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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과 율법의 시여자이신 재판장(교사를 위한 강해와 예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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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조춘호 작성일14-11-22 17:29 조회4,59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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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과 율법의 시여자이신 재판장

11월 29일 안식일
일몰:오후 5시 15분

기억절 : “입법자와 재판관은 오직 한 분이시니 능히 구원하기도 하시며 멸하기도 하시느니라 너는 누구이기에 이웃을 판단하느냐”(약 4:12).

도입)
히말라야 고산족들이 소나 양의 값을 매기는 기준이 재미있습니다. 무게를 따지거나 겉모습을 따지는 것이 아니라 그 짐승의 버릇을 보고 값을 정한다는 것입니다. 풀을 먹을 때 아래서부터 위로 오르며 먹는 짐승의 값이 위에서 아래로 내려가며 풀을 뜯어먹는 짐승의 값보다 높다고 합니다. 온통 벼랑뿐인 히말라야에서 안이한 하향 습성에 길들여지면 풀 없는 저지대에서는 곧 죽게 되기 때문입니다. 현대인들도 아래서부터 차곡차곡 하나하나 쌓아가기보다 소유가 많고 지위가 높은데서 부터 인생을 시작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혹시 힘겹고 도망치고 싶은 순간에 처해 있습니까? 포기하지 마십시오. 지금 보내고 있는 고통의 시간이 성공을 향한 삶의 자양분이 될 것을 의심치 마십시오. 인생을 살면서 고된 상향의 삶을 포기하고 안이한 하향만을 추구한다면 삶의 진가를 모르는 인생이 되지 않을까요? 그리고 매순간 하나님께서 당신의 오른손을 잡고 계신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연구 범위 : 약 4:11~17, 행 17:11, 히 4:15~16, 눅 12:13~21, 전 2:15~19, 딛 2:14.

*매일 교과를 공부할 때에 기도로 시작해서 기도로 마칩시다.

하나님의 것이든 사람의 것이든 법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는 우리가 다른 사람, 심지어 하나님을 대하는 방법에도 영향을 준다. 부자들이나 유명인들이 마치 법 위에 존재하는 것처럼 행동하는 것을 본 적이 있는가? 심지어 법을 만들고 집행하는 자들이 자기의 사적인 이익을 위하여 그런 법을 제정할 방법을 찾기도 한다. 사회의 법을 존중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도 존중하지 않게 된다. 왜냐하면 법이란 우리가 타인을 대하는 방법을 좌우하기 때문이다.
반면 법에 대한 태도가 융통성이 없고 완고한 사람은 인간관계에 어려움을 겪을 수도 있다. 더 깊은 차원에서 보면, 법에 대한 우리의 관점은 법을 주신 분의 지혜와 법의 공평성에 대한 우리의 존경의 정도에 좌우된다.
이번 주에 우리는 우선 율법에 대해 살펴보고, 그 다음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는 교만과 자기 의존의 행태를 언급하는 몇 가지 핵심 단어를 살펴보려고 한다. 왜냐하면 성경은 그러한 것들이 하나님의 법을 범하는 죄가 될 수 있다고 경고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우리는 야고보서를 통해 죄에 대한 다른 관점을 갖게 된다.

안교 활동반과 교과 토의

※ 학습 목표
➊ 깨닫기 : 험담을 피하기 위해 모든 종류의 험담에 대한 이해력을 심화시킨다.
➋ 느끼기 : 언제나 자비의 정신과 친절한 마음으로 말하기로 다짐한다.
➌ 행하기 : 모든 형태의 험담, 흠잡기, 부정적인 비판과 추측을 피한다.

Part 1.
1. 인사 안교 반장 또는 소그룹 리더 서로 인사를 나누고 손님을 환영해 줍니다.
2. 출석과 공부를 확인하고 안교헌금을 걷습니다.
3. 결석자와 구도자에 대한 보고를 듣고 방문 계획을 세웁니다.

Part 2. 나눔 안교 교사 또는 소그룹 리더(A나 B 중 하나를 선택하십시오.)

A. ❶ 검사나 판사에게는 어떤 문제가 결격 사유가 될까요?
❷ 우리가 다른 사람을 쉽게 정죄하거나 판단해서는 안 되는 이유들에 대해 말해 봅시다.
❸ 예수님이 우리의 유일한 재판관이 되신다는 것은 어떤 의미입니까?
❹ 우리가 어떤 경우에 영적인 판단력을 활용하면서도 남을 정죄하는 함정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할까요?

B. ❶ 학창 시절의 경험에 따르면 시험 기간은 보통 언제부터 시작됩니까?
❷ 재림을 항상 염두에 두는 삶과 그렇지 않은 삶은 어떤 차이점이 있을까요?
❸ 우리가 마지막 때일수록 반드시 실천해야 하는 선행이 있다면 이야기해 봅시다.
❹ 당장 한 달 뒤에 주의 재림이 있다고 가정한다면 그대는 한 달 동안 어떻게 살겠습니까?

결론 : 우리가 다른 사람을 험담하거나 정죄한다면 야고보서의 말씀대로 우리는 실제로 율법과 율법을 주신 분을 정죄하고 있는 것입니다.

Part 3. 실천 안교 반장 또는 소그룹(예비) 리더
❶ 연말 기도 주일에 대하여 안내합니다.
❷ 번식 이후 각 반이 단합할 수 있는 특별 모임을 계획합니다.
❸ 기도 제목을 가지고 함께 기도합니다.

첫째 날(일) 판단 또는 분별력?
11월 23일

“형제들아 서로 비방하지 말라 형제를 비방하는 자나 형제를 판단하는 자는 곧 율법을 비방하고 율법을 판단하는 것이라 네가 만일 율법을 판단하면 율법의 준행자가 아니요 재판관이로다”(약 4:11).

교사강해 1)
비방은 헬라어로 ‘카타랄레오’입니다. 이는 악의로 말하고, 반대해서 말하고, 무시해서 말하는 것입니다. 상대를 이기기 위해서, 넘어뜨리기 위해서 하는 말입니다. 나는 높이고 남은 깎아내리는 것, 나는 얻고 남은 잃게 하는 것이 비방의 목적입니다. 비방은 남의 것을 빼앗는 것, 등 뒤에서 무는 것입니다. 칼로만 사람을 죽이는 것이 아닙니다. 암환자들의 대부분은 남에게 ‘비방의 화살’을 맞은 적이 있다고 한 의사는 말했습니다. 몇 년 전이건 몇 달 전이건 누군가로부터 심한 비방의 화살을 맞았는데, 그 화살을 뽑아내지 못한 채 못 자고 못 먹고 괴로워 하다가, 그것이 결국 가슴에 멍을 만든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멍든 가슴이 결국 육신의 병을 초래함으로 죽음에 이른다는 것입니다. 등 뒤에서 하는 비방은 생명을 죽이는 무서운 것입니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성도 가운데 행하신 모든 일을 역행하는 것이 바로 이 비방입니다. 우리를 죄에서 자유롭게 하셨는데, 그래서 다시 죄의 노예가 되게 하지 않고 선한 일에 힘쓰며 하나 되게 하셨는데, 그러한 성도를 죄 짓게 하고 교회를 나뉘게 하며 사탄이 좋아하는 일을 하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역의 모든 일을 역행하는 일인 것입니다. 야고보는 이보다 더 심각한 이유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형제를 비방하는 자나 형제를 판단하는 자는 곧 율법을 비방하고 율법을 판단하는 것이라 네가 만일 율법을 판단하면 율법의 준행자가 아니요 재판관이로다” 다른 형제를 비방하고 판단하는 것은 곧 율법 그 자체를 판단하거나 비방하는 것과 같습니다. 야고보가 말하는 ‘형제’는 참된 믿음을 가진 자로서 자유하게 하는 율법에 따라 말도 하고 행동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가는 형제자매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을 비방한다면 그들이 지키고 있는 율법 자체를 비방하는 것과 같습니다. 늦은 밤, 빨간 신호에 멈춰 서 있는데 누군가 뒤에서 크게 경적을 울려댄다면, 그는 멈춰서 있는 사람에게 뿐만 아니라 신호체계 자체에도 불만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말씀에 따라 살고자 하는 형제자매를 비방하는 것은 말씀 자체를 비방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것이 재판관 자리에 앉은 것과 마찬가지인가?
문자적으로 ‘좋지 않게 말하다’로 번역할 수 있는 11절의 첫 문구는 비방, 거짓 증언, 성난 말과 같이 말에 대한 몇 가지 죄를 포함한다(레 19:15~18). 여기서 야고보의 문체는 3장보다는 부드럽다. 그러나 형제나 자매에 대해 비방의 말을 한다는 의미는 율법 자체에 의문을 제기한다는 면에서 더 심각해 보인다. 스스로 재판장 자리에 앉으므로 우리는 마치 자신이 어느 정도 법 밖에 또는 법 위에 있는 것인 양 자신의 연약성을 무시하고(마 7:1~3 참고) 대신 다른 사람의 비행에 주목한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주목하면 이웃을 자기처럼 사랑하기 어렵다(레 19:18). 결국 우리도 율법을 지키지 못하게 된다.
그러나 우리가 다른 사람을 판단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영적 분별력이 있어야 한다.
다음의 성경절에서 영적 분별력이 요구되는 영역은 무엇인지 찾아보라. 행 17:11, 고전 6:1~5, 고후 13:5, 빌 1:9, 요일 4:1, 갈 6:1.
우리는 사람들이 가르치고 설교하는 것을 하나님의 말씀과 비교해야 한다. 또한 신자들 사이의 차이점을 법정이 아닌 신자 사이에서 해결하도록 권장해야 한다. 세상 법관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를 수도 있고 따르지 않을 수도 있다. 무엇보다 우리는 우리의 신앙 관계가 건강한지 그리고 우리가 생각하는 것들이 신앙 경험을 향상시키는 최상의 것인지 아니면 파괴적인 것인지 스스로를 검증해야 한다.

교훈 : 우리는 다른 사람을 판단함으로 율법의 재판장이 되는 죄를 범하기보다 자신의 믿음이 영적으로 건강한지 분별하고 검증해야 한다.

부가적용)
비방은 믿지 않는 사람들의 특징입니다(롬 1:30; 딤전1:13; 엡4:31; 벧 2:1; 딤후3:2). 이것은 죄의 특성이고 구원받기 전의 상태입니다. 구원받은 우리는 참된 믿음을 가진 자로서 이러한 죄로부터 자유를 얻었습니다. 그런데 다시 그러한 죄에 거한다는 것은, 개가 토한 것을 다시 먹는 것과 같습니다. 또한 비방은 교회의 하나 됨을 나누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우리를 하나 되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어떤 형제가 다른 형제를 비방을 한다면 그것으로 인해 형제들 간의 사이는 갈라지게 됩니다. 비방하는 자리에 함께 있었던 형제자매는 그런 생각이 전혀 없었다가 그 말 때문에 선입견이 생겨서 역시 판단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보혈로 하나 되게 하는 교회를 나누고 갈라놓는 것이 비방입니다. 또한 비방은 성도를 실족시킵니다. 주님은 성도를 실족시키는(죄를 짓게 하는) 자는 화가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마 18:7). 누군가를 비방할 때 그 자리에 있는 형제자매는 그 대상자에 대해 판단과 정죄하는 죄를 짓게 됩니다. 또 비방의 대상이 된 사람은 나중에 그 사실을 알게 되어 그 역시 형제를 미워하고 분노하는 죄를 짓게 됩니다. 한 사람의 비방으로 인해 많은 다른 형제들이 죄를 짓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비방은 다름이 아닌 사탄이 좋아하는 일입니다. 밤낮 하나님 앞에서 형제를 비방하는 자들이 사단이 아닙니까(계 12:10). 우리가 형제를 비방하면 사단이 좋아하고 기뻐하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어느 대학의 졸업식장에서 학생들이 차례로 졸업장을 받고 있었습니다. 순서가 진행되는 것을 바라보는 한 축하객에게 눈에 띄는 장면이 있었습니다. 어느 학생이 한 손을 호주머니에 넣고 한 손으로 졸업장을 받고 총장에게 악수도 받지 않고 지나가는 것이었습니다. 축하객 중 한 사람이 이렇게 중얼거립니다. '세상도 많이 변했군, 저렇게 건방진 학생도 있으니. 한 손으로 졸업장을 받다니 이 학교는 4년 동안 무얼 가르쳤단 말인가?' 그러자 옆에 있던 한 재학생이 말했습니다. ‘그게 아닙니다. 저 분은 한 팔을 잃고 대신 의족을 하고 4년 동안 훌륭하게 학교를 다닌 학생입니다’ 그러자 보이는 대로 비난했던 축하객은 얼굴을 붉히며 함부로 말을 한 것을 부끄러워했다고 합니다. 탈무드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남을 비방하는 것은 살인보다도 위험한 일이다. 살인은 한 사람밖에 죽이지 않지만 비방은 세 사람을 죽인다. 비방하는 사람 자신, 그것을 듣고 있는 사람, 그리고 비방 당하는 사람이다.’

나의 삶 속으로

| 묵상 |
영적인 분별력과 형제를 판단하는 잘못에는 어떤 차이점이 있습니까?
가장 뚜렷한 차이점은 자신을 돌아보는 태도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어떤 죄를 식별하든지 그것을 정죄하기보다는 그 죄가 자신에게도 있는지의 여부를 살피는 데 주력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깊은 통찰력이 있다면 아무리 큰 잘못을 저지른 죄인이라 할지라도 그와 나 사이가 그리 멀지 않음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를 구원하기 위한 용서의 눈빛으로 바라보십니다. 진정한 영적 분별력은 나의 시선이 아니라 주님의 시선으로 바라볼 때 주어집니다.

| 적용 |
그대가 정죄하는 마음이 아닌 영적인 분별력을 가지고 고쳐보아야 할 사람 또는 문제는 무엇일까요?

영감의 교훈

기도
아버지, 제 눈을 고쳐 주옵소서. 정죄의 눈이 아니라 동정과 용서의 눈을 가지신 주님의 눈으로 고쳐 주옵소서. 남의 잘못을 알아보기 전에 먼저 제 잘못을 알아보게 하옵소서. 나를 위해 은혜를 구하는 마음으로 남을 위해 은혜를 구하게 하옵소서.

둘째 날(월) 율법의 시여자가 재판장이심
11월 24일

“입법자와 재판관은 오직 한 분이시니 능히 구원하기도 하시며 멸하기도 하시느니라 너는 누구이기에 이웃을 판단하느냐”(약 4:12).

교사강해 2)
판단은 헬라어로 ‘크리논’입니다. 재판장이 되어 심판하고 단죄(斷罪)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흔히 다른 사람이나 어떤 일에 대해,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내 의견으로는 이렇다” 말하기보다는, ‘이게 옳다’ 단정하곤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남을 함부로 판단하지 말아야 합니다. ‘못마땅해, 그 사람 틀렸어’하는 식으로 생각하는 재판장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네가 만일 율법을 판단하면 율법의 준행자가 아니요 재판관이로다. 입법자와 재판관은 오직 한 분이시니, 능히 구원하기도 하시며 멸하기도 하시느니라. 너는 누구이기에 이웃을 판단하느냐(11∼12절).” 형제를 함부로 판단하지 맙시다. 사람을 두고 선과 악, 좋고 나쁨을 정죄하지 맙시다. 이는 공동체를 파괴하는 일입니다. 우리가 품을 수 있는 생각, 할 수 있는 말은 오직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받습니다”라는 것밖에 없습니다. 하나님만이 유일한 재판관이십니다. 그분이 의로운 판결을 내리실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의에 대하여 심판하실 것입니다. 만약 누군가가 잘못을 지질렀으나 진심으로 회개했다면 갈보리에서 예수께서 친히 모든 빚을 도말하셨기 때문에 그에게는 빚지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도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사람은 내게 잘못을 저지른 것이지 예수께 죄를 지은 것은 아니잖아요~!” 맞는 말입니다. 하지만 당신은 당신 자신도 주님께 죄를 지었다는 사실을 잊고 있습니다. 모든 인류가 죄를 지었지만 죄 없는 어린 양, 예수님은 아무런 혐의도 없는 분이십니다. 하지만 그분은 우리를 대신해 죽으셨습니다. 우리 모두는 이 땅의 법을 능가하는 더 높은 하나님의 법을 어겼다. 재판이 열린다면 우리 모두는 이 우주에서 가장 권위 있는 심판대에 서서 사형을 언도 받아야 할 것입니다. 당신이 다른 사람에게 전해 비난 받을 일을 하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당신이 입은 피해와 당신이 용서받은 일을 비교해 보면 비교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당신이 진 엄청난 빚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 만약 지금 억울한 기분이 든다면 자신이 어떤 자비로운 은혜를 입었는지 그 기본적인 개념조차 잊어버린 사람입니다.

구약의 모든 율법은 예수님에게서 왔다. 종종 그것은 모세를 통해 전달되었기 때문에 모세의 법으로 불린다(대하 33:8, 느 10:29). 그러나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고 시내산에서 그들에게 십계명을 반포하신 분은 예수님이셨다(고전 10:1~4 참고). 산상수훈에서 예수님은 율법을 명확하게 하시고 확대하셨다. 그분은 육체로 오신 말씀이시다(요 1:14). 그리고 우리는 그분의 말씀에 따라 심판을 받을 것이다(요 12:48).
다음의 성경절들은 재판장이신 예수님에 대하여 어떤 사실을 말하고 있는가? 사 33:22, 11:1~5, 히 4:15~16, 계 19:11~16.
율법을 매우 잘 아는 사람만이 법을 위반했는지 아닌지를 판단할 자격이 있다. 변호사들은 그들의 역할을 수행할 준비가 됐는지 확인하는 사법고시를 치르기 전에 여러 해 동안 공부한다. 예수님 시대의 서기관들(대부분 바리새인들)도 모세의 법뿐 아니라 축적되어 온 전통들을 열심히 공부했다. 예수님이 그러한 전통에 동의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지도자들과의 심각한 대립을 초래했다. 그러나 율법을 주신 분으로서 예수님은 유일하게 그것의 의미를 설명하고 그것이 위반되었는지 아닌지를 평가할 자격이 있다. 그래서 그분이 모든 사람에게 그들의 행위대로 갚을 상을 가지고 오시는 것이다(계 22:12). 무엇보다 예수님은 인성을 입고, 죄 없는 생애를 사셨으며 우리 대신 죽고 죄와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셨기 때문에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실 수 있다.
“하나님은 모든 심판을 아들에게 맡기셨다. 왜냐하면 논란의 여지 없이 그분은
육체를 입고 나타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Maranatha, 341).

교훈 : 예수님은 율법을 주신 분이기 때문에 참된 율법의 해설자요 율법에 따라 세상을 심판할 유일한 재판관이시다.

부가적용)
링컨 대통령이 취임을 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장관들을 임명하던 때였습니다. 링컨은 지명도는 떨어지지만 실력은 출중했던 베이커라는 의원을 행정부 장관으로 임명하려고 했는데, 이 임명안을 놓고 여당과 야당의 반대가 매우 심했습니다. 조금 더 인지도가 높은 의원이 장관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도 링컨이 임명을 강행하려고 하자 여당과 야당의 대표로 뽑힌 의원이 ‘베이커가 장관이 되면 안 되는 이유’라는 보고서를 가지고 링컨 대통령을 찾았습니다. 그러나 말이 보고서였지 베이커라는 사람에 대한 일방적인 비난이었습니다. 그 중에는 베이커의 성격에 대한 이야기와 악의적인 루머들도 많았습니다. 링컨은 보고서를 훑어본 뒤 대표에게 물었습니다. “이 보고서는 내가 받은 것이니 이제 내 맘대로 해도 되겠습니까?” 대표는 그렇다고 대답했습니다. 대답을 들은 링컨은 보고서를 찢은 뒤에 벽난로에 불을 지펴 종이를 태워버렸습니다. 그리고 이후에 단 한 번도 그 보고서에 있던 내용을 다른 사람들 앞에서 말하지 않았습니다. 나에게 들리는 다른 사람의 비난은 어쩔 수 없지만 그 비난을 잘 처리하는 것은 나의 몫입니다. 다른 사람을 비난하는 자리는 되도록 오래 있지 말고, 또 확인되지 않은 내용을 함부로 입에 담지 마십시오. 반드시 창대하게 될 것입니다.

나의 삶 속으로

| 묵상 |
그대는 어떤 심정으로 하늘 법정에 서게 될까요?
(왼쪽 페이지에 이어서) “하나님은 인류 가운데 고난 받는 이들의 왕이 온 세상의 심판자가 되도록 계획하셨다. 사람을 영원한 사망에서 구원하기 위해 하늘 법정에서 내려오셔서 지상의 법정에 소환되시고 치욕스러운 십자가 죽음을 당하신 그분만이 상과 벌을 선고하실 수 있다”(Maranatha, 341). 율법의 시여자이시자 구원자이신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재판장이 되실 자격이 있다.

| 적용 |
심판의 때에 심지어 또는 그 이전에 그대는 율법의 시여자이자 재판장이신 예수님으로부터 어떤 도움을 요청하겠습니까?

영감의 교훈

기도
예수님, 주께서 우리의 재판장이 되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나님의 날개 그늘 아래 숨습니다.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옵소서. 그날이 이르기까지 십자가 공로로 우리에게 입혀주신 하나님의 의에 날마다 의지합니다.

셋째 날(화) 앞일을 계획함
11월 25일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어떤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 년을 머물며 장사하여 이익을 보리라 하는 자들아”(약 4:13).

교사강해 3)
위의 말씀에서 야고보는 장사꾼이 사업을 계획하고 이익을 남기려는 자체가 잘못되었다고 지적하는 것이 아닙니다. 본문이 경고하는 대상은 시간을 창조하신 주인도 몰라보고 자신이 시간의 주인인양 내일을 설계하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약 4:13절에 ‘가서, 머물며, 장사하여, 이익을 보리라’라는 네 개의 동사가 나옵니다. 모두 미래형으로 내가 이렇게 해보겠다는 것입니다. 믿음 없는 자들은 하나님이 안중에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없이 내일 일을 계획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없다고 생각하는 자들의 행실은 가증하고 악할 뿐이라고 하였습니다(시14:1). 본문은 두 가지의 죄를 지적합니다. 하나는 시간의 주인이 자신이라는 잘못된 생각입니다. 시간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시간을 창조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시간 안에서 살고 있습니다. 내일이 당연히 올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우매한 생각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오늘을 감사해야합니다. 또 하나는 내가 계획하고 하면 다 될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내가 무엇을 해보겠다는 자체가 교만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시간 안에 산다는 것은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며 살 때 참된 인생의 의미가 있음을 알려줍니다. 우리는 내일의 계획도 나의 육신을 도모하는 계획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위한 계획을 세워야 하겠습니다.

약 4:13을 읽고 눅 12:13~21과 비교해 보라. 우리는 그리스도의 임박한 재림을 고대하며 매일을 살면서 동시에 미래를 위해 신중한 계획도 수립해야 한다. 우리는 이 둘 사이에 어떻게 균형을 잡아야 하는가? 어떻게 하면 무작정 더 큰 ‘곳간’을 짓는 덫을 피할 수 있을까? 일 년 전에 또는 그보다 앞서 계획을 세우는 것은 상당히 합리적인 것처럼 보인다. 회사는 보통 단기, 중기, 장기 계획을 세운다. 개인과 가정도 미래를 위해 저축을 하고, 갑작스런 지출에 대비해야 한다. 반면 우리는 예수님이 곧 오시면 지상에 있는 우리의 모든 소유가 화염에 소멸되리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벧후 3:10~12).
삶에 대비한 이런 두 가지 접근법이 꼭 상충하는 것은 아니다. 어떤 이는 “마치 그리스도께서 몇 년 안에도 오시지 않을 것처럼 계획하되 마치 내일 오실 것처럼 살라.”고 말한다. 물론 장기 계획만으로 그날그날을 살기는 어렵다. 예수님의 청중들은(물론 오늘날 그리스도인들도) 더 큰 곳간을 짓기로 결정한 부자가 하나님이 주신 복 때문에 성공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사람의 속생각을 드러내셨다. “(내)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눅 12:19). 요컨대 그의 최고의 관심사는 자신을 위해 더 많은 재물을 쌓는 것이었다.
우리는 너무 확정적인 계획을 세우기보다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이나 저것을 하리라”(약 4:15)고 해야 한다.

교훈 : 우리는 미래를 위해 계획해야 하지만 매일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심정으로 살면서 모든 계획이 하나님의 뜻과 일치하는지 그분께 물어야 한다.

부가적용)
계획을 세우는데 있어서 ≪만일≫이라는 경우를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만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고 이것이나 저것을 하리라≫. 계획을 세우는 일이 오만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여기에서 오만한 점은 이 계획의 실현, 예를 들면 내일이 전적으로 본인의 권한 하에 있다는 듯 행동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알듯, 이러한 권한은 우리에게 없습니다.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여러분 자신과 미래에 관해 많은 생각을 하십니까? 하나님께서는 더 많은 생각을 하십니다. 여러분에 대한 주님의 생각이 너무 많아 셀 수도 없습니다! 그 수를 셀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의 계획이 이루어지지 않았고 ≪하나님 왜 인가요?≫라고 묻고 싶고, 여러분의 인생 계획이 얼마나 근사했는지 보여주고 싶다면, 여러분에 대한 주님의 계획인 얼마나 더 높은지만 기억하십시오. 여러분에 대한 주님의 생각이 셀 수 없다는 점과 이 모든 생각이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라는 점을 기억하십시오. 주님께서 축복하지 않으신 계획이 있다면, 그것은 주님께서 여러분을 간과하시거나 사랑하지 않으셔가 아니라, 여러분의 인생에 대한 그 분의 완전하고 수용 가능한 뜻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에 대한 주님의 뜻과 계획은 사실 완벽하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결론을 말하면, 계획을 세우는 것은 전혀 잘못된 일이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의 뜻≫이라는 조건을 더하거나,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듯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태복음 26:39) 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계획하시기 바랍니다.

나의 삶 속으로

| 묵상 |
그대는 앞일을 계획할 때 그리스도의 재림을 얼마나 고려하고 있습니까?
(왼쪽 페이지에 이어서) 우리가 장래 계획을 세울 때 ‘하나님의 뜻이라면’이라는 문구를 첨언하는 것이 전부는 아니다. 우리는 자신의 모든 계획을 하나님께 내려놓아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 저는 하나님의 뜻을 알기 원합니다. 하나님이 이 계획을 기뻐하지 않으신다면 제게 그 사실을 보여주시옵소서.” 우리의 계획이 좋지 않다면 하나님은 그 사실을 알려 주실 것이다. 우리가 그분의 음성에 계속 귀를 기울이고 우리의 계획을 기꺼이 수정하고 심지어 완전히 바꿀 수 있다면 하나님은 그렇게 하실 것이다.

| 적용 |
그대가 최근에 세운 계획 가운데 하나님께 다시 물어야 할 계획은 무엇입니까?

영감의 교훈

기도
예수님, 세상살이에 급급한 저희를 용서해 주시옵소서. 우리에게 영원한 가치를 사모하며 먼 미래를 바라보는 지혜를 허락하시옵소서. 우리의 계획에 하나님의 복이 임하기보다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계획에 일부가 되기를 간절히 바라옵니다.

넷째 날(수) 안개
11월 26일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약 4:14).

교사강해 4)
야고보는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라고 물었습니다. 이는 우리 각자에게 인생의 의미를 생각해 보며 살라는 질문입니다. 우리 인생을 안개와 같이 빨리 사라진다고 비유하였습니다. 그러니 인생의 주인을 기억하지 못하며 사업을 계획하고 돈을 번다고 애쓰는 일은 허무할 뿐입니다. 예수님의 설교 가운데 나오는 한 어리석은 부자는 “내 곳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고 계획했습니다. 오로지 자기를 위한 계획을 세우던 그 날 밤에 하나님이 나타나서 말씀하셨습니다.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눅12:20). 내일 일을 모르는 인생들입니다. 우리는 인생의 주인이 하나님이시고, 모든 것이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고 사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전도서는 “너는 청년 때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고 교훈하였습니다(전12:1). 생명을 주시는 분이 누군지도 모르고 자기 마음대로 사는 인생이야 말로 헛될 뿐임을 명심해야 하겠습니다.

약 4:14을 읽어 보라. 이 말씀의 요점은 무엇인가?
인생은 불확실하다. 매 호흡이 선물이다. 약 4:14은 ‘증기’ 또는 ‘안개’로 번역되는 매우 드문 그리스어 ‘아트미스’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전도서에 서른여덟 번 등장하는 히브리어 ‘헤벨’은 ‘숨’ 또는 ‘증기’라는 뜻이지만 ‘헛됨’으로 번역되었다. 마찬가지로 ‘안개(아트미스)’ 역시 덧없는 삶의 본질을 강조한다. 나이 들어 인생이 얼마나 짧은지 느껴보지 못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노년에 접어든 유명한 전도부흥 강사 빌리 그레이엄(Billy Graham)은 “인생이 이렇게 빨리 지나갈지 몰랐다.”고 말했다.
달리 말하자면 죽음은 항상 가깝다. 죽음이 코앞에 있다. 누구나 어떤 이유로 갑자기 죽음을 맞이할 수 있다.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라는 야고보의 표현이 딱 맞다. 우리는 언제 죽을지 모른다.
“나는 사람의 생명이 짧고 덧없음에 대하여 여러 말을 않거니와 하나님의 성신의 애소(哀訴)하는 소리에 순종하기를 지체하고 죄의 생애를 살기로 택하는 일은 두려운 위험-우리가 충분히 깨닫지 못하는 위험-이니 과연 이러한 지체는 사실상 매우 위험한 것이다”(정로의 계단, 32).
게다가 인생은 짧을 뿐 아니라 그 자체가 너무도 만족스럽지 못하다. 전 2:15~19, 4:4, 5:10, 9:11~12을 읽어 보라. 솔로몬의 기별은 야고보의 요점을 어떻게 지지하는가?
우리는 이 세상의 삶 속에서 너무도 많은 부정의와 불공평, 모순들을 본다. 그래서 예수님을 통해 우리에게 주신 영생의 약속을 갈망할 수밖에 없다. 그런 약속이 없다면 우리는 언젠가 사라지고 영원히 잊힐 안개와 같을 뿐이다.

교훈 :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약속과 소망이 없으면 우리는 내일 어떻게 될지 모르는 안개와 같은 존재이다.

부가적용)
인생이라는 시계의 태엽은 단 한 번만 감깁니다. 그리고 그 시계 바늘이 어디서 멈출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다른 사람보다 한 시간 더 빨리 설 수도 있고, 한 시간 더 늦게 설수도 있습니다. 사람이 재산을 잃는다는 것은 정말 슬픈 일입니다. 건강을 잃는 것은 그보다 더 슬픈 일입니다. 그러나 영혼을 잃는 것은 이 모든 것보다 더 슬픈 일입니다. 영혼은 한번 잃고 나면 그만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이 짧은 글을 적는 이 순간에도 39명이 죽었습니다. 매일 매시간 3,420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그들을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을 만나야 될 그 날을 위해 무덤에 내려 간다고 합니다. 여러분도 그 중 한사람일 수 있었지만 죽지 않고 이렇게 살아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나 저도 조만간 죽을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를 만드신 분을 만날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나의 삶 속으로

| 묵상 |
우리가 안개와 같이 허무한 인생을 살아야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죽음이 예정된 인생은 사실상 가치가 없습니다. 그 짧은 세월이 슬픔과 고통뿐이라면 더욱 그렇습니다. 이런 사실을 알고도 아담과 하와는 살아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단 하나의 소망 “여자의 자손”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 허무한 인생을 살아야 한다면 그 이유는 구원의 하나님을 믿음으로 죄에서 벗어나 영원한 삶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처럼 애타게 부르짖으시나 봅니다. “너는 피투성이라도 살아 있으라”(겔 16:6).

| 적용 |
그대는 소망을 가진 삶이 헛되지 않다는 사실을 어떻게 보여줄 수 있을까요?

영감의 교훈

기도
하나님, 안개 같은 우리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시고 그것을 그리스도 안에서 찾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주님 오시기까지 이 짧은 세월이 결코 헛되지 않도록 믿음과 소망을 전하는 삶을 살게 해 주시옵소서.

다섯째 날(목) 선한 일을 알고 행함
11월 27일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이나 저것을 하리라 할 것이거늘 이제도 너희가 허탄한 자랑을 하니 그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 그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하지 아니하면 죄니라”(약 4:15~17).

교사강해 5)
교만이란 피조물이 자기를 자기 이상으로 생각하는 것으로, 자기에 대한 평가가 실제보다 높은 상태를 말합니다. 이 마음 상태가 신약 성경이 말하는 교만의 기본 개념입니다. 이를 가장 잘 나타내는 표현은 "허탄한 자랑"(약 4:16절), 헬라어로 '알라조네이아'(alazoneia) 입니다. 이는 자기를 자기 이상으로 내보이는 태도입니다. 또 다른 표현으로는,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요일 2:16절) 에서 이생의 자랑, ‘헤 알라조네이아 투 비우’가 있습니다. 여기서 '이생'이라는 말은 헬라어로 '비오스' 인데, 이 말은 이 세상이라는 뜻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사람이 지닌 생명'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이생의 자랑' 이란 「자기가 이 세상에서 가지고 사는 그 생명을 자랑한다는 말」입니다. 그 생명을 자랑하는 것이 문제가 되는 이유는 자기의 생명을 본래의 가치와 위치 이상으로 생각한다는 데 있습니다. 그렇게 자랑할 만한 것이 없는데도 허탄한 자랑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생명을 가지고 이 세상을 사는데, 그 생명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며 하나님이 거두어 가시면 그 생명도 사라집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생명이 하나님 없이도 유지되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성경은 그런 태도를 교만이라고 말합니다. "이제 너희가 허탄한 자랑을 자랑하니 이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약 4:16절)에서 「허탄한 자랑」으로 번역된 말은 요한일서 2장 16절의 「이생의 자랑」과 동일한 말입니다. 즉 실제가 아닌데 그것이 실제인 것같이, 그만큼 되지 못하면서 그만큼 되는 것같이 생각하는, 실속이 없고 허망한 자랑입니다.

약 4:15~17을 앞의 문맥에 비추어 읽어 보라. 핵심 요점은 무엇인가?
야고보는 여기서 자기의존적인 태도를 다루고 있다. 실제로 그는 그러한 태도를 교만으로, 그들의 말을 자랑으로 지칭하며 악하게 여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들에게 바른 태도란 아주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17절을 읽어 보라. 성경은 죄를 그르게 행하는 것과 옳은 행위를 하지 않는 것 두 가지로 정의한다. 첫 번째 정의는 요한을 통해 주어졌다. “죄를 짓는 자마다 불법을 행하나니 죄는 불법이라”(요일 3:4). 현대의 번역 성경들은 ‘죄는 무법이다.’라는 식으로 이해하지만 그리스어 ‘아노미아’는 습관적이고 무법적인 행위라기보다 특정 법에 대한 위반을 의미한다(롬 4:7, 딛 2:14, 히 10:17). 두 번째 정의는 약 4:17에 나온다.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하지 아니하면 죄니라.” 따라서 우리는 단순히 잘못을 행하려는 유혹을 거부하는 것 이상을 해야 한다. 우리는 “빛의 자녀들”(엡 5:8)이 되고 “너희(우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우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우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마 5:16)도록 부름을 받았다.
물론 우리는 쉽게 낙심할 수 있다. 어떻게 매일 모든 선한 일을 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쟁점은 그것이 아니다. 예수님의 생애도 멈추지 않는 활동의 연속은 아니었다. 그분도 기도하거나 쉬기 위해 물러날 때가 있었다(눅 5:16, 막 6:31). 무엇보다 그분은 자신이 하는 모든 일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구했다(요 5:30). 심지어 그분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을 식사에 비교하셨다.

교훈 : 선을 행해야 할 줄 알면서도 행하지 않는 것은 옳지 않은 일을 행하는 것과 같은 죄이다. 우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은 행할 능력과 지혜를 주신다.

부가적용)
프랑스 곤충학자 장 앙리 파브르는 날벌레들의 생태를 주의 깊게 관찰하던 중 매우 중요한 사실을 발견하였습니다. 그것은 날벌레들이 앞에 있는 다른 놈이 돌기 시작하면 방향도 이유도 없이 앞에서 날고 있는 놈을 따라서 무턱대고 그냥 빙빙 돈다는 것입니다. 빙빙 돌고 있는 날벌레들은 눈앞에 먹을 것을 주어도 거들떠보지도 않고 계속 돌기만 하는데, 무려 7일 동안 돌다가 결국은 굶어죽고 말더라는 것입니다. 날벌레만 그렇겠습니까? 한 통계자료에 의하면 파브르가 관찰한 날벌레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인생이 전체 인류의 87%에 이른다고 합니다. 믿어지지 않는 수치입니다. 오늘도 하루 해가 밝았으니까, 살아 있으니까 사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성공하지 못하는 이유는 기회가 부족하거나 능력이 부족해서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들은 오늘도 타성에 젖어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육체는 반드시 소멸되고 맙니다. 하지만 소멸되기 전에 우리는 우리의 발자취를 만들 수 있습니다. 죽는다는 사실을 의식하는 삶, 그것은 불필요한 곁가지들을 과감하게 잘라낼 수 있는 동기를 줍니다. 하나님께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으시는 일에 나의 시간과 물질을 드리지 말고, 삶의 우선순위를 정하여 하나님 보시기에 귀한 것, 값진 것에 나의 가장 귀한 삶을 드려야겠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행해야할 선을 행하여 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인생이 그분 앞에서 충성된 삶을 살았다고 인정받은 인생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발자취를 남기고 싶으십니까? 여기서 사용된 「자랑」이라는 단어 '알라조네이아'(alazoneia)는 원래 「전장에서 크게 외친다」는 의미를 가진 동사에서 나왔습니다. 전쟁터에서 싸움을 하기 전에 전의를 다지고 적에게 위협을 주기 위해서 '와' 하고 함성을 지르는데, 이 단어는 그렇게 크게 소리를 지른다는 뜻으로서 일종의 「허세」라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그리고 우습게도 사람이 자기 생명에 대해서 꼭 그와 같은 짓을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이란 하나님이 살게 하시면 살고, 데려가시면 이 세상에 없는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자기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존중하고 그 뜻을 찾아서 행하며 자기에게 주신 분깃을 감사하면서 사는 것이 정당합니다. 그런데 야고보서 4장 13-17절에 묘사된 사람들에게는 그런 정신이 없습니다. 마치 자기 생명이 자기 것인 양 미래에 대한 거창한 계획을 세우면서 삽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그런 사람들에게 이렇게 경고합니다. 14절을 보십시오.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간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나의 삶 속으로

| 묵상 |
그대가 알면서도 행하지 않는 선은 무엇입니까?
(왼쪽 페이지에 이어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요 4:34). 우리가 한 자리에서 먹을 수 있는 음식의 양에 한계가 있듯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의 양에도 한계가 있다. 예수님이 한 사람은 심고 다른 사람이 거두지만 함께 즐거워한다고 말씀하신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36~38절).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일한다면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도록 용기를 얻을 것이며 더 큰 자발성을 가지고 모든 가능한 방법을 통해 쓰임 받기를 기도할 것이다.

| 적용 |
지금까지 알면서도 행하지 않았던 선을 이제 어떻게 행하기로 결심하겠습니까?

영감의 교훈

기도
아버지, 이것이 바로 우리의 모습입니다. 죄를 짓지 않으려 할 뿐 선을 행할 자발적인 의지가 없으니 우리는 여전히 죄인에 불과합니다. 어둠을 몰아낼 하늘의 빛을 비춰 주시옵소서. 그 빛을 사람들에게 비추는 빛의 자녀가 되게 해 주시옵소서.

여섯째 날(금) 더 깊은 연구를 위해
11월 28일

<실물교훈>, 342~346 “달란트”에서 시간의 가치에 대해 읽고 자신에게 인상적이었던 점들을 교과반에서 이야기해 보라.

“그대들 중 아무도 진리에 맞서 자랑하는 사람이 없게 하라. 그런 지혜를 칭찬하는 사람들은 많겠지만, 그것은 매우 기만적이고 해로운 것이다. 그것은 위에서 난 지혜가 아니고 거듭나지 못한 마음의 열매이다. 그런 지혜의 창시자는 사탄이다. 다른 사람을 참소하는 자로 하여금 자기는 분별력이 있는 사람이라는 자신감을 갖지 못하도록 하라. 이는 그가 그렇게 할 때에 사탄의 속성을 입고서 의의 옷이라고 말하기 때문이다”(화잇주석, 약 3:15~16).

“죄를 지어 켕기는 사람이 누구보다 먼저 죄를 알아챈다. 이런 사람은 남을 비난함으로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악을 감추거나 변명하려고 애쓴다. 사람이 악을 알게 된 것은 죄로 말미암아서였다. 최초의 부부는 죄를 범하자마자 서로 비난하기 시작했다. 인간은 그 본성이 그리스도의 은혜 아래 있지 않을 때 필연적으로 이렇게밖에 될 수 없다”(산상보훈, 126).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➊ 위의 둘째 인용문을 보십시오. 우리도 다른 사람을 정죄하고 비방함으로 자신에 대해 만족감을 얻거나 자신의 부족을 감추는 그와 같은 잘못을 저지르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➋ 인생이 얼마나 신속하게 지나가는지 묵상해 보십시오. 이런 사실을 안다면 우리의 우선순위는 어떻게 조정되어야 합니까? 특수상대성 이론에 따르면 시간은 기준틀 내에서 우리가 얼마나 빠르게 움직이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우리가 얼마나 빨리 또는 느리게 움직이든 시간은 지나간다는 것입니다. 시간은 한 번 지나면 영원히 돌아오지 않습니다. 이런 냉엄한 사실에 비추어 우리는 시간을 어떻게 활용해야 할까요?

➌ 죄를 범하기는 하지만 아직 야고보가 경고한 덫에 빠지지 않은 자들을 우리는 어떻게 다루어야 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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