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과 지혜의 말씀(교사들을위한 강해와 예화) > 교과토의 자료

본문 바로가기

운영진
x


교과토의 자료 보기

교과토의 자료

제8과 지혜의 말씀(교사들을위한 강해와 예화)

페이지 정보

작성자 조춘호 작성일15-02-14 08:07 조회5,320회 댓글0건

첨부파일

본문

제8과 지혜의 말씀

 

2월 21일 안식일

일몰:오후 6시 17분

 

기억절 : “많은 사람이 각기 자기의 인자함을 자랑하나니 충성된 자를 누가 만날 수 있으랴”(잠 20:6).

 

도입)

잠언 기자는 충성된 자가 과연 어떤 사람인가 말하면서 한탄하듯 질문합니다. “많은 사람은 각기 자기의 인자함을 자랑하나니 충성된 자를 누가 만날 수 있으랴?” 잠언 기자의 한탄대로 사람들은 스스로 자신이 인자하다고, 무한한 사랑을 가지고 있다고 자랑합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충성된 사람은 자화자찬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런 사랑과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인정받는 사람입니다. 다음 구절에서 대답하듯이 잠언 기자가 하는 말이 의미 있습니다. “완전히 행하는 자가 의인이라 그 후손에게 복이 있느니라”(7절). 완전히 행하는 자입니다. 충성된 사람은 완전히 행하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이 세상에서 누리는 물질적 복이나 자신만의 영화에 만족하지 않습니다. 이 세상만이 아닌 내세에 받을 천국 상급을 염두에 두기에 자신만이 아니라 후손이 받을 복도 기대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자가 하나님 앞에서 충성된 자요, 사람들 앞에서도 충실한 사람입니다. 세계를 제패했던 알렉산더 대왕이 죽기 전에 자신의 재산을 모두 신하들에게 나누어주면서 이런 유언을 했다고 합니다. “내가 죽거든 관에 두 개의 구멍을 내서 내 두 손을 밖으로 내 놓게 하고, 내 관을 말이 끄는 초라한 수레에 싣고, 백성들로 하여금 볼 수 있도록 이 도성을 가로질러 매장지로 가라”고 했다고 합니다. 천하를 제패한, 한 제국의 제왕도 빈손으로 돌아가는 것이 인생인 것을 백성들에게 깨우쳐주기 위해서였답니다. 이 세상에 나의 것이란 아무것도 없습니다. 내 재능, 내 지식, 내 재산, 내 직장, 내 가정, 심지어 내 생명까지도 하나님의 것이었는데 얼마간 잘 관리하라고 맡겨주었을 뿐입니다. 그렇기에 이 진리를 깨달은 베드로는 “너희는 선한 청지기가 되라”고 했고, 바울 사도는 “맡은 자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고 했습니다.(고전 4:2) 하나님께서 왜 우리들에게 많은 재능을 주시고, 직분까지 주신지 아십니까? 주인이신 하나님을 위해 사용해서,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세워 가는 일에 충성하라고 주신 것입니다.

 

연구 범위 : 잠 20장, 고전 12:14~26, 렘 9:23~24, 잠 21장, 마 25:35~40, 잠 22장.

 

우리 모두는 어느 정도(실제로는 상당히) 환경의 산물이다. 유전의 영향이 크긴 하지만 우리가 고수하는 가치들은 우리를 둘러싼 것들 즉 가정, 교육, 문화 등에서 비롯된다. 어릴 적부터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의 영향을 받는다.

그러나 불행히도 우리가 보고 듣는 것이 항상 우리에게 최선은 아니다. 우리를 둘러싼 세계는 모든 면에서 타락한 상태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줄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우리에게는 세상이 제공하는 것보다 더 높고 나은 것을 제시하는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에 대한 약속이 있다.

이번 주에 우리는 여러 잠언의 말씀을 살펴보면서 그것들이 설명하는 실제적인 교훈들을 탐구할 것이다. 우리가 마음에 새기고 따르기만 한다면 그 교훈들은 우리로 하여금 타락한 세상의 부정적인 영향을 극복하도록 도움을 줄 뿐 아니라 우리를 더 나은 인물로 준비시킬 것이다.

 

*교과는 읽고 밑줄만 쳐도 공부가 됩니다.

 

안교 활동반과 교과 토의

 

※ 학습 목표

➊ 깨닫기 : 긍휼과 심판 사이의 인과 관계를 이해한다.

➋ 느끼기 : ‘세상의 부’라는 가시적인 상급보다 ‘하늘의 지혜’라는 비가시적인 상급을 더 감사하게 여긴다.

➌ 행하기 : 악행이 제공하는 일시적인 만족과 효과에 대해 현명한 판단을 내린다.

 

Part 1. 인사 안교 반장 또는 소그룹 리더

서로 인사를 나누고 손님을 환영해 줍니다.

출석과 공부를 확인하고 안교헌금을 걷습니다.

결석자와 구도자에 대한 보고를 듣고 방문 계획을 세웁니다.

 

Part 2. 나눔 안교 교사 또는 소그룹 리더(A나 B 중 하나를 선택하십시오.)

A. ❶ 보통 무엇을 보면 사람이 다 똑같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까?

❷ 눈에 띄는 성공보다 꾸준한 신실함이 더 중요하다는 말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일까요?

❸ 빠른 성공이나 직접 원수 갚는 일을 포기하고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며 기다리는 삶을 살 때 우리는 무엇을 기대할 수 있습니까?

❹ 오늘 나눈 말씀을 통해서 어떻게 지혜로운 삶을 살지 서로의 결심을 이야기해 봅시다.

 

B. ❶ 평범한 일상에서 발견한 지혜가 있다면 소개해 봅시다.

❷ 우리가 일상의 작은 일에 충실한 것이 얼마나 가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합니까?

❸ 우리가 특별히 가난한 자들을 돌보고 자녀를 그리스도인으로 교육하는 일에 더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❹ 우리 각자가 일상에서 진지하고 충실하게 실천해야 할 것들은 무엇일까요?

 

결론 : 자비와 진리는 우리에게 돈과 지혜를 가져다주지는 않지만 우리가 최선의 결정을 내릴 수 있도록 돕고 풍요롭고 발전적인 공동체를 형성할 수 있는 능력을 줍니다.

 

Part 3. 실천 안교 반장 또는 소그룹(예비) 리더

❶ 설 연휴 안부를 묻습니다.

❷ 전도해야 할 가족이나 친척에 대하여 이야기합니다.

❸ 전도해야 할 가족과 친척을 위해 기도합니다.

 

첫째날(일) 2월 15일 우리는 모두 평등하다

 

“듣는 귀와 보는 눈은 다 여호와께서 지으신 것이니라”(잠 20:12).

 

교사강해 1)

토마스 제퍼슨이 “모든 사람은 동등하게 창조되었다”라고 “독립선언문”을 썼을 때, 이것이 자명한 진리라고 그는 주장하였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전 역사를 통해서, 심지어 오늘날에도, 모든 문화는 이런 전제를 거절했습니다. 표면적으로만 보아도, 우리 주위에 불평등의 많은 증거가 보여 지고 있는 가운데 인간 동등성을 주장하는 것은 어리석습니다. 사람은 신장, 무게, 힘, 정열, 지성, 인내심, 진실성, 그리고 거의 모든 인간 속성에서 차이를 보입니다. 불평등은 인간 속성의 자명한 실체입니다. 제퍼슨(Jefferson)은 이것을 알았습니다. 인간의 동등성은 특별한 것으로 강조하였습니다. 인간은 모두가 도덕적으로 동등하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들 모두는 동일하게 행동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할지라도 그들 각자 생명의 가치는 다른 사람들보다 높거나 낮지 않습니다. 이 특이한 원리에 의하면, 필라델피아 거리에서 청소를 하는 사람은 제퍼슨 그 자신과 동일합니다. 각 사람의 생명은 값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의 생명도 다른 사람의 생명보다 값진 것이 아닙니다. 모든 인간 생명의 가치가 동등하다는 것, 사람의 생명의 동등성은 기독교 사상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창조한 각 사람의 생명에 무한한 가치를 부여하였고, 동등하게 각 사람을 사랑한다고 기독교인들은 믿습니다. 기독교에서는 가족 때문에, 종족 때문에, 나라 때문에 구원을 받지 않습니다. 구원받는 일은 각자의 문제이다. 게다가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부르시고, 우리 각자의 삶에는 신적 계획이 있습니다. 종교개혁 동안에, 마틴 루터는 기독교 신앙 여정의 개인성을 강조하였습니다. 우리가 죽을 때에 각자 하나님 앞에서 심판을 받으며, 살아있는 동안에도 개인적인 관계를 하나님과 가집니다. 종교적인 진리가 우리에게 내려온 것이 아니라, 우리 각자의 공부와 개인적인 기도를 통해서 얻어집니다. 이런 사상은 중대한 결과를 일으켰습니다. 인간은 태어난 모습의 차이는 있을 수 있으나 하나님께서 주시는 구원의 방법과 은혜에는 차별이 없으시기 때문입니다.

 

잠 20:12을 읽어 보라. 이 말씀은 모든 사람의 가치에 대해 어떻게 가르치는가?

인간을 비인격적인 우주의 우연의 산물로 간주하는 진화론과 달리 성경은 모든 사람을 하나님이 창조하셨다고 가르친다(행 17:26 참고). 토머스 제퍼슨도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셨기 때문에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고 주장했다. 우리가 평등한 이유는 오직 그분에게서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창조주가 같다고 해서 우리 모두가 똑같은 것은 아니다. 심지어 일란성 쌍둥이들도 완전히 똑같이 행동하지는 않는다. 고린도서에서 바울은 우리의 다양성에 대해 말하며 그런 다양성이 우월감으로 이어지기보다는 서로에 대한 필요성을 깨닫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고 강변하였다. “눈이 손더러 내가 너를 쓸 데가 없다 하거나 또한 머리가 발더러 내가 너를 쓸 데가 없다 하지 못하리라”(고전 12:21).

다음의 성경절을 읽어 보라. “내가 내 마음을 정하게 하였다 내 죄를 깨끗하게 하였다 할 자가 누구냐”(잠 20:9). 우리 모두를 평등하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죄는 또 다른 보편적인 평형 장치이다. 잠언의 수사적인 질문에 주어진 “아무도 없다”라는 대답은 인류의 비극적이고 절망적인 상태를 지적한다. 인간은 너무나 연약하고 무력하다. 세상의 모든 돈과 권력으로도 그 상황을 바꾸지는 못한다. 그러나 성경에서 언급하는 인간의 죄성이 절망으로 이어져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이 죄의 정도와 상관없이 누구나 영생의 약속을 얻을 수 있게 길을 닦았기 때문이다. 이 생명은 우리의 노력이 아니라 오직 그분에 대한 믿음을 통해 온다.

 

교훈 :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피조물이라는 점에서 평등하다. 또한 모두 죄인이지만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점에서도 존귀하며 평등하다.

 

부가적용)

유대법에 의하면 장자가 다른 자녀들보다 두 배의 상속을 받도록 되어있었으나, 로마법은 자녀들은 모두가 상속자로서 동등한 권한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로마서는 로마교회에 보낸 서신인데, 로마인들이 가진 상속법을 근거로 해서 모든 그리스도인들 또한 동등한 하나님의 상속자들이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후사임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이면 영광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자녀가 아니면 그것은 오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지위는 하나님 자녀의 지위이다. 이것이 권세요 권리이며 영광스럽고 감격적인 사실이므로 늘 생각하고 인식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요1:12-13). 그리스도인은 죄용서 받은 것만이 전부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가정에 양자가 되었고, 신의 성품에 참여한 자가 되었으며,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새롭게 지음을 받은 자입니다(롬8:29). "후사" 란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기다리는 기업이 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이 교훈과 진리는 성경 가운데 큰 주제이므로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 대단히 중요한 것이며 또 실제적인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나의 삶 속으로

 

| 묵상 |

십자가는 모든 인간의 평등함에 대해 어떤 귀중한 진리를 가르칩니까?

(왼쪽 페이지에 이어서) “그러나 만일 자신의 선한 행위 중 어떤 것으로도 구원을 얻을 수 없다면, 구원은 오로지 한 사람의 죄인이 예수님을 받아들이고 믿기 때문에 받은 은혜일 수밖에 없다. 그것은 완전히 값없이 받는 선물이다.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는 논쟁의 대상이 아니다. 선을 행한다고 할지라도 타락한 인간의 공로로는 자신을 영생으로 이끌 수 없다는 문제가 해결되는 순간 이 모든 논쟁은 끝이 난다”(믿음과 행함, 20).

 

| 적용 |

인종 차별, 남녀 차별, 학력 차별 등 그대가 그리스도인으로서 거부해야 할 차별의 종류를 적어 보십시오.

 

영감의 교훈

차별을 인정하지 않으심 - “국적이나 인종이나 계급에 의한 차별을 하나님께서는 인정하지 않으신다. 하나님께서는 온 인류의 창조주이시다. 모든 사람은 창조에 의하여 한 가족이 되었고, 구속을 통하여 하나가 되었다.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분리의 장벽을 헐어 버리시고 성전 마당의 모든 칸막이들을 열어 젖혀서 모든 영혼들로 하여금 자유로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하기 위하여 오셨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차별이 없다”(선지자와 왕, 369).

 

기도

아버지, 이 땅에 사람으로 태어난 모든 남녀가 다 하나님이 지으신 피조물임을 믿습니다. 우리 모두가 다 죽을 수밖에 없는 연약한 죄인이 되었음을 고백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누구든지 하나님의 자녀가 될 자격이 있음을 믿습니다.

 

둘째날(월) 2월 16일 삶의 시험

 

“많은 사람이…자기의 인자함을 자랑하나니 충성된 자를 누가 만날 수 있으랴”(잠 20:6).

 

교사강해 2)

광무제가 한 왕조를 재건시키기 위해 전투를 하던 중 상황이 불리해지자 거의 모든 신하들이 그를 버리고 도망쳤습니다. 그러나 충신 왕패만은 그를 버리지 않았는데 왕은 그에게 이런 말을 하였다고 합니다. “영천에서 나를 따라온 사람들은 모두 내 곁을 떠났다. 그러나 너만 오직 홀로 남아서 분투하고 있구나. 이것은 강한 바람에 약한 풀은 쓰러지나 강한 풀의 강함을 비로소 알게 됨이로다” 내가 환난을 당해 고통과 절망 가운데 있을 때에 변함없이 찾아와서 함께 슬퍼하고 위로하고 도와주는 사람이야말로 충성된 사람입니다. 충성스러운 신앙도 이와 같습니다. 우리 주위에는 자신의 믿음을 자랑하며 죽기까지 주님을 따르겠다고 호언장담하는 신앙인들이 꽤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말과는 달리 달면 삼기고 쓰면 뱉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은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진실로 충성된 신앙인은 시험과 환난 가운데서 그 빛이 찬란하게 드러납니다. 시험과 환난이 다가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갈 때에도 오로지 하나님만을 믿고 바라보며 하나님께 모든 것을 의탁하고 순종하는 사람이 충성스러운 성도입니다.

 

계 14:13은 의인들이 받을 상급에 대하여 “그들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고 하였다. 개인의 진정한 가치는 오직 미래에 입증된다. 우리는 현재의 부와 지식, 육체적인 솜씨를 뽐낼 수 있다. 그것이 정말 사실일 수도 있다. 그러나 과연 하나님이 보시기에도 그럴까? 우리가 중요하게 여기고 인상적이라고 추켜세우는 외모나 능력, 행동들이 실제로는 무가치한 배설물처럼 보일 때가 있다. 연예계에서 비열한 역할을 맡는 이들 중에 팬들로부터 숭배를 받다시피 하는 이들을 보라. 오늘날 우리가 우상화하고 숭배하는 것들은 인간이 얼마나 타락했는지를 보여주는 단적인 증거이다.

잠 20:6을 읽어 보라(렘 9:23`~24, 막 9:35 참고). 이 말씀에 따르면 하나님이 정말 가치 있게 여기시는 것은 무엇인가?

관계의 높은 수준을 증명하는 것은 단 한 번 세상을 떠들썩하게 하는 사랑의 행위나 희생이 아니라 매일 인내심과 확신을 가지고 오랫동안 지속적으로 이루어 온 작은 행동들의 연속이다. 배우자를 위해 준비하는 매일의 음식, 병든 부모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 직장에서의 꾸준한 노력 등 이러한 일상의 작은 행위들이야말로 그대의 믿음이 진실하다는 증거이다. 강력하지만 드문 사랑의 행위보다 꾸준한 신실함이 더 가치가 있다.

이런 원칙은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사는 것이 죽는 것보다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는 이유만으로 하나님을 위해 죽는 것보다 그분을 위해 사는 것이 더 가치 있고 힘든 일이다. 하나님을 위해 사는 성자가 그분을 위해 죽는 순교자보다 더 위대하다. 누구나 하나님을 믿고 섬긴다고 공언할 수 있다. 문제는 “끝까지 견디는 자”가 “구원을 얻으리라”(마 24:13)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처럼 ‘그것이 오래 갈 것인가’이다.

 

교훈 : 사람들은 눈에 띄는 외모나 성공을 가치 있게 여기지만 하나님은 그러한 일시적인 것들보다 지속적이고 꾸준한 생활의 신실함을 더 중요하게 여기신다.

 

부가적용)

다큐멘터리 영상을 통하여 많이 알려진 지하철에서 맨발로 전도하며 다니시던 최춘선 할아버지를 잘 아실 것입니다. 그분의 육성의 마지막 말씀 중에서 '충성은 열매 중에 하나입니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통일이 될 때까지는 신발을 신지 않겠다던 다짐을 지켜내는 것을 통하여 그의 뜻의 옳고 그름을 떠나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한 서약과 헌신을 끝까지 지키는 충성됨이 있었습니다. 이 시대에 충성된 사람을 보는 것이 희귀해졌습니다. 충성은 정말로 가치 있는 일입니다. 프랑스 대혁명 때 루이16세의 정부군이 혁명군에 포위당하였습니다. 끝까지 항전했던 군인이 있었습니다. 정부군이냐? 아니었습니다. 스위스 용병 220명이 끝까지 남아서 루이 16세를 지키다가 전사 하였습니다. 투항할 수도, 도망칠 수도 있었는데 그곳을 사수하며 지키던 스위스 용사 중 한명이 가족에게 남긴 편지에 이렇게 기록되었습니다. '우리가 신용을 잃으면 후손들이 영원히 용병이 될 수 없기에 우리는 죽음으로 프랑스정부와 계약을 지키기로 했다' 지금도 로마 바티칸을 지키는 용병을 보면 스위스용병입니다. 신용이 재산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스위스는 국가 이미지 자체가 충성입니다. 참으로 부러운 일입니다. 충성의 가치가 낮아지고 있습니다. 충성하는 사람을 일컬어 돌쇠다, 무식하다라고 몰아버리곤 합니다. 오히려 반항하고 비판하는 이들이 높이 평가받는 분위기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반항과 비판은 수술할 때 쓰는 메스와 같습니다. 마지막 방법으로 메스를 드는 것입니다. 여드름이나 종기가 날 때마다 수술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지금은 수술용 칼이 난무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현 시대에도 중요한 가치는 충성입니다. “많은 사람은 각기 자기의 인자함을 자랑하나니 충성된 자를 누가 만날 수 있으랴 완전히 행하는 자가 의인이라 그 후손에게 복이 있느니라”(6,7절)

 

나의 삶 속으로

 

| 묵상 |

그대는 성실한 삶과 꾸준한 신앙생활을 얼마나 가치 있게 여깁니까?

다음은 어느 작가의 깨달음입니다. “젊었을 때 나는 사람들에게 그들이 줄 수 있는 것 이상을 요구했다. 지속적인 우정, 끊임없는 감동 같은. 이제 나는 그들에게 그들이 줄 수 있는 것보다 더 작은 것을 요구할 줄 안다. 그냥 말없이 있어주는 것 같은.” 항상 곁에 있는 것은 눈에 띄는 성공이나 화려한 사랑에 비하면 초라할지 모르지만 결국 마지막까지 남아 있다는 점에서 가치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저녁 시간에 가족과의 행복한 재회를 기다리며 매일 새벽 문을 나선 이들의 발과 예배 시간마다 교회의 등을 밝혀 온 이들의 손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 적용 |

“끝까지 견디는 자가 구원을 얻으리라”는 말씀을 그대는 어떻게 삶에 적용하겠습니까?

 

영감의 교훈

더욱 귀한 자 - “자기 개인의 생활 속에서, 날마다 자아를 굴복시키고, 진실한 목적과 순결한 사상을 가지며 어떠한 불쾌한 일에서도 온유함을 유지하고 지극히 작은 일에서는 믿음과 경건함과 신실함을 나타내고 가정생활에서도 그리스도의 품성을 나타내는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 앞에서 세계적으로 유명한 선교사나 순교자보다 오히려 더욱 귀한 자가 될 수 있다”(실물교훈, 403).

 

기도

주님, 제가 성경의 위인들처럼 신앙을 불태우지는 못해도 다만 성실하게 하나님을 섬기면서 제게 허락하신 작은 삶의 울타리 안에서 열심히 일하고 기도하며 살 수 있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셋째날(화) 2월 17일 하나님을 기다림

 

“속이고 취한 음식물은 사람에게 맛이 좋은 듯하나 후에는 그의 입에 모래가 가득하게 되리라”(잠 20:17).

 

교사강해 1)

성경에 기록된 말씀 전체는 정직한 사람과 거짓된 사람에 대한 상벌의 나열들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의 인간들이 얼마나 거짓되고 부패 타락하였는지 거짓과 속임수를 한낱 삶의 방편이나 음식물의 양념 정도로 취급해 사용할 뿐, 거짓의 정체성과 그에 대한 반사 효과가 무엇이며 또 어떤 결과에 떨어진다는 것에 대해서는 어두움에 있습니다. 사람이 온 천지만물을 지배 장악할 수 있는 기교와 지식을 지녔다 할지라도 거짓에 대한 정체성을 모르고 함부로 사용하게 되면, 그 모든 지혜와 지식은 모두 자기와 자기에게 속한 모든 것을 멸망시키게 됩니다. 하나님께는 말씀만 존재하였을 뿐, 거짓과 속임수란 아예 생각할 수도 없었고 알지도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하나님에 대해 거짓된 속임수로 악하게 대하는 사단을 발견하게 되었고 이때부터 그의 행위를 거짓이라 일컬었습니다. 이것이 악의 실체로써 선하신 하나님을 악하게 대한다는 뜻의 열매, 곧 선악과의 근본(실체)입니다. 이때부터 하나님께로부터 발생되는 마음과 말과 행동은 정직이라 진실이라 새롭게 표현하게 되었고, 하나님과 똑 같은 형태의 말과 행동이라도 사단으로부터 발생되는 심보와 말과 행동은 거짓이라 허위라 분류(표현)되었습니다. 많은 현대인들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 필요하면 거짓과 사기도 사용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현대인들에게 거짓과 속임은 때로 사업적 능력이나 수완으로 간주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17절은 거짓을 통해 얻은 것은 허무하며, 오히려 자신에게 화를 부른다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잠 20:17, 21:5을 읽어 보라. 이 말씀의 실질적인 교훈은 무엇인가?

쌀을 훔치는 도둑은 쌀을 사기 위해 일해야 하는 사람보다 빨리 쌀을 얻는다. 하자가 있는 상품을 팔기 위해 거짓말을 하는 판매원은 정직한 상인보다 빨리 부자가 될 수 있다(잠 21:5을 6절과 비교하라). 그러나 잠언에 따르면 훗날 단 맛에 취한 입은 모래로 채워지고, 급히 획득한 부는 가난으로 바뀐다. 잠언은 아래의 현상들을 설명하기 위해 다양한 예를 제시한다.

1. 유산(잠 20:21). 너무 이른 상속(아직 부모가 살아있음을 암시)에 대한 언급 이전에 부모를 저주하는 자에 대한 책망이 먼저 나온다(20절). 두 구절의 관계는 상당히 중요하다. 그 자녀는 부모를 저주하고 죽기를 바라는 듯하다. 어쩌면 유산을 받기 위해 부모를 죽이려고 음모를 꾸밀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러한 행동의 결과는 비극적이다. 그가 지금 누리는 등불은 꺼질 것이고(20절), 부모에 대한 그의 저주가 자신에게 돌아올 것이다. 왜냐하면 축복을 받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21절).

2. 복수(잠 20:22). 여기서 잠언은 자신에게 해를 끼친 악인에게 복수할 기회를 노리는 피해자에 대해 언급하면서 “여호와를 기다리라”고 충고한다. 그래야 구원을 얻을 수 있다. 이는 직접 원수를 갚는 것이 대단히 심각한 죄임을 암시한다. 잠 25:21~22은 머리에 숯불을 올려놓는다는 은유적인 표현을 사용하여 동일한 교훈을 강조한다. 이런 행동은 이집트인들이 회개와 회심을 표현하는 의식이었다.

그대가 직접 원수 갚는 일을 금하면 잠 20:22의 약속에 따라 하나님이 그대를 구원하시고, 그 과정에서 그대는 원수를 구원할 것이며(잠 25:21~22) 결국 선으로 악을 이기게 된다(롬 12:21).

 

교훈 : 빠른 성공과 성급한 복수를 구하기보다는 느리지만 정직한 삶이 낫고 원수 갚는 일을 하나님께 맡김으로 선으로 악을 이기는 편이 낫다.

 

부가적용)

금이 원래는 금이라 단순히 일컬어 졌으나 사기꾼 사단이 금의 소중한 가치를 인식해 모양만 비슷하게 금처럼 만들고 성분은 전혀 금의 가치를 지니지 못하게 만든 것이 바로 가짜 금입니다. 하나님은 사단을 순수하게 창조하였지만 사단은 지혜롭게 되자 하나님의 순수한 것이 너무 단조롭고 못마땅하여 하나님이 알지도 못하고 갖고 있지도 않는 획기적인 새로운 것을 자체적으로 개발해 낸 것이 있으니 그것이 바로 남을 속이는 거짓된 방법입니다. 이 거짓된 방법이야 말로 하나님의 순전한 성품보다 훨씬 능률적이고 기교적인 것으로 보여 최초로 자기의 성품을 뜯어고쳐 성형수술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형상과 본질이 하나님 보시기에 심히 흉악하였음으로 말미암아 그와 같은 거짓된 생각과 도모를 악으로 규정하고, 그와 같이 날조되어 변형된 것은 모두 순수한 생명 세계에서 폐기처분 되어야 할 악임이 이 세상에서 확실히 보여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매일 같이 빠른 성공을 위해 정직의 도와 다른 방법을 취한 사람들의 멸망을 보게 됩니다. 정직한 삶은 조금 느릴지라도 하나님의 축복을 가져다주는 바른 길이 될 것입니다.

 

나의 삶 속으로

| 묵상 |

왜 우리는 재빨리 대응하지 않고 하나님을 기다려야 합니까?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에게 세상이란 경쟁에서 이겨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밀림과 같습니다.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생존을 위해서 법과 원칙은 물론이고 인간관계뿐 아니라 가족도 내버립니다. 그래서 오늘 잠언에서 경고하는 일들은 어쩌면 비정한 세계의 법칙이 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 보장받는 생존과 성공이 영원을 사모하는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설령 생존 법칙에 희생되는 한이 있더라도 하늘의 법칙을 지키며 하나님의 뜻을 기다리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지키는 자들의 모습일 것입니다.

 

| 적용 |

현재 빠른 대처가 필요하지만 하나님을 기다려야 하는 문제는 무엇입니까?

 

영감의 교훈

복수의 정신을 품지 말라 - “증오와 복수의 정신은 원래 사탄에게서 나왔으며, 그는 이것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을 죽이게 되었다. 적의(敵意)나 몰인정한 마음을 품는 자는 누구나 동일한 정신을 품게 되며 그 결과로 죽음에 이르게 될 것이다. 씨앗 속에 식물(植物)이 들어 있는 것같이, 복수의 생각 속에 악한 행동이 들어 있다.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요한일서 3장 15절)”(산상보훈, 56).

 

기도

아버지, 지금 이 세상이 창조의 섭리와 아버지의 뜻을 거역하는 방향으로 돌아간다 할지라도 저는 아버지께서 살아계심을 믿고 바라봅니다. 제게 약속을 주셨으니 이 땅에서 선으로 악을 이기며 믿음과 소망으로 살 수 있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넷째날(수) 2월 18일 가난한 자들에 대한 동정

 

“가난한 자와 부한 자가 함께 살거니와 그 모두를 지으신 이는 여호와시니라”(잠 22:2).

 

교사강해 4)

위의 말씀을 전한 지혜자는 가난한 자와 부자를 만드신 분이 여호와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22:2)을 원문대로 직역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부자와 가난한 자는 함께 만난다. 여호와는 그들 모두를 지으신 분이시다." 2절은 혼합적 병행구로 되어 있습니다. 혼합적 병행구는 그 핵심이 앞보다 뒤에 있습니다. 여기에서 '함께 만난다'는 말은 '함께 모여 산다'는 말로서 '인간의 평등성'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세상에는 부자와 가난한 자가 함께 모여서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다 하나님의 형상을 쫓아 지음 받은 고귀한 존재들입니다. 그러므로 부자는 가난한 자를 멸시하지 말고 형제처럼 여기고 살아가야 합니다. 부자들은 가난한 자들을 무시하고 함부로 대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 이러한 일은 가난한 자들을 만드신 하나님의 진노를 부릅니다. 하나님께서는 가난한 자들이 억압받을 때에 그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들을 학대자의 손에서 구원해 주십니다. 반면에 가난한 사람들은 부자를 시기하거나 욕하고 대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일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이 아닙니다. 가난한 사람들 역시 부자들을 인정하고 따르며 함께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은 만인의 아버지이시며, 모든 사람은 하나님 형상를 가진 형제자매입니다. (행 17:26)에서 누가는 "하나님께서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거하게 하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성과 인종과 계급과 신분에 있어서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차이가 인간을 차별하는 이유가 될 수는 없습니다. 이는 인간은 모두 다 하나님의 지으심을 받은 형제자매들이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의 인격은 지혜나 신앙적 헌신보다는 가난하고 곤궁에 처한 자들을 도우려는 자발성에 의해 평가된다. 우리의 소유는 인격을 평가하는 기준이 아니다. 인격은 ‘나는 이웃에게 어떤 사람인가’로 평가된다. 이웃을 도와준 사마리아 사람이 영적인 제사장보다 하나님의 나라에 더 가깝다(눅 10:26~37). 잠언은 이러한 우선순위를 강조하여 설명한다.

하나님을 위하여 : 이것을 우선순위로 삼아야 하는 첫 번째 이유는 하나님 자신에게 있다. 그분은 종교적 열성보다 가난한 자들에게 베푸는 동정을 더 선호하신다(잠 19:17, 21:13). 가난한 자들에게 대한 우리의 세심함과 그들을 위한 구체적인 행위는 어떤 경건의 행위보다도 하나님께 더 소중할 것이다. 사실 그런 일에 하나님 자신이 상당히 개입되어 계시기 때문에 우리가 가난한 자들에게 동정을 베풀 때에 그것은 마치 하나님께 드리는 것과 같다(마 25:35~40).

마 25:35~40을 읽어 보라. 예수님은 이 이야기 속에서 자신과 곤궁에 처한 자들을 어떻게 동일시하는가? 이런 사실은 우리가 그런 사람들을 대하는 방식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가?

가난한 자들을 위해 : 두 번째 이유는 가난한 자들에게 있다. 그들도 부자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창조물이다(잠 22:2). 하나님이 그들 모두를 창조하셨다는 사실에 기초한 인류의 평등은 부자와 마찬가지로 가난한 자들을 주목하게 한다. 우리는 우리의 이웃도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기 때문에 사랑해야 한다.

그렇다면 그대가 곤궁한 자들을 돕기 위해 얼마나 선을 행하는지 생각해 보라. 우리의 본성은 이기적이다. 우리는 자신을 다른 사람보다 더 돌아보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우리는 자신을 내어줌으로 자아에 대해 죽고 그리스도의 성품을 더 잘 반영하는 법을 배운다. 그것보다 우리에게 더 가치 있는 것이 무엇이겠는가?

 

교훈 : 인간은 부하든지 가난하든지 모두 평등하며 특히 예수님은 곤궁한 자들과 자신을 동일시하셨기에 우리는 그들에게 특별한 관심을 가져야 한다.

 

부가적용)

과거에 어떤 잘못된 사상가는 인류 중에는 열등한 민족과 고등한 민족이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노예들을 형제로 대하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존재이며 한 형제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특히 예수를 믿고 성령 안에서 중생한 사람들은 한 가족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성과 인종과 계급을 넘어서서 서로 존중하고 사랑해야 합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모든 계명의 핵심입니다.

우리의 삶에 있어 부요함이 반드시 좋은 것만은 아닙니다. 재물이 삶에 이익이 되느냐 아니냐는 그것을 어떻게 사용하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비단 재물뿐 아니라 다른 기회와 특권에 대해서도 똑같이 말할 수 있습니다. 지식과 힘, 아름다움과 능력 모두 잘못 사용할 수 있습니다. 이런 것들을 하찮게 여기거나 잘못 사용한다면 애초에 갖지 않느니만 못합니다. 재물은 제대로 사용할 줄 모르는 사람의 손에 들어가면 독이 될 뿐입니다. 돈은 우리에게 맣은 것을 누리게 해줍니다. 여기, 친구를 도울 수 있는 능력, 예술작품, 여행의 즐거움, 이 모든 것을 돈으로 얻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자칫하면 돈의 힘에 집착하기 쉽습니다. 돈을 소유하는 것과 돈을 소유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분면 그 나름의 가치가 있습니다. 하지만 엄청난 희생을 치러야 할 만큼의 가치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너무 비싼 값을 치르고 금을 샀다는 속담도 있습니다. 여가를 누릴 수 있게 해주기 때문에 부가 소중한 거라면 여가를 희생해가면서까지 돈을 버는 것은 잘못된 일입니다. 돈은 인간의 영혼을 가난하게 만드는 경향이 있습니다.

 

나의 삶 속으로

 

| 묵상 |

그대는 자신을 위한 삶보다 다른 이를 돕는 삶에서 얼마나 더 큰 만족감을 느낍니까?

석유왕 록펠러는 53세에 세계 최고의 부자가 된 악덕 기업인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55세에 불치병을 앓으면서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합니다. 그가 마지막 검진을 받기 위해 병원을 찾았을 때입니다. 병원 로비에 ‘주는 자가 받는 자보다 복이 있다.’는 문구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마침 돈이 없어 어린 딸을 입원시킬 수 없는 한 어머니의 모습을 보고 그는 몰래 소녀의 치료비를 대납해 주었습니다. 얼마 후 자신이 도와준 어린 소녀가 회복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는 일평생 경험해 보지 못했던 행복감을 느낍니다. 그 일을 계기로 그는 98세까지 자선 사업에 힘쓰며 살았다고 합니다.

 

| 적용 |

그대는 주변에 있는 그대보다 가난한 사람에게 어떤 도움을 줄 수 있을까요?

 

영감의 교훈

예수님을 소홀히 하는 것 - “여기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과 고난 받은 당신의 제자들을 참으로 동일하게 표현하고 계시지 않는가? 그분은 그들의 환경을 당신 자신의 것으로 생각하신다. 예수님은 감옥에서 고생하는 사람과 당신 자신을 동일시하신다. 이기적인 그리스도인들이여, 가난한 자들과 고아와 아버지를 잃은 아이들을 소홀히 하는 것이 바로 그들 속에 계신 예수님을 소홀히 하는 것임을 생각하라”(구호봉사, 40).

 

기도

아버지, 저로 하여금 이 세상에서 오직 자신의 성공과 행복을 위해 노력하는 이기적인 삶보다는 아버지를 섬기며 이웃과 적은 음식이라도 나누어 먹고 정을 주고받으며 살아가는 소박한 삶의 주인공이 되게 해 주시옵소서.

 

다섯째날(목) 2월 19일 교육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잠 22:6).

 

교사강해 5)

옛 어른들이 말씀하시기를 “자식농사가 가장 중요하고, 또한 짓기가 가장 어렵다”고 했습니다. 그 말씀 그대로 자식을 키우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고 고 이병철 회장의 말에 따르면 이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것이 골프와 자식농사라 했습니다. 골프를 칠 때 내 마음으로 보내려 하는 대로 잘 되지 않는 것이 골프입니다. 자식농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느 부모가 자식이 잘못되기를 원하겠습니까? 자식도 내 자신이 원하는 바람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현실입니다. 부모들은 왜 자식농사에 실패합니까? 거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기본적인 것을 가르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기본이 중요합니다. 기 기본은 성경을 가르치는 것, 부모가 본을 보이는 것, 훈계하는 것입니다. 자녀양육에 있어서 명심해야 할 점이 무엇입니까? 사람은 배움으로 성장합니다. 배우지 않으면 사람으로서 구실을 할 수 없고, 사람으로서의 삶을 살 수가 없습니다. 배운다는 것은 공부를 많이 하여 높은 학벌만을 가지는 것이 아닙니다. 학벌은 낮아도 사람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기본적인 예법, 지식, 기술을 배우는 것입니다. 또한 부모에게는 어떻게 하고, 자식에게는 어떻게 하며 다른 사람들에게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 예절을 배우고, 밥은 어떻게 하고 요리는 어떻게 하는지, 먹고 살기 위해서는 무엇을 하며, 그것을 하기 위해서 어떤 기술을 가져야 하는 지에 대한 기술과 방법을 배우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우리 기독교인들은 무엇을 배우고 익혀야 합니까? 기독교인으로서의 삶에서 배워야 할 방식은 무엇입니까? 이 모든 것은 바로 성경과 하나님을 떠나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성공하고 출세하게 했다 해도, 예수님을 믿지 않고, 하나님을 떠난 자녀가 있다면 그 부모는 자녀교육에 실패한 것입니다.

 

‘교육’을 뜻하는 히브리어는 ‘짓다’ 또는 ‘시작하다’라는 뜻의 단어에서 유래했다. 이 모든 의미가 교육에 대한 히브리인의 개념에 함축되어 있다. 아이를 가르침으로 우리는 미래를 위해 기초를 세우고, 일으키며, 다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부모와 교사들은 아이들의 미래에 대해, 더 나아가 세계의 미래에 대한 책임이 있다. 어린이들에 대한 현재의 대책은 다가올 세대와 그 사회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잠 22:6을 읽어 보라. 이 말씀은 자녀들을 바르게 양육하는 일에 대해 무엇이라 말하는가?

의미심장하게도 ‘교육’을 의미하는 히브리어는 성전 ‘봉헌’의 의미로도 사용된다(왕상 8:63). 초기 교육은 성전을 봉헌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께 우리의 자녀를 바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한 교육은 현재의 삶을 넘어 구원에도 영향을 미친다. “부모들에게는 미래와 영원한 생명을 위하여 자녀들을 교육하고 훈련시키는 큰 사업이 맡겨져 있다”(새 자녀 지도법, 38). 교육은 영원한 결과를 낳는다.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어려서부터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는 성경 지식에 대해 칭찬했을 때(딤후 3:15), 그는 잠언 22:6을 암시하는 것으로 보인다.

잠 22:8, 15을 읽어 보라. 여기서 우리는 어떤 원칙을 발견하는가?

교육은 씨 뿌리는 행위로 비유된다. 이 사회와 자녀들의 미래는 우리가 뿌리는 씨에 좌우된다. 우리가 죄악의 씨를 뿌리면 교육은 실패로 돌아가고 우리는 불행을 거둘 것이다(8절). 그러나 우리의 씨가 자녀의 마음을 감동시키면(15절) 교육의 “채찍”이 그들에게서 미련한 것들을 멀리 분리시켜 놓을 것이다.

 

교훈 : 자녀 교육은 하나님께 성전을 봉헌하는 것처럼 소중한 사업이다. 이 사회의 미래와 우리 자녀들의 영생이 어린 시절의 교육에 크게 좌우된다.

 

부가적용)

하나님이 부모로서 우리에게 맡겨주신 사명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주신 자녀를 실족하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나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를 만들고 하나님의 자녀로 살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믿는 부모로서 해야 할 최대의 임무이며 사명입니다. 링컨의 어머니는 어릴 때부터 성경을 읽어주고 성경을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성경을 잃게 했습니다. 그녀는 링컨이 아홉 살 때 죽으면서 성경을 유산으로 물려주면서 꼭 성경을 읽으라고 유언했습니다. 링컨은 죽을 때까지 성경을 말씀을 따라 살았고, 일곱 번의 실패에도 낙심하지 아니하였고, 여러 번의 국회의원 낙선에도 좌절하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마침내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링컨은 어릴 때부터 어머니로부터 성경을 배웠습니다. 아이들 교육에서 가장 주요한 요소는 본보기입니다. 아이들은 보는 대로 행합니다. 어리면 어릴수록 부모의 본을 더욱 많이 보게 되어 그 본대로 따라하게 됩니다. 부모가 만날 싸우는 모습을 보여주면 아이는 자신도 모르게 폭력적이 되고 나중에는 폭력배로 성강하게 됩니다. 엄마가 매일 놀러 다니고 집에 오면 TV앞에만 앉아 있으면 아이들에게 ‘공부하라’고 백말 말해봤자, 아이들은 엄마를 본받아 공부를 하지 않게 됩니다. 아이에게 공부하게 하려면 엄마나 본을 보여야 합니다. 책상 앞에 앉아 책 읽는 모습을 보여주면 아이들은 공부하라고 하지 않아도 저절로 공부하게 됩니다.

 

나의 삶 속으로

 

| 묵상 |

그대는 자녀에게 어떤 삶의 모본을 남겨줄 수 있습니까?

가정교육은 일반적으로 부모의 생활과 사고방식을 모방하는 과정입니다. 물론 훈계와 교훈이 있고 규율과 표준이 제시되기도 하지만 부모의 삶이 그것들과 일치하지 않는 이상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결국 자녀의 성장 기간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은 바로 부모의 실생활입니다. ‘아이 앞에서 찬물도 못 마신다.’는 속담처럼 우리는 자녀 앞에서 함부로 행동하지 말아야 하며 그들이 스스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선택할 수 있도록 기도하며 도와주어야 합니다.

 

| 적용 |

그대가 자녀를 신앙적으로 바르게 교육하기 위해 개선해야 할 점은 무엇입니까?

 

영감의 교훈

등한시 되어온 어린이 교육 - “부모들은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그들의 자녀를 양육하여야 하며 하나님의 뜻을 즐겨 행하도록 그들을 교육하여야 한다.… 하나님의 율례와 법도들이 영혼의 돌비에 가장 쉽게 아로새겨지는 때는 어린 시절이다. 어린이들의 교육이 너무나도 등한시되어 왔으며 마땅히 가르쳤어야 할 그리스도의 의에 대한 교훈을 저들에게 가르치지 못하였다”(가려 뽑은 기별 1권, 318).

 

기도

아버지, 제가 참 부족한 아비요 부족한 어미임을 고백합니다. 제게 주신 자녀들을 주의 뜻대로 양육할 수 있도록 지혜와 지식을 주시옵소서. 주님 재림하셔서 귀중한 보배를 찾으실 때 하나도 잃지 않고 다 드릴 수 있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여섯째날(금) 2월 20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부모들은 진실성의 표본이 되어야 한다. 이 공과는 날마다 어린이의 마음에 명심시켜야 할 공과이기 때문이다. 일상생활의 모든 일에서, 특히 그들의 자녀들의 교육과 훈련에서 어긋남이 없는 원칙이 부모들을 다스려야 한다.… 부모들이여, 결코 거짓말을 하지 말라. 교훈과 모본으로 결코 허위를 말하지 말라”(새 자녀 지도법, 151).

 

“많은 아버지와 어머니가 어린 자녀들을 먹이고 입히고 세상의 표준에 따라 교육을 시키면 그들의 의무를 다한 줄로 생각하는 듯하다. 사업과 향락에 너무나 열중한 나머지 부모들은 자녀들의 교육을 생애의 연구 과제로 삼지 않는다. 그들은 자녀들이 그들의 재간을 구속주의 영광을 위하여 사용하도록 훈련시키려고 노력하지 않는다. 솔로몬은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말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 고 말하지 아니하고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훈련시키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잠 22:6)고 말하였다”(새 자녀 지도법, 38).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➊ 잠 22:6의 의미를 더 깊이 생각해 보십시오. 왜 우리는 이 말씀을 신중하게 적용해야 합니까? 사실 많은 부모가 자녀를 양육하는 데 충실합니다. 하지만 성인이 된 그들의 자녀들은 옳지 않은 선택을 합니다. 우리가 이 말씀의 의미를 살펴볼 때, 자유 의지의 본질과 대쟁투의 본질을 잊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➋ 그대는 어떤 방식으로 자신을 위한 일보다 곤궁한 사람을 돕는 일에서 더 큰 만족감을 얻습니까? 특히 대가를 바라지 않고 남을 도울 때 얼마나 큰 만족감을 얻습니까? 이런 사실에서 미뤄볼 때 세상의 부를 소유한 많은 사람이 불행한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➌ 우리는 저마다 재능과 교육 정도, 경험 등이 각각 다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가장 중요한 것에서 평등합니다. 즉 우리 모두는 구원 받기 위해 십자가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로부터 전 인류의 가치와 평등성에 대해 무엇을 깨닫습니까? 더욱이 이런 진리는 모든 사람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에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될까요?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대총회 북아태지회 한국연합회 성경통신학교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 한국연합회 선교부 | 고유번호증번호: 204-82-62040 | 대표자: 강순기 | 부서장: 신광철
Copyright © 2014 안식일학교·선교부 All rights reserved.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