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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0과 선지자의 '미친 행동'(알기 쉬운 교과 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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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폴쵸 작성일09-11-27 22:43 조회4,25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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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0과 선지자의 '미친 행동'
12월 5일 안식일 (일몰: 오후 5시 14분)

도입)
러시아의 문호 톨스토이의 저서에서“사람에게는 얼마만큼의 땅이 필요한가?”라는 책이 있다. 평생 남의 땅을 빌러 농사를 짓고 사는 소작농으로 만족하며 행복하게 살아온 순박한 “바흠”이라는 농부가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그는 열심히 일을 한다. 덕분에 조금씩 자기 땅을 갖게 된다. 더 열심히 일을 한다. 어느 날 낮선 사람이 찾아왔다. 아주 적은 돈으로 끝없이 넓고 기름진 초원을 살 수 있다고 유혹한다. 그 말에 귀가 솔깃하여 전 재산을 처분한다. 그리고 땅주인 촌장을 찾아가고 촌장은 자기 땅이 있는 넓은 초원으로 안내한다. 정말 드넓은 평원이 짝 널려있다 촌장은 모자를 벗어 여기다 돈을 넣으라고 하고 돈을 넣자 촌장은 말한다. “여기서 출발해서 해지기 전까지 돌아오면 당신이 밟은 모든 땅이 당신의 소유가 됩니다.” 주인공 농부는 이튿날 새벽 더 많은 땅을 소유하기 위하여 동이 트자마자 출발한다. 하루 종일을 걸었다. 꺾는 지점마다 삽으로 땅을 파고 잔디를 심어 표시한다. 대형 사각형을 그리며 이제 출발지점을 향해 돌아오는데 온 몸은 땀으로 뒤범벅이 되었고, 신발이 무거워서 장화도 벗어던지고 땀에 젖은 겉옷이 무게가 느껴지자 그것도 벗어 던져버렸다. 어슴프레 하게나마 출발지점에 놓았던 촌장의 털모자가 그의 눈에 들어왔다. 맨발에, 속옷차림에, 피투성이가 된 채 기진맥진하여 돌아왔을 때 “바흠”의 코에서는 검은 먹피가 흐르고 있었다. 결국 촌장 앞에서 쓰러지고 말았다. 정말 사람에게는 얼마만큼의 땅이 필요할까? 가진 것이 많으면 많을수록 더 행복할 수 있을까? 이 질문에 톨스토이는 NO라고 대답 한다. 작가는 인간의 끝없는 욕망이 얼마나 헛되고, 덧없는지를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농부는 더 행복해지려면 더 많은 땅을 소유해야 한다는 ‘욕심’을 갖게 된다. 욕심은 그를 더욱 열심히 일하게 했고 더욱 열심히 돈을 모으게 했고, 점점 더 많은 땅을 소유하게 한다. 그러나 점점 더 많은 땅을 소유하려는 욕심이 주인공의 인생을 파멸로 끝나고 말았다. 성경은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고 경고한다. 오늘 성경에 등장하는 발람이라는 선지자를 통해서 욕심이 결국 자신을 파멸로 끝맺는 말씀을 본다. 발람은 메소포타미아에서 유명한 선지자로 활동한 사람이다. 그의 이야기는 민22-24장까지 계속되고 있다. 성경에 내용을 보면 발람이라는 선지자에게는 좋은 면도 있고, 나쁜 면도 있었다. 물론 사람에게는 다 좋은 면과 나쁜 면이 있다. 그러나 결과가 어떻게 끝났느냐가 중요하다. 발람은 결국 그의 나쁜 점 때문에 그의 인생은 불행하게도 파멸로 끝났다는 것이다. 마치 러시아의 순박한 농사꾼이었던 바흠의 말년의 인생처럼 말이다. 우리는 발락의 유혹에 넘어간 발람 같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현재에도 우리는 돈, 명예 등의 유혹을 받게 되는데 하나님의 말씀에 겉으로는 순종하는 것처럼 하면서 속으로는 거부하는 이중적인 삶, 즉 돈과 하나님을 동시에 잡으려는 어리석은 삶을 살아서는 안 될 것이다.

기억절: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딤전 6:10)

연구범위: 민 22~24장, 신 1:30, 20:4, 마 15:14, 고전 2:14, 벧후 2:14~16, 계 3:17.

안식일 오후
발람의 이야기는 잘 알려져 있을 뿐 아니라 농담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글쎄, 하나님이 발람의 나귀를 통해서도 말씀하실 수 있는데 누군들 못하시겠어?"
하지만 이 이야기를 우스운 이야기로만 생각해서는 안 된다. 여러 면에서 생각할 수 있겠지만, 발람이 여호와 하나님과 교통한 이야기는 죄가 하나님의 능력을 통해 정복되지 않으면 우리를 파멸에 빠뜨릴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예증이 된다.
발람은 신약에 세 번 언급되는데(벧후 2:15~16, 유 1:11, 계 2:14), 어느 경우도 긍정적으로 언급된 곳은 없고, 오히려 그는 죄의 표본으로 묘사되어 있다.
베드로는 발람의 행동을 “미친” 짓으로 말했는데, 이는 그가 정신적으로 미친 것이 아니라, 모압 왕 발락의 잘못된 요구까지도 기꺼이 들어주고자 할 만큼 돈에 대한 탐욕에 빠져 있었던 것이다.
발람과 같은 하나님의 선지자도 그렇게 '어리석은 행동'을 저지를 수 있었다면 하물며 우리야 어떠하겠는가? 우리는 발람의 슬픈 이야기에서 교훈을 얻고 그의 전철을 밟지 말아야겠다.

일요일(11월 29일)
두려움에 빠진 어리석은 왕(민 22:1~6)

도입)
구약성경 중에 가장 어처구니없는 얘기가 바로 발람과 발락의 얘기이다. 특히 발람의 경우는 더욱 그러하여 나중에 신약저자들이 그를 교훈으로 삼을 정도로 매우 커다란 사건이었다. 이스라엘은 아모리를 쳐서 그 땅을 점령하고 바산 땅까지 점령하였다. 그것을 본 모압왕 발락에게 두려움이 생길 것은 당연하였다. 그 두려움에 대한 발락의 행동은 발람에게 이스라엘을 저주해달라고 부탁하였다. 정면승부로는 이스라엘을 이길 수 없으므로 종교적으로 저주하며 약화시키기 위한 전략전술이다. 발람은 선지자였으나 그의 타락한 성정으로 보아 그는 마치 무당과 점술가 같은 행위로 이스라엘을 종교적으로 저주하려고 한다. 그러나 하나님이 발람에게 강권하셔서, 이스라엘 민족을 저주하는 것이 아니라, 축복하도록 하게 되자, 발람을 돌려보내고 만다. 하나님은 하나님이 축복하신 자는 어떤 일이 있어도 축복하신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하나님은 인간과는 달리 식언하거나 후회하지 않으신다는 분명한 역사적 교훈이다. 발람은 ‘백성을 파멸시키는 자’라는 뜻으로 유프라데스강가의 메소포타미아 브돌지방 브올의 아들이요, 술사의 행위를 한 타락한 선지자이다. 이방인으로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경외감은 있으나, 발락이 제공한 물질에 눈이 어두워 이스라엘을 죄에 빠지게 한 이중인격의 선지자이다. 세 번에 걸쳐 발락이 부탁한 저주를 거절하였으나, 성서기자들은 발람을 표리부동한 선지자로 낙인찍고 있다.(계2:14,벧후2:15-16, 유1:11) 왜냐하면, 정면으로 이스라엘을 저주하지는 않았지만, 후면으로 이스라엘 민족을 모압여인을 통해 우상숭배와 음란의 죄에 빠지게 했기 때문이다. 결국 이 죄로 인해, 엘리아살의 아들 비느하스의 칼에 죽게 된다.(민31:8)

잠시나마 모압 왕 발락의 입장에 서 보자. 강대국 애굽으로부터 탈출해 나온 거대한 무리가 광야에서 40년간을 기적적으로 생존하였다. 이제 그들이 자신의 왕국에서 멀지 않은 “모압 평지에”(민 22:1) 진을 치고 있다.
비록 이스라엘이 그들을 침략하거나 아무런 위협을 하지 않더라도 발락은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임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더구나 이스라엘이 바산 왕 옥을 물리치고, 전에 모압을 친 적이 있는(참조 민 21:26) 아모리 왕 시혼을 쳐부순 소식을 들었다. 이 무리가 가나안 족속을 진멸한 것은 말할 나위도 없었다(민 21:1~3). 그가 겁에 질린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1. 민수기 22:1~6을 읽으십시오. 모압 왕 발락이 이스라엘을 두려워한 것은 특히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답:

2. 발락이 이스라엘에 대해 위협을 느꼈다면 무엇에 대하여 두려워했어야만 했습니까?(참조 창 48:21, 출 15:1, 신 1:30, 20:4)
답:
발락은 자신이 도저히 당해낼 수 없는 적을 만났다고 생각했을 때 그 적이 섬기는 하나님의 선지자를 통해 그들을 저주함으로 그들을 물리치려고 했는데, 이는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발락은 선지자가 무엇을 할 것인지를 알고 있었는지 모르지만 우리의 견지에서 볼 때 그의 계획은 처음부터 안 될 일이었다. 발락이 왜 자기 나라의 사제들 중에서 하나를 택하여 모압의 신들에게 이스라엘을 막아 달라고 탄원하게 하지 않고 참되신 하나님의 선지자를 불렀는지 알 수 없지만, 아마도 그가 그렇게 한 까닭을 민수기 22:6에서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저들은 “우리보다 강하니 청컨대 와서 나를 위하여 이 백성을 저주하라. 내가 혹 쳐서 이기어 이 땅에서 몰아내리라. 그대가 복을 비는 자는 복을 받고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줄을 내가 앎이니라.”(민 22:6)

교훈: 발락은 이스라엘이 모압 평지에 진을 치자 겁에 질려 하나님의 선지자를 불러들였다. 그는 아마도 그분의 능력에 대해 인식하고 있었던 것 같다.

부가적용)
발람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 왕은 국경선까지 영접하러 나왔다. 그러나 발람은 “내가 오기는 하였으나 무엇을 임의로 말할 수 있으리이까 하나님이 내 입에 주시는 말씀 그것을 말할 뿐이니이다.”(민 22:38). 다음 날 아침 왕은 나라의 중신들과 함께 장엄하게 위엄을 갖추어 발람을 호송하고 산 위에 있는 바알의 산당에 올라갔다. 거기서 발람은 이스라엘 진영 이 끝에서 저 끝까지 내려다 볼 수 있었다. 그 때 그는 “그들의 번영을 보고 크게 놀랐다. 발람은 이제까지 이스라엘은 미개하고 아무 조직도 없는 민족으로 무리를 지어 배회하면서 나라들을 해치므로 부근의 국민들에게 염오와 공포의 대상인 줄 알았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모습이 이 모든 것과는 정반대이었다. 발람은 이스라엘 진영이 그 규모가 크고 완전히 정렬되었고 모든 것이 완전한 규율과 질서를 가진 것을 보았다. 발람은 자신이 바위 위에서 이스라엘을 바라보면서 이스라엘은 다른 민족과는 구별된 민족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스라엘은 열 방 중에서 구별된 제사장 민족이었기 때문에 이들이 다른 민족들과 구별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 민족을 땅의 티끌 같이 많게 해 주시겠다고 약속해 주셨다. 발람은 그 숫자가 너무 많아서 그 수의 1/4도 셀 수 없다고 노래했다. 발람은 이스라엘을 저주 하기는 커녕 자신도 이스라엘이 받은 축복을 받고, 그들과 함께 죽기를 원한다고 노래하였다. 발람은 심히 노한 발락 왕을 향해서 자신은 여호와께서 명하신 말을 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였다. 그는 이스라엘을 축복하는 것은 자신의 의지로 하는 것이 아니며, 하나님에 의한 것이라고 대답하였다. 이것은 자신의 책임을 하나님께 돌리려는 태도였다. 그가 정말 성실한 선지자였다면 하나님께서 축복하시는 이스라엘을 향해 자신의 의지로도 축복할 수 있어야 했다. 그리고 모든 선지자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이 일이 생명을 요구한다고 해도 담대하게 외쳐야 했다. 그러나 그는 자기는 원하지 않았지만 하나님께서 하시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이 일을 행하는 것 같은 태도를 보이고 있었던 것이다.

월요일(11월 30일)
발람(민 22:7~21)

도입)
모압 왕 발락(‘약탈자’란 뜻)은 이스라엘을 칠 방법을 찾기 위해 미디안의 장로들을 불러서 조언을 구하였다. 미디안의 장로들은 고용된 마술사이거나, 여러 지역을 다니며 상업을 하는 대상들이었으므로, 그들은 여러 지역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여러 지역을 다니다 알게 된 선지자를 알고 있었는데 그 이름은 발람이었다. 미디안 장로들은 발락 왕에서 발람을 불러서 이스라엘을 저주하게 할 것을 권하였다. 발락은 이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발람을 데려오기 위하여 메소포타미아의 유프라테스 강변에 있는 브돌로 예물과 함께 사자들을 보냈다. 당시에는 마법사들이 특수한 곳에 모여 사는 관습이 있었는데, 브돌은 당시 바벨론 마법사들이 사는 곳으로 유명한 곳이기도 하다. 모압과 미디안의 장로들은 복술의 예물(‘케싸밈’: 복술이나 예언의 대가로 주는 돈)을 가지고 떠나서 발람의 집에 도착하여 발락의 말을 전하였다. 발람이 그 먼 땅에서 자신을 불러오기 위해서 왕의 보냄을 받은 장로들을 맞이하여 절대로 응할 수 없는 요구에 미적거리며 단호히 거절하지 못하고 저들은 영접한 것은 그가 종종 돈이나 물질을 탐한 죗된 경험이 있거나 그의 마음이 세속으로 기울어져 있어 이미 그가 초창기 가졌던 그의 순수한 신앙의 열정에서 멀어진 선지자로서 세속적인 갈망이 가득한 사람이었던 것처럼 보인다. 그가 거한 거처나 그가 살아가는 방식을 볼 때 그는 순수한 선지자가 아닌 마음이 하나님께로부터 점점 멀어진 타락한 선지자였음이 분명하다.

발람은 어떤 사람이었는가? “일찍이 발람은 선량한 사람이었고 하나님의 선지자였다. 그러나 그는 배도하고 탐욕에 빠져 있으면서도 여전히 지극히 높으신 분의 종이라고 공언하였다. 그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일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사자들이 그에게 온 용건을 말했을 때에 그는 발락의 보상을 거절하고 그들을 돌려보내는 것이 자기의 의무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발람은 위험하게도 감히 유혹과 장난하려고 하였”다.(부조와 선지자, 439)

1. 민수기 22:7~21을 읽으십시오. 표면적으로는 발람이 여호와를 위해 굳게 서는 것처럼 보였지만, 자세히 읽어보면 그가 유혹과 타협하려고 했다는 사실을 어디서 발견할 수 있습니까?
답:
발람은 여호와께 조언을 구하기까지 확답을 줄 수 없다고 말하면서 모압 왕의 사신들에게 그와 함께 하룻밤 유숙하도록 제안하였다. 발람은 여호와 하나님에 대해 알고 있었으므로, 자신의 저주가 이스라엘을 해하지 못하리라고 생각했음이 분명하다. 그는 참으로 여호와께 물을 필요조차도 없었다. 하지만 그는 혹 다른 대답이 있기를 기대했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그는 그들을 즉시 돌려보냈어야 했으나 머물게 함으로써 자신을 유혹에 노출 시켰던 것이다. 그 사신들이 “복술의 예물”(7절)을 가지고 왔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더 많은 것을 약속하며 두 번째로 유혹했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주목해 보라.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그 사람들이 너를 부르러 왔거든 일어나 함께 가라.”(민 22:20) 말씀하셨다. 그 모압 귀족들이 다른 말을 하지 못하도록 발람은 이른 아침에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그들과 함께 길을 떠났다. 다시 말하면, 그는 자신이 어떤 값으로도 매도될 수 없는 신실한 하나님의 종인 체 하였지만, 사실은 그에게 제안된 많은 돈을 갈망하고 있었다.

교훈: 발람은 한 때 하나님의 선지자였으나, 돈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여 타락하고 말았다. 그럼에도 그는 하나님의 신실한 종인 것처럼 행동하였다.

부가적용)
발람은 겉보기에는 경건한 종교인이나, 발락의 사신 앞에서 자신의 진실과 속마음을 내보이지 않고, 하나님께 물어보겠노라고 말하며 자신의 종교성만을 과시하였다. 그러나 그의 마음에는 화려한 물질에 대한 욕심과 자신의 신통력을 자랑하고자 하는 명예욕이 꿈틀대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경건한 종교와 저급한 욕심사이에 오가며 실리를 추구하는 실용주의적인 두마음의 소유자였던 것이다. 그의 내면은 변화하지 못하고, 재물에 대한 불타는 욕심 때문에 결국 인간의 양심과 이성을 마비시키며 쉽게 죄와 짝하게 된 것이다. 이처럼, 물질에 대한 지나친 욕심은 신앙과 멀어지게 되며, 죄와 짝하게 된다. 우리는 때때로 신분상 또는 호칭상 말씀의 교사들이나 말씀의 증거자로 혹은 선지자로 행세하며 살아가는 종교 지도자로 불리 우는 현대판 선지자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발람과 마찬가지로 오늘날에도 종교적 지도자들이 재물에 대한 욕심과 탐심으로 가득하 타락한 자들이 종종 있다. 어떻게 발락과 발람이 하나가 되었을까? 그것은 이스라엘을 저주하고자 하는 발락의 생각과 재물에 눈이 어두운 발람의 생각이 서로 맞아 떨어진 것이다. 그러나 이런 불의한 모의 이면에 이스라엘을 보호하시고 은혜로운 은총을 주시는 하나님의 초월적인 뜻이 스며있다. 왜냐하면 , 발락의 계획이 번번히 실패했으며, 발람도 하나님의 강권하심으로 그 입술이 붙잡히게 된 것이다. 하나님은 개인이나 국가의 장래를 홀로 주관하고 계신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화요일(12월 1일)
이상한 경험(민 22:22~34)

도입)
여호와의 사자가 발람의 길에서 그를 막고 있었다. 그러나 뇌물로 눈이 어두워진 발람은 그것을 보지 못했다. 이때에 발람은 자기 나귀를 탔고, 그의 두 종은 그와 함께 있었다(22). 그러나 나귀는 오히려 여호와의 사자가 발람을 죽이려고 칼을 빼어 들고 있는 것을 보고 있었다. 그래서 그 나귀는 길에서 떠나서 밭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발람은 그 나귀에게 채찍질을 하면서 그 나귀를 다시 길로 돌려놓으려고 했다. 발람이 이스라엘 백성을 저주하는데 실패하는 이 기록을 통해 어떤 나라와 종교의 힘도 택한 하나님의 백성들을 저주하지 못하는 것을 본다. 하나님께서는 주변 국가들이 이스라엘 민족들을 방해할 때에 그들을 진멸시키심으로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들의 길을 막지 못하게 하셨다. 이로써 하나님께서는 열방의 어떤 나라보다 강하시며 그들을 주관하시는 분이심을 보여주셨다. 그리고 모압왕 발락이 선지자 발람을 불러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저주하려고 한 계획을 이루지 못하게 하심으로써 오히려 그 저주를 축복으로 바꾸어 주셨다. 이 사건은 어떠한 종교적인 세력도 하나님께서 축복하신 백성들을 저주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발람은 모압 왕이 제안한 보상을 받기로 결심하고 그 사람들과 함께 모압을 향해 길을 떠났다. 발람은 신실한 것처럼 공언했을 뿐 아니라 스스로를 속이기까지 했으나, 여호와께서는 이 사람의 마음속에 일어나고 있는 생각을 아시고 그에 대해 반응하셨다.

민수기 22:22~34을 읽고 다음 질문들에 답하십시오.

1. 말 못하는 나귀가 여호와의 사자를 보았으나 하나님의 선지자로 자처하던 발람이 그를 보지 못했다는 사실에서 우리는 어떤 중요한 상징적인 교훈을 발견하게 됩니까?(참조 습 1:17, 마 15:14, 계 3:17)
답:

2. 발람이 나귀의 하는 말을 듣고 나서 맨 처음 한 말을 읽어 보십시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었습니까? 발람의 비이성적인 반응은 재물을 갈망하는 그의 마음을 어떻게 드러내 줍니까? 짐승이 말하는 것을 보았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답:

3. 이 이야기에서 하나님의 은혜는 심지어 곁길로 나가는 발람에게도 어떻게 나타나 있습니까?
답:
수세기에 걸쳐 많은 학자들은 성경에 나오는 이 특이한 이야기를 해석하였으나 주석자마다 설명이 다르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발람이 하나님과 더불어 특별한 관계를 가졌다는 것이다. 여호와께서 여전히 그에게 매우 친근하게 말씀하고 계셨던 것이다. 그러나 이 특별한 관계에도 불구하고 발람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행하기로 결심하였다.

교훈: 말 못하는 나귀가 하나님의 사자를 알아보았을 때에도 선지자 발람은 보지 못하였다. 그는 재물에 눈이 어두워져서 영적인 시력을 잃어가고 있었다.

부가작용)
처음부터 하나님의 뜻을 분명히 알았다면 발람 선지자는 재차 하나님에게 물을 필요가 없었다(민 22:19절). 두 번째 찾아온 모압 왕의 사자들을 그가 단호하게 거절해야 했다. 그러나 이미 그 마음에 욕심이 생겼다. 모압 왕 발락이 귀족들을 통해 보낸 예물에 탐이 났고 그들에게 인정을 받아 더 큰 부귀를 누리고자하는 욕심이 생겼다. 이 때문에 자기 소원에 따라 혹 여호와가 다른 명을 내리지나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여호와께 다시 나아가 물어보겠다고 그는 답했다. 하나님은 이미 탐심에 넘어간 그의 마음의 동기와 중심을 읽었다. 가룟유다가 항상 돈에 대한 탐심에 넘어가 있었고 때가 되며 하나님의 허락하여 그가 예수님을 팔도록 한 것과 같다. 그를 더 이상 강제로 막을 수 없었다. 그렇다면 그에게 위협을 주고 경고해 경고망동하지 않도록 조치해야 했다. 잘못된 소원이라고 인간이 계속 고집한다면 하나님은 강제로 꺾는 일이 없다. 잘못된 소원대로 가도록 하나님은 허용한다. 이에 대해 성경은 하나님이 마음을 강퍅하게 했다(출 11:10, 수 11:20) 또는 완악하게 했다(롬 11:7절)라고 기록한다. 이 때 부패한 인간은 하나님의 허용을 자기에게 유리하게 해석하고 하나님이 자신의 기도를 들어주었다고 생각하며 자신의 소원을 이루고자 열심히 노력한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허용이 반드시 선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멸망의 길로 가도록 조치하기 위한 하나님의 목적을 숨기고 있음을 본다. 즉 우리의 잘못된 소원에도 불구하고 주변이나 환경을 통해 긍정적인 사인이 나타날 때 그것이 하나님의 응답이라고 100% 장담할 수 없다. 이 점에서 긍정적인 사고나 기복주의 형통신학은 잘못할 수 있다. 무엇이든지 잘되고 좋으면 하나님의 뜻이라고 이들은 해석하기 좋아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허용에 대한 성경적인 이해가 필요하다.

수요일(12월 2일)
“의인의 죽음”(민 23:5~10)

도입)
미국사람은 발효시킨 음식을 잘 안 먹으니까 요구르트를 만들어 유산균을 섭취한다. 하지만 우리 한국 사람은 유산균 요구르트를 먹지 않아도 된다. 이유는 김치에 많은 유산균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김치를 발효시키면 나오는 것이 유산균이다. 처음에는 없다가도 시간이 갈수록 유산균이 풍부해진다. 이것을 먹으면 건강해 지는 것이다. 한 가지 알아야 할 사실은 발효시킨다는 것과 썩히는 것과 차이가 있다. 시간이 지난 다음 나타나는 똑 같은 현상이지만 발효식품은 유산균이 나오고 몸에 좋은, 맛이 좋은 음식으로 변화된다. 하지만 무조건 음식을 오래둔다고 발효되는 것이 아니다. 음식을 오래두면 어떻게 되는가? 부패가 된다. 또한 벌레가 생긴다. 냄새가 난다. 심지어 못 먹게 된다. 신앙 역시 오랫동안 신앙생활 한다고 모두가 발효식품처럼 좋은 것으로 당연히 되는 것은 아니다. 발람의 생애는 세월이 지날수록 발효되어 숙성된 선지자가 아니라 돈과 명예에 허우적거리다 썩어버린 선지자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죽음만큼은 의인의 죽음처럼 죽고 싶었다. 어떤 분은 신앙이 갈면 갈수록 성장하고 아름답고 향기로운 주님의 제자가 되지만 어떤 사람은 변화가 없고 사랑이 없고 주님의 말씀이 도대체 들어오지 않는 사람이 있다. 심지어는 부패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도 만난다. 똑같이 신앙을 시작하였다고 하더라도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진노를 받고 사람에게 미움을 받는 사람도 있다. 또한 신앙을 거부하고 마음이 부패해 지는 것을 발견한다. 신앙을 가졌으면서도 사람들에게 욕을 먹고 비난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우리의 신앙이 오래되면 될수록 숙성되고 맛있게 인생이 변화된 발효된 김치 같은 삶이되시기를 바란다. 썩어 먹을 수없는 삶, 추한 냄새가 나는 발람과 같은 삶이 되지 않기를 바란다. 오직 그리스도의 향기를 내는 그리스도인이 되시기를 바란다.

나귀가 말하는 사건이 있은 후에 발람은 발락에게로 갔다. 발락이 발람을 “바알의 산당”(민 22:41)으로 인도했다는 사실은 흥미롭다. 분명히 근동지방의 이방인들은 그들의 신들과 더 가까워지기 위해 산꼭대기에 산당을 지었었다. 발람은 왕에게 그곳에 일곱 단을 쌓고 그 위에 수송아지 일곱과 수양 일곱을 준비하라고 하였다.

1. 발람이 하나님의 인도를 따라 이스라엘 자손에 대해 한 말을 읽어 보십시오. 어떤 놀라운 약속이 나타나 있습니까? 그 말씀은 우리에게 어떤 희망을 안겨 줍니까?(민 23:5~10, 참조 고전 15장)
답:
“발람은 새롭게 변화된 세상에서 불멸의 영광중에서 구속받은 자들이 기뻐하는 것을 보았다. 그는 이 광경을 바라보고 '야곱의 티끌을 뉘 능히 계산하며 이스라엘 사분지 일을 뉘 능히 계수할꼬'라고 부르짖었다. 그리고 또 각 사람의 머리 위에 영광의 면류관이 있고 각 사람의 얼굴에 희열이 빛나는 것을 보고 그 순결한 행복의 무궁한 생애를 연상할 때에 발람은 '나는 의인의 죽음같이 죽기를 원하며 나의 종말이 그와 같기를 바라도다'라고 엄숙한 기도를 드렸다.”(부조와 선지자, 447)

2. “의인의 죽음”을 죽는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우리가 그러한 죽음을 죽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무엇입니까?(롬 3:20~24)
답:
어떤 의미에서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그의 말은 각 시대의 하나님의 백성에게 주어진 복음의 약속 곧 예수님의 의로 인해 주어지는 영생의 약속을 반영한다. 우리는 아무도 의롭지 못하며, 의인의 삶을 살거나 스스로 의인의 죽음을 죽을 수 없다. 믿음으로 우리에게 전가되는 예수님의 의(義)만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다. 여기 민수기에 기록된 발람의 이야기에서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통한 구원의 약속을 나타내신 것이다.

교훈: 발람은 '의인의 죽음'을 죽기 원하였는데, 우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통해서만 의로운 삶을 살 수 있고, 의인의 죽음에 동참할 수 있다.

부가적용)
사람으로서 가장 무서운 사람은 죽음이 모든 문제의 해결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내일이 있다고 믿는 사람과 내일이 없다고 믿는 사람에게는 큰 차이가 있다. 즉 소망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의 차이는 엄청난 것이다. 이것은 어떤 이론이나 철학의 이야기가 아니다. 당장 오늘 이 한 시간의 생활 자세도 바로 여기에 기인하고 있기 때문이다. 세상에는 무서운 원수가 둘 있다. 하나는 허무주의요, 또 하나는 물질주의이다. 그리스도인의 내세관은 부활 신앙 위에 있다. 부활을 믿어도 되고 안 믿어도 된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기독교에서 부활을 빼면 기독교는 없어진다. 기독교의 골자는 부활이다. 인도의 선교사 썬다 싱이 영국을 방문했을 때의 일이다.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질문을 했는데 틀별히 대학교수가 질문을 던졌다. "당신이 오랜 동안 젖은 전통의 힌두교를 버리고 기독교를 믿게 된 이유가 무엇입니까? " 즉 힌두교와 기독교의 차이가 무엇이길래 이렇게 바꾸었느냐 하는 질문이었다. 그는 "부활하신 예수가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라고 간단하게 대답했다. 그러나 부활보다 더 앞선 십자가의 경험은 하나님의 능력이며 지혜의 결정체이다. 바울은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 알수록 더 알고 싶었다. 죄인을 의롭게 하시는 능력이 십자가 안에 나타나 있음을 안 것이다. 영생을 주시는 생명의 능력이 십자가 안에 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의인의 죽음은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의 모든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는 결단이 이루어질 때, 참되게 이루어지는 것이다. 율법이나 제사나 십일조나 성전 의식만으로는 아무도 거룩하고 의롭게 될 수 없다. 율법을 지킴으로서 하나님 앞에 의로워질 수가 결코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예정 가운데 때가 차매 그 아들이 오신 것이다. 그 아들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이미 패역하고 하나님을 멸시하며 떠나버린 이스라엘에 예수가 오셨다. 이 복음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목요일(12월 3일)
별과 홀(민 24:15~17)

도입)
우리가 사는 이 땅도 하나님의 섭리에 대항하는 발락과 발람 같은 사람이 얼마든지 있다. 또한 시대를 초월하여 이러한 세력은 끊임없이 존재해왔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반대와 핍박을 만났을 때, 이상히 여기지 말아야 한다. 예수님도 이 같은 반대에 직면하셨다. 그러나 그 핍박이 심하면 심할수록 하나님은 초월적인 방법으로 당신의 거룩한 뜻을 이루어 내심을 절대로 잊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은 여러 과정을 통해서 발람이 함부로 이스라엘을 저주하지 못하도록 하셨다. 하나님은 철저하게 발람의 입을 통제해서 그가 이스라엘을 저주하지 못하게 하시고, 반대로 이스라엘을 축복하게 만드셨다. 발락은 영적인 일을 어느 정도 아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강력한 영적인 힘이 자기를 통제하고 있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었다. 그가 발락 왕의 요구대로 산에 올라가서 이스라엘을 저주하려고 했을 때에, 하나님은 그의 입을 통해서 이스라엘을 저주하지 못하게 하시고, 반대로 이스라엘을 축복하게 만드셨다. 발람은 몇 번 같은 일을 반복하면서 이스라엘을 저주하는 일을 포기했으며, 성령이 시키는 대로 이스라엘을 축복을 할 수밖에 없었다.

발람이 이스라엘을 축복하기 시작하자 모압 왕이 얼마나 놀랐을지 상상해 보라. 왕은 비록 화가 났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이스라엘 진영의 일부만 보이는 다른 산꼭대기로 선지자를 데리고 가서 일곱 단을 쌓고 다시 수송아지와 수양을 드렸다. 발람은 “전과 같이 사술을 쓰지 아니”하였다(민 24:1). 이스라엘을 저주하려는 발락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발람은 하나님의 인도를 받아 이스라엘을 축복하였다. 발락은 다른 곳에서 세 번째로 단을 쌓고 그 위에 제물을 드렸으나 발람은 그가 이스라엘에 대해 사술을 쓰기 위해 하나님께 구하는 일이 쓸데없는 것임을 알았다. 그는 세 번째 장소에서 이스라엘 진영을 바라보며 다시 그 민족을 축복하였다(민 23:27~30, 24:1~10). 그러자 발락은 발람이 이스라엘을 저주하는 데 실패한 것을 비난하며 집으로 돌려보냈다.

1. 민수기 24:15~17에서 발람이 지은 노래에 나오는 은유를 읽으십시오. 이 예언은 무엇에 관한 것이며, 또 어떻게 성취되었습니까?(창 49:10, 마 2:1~2)
답:
“그들은 더욱 명확한 지식을 찾는 가운데 히브리 성경에 관심을 돌렸다. … 한때는 하나님의 선지자였던 발람도 이들 박사의 계급에 속한 사람이었다. 성령의 감동을 받아 그는 이스라엘의 번영과 메시야의 나타나심을 예언하였다. … 발람의 예언은 이렇게 선포하고 있었다. '한 별이 야곱에게서 나오며 한 홀이 이스라엘에게서 나'리라(민 24:17). 이 이상한 별은 약속된 분을 예고하기 위하여 보냄을 받은 것이 아닐까?”(시대의 소망, 59~60)
성경 학도들은 이 구절을 구속자 예수님의 도래를 말하는 메시야 예언으로 이해해 왔다. 홀(능력)과 별(빛)은 예수님을 상징한다. 여호와께서는 이 예언이 주어질 당시의 사람들을 위해 지역적 상징으로 나타내셨으나 그 예언의 약속은 세계적인 것이다. 예수님은 세상의 빛이시며 세상의 임금이시다. 마침내 온 세상은 그분께서 승리의 왕으로 오시는 것을 볼 것이다.(참조 사 45:23, 롬 14:11, 빌 2:10)

교훈: 발람이 노래한 별과 홀에 관한 예언은 예수 그리스도의 출현을 가리킨 것이다. 그분은 인류의 구원자로 초림하셨고, 승리자로 재림하실 것이다.

부가적용)
하나님께서는 거짓 선지자 발람을 통하여, 장차 이스라엘에 한 왕이 태어나 모압을 비롯한 이스라엘의 주변 국가들을 정복하게 될 것을 예언하게 하셨다. 발람은 그 때가 가까운 때가 아니라 먼 훗날에 이루어질 것이라고 하였다.(민 24:15-19) 이와 같이 평화와 공의로 이 세상을 다스리실 메시야에 대한 예언은 이 작은 불씨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별과 홀은 통치를 상징하는 것으로서 우리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것이다. 마태에 의하면 이 예언은 동방 박사가 본 바로 그 별을 통하여 성취되었다. 왕의 초림과 재림(민 24:17, 계 22:16, 벧후 1:19)에 대한 이 귀한 예언들은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의 주역이 예수 그리스도가 되실 것임을 예언한 것이다.

금요일(12월 4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독서 과제: 부조와 선지자, 제40장 '발람'(438–452), 산상보훈, '팔복'(17~44) '율법의 신성성'(45~58)

“자기의 지배 아래 있다는 이유로 동물을 학대하는 자는 비겁한 압제자이다. 사람이나 짐승에게 고통을 가하는 성벽은 악마적인 것이다. 말 못하는 동물은 아무리 학대를 받아도 그 고통을 표현할 수 없으므로 그들의 잔인한 행위가 아무에게도 알려지지 않으리라고 생각하는 자들이 적지 않다. 그러나 발람의 눈처럼 이런 자의 눈이 열릴 수 있다면 그들은 하나님의 천사가 증인으로서 하늘 법정에 서서 그들에 대하여 증언하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이 지으신 동물을 학대하는 자들의 기록이 다 하늘로 올라가고 있으며 또 그들에게 형벌이 선고될 날이 반드시 올 것이다.”(부조와 선지자, 443)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1. 발람의 이야기를 통해서 하나님의 섭리와 인간의 자유의지, 그리고 인간의 죄된 속성에 관해 어떤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까?

2. '의인의 죽음'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보십시오. 만일 내가 오늘 죽는다면 '의인의 죽음'에 참여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까?

3. 돈은 우리의 신앙생활을 포함한 모든 삶에 엄청난 영향을 미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떻게 하면 돈의 부패케 하는 영향력에서 보호받을 수 있을까요?

4. 이번 주 교과를 통해 새롭게 깨달은 영적 교훈이나, 한 주일을 살아가면서 꼭 실천하고 싶은 내용은 무엇입니까?

요약: 발람이 재물과 명예를 얻기 위해 이스라엘을 저주하려 했던 이야기는 그의 터무니없는 탐욕에서 나온 것이었다. 십계명의 마지막 계명은 우리에게 이러한 죄된 성향을 멀리하라고 경고한다. 우리 중 어느 누구도 이러한 죄의 위험에서 벗어날 사람은 없다. 그러한 성향을 극복하지 않으면 마침내 우리는 파멸되고 말 것이다. 우리는 발람의 실수로부터 교훈을 얻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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