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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피맨의 교과 - 제6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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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해피맨 작성일09-11-08 02:14 조회2,98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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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 사정으로 더이상 교과를 올릴 수 없게 되었슴을 알려드립니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애독해주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해피맨 드림


제 6 과 미리 계획함

기억절 (겔 20:18-19) 『[18] 내가 광야에서 그들의 자손에게 이르기를 너희 열조의 율례를 좇지 말며 그 규례를 지키지 말며 그 우상들로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 [19] 나는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라 너희는 나의 율례를 좇으며 나의 규례를 지켜 행하고』

학습 목표 가나안 접경에서 실패하고 광야로 되돌아가는 이스라엘 백성을 보시는 하나님의 아픈 심정을 느끼고 영원한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결심한다.


(민 15:) 『[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그들에게 이르라 너희는 내가 주어 살게 할 땅에 들어가서 [3] 여호와께 화제나 번제나 서원을 갚는 제사나 낙헌제나 정한 절기제에 소나 양을 여호와께 향기롭게 드릴 때에 [4] 그러한 헌물을 드리는 자는 고운 가루 십분의 일에 기름 사분의 일 힌을 섞어 여호와께 소제로 드릴 것이며 [5] 번제나 다른 제사로 드리는 제물이 어린 양이면 전제로 포도주 사분의 일 힌을 준비할 것이요 [6] 숫양이면 소제로 고운 가루 십분의 이에 기름 삼분의 일 힌을 섞어 준비하고 [7] 전제로 포도주 삼분의 일 힌을 드려 여호와 앞에 향기롭게 할 것이요 [8] 번제로나 서원을 갚는 제사로나 화목제로 수송아지를 예비하여 여호와께 드릴 때에는 [9] 소제로 고운 가루 십분의 삼 에바에 기름 반 힌을 섞어 그 수송아지와 함께 드리고 [10] 전제로 포도주 반 힌을 드려 여호와 앞에 향기로운 화제를 삼을지니라


민15장은 불평과 불신으로 가나안을 눈앞에 두고
다시 광야로 백성들을 돌이킨 직후에 주어진 규례들이다.

가나안에 들어가서 주시면 될 규례와 법들을 왜 지금 주시는가?
지금은 실패했지만 꼭 들어가게 될 것이라는 것을 확인시켜 주시기 위함이다.

매 규례마다 앞에 더해지는 말은
"너희는 내가 주어 살게 할 땅에 들어가서"
"너희는 내가 인도하는 땅에 들어가거든" 이다.

이 구절 속에는 가나안으로 들어가지 못한 하나님의 안타까움과
여전히 약속하신 대로 가나안으로 들어가게 하시고야 말겠다는
하나님의 강력한 의지가 동시에 표현되어 있다.

민 14장에서 이미 운명이 결정지어진 20세 이상의 성인남녀들은 해당사항이 없는 것이지만
그들의 자녀만이라도 가나안에 들어갈 수 있다면
이 규례들은 기억할 필요가 있는 것이었다.

그 첫번째 규례는 기존의 제사들에 소제나 전제가 더해진 것이다.
소제는 고운 가루 십분의 일 + 기름 사분의 일 힌
전제로는 포도주 사분의 일 힌이 드려졌다.

이 제물들에는 축복이 암시되어 있다.
가나안에서는 이렇게 살게 되리라.
고운 가루, 기름, 포도주는 광야생활에서는 너무도 귀한 것들이었다.

가나안에 들어가기만 하면
그 귀한 것들의 1/10, 1/4을 드려 태우고 부어서
제물로 바칠 만큼 풍성한 축복을 받을 것을 암시하고 있다.

1. 소제란 히브리어 민하 즉 선물, 감사의 예물이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소제의 첫번째 목적은 하나님께 감사함을 표현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접경에서 실패한 근본원인이
감사의 부재 혹은 실종이라고 보셨다.

감사하는 마음없이는 홍해의 기적도, 만나의 공급도,
구름기둥 불기둥의 인도하심도 다 소용없었다.

구원의 확신은 어디에서 오는가?
십자가의 피로 구원받은 것을 진심으로 감사하며
온 마음을 다해 예배하는 가운데 넘치는 기쁨이다.

그대에겐 이 구원받은 기쁨과 감사가 넘쳐흐르고 있는가?
만일 없다면, 그대는 헛된 광야길 40년으로 들어설지도 모른다.
감사, 감사, 그 은혜를 또 다시 감사하라. 헛된 통곡을 그치고 감사하라.
Think 에서 Thank가 왔다고 한다.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들을 생각하고 기억을 되새기며 감사하자.

“때때로 그리스도인은 자기의 지난 생애를 회고하면서 시련 중에 붙드시고,
모든 것이 어둡고 험악하게 보일 때에 그의 앞에 길을 열어 주시고,
힘이 쇠할 때에 그를 소생시킨 하나님의 귀중한 구원을 생각하고 감사해야 한다.
그는 그 모든 것들을 하늘 천사들이 돌보신 증거로 인식하여야 한다.”
(엘렌 지 화잇, 재림교 성경주석, 창 28:16-22)


2. 소제의 또 다른 의미는 기존의 제사에 더하여짐에서 찾을 수 있다.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바, 모든 생축의 제물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에서 그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인간이 바치지만 실상은 하나님이 인간을 위하여 하실
위대한 일들을 선포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소제든, 전제든 모든 추가되는 제물들은
인간의 구원을 위하여 추가된 하나님의 일이라고 보는 것이 마땅하다.

말하자면, 소제는 십자가 피에 더하여진
또 다른 하나님의 사역을 의미한다고 볼 수도 있다.

또 다른 보혜사의 사역을 의미하는 것이다.

실패한 이스라엘 백성의 구원을 위해 하나님은
더 나은 수고를 하시기로 작정하신 것이다.

마침내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들어가게 되면
하나님의 더욱 큰 은총과 사역을 기억하는 소제와 전제를 드리며
더욱 큰 감사와 찬양을 드리게 될 것을 미리 보여주는 것이다.

3. 소제의 마지막 관점은 광야에서 얻지 못하는 농경지의 수확물이라는 점이다.
위의 제물들은 광야에서는 얻을 수 없는 것들에 해당한다.
농경지에서만 거둘 수 있는 밭의 수확물들이었다.

가나안의 풍성한 결실의 결과물들을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날이
40년의 긴 세월동안 미뤄진 것이다.

이 세가지는 모두 열매와 관련이 있다.

농부이신 하나님이 그토록 기대하시는 것이다.
씨를 뿌리면 알곡이 맺혀 고운 가루로 만들 것을 기대하고
감람 나무를 심으면 열매를 찢어 순전한 기름을 기대하고
포도 나무에서 난 열매로 포도주를 마시길 기대한다.

열매없는 농부는 수치를 당한다.

가나안에 들어갔다면 열매가 맺히고 결실을 보았을터인데
뒤돌아서는 하나님의 심정을 애둘러 표현하고 계신 것이다.

마치 우물에서 숭늉찾는 안타까운 꼴이 되고 만 것이다.
가나안 접경에서 뒷걸음칠 친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아주 우스운 꼴로 만들고 말았다.

우리는 지금 어떠한가?
우리는 열매맺는 백성인가?
하나님의 이름으로 진군하는 백성들인가?
아니면 겁먹고 두려워떨며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밤새 울부짖는 자들인가?

갈렙과 여호수아의 믿음이 우리 모두의 것이 되기를 간절히 원한다.
"그들은 우리의 밥이라"

민 15장의 말씀 속에서 하나님의 통탄하시는 심정을 조금이라도 느낄 수 있기를 바란다.


월요일 – 너희 중에 우거하는 타국인(민 15:14-16)

레 19:33 『타국인이 너희 땅에 우거하여 함께 있거든 너희는 그를 학대하지 말고』

한국인들의 타 인종 차별은 심각한 수준이다.
국제 엠네스티의 ‘한국의 이주 노동자’의 인권 보고서의 제목은
타국에서 살아가는 우리 한인들의 가슴을 서늘케 한다.

‘일회용 노동자: 한국의 이주 노동자 인권 상황’

스리랑카 출신 ㅅ씨(26)는 “한번은 기계가 왼손을 절단하고,
또 한번은 오른쪽 허벅지를 통과해 부상을 당했지만
보상금은 커녕 ‘너무 자주 사고를 일으킨다’는 이유로 해고만 당했다”고 털어놨다.

인종 차별 문제로 전쟁까지 치렀던 미국이
자메이카 태생의 흑인인 오바마를 대통령으로 선택한 이번 선거는
미국인 전체에게 노벨 평화상이 주어질만한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오바마가 중동 평화나 세계 평화를 위해 기여한 일이 전혀 없다하더라도
수백년간의 인종 차별의 희생자였던 흑인이 미국의 대통령이 된 것은
노벨 평화상보다 더한 상이라도 받을 가치가 있는 사건인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이미 타국인의 인권 문제를 소홀히 하지 않도록 가르치고 있다.
(민 15:16) 『너희나 너희 중에 우거하는 타국인이나 한 법도, 한 규례니라』

타국인이란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살면서
그들의 믿음을 전적으로 받아들이는 자들이며
남자이면 할례를 받아야 했다.(출 12;48)

레 19:34 『너희와 함께 있는 타국인을 너희 중에서 낳은 자 같이 여기며 자기 같이 사랑하라 너희도 애굽 땅에서 객이 되었더니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

애굽에서의 노예 생활로 타국인의 처지를
누구보다도 잘 아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하라”는 십계명의 정신을
타국인에게 그대로 적용하도록 요구하셨다.

민 35:15에 세워진 여섯 성읍의 도피성에도
부지 중에 살인을 저지른 타국인이 도피할 수 있게 했고
신 1:16절에는 공정한 재판이 명령되었다. 타국인이라 해서 차별할 수 없었다.
단, 타국인에게 왕위를 주는 것은 금하였다.(신17:)

신 31:12에는 타국인도 듣고 배우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지켜 행하게 하도록 교육하도록 지시하였다.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이 대거 유입된 초기 기독교는
유대인과 이방인이 더 이상 분리된 존재가 아니라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라는 사실이 강조되기 시작했다.

엡 2:13에는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에게 대하여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고 기록하고 있다.

(갈 3:28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골 3:11) 거기에는 헬라인이나 유대인이나 할례파나 무할례파나 야만인이나 스구디아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 차별이 있을 수 없나니

2. 솔로몬의 성전 봉헌 기도 속에 나타난 이방인에 대한 태도

(왕상 8:41,43) 『[41] 주의 이름을 위하여 먼 지방에서 온 이방인이라도 …[43] 주는 계신 곳 하늘에서 들으시고

솔로몬은 여호와를 이스라엘의 부족신이 아닌 온 세계의 하나님으로 믿었다.
이방인도 하나님의 축복과 은총을 받을 수 있다고 믿었다.

예수께서 성전을 정결케 하시면서 외치신 일성은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는 말씀이었는데 이는 사 56:6,7절의 말씀을 인용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 말씀 속에는 이방인을 향해 활짝 열린 하나님의 구원을 담고 있었다.

『[6] 또 나 여호와에게 연합하여 섬기며 나 여호와의 이름을 사랑하며 나의 종이 되며 안식일을 지켜 더럽히지 아니하며 나의 언약을 굳게 지키는 이방인마다 [7] 내가 그를 나의 성산으로 인도하여 기도하는 내 집에서 그들을 기쁘게 할 것이며 그들의 번제와 희생은 나의 단에서 기꺼이 받게 되리니 이는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이 될 것임이라』



화요일 – 부지 중에 지은 범죄(민 15:22-27)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노예 시절에 태어난 세대로 제거해야 할 나쁜 습관과
새롭게 배워야 할 좋은 습관들이 많이 있었다.

세상에서 살다가 교회 안에 들어와서 버려야 할 나쁜 습관과
새롭게 형성해야 할 좋은 습관들이 많이 있다.

죄인줄 모르고 습관이나 관습, 문화적으로 답습해오던 것들이
하나님의 선하심과 배치되거나 죄됨을 깨닫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이러한 때에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해야할 것인가?

분명한 사실은 그것이 집단적이든 개인적이든 부지 중에 지은 죄도 죄라는 사실이며
죄임을 깨닫게 될 때의 바른 태도는 이를 회개하고 속죄함을 꼭 받아야 한다는 점이다.

과거에는 죄인줄 몰랐지만 말씀을 통해서 그것이 죄라는 사실을 지적받거나 깨닫게 될 때에는 겸손히 죗됨을 인정하는 자세가 필수적이다.

예를 들자면
1) 일부다처의 관습을 따르던 사람이 하나님의 일부일처제의 결혼제도를 깨닫게 되면 어떻게 해야할까?
2) 하나님의 안식일을 깨닫기 전에 일요일 성수를 외치던 자들은 회개할 필요가 있을까?
3) 폭리를 취하던 자가 형제들에게 이자를 받지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읽었다면 어떻게 해야할까? 등등 구체적인 많은 사례가 있을 것이다.

하나님은 부지 중에 지은 죄와 고의로 짓는 죄를 엄격히 구분하셨다.

인간은 그 속을 들여 다 볼 수 없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속 마음을 보시고 아신다.

성경에서 부지 중에 지은 죄를 인해 형벌을 받을 뻔 하였다가
하나님의 용서를 받은 사례들이 있다.

1) 아비멜렉 왕이 아브라함의 아내 사래를 누이인줄 알고 왕궁으로 데려갔다가 형벌을 받았으나 용서받은 사례
2) 욥의 친구들이 욥의 고난의 때에 한 잘못된 말들, 하나님에 대한 잘못된 지식들에 대하여 하나님이 용서의 제사를 요구하시고 욥이 기도하자 용서하시는 사건


하나님은 도피성을 일곱개나 두시고 부지중에 죄를 저지른 자들이
복수의 칼에서 보호함을 받도록 하셨다.

기억하라.
부지중에 지은 죄도 죄다.
깨닫게 하시거든 즉시 죄로 인정하라.
변명은 아담과 하와의 더 큰 죄다.
회개하고 죄 용서함을 받으라.

(요일 1:9)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수요일 – 고의로 범한 죄(민 15:30-31)

때때로 그것이 죄인 줄 알면서도 죄를 지을 때가 있는가?
양심에 가책을 느끼지만 억누르는 것은 왜 위험한 일인가?

(민 15:30,31) 『[30] 본토 소생이든지 타국인이든지 무릇 짐짓 무엇을 행하면 여호와를 훼방하는 자니 그 백성 중에서 끊쳐질 것이라 [31] 그런 사람은 여호와의 말씀을 멸시하고 그 명령을 파괴하였은즉 그 죄악이 자기에게로 돌아가서 온전히 끊쳐지리라』

여기서 ‘짐짓’리아는 말은 히브리어로 ‘높이 든 손으로’(with a high hand)라는 뜻인데 거만하고 반항적인 자세를 가리킨다.
‘고의로’ ‘알면서’ ‘누가 보든 개의치 않고’ 짓는 죄를 말한다.

민 15:32-36에는 안식일에 나무하다가 잡힌 사람의 집단 처형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다.
이 사건은 안식일을 공개적으로 범한 자를 어떻게 처리하는 것이 좋을지 몰라 고민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사실 이 장면은 민 14:40-45절에서 하나님의 분명한 선고를 받은 후
나타난 이스라엘 백성들의 정신 상태와도 맥을 같이 한다고 볼 수 있다.

싸우다 죽으나 광야에서 죽으나 죽기는 매한가지라는 절망적인 심정으로
아말렉으로 쳐들어갔다가 패배하고 많은 이가 죽었다.
지키다 죽으나 안 지키다 죽으나 죽기는 마찬가지라는 심정적 동요가 그들 가운데 있었다.

모세가 광야에서 가나안을 바라보다 들어가지 못하고 죽은 이유는 무엇일까?
하나님은 모세의 죽음을 굳이 왜 거기서 명하셨을까?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절망적인 광야 생활에 대한 놀라운 희망을 품고 있다.
그들의 영적인 지도자 모세마저도 광야에서 죽은 것은
광야 길에서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죽임을 당한 모든 자들을 위한 relief 이다.

물론 시차적으로 보자면
모세의 느보산에서의 죽음은 후대의 일이지만

민수기와 신명기의 기록을 읽고 듣는 모든 성도들은 모세의 죽음을 통해
광야 길에 죽은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속깊은 배려를 읽을 수 있게 될 것이다.

모세는 광야 길에 죽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를 다시 살리사 영원한 생명 천국에 들어가게 하셨다.

그를 먼저 데려갔을 뿐
광야 길에 동행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죽음도 헛되지 않을 것임을 천명하고 있다.

결코 절망하지 말자.
하나님을 향하여 분을 품지 말라.

나의 운명이 혹 광야에서 끝을 맺는다고 할지라도 절망할 필요는 없다.

고의로 하나님의 말씀을 대적하지 말라.
그 결과는 참담할 것이다.

오늘의 고통스런 현실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다시 차지 할 수 없는 처지를 보여주고 있다 할지라도
우리에겐 영원한 소망이 있다.

부와 명예와 능력을 다시 소유할 수 없다 할지라도
낙담할 필요가 없다.

우리에게 주어졌던 최고의 시기에 우리의 잘못으로 다시는 이 땅에서 그와 같은 위치에 오르지 못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결코 의심하지 말 것이다.
이 땅에서의 부와 명예, 가진 것만이 하나님의 은총을 받은 증거라는 가르침은 바리새인들의 누룩이었다.

비록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한 채 인생의 길을 마칠지라도
모세처럼 하나님의 뜻을 끝까지 받들면
영원하고 참된 보상을 받게 될 것이다.

이를 믿는가?

결정적인 범죄로 더 이상 이 땅에서 부끄러움과 수치로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자들조차도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의 구원하심은 영원히 계속될 것이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요일 4:16)


목요일 – 옷단 귀에 술과 함께 단 청색 끈(민 15:38-41)

재림 교인들은 사치와 허영을 피하기 위해
일반적으로 귀걸이나 반지를 사용하지 않는다.

그러나 반지는 일반적으로 다른 이들에게 기혼자라는 것을 알리고
자신 스스로에게도 결혼의 서약을 기억하게 만드는 역할을 한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백성의 표가 나는 옷을 입도록 명하셨다.
그것이 오늘날 정통 유대인들의 복장에서 찾을 수 있는 바,
겉옷 테두리에 흰색 술을 다는 방식이다.

증언보감 1권 524페이지
이스라엘 사람들은 눈에 띄자마자 그런 사람이라는 사실이 알려졌다.

남에게도 자신 스스로에게도 내가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표를 드러내는 것이었다.

십자가를 목에 거는 행위를 우상숭배라고 치부할 수도 있고
주술적인 의미에서 사용하는 잘못된 견해도 있지만
십자가가 그리스도인의 상징인 것은 분명하며
남에게나 자신에게나 그리스도인의 흉배를 붙이고 드러내는 것은
성경이 추구하는 자세라고 본다.

(살전 5:8) 『우리는 낮에 속하였으니 근신하여 믿음과 사랑의 흉배를 붙이고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자』

(신 6:8)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를 삼고』

탕자가 돌아왔을 때에
아버지는 그 아들에게 아들의 신분 회복을 분명히 하기 위해
그 손에 가락지를 끼운다.(눅 15;22)

안타까운 이야기 하나.
모 대학에 입학하는 여학생들은 곧바로 채플을 갖고
귀걸이, 반지를 빼고 등교하라는 교육을 받는다.
사치와 허영을 버리자는 취지로.
그러나 강의실에서 그들은 교수들이 하는 사치와 허영의 자랑들에 기가 질린다.
몇 천만원짜리 악기를 산 이야기, 명품으로 치장한 교수님들…

스스로 속이지 말자.
사치와 허영은 금도금한 반지에 있지 않다.
우리의 마음에 있다.

그리스도를 생각하면서 살아가는 삶을 추구하는 자들은
그리스도인임을 드러내며 살아야 한다.

2. 이스라엘 백성들은 옷에 달린 채 흔들리는 술과 청색끈을 보면서 순종하는 거룩한 생애를 살아야 함을 다시 기억하는 은혜를 누렸다.

(민 15:39-40) 『[39] 이 술은 너희로 보고 여호와의 모든 계명을 기억하여 준행하고 너희로 방종케 하는 자기의 마음과 눈의 욕심을 좇지 않게 하기 위함이라 [40] 그리하면 너희가 나의 모든 계명을 기억하고 준행하여 너희의 하나님 앞에 거룩하리라』

성경을 품에 안고 살자.
외식하자는 말이 아니다.

내가 그리스도인임을 그들로 알게 하고
나도 그리스도인의 정직한 삶을 살도록 노력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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