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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과 사랑과 율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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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조춘호 작성일14-10-26 05:29 조회4,02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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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과 사랑과 율법

11월 1일 안식일
일몰:오후 5시 34분

기억절 :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약 2:13).

도입)
키에르케고르의 글입니다. 독실한 그리스도인인 한 귀부인이 추운 겨울날 마부를 데리고 극장에 갔습니다. 그녀는 마부를 바깥에 세워놓고 극장에 들어가 연극을 봅니다. 연극의 주인공이 불쌍한 사람들을 외면하자 그녀는 온갖 욕설을 퍼부으며 주인공에게 푸대접 받는 약한 사람들을 불쌍하게 여깁니다. 그런데 그녀가 그렇게 울고 웃는 순간, 밖에서는 자신을 태우고 온 마부가 추위에 온몸이 얼어붙고 있습니다. 이 글을 통하여 우리는 인간의 마음과 삶이 얼마나 동떨어질 수 있는지 잘 알 수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양심과 긍휼은 미디어를 통해서만 발휘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우리의 머리는 옳고 그른 것을 알지만 막상 어떠한 상황이 우리 삶에 펼쳐지면 옳은 대로 행동하기보다는 원하는 대로 행동한 뒤 자기 합리화를 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한 다리 건너 듣는 소식에는 민감하지만, 내 자신의 삶 속에 펼쳐지는 모순된 상황에는 무감각하며 무덤덤합니다. 성경에서는 긍휼을 행하라고 단호히 말합니다. 긍휼한 마음은 순간적으로 안쓰러워하고 지나치는 일회적인 감정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진정한 긍휼의 의미는 내가 가진 것을 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한 영혼을 끝까지 살리고자 하는 뜨거운 눈물과 의지적 실천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이웃을 향한 긍휼을 몸소 베풀 때에 우리 또한 아버지로부터 긍휼함을 얻고 그에 따른 상급을 자랑할 만큼 받을 것입니다.

연구 범위 : 약 2:1~13, 막 2:16, 레 19:17~18, 롬 13:8~10, 요 12:48.

처음에는 제사장이, 그다음에는 레위인이 여리고에서 예루살렘으로 가다가 길가에 쓰러져서 거의 죽어가는 한 남자를 보았다. 비록 그들의 종교적 의무가 방금 끝났다 할지라도 그 둘 중에 아무도 그들의 의무를 부상당한 사람에 대한 책임과 연결시키지 못한 채 그곳을 지나쳐 버렸다. 결국 이방인과 다름없는 한 사마리아 사람이 나타나 그 사람을 가엾이 여겨서 상처를 감싸주고, 그가 회복될 때까지 여관에 머물 수 있도록 비용을 지불하였다. 그리고 그 사람에게 더 필요한 것은 무엇이든지 값을 지불하겠다고 여관 주인에게 약속했다(눅 10:30~37).
예수님은 영생에 대하여 묻는 한 법관의 질문에 답하는 과정에서 이 이야기를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그 법관에게 “더 열심히 해라!”, “더 많이 해라!”라고 말씀하시기보다 사랑을 실천하는 한 장면을 묘사하셨다. 즉 우리는 잠재적으로 위험하거나 내키지 않는 상황에서도 사랑해야 하고, 우리가 좋아하지 않는 자들도 사랑해야 한다.
비록 그것이 쉽지 않고 우리의 본성을 거스른다 할지라도 참된 사랑을 실천하는 것은 상당한 위험 부담을 안고 있으며 교회의 내외에서 사람들을 분리시켜 놓은 장벽들을 허물도록 요구한다. 이번 주에는 이런 중대한 진리에 대하여 야고보서의 가르침을 배우려고 한다.

*안교반과 소그룹을 일원화시키면 가장 좋습니다.

안교 활동반과 교과 토의

※ 학습 목표

➊ 깨닫기 : 그리스도의 법이 무엇이며 어떻게 우리의 삶에 적용해야 하는지 깨닫는다.
➋ 느끼기 : 그리스도의 대사로서 그분의 지혜와 인도가 필요함을 느낀다.
➌ 행하기 : 예수님의 도움을 받아 우리도 예수님처럼 자아가 아닌 타인에 대한 사랑과 섬김에 관심을 가지기로 결심한다.

Part 1.
1. 인사 안교 반장 또는 소그룹 리더 서로 인사를 나누고 손님을 환영해 줍니다.
2. 출석과 공부를 확인하고 안교헌금을 걷습니다.
3. 결석자와 구도자에 대한 보고를 듣고 방문 계획을 세웁니다.

Part 2. 나눔 안교 교사 또는 소그룹 리더(A나 B 중 하나를 선택하십시오.)

A. ❶ 돌아가면서 교회에 없어야 할 것에 대해 말해 봅시다.
❷ 차별은 하나님이 바라시는 교회의 이상과 얼마나 거리가 있습니까?
❸ 어떻게 하면 우리 교회가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최고의 법을 지킬 수 있을까요?
❹ 교회는 사회 계층 간의 격차를 해소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까?

B. ❶ 그대가 안식일 예배 설교자인데 교회 가는 길에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봤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❷ 율법에 대하여 ‘자기중심의 순종’과 ‘관계중심의 섬김’에는 어떤 차이점이 있습니까?
❸ ‘긍휼’은 우리의 구원과 이타적인 섬김의 삶에 얼마나 중요한 영향을 미칩니까?
❹ 비록 작은 일이라도 각자가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를 나타낼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결론 : 사랑과 율법의 개념을 이해할 때에 심판과 자비가 조화를 이룹니다. 사랑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일을 하도록 자극합니다. 의롭게 될 자들은 그분의 사랑의 율법을 행하는 자들입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삶 속에서 그분의 사랑과 자비를 세상에 나타내는 그분의 대사로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Part 3. 실천 안교 반장 또는 소그룹(예비) 리더
❶ 분반한 상태에서 서로의 느낌을 나눕니다.
❷ 봉사한 교사(리더)와 반장(예비 리더)을 격려합니다.
❸ 우리 소그룹 또는 안교반의 번식을 위해 기도합니다.
첫째 날(일) 금가락지를 낀 사람
10월 26일

“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너희가 가졌으니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말라”(약 2:1).

교사강해 1)
초대교회 성도들의 대부분은 가난했고 노예나 과부나 고아나 여인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다가 부유한 옷차림을 한 사람이 나타나면 그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 요란을 떨었습니다. 물론 그들도 인간이기에 가난한 사람보다 부유하고 사회적으로 지위가 높은 사람에게 호감이 더 가는 것은 어쩔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면 그들이 어떻게 사람을 차별대우한지 아십니까? 손가락에 금가락지를 낀 사람이 오면 허리를 굽히며 ‘오서 오세요’ 하며 제일 좋은 상석에 앉혔습니다. 반면에 허름한 옷을 입은 사람이 들어오면 거들떠보지 않았습니다. 아니면 ‘저기 뒤쪽에 가서 서 있어요’ 하거나, 아니면 내 발등상에 앉으라며 푸대접했습니다. ‘발등상’은 의자의 발걸이를 말합니다. 당시 손에 금가락지를 끼었다는 것은 단지 부의 상징만이 아니라 지위의 상징이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그들은 사람을 차별대우했습니다. 교회 내에서도 이렇게 사람들을 차별대우했으니 일반 사회에서는 어떠했겠습니까? 돈이 많이 있는 사람, 옷을 잘 입고 다니는 사람, 지위가 있는 사람들은 대우받고, 돈 없고 백 없는 사람들은 인간 대접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을 벌고, 신분 상승을 위해 물불가리지 않았으며, 할 수만 있으면 비싼 옷을 사 입고, 할 수만 있으면 큰 마차를 타고, 할 수만 있으면 넓은 집에서 살고자 했습니다. 우리나라는 석유 한 방울 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대형 고급 승용차가 거리를 누비고 다닙니다. 이는 외모로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작은 차를 타고 다니면 사람들이 아저씨, 아주머니라 부르고, 큰 차를 타고 다니면 사장님, 사모님이라 부르기 때문에 사자 소리를 듣고 싶어 큰 차를 타고 다닌다는 말이 있습니다. 독일이나 네덜란드를 가보면 거의가 작은 차들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외모로 사람들을 취하기 때문에 필요 이상의 넓은 아파트에서 삽니다. 외모를 보고 취하기 때문에 허영에 들뜬 여인들이 몇 천 만 원짜리 루이뷔똥 가방을 들고 다닙니다. 진품이 비싸서 갖고 다닐 수 없으면 짝퉁이라도 들고 다닙니다. 그래서 우리나라가 짝퉁의 천국이라는 소리를 듣기도 합니다.

약 2:1~4을 읽어 보라. 이는 다른 것들과 대비를 이루는 가르침이다. 한 사람은 부유하고 멋진 옷을 입은 중요한 인물로 보이는 반면 다른 사람은 가난하고 누추한 옷에 별 볼 일 없는 인물로 보인다. 한 사람은 극진한 환영을 받고 다른 사람은 업신여김을 받는다. 한 사람에게는 편하고 높은 자리에 앉으라 하고, 다른 사람은 어디에 서 있거나 바닥에 앉으라고 한다.
상황이 그리 아름답게 보이지 않는 이유는 그것이 예배 시간에 벌어지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2절에 나오는 ‘회당’이라는 말은 그리스어로 ‘쉬나고게’이다. 이 말은 대부분 일반 가정에서 행해진 유대인 기독교도 안식일 예배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행 18:7~8, 참고).
1세기 그리스·로마 사회에서 한 사람의 공적 이미지와 지위는 매우 중요했다. 부와 학식, 정치적 영향력을 가진 사람들은 자신의 명성을 높이고 개인적인 이득을 얻기 위해 그러한 유·무형의 자산을 사용하기 마련이었다. 대중적으로 또는 종교적 행사에서 큰 선물을 받은 사람은 어떤 방식으로든지 선물의 수여자에게 은혜를 갚아야 했다. 총애는 충성으로 관용은 대중의 인정으로 보답을 받았다.
그래서 기독교 예배에 참석한 소수의 상류층은 특별한 대접을 기대했다. 그런 기대를 무시했다가는 교회에 불명예를 가져올 수 있었다. ‘정치적으로’ 옳지 않거나 사회적 가치를 거부하는 것은 공격의 빌미를 사거나 분열의 원인을 제공하였다.
막 2:16과 눅 11:43을 읽어 보라. 여기에 관련되어 있는 사회적 기대는 무엇인가? 그것들은 복음의 원칙과 어떻게 상충하는가?
부하거나 가난한 것이 죄는 아니지만, 나이와 재물, 교육과 심지어 종교적인 신념이 다른 사람을 다루는 태도는 기독교 신앙의 한 척도이다.

교훈 : 사회에서는 부와 학식, 권력에 따른 계층이 존재하지만 교회에서는 사회적 계급에 따른 차별이 있어서는 안 된다.

부가적용)
만일 교회 안에서 외모를 보고 취하는 생각을 버리지 않을 때 돈 많은 사장이나 사장 부인이 교회에 등록하면 월척을 낚았다고 좋아하는 현상이 생기게 될 것입니다. 사장이나 사장 부인이 월척이면 일반 사원이나 사원 부인은 피라미입니까? 성경은 차별대우를 하지 말도록 곳곳에서 말씀하십니다. “외모로 판단하지 말고 공의롭게 판단하라 하시니라”(요 7:24). “베드로가 입을 열어 말하되 내가 참으로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취하지 보지 아니하시고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다”(행10: 34-36). “이는 하나님께서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아니하심이라”(롬 2:11). “상전들아 너희도 그들에게 이와 같이 하고 위협을 그치라 이는 그들과 너희의 상전이 하늘에 계시고 그에게는 사람을 외모로 취하는 일이 없는 줄 너희가 앎이라”(엡 6:9). “불의를 행하는 자는 불의의 보응을 받으리니 주는 사람을 외모로 취하심이 없느니라”(골3:25).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판단하시는 이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 너희가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벧전 1:17). 그런데도 사람들은 겉모습을 보고 차별합니다. 사무엘상 16장을 보면 사무엘이 다윗에게 기름을 붓는 사건이 나옵니다. 사무엘은 이새의 맏아들 엘리압을 보는 순간 기름을 붓고자 했습니다. 사무엘이 그를 세우고자 한 것은 키도 크고 용모도 빼어났고 흠 잡을 데가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 때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십니다.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의 그 용모와 키를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하시더라”(삼상 16:7). 하나님은 엘리압을 취하지 않고 들에서 양을 치던 이새의 말째인 다윗을 취하여 기름을 부었습니다.  

나의 삶 속으로

| 묵상 |
우리 교회에 ‘차별이 있다’ 또는 ‘없다’고 말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왼쪽 페이지에 이어서) 우리는 사회적 신분이 우리보다 높아 보이는 자들을 더 존중하고 낮아 보이는 자들을 덜 존중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는 관습을 따르기 쉬우나 하나님은 우리가 다른 행동을 하도록 부르셨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롬 12:2 참고).

| 적용 |
만약 차별이 있다면 그런 태도와 분위기를 어떻게 바꿀 수 있을까요?

영감의 교훈

기도
한갓 학력과 재산, 지위로 사람을 다르게 평가하는 우리의 어리석음을 용서해 주시옵소서. 오직 ‘그리스도께서 이 사람을 위해서 죽으셨다.’는 생각으로 모든 사람을 존중하고 평등하게 대할 수 있는 마음가짐을 주시옵소서.

둘째 날(월) 계급투쟁
10월 27일

“…하나님이 세상에서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상속으로 받게 하지 아니하셨느냐 너희는 도리어 가난한 자를 업신여겼도다 부자는 너희를 억압하며 법정으로 끌고 가지 아니하느냐 그들은 너희에게 대하여 일컫는 바 그 아름다운 이름을 비방하지 아니하느냐”(약 2:5~7).

교사강해 2)
누가복음 21장 1-4절을 보면 부자와 과부가 각기 연보하는 말씀이 나옵니다. 부자들은 지갑에서 잉크 냄새가 나는 수표 한 장을 사람들에게 보라는 듯이 꺼내어 기침을 하며 연보궤에 넣었습니다. 사람들은 부러운 눈초리로 그를 바라보았습니다. 반면에 한 가난한 과부가 두 렙돈을 넣었습니다. 과부는 동전 두 렙돈을 조심조심 넣었지만 넣는 순간 땡그랑 소리가 났습니다. 많은 사람들의 시선이 그녀에게 집중되었습니다. 그녀의 얼굴은 홍당무가 되어 어쩔 줄 몰라 했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이르시되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가난한 과부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눅21:3).” 예수님은 행위보다 중심, 동기를 보시고 양보다 질을 귀히 여기십니다. 예수님은 사람을 평가할 때 현재의 모습을 보고 평가하지 않고 가능성을 보고 취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처음 보실 때 그는 무식한 어부였습니다. 그는 모래알처럼 의지가 약했습니다. 그는 큰 소리를 잘 치는 big mouth이었습니다. 그에게는 반석다운 면이 조금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를 보는 순간 ‘장차 게바라 하리라’ 하셨습니다(요1:42). 사실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던 그 때까지도 계집종 앞에서 예수님을 부인할 만큼 반석다운 내면성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후 변하여 새 사람이 되어 초대교회를 든든히 받치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모든 문서전도자가 아는 것처럼 기꺼이 기독교 서적을 구입하려는 사람은 대개 극빈한 자들이다. 부자가 모여 사는 지역에서는 책을 팔기가 까다롭다. 왜냐하면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자신이 소유한 것에 만족하므로 가난한 사람만큼 하나님에 대한 필요를 느끼지 않기 때문이다. 동일한 현상이 광범위하게 감지된다. 교회는 경제와 사회가 어려움을 겪는 지역 또는 그런 시기에 가장 빨리 성장했다. 그렇다면 큰 문제로 씨름하는 사람들이 모든 면에서 성공했다고 여기는 사람들보다 예수님의 이야기에서 제시된 소망에 더욱 개방적이라는 말인가?
약 2:5~6을 읽어 보라. 여기서 야고보는 앞선 네 절에서 설명한 것을 어떻게 확대하는가?
이 말씀에서 판단해 보건대, 교회에서 부자와 가난한 자들 사이에 심각한 문제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나님은 비록 세상에서는 거부당했지만 믿음은 부유한 가난한 자들을 선택하셨다. 반면 부자들은 그들의 부를 사용해 가난한 이들을 억압하였다. 부자들이 가난한 자들을 착취하는 문제는 당시에 어디에서나 발생하는 현상이었다. 심지어 로마법은 부자 편에서 가난한 자들을 차별하는 법을 성문화했다. “경제적 사리사욕에 따라 행동한다고 여겨졌기에 낮은 계급의 사람들은 높은 계급의 사람들을 고소할 수 없었다. 법은 높은 계급의 범법자보다 유죄 선고를 받은 낮은 계급의 사람에게 더 가혹한 형벌을 부과하였다.” - Craig S. Keener, The IVP Bible Background Commentary: New Testament (Downers Grove, Ill.: InterVarsity Press, 1993), 694.

교훈 : 교회 안에서 예수님을 믿는다고 고백하는 자들이 자신의 부와 권력을 이용해 다른 사람을 억압하거나 그들에게 이득을 취하는 것은 심각한 잘못이다.

부가적용)
요한복음 4장을 보면 우물가에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복음을 전하시는 예수님이 나옵니다. 유대인은 사마리아인과 상종조차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 그것도 부도덕한 여인에게 뜨겁게 내리쬐는 태양 아래서 점심식사도 잊은 채 열심히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이런 예수님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변하여 사마리아 동네로 달려가 예수님을 전했습니다. 예수님은 당시 죄인, 창기와 더불어 3대 죄인 중의 하나인 세리 마태를 제자로 삼으셨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사역에 전혀 도움이 되는 인물이 아닙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를 취하였습니다. 그 후 그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산상수훈을 기록한 성 마태가 되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외모를 보고 차별하지 않으셨습니다. 5절을 보겠습니다.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들을지어다 하나님이 세상에서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상속으로 받게 하지 아니하셨느냐?” 하나님은 가난한 자를 택하십니다. 이는 믿음에 부요한 자가 되도록 함입니다. 고린도전서 1장 26-29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의 삶 속으로

| 묵상 |
오늘날 교회 안에서 가난한 자들은 어떤 소외감을 느낄까요?
(왼쪽 페이지에 이어서) 약 2:7을 읽어 보라. 이런 적절치 못한 행위의 영향에 대해 야고보가 지적한 요점은 무엇인가? 그들의 부적절한 행위는 예수님의 선한 이름에 대한 모독이었다. 나쁜 행위는 그 자체로도 충분히 나쁜데,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이 그런 행위를 했을 때는 문제가 더 심각해진다. 심지어 그들이 교회 안에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자신의 부와 권력을 사용해 다른 이들에게서 이득을 취하고 그 결과 분열과 다툼이 생긴다면 문제는 훨씬 더 심각해진다. 따라서 우리가 지지하는 선한 이름에 맞게 말하고 행동하려면 얼마나 조심해야겠는가?

| 적용 |
교회 안에서 부자와 가난한 이들이 공존하려면 각자 어떤 노력이 필요할까요?

영감의 교훈

기도
아버지, 우리 교회에 심령이 가난한 부자들이 많게 해 주시옵소서. 우리 교회에 믿음이 부요한 가난한 자들도 많게 해 주시옵소서. 우리가 믿음 안에서 하늘의 일을 위해 아름답게 협력하는 형제와 자매가 되게 해 주시옵소서.

셋째 날(화) 우리의 이웃을 사랑하기
10월 28일

“너희가 만일 성경에 기록된 대로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하신 최고의 법을 지키면 잘하는 것이거니와 만일 너희가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면 죄를 짓는 것이니 율법이 너희를 범법자로 정죄하리라”(약 2:8~9).

교사강해 3)
한 때 「뉴스위크」의 설문조사에 다소 놀라운 통계를 보여주었습니다. 채용 책임자들의 57퍼센트는 구직자가 매력이 없으면 능력이 있어도 직장 구하기가 더 어렵다고 했고, 84퍼센트는 그들의 상관이 능력은 있으나 나이가 많은 구직자를 고용하기를 주저할 것이라고 답했습니다. 또 채용 책임자들의 64퍼센트는 회사에서 외모를 기준으로 사람을 뽑을 수 있게 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것들은 모두 용납하기 힘든 편견에 대한 명백한 사례들입니다. 편견은 새로운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것이 초대교회에 스며들어오게 되자 야고보는 정면으로 그것을 다루었습니다. 선지자적인 용기와 목회자의 심정으로 그는 “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너희가 가졌으니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말라”(약 2:1)라고 썼습니다. 야고보는 부자한테는 잘하고 가난한 사람은 무시하는 것을 편견의 예로 들었습니다(2-4절). 그것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편견을 갖지 말아야 한다(1절)는 것에 어긋나는 것이며, 하나님의 은혜를 배반하는 것이요(5-7절), 사랑의 법을 어기는 것이며(8절), 죄를 짓는 행위입니다(9절). 편견을 없애는 방법은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모범을 따르는 것입니다. 우리가 편견이라는 죄와 대항해 싸울 때, 우리는 서로 사랑하고 서로 대하는 모습 속에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사랑을 온전히 나타낼 수 있습니다.

약 2:8~9을 레 19:17~18, 마 5:43~45과 더불어 읽어 보라. 어떤 중요한 기별이 여기에 제시되었는가?
야고보는 하나님의 법을 “최고의 법”이라고 칭했다. 왜냐하면 그것이 “만왕의 왕”(계 19:16)의 법이기 때문이다. 하나님 나라의 법은 산상설교에서 자세하게 제시되었다(마 5~7장). 산상설교의 첫 아홉 절은 이웃을 사랑하는 방법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마 5:3~11).
마 5:43의 말씀은 레 19:18이 당시에 어떻게 이해되었는지를 암시한다. 예를 들면, 바로 앞선 명령에서 레위기는 이웃과 같은 의미의 단어를 사용한다. “형제”를 미워하고 동료 이스라엘 동포에게 악의를 품는 것은 금지되었다(레 19:17~18).
아마도 어떤 이는 이 명령을 이스라엘 사람이 아닌 사람에게는 화를 내거나 그들을 미워해도 좋다는 의미로 해석했던 것 같다. 왜냐하면 레위기에는 그들이 누구인지 구체적으로 언급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이 아닌 자들은 일반적으로 원수로 간주되었다. 최근 우리는 이스라엘 민족으로부터 자신을 분리시켰던 경건한 유대교 쿰란 공동체에서 그러한 태도가 존재했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들은 외국인뿐 아니라 공동체의 가르침을 거부하는 이스라엘 사람을 ‘어둠의 자녀들’ 또는 ‘지옥의 사람들’로 분류하고 미워하도록 교육을 받았다.
“모든 악한 것들 중에 가장 큰 것이 죄이지만, 죄인을 동정하고 도와주는 일이 우리가 할 일이다. 과오를 범하고 수치심과 자신의 어리석음을 느끼는 많은 사람이 있다.… 그들은 잘못과 과오를 바라보다가 마침내 거의 절망 직전까지 내몰린다. 우리는 이런 영혼들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시대의 소망, 504).

교훈 : 우리는 모든 사람을 우리의 이웃과 형제로 여기고 그들을 미워하지 말고 사랑하라고 하신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야 한다.

부가적용)
피혁(皮革)이란 동물들의 가죽(皮)을 그냥 그대로 놔두면 썩어버리기 때문에 썩지 않도록 만든 것(革)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과정을 무두질(다룸가죽)이라고 하는데 일본 말로는 ‘나메시’라 합니다. 우리의 마음도 가죽을 무두질 하듯 우리의 마음을 무두질 할 필요가 있습니다. 성경은 차별을 금지합니다. 지금은 당연하다고 할지 모르지만 그 옛날 성경시대 때 여자에게도 상속권을 인정하였습니다. 고아와 객과 과부와 나그네를 잘 대접하라고 하였으며 심지어는 곡식을 추수 할 때에도 토지가 없는 사람들을 위하여 내 모퉁이 곡식은 추수하지 말라고 하였으면 추수할 때 떨어진 이삭을 깨끗하게 줍지 말라고 하였다. 이웃이 이삭줍기를 해서 먹고 살 수 있도록 섬세한 배려를 한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도 건강한 자가 아니라 병든 자를 위하여 오시고 그렇게 실천 해 주셨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 믿는 사람들끼리 차별하는 일은 절대로 없어야 합니다. 직분을 계급처럼 여겨서 차별한다면 그런 사람은 가죽을 벗겨서 부드럽게 하는 ‘나메시’(무두질)를 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가장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예수 안 믿는 사람들을 보고 혀를 차면서 죄인 취급하고 차별하는 일만큼은 절대로 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차별과 구별은 다르기 때문입니다.

나의 삶 속으로

| 묵상 |
그대는 간혹 어떤 민족에 대해 또는 어떤 개인에 대해 적대감을 품지는 않습니까?
예수님의 생애는 은혜 갚을 줄도 모르는 합당치 않은 자들에게 이타적인 사랑이 무엇인지 보여준 가장 위대한 모본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그런 사랑을 실천할 수 있을까요? 결국 전적인 자아굴복과 죽음이 유일한 해답이 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자신의 무가치함과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쏟으신 은혜와 사랑을 깨닫는다면 세상에 하찮게 여겨도 될 사람은 아무도 없게 될 것입니다. 오직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시고 급기야 우리를 위해 죽으신 예수님의 마음을 가질 때에 우리는 비로소 그분의 모본을 따를 수 있습니다.

| 적용 |
그대가 그 동안 소홀히 여겼던 사람이 있다면 이제 어떤 마음으로 그를 대하겠습니까?

영감의 교훈
모든 사람이 우리의 이웃과 형제 -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면 우리의 도움을 가장 필요로 하는 바로 그 사람들을 될 수 있는 대로 멀리 피하여 다른 길로 지나가 버리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병으로 인한 것이든 죄로 인한 것이든 곤경에 빠진 인간들을 볼 때 이것은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결코 말하지 말 것이다”(시대의 소망, 504).

기도
아직도 알량한 자존심을 완전히 버리지 못하고 마음 한편으로 다른 사람을 무시하고 적개심을 거두지 못한 저를 용서해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모본을 따르는 길이 멀게 보이지만 주의 마음을 품기 간절히 원합니다.

넷째 날(수) 온 율법
10월 29일

교사강해 4)
* 탈무드 이야기입니다. 살란터 랍비는 율법을 철저히 지키는 사람이었습니다. 유월절이 다가오면 유월절 무교병을 굽는 법칙에 따라 무교병을 구워야 합니다. 생수로 반죽해야 하고 이방인들이 보면 부정 타기 때문에 몰래 구워야 합니다. 또 다른 것이 섞이면 안되었습니다. 불은 반드시 나무로 피워야 했습니다. 살란터 랍비의 임무는 제대로 무교병을 굽는지 감독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유월절을 며칠 앞두고 그는 병들어 눕게 되었습니다. 할 수 없이 다른 감독관을 세워야 했습니다. 감독으로 선정된 제자들이 살란터 랍비에게 물었습니다. “랍비님, 감독할 때 가장 주의해야 할 점은 무엇입니까?” 살란터 랍비가 병석에서 말했습니다. “제자들아, 무교병을 굽는 여인들에게 보수가 제대로 지급되는지 감독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다.” 라고 말했습니다. ”유교병을 굽는 일보다 그 일을 행하는 사람이 더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가난한 여인들을 보호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감독의 할 일이라고 살란터 랍비는 말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랑이 율법입니다. 유월절의 무교병을 제대로 구워내는 것은 참으로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무교병을 굽는 여인들이 보수를 제대로 받지 못해 저들이 혹시나 굶주리는 않는지 사람을 배려하고 사람을 살리는 것을 더 크게 보살펴야 할 일, 더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율법이 그 사람을 죽이고 그 사람을 교회에서 떠나게 하면 그 율법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안식일은 소극적으로 무엇을 하지 않는 것에 집중하는 날이 아니라, 오히려 적극적으로 연약한 사람을 돕고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돌보는 날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주님께서 가르치십니다. 율법의 기준에 맞춰 나와 다른 사람들을 제단하기 전, 먼저 하나님의 사랑을 간구하십시오.   안식일만 지키는 안식일교인이 되지 말고 영혼을 긍휼히 여기고 진정으로 영혼을 사랑하는 교인이 되십시오~! 율법은 사람을 죽일 수 있지만 여러분의 사랑과 자비는 사람을 살릴 수가 있습니다. 고전 13:3에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인생의 삶이 사랑에 기초가 되지 않은 인생은 무용한 삶입니다. 아무런 유익이 없는 삶이 사랑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 자신이 사랑이십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을 배우는 것입니다.  사랑을 통해서만이 우리는 하나님을 닮아갈 수 있습니다. 온 율법은 사랑하라는 말씀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갈 5:14). 갈5:14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 이루었나니 모든 사람을 사랑해야 하지만 특히 하나님의 가족을 사랑해야 합니다. 가장 잘 사는 인생은 사랑하는 삶이다 (The best use of life is love)  사랑이 인생의 최고 목표입니다. 사랑 없는 삶은 무가치합니다

예수님은 율법에서 더 중요한 것이 “정의와 긍휼과 믿음”(마 23:23)이라고 말씀하셨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과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중심으로 돌아간다. 따라서 야고보는 예수님이나 바울의 가르침과 다른 것을 말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법을 어기는 죄는 무엇이든 하나님과 다른 사람과 우리 사이의 관계를 해한다.
따라서 나쁜 짓보다 선행을 더 많이 행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순종이 우리 자신을 중심으로 이루어진다면 그것은 공허한 순종일 뿐이다. 대신 우리는 예수님을 앎으로 관심을 우리 자신에서 하나님께 대한 헌신과 타인에 대한 섬김으로 돌리기 시작한다.
예수님은 율법의 중요성과 함께 그것의 핵심인 사랑을 강조하셨다. 율법의 준수가 하나님과 사람과의 관계에서 비롯되지 않으면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를 범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 간음하지 말라 하신 이가 또한 살인하지 말라 하셨은즉 네가 비록 간음하지 아니하여도 살인하면 율법을 범한 자가 되느니라”(약 2:10~11).
약 2:10~11을 읽어 보라. 표 안에 있는 성경절을 찾아 읽고 각 성경절이 ‘온 율법’과 ‘사랑의 법’ 중에 무엇을 강조하는지 아니면 둘 다 강조하는지 구분하라.
                                온 율법                         사랑의 법
마 5:18~19
마 22:36~40
롬 13:8~10
갈 3:10
갈 5:3
갈 5:14

우리는 율법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이 얼마나 급진적이었는지 가늠하기 어렵다. 당시의 경건한 유대인들의 입장에서는(오늘날 여러 신자들도) 모세의 책에 기록된 모든 율법을 충성스럽게 지키지 않는다면 진정으로 율법을 준수하고 있다고 주장하기 어려웠다. 지켜야 할 조항이 613개에 이르기 때문이다(248개는 긍정적인 법이고, 365개는 부정적인 법이다).
어느 율법이 가장 중요한지 묻는 질문은 아마도 예수님께 덫을 놓으려던 목적이었던 것 같다. 물론 예수님은 율법의 일점일획이 모두 중요하다고 단언하셨지만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가르치셨다. 왜냐하면 그 둘이 다른 모든 율법을 요약하기 때문이다.

부가적용)
종교적인 야심은 늘 비본질적이고도 외적인 것에 대해 전문가가 됩니다. 의식과 예식을 수행한다거나 규칙을 준수할 때에도 예외를 두는 법이 없습니다. 세세한 것에 대해서는 그들을 따를 만한 사람이 없었을 정도로 전문가였던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율법의 목적에 대해서는 무지하였습니다. 율법의 철자하나에까지 까다롭게 굴었지만 정작 그 율법이 담고 있는 하나님의 사랑의 정신에 대해서는 외인이었습니다. 저들은 자신이 처한 상태가 어떠한지에 대해서 자신들을 살펴볼 수 있는 능력이 없었기 때문에 예수님 앞에서 크게 당황하였고, 때로는 전전긍긍하였습니다. 타인에게 얼마나 존경받는가 하는 도덕적이고도 외적인 처신에 대해서는 세련된 자들이었지만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죄인이 바로 설 수 있는가에 대하여는 전혀 문외한이었습니다. 종교인은 자기 편리대로 말씀을 써먹고, 기독교인은 말씀(그리스도)에 쓰임 당합니다. 예수께서는 세리도 용납하셨고,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창녀도 그 자리에서 사함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천국복음을 가지고 종교놀이에 빠졌던 지도자들을 꾸짖는 곳에서는 가장 큰 분노의 음성을 발하셨습니다. 그는 종교인들의 죄악에 대해서는 3년 반이나 물고 늘어 지셨습니다: “화 있을 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화 있을진저 소경된 인도자여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회칠한무덤…”(마23장). 그들은 6백가지가 넘는 율법을 지키는 데는 대단한 노력을 경주했으나 “서로 사랑하라”는 그리스도의 계명 한 가지도 못 지켰습니다(요13:34,35).

나의 삶 속으로

| 묵상 |
그대는 하나님과 이웃과 각각 어떤 관계에 기초하여 율법에 순종합니까?
(왼쪽 페이지에 이어서) 또한 예수님의 가르침은 순종이 주변과 관계없이 이루어질 수 없음을 보여준다. 순종은 언제나 관계적이다. 그렇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 즉 내가 구원받지 못할까봐 십일조를 드리고 있다면 그것은 관계적인 것이 아니다. 반면 내가 하나님이 내게 베푸신 것에 대한 감사의 마음에서 십일조를 드리고 있다면 나의 행위는 하나님과의 관계에 기초한 것이다.
예수님은 율법에서 더 중요한 것은 “정의와 긍휼과 믿음”(마 23:23)이라고 말씀하셨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과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중심으로 돌아간다. 따라서 야고보는 예수님이나 바울의 가르침과 다른 것을 말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법을 어기는 죄는 무엇이든 하나님과 다른 사람과 우리 사이의 관계를 해한다. 따라서 나쁜 짓보다 선행을 더 많이 행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순종이 우리 자신을 중심으로 이루어진다면 그것은 공허한 순종일 뿐이다. 대신 우리는 예수님을 앎으로 관심을 우리 자신에서 하나님께 대한 헌신과 타인에 대한 섬김으로 돌리기 시작한다.


영감의 교훈

기도
주님, 저는 이 가르침이 옳기 때문에 배우며 따릅니다. 그러나 이것을 주신 주님의 사랑을 믿기 때문에 더욱 순종하기를 원합니다. 또 제게 사랑의 마음을 주신 줄 믿기 때문에 더욱 이웃을 사랑하기 원합니다.

다섯째 날(목) 율법에 따라 심판을 받음
10월 30일

“너희는 자유의 율법대로 심판 받을 자처럼 말도 하고 행하기도 하라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약 2:12~13).

교사강해 5)
야고보 장로는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이라는 표현을 하면서 교회가 지켜야 한다고 하였습니다(약 1:25).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이라는 수식어가 붙은 율법이 가리키는 바가 무엇일까요? 만약에 옛 언약의 율법을 가리킨다면 성경 전체적으로 율법에 대한 설명은 모순이 됩니다. 예수님과 바울 사도의 진술과 다릅니다. 반면에 예수님에 의해 완전하게 된 율법을 가리킨다면 모순이 아닙니다. 옛 언약의 백성들에게 주어진 삶의 법칙인 율법과 달리 새 언약의 백성들에게 주어진 삶의 법칙으로 완전하게 된 율법이 있다는 증언이 됩니다. “자유하게 하는”이라는 표현에서 자유는 신약 성경에서 죄 또는 사망과 관련된 단어입니다. 개역 성경에서는 해방이라고 표현되기도 합니다(롬 8:2). 바울 사도가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교회를 해방시킨다고 할 때와 같습니다. 야고보 장로가 이야기하는 율법은 죄와 사망의 법에서 교회를 해방시키는 율법입니다. “온전한”이라는 표현은 예수님에 의해 완전하게 되어야 했던 옛 언약의 율법과 대조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는 새 언약이 드러나자 옛 언약의 율법은 온전하지 못하였다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옛 언약 아래 있던 옛 언약의 백성들에게는 아무런 부족함이 없었지만 새 언약과 비교될 때에는 부족함이 있는 삶의 법칙이었습니다. 온전한 율법은 예수님에 의해 완전하게 된 율법입니다. 그러므로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이란 옛 언약의 율법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새 언약의 율법을 가리킵니다. 새 언약의 율법이라는 표현은 오늘날의 교회에게 너무나 생소합니다. 새 언약과 율법과는 그 어떤 연관 관계도 없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새 언약과 율법이 연결되면 잘못된 것이라는 의식으로 팽배합니다. 생소할 뿐만 아니라 거부되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렇지만 이는 성경의 가르침에 대한 바른 이해와는 동떨어진 것입니다. 성령의 법(롬 8:2)이라고 할 때에 법으로 번역된 헬라어는 노모스입니다. 노모스는 율법, 법, 법칙 등의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노모스를 법으로 번역할 수도 있고 율법으로 번역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로마서에서 노모스는 일관되게 율법으로 번역되고 있기에 성령의 율법으로 번역하는 것이 더 적절합니다. 그리스도의 법(갈 6:2)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와 율법이 연결될 수 없다는 생각으로 인해 법으로 번역하였습니다. 율법으로 번역함이 갈라디아서에서의 노모스 용례에 비추어 더 적절합니다. 갈라디아서에서도 노모스는 율법으로 번역되었습니다. 그리스도에 의해 완전하게 된 율법을 가리킵니다. 곧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 자유의 율법, 성령의 법, 그리스도의 법은 표현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모두 같은 뜻입니다.

약 2:12~13과 요 12:48, 롬 2:12~13, 고후 5:10, 계 20:12~13을 읽어 보라. 이 성경절들은 심판에 대해 무엇을 가르치는가?
선행이든 악행이든 우리가 행한 대로 율법에 따라 심판을 받게 되리라는 가르침만큼 분명한 것도 없다. 그와 함께 성경은 우리가 예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분의 의를 입으리라는 사실을 분명히 한다.
의를 입는 과정은 두 가지 즉, 용서(칭의)와 순종(성화)을 포함한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골 2:6).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침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갈 3:27).
우리가 행한 일뿐 아니라 우리가 행하지 않은 일도 심판을 받게 되리라는 말이 있다. 물론 그것이 사실이지만, 그 의미에 대하여 잘못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이는 어떤 일을 더 많이 행해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그것은 절망과 좌절에 빠지는 길이다.
야고보가 2장 13절 전반부에서 그것을 어떻게 설명하는지 주목하라.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약 2:13). 다시 말하지만, 이것은 행함에 대한 관계적인 정의이다.
만약 이것에 대해 지나치게 생각하면 우리는 심판에 대하여 피해망상에 사로잡혀 절망하며 구원을 포기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라 이는 그의 심판의 시간이 이르렀”(계 14:7)다는 말씀이 뜻하는 바가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끝까지 예수님의 의를 의지해야 한다. 그분의 공로는 심판의 날에 우리의 유일한 소망이다.

교훈 : 우리는 우리의 행위와 삶에 따라 심판을 받는다.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을 믿고 그분의 의를 의지하는 자는 심판을 이긴다.

부가적용)
성령님의 율법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령님을 통하여 새 언약의 교회에게 주어진 새 언약의 율법입니다. 예수님께서 전 인격과 전 삶에서 율법을 완성하시고 그 안에서 이전의 은혜의 방편인 율법과는 다른 차원의 은혜를 드러내십니다. 그것은 은혜 위의 은혜로서 율법의 모든 내용을 포괄하고 율법의 모든 내용이 녹아 있는 것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삶 그리고 그분으로부터 새 언약의 백성들에게 주어지는 예수 그리스도의 율법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을 사랑하신 것과 같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과 같이 서로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율법의 하나님 사랑, 이웃- 자기 몸같이- 사랑이 완전하게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율법은 새 계명 곧 사랑의 율법입니다. 사랑의 율법이란 포괄적인 선언이고 그 안에는 구체적인 내용들이 있습니다. 형제에게 노하지 않고 라가라 하지 않지 않으며 미련한 놈이라고 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성에 대하여 음욕을 품지 않으며 헛맹세를 하지 않는 것입니다. 악한 자를 대적하지 않고 희생하며 원수를 사랑하며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 외에도 신약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교회에게 주어진 명령들은 모두 사랑의 율법의 내용입니다. 성령님의 율법의 내용입니다. 성령님의 율법은 율법을 완전하게 한 것입니다. 성령님의 율법은 의식법을 완전하게 한 것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을 통한 죄 사함과 그분을 말미암아 성령님을 통한 하나님과의 화목 그리고 교제입니다. 시민법을 완전하게 한 것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세상과 다른 원리를 추구함으로 교회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가 아닙니다. 오른뺨을 치는 악한 자에게 왼뺨을 돌려댑니다.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합니다.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면 십리를 동행합니다. 도덕법을 완전하게 한 것으로 인간들이 양심으로 느끼고 있는 수준을 뛰어넘어 하나님을 드러내게 하는 심화된 도덕법입니다. 잘못된 성적 결합을 거부함은 당연하고 이성에 대해 음욕을 품지도 않는 것입니다. 율법과 달리 성령님의 율법은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된 새 언약의 백성들이 죄와 사망의 법 아래로 끌어가려는 자신안의 한 법을 이기는 능력이었습니다. 그것은 은혜 위에 은혜이었습니다. 성령님께서 부어져서 선물로 주어지고 그 분이 자신의 율법을 사용하여 새 언약의 백성을 다스립니다. 순종하면 죄와 사망의 법에서 현재적으로도 해방됩니다. 로마서 7장의 바울 사도의 고백은 거듭나기 이전이 아니라 거듭난 이후입니다. 그리고 8장에서 기록된 선언은 단순히 과거에 이루어진 사실만을 가리키지 않고 현재적으로 열매를 맺는 것을 포함합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죄와 사망의 법으로 끌려가는 자신을 본다면 자신 안에서 역사하시는 성령님과 그분의 율법을 의식하고 그 아래로 나아가면 된다. 나아가야 합니다. 자신을 쳐서 복종하게 하고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스스로에 대하여 죽은 자로서 자신을 성령님께 내어드리는 것입니다. 죄 사함과 성령님의 능력으로 죄와 사망의 법에서 현재적으로 해방을 누리게 됩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십자가에서 주어졌던 죄와 사망의 법에서의 해방을 지속적으로 누리는 것입니다. 야고보 장로가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교회가 지켜야 한다고 말씀한 것도 동일한 맥락입니다. 즉 현재적으로 죄 용서를 얻으며 교회의 정체성을 드러내고 심화된 도덕법 준수로 하나님을 드러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거듭남은 성령님의 율법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역사가 아닙니다. 하늘에서 성령님께서 그 기쁘신 뜻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창세전에 예정하시고 택하신 이들에게 행하시는 역사입니다. 성령님의 율법은 그렇게 거듭나게 하신 성령님께서 그에게 선물로 주어져서 그를 다스리시는 방편입니다. 그 다스림을 받으면 다르게 말하면 성령님의 율법을 준수하면 죄와 사망의 법에서 현재적으로 해방됩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그도 범죄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났음이라”(요일 3:9)라는 요한 사도의 가르침도 동일한 내용입니다.

나의 삶 속으로

| 묵상 |
그대는 심판을 이기고 자랑할 만큼 하나님의 긍휼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있습니까?
(왼쪽 페이지에 이어서) 우리로 하여금 그의 부르심대로 모든 것을 행하게 하는 원동력은 우리를 그분의 의로 구원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이다. 또한 성경에서 말하는 심판의 경고는 우리를 위한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평안하다는 잘못된 판단에 빠지지 않게 하기 위한 것이다. 야고보는 “긍휼은 심판을 이”(약 2:13)긴다고 했다. 우리는 특히 가장 심각한 죄에 빠진 자들을 대할 때도 이 말씀을 기억해야 한다.

| 적용 |
그대는 하나님의 긍휼에 대한 확신을 통해 누구에게 긍휼히 대하기로 결심합니까?

영감의 교훈

기도
심판이 임할지라도 아버지의 긍휼하심에 의지하겠습니다. 우리를 끝까지 붙잡아 주시옵소서. 그리고 그 긍휼하심으로 인해 마지막까지 형제와 이웃을 불쌍히 여기며 그들을 위해 섬기고 봉사하는 생애를 살 수 있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여섯째 날(금) 더 깊은 연구를 위해
10월 31일

<각 시대의 대쟁투>, 479~491 “하늘에서 행하는 조사 심판”을 읽어 보라.

“하나님께서 사람들과 천사들 앞에서 그대를 당신의 자녀로 인정하셨으므로, ‘일컫는 바 그 아름다운 이름을’(약 2:7) 손상하지 않도록 기도하라. 하나님께서는 그대를 당신의 대리자로 세상에 내보내신다. 그러므로 생활 하나하나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나타내야 한다.… 그대는 오직 그리스도의 은혜와 의를 받아들임으로써만 이 일을 할 수 있다”(산상보훈, 107).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공의의 그 드높은 거룩함을 단 한 점도 손상시킴이 없이 용서가 가능케 되었다”(화잇주석, 약 2:13).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➊ “저는 그리스도를 좋아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싫어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와 너무 다릅니다.”라고 말한 간디는 여러 사람의 생각을 대변합니다. 불행히도 그가 왜 그렇게 말했는지 이해하기가 어렵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요? 물론 우리는 쉽게 다른 사람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어떤 일을 행했는지 볼 수 있지만, 그보다 우리 자신을 그리고 우리가 그분의 이름으로 행한 일들을 돌아봐야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우리는 어떻게 우리 주위의 세상에 그분을 잘 나타낼 수 있을까요?

➋ 그대가 출석하는 교회는 사람들의 배경, 사회적 지위, 기이한 특징 등과 상관없이 누구나 존중을 받는 곳입니까? 그렇지 않다면 교회를 변화시키기 위해 그대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➌ 우리나라에 있는 전통이나 사회 법률 가운데 성경의 원칙과 어긋나는 것은 무엇입니까? 명확한 것은 무엇이고 미묘한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어떻게 하면 그러한 것들을 초월하여 예수님이 우리에게 더 나은 삶의 길을 제공하셨다는 사실을 다른 이들에게 보여줄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하면 성경의 원칙대로 살고 그것을 드러낼 수 있을까요?

➍ “긍휼은 심판을 이긴다.”는 말씀은 실질적으로 어떤 뜻입니까? 예를 들면 옳지 않은 일을 행하는 자들을 대해야 할 때 그 말씀을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이것에 대하여 우리는 어떤 종류의 균형이 필요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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