라”(잠 28:4,7,9).

 

교사강해 1)

여기에서 '율법'으로 번역된 말은 1차적으로 "토라", 즉 모세오경을 의미합니다. 모세오경은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기록한 것으로, 이스라엘의 모든 종교와 삶의 기초가 되는 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언급된 "율법"은 보다 넓은 의미에서 하나님의 뜻을 기록하고 있는 모든 하나님의 말씀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보면, 본문에 나오는 "율법을 버린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멸시하고 거역하는 자를 의미합니다. 일반적으로 잠언서에서 '율법을 버린 자'는 악인이나 미련한 자와 동일한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거역하고 율법을 거스리는 자들은 악인을 보면, 그를 지지하고 칭찬합니다. 그들은 양심의 소리에 귀를 막고 고의로 악을 행합니다. 그들은 자신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같은 일을 행하는 자들을 칭찬하고 격려합니다. 율법을 버린 사람들이 악인을 칭찬하는 것은 자신을 합리화하기 위해서 자신과 같이 악을 행하는 자를 지지하고 격려합니다. 그래서 유유상종이라 하였습니다. 같은 악한 정신을 가진 사람들은 그런 사람들끼리 모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율법을 지키는 자는 악인을 대적합니다. 의인은 의인을 인정하고 그를 귀중히 여기며, 악인과 타협하지 않고 악인을 대적합니다. 그는 의로운 길을 알기에 악인을 의롭다고 하지 않습니다.

 

‘토라(율법, 가르침)’는 잠언 전체에서 열세 번 등장하는데 그 중에 네 번이 잠언 28장에 나타난다(4절에서 두 번, 7절과 9절에서 한 번씩). 대개 잠언에서는 이 단어가 지혜자의 ‘교훈’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지만(잠 13:14), 잠언이 자체적으로 입증하고 있듯이 이 말은 이스라엘의 전통적인 관념 속에서 하나님의 계시를 가리키는 영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잠 29:18 참고).

잠 28:4, 7, 9을 읽어 보라. 이 말씀은 우리의 삶의 방식에서 차지하는 율법의 중요성에 대해 어떤 사실을 알려주는가?

이스라엘 백성의 사고방식이나 심지어 그들의 영성 또는 추상적인 신학적 관점은 그들과 다른 민족을 구분 짓는 그다지 중요한 요소가 아니었다. 그들을 다른 민족으로부터 거룩하게 구분 짓는 것은 삶의 여러 요인 중에서 음식, 안식, 자연 환경 그리고 이웃과 가족 관계에 관한 그들의 구체적인 선택들이었다. 이상적으로 그러한 선택은 그들에게 주어진 율법과 원칙을 중심으로 이루어져야 했다.

인간은 스스로 지혜로워질 수 없다. 우리는 선악을 분별하지도 못한다(왕상 3:9). 따라서 우리는 선악을 식별하기 위해 거룩한 율법이 필요하다. 다시 말해 지혜의 습득은 지적 또는 영적 단련에 좌우되지 않는다. 지혜는 본질적으로 율법에 대한 순종과 관계가 있으며 그러한 순종은 우리 자신과 우리의 문화, 개인의 심리와 욕구를 초월한다.

여기서 율법이란 당연히 하나님의 영원한 법을 말한다. 그래서 율법을 따른다는 것은 진정한 믿음의 행위이다.

 

교훈 :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율법에 순종하고 우리의 삶에 구체적으로 적용하는 선택만이 우리가 지혜를 얻는 유일한 길이다.

 

부가적용)

'율법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뜻에 순종하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과 양심에 예민하게 반응합니다. 그들은 성령의 감동으로 선과 악을 분명하게 구별하며, 하나님을 가까이하고 악을 멀리합니다. 율법을 지키는 사람들은 의인을 사랑하고 그들을 가까이하며, 악행하는 자들을 멀리하고 대적합니다. 진리와 비진리 사이에 중립 지대는 없습니다. 인류 역사의 초기부터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은 불의와 악인들을 대적해 왔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인류의 행동에 대한 절대적인 표준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을 쫓아가면 온전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계시를 포기하게 되면, 우리의 삶에 대한 절대적 기준이 사라지게 되어, 상대주의적인 가치관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에녹은 하나님의 뜻을 떠난 시대에 하나님 편에 서서 불의한 사람들을 책망했습니다(유다서 1:14-15). 또한 우리가 잘 아는 노아도 하나님을 무시하는 사람들과 타협하지 않고, 그들을 향해서 다가올 심판을 경고했습니다(벧후 2:5).

 

나의 삶 속으로

 

| 묵상 |

그대가 비신자와, 심지어 다른 그리스도인과 구별되는 점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왼쪽 페이지에 이어서)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롬 1:16~17).

 

| 적용 |

그대는 하나님의 율법에 순종하는 것이 지혜라는 사실을 어떤 경험을 바탕으로 증언하겠습니까?

 

영감의 교훈

율법에 순종했더라면 - “하나님의 율법을 순종했더라면 그들(이스라엘)은 세계 열방 앞에서 놀랄 만큼 번영했을 것이다.… 만일 그들이 순종했더라면 다른 나라 백성을 괴롭혔던 질병을 피할 수 있었을 것이고 왕성한 지능을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위엄과 권능이 그들이 하는 모든 일에 나타났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제사장과 방백의 나라가 되었을 것이다”(실물교훈, 288).

 

기도

아버지, 말씀에 순종하는 삶에서 진정한 믿음의 의미를 깨닫게 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제 자신의 지혜가 얼마나 부족한지 망각하지 않기를 원합니다. 언제나 말씀을 마음에 담고 성령의 인도를 구하며 살아갈 수 있게 해 주시옵소서.

 

둘째날(월) 3월 9일 여호와를 찾으라

 

“악인은 정의를 깨닫지 못하나 여호와를 찾는 자는 모든 것을 깨닫느니라”(잠 28:5).

 

교사강해 2)

지혜자는 4절에서 율법을 버린 자는 악인을 칭찬하지만, 율법을 지키는 자는 악인을 대적한다고 말했습니다. 이제 그는 5절에서 그 이유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악인은 정의를 깨닫지 못하고 선과 악을 분별할 줄 모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악을 행하고 같은 일을 행하는 자를 옳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여호와를 찾는 사람은 선과 악을 구별할 줄 알며, 공의를 분별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하나님을 가까이하고 악을 대적합니다. 지혜자는 "악인은 정의를 깨닫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여기에서 "공의"로 번역된 말(미쉬파트)은 원래 '재판'이나 '심판'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이 말이 '선과 악을 분별하는 능력', 또는 '정의를 분별하는 능력'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율법은 창조주 하나님께서 피조물인 인간에게 원하시는 뜻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율법을 통해서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선과, 해서는 안될 악에 대한 분별력을 배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율법을 멸시하고 율법을 버리는 자들은 선과 악에 대한 기준을 잃어버리고, 세상과 자기 생각을 좇아 살아갑니다. 그러므로 율법을 버린 자들은 선악에 대한 절대적인 기준을 부정하고 모든 것을 인정하는 상대주의로 나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율법을 떠나는 사람은 선과 악의 기준을 버리고, 세상의 가치를 따라 판단하며 살아갑니다. 인간은 이미 타락하여 분별력을 상실했기 때문에 선과 악에 대한 판단력이 모호해지고, 정의를 분별할 능력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율법을 버린 자들은 악을 행하고, 또 악을 행하는 자를 지지하고 칭찬하며 살아갑니다.

 

율법(토라)이 신앙생활에 아무리 중요하다 할지라도 그것 자체는 생명의 근원이 아니다. 오히려 율법은 죄를 가리키고 죄는 사망으로 이어진다(롬 7:7~13 참고). 오직 그것이 하나님께로부터 비롯되었다는 사실만이 율법을 효력 있게 한다. 하나님과 분리된 율법은 그분의 본래의 의도와 상관없는 율법주의적인 신조에 불과하다. 하나님의 율법에 순종하는 생애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생애와 관련이 있다. 율법은 하나님을 대체할 수 없다. 그것은 단지 학생을 그 스승에게 인도하는 몽학 선생에 불과하다(갈 3:24).

갈 3:24을 문맥을 참고하여 읽어 보라. 율법은 어떻게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워질 수 있도록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가리키는가?

잠언은 단지 하나의 지혜서가 아니다. 무엇보다 잠언은 지혜를 계시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책이다. 율법에 순종함으로 지혜를 구하는 것은 우리를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가게 하며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때 그분이 값없이 제공하시는 구원에 더 가까이 이르게 한다.

잠 28:5을 읽어 보라. “모든 것”을 깨닫기 위한 비결은 무엇인가?

‘율법’이 4절에서 두 번 사용된 것처럼 ‘깨닫다’는 말은 5절에서 두 번 사용되었다. 율법을 지키라는 4절과 여호와를 찾으라는 5절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그러나 이런 행동의 범주는 단지 옳은 것(5절에서 ‘정의’)을 알고 행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는다. 이런 이해는 ‘모든 것’과 관련이 있다. 왜냐하면 그것이 모든 것의 하나님에게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고대 이스라엘 백성에게 모든 것에 대한 지식은 종교적인 경험과 분리되지 않았다. 신앙은 지성과 합리적 이해와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이성 없는 믿음 또는 신앙 없는 이성은 상상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두 영역의 근본이 모두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교훈 : 율법은 생명을 줄 수 없다. 그러나 율법에 순종하면서 하나님을 찾으면 우리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하시는 주님과 모든 지식으로 인도된다.

 

부가적용)

지혜자는 여호와를 찾는 사람은 모든 것을 깨닫는다고 말합니다. 여기에 나오는 "여호와를 찾는 사람"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분만으로 만족하며, 그 분의 뜻을 찾아 순종하려는 사람을 말합니다. 여호와를 찾는 사람은 선과 악에 대한 분명한 분별력을 소유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모하고 하나님의 영광과 뜻을 찾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려고 노력합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사람들의 눈을 열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선)과 하나님을 노하게 하는 것(악)이 무엇인지 분별할 수 있게 해주십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선과 악을 분별하는 능력과, 정의를 사랑하는 마음을 얻을 수 있습니다. 또한 그들은 여호와를 경외하고 의인들을 가까이하며, 악인을 미워하고 멀리합니다. 그러므로 의인의 주변에는 의인이 몰려들고, 하나님은 그 모임을 축복해 주십니다. 의인은 가정과 나라를 강하게 하는 축복의 근원이며 보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이 먼저 의인이 되고, 우리나라에 의인들이 많아지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나의 삶 속으로

 

| 묵상 |

그대를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것은 무엇이며 그 길을 가로막는 것은 무엇입니까?

롬 1:17은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한다고 말합니다.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하나님에 대하여 점점 심화된 신뢰의 관계로 우리를 인도합니다. 그런데 이런 관계 속에는 롬 8:4의 말씀처럼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는 경험이 따르게 됩니다. 하나님께 대한 믿음은 그분의 계시로 나타난 율법의 의미를 우리에게 바르게 성취시킵니다. 반면 하나님의 계시와 도움을 구하지 않는 사람에 대해서 성경은 “이 사람들은 무엇이든지 그 알지 못하는 것을 비방하는도다 또 그들은 이성 없는 짐승같이 본능으로 아는 그것으로 멸망하느니라”(유 10)고 했습니다.

 

| 적용 |

경험적으로 믿음과 순종은 신앙뿐 아니라 지적인 능력에 어떤 향상을 가져왔습니까?

 

영감의 교훈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율법 - “율법의 원칙이 그리스도의 생애에서 명백하게 드러났다. 하나님의 성령께서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키고 그리스도의 빛이 당신의 정결하게 하는 피와 의롭게 하는 의의 필요를 사람에게 보여 줄 때에 율법은 여전히 우리를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데 있어서 대리자로서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을 수 있게 한다”(시대의 소망, 308).

 

기도

아버지, 다시 한번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임을 고백합니다. 우리에게 주신 계시의 말씀을 읽을 때마다 아버지를 만나게 하시고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깨달음을 얻게 해 주시옵소서.

 

셋째날(화) 3월 10일 부자들을 위한 말씀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요일 2:15~17).

 

교사강해 3)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요 3:16)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사랑하셨는데 우리 더러는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을 사랑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먼저 생각해야 하는 것은 성경이 말하는 세상이라는 단어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이 논리적 모순을 인위적으로 설명한 이들이 초대교회 이단들입니다. 그들은 이원론으로 이 모순을 명쾌하게(?) 설명하였습니다. 모든 것을 이원론적으로 이해하고 설명하였습니다. 참신과 거짓 신, 선과 악, 영혼과 육체, 교회와 세상이 대립관계에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런 이해에서 그들은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는 말씀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들의 가르침에 의하면 세상의 모든 것은 가치 없는 것이고 영혼과 교회는 귀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가르침은 세상의 모든 것을 미워하는 것을 정당화 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가르침은 세상을 사랑하신 하나님의 사랑에 반하는 거짓 가르침입니다. 성경에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고 했을 때 “세상”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성경은 “세상”이라는 말을 두 가지 뜻으로 사용하였습니다. 먼저는 인간을 비롯하여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것을 지칭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탄과 그 세력을 지칭하여 “세상”이라고 하였습니다.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을 사랑하지 말라고 했을 때는 후자를 지칭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초대교회 영지주의자들처럼 오해하는 일이 교회 안에 너무 심각합니다.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는 말씀은 이원론자들의 가르침을 경계하는 말씀인데 아이러니 하게도 교회가 이원론적으로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한국교회는 이 점에 있어서 큰 실수를 하였습니다. 영적인 것과 세속적인 것을 물리적으로 구분하는 것은 모두 이원론의 영향입니다. 한국의 기독교인들이 희랍의 이원론을 배워서 그런 것이 아니라, 이원론은 하나님을 모르는 자연종교나 사상이나 철학이나 민속 문화에 자생적으로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사랑하지 말아야 할 세상이란 사람을 비롯한 피조물 자체가 아니라 사탄의 지배아래 하나님께 대항하는 세력이나 경향이나 사상이나 가치관 같은 것입니다. 예전에는 교회의 세속화를 막기 위해 극장을 가는 것, 노래방 가는 것, 교인들이 매니큐어를 칠하고 파마를 하는 것까지 금지하였습니다. 그런 모든 것을 세상의 것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결국 세상의 어떤 문화가 교회로 들어오는 것을 막음으로써 교회가 세속화 되는 것을 막는 것으로 여겼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모든 것들이 모든 교인들에게 자연스러운 일들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곧 신앙을 금욕적인 것으로 오해한 결과입니다. 세상을 사랑치 않는 것, 교회가 세속화되지 않는 것이 그런 것이라면 수도원처럼 사회와 격리한 채 살아가는 사람들은 자신들을 철저히 세상을 사랑하지 않는 존재로 여길 것입니다. 자기들에게는 세속화란 없다고 여길 것입니다. 그렇다면 세상을 사랑하지 않기 위해서는 스스로 세상과 격리될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그러나 요한이 말하는 세상은 전혀 다른 의미입니다. 요한이 말하는 세상의 의미를 안다면 우리가 얼마나 세상적이며 세상을 사랑하는 자로 살고 있는가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수도원처럼 격리되어 살아가는 그들 역시 비록 사회와는 격리되었다 할지라도 그들도 세상을 사랑하고 세속화되었다는 결론을 내리게 될 것입니다. 먼저 요한이 말하는 세상은 가시적이고 물질적인 것을 뜻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지 않고 의지하지 않는 모든 사고방식을 지칭하여 세상이라고 일컫는 것입니다. 세상의 삶의 정신 자체가 하나님이 없어도 자신들의 힘과 능력으로 얼마든지 살아갈 수 있다는 것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도 세상은 얼마든지 존재합니다. 자신들의 힘으로 뭔가를 이뤄보고자 할 때, 하고자 하면 못 이룰 것이 없다는 말이나 하고 있을 때 그것이 곧 세상이며, 그것을 가리켜서 교회의 세속화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요일 2:15~17을 읽어 보라. 이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경고는 무엇인가? 어떻게 우리는 이 말씀이 언급하는 위험으로부터 우리 스스로를 보호해야 하는가?

‘부자’가 된다는 의미는 매우 다양하다. 잠언은 부자가 되는 법과 우리가 얻은 부를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에 대한 몇 가지 지침을 제시한다.

1. 가난한 자들을 이용하여 부를 얻지 말라(잠 28:8). 우리가 가난한 자들을 이용하여 부를 얻는다면 그러한 부는 정당하지 못하다. 앞서 보았듯이 성경은 개인의 이익을 위해 가난한 자들을 착취하는 자들을 강력하게 비난한다.

2. 가난한 자들에게 베풀라(잠 28:27). 잠 28:25에서 말하는 탐욕스러운 자들과 대조적으로 가난한 자들에게 관대한 자들은 복을 받을 것이다.

3. 성실하게 일하라(잠 28:19). 부는 절도나 우연한 방법이 아니라 성실한 노력의 결과로 주어져야 한다. 소득은 노동의 질에 좌우된다. 부자가 되려면 그에 합당한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4. 빨리 부자가 되려 하지 말라(잠 28:20, 22). 잠언은 두 가지 가능성 있는 시나리오를 제시한다. (1) 우리가 어떤 부정직한 행위에 눈을 감으면 결과적으로 그 행동에 대한 공범죄를 지게 된다(잠 28:22). (2) 우리가 부모의 재산을 누리고자 지나치게 갈망한다면 지금 그들에게 필요한 것을 빼앗게 된다(잠 28:24). 더 심각한 것은 이런 일을 행하고도 잘못한 것이 없다고 자신을 정당화하는 것이다.

 

교훈 : 우리는 세상의 정욕을 따라 부당한 방법으로 부자가 되기보다 스스로 성실히 일하여 정당하게 부를 얻고 가난한 자에게 베풀 수 있어야 한다.

 

부가적용)

교회는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을 의지하는 방식으로 살아갑니다. 하나님의 하나님 됨을 인정하며 하나님이 온 우주를 주관하시고 다스리심을 인정하면서 하나님의 일하심에 순종하는 것이 교회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교회가 하나님의 다스림을 인정하기보다는 반기를 듭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에 대해 불만과 불평을 내세우며 자신의 뜻대로 이뤄 달라고 소리칩니다. 이것이 세상이며 교회의 세속화 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이 없이 자신들의 힘으로 원하는 것을 이루며 살아가는 삶이 좋아 보이는 것을 뜻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대로 산다는 것보다는 열심과 힘을 다해 원하는 것을 이루며 살아가는 것이 훨씬 사는 것 같고 보람이 있는 것처럼 여겨지는 것이야 말로 세상에 대한 사랑이 그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의 사랑이 있다면 세상이 살아가는 사고방식은 절대로 마음에 들지 않게 됩니다. 오히려 아버지의 다스리심을 부인하는 사고방식에 대해 적대감을 가지게 됩니다. 그리고 그러한 삶과 싸우며 살아가게 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그러한 모습이 나와지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사랑이 있다면 그 사랑은 여러분으로 하여금 아버지를 바라보고 믿고 의지하게 합니다. 세상이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모습들이 결코 좋게 보이지를 않게 됩니다. 때문에 세상을 사랑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사랑이 없을 때 자연히 세상이 좋아 보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세상적 인간, 세속적인 인간이 되는 것입니다. 16절에 보면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없이 사는 세상이 목적하는 것은 모두가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들입니다. 육신의 즐거움을 위해 살고 외형적인 것으로 가치를 판단하며 살아갑니다. 그러기에 이들은 하나님을 싫어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에 복종할 것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주관한 대로 순종할 것을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정욕이란 세상에 있는 것을 자신의 소원을 삼은 것을 뜻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 기도하게 됩니다. 이것을 두고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한 기도라고 말씀합니다. 즉 자신의 소원을 이루기 위해 기도하는 것은 잘못된 것임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4:4절에 보면 “간음하는 여자들이여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의 원수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게 하는 것이니라”고 말합니다. 요사이 전통적인 가치관의 하나인 간통죄가 폐지되었습니다. 도덕적인 전통적인 그 가치가 변해 버린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은 변할지라도 하나님의 세계는 변함이 없습니다. 세상과 벗되는 것이 왜 하나님과 원수 되는 것입니까? 그것은 세상의 삶의 사고방식이 하나님과 전혀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사랑하는 것은 우리 안에 있는 생명의 존귀함을 멸시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를 스스로 부인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세상은 흘러 지나가는 것에 불과합니다. 우리의 눈에 좋아 보이는 모든 것들이 잠시 후면 사라질 것들에 불과합니다. 영원한 것이 되지 못합니다. 그런데 그러한 세상 것으로 이생의 자랑으로 삼으려고 하고 세상 것을 소유함으로서 자신을 존귀하게 하려고 한다면 참으로 어리석다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의 영광은 오직 그리스도로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사랑치 말기 바랍니다. 신자는 영원한 생명으로 사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나의 삶 속으로

 

| 묵상 |

그대는 부자가 되어야 하는 이유가 있습니까?

현대 사회에서 부자가 되려면 평범한 노동만으로는 부족해 보입니다. 기본적인 생활비를 제하면 저축할 여력이 없습니다. 설령 저축을 한다 해도 금리가 낮아 이자 소득을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전문직을 얻든지 투자 정보에 밝든지 큰 재산을 상속 받든지 해야 합니다. 그러나 절망하기에 앞서 우리는 왜 부자가 되려는지 스스로에게 물어야 합니다. 단지 부자가 더 행복할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 때문이라면 다음의 말씀에 귀 기울여야 합니다. “은을 사랑하는 자는 은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풍요를 사랑하는 자는 소득으로 만족하지 아니하나니”(전 5:10).

 

| 적용 |

사람들이 빨리 부자가 되려는 마음으로 걸려드는 덫 가운데 그대가 특별히 조심해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영감의 교훈

우리의 의무 - “만일 우리가 유혹을 물리치는 데 강하다면 우리는 연약하고 굴복하는 자들을 도와줄 더 큰 책임을 지고 있다. 우리가 지식을 가졌으면 무지한 자들을 가르쳐야 한다. 하나님이 이 세상의 재물로 우리를 축복하셨다면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위하여 일해야 한다”(교회증언 5권, 606).

 

기도

아버지, 제가 부자라면 그에 대한 사명과 책임을 알게 해 주시옵소서. 제가 부자가 되어야 한다면 부르심의 목적을 알게 해 주시옵소서. 만약 사람들이 저를 가난하게 본다면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함에 있지 않음을 보여줄 수 있게 하옵소서.

 

넷째날(수) 3월 11일 가난한 자들을 위한 지침

 

“가난한 자와 포학한 자가 섞여 살거니와 여호와께서는 그 모두의 눈에 빛을 주시느니라”(잠 29:13).

 

교사강해 4)

미국이 낳은 영웅이 있습니다. 1944년 미국 남부 애틀랜타에서 웅변대회가 있었답니다. 한 학생이 당당히 1등을 했습니다. 그는 여자 선생님과 함께 버스를 탔습니다. 곧 다른 사람들이 뒤따라 버스를 탔습니다. 운전기사는 고함을 칩니다. 웅변대회에서 1등한 학생과 교사에게 자리를 내놓으라고 했습니다. 학생은 그럴 수 없다고 버티었습니다. 선생님이 학생을 설득시켰습니다. 그는 자리를 빼앗기고 150km를 선 채로 오면서 이 분노를 평생 간직하겠다고 맹세했습니다. 그는 검둥이였기 때문에 백인에게 자리를 빼앗긴 것입니다. 이 소년은 미국의 인권운동가 마르틴 루터 킹 목사로 성장했습니다. 1896년 미국 대법원은 공공시설에서 흑인과 백인의 자리를 분리시켜도 좋다고 판결했습니다. 이것을 분리평등(separate but equal)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1954년에 일 워런이 이끄는 대법원은 공립학교에서 “분리평등”을 없애라고 만장일치로 결의했습니다. 이 역사적 판결을 흑인 민권운동은 십계명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이와 비슷한 일은 우리나라 조선에도 있었습니다. 조선은 양반이 지배하는 사회였습니다. 양반들은 상놈을 억눌렀고 상놈은 그 지배 아래서 고난을 받아야 했습니다. 백정은 상놈의 대명사였습니다. 백정은 기와집에서 살 수 없었고 비단옷이나 갖신도 신을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양반이 지나갈 때에는 길을 비켜서야 했으며 항상 허리를 구부리고 뛰어가듯 껑충거리며 다녀야 했습니다. 만일 허리를 숙이지 않으면 중형에 처해졌습니다. 바로 이들을 사람 대접받을 수 있도록 해준 사람이 모삼열 선교사였습니다. 모삼열 선교사는 자기가 운영하는 학교에 상놈 출신을 받아들여 교육을 시켰는데 그 중에 백정 박씨의 아들이 있었습니다. 박씨는 불행히도 장티푸스에 걸려서 죽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알고 모삼열은 임금의 시의였던 애비슨을 데리고 와서 치료해주었습니다. 백정으로서 감히 상상도 못할 일이었습니다. 이 일로 인하여 박씨의 온 가족이 개종을 하였습니다. 박씨는 1895년에 세례를 받게 되었는데 그가 백정이라는 사실이 밝혀지자 사람들은 백정과 함께 예배를 드릴 수 없다고 하면서 반 이상이 교회에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모삼열 선교사는 “예수의 사랑 앞에는 사람의 차별이 없다”고 그들을 설득하였습니다. 이에 대해 양반들은 “그러면 교회에서 양반과 백정의 자리를 구분하여 양반들에게 앞자리를 달라”고 타협안을 제시하였다. 모삼열 선교사는 이런 조건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이런 백정에 대한 사랑은 개인적인 차원의 것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1895년 4월 모삼열은 한학자 최씨로 하여금 박씨를 도와서 정부에 백정에 대한 차별대우를 철폐할 것을 탄원하는 청원서를 제출하였습니다. 정부는 그들의 청원을 받아들여 평민들과 같이 초립과 망건을 착용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습니다. 또한 그 다음해 3월에는 인구조사에 백정이 빠져 있자 이것을 시정하여 백정도 일반인들과 똑같은 대우를 받게 해달라고 청원하여 허락을 받아냈습니다. 백정 박씨의 개종은 그의 삶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아들 박동열은 1907년에 최초로 세브란스 의전을 졸업한 학생 가운데 하나가 되었습니다. 박씨 자신도 은행업을 시작하여 사업가와 장로가 되었습니다. 박씨는 백정조합 회장으로 선출되어 백정들에게 해방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부자와 가난한 자는 또 다른 백인과 흑인 그리고 양반과 상놈과 같은 모습으로 포장되어 약한 자를 억누르는 세력으로 보여집니다. 여기에서 '포학한 자'로 번역된 말(이쉬 테카킴)은 '고리대금업자', '억압하는 자', 또는 '속이는 자'를 의미합니다. 이러한 점에서 본문에 나오는 '포악한 자'는 '불의한 부자'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잠 22:2)에도 이와 비슷한 잠언이 나옵니다. "빈부가 섞여 살거니와 무릇 그들을 지으신 이는 여호와시니라!(잠 22:2)" 세상에는 항상 가난한 사람과 부유한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부자들 중에는 가난한 사람들을 도우며 살아가는 선한 사람들도 있고, 반대로 약한 사람들을 등쳐서 배불리는 불의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러한 일은 역사가 존재하는 계속해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공산주의자들은 인위적으로 빈부의 차를 없애보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공산사회를 만들지 못했습니다. 공산주의 사회는 더 큰 빈부의 격차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빈부를 인위적으로 없앨 수는 없습니다. 불교, 힌두교, 이슬람교, 기독교 국가, 민주주의 국가, 왕정 국가, 또는 공산주의 국가에도 빈부는 여전히 존재합니다. 일부 사람들은 먹을 것이 없어서 굶주리고, 어떤 사람들은 너무 많이 먹어서 비만증에 걸립니다. 그러나 지혜자는 "여호와께서 그들의 눈에 빛을 주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빈부를 차별하지 않고 그 '눈에 빛을 주십니다.'. 여기에서 "눈에 빛을 준다!"는 말은 매일 살아갈 수 있는 생명력을 주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은 악인이나 의인에게 똑같이 빛을 비추어 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마 5:44,45). 세상이 존재하는 한 가난한 자와 부자는 항상 공존하고, 또 갈등도 계속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모든 사람에게 햇빛과 비와 생명력을 주십니다. 하나님은 불의한 자들을 벌하시고 연약한 자들을 돌아보십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강제로 모든 부자와 가난한 자들을 제거하시지는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인정하고 부자와 연약한 사람들이 서로 도우며 살아가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우리가 이것을 실천하면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면서 서로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잠 29:13을 읽어 보라. 여기서 논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가난한 자들과 부자들은 모두 평등하다(잠 29:13). 여기서 사용된 ‘빛’의 은유는 이 주제를 창조의 관점에서 보게 한다. 부자나 가난한 자나 모두 하나님의 피조물이다(잠 22:2). 그들 모두 생명의 선물을 누리며, 태양도 두 부류에게 똑같이 빛을 비춰준다. 부자는 가난한 자들을 대하는 태도에 대해 경고를 받았다. 마찬가지로 가난한 자들은 경우에 따라 부자일 수도 있는 그들의 압제자들까지 사랑해야 한다(마 5:44~45).

잠 28:3의 기별은 무엇입니까?

가난한 자들에게도 부자와 동일한 의무가 있다(잠 28:3). 가난을 범죄의 구실로 삼아서는 안 된다. 우리가 압제를 받았다고 해서 우리에게 남을 압제할 면허가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자기보다 더 가난한 동관을 옥에 가뒀던 종의 비유는 이런 식의 반응이 드물지 않음을 보여준다(마 18:22~35). 이는 가난한 자가 다른 가난한 자에게 더욱 동정적일 것이라는 일반적인 예상을 뒤엎는다. 비의 은유는 보통 은총의 상징이지만 잠 28:3에서는 재해를 끼치는 폭우로 나타난다. 이런 비유적 표현은 그러한 행위의 비정상성과 그것이 가져오는 실망을 예증한다.

잠 28:6의 기별은 무엇인가?

가난하지만 의로운 자가 악한 부자보다 낫다(잠 28:6). 전통적인 상식에 따르면 의인은 가난하게 될 리가 없다. 왜냐하면 가난은 게으름에 대한 징벌로 여겨졌기 때문이다(잠 24:34). 그러나 현실은 훨씬 복잡하다. 때로는 가난한 자들이 불의와 통제가 불가한 환경의 피해자일 수도 있다. 어쨌든 잠언이 방어하는 가치척도는 명확하다. 의는 부보다 중요하고 성공은 의로움의 완벽한 지표가 아니다.

 

교훈 : 하나님께 가난한 자와 부자는 모두 동일하다. 가난과 부는 죄악의 환경과 불의의 결과일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무엇보다 먼저 의로움을 추구해야 한다.

 

부가적용)

인도의 영원한 지도자 간디(Mohandas Karamchand Gandhi, 1869-1948)가 젊었을 때 영국으로 유학을 갔습니다. 온갖 차별과 편견과 냉대에 시달리면서 어려운 유학생활을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우연히 성경책을 발견하고 이를 읽기 시작하였습니다. 성경을 읽으면서 간디는 참으로 많은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특히 예수님이 산상수훈의 말씀은 그에게 큰 감명을 더하여 주었습니다. 성경을 읽은 간디는 하나님을 위해 그의 일생을 바쳐야겠다는 결심하고는 교회의 문을 두드리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인도가 영국의 식민지에 지나지 않는 미개한 나라이었고 인종차별이 심한 때이었기 때문에 그의 결심은 빛을 볼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교회를 찾아다니며 예수를 잘 믿을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여러 차례 청원을 해 보았으나 교회당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쫓겨나기가 일쑤이었기 때문입니다. 교회에서 쫓겨나면서 한 그의 마지막 말은 너무나 유명합니다. “나는 그리스도는 존경하지만 그리스도인은 경멸한다.” 그는 결국 기독교에 대한 신앙을 버리고 교회를 떠나고 말았습니다. 인도로 돌아온 그는 10억 인구의 인도를 움직이는 위대한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만약 그 때 교회가 간디의 간절한 소망을 외면하지 않았다면 인도의 역사는 전혀 달라졌을지 모릅니다. 간디가 기독교의 영향을 인도에 끼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인도 컬컷트에서 만나는 인간 이하의 삶을 사는 그 수많은 거지 떼들은 인도가 아직도 어두움 속에 헤매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빈부를 구별하지 않고 그들의 '눈에 빛을 주십니다.'. 여기에서 "눈에 빛을 준다!"는 말은 생명을 지속할 수 있는 힘을 주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마 5:44-45)에서도 주님은 이와 비슷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때에 주님은 제자들에게 "하나님은 악인이나 의인에게 똑같이 빛을 비추어 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마 5:44,45). 우리는 불의한 부자들은 마땅히 벌을 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가난한 자를 속이고 협박해서 재산을 모아서, 그 재산으로 비싼 이자를 받고 돈을 빌려주어서 더 큰 재산을 모읍니다. 그는 그 재물을 가지고 남을 돕지 않고, 자기 자신만 위해서 사용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러한 악한 부자들을 즉시 심판하시지 않고 세상에 그대로 살아가게 하십니다. 반대로 세상에는 힘없고 가난한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세상에 가난한 사람들도 살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세상이 존재하는 한 가난한 자와 부자는 항상 공존하게 되고, 또한 갈등도 계속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을 세상에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모든 사람에게 햇빛과 비, 그리고 생명력을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때때로 불의한 자들을 벌하고 연약한 자들을 돌보아 주시지만, 그렇다고 세상에서 빈부를 모두 사라지게 하시지는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는 날까지 이 모든 사람들이 함께 공존하도록 하실 것입니다.

 

나의 삶 속으로

 

| 묵상 |

그대에게 가난은 성공의 반대입니까? 아니면 하나의 선택입니까?

이 세상은 여러모로 가난한 자에게 불리하게 작용합니다. 그래서 그들의 호소는 하나님의 특별한 관심사입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하나님은 가난한 자들이 더욱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는 길을 제시하셨습니다. “가산이 적어도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크게 부하고 번뇌하는 것보다 나으니라”(잠 15:16). “적은 소득이 공의를 겸하면 많은 소득이 불의를 겸한 것보다 나으니라”(잠 16:8). “가난한 자는 거짓말하는 자보다 나으니라”(잠 19:22). “가난하여도 성실하게 행하는 자는 부유하면서 굽게 행하는 자보다 나으니라”(잠 28:6).

 

| 적용 |

그대가 가난하지만 당당하게 살기를 원한다면 어떤 원칙을 지켜야 할까요?

 

영감의 교훈

가난한 자들도 차지할 수 있는 축복 - “가난을 핑계로 하여 그들이 받은 귀한 빛을 남에게 전하여야 할 의무를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 가난하다고 하여 하늘에 보물을 쌓아두는 것을 그만두어서는 안 된다. 부자들이 차지할 수 있는 축복은 가난한 자들도 능히 차지할 수 있는 것이다. 그들이 소유한 적은 재물이라도 신실히 사용하면, 하늘 창고에 쌓은 그들의 보물은 그 신실함을 따라 더욱 증가할 것이다”(복음교역자, 222).

 

기도

아버지 제가 비록 가난할지라도 강퍅하거나 비굴하거나 불평과 불만에 가득한 인생을 살지 않기를 원합니다. 오히려 제 삶에 정직함과 의로움을 허락하시고 하나님을 섬기며 성도와 가족 그리고 이웃과 더불어 소박한 행복을 누리며 살게 하옵소서.

 

다섯째날(목) 3월 12일 진리를 사랑함

 

“채찍과 꾸지람이 지혜를 주거늘 임의로 행하게 버려 둔 자식은 어미를 욕되게 하느니라”(잠 29:15).

 

교사강해 5)

지혜자는 "채찍과 꾸지람이 지혜를 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채찍과 꾸지람'은 징계를 포함하는 교육(훈육)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부모들은 하나님께서 맡겨 주신 자녀들을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자라날 수 있도록 교육할 책임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크리스챤 부모들은 자녀들이 그릇된 길로 나갈 때에 적절한 책망과 징계를 통해 그들이 바른 길로 갈 수 있도록 인도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지나치게 자녀를 사랑하다가 자녀들이 잘못을 해도 책망하거나 징계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어려서 자녀들을 바로 잡아주지 못하면, 자라나서 큰 실수를 할 가능성이 많습니다. 이런 점에서 지혜자는 독자들에게 '채찍과 꾸지람이 자녀들에게 지혜를 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징계와 책망은 자녀들에게 무엇이 옳고 잘못된 것인지 깨닫게 해줍니다. 자녀들이 잘못된 길로 갈 때에 그들을 책망하면, 그들은 그 일이 잘못된 것임을 알고 그 길로 가지 않습니다. 그러나 잘못을 해도 책망해 줄 부모가 없는 자녀는 같은 실수를 반복합니다. 이와 같이 적절한 훈계와 책망은 자녀들에게 선과 악을 분별하는 분별력을 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려서 부모를 통해서 사려 깊은 훈육을 받은 자녀들은 분별력과 품위를 지닌 자녀들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부모로부터 적절한 교육을 받지못하고 자란 자녀는, 거칠고 균형 잡히지 못한 모습을 보여줄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자녀나 학생 또는 배우려는 열린 마음을 가진 사람에게 가르쳐야 할 가장 중요한 교훈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다음과 같은 바울의 기록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그들이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받지 못함이라”(살후 2:10). 물론 예수께서 진리이시기 때문에 진리를 사랑하도록 가르친다는 것은 예수님을 사랑하라고 가르치는 것과 같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무엇이겠는가?

“어떤 방면의 연구에 종사하든지 진리에 도달하려는 진실된 목적을 가지고 힘쓸 때에 우리는 만물 가운데서, 또 만물을 통하여 일하시는, 눈에 보이지는 않으나 놀라운 지능 그 자체이신 분을 만나게 된다. 사람의 마음과 하나님의 마음이 만나고, 유한한 자와 무한하신 분이 만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만남이 지·덕·체의 발달에 미치는 영향은 실로 헤아릴 수 없이 크다”(교육, 14).

잠 29:15을 읽어 보라(잠 29:19도 참고). 여기서 우리는 교육뿐 아니라 일반적인 생활에도 유용한 어떤 중요한 원칙을 찾을 수 있는가?

우리가 책망하거나 징계할 수 없는 자들에게는 모본이 중요하지만 경우에 따라 그 이상이 필요할 때가 있다. 특별히 우리 자녀들이 그러한 경우이다. 때로 우리 자녀들은 삶을 바로잡기 위해 징계를 받을 필요가 있다.

우리의 본성은 매우 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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