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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과 교회(교사강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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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조춘호 작성일14-08-16 03:03 조회3,92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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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과 교회

8월 23일 안식일
일몰:오후 7시 15분

기억절 : “내가 비옵는 것은 이 사람들만 위함이 아니요 또 그들의 말로 말미암아 나를 믿는 사람들도 위함이니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요 17:20~21).

도입)
교회의 일치는 세상으로 하여금 예수님을 하나님이 보내신 자로 믿게 할뿐 아니라, 하나님이 교회를 사랑한다는 것을 알게 한다는 점이다. 바꿔 말하면, 분열은 전도를 가로막을 뿐 아니라, 분열 그 자체가 큰 죄란 점이다. 예수님께서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마 23:13)고 하셨는데, 이는 먼저 믿는 자들의 잘못된 행위가 전도의 문을 가로막는다는 사실을 언급하신 것이다. 창세로부터 지금까지 하나님의 구원사역은 분열을 일치로 가져오는 것이었다. 분열을 죄로 보고, 죄의 값을 죽음으로 본다. 따라서 죽음이란 분열 또는 단절을 말하는데, 하나님과의 분열 또는 단절을 영혼의 죽음, 육체가 영혼에서 분열 또는 단절되는 것을 육신의 죽음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사람이 죽음에서 생명에로 거듭나는 길은 하나님과 일치 또는 연대, 사람과 일치 또는 연대, 자연과 일치 또는 연대하는 것이다. 성경은 단절을 원수 된 관계, 구원을 화목 된 관계라고 말한다.

연구 범위 : 신 32:4, 시 28:1, 요 17장, 요 15:1~5, 마 7:1~5, 마 5:23~24, 마 18:15~18.

*교과는 읽고 밑줄만 쳐도 공부가 됩니다.

기독교의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이스라엘 자손과 아브라함 그리고 아담에게까지 이른다. 여호와께서는 아브라함과 훗날 이스라엘 백성을 부르셔서 자신과 언약을 맺게 하시고 세상에 복을 주는 통로가 되게 하셨다. 거룩한 역사의 흐름 속에 그러한 언약 관계는 교회를 통해 지속되었다.
교회는 사도 또는 어떤 인간의 창작물이 아니다. 예수님은 지상 사역 기간에 교회를 세우리라는 계획을 친히 선언하셨다. “내 교회를 세우리니”(마 16:18).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존재하게 되었다. 그분은 교회의 창시자이시다.
복음서에 따르면 예수님은 ‘교회’라는 단어를 단지 세 번 언급하셨다(마 16:18, 18:17). 그렇다고 그분이 이 주제를 중요하게 취급하지 않으셨다는 뜻은 아니다. 사실 그분은 교회에 관하여 매우 중요한 개념들을 가르치셨다. 이번 주에 우리는 ‘교회의 기초’와 ‘교회의 연합’이라는 두 가지 주제를 집중적으로 연구하려고 한다.

안교 활동반과 교과 토의

※ 학습 목표
➊ 깨닫기 : 연합과 통일성의 개념을 비교하면서 연합한 교회의 특성을 파악한다.
➋ 느끼기 : 세계적으로 연합된 영적 가족의 일원이 되는 특권을 경험한다.
➌ 행하기 : 동료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시간, 열정, 재능, 재정을 투자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기 위해 연합한다.

Part 1. 인사 안교 반장 또는 소그룹 리더
서로 인사를 나누고 손님을 환영해 줍니다.
출석과 공부를 확인하고 안교헌금을 걷습니다.
결석자와 구도자에 대한 보고를 듣고 방문 계획을 세웁니다.

Part 2. 나눔 안교 교사 또는 소그룹 리더(A나 B 중 하나를 선택하십시오.)
A. ❶ 그대는 개인, 2인, 단체 경기 중에서 무엇이 가장 재미있다고 생각합니까?
❷ 요 17장에서 예수님이 교회의 연합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❸ 교회의 연합에 필수적인 요소들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❹ 우리 교회가 연합하기 위해서 반드시 해야 할 것은 무엇인지 이야기해 봅시다.

B. ❶ 단체 줄다리기 또는 단체 줄넘기 같은 경기에서 승리할 수 있는 비결은 무엇입니까?
❷ 교회의 연합을 깨는 요소들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❸ 신자들 사이의 갈등으로 분열된 교회가 다시 연합하려면 어떤 노력이 필요합니까?
❹ 우리 교과반(소그룹)부터 말씀과 사랑으로 하나가 되려면 무엇을 실천해야 할까요?

결론 : 교회는 연합한 상태에서 신자들과 지역 사회를 가장 잘 섬길 수 있습니다.

Part 3. 실천 안교 반장 또는 소그룹(예비) 리더
❶ 오늘 있는 친교 모임을 점검합니다.
❷ 친교 모임에서 새로운 친구들을 어떻게 소그룹으로 초청할지 이야기합니다.
❸ 기도 제목을 가지고 함께 기도합니다.

첫째날(일) 교회의 기초
8월 17일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마 16:18).

교사강해 1)
예수님께서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 이르렀을 때에 제자들에게 질문을 던지셨다.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예수님께서는 그동안 여러 가지 사역을 통해서 자신이 어떤 분이신지 그 모습을 보여 주셨다. 그리고 이제 이 예수님을 사람들이 어떤 분으로 받아들이고 있는가? 물어보신 것이다. 이에 제자들이 어떻게 대답하였는가? "더러는 침례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에 하나라 하나이다." 그들은 예수님을 나쁘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침례요한이나 엘리야, 예레미야처럼 훌륭한 선지자, 당 시대에 백성들에게 지대한 영향력을 끼친 위대한 영적인 지도자 중에 한 사람으로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것은 예수님의 일부분만 보고 지적한 것이지 예수님의 전체를 보고 말한 것은 아니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이번에는 제자들에게 질문을 던지셨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그러자 시몬 베드로가 가장 먼저 손을 들고 대답을 하였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그의 대답은 가장 확실하고 정확한 대답이었다. 그리스도는 메시야, 즉 구원자란 뜻이다. 무리들은 예수님을 선지자로 보았지만 베드로는 예수님을 구원자로 보았다. 선지자와 구원자! 이 둘 사이는 언뜻 보면 별 차이가 없어 보이지만 이 둘 사이에는 도저히 비교될 수 없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선지자는 백성들의 죄를 깨우치고 회개하도록 돕는 자이다. 그러나 구원자는 백성들을 죄에서 근본적으로 구원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자이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을 받아서 전달하는 자이다. 그러나 구원자는 그 입에서 바로 구원의 진리, 생명의 복음을 전파하는 자이다. 선지자는 구원자를 소개하고 그를 위해서 길을 예비하는 자이다. 그러나 구원자는 그 자신이 구원의 핵심으로서 구원을 완성하는 자이다. 선지자는 시대 시대마다 하나님께서 택하여 세우신 하나님의 종이다. 그러나 구원자는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로서 그 본체가 하나님이시다. 선지자는 역사상 여러 명이 있었다. 그러나 구원자는 오직 한 분 예수님 밖에 없다. 예수님은 우리 인생들의 근본문제인 죄와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신 유일한 구원자요, 그리스도가 되신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다(행4:10). 우리는 오직 한 분 이 예수님을 통해서만 구원을 받을 수가 있고,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가 있고, 영생을 얻을 수가 있다. "주는 나의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이 신앙고백은 구원과 멸망을 좌우하는 문제이기 때문에 매우 중요하다. 그래서 이 고백 위에 교회를 기초를 놓는다는 것은 너무나 분명하다.

예수님은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마 16:18)겠다고 말씀하셨다. 그렇다면 교회가 세워질 이 반석(그리스어로 ‘페트라’)은 누구인가? 어떤 주석가들은 베드로가 그 반석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주께서 베드로(페트로스)와 반석(페트라)이라는 단어로 언어유희를 사용하셨고 짐작건대 예수님이 사용하신 아람어로는 그 의미가 더욱 분명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실제 예수님이 아람어로 정확히 어떤 단어를 사용하셨는지 아는 사람은 없다. 우리에게는 마태가 그리스어로 기록한 본문만 있는데 거기에는 ‘페트로스(돌)’와 ‘페트라(반석)’를 구분하고 있다. 우리는 이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페트라(반석)’가 그리스도를 일컫는다고 주장할 합당한 근거들이 있다. 예수님의 진술이 이어지는 해당 문맥은 베드로가 아닌 그리스도의 정체와 사명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게다가 예수님은 이전에 반석 위에 지은 집에 대한 비유를 들면서 분명하게 그 반석을 자신 또는 자신의 가르침과 동일시하셨다(마 7:24~25).
구약에서 ‘반석’은 어떤 상징적인 의미가 있는가?(신 32:4, 시 28:1, 31:2~3, 42:9, 62:2, 사 17:10)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이 반석 위에 자신의 교회를 짓겠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을 때, 그들은 그 은유를 구약에서 말하는 의미 즉 하나님을 가르키는 상징으로 해석했을 것이다. 베드로도 그리스도께서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행 4:11)셨다고 확증하였고, ‘반석’이란 단어를 교회의 기초이신 그리스도께 적용하였다(벧전 2:4~8). 그는 일반적으로 신자들을 ‘산 돌’과 비교하였지만, ‘반석(페트라)’은 오직 그리스도께만 적용하였다. 성경에서는 예수님 외에 어떤 사람도 반석으로 불리지 않는다.

교훈 : 구약과 신약의 저자들의 이해에 따르면 예수님이 교회를 세우는 기초로 언급하신 반석은 베드로가 아니라 예수님 자신을 가리킨다.

부가적용)
우리는 교회의 기초가 그리스도라는 것과 그분이 우리의 반석이 되신다는 사실에 이의가 없다. 그러나 오늘 마 16:18절에서 보여주는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겠다는 이 반석의 의미는 무엇일까? 그리스도도 베드로도 아니다. 그러면 누구일까?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신앙고백을 하였다(마 16:16). 이 말을 들으신 예수님은 “너는 베드로(작은 돌멩이, 페트로스;petro)라 내가 이 반석(페트라;petra) 위에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고 선언하셨다(마 16:18). 여기서 ‘반석’은 무엇을 상징하는 것일까? 첫째는 예수 그리스도라고 해석하는 견해가 있다. 어거스틴이나 루터는 이 말이 이사야 28:16의 반영이라고 보았다. 신약의 다른 구절에서도(롬 9:33; 고전 10:4) 그리스도를 반석이라고 본 점에서 본문에서 말하는 반석은 그리스도를 의미한다고 보았다. 그렇지만 본문의 문맥 전후 상으로 볼 때 이 해석은 무리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둘째는 반석이란 별명을 가진 베드로 자신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해석하는 것이다. 그래서 가톨릭은 이 해석에 기초하여 베드로는 교회의 기초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베드로의 뒤를 이은 교황이 교회의 참 권위자이며 교황이 다스리는 교회가 참 교회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이 해석을 받아들이기 어려운 점 가운데 하나는 베드로는 남성이지만 반석이란 단어는(페트라) 여성명사라는 점이다. 그리고 베드로는 신앙고백 바로 다음에 예수님으로부터 책망을 받았다는 점이다(마 16:33). 또한 다른 성경 본문에서 교회의 기초는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시자(고전 3:11) 간접적으로 신앙고백을 하는 성도들임을 말씀하고 계신다(엡 2:20). 그러므로 베드로란 인격을 교회의 기초로 볼 수 없다고 본다. 그러면 그 의미는 무엇인가?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우신다고 할 때의 ‘반석’은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가리키는 것으로 예수님을 주로 고백하는 신앙고백 위에 교회를 세우신다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너의 이름은 페트로스(베드로)라 그리고 네가 고백한 진리는 페트라(반석)라. 내가 그(페트라)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라”로 해석할 수 있다. 마 16:15-28절을 깊이 읽어보라. 마16:15 가라사대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마16:16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마16:17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마16:18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나의 삶 속으로

| 묵상 |
그대는 교회의 기초가 결코 무너지지 않는 반석이신 그리스도라는 사실에서 무엇을 느낍니까?
(왼쪽 페이지에 이어서) 사도 바울도 ‘페트라(반석)’란 단어를 그리스도와 관련하여 사용하며(롬 9:33, 고전 10:4), 결정적으로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고전 3:11)고 선언한다. 결론적으로 사도교회는 반석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실에 이의가 없었다. 그 외에 모든 선지자와 베드로를 포함한 모든 사도는 교회의 영적 구조 속에서 첫 번째 층을 이루는 산 돌들이다(엡 2:20).

| 적용 |
어떤 인간이나 그의 사상을 기초로 한 교회는 어떤 모습일 것이라고 생각합니까?

영감의 교훈 : 산 반석 위에 세워진 교회 - “예수께서는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임재하심과 모든 하늘 거민들 앞에서, 또 보이지 아니하는 음부의 군대 앞에서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교회를 산 반석 위에 세우셨다. 그 반석은 예수 자신 곧 우리를 위하여 찢기시고 상함을 받으신 그의 몸을 의미한다. 음부의 권세가 이 터 위에 세워진 교회를 이기지 못할 것이다”(시대의 소망, 413).

기도 : 나의 반석이신 예수님, 그 위에 교회를 든든하게 세워 주셔서 감사합니다. 주님과 말씀에서 벗어난 교회는 모래 위에 지은 집처럼 무너질 것이나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 정신과 말씀의 교훈 위에 세운 교회는 절대 무너지지 않으리라 굳게 믿습니다.

둘째날(월) 연합을 구하는 그리스도의 기도
8월 18일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요 17:21).

교사강해 2)
위의 말씀은 수직적인 의미에서 아버지와 아들, 아들과 제자들의 관계를 하나로 표현하고 있다. 제자들이 아버지와 연합 할 수 있는 것은 아들이 제자들 안에도 있고 또한 아버지 안에도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들을 통하지 않고는 아버지에게 갈 자는 아무도 없다. 하나님의 사랑과 아들을 보내심이 불가분적 관계에 있음과 같이 제자들을 사랑하는 것과 그들을 세상에 보내는 것 역시 불가분적 관계에 있다. 성도들이 세상가운데서 하나로 나타나는 것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사랑에 기초할 때에만 가능하다. 아버지는 아들 안에 있어 그의 일을 하시며 또 아들은 아버지 안에 있으므로 두 분은 하나로 존재하고 일하신다. 그리고 아버지와 아들도 우리 안에 들어 와서 거처를 삼으시고 함께 일하신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성도 공동체가 하나님과 그리스도 안에서 일체를 이룸으로써 세상이 이를 통해 믿음을 갖게 되기를 간구하신다는 것이다.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영광은 아들이 행하는 모든 사역과 관계를 맺고 있으며 십자가를 통해 그 영광의 역설적 의미가 선명하게 드러난다. 사도들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힘으로 획득한 영광을 세상 가운데서 실제적으로 나타낼 때에 아버지와 아들이 있는 그곳에서 영원한 영광을 보게 될 것이다.

목요일 밤이었다. 마지막 만찬 후에 예수님과 제자들은 감람산으로 가셨다. 겟세마네로 가는 길에 예수님은 발걸음을 멈추고 자신과 제자들 그리고 후에 사도들의 가르침을 통해 자신을 믿게 될 모든 자를 위해 기도하셨다. 비록 십자가 고난이 앞에 놓여 있었지만 그분의 최대의 관심사는 자신이 아니라 제자들이었다.
요한복음 17장에는 성경에 기록된 가장 긴 예수님의 중보기도가 있다. 그분이 우리 각자를 포함하여 자신을 믿는 모든 사람을 위해 기도하셨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용기가 난다.
요한복음 17장을 읽어 보라. 신자들에 관하여 예수님이 아버지께 올린 주된 기도의 소원은 무엇이었는가? 특히 21~23절을 보라.
교회의 생명은 연합에 달려 있다. 예수께서 제자들이 하나가 되기를 바라는 간절한 소망을 네 번이나 반복하여 간청하셨다는 사실에서 우리는 그 중요성을 가늠할 수 있다(요 17:11, 21~23). 그 같은 최후의 순간에 주님은 여러 가지 중요하고 필요한 다른 일들을 위해 기도하실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분은 신자들의 연합에 대하여 집중적으로 기도하셨다. 그분은 교회의 최대 위협은 경쟁과 분열의 정신이라는 사실을 아셨다.
예수님의 소원은 통일성이 아니라 자신과 아버지 사이의 관계와 유사한 개인적인 연합이었다. 예수님과 아버지는 역할이 다르고 서로에게 구별된 두 인격이시다. 그럼에도 그분들은 본성과 목적에 있어서 하나이시다. 같은 이치로 우리 모두는 기질과 배경, 재능과 역할이 다를지라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연합해야 한다.
이런 종류의 연합은 그냥 생기지 않는다. 그런 연합을 이루려면 우리는 주인되시는 그리스도를 우리의 삶 속에 온전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교훈 : 예수님은 마지막 순간까지 교회의 연합을 위해 기도하셨다. 교회의 연합은 하나님이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아들을 보내셨다는 가장 큰 증거이다.

부가적용)
아버지의 이름은 아버지의 본성을 의미하며 아들의 지상 사역 가운데서 가장 확연히 나타났다. 아들은 이 땅에서 행하는 모든 행동뿐만 아니라 자신의 인격을 통하여 하나님을 나타내었다. 그리스도인이 하나가 되어 서로 사랑할 때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되고 세상도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될 것이다. 우리는 시기와 미움과 교만함과 위선된 모습에서 떠나 있어야 한다. 주님은 이 모든 악에서 떠나 하나가 되기를 기도하셨다.

나의 삶 속으로

| 묵상 |
주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연합이란 어떤 것일까요?
(왼쪽 페이지에 이어서) 그분은 우리의 품성을 빚으시고, 우리는 우리의 뜻을 그분의 뜻에 굴복시켜야 한다. 이러한 연합은 그 자체가 목적은 아니다. 그것은 세상으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하나님이 보내신 구주로 믿도록 격려하는 일종의 간증이다. 다양한 성향의 사람들 사이에 존재하는 조화와 연합은 하나님이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 아들을 보내셨음을 시사하는 강력한 증거이다. 그것은 그리스도께 사람을 구원하고 변화시키는 능력이 있음을 보여주는 반박할 수 없는 증거가 된다. 우리에게 이런 증거를 전할 특권이 주어진 것이다.

| 적용 |
우리가 교회로서 연합하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영감의 교훈 : 연합한 교회 - “친절한 동정과 확신으로 하나님의 일꾼들은 서로 연합해야 한다.… 참된 신앙은 마음을 그리스도와 연합시킬 뿐만 아니라 가장 부드러운 연합으로 피차간을 연합시킨다. 우리가 이와 같이 그리스도와 연합하고 우리의 형제들과 연합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게 될 때, 우리가 어디로 가든지 향기로운 감화가 우리의 사업에 함께할 것이다”(교회증언 9권, 145).

기도 : 우리가 서로 하나가 되기를 그토록 바라셨던 주님, ‘나’와 ‘너’를 가르고 ‘우리’와 ‘그들’을 나누었던 저희의 부끄러운 과거를 용서해 주옵소서. 이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과 성경의 진리로 하나 되는 교회가 되기를 원합니다.

셋째날(화) 그리스도께서 구하는 연합의 요소
8월 19일

“그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요 17:17).

교사강해 3)
우리가 거룩하게 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거룩하게 한다"는 말은 "성별한다", "따로 세운다"는 뜻을 갖고 있다.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바쳐지는 것을 가리킨다. 그리고 "진리로 거룩하여진다"는 말은 우리의 삶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진리에 일치시키고 그를 섬기는 데에 바치는 것을 말한다. "그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한 것은 그들 곧 예수님의 제자들이 세상적인 사람들이어서는 안될 것을 말한 것이다. 그들은 거룩한 사람이어야 하고 주님을 섬기기 위하여 세상과 구별된 사람이어야 하는 것이다.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하신 것은 진리인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만 거룩하여질 수 있음을 가리키는 것이다. 거룩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진리와 별도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님을 말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이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주저하지 않고 받아들여야 하고 행해야 한다. 성화는 그러한 방법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교회를 위해 기도하셨던 연합의 기초는 무엇인가?(요 17:23, 요
15:1~5)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요 14:20)에 있다는 표현은 우리와 그리스도 사이에 있어야 할 친밀한 관계를 설명한다. 우리 마음속에 예수님이 계시면 연합의 결실이 맺힌다. 그분은 우리의 삶 속에 ‘하나님의 말씀’과 ‘그분의 사랑’이라는 연합에 필수 불가결한 두 요소를 가져오신다.
우리에게 예수님이 계신다면 우리에게는 그분의 말씀도 있을 것인데 사실 그 말씀은 아버지의 말씀이다(요 14:24, 17:8, 14). 예수님은 진리이시며(요 14:6), 아버지의 말씀 또한 진리이다(요 17:17). 예수님 안에서 이루어지는 연합은 곧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의 연합을 의미한다. 우리가 연합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에서 제시하는 진리에 동의해야 한다. 성경에 기초한 신념들을 고수하지 않고 연합을 이루려는 노력은 결국 모두 실패로 돌아간다.
주님은 또한 제자들이 진정한 사랑으로 연합하기를 바라신다. 우리에게 예수님이 계신다면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셨던 완전한 사랑이 우리에게도 있을 것이다(요 17:26). 이러한 사랑은 일시적인 감정이나 감흥이 아니라 살아있는 항구적인 행동 원칙이다. 진실한 사랑을 소유하려면 우리는 자아는 덜 사랑하고 예수님은 더욱 사랑해야 한다. 그러면 우리는 참되고 진실하게 서로를 사랑하며 예수님이 기도하셨던 완전한 연합을 이루게 될 것이다.
높은 수준의 진리를 유지하면서 동시에 서로에 대하여 깊은 사랑을 나누는 것이 항상 쉬운 것은 아니다. 하나를 희생하여 다른 하나를 강조하는 것은 언제나 위험이 따른다. 물론 교리만 연합의 가장 중요한 요소로 간주되었던 시절이 있었다. 다행히도 이러한 균형의 부족은 점차적으로 보완되었다.

교훈 : 예수님은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과 사랑으로 하나가 되기를 기도하셨다. 둘 중에 하나가 없으면 진정한 연합을 이룰 수 없다.

부가적용)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했는데 진리란 무엇인가? 성경은 진리를 언제나 하나님과 연관시켜 말한다. 하나님과 상관없는 진리란 없다. 진리는 하나님의 특성이며 본성 그 자체이다. 구약성경은 종종 하나님을 "진리의 하나님"이라고 부른다. 시31:5에서는 "내가 나의 영을 주의 손에 부탁하나이다 진리의 하나님 여호와여 나를 속량하셨나이다" 했고, 사65:16에서는 "이러므로 땅에서 자기를 위하여 복을 구하는 자는 진리의 하나님을 향하여 복을 구할 것이요 땅에서 맹세하는 자는 진리의 하나님으로 맹세하리니 이는 이전 환난이 잊어졌고 내 눈 앞에 숨겨졌음이라" 했다. 우리가 진리를 아는 것은 오직 하나님을 알 때이다.

나의 삶 속으로

| 묵상 |
진리의 연합과 사랑의 연합 가운데 오늘날 교회의 결핍은 무엇입니까?
(왼쪽 페이지에 이어서) 그러나 오늘날에는 우리가 다른 극단 즉 연합을 위해서는 진리보다 사랑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할 위기에 처해 있다. 우리는 진리 없는 사랑은 맹목적이며 사랑 없는 진리는 결실이 없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사도 교회는 예수님이 기도하셨던 연합을 드러냈다.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행 2:42).

| 적용 |
진리와 사랑으로 연합한 교회를 만들기 위해 그대가 기여할 수 있는 일은 무엇입니까?

영감의 교훈 : 온전한 연합 - “진리를 믿는다고 주장하는 자들이 진리로 거룩해지고 그리스도에 대해 그분의 온유함과 겸손함을 배울 때 교회에는 온전하고 완벽한 연합이 있을 것이다”(영문시조, 1900년 9월 19일).

기도 : 나눠져 있는 우리 교회 신자들의 마음에 그리스도의 사랑을 부어주옵소서. 우리가 사랑으로 연합하여 진리를 전할 때,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진리의 깃발 아래로 모여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넷째날(수) 연합의 큰 장애
8월 20일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마 7:1~2).

교사강해 4)
예수님 당시에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외식적이고, 형식적이고, 습관적인 편견에 사로잡힌 신앙의 기준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자신들의 기준의 잣대로 다른 사람들을 정죄하고 판단하는 행위를 엄격하게 행했다. 그들은 누구보다 더 하나님을 잘 믿는다고 생각하며 신앙이란 이름으로 자기들과 같은 생활을 못하는 다른 사람들을 낮게 보고 비판하며 판단하고 정죄했던 것이다. 즉 자기들의 전통, 유전, 지식, 문화적 배경으로 신앙적 삶의 기준을 높이 정하고 그 기준에 따라 백성들을 판단했던 것이다. 이런 사람이 가정이나 교회에 한 사람만 있어도 여러 사람이 상처를 입고 주위가 피곤해진다. 우리는 자기가 자라온 교회의 신앙적 배경에서, 혹은 자신이 배우고 경험한 지식의 배경을 기준으로 평신도, 직분자들과 교역자들을 판단하는 일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아니라고 하면서도 바리새인적으로 행동한다. 이러한 편견적인 판단은 하나님을 모르는 어리석음과 무지에서 나오는 죄요, 교만의 죄요, 수군수군하는 죄요, 비방하는 죄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 자매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을 경멸하는 죄를 범하는 비판을 하지 말아야 한다. ‘비판하지 말라’는 것은 자신이 하나님의 자리에 앉아서 판단하지 말라는 뜻이다. 우리를 판단하실 분은 오직 하나님 한분뿐이시다. 다른 사람을 비판하는 사람은 자신은 의롭다고 여기기 때문에 그렇게 한다.

예수님이 마 7:1~5에서 주신 말씀은 교회 안의 분열과 갈등을 피하는 데 얼마나 도움이 되는가? 자기 자신의 단점보다 다른 사람의 단점이 훨씬 쉽게 보인다.
비판은 우월성이라는 부정적인 감정을 일으킨다. 왜냐하면 비판하는 사람은 자기보다 못한 것처럼 보이는 다른 사람을 자신과 비교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를 다른 사람이 아닌 예수님과 비교해야 한다.
“너는 네 백성 중에 돌아다니며 사람을 비방하지 말”(레 19:16)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전적으로 순종한다면 얼마나 많은 문제를 피할 수 있을까? 안타깝지만 “말쟁이는 친한 벗을 이간하느니라”(잠 16:28)는 말씀은 진실이다.
반면 다른 사람에 대하여 말해야 할 때도 있다. 하지만 말하기 전에 우리는 스스로 다음의 세 가지를 물어야 한다.
1. 내가 하려는 말은 사실인가?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라”(출 20:16). 간혹 우리는 가정이나 추측에 불과한 것을 마치 사실인 것처럼 말할 때가 있다. 게다가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주관적인 평가를 더하여 다른 사람의 의도를 잘못 판단하는 위험에 빠지기도 한다.
2. 내가 하려는 말은 덕이 되는가? 그 말을 듣는 사람에게 유익한가? 바울은 우리에게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엡 4:29) 것만 말하라고 권고한다. 사실이라 할지라도 덕을 세우지 못한다면 말하지 않는 편이 더 낫지 않겠는가?
3. 그것을 사랑의 방식으로 말할 수 있는가? 우리의 말하는 방법은 우리가 말하려는 내용만큼 중요하다(잠 25:11 참고). 그것이 진실이고 덕을 세운다 할지라도 우리는 상대방의 감정을 상하게 하지 않는 방법으로 그것을 말할 수 있는지 확인해야 한다.

교훈 : 우리는 교회의 연합을 위해 어떤 말이든지 그 말이 미칠 영향을 생각하며 다른 사람을 비난하거나 험담하기보다 하나님의 능력과 영광을 찬양해야 한다.

부가적용)
미국정부는 대통령 취임식 때 대통령이 좋아하는 성경구절을 택해 취임 선서를 한 후, 성경에 입을 맞춤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경외심을 나타낸다고 한다. 링컨 대통령은 취임식 때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마7:1)는 말씀을 했다고 한다. 변호사 시절 링컨은 잘난 척 잘하는 <제임스 쉴즈>를 못 마땅히 여겨 익명으로 신문에 비난의 글을 올렸다가 쉴즈의 목숨 건 결투 신청을 받고 결국 사과를 통해 생명을 건질 수 있었다. 이 사건 이후로 링컨은 마태복음 7장1절을 인생의 좌우명 삼았다고 한다. 탈무드에는 ‘남을 비방하는 것은 살인보다도 위험한 일’이라고 말하고 있다. 살인은 한 사람밖에 죽이지 않지만 비방은 세 사람을 죽인다. 비방하는 사람, 그것을 듣고 있는 사람, 그리고 비방 당하는 사람이다.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사람은 하나님께 판단 받는다. 2절을 보라.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하나님께 판단 받으려면 다른 사람을 판단해도 좋다. 하나님 앞에 판단 받기 전에 사람들로부터도 자기가 판단한 기준에 따라 판단을 받는다. 그리고 공의로우신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우리가 판단한대로 판단 받는다. 여기에 ‘헤아리다’는 말은 ‘재다’, ‘측량하다’, ‘계산하다’는 뜻입니다. 누가 더하고 누가 덜하고, 누가 더 많고 누가 더 적고 하며 비판하지 말라는 말씀이다.
인간의 판단은 언제나 어느 정도의 오류가 있다­사람이 무엇인가를 판단할 때 그 기준은 대개 자기의 감정과 상식과 지식에 의존한다. 남성은 여성의 심리를, 여성은 남성의 심리를 100% 이해할 수 없다. 다른 사람의 행동에 나타나는 동기를 정확히 헤아릴 수 없다. 그래서 다른 사람에 대한 판단에는 언제나 실수가 오류가 있게 마련이다. 더군다나, 추측하여 말하는 것, 과장하여 말하는 것은 재판장이신 하나님의 일을 대신하는 참람된 일임을 알아야 한다. 󰡒자신을 다른 사람보다 낫게 생각하거나 자신을 그들의 심판관의 자리에 두지 말라. 그대는 동기를 식별할 수 없으므로 남을 능히 판단할 수 없다. 남을 비판함으로 그대는 자신에게 유죄 선고를 내리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대는 그대가 형제를 참소하는 자인 사단과 한통속임을 보여주기 때문이다.󰡓(소망, 314)
그대는 다른 사람들을 바로 잡아주고 그들의 잘못을 느끼게 해주기를 원할 위험에 빠질 수 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대에게 하라고 맡겨주신 사업이 아니다. - 5T 337

나의 삶 속으로

| 묵상 |
그대의 비판적인 태도 때문에 교회에 어려움이 생길 가능성은 얼마나 큽니까?
(왼쪽 페이지에 이어서) 야고보는 혀를 큰 숲을 태울 수 있는 작은 불로 비유하였다(약 3:5~6). 소문을 들을 때 우리는 불에 장작을 더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나무가 다하면 불이 꺼지고 말쟁이가 없어지면 다툼이 쉬”(잠 26:20)기 때문이다. 소문이 퍼지려면 전달자의 사슬이 있어야 한다. 우리는 소문을 듣지 말든지 아니면 그것을 들었어도 전달하지 않음으로 소문의 고리를 끊을 수 있다. “숙덕공론을 하여 낭패를 당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무한하신 권능과 그분의 영광을 이야기”(하늘을 향하여, 306)하자.

| 적용 |
서로를 비난하는 정신이 교회를 지배할 때에 그대는 무엇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까?

영감의 교훈 : 사탄의 전쟁술을 익히지 말라 - “성령께서는 날카롭고 비평적인 사람이 되기를 좋아하는 이들과 더불어 일하지 않으신다. 토론자들과 만날 때 그러한 정신을 품어 왔으며, 어떤 이들은 버릇처럼 싸움에 익숙해지기까지 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일을 통해 수치를 당하신다. 날카로운 창살을 뒤로 걷어 치워라. 사탄의 학교에서 그의 전쟁술을 익히지 말라. 성령께서는 비난의 말을 하도록 고무시키지 않으신다”(목사와 복음교역자에게 보내는 권면, 248).

기도 : 아버지, 남을 비난하고 싶을 때 차라리 침묵을 선택할 수 있도록 도와주옵소서. 서로를 비판하며 다툴 때에 차라리 기도하며 묵묵히 주의 일에 집중하도록 도와주옵소서. 모두가 교회에 하나님이 없다고 할 때에도 오히려 주님을 찬양하게 하옵소서.

다섯째날(목) 연합의 회복
8월 21일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 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마 5:23~24).

교사강해 5)
예물을 제단에 드리는 것은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이고,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은 나와 형제와의 관계이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하나님께 제물을 드리는 하나님과 나의 관계를 잘 이루려면, 먼저 나와 내 형제와의 관계를 화목케 하고 와서 하나님께 예물을 드리라고 하신다. 왜 이와 같이 말씀하셨을까? 예수님께서는 마25:40, 45 말씀에서 작은 소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나에게 한 것이고, 작은 소자 하나에게 하지 않은 것이 곧 나에게 하지 않은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또한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바울을 부르신 예수님은 바울을 향하여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행9:4)고 말씀하신다. 그러나 바울은 예수 믿는 성도는 핍박을 했지 한 번도 예수님을 만난 적이 없다. 예수께서는 작은 소자 하나에게 행한 것이 곧 예수님께 행한 것으로 생각하신다. 따라서 형제에게 화목하지 않고 예수님께 예물을 드린다는 것은 곧 예수님과 화목하지 않은 상태에서 예수님께 예물을 드린다는 의미와 같다 따라서 먼저 내 이웃과 화목하고 와서 예수님께 예물을 드려야 하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먼저 화목할 수 있는가 그것은 내가 먼저 회개기도부터 하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불화의 관계에 있는 형제와 먼저 화목하고 와서 하나님께 예물을 드리라는 것이다.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보다 먼저 할 일은 나와 내 형제와의 관계부터 화목케 하여야 하는 것이다.

왜 예물을 드리기 전에 피해를 입은 형제와 화해하는 것이 필요한가?(마 5:23~24)
제단에 드리는 제물에는 여러 종류가 있었지만 아마도 예수님은 하나님으로부터 사함을 얻기 위한 동물 제사를 언급하셨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하나님께 용서를 받으려면 우리는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바로잡아야 한다. 화해를 하려면 자신의 잘못을 겸손하게 인정해야 한다. 이런 태도 없이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용서를 구할 수 있겠는가?
누군가 우리에게 해를 끼칠 때 우리가 밟아야 하는 세 단계의 과정은 무엇인가?(마 18:15~18)
예수님은 우리가 그의 잘못을 다른 사람에게 말하기보다 잘못을 저지른 사람에게 말하되 그를 정죄하지 말고 대신 그의 잘못을 보여주면서 회개하도록 권유해야 한다고 말씀하신다(레 19:17 참고). 우리는 온유와 부드러운 사랑의 정신으로 그가 회개하며 사죄할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자신의 잘못을 깨달을 수 있도록 가능한 모든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우리는 그의 잘못을 공개함으로 그를 수치스럽게 하지 말아야 한다. 그렇게 하면 그의 회복은 더욱 어렵게 된다.
회개와 화해로 인도하는 이상적인 방법은 개인적인 대화이다. 그러나 가해자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거나 일을 바로잡으려고 하지 않는다면 다음 단계는 잘못을 저지른 사람을 설득하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한두 명의 증인을 대동하는 것이다(신 19:15). 그에게 회개하도록 권유하려면 이 증인들은 그 사건과 개인적으로 연루되어 있지 않아야 한다. 그렇게 하면 가해자가 그들의 권유조차 거절할지 라도 그들은 그를 위해 기울인 노력에 대하여 증언할 수 있다.

교훈 : 우리는 하나님께 용서를 빌기 전에 사람과 화해해야 하고, 내게 해를 끼친 사람을 정죄하기보다 회개할 기회를 주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부가적용)
하나님께 경배하고 예물 드리는 일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믿는 형제자매가 서로 화목(和睦)하는 것을 제일 기뻐하신다. 이 세상의 모든 부모들도 그렇지 않은가? 자녀들이 부모에게 맛있는 음식을 가져오고 좋은 의복을 사오는 것보다 오히려 형제간에 화목하고 사이좋게 지내는 것이 더 기쁘게 여기는 일이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이다. 주님 안에서 형제된 우리 성도들이 아무리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예물을 드리고 경배해도 서로 물고 찢고 싸우면 하나님께서는 그 예물을 싫어하신다. 한 가정에서도 남편과 아내가 물고 찢고 싸우면 그 다음에는 기도가 막혀버린다. 기도를 해도 하나님이 들어주시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서로 용서해주고 화목 하는 것은 우리 신앙생활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예배란 하나님께 예물을 드리는 것이다. 입술로 찬송의 예물을 드리고 기도로 예물을 드리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가 찬미와 기도로 예물을 드릴 때 그것을 받아들이지 아니하면 우리의 심령이 얼마나 메말라지겠는가? 그러므로 하나님께 우리의 찬송과 기도가 열납되기 위해서는 서로 용서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용서하고 화해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예수 믿는 사람끼리 용서하고 화해(和解)하는 것을 제일 기뻐하신다. 우리가 회개하고 기도하면 성령이 들어오셔서 하나 되게 하시고 서로 용서하고 화해하게 만든다. 그 다음에 예물을 받으신다. 하나님 앞에 예물을 드린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세워 가는 것이다. 그러나 정말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원한다면 먼저 사람들과의 바른 관계를 만들어야 한다. 요한일서 4장에는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요일4:20)고 말씀하고 있다. 주님은 좋은 관계를 위해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셨다. 주님의 죽으심은 하나님과 사람의 화목을 위한 것이고 이로 말미암아 사람과 사람 사이의 화목을 이루어 주신 것이다. 우리가 누군가에게 원망을 들으면서 하나님께 예배하고 거룩한 의식에 참여한다는 것은 매우 위선적인 것이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예배는 눈에 보이는 화려한 의식이 아니라 형제와 함께 교회에 나와 손을 맞잡고 눈물을 흘리며 회개하는 예배이다.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를 드리려면 예배드리기 전에 먼저 형제와 화목해야 한다. 그래야 참된 예배를 드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먼저 분을 푸는 사람이다. 너를 송사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에 급히 사화하라고 말씀하신다. 이는 기회가 왔을 때에 지체치 말고 즉시 화목함으로 문제를 해결하라는 말씀이다. 믿는 자의 이웃과의 관계는 항상 화목하며, 서로 사랑하는 관계이어야 한다. 이웃을 사랑하며 이웃과 화목한 관계를 계속해서 유지하려면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항상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하며(딤전4:5). 기도를 항상 힘쓰고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어야 하는 것이다 (골4:2)

나의 삶 속으로

| 묵상 |
우리에게 잘못이 있어도 때로 기꺼이 먼저 사과하기가 어려운 이유는 무엇입니까?
(왼쪽 페이지에 이어서) 만약 앞의 두 단계의 노력이 실패하면 마지막으로 우리는 징계가 아닌 회개로 인도하기 위한 최종적인 호소를 위해 그것을 교회에 말해야 한다. 처음부터 모든 과정의 목적은 구원이어야 한다(갈 6:1).

| 적용 |
징계를 받았거나 스스로 물러난 자를 위해 교회는 어떤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까?

영감의 교훈 : 먼저 화해하라 - “만일 그대가 말이나 행동으로 형제에게 잘못을 범했다면, 그대의 예배가 하늘에 가납되기 전에 그대는 먼저 그와 화해해야 한다. 그대가 손해를 입힌 자들에게 고백하고, 변상을 하고,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 만일 어떤 사람이 형제에 대하여 빈정대는 감정이나 분노나 적의를 품고 있다면 그 사람을 개인적으로 찾아가서 그의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구해야 한다”(교회증언 5권, 646).

기도 : 예수님, 실수와 약점 투성이인 우리를 하나로 모아 교회로 불러 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 각자가 잘못을 저지를 수밖에 없지만 기꺼이 잘못을 시인하고 서로 용서함으로 사탄이 틈탈 수 없는 강한 교회가 될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시옵소서.

여섯째날(금)
8월 22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교회증언 5권>, 236~248 “그리스도인의 연합”, <교회증언 8권>, 239~243 “하나님 안에서 그리스도와 하나가 됨”를 읽어 보라.

“연합은 힘이요, 분쟁은 허약이다. 현대 진리를 믿는 자들이 연합할 때, 그들은 현저한 영향을 발휘한다. 사탄은 이 사실을 잘 안다. 그가 오늘날처럼 주님의 백성들 사이에 원한과 분열을 일으킴으로 하나님의 진리를 무효로 만들기 위하여 결정적인 노력을 한 적은 없었다”(교회증언 5권, 236).

“우리는 모든 사람을 특별히 좋게 생각하되 우리의 형제들에 대해서 달리 생각하지 않을 수밖에 없게 될 때까지는 그렇게 해야 한다. 우리는 나쁜 소문을 성급히 신임하지 않아야 한다. 이런 것들은 흔히 질투나 오해의 결과로 생겨나기도 하고 혹은 과장이나 사실의 부분적 표현에서 나올 수도 있다”(교회증언 5권, 58).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➊ 교리는 다르지만 그대와의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친절하고 수용적이며 사랑이 많은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대는 그들과 어떻게 관계를 맺어야 합니까? 반대로 신학적으로는 동의하면서도 자신들과 시각이 다른 자들에게 대하여 가혹하고 비판적이며 증오심을 품는 자들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➋ 교회에 연합이 중요할 뿐 아니라 그러한 연합을 잘 유지하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그대는 기독교를 바라보는 비신자들이 신자들의 연합을 어떤 시선으로 바라볼 것이라고 생각합니까?

➌ 예수님은 우리에게 해를 입힌 자들을 용서하라고 명령하십니다. 하지만 회개하지도 않고 우리에게 용서를 구하지도 않는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리는 그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까요?

➍ 사랑과 징계의 관계는 무엇일까요?

➎ 에큐메니컬 운동(종교통합운동)은 그것이 그리스도께서 기도하였던 연합을 이루기 위한 노력이라고 주장합니다. 동기가 아무리 좋더라도 우리는 마지막 때의 사건들과 관련된 명확한 문제들 외에도 그 운동에서 어떤 문제점을 볼 수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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