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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과 겸비한 하늘의 지혜(교사를 위한 강해와 예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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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조춘호 작성일14-11-14 21:28 조회4,96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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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과 겸비한 하늘의 지혜

11월 22일 안식일
일몰:오후 5시 17분

기억절 :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약 4:10).

도입)
미국의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는 뛰어난 전략가요, 정치가요, 군인이었습니다. 그의 뒤를 이은 사람은 부통령을 하던 존 애덤스였습니다. 애덤스가 대통령으로 취임한 이듬해인 1798년 미국은 뜻하지 않은 외환(外患)을 만났습니다. 신대륙에 널려있는 막대한 이해관계에 뛰어든 프랑스가 미국에 무력도발을 한 것입니다. 이 같은 위기 상황에서 이를 해결할 만한 전략가는 이미 퇴임한 전직 대통령 워싱턴밖에 없다고 생각한 애덤스는 워싱턴을 찾아가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그런데 애덤스 대통령은 워싱턴에 대한 예우 때문에 고민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참모총장의 계급은 중장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때 워싱턴은 특별대우를 마다한 채 중장계급을 달고 현역으로 복귀, 프랑스의 위협으로부터 미국을 건졌습니다. 조국을 사랑하는 마음은 계급을 초월했습니다. 미국 국민은 지금까지도 그를 미국 역사상 위대한 인물의 한 사람으로 존경하고 있습니다. “겸손과 여호와 경외함의 보응은 재물과 영광과 생명이니라”(잠 22:4) 겸손은 위대한 사람이 반드시 지녀야 할 품격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낮춤에 대한 본보기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낮아질 대로 낮아진 사도 바울이 예수님이 겸손하심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즉 ‘근본은 하나님의 본체’이시나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이 땅에 종의 모습으로 오신 예수님이 참된 겸손의 모습인 것입니다. 하늘의 모든 영광을 다 버리고 이 땅에 가장 비천한 모습으로 오신 예수님. 그의 가난하심은 성도들에게 부요함을 주셨고(고후 8:9) 그가 받으신 질고와 고난과 굴욕은 성도들에게 사유의 은총과 참된 자유와 평화와 승리를 주셨습니다(사 53:4,5). 예수님 자신의 뜻은 아니었지만(눅 22:42) 오로지 하나님의 뜻에 대한 철저한 복종을 실천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셨습니다(9절). 이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 뒤에 오는 그리스도의 승귀(昇貴), 곧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승천, 그리고 영광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 성도들에게도 이웃과 교회의 덕을 위하여, 더 나아가서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포기해야 할 삶의 부분들이 있습니다. 이는 성도의 제1 목적이 바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연구 범위 : 약 3:13~4:10, 신 4:6, 갈 5:17, 렘 3:6~10, 20, 행 19:13~16, 시 24:3~6.

많은 중·대형 회사에는 ‘중간 관리자 사고방식’이 존재한다. 이런 태도는 직원들이 그들에게 없는 어떤 권한, 즉 자신에게 더 많은 존경과 급료, 더 높은 지위가 있어야 한다고 느낄 때 생긴다. 이런 건전하지 못한 태도는 승진하려고 노력하는 시간이 오래될수록 발달한다. 이기적인 경쟁의식에 사로잡혀서 의사결정권자들에게 바치는 아첨성 발언과 동료에 대한 무례한 행동 등이 대표적인 징후에 포함된다. 어떤 TV 뉴스 앵커가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지 않고 높은 자리로 승진하자 한 동료가 감탄하며 평하기를 ‘시체가 없었다.’고 말했다.
이기적인 경쟁의식은 세상 조직에 국한될 뿐 교회는 완전히 다르게 작동해야 한다. 그러나 불행히도 성경은 너무 자주 ‘세상의 지혜’가 신자들 가운데 작용한다고 지적한다.
이번 주 우리는 이런 불행한 현실에 대하여 하나님의 말씀이 전하는 기별을 듣고자 한다.

*교과는 읽고 밑줄만 쳐도 공부가 됩니다.

안교 활동반과 교과 토의

※ 학습 목표
➊ 깨닫기 : 지혜란 단지 선악을 구별하는 능력뿐 아니라 다른 사람을 대하는 태도에 대한 바른 이해라는 사실을 인식한다.
➋ 느끼기 : 지혜롭게 말하고 행동하려는 소망을 가진다.
➌ 행하기 : 나뉘지 않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긴다.

Part 1.
1. 인사 안교 반장 또는 소그룹 리더 서로 인사를 나누고 손님을 환영해 줍니다.
2. 출석과 공부를 확인하고 안교헌금을 걷습니다.
3. 결석자와 구도자에 대한 보고를 듣고 방문 계획을 세웁니다.

Part 2. 나눔 안교 교사 또는 소그룹 리더(A나 B 중 하나를 선택하십시오.)
A. ❶ 사람들은 왜 지능지수(IQ)가 높은 사람을 부러워할까요?
❷ 성경이 말하는 지혜와 아이큐는 어떻게 다르다고 생각합니까?
❸ 그대는 겸손과 참된 지혜가 어떤 관계라고 생각합니까?
❹ 각자 하늘의 지혜를 따를 때 얻기 원하는 결과가 무엇인지 말해 봅시다.

B. ❶ 아주 똑똑한 대신 성격이 나쁜 사람과 똑똑하지는 않아도 아주 성격이 좋은 사람이 있다면 그대는 누구와 사귀겠습니까? 이유는 무엇입니까?
❷ 세상에 속한 지혜와 하늘에 속한 지혜는 각각 어떤 특징이 있습니까?
❸ 교회가 세상에 속한 지혜와 하늘에 속한 지혜의 지배를 받을 때 각각 어떤 모습일지 이야기해 봅시다.
❹ 우리 가정과 교회가 하늘에 속한 지혜의 지배를 받으려면 어떤 결심이 필요할까요?

결론 : 진정한 지혜는 겸손한 생애와 사랑이 담긴 언어와 행동을 통해 실체가 드러납니다.

Part 3. 실천 안교 반장 또는 소그룹(예비) 리더
❶ 멤버를 확대하기 위해 서로 어떤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지 이야기합니다.
❷ 소그룹 또는 안교반 번식에 대하여 점검합니다.
❸ 기도 제목을 가지고 함께 기도합니다.

첫째 날(일) 지혜의 온유함
11월 16일

“너희 중에 지혜와 총명이 있는 자가 누구냐 그는 선행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온유함으로 그 행함을 보일지니라”(약 3:13).

교사강해 1)
에딘버러 대학의 제임스 심프슨 교수에게 한 학생이 “선생님의 생애에서 가장 뜻 깊은 발견은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을 던졌습니다. 심프슨 교수는 환자들에게 고통 없이 수술을 받을 수 있도록 하는 마취제 클로로프롬을 발견, 세계 의학계에 위대한 혁명을 일으킨 사람으로 칭송받는 의학자였습니다. 그래서 주위 사람들은 심프슨 교수가 당연히 그 마취제의 발견을 들 것이라고 예상했습니다. 그런데 심프슨 교수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나의 생애에 있어서 가장 소중한 발견은 나는 죄인이며 예수님이 나의 구주이시라는 사실을 자각한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겸손을 자신의 능력이나 지식을 드러내지 않고 낮추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겸손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보잘 것 없음을 자각한 사람들이 그 낮아진 마음으로 다른 영혼들을 대하는 것입니다. 진정한 겸손은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한 경험 위에서 꽃피는 덕목인 것입니다.

“지혜의 온유함”이란 무슨 뜻일까?
어떤 주석가들은 야고보서 3장 전체는 어떤 사람이 교사의 자격이 있는지에 관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지혜롭고 총명한 자들은 훌륭한 교사 후보자들이지만, 그 범위는 회중 전체를 포함할 정도로 모호해 보인다. 야고보가 이 서신을 통해 설명하려는 지혜란 주로 고대 그리스나 현대의 서방 국가들에 의해 높이 평가를 받는 지적인 박학다식이 아니다. 오히려 지혜란 ‘행함’으로 번역된 그리스어 ‘아나스트로페’가 지적하듯이 그 사람의 행실과 삶의 방식 속에서 나타난다(딤전 4:12, 히 13:7, 벧전 1:15, 2:12 참고). 우리의 행실은 우리가 얼마나 지혜로운지를 증언한다. 예수님의 가르침도 동일하다. “지혜는 그 행한 일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마 11:19).
흥미롭게도 “지혜와 총명(지식)”이란 표현을 사용한 유일한 구약 성경절은 하나님이 명령하신 모든 율법을 준수하라는 모세의 권면에 나타난다. “너희는 지켜 행하라 이것이 여러 민족 앞에서 너희의 지혜요 너희의 지식이라 그들이 이 모든 규례를 듣고 이르기를 이 큰 나라 사람은 과연 지혜와 지식이 있는 백성이로다 하리라”(신 4:6).
반대로 약 3:11에서 언급된 “쓴 물”은 교회 내에 질투와 이기적인 야망을 생산한다(14절). “다툼”으로 번역된 그리스어는 ‘에리테이아’로서 배타적인 자기 이익의 추구를 의미한다. 그런 태도는 이 땅의 그리스도인이라기보다는 하늘의 사탄과 더 가까워 보인다. 자아에 대하여 죽고 의지를 주님께 굴복시키겠다고 의식적으로 결심하지 않는다면 우리도 야고보가 경고한 그 같은 태도를 보일 위험성이 있다.

교훈 : 참된 지혜는 박학다식이라기보다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생활과 행동에서 드러나는 겸손함으로서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세상의 지혜와 다르다.

부가적용)
마틴 루터는 1517년 10월31일 자신이 사제로 일하고 있는 비텐베르크 성당 문 위의 벽에 95항목의 신학명제가 적힌 대자보를 내다걸었습니다. 교회사가들은 훗날 이 날을 종교개혁일로 정했습니다. 루터가 바로 그 날을 시점으로 종교개혁을 시작한 것은 아닙니다. 더구나 그는 종교개혁을 의도한 것도 아닙니다. 복음공동체인 교회의 본질이 무엇인지, 그것이 당시에 어떻게 왜곡되었는지를 신학적으로 해명한 것뿐입니다. 그런 노력이 교회 내외의 여러 가지 요인과 맞물려 당시 교회와 사회를 변혁하는 에너지로 자리를 잡았습니다. 오늘 우리는 종교개혁의 정신을 이어받는 종교개혁의 후예들입니다. 무엇이 종교개혁의 정신일까요?
루터가 비텐베르크 성당 문 위에 붙인 95 항목의 신학 명제는 핵심적으로 두 가지 내용입니다. 하나는 면죄부가 신학적으로 타당성이 없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교황무오설 역시 신학적으로 잘못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눈에 당시 가톨릭의 면죄부와 교황무오설이 언어도단인 것처럼 보일지 모르겠지만 당시에는 나름으로 일리가 있었습니다. 면죄부나 교황무오설이나 그 중심은 교회입니다. 면죄부는 당시 베드로 성당 건축비 조달을 위한 조치였고, 교황무오설 역시 교회의 권위를 강화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세상의 건축물보다 더 웅장하고 좋은 성당을 건축하는 노력이나, 그리고 세상의 왕보다 더 막강한 교권을 확보하려는 노력은 모두 교회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교회를 위해서 비성서적인 교리를 끌어들인 것뿐입니다. 사람은 목적만 좋으면 그 수단은 별로 문제를 삼지 않는 경함이 있습니다. 좋은 게 좋다는 식입니다. 그런데 머물러 있으면 종교는 부패하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종교개혁자들은 교회를 가리켜 ‘에클레시아 샘퍼 레포만다!’라고 규정했습니다. 한시적으로가 아니라 항상 개혁되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말은 누구나 개혁이라고 하지만 그게 간단한 게 아닙니다. 종교 집단에서는 개혁이 특히 어렵습니다. 그 이유는 종교가 보수적이기도 하고, 경건의 모양을 취하기 때문입니다. 경건한 모양으로 살아가는 사람의 잘못을 뚫어보기는 어렵습니다. 교회 안에 그런 풍토가 굳어졌습니다. 기도하고, 눈물 흘리고, 찬미를 부르는 사람은 자타가 경건한 사람으로 인정합니다. 교회에 어떤 문제가 생기면 기도를 하자고 말합니다. 그것은 원칙적으로 옳지만 실제로는 옳지 않습니다. 기도하는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면 시시비비가 가려지지 않습니다. 어떤 목사님들은 교회에 문제가 생기면 일주일 기도, 또는 금식기도를 합니다. 아무리 비민주적이고, 잘못된 일을 하더라도 이런 경건한 포즈를 취하기만 하면 모든 게 해결되는 것처럼 행동합니다. 루터가 당시에 면죄부와 교황무오설을 문제 삼았다는 것은 목숨을 담보로 내놓는 행위였습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루터의 말이 옳기는 하지만 그대로 따라가기는 귀찮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종교적인 경건에 담긴 위선은 분간하기도 힘들고, 그것을 지적하는 것은 더 힘듭니다. 그래도 그런 걸 따지지 않으면 교회는 순식간에 본질로부터 이탈됩니다.

나의 삶 속으로

| 묵상 |
그대의 신앙 경험에 따르면 ‘온유한(겸비한) 지혜’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세상의 기준에 따르면 지혜란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은 정보와 차원 높은 분별력을 포함한 지적 능력을 말합니다. 그래서 ‘지혜’를 가진 사람이 조직을 이끌거나 의사를 결정하는 권한에 가까워집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에게 그런 능력이 있음을 증명하기 위해 경쟁적으로 노력하게 됩니다. 그러나 야고보는 “독한 시기와 다툼이 있다면 자랑하지 말라”(약 3:14)고 합니다. “이러한 지혜는 위로부터 내려온 것이 아니요 땅 위의 것이요 정욕의 것이요 귀신의 것”(15절)이기 때문입니다. 이와 대조적인 의미에서 온유한 지혜란 하늘에 속한 것이며 하나님의 명령과 말씀의 원칙에 순종하려는 겸손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 적용 |
그대는 어떻게 말과 삶의 방식을 통해 하늘에 속한 지혜를 보일 수 있을까요?

영감의 교훈

기도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라는 말씀에 귀를 기울입니다. “여호와를 신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는 말씀을 되새깁니다. 저의 부족을 인정하고 겸손히 하나님의 뜻과 명령을 따르는 것이 제게 가장 필요한 지혜임을 고백합니다.

둘째 날(월) 두 종류의 지혜
11월 17일

“이러한 지혜는 위로부터 내려온 것이 아니요 땅 위의 것이요 정욕의 것이요 귀신의 것이니 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에는 혼란과 모든 악한 일이 있음이라”(약 3:15~16).

교사강해 2)
옛날 어느 가난한 홀어머니에게 두 아들이 있었는데 너무 가난하여 삯바느질로 아들을 가르쳤습니다.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 어느 날 어머니가 바느질을 하고 있는데 처마에서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가 이상하게 들려 가만히 살펴보니까 처마 맡에 항아리가 묻혀 있었습니다. 항아리를 꺼내보니까 그 안에는 금화가 가득 들어 있었습니다. 그 돈만 있으면 고생하지 않아도 두 아들 공부시킬 수 있고 좋은 집 사서 호의호식하며 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어머니는 금화가 가득 들어 있는 항아리를 다시 땅 속에 깊이 묻어버렸습니다. 그리고 서둘러 그 집을 팔고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갔습니다. 그 어머니는 계속하여 삯바느질로 고생하며 두 아들을 공부시켰는데 두 아들이 나란히 과거에 급제하였습니다. 지긋지긋한 가난에서 벗어나게 된 후 어느 날 어머니는 높은 벼슬길에 오른 두 아들을 불러놓고 금화항아리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그러자 두 아들은 놀라면서 왜 그 고생을 하시면서 그렇게 하셨느냐고 하면서, 그 돈이 있었다면  어머니가 그 고생을 하지 않고도 우리 둘이 넉넉히 공부할 수 있었을 텐데 왜 사서 고생을 하셨느냐고 하자, 어머니가 두 아들에게 말했다고 합니다. 만약 그 많은 돈이 있었는데도 너희들이 그렇게 열심히 공부하여 이렇게 훌륭하게 될 수 있었다고 생각하느냐? 나는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도 그 돈으로 고생을 면하고 싶었지만 너희들을 망치게 될까 해서 그렇게 한 것이다 라고 하였답니다.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금화가 가득 들어 있는 항아리보다 귀한 지혜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지혜를 주실 때 여러 경로를 통해 지혜를 주십니다. 여기 두 지혜가 대조되어 나타납니다. 하나는 세상 지혜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하나님의 지혜는 곧 그리스도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라고 합니다. 일반적으로 지혜라고 하면 사물에 대한 판단 능력과 미래를 예측하는 지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학생 때는 지혜보다 지식이 돋보입니다. 사회에서도 때로는 지식이 지혜보다 돋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일평생을 함께 살 사람이라면 지식이 깊은 사람보다 지혜가 많은 사람을 택해야 합니다. 지식은 공부를 많이 하면 누구나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혜는 공부를 많이 한다고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공부를 많이 하여 지혜를 얻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지혜는 하나님께서 주십니다. 지혜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사입니다. 우리가 얻는 수많은 지식과 지혜가 있을지라도 구원의 지혜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없는 사람은 결국 무가치한 지혜를 가진 사람일뿐입니다. 우리의 삶을 영생으로 이끄시는 그리스도를 얻은 사람은 모든 것을 다 얻은 사람이 될 것입니다.

약 3:15~16을 읽어 보라. 야고보는 세상의 지혜를 어떻게 묘사했는가? 세상에서 심지어 교회에서 드러나는 이런 지혜를 바라보는 일반적인 시선은 어떤 것인가?
우리가 저절로 얻는 지혜는 ‘세속적’이며 심지어 ‘사악’하고 ‘악마적’이며 성령과 무관하다. 오래전에 솔로몬도 사망의 길이지만 바르게 보이는 길에 대해 말했다(잠 14:12, 16:25). 이런 지혜는 뿌리까지 파괴적이다. 시기심이 가득한 이기적인 야망이 자라나고 드러나면, 그 결과는 고린도교회의 상황과 비슷하게 무질서, 불화가 될 것이다(고후 12:20).
약 3:17~18, 요 3:3~7, 골 3:1~2을 읽어 보라. 이 성경 말씀은 ‘하늘의’ 지혜에 대해 우리에게 어떤 사실을 말하고 있는가?
야고보는 직접적으로 성령을 언급하지 않지만, 중생의 개념은 분명하게 제시한다. 그 대신 사도는 복음의 기별을 들을 때 마음에 파종되는 말씀에 대해 언급하셨던 예수님의 비유를 기초로 삼아 씨를 뿌리고 열매를 맺는 농경 사회의 상징을 선호했던 것으로 보인다(마 13:3~9, 18~23 참고). 하늘의 지혜는 긍휼뿐 아니라 선한 열매로 가득하다. 앞서 보았듯이 야고보서가 믿음의 열매로서 순종과 선행의 중요성을 강조했지만 긍휼이 심판을 이긴다(약 2:13). 요컨대, 진정으로 지혜로운 사람들은 예수님처럼 온유하고 겸손할 뿐 아니라 평화를 추구하고, 친절하며, 자비롭고, 용서하며, 기꺼이 다른 사람의 잘못을 간과하되 그들을 비판하거나 정죄하지 않는다.

교훈 : 세상의 지혜는 마귀와 같이 이기적이며 파괴적이지만 하늘의 지혜는 예수님과 같이 온유하고 겸손하며 성령의 선한 열매로 가득하다.

부가적용)
바울은 하나님의 지혜에 대하여 이 세상의 지혜와 다르다고 했습니다. 이 세상의 지혜가 아니란 말씀은 인간들이 본래 소유하고 있는 천부적인 인간 본능으로서의 지혜이거나 학문을 배우거나 터득해서 얻을 수 있는 그런 지혜가 아니란 뜻입니다. 이 세상의 지혜로는 깨들을 수도 없고 배울 수도 없는 지혜인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지혜는 이 세상의 없어질 관원의 지혜도 아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관원이란 이스라엘의 최고 의결기관인 산해드린 공회를 말합니다. 이스라엘의 최고 지성인이요 석학들이요 종교계의 거물급 인사들이 모여서 제반사를 의논하고 결의하는 기관입니다. 니고데모도 이 기관의 의원이었습니다. 이들의 지혜는 이 세상의 없어질 지혜인 것입니다. 그들은 결국 예수님의 재판에서 사형 판결을 내림으로 스스로 정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 바울은 고전 2:7절에서 '오직 비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라고 했습니다. 비밀한 가운데 있다는 말은 세상에는 숨겨져 있었던 지혜란 뜻입니다. 하나님의 지혜는 세상에 알려진바 없습니다. 감춰져 있었습니다. 바로 감추어진 지혜는 그리스도이십니다. “골2:2 이는 저희로 마음에 위안을 받고 사랑 안에서 연합하여 원만한 이해의 모든 부요에 이르러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려 함이라 골2:3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취어 있느니라”

나의 삶 속으로

| 묵상 |
그대가 바라는 결실은 무엇이며 그것을 얻기 위한 지혜란 어떤 것입니까?
세상도 더 많은 생산과 매출과 결과를 이끌어낼 수 있는 방법을 찾습니다. ‘리더십’ 분야는 그러한 성공을 얻기 위해서는 단순한 공정과 조직, 체계 이상의 ‘지혜’가 필요함을 말해줍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약속된 하늘의 지혜는 그것보다 훨씬 가치 있는 결실을 보장합니다.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견과 거짓이 없나니 화평하게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약 3:17~18).

| 적용 |
그대가 “위로부터 난 지혜”를 통해 거두기를 원하는 결실은 구체적으로 무엇입니까?

영감의 교훈

기도
하나님, 세상에서 성공하려고 지혜를 좇았던 저의 짧은 안목을 불쌍하게 여기시옵소서. 이제는 제게 더 소중한 영적 결실을 바라며 “위로부터 난 지혜”를 구합니다. 제 삶에 성결, 화평, 관용, 양순, 긍휼의 열매가 있게 하옵소서.

셋째 날(화) 갈등과 다툼의 원인
11월 18일

“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부터 다툼이 어디로부터 나느냐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부터 나는 것이 아니냐”(약 4:1).

교사강해 3)
야고보가 참으로 중요하고 현실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인간은 투쟁하는 존재이고 인류의 역사는 싸움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칼 마르크스는 인생을 생존경쟁으로 또는 적자생존으로 이해하였습니다. 상당히 일리가 있는 주장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먹기 위해 싸우고, 더 가지려고 싸우고, 빼앗으려고 싸우고, 권력과 명예를 얻으려고 싸웁니다. 계급에 대한 투쟁, 가진 자와 못가진 자의 싸움... 사실 야고보도 결국에는 이 같은 인간의 분쟁과 싸움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는 셈입니다. 약 2장 1-9절에서는 계급 간의 분쟁에 대하여 말씀했고, 약 5장 1-6절에는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다툼에 대하여 말씀합니다. 약 1장 19-20절에서는 자기와의 싸움에 대하여, 약 4장 1-12절에는 교회 안에서 성도들 간의 싸움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영국의 철학자 토마스 홉스는 인간의 역사를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라고 하였습니다. 모든 인간이 공유하는 일반적인 성향 하나가 있는데 그것은 무모하고도 줄기차게 힘을 추구하는 욕망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욕망은 죽어야 비로소 끝이 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런 상태에서 인간이 안전하기 위해서는 절대 권력의 강력한 지배체제가 필요하다고 주장했습니다. 구약성경 욥기에 나오는 죽지 않고 영원히 산다는 거대한 동물 리바이어던(Leviathan)에 국가를 비유하였습니다. 홉스는 리바이어던 비유에서 인간의 악함 주장하며 ‘자연 상태에서 인간은 인간에 대하여 늑대이며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상태라고 하였습니다. 인도의 철학자는 인간의 마음속에 검은 개와 흰 개가 있어서 서로 싸우는데 검은 개가 이기면 육신이 좋아하고 흰 개가 이기면 영혼이 좋아한다고 하였습니다. 희랍의 철학자 플라톤은 영혼과 육체가 서로 싸운다고 하였습니다. 영혼은 고귀하고 육체는 악하다고 하였습니다. 인간의 악함과 그로부터 나오는 투쟁과 싸움의 문제를 사람들은 자기 나름대로 이해를 했던 것입니다. 야고보가 이 문제에 대해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부터 다툼이 어디로부터 나느냐?” 이 싸움은 흰 개와 검은 개의 싸움도 아니고 영혼과 육체의 싸움도 아닙니다. 야고보는 질문을 던지면서 그 대답을 하고 있습니다.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부터 나는 것이 아니냐?” 우리가 싸우는 원인은 정욕 즉 욕심 때문이라고 합니다. 링컨 대통령이 산책을 하는데 귀여운 두 어린아이가 재미있게 놀고 있어서 호두 세 개를 주었답니다. 그랬더니 잘 놀던 두 아이가 싸우기 시작하였습니다. 서로 호두 두 개를 가지려고 싸웁니다. 사람은 둘인데 호두는 세 개니까 싸우는 겁니다. 그 때 대통령 보좌관이 대통령을 찾아왔다가 두 아이가 싸우는 것을 보고는 ‘각하, 저 아이들이 왜 싸웁니까?’라고 물어보았습니다. 그러자 링컨이 ‘저 이이들은 지금 국제 문제로 싸우고 있다네.’라고 하였답니다. 복잡하고 어려운 국제 분쟁의 요인도 결국은 더 가지려고 하는 싸움입니다.  싸우는 이유가 어떤 것이든 결국은 욕심입니다. 어떤 두 사람이 버스 안에서 심하게 다투고 있었습니다. 좁은 공간에서 다른 승객들을 아랑곳하지 않고 소리를 높이고 있었던 것입니다. 함께 타고 있던 다른 승객들이 얼마나 불편이 컸겠습니까? 어느 중년의 승객이 참다못해 다음 정거장에 버스가 도착하자 버스에서 내렸습니다. 버스에서 내리던 승객은 버스 문 앞에서 뒤를 돌아보더니 다투던 사람들에게 소리를 쳤습니다.“여기가 교회인줄 알아?” 교회가 세상 사람들에게 다툼의 장소로 인식된 것은 슬픈 일입니다. 세상에서의 큰 다툼은 작게 인식되지만 교회에서의 작은 다툼은 세상에서 큰 다툼으로 인식됩니다. 교회는 작은 다툼이라도 일어나지 않게 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이는 성경이 권하는 명령이기도 합니다. 교회는 다툼이 있는 곳에 화평이 되어야 합니다.

약 4:1과 갈 5:17을 비교하며 읽어 보라. 두 성경절은 기본적으로 어떤 갈등에 대해 설명하는가?
야고보서 4장 1절은 내부의 심각한 투쟁으로 말미암아 산산이 부서진 신자들을 묘사한다. 교회에서 겉으로 드러난 다툼에는 쾌락의 탐닉(이 그리스 원어에서 쾌락주의라는 의미의 영어 ‘hedonism’이 유래함)이라는 내적 원인이 있다. 바울이 은유적으로 ‘육체’로 일컬었던 이런 악한 욕망들은 더 상위의 영적 동기와 적극적으로 투쟁을 벌인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위로부터 난 지혜”(약 3:17)의 지배를 받지 않으면 교회에 벌어지는 (그래서 신자들 사이에 영적 상처의 원인이 되는) 끈질긴 투쟁에 연루된다.
약 4:2~3을 읽어 보라. 어떤 악한 욕망이 언급되었는가? 그것들은 어떻게 교회에 영향을 미쳤는가?
이 성경절은 직접적으로 십계명을 언급하는 내용을 포함한다. “너희는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여 살인하며 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하므로…”(약 4:2). 질투, 탐심, 욕망 등 반복적으로 언급되는 문제는 예수님이 산상보훈에서 말씀하셨던 것과 비슷한 관점을 반영한다. 예수님은 산상보훈에서 외적인 행위보다 내적 동기를 강조하셨다. 그러므로 여기서 살인에 대한 언급은 넓은 의미에서 분노를 포함하는 뜻일 것이다. 초기 교회에는 서로를 죽이는 신자는 없었을 것이다. 물론 우리가 사도행전에서 보았듯이 야고보가 있었던 예루살렘에서는 종종 배신이 신자들의 체포, 투옥, 처형으로 이어질 수 있었다.

교훈 : 신자들이 하늘에 속한 지혜의 지배를 받지 않으면 교회는 각자의 욕망 때문에 분열과 갈등을 겪을 수밖에 없다.

부가적용)
형제교회라는 교단이 있습니다. 이 교회에서는 성찬식 대신 세족식을 합니다. 세족식은 예수님이 제자의 발을 씻겨주신 것처럼 성직자가 성도의 발을 씻어주는 예식입니다. 어느 형제교회 교단의 세족식에서 목사님이 습관적으로 교인의 왼발을 먼저 씻었습니다. 서로 마주앉아 있기 때문에 목사님이 오른쪽을 잡으면 교인의 왼발이었던 것입니다. 세족식이 끝난 다음 그 교회의 선임 집사님이 용기를 내어 목사님께 말했습니다. "목사님, 왜 왼발을 먼저 씻습니까? 오른발을 먼저 씻으면 좋지 않겠습니까?" 성경에도 없는 사실을 가지고 목사님께 따지는 것을 목사님은 용납하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집사님은 ‘다음 세족식 때는 설마 오른발을 먼저 씻어주겠지’ 하는 기대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다음 세족식에도 목사님은 왼발을 먼저 씻었습니다. 화가 난 집사님은 교인을 선동하여 교회를 박차고 나갔습니다. 그들은 새로 교회를 세우고 교회 이름을 ‘오른발 교회’라고 했습니다. 이 교회는 지금도 미국에 있습니다. 서로를 배려하지 않는 닫힌 마음은 작은 차이를 큰 분쟁으로 만듭니다. 그래서 성경은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빌 2:3)라고 권합니다.

나의 삶 속으로

| 묵상 |
교회에서 벌어지는 갈등의 원인은 대부분 무엇입니까?
교회는 경쟁과 투쟁, 권력 다툼이 끊임없는 세상과 분명하게 구별되어야 합니다. 교회는 오히려 섬김과 봉사, 협력의 가치가 지배해야 합니다. 그러나 자신을 드러내고, 자신의 의견을 주장하고, 지위를 높이려는 욕망이 지배적이라면 교회와 세상은 다를 바가 없습니다. 만약에 그런 욕망이 제거된 교회가 있다면 사람들은 교회를 타락한 세상과는 다른 세계로 바라볼 것입니다.

| 적용 |
최근에 교회나 가정, 직장에서 그대가 개입되어 있는 갈등이 있었다면 그때 자신이 버려야 했던 욕망은 무엇이었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십시오.

영감의 교훈
잘못된 사랑 - “불안이 일어나는 것은 자기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위로부터 거듭날 때에 예수의 마음, 곧 우리가 구원을 받을 수 있도록 자신을 겸비하게 하도록 이끈 마음과 똑같은 마음이 우리에게 있을 것이다. 그 때에야 우리는 가장 높은 지위를 구하지 않게 될 것이다. 우리는 예수의 발아래 앉아서 그를 배우려 할 것이다”(시대의 소망, 330~331).

기도
아버지, 제 안에 꿈틀거리는 자아가 가정과 교회와 사회생활에서 분란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날마다 ‘나’를 십자가에 못 박고 오직 예수의 마음을 품기 원합니다. 제게 허락하신 가정과 교회에 다툼이 사라지고 하늘의 평화가 충만하게 해 주시옵소서.

넷째 날(수) 세상과 벗됨
11월 19일

“간음한 여인들아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과 원수 됨을 알지 못하느냐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는 것이니라”(약 4:4).

교사강해 4)
간음한 여인이란 말은 헬라어의 파격적인 어법으로 여기서는 문자적으로 간음한 여인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일반적으로 구약에서 사용된 의미로서 하나님께 대한 신실하지 못함을 의미합니다. 구약성경에서 모든 죄와 변절이 간음이라고 말씀했습니다. 바로 이와 같은 의미에서 4절은 하늘의 지혜를 추구하지 않고 이 땅의 지혜대로 사는, 즉 시기와 다툼을 일삼는 사람들을 향해 그것이 바로 간음이라고 말씀합니다. 얼마나 무서운 지적입니까. 우상숭배만이 영적인 간음이 아닙니다. 천국의 가치관으로 살지 않는 것도 간음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면서 약 4:4절은 세상의 지혜로 사는 사람은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시기와 질투 다툼과 싸움이 바로 영적인 간음입니다. 하나님과 원수 되는 것입니다.

약 4:2~4을 읽어 보라. 야고보는 왜 그들의 독자들을 간음한 자라고 부르는가?(렘 3:6~10, 20, 사 54:5, 렘 2:2, 눅 16:13 참고)
야고보는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신부라는 성경적 개념을 암시하며 신자들이 세상의 풍습을 따르며 세속적 태도에 영향을 받는 상태를 영적 간음에 빗대었다. 실제로 그들은 다른 주를 택하고 있었다.
그다음 약 4:5은 이해하기 쉽지 않다. 어떤 이들은 이것을 신약에서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성경절이라고 일컫는다. 원어의 모호함은 번역 성경에 그대로 반영되었다. 어떤 성경은 ‘영’을 ‘성령’으로 간주한다. 어떤 성경은 그것을 인간의 영으로 여긴다. 후자가 문법과 문맥에 가장 적합하다. 그럼에도 그 의미는 여전히 명확하지 않다. 구문법과 전후문맥에 대한 자세한 연구를 기초로 5~6절을 다음과 같이 번역할 수 있다. “아니면 너희는 성경이 시기심에 대하여 헛되게 말한다고 생각하느냐? 그분이 우리 안에 거하게 하신 영은 동경하지만 그분은 더욱 은혜를 주신다. 그래서 그분은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고 하셨다.”
1~4절에서 밝힌 것처럼 원래 악하지 않았지만 죄로 말미암아 뒤틀리고 악한 길에 빠진 인간의 영(마음)은 정욕에 물들었다. 은혜는 우리의 곤경에 대한 유일한 실질적인 해결책이다. 그런데 교만한 자들은 그런 은혜를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입장에 서 있다. 어떤 사람은 우리가 폭포 앞에서 작은 찻잔을 들고 있는 거지가 받는 만큼의 은혜만을 얻는다고 말했다. 오직 겸손하고 온유하며 자신의 절대적인 부족과 의존성을 깨닫는 자만이 가당치 않은 자들에게 부여되는 은혜와 호의에 마음을 연다.

교훈 : 세상의 풍습과 태도를 따르는 것은 영적인 간음이다. 우리의 마음이 세상의 정욕에 쉽게 물들지라도 겸손한 자는 부족을 깨닫고 은혜를 구한다.

부가적용)
“간음한 여인들아”는 특별히 간음한 여인들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하반 절에 “누구든지”라고 하고 있습니다. 즉 여인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상징적인 표현입니다. 간음한 여인들이란 세상을 사랑함으로써 주님과 멀어지고 사람들과 불화하게 된 영적 간음 자들을 가리킵니다. 마 12:39절을 보면 표적을 보여 달라고 하는 사람들을 향하여 “악하고 음란한 세대”라고 하셨습니다. 마 16:4절에서도 그 당시 유대인 사회를“악하고 음란한 세대”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간음이 무어인가에 대해 말씀하심에서도 그것이 상징적인 말씀임을 알 수 있습니다.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과 원수 됨을 알지 못하느냐” 그러니까 간음이란 세상과 벗되는 것을 가리킵니다.

나의 삶 속으로

| 묵상 |
세상을 동경하는 마음은 영적으로 어떤 심각한 영향을 미칩니까?
(왼쪽 페이지에 이어서) 엘렌 G. 화잇은 “우리의 가장 큰 필요는 하나님의 자비를 요청하는 것뿐이다”(시대의 소망, 317)라고 말했다.

| 적용 |
그대가 버려야 하는 세상에 대한 동경심은 무엇입니까?

영감의 교훈

기도
아버지, 세상을 사랑하여 하나님을 멀리했던 걸음을 돌이키려고 합니다. 저의 결심을 받으시고 제게 은혜를 베풀어 주시옵소서. 저는 의지가 약하오니 성령을 보내셔서 저를 인도해 주시옵소서.

다섯째 날(목) 하나님께 복종함
11월 20일

“너희는 하나님께 복종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약 4:7).

교사강해 5)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께 복종하고 마귀를 대적하여 하는데 어떻게 우리가 마귀를 대적할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를 통하여 꼭 알아야 될 것은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마귀의 정사와 권세를 다 벗겨 버렸다는 것입니다. 마귀의 무기가 무엇입니까? 무엇을 가지고 큰소리 합니까? 우리의 죄를 가지고 큰소리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죄를 짓고 버림받았기 때문에 먼저 죄를 지은 마귀는 우리에게 죄를 가지고 죄의 사슬로 묶어 놓으려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죄지었기 때문에 마귀에게 끌려 다니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사단은 우리가 세속에 잡혀있기 때문에 세상의 그 사슬을 잡고 있기 때문에 사단은 우리에게 큰소리하는 것입니다. 또한 마귀의 최후의 무기는 죽음입니다. 육체의 죽음을 가져와서 파멸 당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이 마귀의 모든 무기에 대한 무장을 다 해제해 버리셨습니다. 골 2:14~15에 “우리를 거스르고 불리하게 하는 법조문으로 쓴 증서를 지우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통치자들과 권세들을 무력화하여 드러내어 구경거리로 삼으시고 십자가로 그들을 이기셨느니라.” 십자가로 율법도 패해 버리시고 마귀의 통치자, 마귀 권세자들을 무력화하여 구경거리로 삼으시고 십자가로 이기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구주로 모신다는 것은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서 구주로 모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를 끌어안고 우리 옛사람을 청산해 버리고 십자가에서 새사람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여러분이 태어난 자리는 십자가인 것입니다. 우리 영혼의 고향이 어디입니까? 갈보리 산 십자가인 것입니다. 십자가상에서 옛사람이 청산되고 마귀의 종된 우리가 청산되고 거듭나서 보라 새것이 된 장소가 십자가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고향은 십자가인 것입니다. 항상 십자가를 바라보고 내가 그곳에서 옛사람은 죽고 새사람으로 태어난 것을 생각하고 감사하고 찬송해야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 보다 더 위대한 곳이 없으며, 십자가보다 우리에게 더 다정한 곳이 없습니다. 우리는 죄를 짓고 불의하고 추악하고 버림을 받아야 마땅하였는데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우리를 끌어안고 우리를 다 청산해 주시고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죽었다가 부활하신 능력으로 새롭게 거듭나게 해서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이 모든 역사가 십자가에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항상 십자가를 가슴에 품고 항상 십자가를 바라보고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님을 예배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마귀를 대적하여 이길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여기서 명령의 순서에 주목하라. 만약 우리가 자신의 힘으로 마귀를 대적하려고 한다면 우리에게 어떤 성공의 기회가 있을까? 사도행전을 보면 일곱 명의 유대인 퇴마사가 주술의 일종으로 예수님과 바울의 이름을 사용하여 귀신들린 사람에게서 귀신을 내쫓으려고 했지만 귀신들린 사람이 덮치자 그들은 옷을 벗고 피를 흘리며 달아난다(행 19:13~16). 결국 우리는 마귀를 대적하기 위해 먼저 하나님과 그분의 뜻에 복종해야 한다. 실제로 그런 단계를 따른다면 우리는 그 과정에서 마귀를 대적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야고보서의 첫 독자들이 하나님께 자신을 굴복시키지 않았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야고보는 공공연한 신자들에게 서신을 보냈다. 따라서 우리는 매일 하나님께 자신을 굴복시키고 시험이 올 때마다 마귀를 대적하는 일에 대해 더 깊이 생각할 필요가 있다.
약 4:8~10을 읽어 보라. 야고보는 무엇을 명령했고, 그것들은 어떻게 서로 관련이 있는가? 또한 그것들은 어떻게 하나님께 굴복하는 문제와 관련이 있는가?
야고보가 약 3:13 이후로 제시했던 모든 기별은 변화를 호소하는 이 말씀에서 정점에 이른다. 우리가 이번 주 공부했던 본문은 하늘의 지혜와 마귀의 지혜 그리고 마귀가 그랬던 것처럼(사 14:12~14 참고) 자기를 높이는 교만한 자들과 하나님께 복종하고 자신을 낮추는 겸손한 자들을 대조한다. 하나님의 언약에 충실하지 못한 잘못도 언급되고(약 4:4), 두 마음을 품은 잘못도 반복된다(약 4:8과 1:8 비교). 따라서 하나님께 복종하라는 부르심은 도덕적 훈계를 초월하여 예수님께서 호소하셨던 것과 같이 죄인들로 하여금 회개하라는 부르심이다(눅 5:32).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회개해야 하는가?

교훈 : 우리는 하나님께 복종하고 그분께 가까이 나아감으로 마귀를 대적한다. 진정한 회개는 자신의 부족을 깨닫고 슬퍼하며 은혜를 구하는 것이다.

부가적용)
어떤 이야기 속에 이렇게 지어진 이야기가 있다. A 지구에서 성업중이던 악마가 활동 영역을 확장하기 위해 B 지구로 옮기면서 평소 사용하던 갖가지 소장품과 장비들을 경매하기 시작했다. 물론 경매 값은 절반가격이었단다. 여기저기서 몰려든 사람들이 신기한 표정으로 악마의 도구들을 구경하기 시작했고 가장 높은 가격이 붙여져 있는 도구 앞에 걸음을 멈추곤 했다. 바로 그 도구는 ‘절망’이라는 것이었다.누군가가 물었다. “이것은 왜 이렇게 가격이 비싼가” 그러자 악마는 “이유는 간단하다. 나는 이 절망이라는 도구로 수를 셀 수 없는 사람들을 넘어뜨렸고 온갖 해악을 끼쳤으며 삶을 포기하게 만들었다. 이 도구야말로 내가 가장 아끼고 애용하던 것이기 때문이다”고 대답했단다.절망, 그것은 키에르케고르의 말을 빌리면 죽음에 이르는 병이다. 하나님은 희망을 만들고 악마는 절망을 만든다. 절망이 있는 곳에는 기대도 생명도 영원도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 시대를 덮고 있는 절망의 안개를 믿음과 소망의 빛으로 걷어내어야 한다. 우리가 마귀를 대적하여 이길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분을 우리의 마음에 모시고 그분이 내 안에 살도록 하는 것뿐이다.

나의 삶 속으로

| 묵상 |
왜 우리는 자신에 대해 슬퍼하며 애통해야 합니까?
(왼쪽 페이지에 이어서) 야고보는 시 24:3~6을 기초로 하는 단계를 제시한다. (1)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하시리라 (2) 손을 깨끗이 하고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즉 행동뿐 아니라 마음까지) (3) 자신의 부족에 대하여 슬퍼하며, 애통하며, 울고 자신의 필요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것임을 다시 깨달으라.

| 적용 |
그대는 지금 무엇을 멀리하고 무엇을 가까이 하기로 결심합니까?

영감의 교훈

기도
아버지, 눈물이 사라진 메마른 저의 심령을 적셔 주옵소서. 저의 실상을 깨닫고 목마름과 배고픔을 느끼게 해 주옵소서. 제 삶에 정결함을 구합니다. 더러운 영을 멀리하고 성결의 영을 품게 해 주시옵소서. 복종하는 마음으로 아버지 앞에 무릎 꿇습니다.

여섯째 날(금) 더 깊은 연구를 위해
11월 21일

“세상의 표준에 도달하기 위하여 애씀으로써 근심의 짐에 눌려 상심하는 자들이 많이 있다. 그들은 세상을 섬기기로 택하였고 세상의 괴로움을 받아들였으며 그 관습을 채택하였다. 이리하여 그들의 품성은 훼손을 당하고 생애는 곤고하게 된다. 그들은 야망을 만족시키고 세속적인 욕망을 만족시키기 위하여 양심을 상하게 하여 가책의 짐을 얹어 짊어진다. 끊임없는 근심은 생명력을 약화시킨다. 우리 주께서는 그들이 이 속박의 멍에를 벗기를 원하신다. 예수께서는 당신의 멍에를 받으라고 그들을 초청하신다.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고 그는 말씀하신다. 예수께서는 저들에게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명령하신다. 그리하면 이 세상에서 그들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더하시겠다고 허락하셨다”(시대의 소망, 330).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➊ 월요일 소지에서 나눈 두 종류의 지혜에 대해 더 깊이 생각해 보십시오. 각각의 지혜와 관련 있는 사고의 목록을 만드십시오. 지난주에 어떤 중요한 결정을 내리거나 조치를 취했던 때가 있었다면 그때 어떤 종류의 지혜가 사용되었습니까?

➋ 일요일 소지에서 보았듯이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율법을 준수하면 주변 백성들이 그들을 지혜와 총명이 있는 백성으로 존경할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오히려 교만해졌습니다. 물론 이것은 겸손으로 이끄는 하늘의 지혜와 정반대의 태도입니다. 무엇이 문제였을까요? 그들의 실수를 피하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성소 봉사에 대한 바른 이해는 어떻게 교만을 피하는 최고의 방법이 될 수 있을까요? 오늘날 십자가는 어떻게 교만을 피하는 궁극적인 대비책이 될 수 있습니까?

➌ 위의 엘렌 G. 화잇의 인용문을 읽어 보십시오. 우리는 얼마나 자주 세상의 기준대로 살려고 노력합니까? 그런 기준은 언제나 잘못일 수밖에 없습니까? 우리는 세상의 기준으로 볼 때는 모든 것을 소유한 것처럼 보이나 삶은 만신창이가 된 사람들을 자주 봅니다. 이것은 세상이 제공하는 것들이 실제로는 얼마나 기만적인지 말해줍니다. 그렇다면 세상의 거짓 약속에 쉽게 사로잡히는 청년들이 이런 덫에 걸리지 않도록 돕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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