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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과 그리스도의 율법 그리고 복음(교사강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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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조춘호 작성일14-05-26 11:31 조회4,929회 댓글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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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과 그리스도의 율법 그리고 복음

5월 31일 안식일
일몰:오후 7시 47분

기억절 :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
아 온 것이라”(개역, 요 1:17).

도입)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율법을 지키라고 준 것은 죄와 의를 알게 하기 위한 것이며, 이 율법은 죄를 짓지 못하게 감시하는 역할뿐이었고, 율법으로 다스리는 것은 죄를 짓지 못하게 하는 방법이었다. 이는 율법 안에 죄를 가두어 죄가 힘을 쓰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율법은 죄를 짓지 못하게 하려고 그 법을 지키는 것에 불과했고, 지은 죄를 율법으로 없게 할 수는 없었다(히 10:11 참고). 그 율법 중 하나가 죄 사함을 위해 황소와 염소의 피를 죄인에게 뿌리는 것이었으나, 그것으로써 죄가 완전히 사해지지는 않았다(히 10:4). 예수님께서 이 모세 율법을 완전하게 하기 위해 죄를 위한 제사법을 폐지하셨다(마 5:17, 히 10:12-18 참고). 율법적 제사를 폐지한 것은 어떠한 ‘법’으로써가 아니고 ‘예수님의 피’로써였다. 이 율법과 장막(帳幕)은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요(히 8:3-5, 10:1), 초등 학문이며(갈 4:3-5), 그리스도 앞으로 인도하는 몽학(蒙學)선생이므로(갈 3:24), 그리스도가 오셨을 때는 율법 안에 있을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앞으로 나아와야만 죄 사함과 구원이 있게 된다고 가르치고 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은혜와 진리이며, 그 구원은 죄 사함을 받고 영생을 얻는 것이다.

연구 범위 : 롬 7:7~12, 신 30:15~20, 마 7:24~27, 행 10:34~35, 요 15:10, 엡 2:1.

예수님이 태어나시기 약 백 년 전에 로마 시인 루크레티우스는 중세시대까지 역사 속에 파묻혔던 ‘만물의 본성에 관하여(On the Nature of Things)’라는 유명한 시를 남겼다. 때로 무신론자라는 비난을 받지만 루크레티우스는 그의 시에서 신들의 존재를 부인하지 않았다. 그는 단지 그들이 신이기 때문에 인간사에 전혀 관심이 없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반면 성경은 세상에 유일신이 계시며 그분은 이곳에서 벌어지는 일에 관심이 지대하시다고 주장한다. 인류에 대한 그분의 뜨거운 관심은 그분의 율법(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 안내해 주는)과 그분의 은혜(율법을 범했을지라도 우리를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방편)를 통해 나타난다. 때로 은혜와 율법은 서로 상반된 것처럼 보이지만 둘은 불가분의 관계이다. 그것들은 작용하는 방식이 서로 다르지만, 의가 죄를 이길 것이라는 사실을 함께 보여준다. 하나님의 율법과 은혜는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과 우리를 구원하여 영원한 나라로 인도하려는 그분의 소망을 강력하게 증언한다.

*매일 교과를 공부할 때에 기도로 시작해서 기도로 마칩시다.

안교 활동반과 교과 토의

※ 학습 목표
➊ 깨닫기 : 율법과 은혜가 죄를 이기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을 함께 계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한다.
➋ 느끼기 :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뜨거운 관심을 감사하게 여긴다.
➌ 행하기 : 다른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에 하나님과 협력한다.

Part 1. 인사 안교 반장 또는 소그룹 리더
서로 인사를 나누고 손님을 환영해 줍니다.
출석과 공부를 확인하고 안교헌금을 걷습니다.
결석자와 구도자에 대한 보고를 듣고 방문 계획을 세웁니다.

Part 2. 나눔 안교 교사 또는 소그룹 리더(A나 B 중 하나를 선택하십시오.)
A. ❶ 그대는 뭘 보면 한 눈에 그 사람의 성격을 가늠할 수 있습니까?
❷ 우리는 율법에서 하나님의 품성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습니까?
❸ 예수님이 가져오신 은혜와 복음은 율법과 더불어 하나님의 품성을 어떻게 나타냈습니까?
❹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품성을 기초로 세 천사의 복음을 전할 수 있을까요?
B. ❶ 그대는 어떤 상황에서 양심이 불편함을 느낍니까?
❷ 우리가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성경을 모르는 사람은 어떻게 율법을 깨닫게 됩니까?
❸ 율법을 알고 복음을 깨닫도록 하나님이 우리를 먼저 부르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❹ 어떻게 하면 우리가 율법에 나타난 진리와 예수님이 가져오신 십자가 은혜 그리고 약속된 구원의 복을 전하는 훌륭한 통로가 될 수 있을까요?

결론 : 하나님의 율법은 그분의 은혜와 함께 인류에 대한 그분의 사랑과 우리를 구원하여 영원한 나라로 인도하려는 그분의 소망을 강력하게 증언합니다.

Part 3. 실천 안교 반장 또는 소그룹(예비) 리더
❶ 6월 14일 저녁이나 15일에 소그룹 모임을 갖고 친구들을 초청하기로 계획합니다.
❷ 안식일 오후 활동을 점검하고 참여를 권장합니다.
❸ 기도 제목을 가지고 함께 기도합니다.

첫째날(일) 죄와 율법
5월 25일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라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롬 7:7).

교사강해 1)
현대의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소위 ‘복음’을 강조하다가 율법의 존재와 그 역할을 오해하는 경우가 많다. 특히 ‘율법주의’와 율법의 바른 기능을 혼돈함으로 율법이 없는 복음을 외치는 사례들이 많아지고 있다. 그러나 율법이 없는 복음이란 사실 성경에서 존재하지 않으며 심지어 율법이 없는 복음은 ‘무법주의’(Antinomianism)로 향하게 되어 복음을 아주 값싸고 능력 없게 만들어 버린다. 바울이 로마서를 쓸 당시에도 바울의 복음을 오해하여 바울의 복음을 ‘무법주의’로 만든 사람들이 많았었다. 이들은 “마음껏 죄를 지을수록 하나님의 은혜는 더욱 드러날 것이니 죄를 짓자. 더 이상 율법은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주장하였다. 이에 관하여 바울은 탄식하며 부르짖는다. “그러면 선을 이루기 위하여 악을 행하자 하지 않겠느냐 어떤 이들이 이렇게 비방하여 우리가 이런 말을 한다고 하니 저희가 정죄받는 것이 옳으니라”(롬 3:8) 사실 성경을 이해하는 데에 있어 율법과 은혜에 대한 바른 인식은 대단히 중요하며 나아가 우리의 개인적 구원에 대한 인식과 연결된다. 다른 말로 하면, 구원 받은 후의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복음과 율법의 바른 관계를 이해하지 못하고는 할 수가 없는 것이다.

롬 7:7~12을 읽어 보라. 여기서 바울은 죄와 율법의 관계에 대하여 어떻게 말하는가? 심지어 바울은 왜 ‘율법이 죄냐?’고 질문해야 했을까?
바울은 ‘율법이 죄냐?’는 수사적인 질문을 하면서까지 율법과 죄를 밀접하게 연결시킨다. 대답은 물론 아니다. 오히려 바울은 끝부분에서 “이로 보건대 율법은 거룩하고 계명도 거룩하고 의로우며 선하”(롬 7:12)다고 말한다. “이로 보건대”라는 표현은 그의 논증의 결론임을 말한다. 즉 율법은 절대 죄가 아니며 진실로 거룩하고 선한다.
여기서 바울의 논리는 형법과 범죄 사이의 관계와 유사하다. 어떤 것이 범죄가 되려면 법이 그것을 그렇게 명시해야 한다. 어떤 나라에서는 합법적인 행위가 어떤 나라에서는 감옥에 갈 일이기도 하다. 그 이유는 한 나라에서는 그 행위를 법으로 금지하지만 다른 나라에서 금지하지 않기 때문이다. 똑같은 행동이라도 결과는 다르다. 무엇이 다른 차이를 만드는가? 법이다.
하지만 법이라고 다 선한 것은 아니다. 미국 초기에는 도망한 노예를 주인에게 돌려보내라는 법이 있었다. 법이긴 법이지만 전혀 공의롭지 못한 법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법은 그분의 품성을 반영한다. 그래서 바울은 율법이 거룩하며 선하다고 말했다. 누가 그런 법을 제정하였는지 생각해 본다면 무엇이 더 필요하겠는가?
율법에 대한 자신의 요점을 증명하기 위해서 바울이 롬 7:7에서 언급한 계명의 핵심은 무엇인가? 바울은 왜 “도둑질하지 말라” 같은 계명 대신에 그 계명을 사용했을까?

교훈 : 사람이 만든 법은 때로 공의롭지 못하다. 그러나 하나님이 제정하신 법은 그분의 품성을 반영하기 때문에 선하고 의로우며 정확하게 죄를 가리킨다.

부가적용)
율법은 모든 인간으로 하여금 죄를 깨닫게 함으로 모든 인간의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심판 아래 있게 하는 것이다. 따라서 율법으로는 율법 앞에서 의롭다고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율법의 절대기준에 의하면 로마서 3장 10절처럼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율법에 의하여 모든 사람이 율법아래서 의로울 수 없으므로 하나님의 진노를 받기에 합당하게 된다. 이는 하나님께서 율법에 의하여 인류를 멸망시킨다 하더라도 하나님께 따질 수 있는 자가 없는 것이다. 오직 하나님의 공의가 이루어질 뿐이다. 이때 ‘복음’이 등장한다.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 3:21-24). 복음, 즉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는 구원, 은혜로만 얻는 구원의 메시지가 하나님께서 우리 인류에게 주신 기쁜 소식이다. 이 구원의 길이 얼마나 중요하면 이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바울은 갈라디아서 1장 7-9절을 통하여 경고한다.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교란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가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나의 삶 속으로

| 묵상 |
십계명에는 선하신 하나님의 품성이 어떻게 나타나 있습니까?
(왼쪽 페이지에 이어서) 바울이 다른 계명 대신에 그 계명을 사용했던 이유는 그것이 잘못인지 명확하지 않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탐심이 죄라고 믿을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물론 살인이나 절도는 그렇게 믿는다. 일반적으로 그것이 잘못이라는 사실을 알기 위해 십계명까지 필요하지는 않다. 그러나 탐심은 경우가 다르다. 그래서 율법은 죄가 무엇인지 보여준다는 바울의 논점을 증명하는 데 딱 들어맞는 예이다. 그렇지 않다면 탐심이 잘못이라는 사실을 그도 알지 못했을 것이다.

| 적용 |
특별히 그대의 품성적 결함을 지적하는 계명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영감의 교훈
하나님의 품성과 율법 - “하나님의 율법은 바로 그 본질상으로 불변이다. 그것은 율법의 창시자이신 하나님의 뜻과 품성을 나타낸다. 하나님이 사랑이시므로 그분의 율법도 사랑이다. 율법의 두 가지 큰 원칙은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사람에게 대한 사랑이다.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롬 13:10)다. 하나님의 품성은 의며 진리이다. 그의 율법의 본질도 마찬가지이다”(각 시대의 대쟁투, 466).

기 도
계명의 말씀 속에서 거룩하고 선하신 아버지의 모습을 봅니다. 예수님의 피의 공로와 그분의 완전한 의에 의지하여 거짓이 없고 순결하며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운 아버지의 품성을 닮는 자녀 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둘째날(월) 율법과 이스라엘(신 30:15~18)
5월 26일

“보라 내가 오늘 생명과 복과 사망과 화를 네 앞에 두었나니 곧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모든 길로 행하며 그의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하는 것이라 그리하면 네가 생존하며 번성할 것이요 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가서 차지할 땅에서 네게 복을 주실 것임이니라”(신 30:15~16).

교사강해 2)
율법은 출애굽 직후 여호와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언약을 맺는 상황에서 주어졌다. 언약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이스라엘 백성은 이 율법에 충실해야만 했다(출19:5). 하나님의 백성이 율법에 충실하게 순종했을 때에는 분명 이 언약대로 하나님의 보호아래 살게 됨으로써 율법이 그들을 위한 삶의 수단이 되었지만, 그들이 율법을 무시하고 거역함으로써 하나님과의 언약에 불순종했을 때에는 언약을 통해 경고되었던 재앙이 뒤따랐다. 율법의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까지 그의 백성을 하나님을 예배하는 이상적인 공동체로 세우며 보존하는데 있었다. 모세의 율법에 대한 예수님의 언급을 자세히 살펴보면 예수님께서 결코 율법의 폐지를 주장하지 않으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수님은 당신께서 율법을 폐하러 오지 않으셨음을 분명히 하셨으며(마5:17-20), 오히려 보다 철저하게 율법에 따라 살 것을 요구하신다. 즉 율법을 형식적으로 지킬 것이 아니라, 율법이 근본적으로 의도하는 바를 실행할 것을 강조하셨다(눅11:42; 18:18-22).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모세의 율법과 후대에 첨가된 서기관들의 유전, '할라카'(막7:1-8)를 구별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창녀와 세리들과 함께 식사를 하셨고, 주로 안식일에 병자를 고침으로써 서기관의 유전, '할라카'를 정면으로 거부하셨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율법을 주신 일은 특별한 행위였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율법을 주시기 직전에 그분의 백성들이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출 19:6)임을 상기시키셨다. 하나님이 지상의 모든 민족 가운데 그분의 율법을 특별하게 계시한 민족은 바로 이스라엘이었다(롬 9:4). 율법을 주신 의도는 백성에게 짐을 지우려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선택 받은 민족이 하나님 정부의 기초인 도덕적 규범을 민중들에게 드러내도록 주신 도구였다. 이스라엘 백성은 세계적인 선교 사명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과 협력자가 되어야 했다. 그리고 하나님의 율법은 그분의 대리자들을 확인할 수 있는 표식이었다.
신 30:15~20에 따르면 아브라함, 이삭, 야곱에게 주신 언약과 율법 사이의 관계는 무엇인가? 이러한 원칙들은 새 언약 아래 있는 오늘날의 우리에게 어떻게 적용되는가?(마 7:24~27 참고)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그분의 대표자로 선택하셨다. 이스라엘 백성은 모든 민족에게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약속된 복을 전하는 통로가 되어야 했다. 하지만 그 복은 결코 저절로 전해지지 않았다. 이스라엘 백성은 선택 받은 민족으로서 여호와의 뜻과 조화롭게 행하여야 했다. 모세는 생명과 번영이 하나님의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킬 때에만 이르러 오리라는 점을 분명히 밝혔다(신 30:15~16).

교훈 :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께 선택 받은 민족으로 율법을 받고 그 뜻에 따라 행하여 모든 민족에게 하나님이 약속하신 복을 전하는 통로가 되어야 했다.

부가적용)
창세기를 제외한 모세오경은(출애굽기-신명기) 출애굽과 관련한 역사적 사건들과 율법을 중요하게 다루고 있다. 출애굽기에서는 시내 산에 이를 때까지(출 19장) 출애굽하는 과정에 대한 역사를 다루고, 그 내용은 민수기로 이어져 안식의 땅으로 들어가기까지의 광야 생활 전반에 대한 사건을 다루고 있으며, 신명기에서도 일부 그 역사는 제시된다. 한편 출애굽기 20장부터는 시내 산에서 율법을 받는 것으로 시작하여, 성막 및 여러 사회적인 법들을 제정하시고, 레위기에서는 율법을 세세하게 강론하고 계시며, 신명기에는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 직전에 다시 한 번 반복해 전하시는 율법의 내용들을 기록하고 있다. 이 율법은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는 표였다. 율법은 이방인들에게는 주어지지 않은, 오직 유대인들만을 위한 법이었다. 로마서 2:17-23에서는 유대인이냐 이방인이냐의 구분을 율법을 받았냐 그렇지 않느냐 하는 것으로 나누고 있다. 그러나 이 구분은 단순한 민족적인 구분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것은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유일 신앙으로, 이스라엘을 모든 이방인들과 구별하시려는 것이었다. 참 하나님의 백성과 이방인을 구별하는데 있어 이 율법을 지키는 그들의 삶으로 평가되었다. 『그러므로 이제 만일 너희가 참으로 내 음성에 복종하고 나의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백성보다 나에게 독특한 보물이 되리니, 이는 온 땅이 내 것임이라. 너희는 나에게 제사장들의 왕국이 되며 거룩한 민족이 되리라』(출 19:5,6). 그래서 십계명의 첫 네 계명은 모두 유일하신 하나님에 대한 절대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이것은 이스라엘과 하나님의 관계성을 설정하는 데에 있어 매우 중요하다. 즉 율법을 지킴으로써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시고, 이스라엘은 그분의 백성이 된다는 언약이 성립되는 것이다. 세상의 어느 민족에게도 이러한 언약은 맺어진 적이 없다. 그래서 “모세의 언약”이라 불리는 율법은 유대인의 민족적인 탄생에 있어서 절대적인 요소가 되었다. 로마서 7:14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율법은 “영적인” 것이어서 그들의 모든 신앙적인 규범이 되었고, 또한 모든 사회적인 규범들을 통한 이스라엘 민족의 통치 기틀이 되었다.

나의 삶 속으로

| 묵상 |
그대는 하나님의 복을 전하는 통로로서의 역할에 충실합니까?
(왼쪽 페이지에 이어서) 이스라엘 역사를 그르친 여러 반역의 일화를 보면 이스라엘 민족은 언약의 조건대로 사는 데 실패했다. 하지만 우리는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롬 3:23)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근래의 역사에서도 그리스도인을 자처하는 민족들이 전쟁도발, 편견, 압제의 태도로 하나님의 대의를 잘못 나타냈다.

| 적용 |
그대는 주변에 복음을 모르는 자들에게 어떤 은혜와 진리를 전할 책임을 느낍니까?

영감의 교훈
겸손과 순종을 배우라 - “빛을 받고 그 빛을 따르지 않으며 오히려 하나님의 요구를 무시하는 사람들은 저들의 축복이 저주로, 자비가 심판으로 변경되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고대 이스라엘 즉 하나님의 택하신 특별한 백성이었으나 그들 자신의 길을 따라감으로 멸망을 자초하였던 고대 이스라엘의 역사를 읽을 때 겸손과 순종을 배우기를 원하신다”(식생활과 음식물에 관한 권면, 379).

기 도
아버지, 복음을 가로막는 우리를 용서해 주시옵소서. 우리의 잘못된 삶이 빛을 가리지 않기를 원합니다. 진리에 순종하는 삶을 통해 그리스도를 반사하며 하늘의 복과 구원의 행복을 아름답게 증언할 수 있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셋째날(화) 율법과 민족들(행 10:34~35)
5월 27일

“베드로가 입을 열어 말하되 내가 참으로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아니하시고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다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다”(행 10:34~35).

교사강해 3)
하나님이 받으시는(Accept)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하나님은 어떤 사람을 들어서 사용하시려고 하는가? 이 물음에 답을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하나님이 받으시는 사람은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義)를 행하는 사람’ 이라고 하였다. 여기 <의>란 말을 영어 성경에서는 Righteousness 라고 번역했는데, 이 말은 헬라어 디카오수네(δικαιοσυνη)란 말이다. <디카이오수네>란 우리말로는 정의(正義), 공정(公正), 정직(正直)이란 뜻으로 해석할 수 있는 단어이다. 하나님은 어떤 사람을 들어 쓰시는가 하면 자기를 경외하며 정직하게 사는 사람들을 들어 사용한다는 말이다. 지금 우리나라에서 모든 분야에서 회복해야 할 급선무 중에 하나는 <공정>과 <정직>이라고 본다. 사회 각 분야에서 이것만 회복하면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크리스천들에게 덜 책무를 느끼게 될 것이라고 본다.

행 10:34~35, 17:26~27, 롬 1:20, 2:14을 읽어 보라. 이 말씀들이 가르치는 핵심 교훈은 무엇인가?
이스라엘 백성은 실패했어도 하나님은 다른 나라의 백성들을 증거 없이 내버려두지 않으셨다. 기록된 하나님의 계시를 받을 특권이 없었던 자들은 천연계에 나타난 광경을 통하여 하나님의 기별을 받았다(롬 1:20). 천연계 속에 펼쳐진 하나님의 책은 사람을 그분께로 인도하기에 충분한 정보를 담고 있다.
하나님은 또한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 일정한 영적 갈망을 주입하신다. 바울에 따르면 내주하시는 하나님의 영을 느끼는 자들은 그분을 찾아 나설 것이다(행 17:27). 수많은 사람이 세상이 주는 명성, 권력, 돈, 섹스 그 무엇도 궁극적인 만족을 주지 못함을 깨닫고 인생의 허무함을 느낀다. 본질적으로 이것은 전도서의 기별이다. 이런 허무와 불만족은 종종 사람들로 하여금 일상적인 것을 초월하는 존재를 찾도록 이끈다. 그들은 영혼의 갈망과 공허함을 진정시키고자 하는 소원을 가지고 계시된 진리로 이끌림을 받는다. 하나님의 뜻이 문서나 천연계 어디에 계시되었든지 그것을 받은 사람은 그 계시대로 살 책임이 있다. 진리를 전달하는 매체와 관계없이 진리는 진리이기 때문에 그 진리를 억압하는 자는 하나님의 진노를 살 것이다(롬 1:18). 따라서 많은 사람이 성경 말씀 또는 십계명을 받지 못했을지라도 하나님은 그들이 수집한 진리의 분량만큼 책임을 물으신다. 결국 모든 사람이 심판을 받되 하나님이 선지자 모세를 통해 분명하게 계시하신 율법이든, 또는 성문화된 율법은 모르지만 천연계 속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계발된 양심의 법이든 율법이 심판의 기준이 될 것이다.

교훈 : 율법은 천연계를 통해서도 계시된다. 그래서 누구든지 영적 갈망에 반응하여 하나님을 찾을 수 있고 그들이 깨달은 양심의 법에 따라 심판을 받게 된다.

부가적용)
하나님은 사람을 취할 때 외모를 보지 않는다고 하였다. 하나님은 외모보다 마음의 중심을 보시고 자기를 경외하는 사람들을 받으신다고 하였다. 위의 말씀을 보면 하나님 앞에서는 국적이 문제가 안 된다. 사실 국제 사회에 나가 보면 국적이 얼마나 편견을 같게 하는지 모른다. 어느 나라 사람인가에 따라 대하는 태도가 달라지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 하나님이 보시는 것은 자기 자신을 위하여 성취한 사람보다 얼마나 의(義)를 행하고 있느냐를 보신다고 하였다. 이것이 고넬료(Cornelius)를 하나님이 선택한 이유였다. 고넬료는 이방인이었다. 로마의 군대 장교였다. 유대인의 입장에서 보면 이방인은 모든 면으로 보아 하나님의 선택의 대상이 아니라고 생각하였다. 아브라함의 후손이요, 이삭과, 야곱의 후손 된 자기들만이 선민이라고 그렇게 생각하였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렇지 아니했다. 하나님은 저들의 고정관념을 깨뜨리기 위하여 베드로에게 먼저 이 뜻을 알리고 보여 줌으로서 복음의 확장에 일조를 더하게 하였다.

나의 삶 속으로

| 묵상 |
얼마나 많은 사람이 하나님을 찾고 있을까요?
실상은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살피사 지각이 있어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다 치우쳐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시 14:2~3)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전 3:11)을 주십니다. 그분은 자신을 “찾지 아니한 자들”과 “묻지 아니한 자들에게” 자신을 나타내십니다(롬 10:20). 그래서 때로 우리가 복음을 전하지 않았는데도 하나님을 찾아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 적용 |
주변에 세상으로부터 실망한 사람이 있다면 그대는 그 사람을 어떻게 돕겠습니까?

영감의 교훈
아직도 창조주를 증언하는 천연계 - “그러나 만물이 비록 퇴폐한 상태가 되기는 하였지만 아직도 그 가운데 아름다운 면이 많이 남아 있고 하나님이 주고자 하시는 실물 교훈이 말살되지는 않았다. 천연계를 올바로 이해하게 되면 그것들이 그들의 창조주에 대하여 말하고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실물교훈, 18).

기 도
아버지, 사람들이 더듬어 하나님을 찾고 있을 때에 우리가 손을 내밀어 잡아 주기를 원합니다. 우리를 준비시켜 주옵소서. 세상에 실망한 이들에게 하늘의 선물을 전하는 빛의 자녀가 되게 해 주시옵소서.

넷째날(수) 은혜와 진리(요 1:17)
5월 28일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요 1:17).

교사강해 4)
율법과 은혜의 대조적인 등장의 말씀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을 더욱 잘 알 수 있다. 그분은 공의와 사랑의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의 공의는 모세를 통하여 주신 율법이 알게 한다.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다. 이 두 사실은 모두 기독교 교리의 핵심이다. 첫째, 모세를 통해 주신 율법을 통해 볼 때 모든 인류는 하나님의 율법을 어긴 죄인이다. 죄가 무엇인지를 깨달으려면 율법을 배워야 한다. 성경은 우리에게 이 율법에 관한 것을 가르치고 있다. 이 율법이 몽학선생 역할을 한 것이라고 바울은 로마서에 기록하고 있다. "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되어... " (갈3:24) 몽학선생이란 초등교사 역할이란 뜻이다. 율법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은혜를 알기 위해 통과해야 하는 기초 과정인 것이다. 둘째, 가장 큰 계명은 사실 십계명보다 더 큰 율법은 예수님이 가르쳐 주셨다. 한 서기관이 예수님께 " 모든 계명 중에 첫째가 무엇입니까? " 라고 질문하자 예수님께서 "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눅12:30) 둘째는 이것이니 "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에서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 (눅12:31)하셨다. 셋째, 은혜의 진리로 오신 예수님을 통해 율법은 모세를 매개로 주신 것이나 은혜와 진리는 직접 우리에게 오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분이 예수님이시다. " 온 것이라 " '온 것'의 뜻은 '태어나다 발생하다' 란 뜻을 가지며 기원을 나타내기도 하다. 즉 예수님은 은혜와 진리의 근원이시며 실체이심을 뜻하기도 한다. 율법은 사람을 통해 주어졌지만 은혜와 진리는 주님이 친히 임하심으로 우리에게 온 것이다. 넷째, 우리 가운데 거하신 은혜와 진리 곧 우리는 율법보다는 은혜의 진리가 더욱 우리에게 가까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아예 예수님은 "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 (14절)라고 했다. 그분이 우리 가운데 거하심으로 "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 (14절)하셨다. 이 충만한 은혜와 진리를 예수님을 영접함으로 우리는 누릴 수 있다. "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 (12절) 주 예수를 영접하라. 그리하면 그 은혜와 진리의 충만함이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실 것이다.

요한은 구속의 역사를 한 절로 압축하였다(요 1:17). 아담이 지은 죄의 결과로 모든 인류는 죽음의 저주로부터 영향을 받는다. 예수님을 제외하면 인간 부모에게 태어난 그 누구도 죄를 짓는 성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기에 이 저주는 강화된다. 그래서 하나님은 한 백성을 택하셔서 그들을 통해 다른 백성에게 빛을 비추시려는 의도로 그들에게 자신의 율법을 계시하셨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구원의 수단이 아니라 의의 필요성을 끊임없이 상기시켜 주는 수단으로 율법을 제공하셨다.
빌 2:8, 요 15:10, 마 26:39은 예수님이 사셨던 생애에 대하여 어떤 사실을 말하는가?
첫째 아담은 하나님의 분명한 명령에 불순종함으로 온 세상을 혼란과 속박에 빠뜨렸다. 반면 둘째 아담이신 예수님은 순종의 생애를 통하여 첫째 아담이 불러온 속박에서 세상을 건지기 위해 오셨다. 예수님은 지구에 계셨을 때 자원하여 자신의 뜻을 아버지의 뜻에 굴복시키셨으며 죄를 짓지 않기로 결심하셨다. 저주와 거짓을 불러온 첫째 아담과 다르게 예수님은 이 세상에 “은혜와 진리”를 불러오셨다. 은혜와 진리는 율법을 대체하지 않는다. 대신 예수님은 율법만으로는 구원을 주기에 충분하지 않다는 사실을 보여주셨다. 그분이 가져오신 진리는 은혜에 대한 더 완전한 이해였다.
롬 6:23, 엡 2:8에 따르면 예수님에게서 기원한 은혜의 속성은 무엇인가? 예수님은 어떻게 인간에게 은혜를 공급하시는가?

교훈 : 예수님이 가져오신 은혜와 진리는 율법을 대체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내주로 말미암아 율법을 지키도록 우리에게 능력을 주기 위한 것이다.  

부가적용)
루이스 벌코프는 ‘은혜’를 정의하기를 ‘은혜란 신자를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통치방법이다. 즉, 은혜란 단지 죄인을 용서해 주시는 객관적인 하나님의 은총일 뿐 아니라 성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인격적이며 지속적인 거룩한 영향력을 말한다’라고 했다. 쉬운 말로 은혜는 한번 받고 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주님을 만나는 그 날까지 우리를 양육하고 성숙시키는 방법이며 수단으로, ‘지속적으로 우리의 삶을 간섭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이라는 것이다. 이 ‘은혜’의 정의를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구원의 세 시제’를 정확하게 알고 있어야 한다. 우리가 여러 번 공부했다시피 구원은 ‘칭의, 성화, 영화’ 모두를 ‘구원’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구원이라는 것은 어떤 한 시제에만 머물러서는 안 되는 것이다. 이런 말이다. 우리가 ‘구원을 받았다’라고 과거로 이야기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은 전지전능 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그 분이 계획하시고 시작하신 것은 절대 실패할 수 없다는 것을 근거로 원리적이며 신분적이며 운명적인 면에서 ‘구원을 받았다’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고 우리가 ‘구원을 받고 있다’라고 구원을 현재 시제로 이야기하는 것은 구원이라는 것은 우리가 이 죄 된 육신을 벗고 하나님께서 준비해 주신 눈부신 새 몸을 입고 영원한 새 하늘과 새 땅에 입성하는 그 날 완성이 되는 것이므로 ‘우리는 지금 구원을 받고 있다’라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의미에서 우리의 구원은 아직도 진행 중이라는 구원의 미래시제가 성경에 등장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는 단발 적이며 일회적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영화의 단계에 들어가게 될 때까지, 지속적으로 우리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게 되어, 그 분을 영접하게 된 사람들은 그 때부터 성화가 시작되기 때문에 ‘죄와 사망의 법’이 지배하던 그들의 삶을 ‘은혜의 법’인 ‘생명의 성령의 법’이 다스리게 되는 것이다. 그게 성화이다.  

나의 삶 속으로

| 묵상 |
그리스도의 은혜의 선물은 그대에게 어떤 능력을 줍니까?
(왼쪽 페이지에 이어서) ‘은혜’로 번역된 그리스어 ‘카리스(charis)는 ‘선물’을 뜻하며 ‘기쁨’을 의미하는 ‘카라(chara)’와도 관련이 있다. 예수님이 인류에게 주시는 선물은 영생이다. 또한 은혜는 그리스도의 내주(內住)를 나타내는데 그것은 율법이 장려하는 의에 신자들이 참여할 수 있게 한다. 바울은 예수님이 육신의 죄를 정죄하면서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롬 8:4)지게 하셨다고 진술한다. 은혜는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해방시킬 뿐 아니라, 우리가 부르심에 따라 율법을 지킬 수 있도록 해 준다.

| 적용 |
예수님이 주신 은혜의 선물을 통해 그대가 이룰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영감의 교훈
사도들의 생애 - “그리스도께서 택하신 사도들의 봉사의 결과들은 실로 영광스러웠다.… 은혜와 진리가 그들의 마음을 다스리고, 그들의 동기를 고무시키고 그들의 행동을 제어하였다. 그들의 생애는 하나님 안에 그리스도와 함께 감추어졌다. 이기심은 사라지고 무한한 사랑의 심연에 잠겨버렸다”(사도행적, 593).

기 도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약 1:17)옵니다. 합당치 않은 자에게 베풀어주신 이 모든 은혜를 감사히 여기며 제 속에 임하신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게 하옵소서.

다섯째날(목) 율법과 복음(롬 1:16~17)
5월 29일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롬 1:16~17).

교사강해 5)
율법(律法)이란 문자 그대로 선과 악의 기준은 무엇인지 아니면 범죄의 대가는 무엇인지를 객관적으로 규정한 것이며, 복음(福音)이란 예수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 요구되는 모든 것을 대신 치러 주셨다는 좋은 소식이다. 많은 사람들이 율법하면 구약의 모세 율법만 생각한다. 반대로 복음하면 신약의 복음만 생각한다. 그러나 신학적으로 엄밀하게는 율법이란 하나님께서 자연 만물과 우리의 양심에 새기신 법에서부터 구약 율법 곧 모세 율법 그리고 신약의 산상수훈의 교훈 등 하나님께서 인간의 행위 규범으로 그리고 선, 악의 기준으로 주신 모든 법을 다 포함한다. 또한 복음이라 할 때에는 신약의 복음뿐 아니라 예수의 구원과 관련된 구약의 모든 내용, 즉 에덴동산에서의 여자의 후손 언약(창 3:15) 이후 각종 언약의 내용들, 나아가 예수와 관련된 선지자들의 모든 예언 선포도 다 복음일 수 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인간 구속의 역사 전개를 위한 경륜(Dispensation)의 방법상 예수께서 오시기 이전의 시대에는 예수께서 오실 것에 대한 옛 언약(구약, Old testament)과 구원의 객관적 조건을 제시하는 율법을 주로 강조하셨고, 예수께서 오신 이후의 시대에는 예수께서 천국에서의 최종 구원을 내용으로 새로 맺어주신 새 언약(신약, New testament)과 이미 예수께서 구원의 조건에 필요한 죄 값을 우리를 위해 치르셨음을 선포하는 복음을 주로 강조하셨다. 그리하여 앞에서 말한 대로 율법하면 일반적으로 모세 율법과 그와 관련된 구약 법만을 가리키는 것으로 생각되게 되었다. 또 구약 시대는 율법의시대요 신약 시대는 복음의 시대라는 통념(通念)이 있게 되었다. 또한 논리적으로도 구원 사역에 대한 선포인 복음이 있기 전에 왜 구원이 필요한지에 대한 규명이 요구되는바 율법이 복음보다 먼저 제시될 필요도 있었다. 그리하여 점진성을 가진 계시의 속성상 구약 시대에는 율법이 보다 강조되고 신약 시대에는 복음이 강조된 이유로 이상의 통념이 통용되어 성경에서도 이런 통념이 자연스러이 사용되게 된 것이다.

생활이 아무리 훌륭해도 끊임없이 죄를 상기시키는 것들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질병, 죽음, 재난이 행복을 가로막는다. 개인의 입장에서 영적 안정감은 과거의 죄에 대한 기억, 심지어 다시 죄를 짓고자 하는 충동에 의해 위협을 받는다.
롬 6:23, 7:24과 엡 2:1은 죄의 영향력에 대하여 어떻게 설명하는가?
죄와 불의(不義) 가운데 사는 사람은 마지막 숨을 거두는 날이 되기를 기다리는 걸어가는 송장에 불과하다. 바울은 인간의 상태를 평가하면서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4)고 절규하였다. 이것은 불의에서 벗어나기를 바라는 외침이다. 바울은 구원이 예수님에게서 온다는 사실을 재빠르게 깨닫는다(롬 7:25).
이것이 복음이다. 복음이란 불의의 육신에 갇혔던 우리가 그리스도의 의를 덧입을 수 있다는 소식이다. 복음은 이제 우리가 율법이 장려하는 의를 소유할 수 있기 때문에 율법의 저주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보증이다(롬 8:1).
바울이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편지할 때에 예수님의 죽음의 소식은 아직 제국에 회자되고 있었다. 이야기를 들은 자들은 그분이 돌아가신 방법이 수치스러웠음을 충분히 이해하였다. 극형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자들은 여생을 수치 속에서 살아야만 했다. 그러나 바울과 수많은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의 그 ‘수치스러운’ 죽음을 인류 역사상 가장 중요한 사건으로 이해하였다.

교훈 : 복음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의를 덧입음으로 율법의 정죄에서 벗어나 죽음을 이기고 영생을 누릴 수 있다고 보증한다.

부가적용)
구약과 신약은 예수를 중심으로 전후로 나누어지고 그 강조점도 다르나 예수 안에서 하나로 통일된다. 그 두 언약과 관련되어 즉 그 두 언약의 내용인 동시에 조건으로서 각각 따로 강조되며 계시된 율법과 복음도 그 역할은 다를지라도 인간 구원이란 대 목적 하에서 서로 연결된 계시들이다. 먼저 율법은 인간에게 선과 악의 기준을 제시하여 인간이 왜 죄인인지를 보여 준다. 그리고 죄의 대가인 형벌을 규정한다. 그리하여 궁극적으로는 모든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한 존재인바 자신의 행위로는 하나님의 절대 기준에 미치지 못하여 구원받을 수 없음을, 그리고 형벌 받아 마땅한 존재임을 있는 그대로 제시한다. 율법은 이것으로만 자기의 역할을 다하는 제한적 속성을 갖고 있다. 반면 복음은 죄인에 대한 정죄에서 머무는 율법에서 더 나아가 예수께서 인간의 죄 값을 대신 치르시어 죄인을 구원했음을 선포한다. 구약과 신약이 예수를 전후로 나뉘었으나 기실은 한 분 하나님의 구원 약속이란 통일성이 있었으며 서로 단절된 관계가 아니라 그 질과 양면에서 점진적 발전 관계에 있었듯이 구약과 신약의 조건 또는 내용의 형식으로 계시된 율법과 복음도 그 역할은 서로 다르나 한 분 하나님(주체)의 구원 계시(목적)라는 통일성이 있으며 또한 점진적 발전 관계에 있음을 잘 보여 준다. 하나님의 경륜상 구약과 신약 시대에 각각 율법과 복음이 따로 강조되었으나 여기 보듯이 양자는 본질적으로 통일성이 있는 점진적 발전 관계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 구약 시대를 불문하고 택한 자는 율법과 복음을 둘 다 주신 하나님을 믿음으로써 예수 복음 사역의 결과인 구속 은총의 적용을 받아 구원을 받는다. 또한 불신자는 율법과 복음을 둘 다 주신 하나님을 믿지 않음으로 그 역시 시대를 불문하고 율법의 적용을 받아 심판을 받게 된다. (합 2:4; 마 5:17; 롬 2:12-16; 4:11)

나의 삶 속으로

| 묵상 |
복음은 그대의 삶 속에 어떤 능력을 나타냈습니까?
(왼쪽 페이지에 이어서) 이런 이유 때문에 바울은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롬 1:16)고 선언하였다. 복음의 핵심은 종국에 죽음이 최후의 승리를 거두지 못할 것이며 예수님을 믿고 구원 받은 자들이 새 땅에서 영원히 살리라는 위대한 약속에 있다.

| 적용 |
그대는 자신에게 나타난 복음의 능력을 어떻게 다른 사람에게 증언하겠습니까?

영감의 교훈
그리스도의 의를 옷 입으라 - “그대들에게는 선을 행할 힘이 없으며 그대들의 상태를 개선할 수도 없다.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우리에게는 아무런 공로도 없으며 의도 없다. 우리들이 그리스도의 흠 없으신 의를 옷 입지 않는 한 우리들의 죄상, 우리들의 연약성, 우리들의 인간적인 불완전성은 우리들로 감히 하나님 앞에 나아가지 못하게 할 것이다”(가려 뽑은 기별 1권, 333).

기 도
아버지, 예수님을 알지 못했다면 절망 속에 살다가 죽어야 할 저에게 소망의 빛과 기쁨의 소식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게는 의도 능력도 없지만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있음을 믿고 영광과 감사와 찬양을 드립니다.

여섯째날(금) 더 깊은 연구를 위해
5월 30일

<복음전도>, 231~232 “특수한 진리를 전파함”를 읽어 보라.

“피조물의 공로는 하나님의 선물을 받거나 하나님 앞에 서게 하는 일에 어떤 영향도 미칠 수 없다는 주제를 분명하게 밝히도록 하자. 믿음과 행함으로 어떤 사람이 구원의 선물을 살 수 있다면 창조주는 피조물에 대하여 의무 아래 놓이게 된다. 여기서 거짓이 진리로 받아들여질 기회가 주어진다. 만일 어떤 사람이 자신의 행하는 어떤 것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면 그는 자신의 죄 때문에 고해성사를 해야 하는 가톨릭과 동일한 입장을 취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구원은 품삯처럼, 일해서 얻을 수 있는 채무의 일부분이 된다. 그러나 만일 자신의 선한 행위 중 어떤 것으로도 구원을 얻을 수 없다면, 구원은 오로지 한 사람의 죄인으로서 그가 예수님을 받아들이고 믿기 때문에 받은 은혜일 수밖에 없다. 그것은 완전히 값없는 선물이다.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는 논쟁의 대상이 아니다. 자신의 선한 행실 안에 있는 타락한 인간의 공로로는 자신을 영생으로 이끌 수 없다는 문제가 해결되는 순간 이 모든 논쟁은 끝이 난다”(믿음과 행함, 19~20).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➊ 위의 엘렌 G. 화잇의 글을 묵상해 보십시오. 이 글 가운데서 가장 심각한 죄인도 받을 수 있는 위대하고 희망적인 진리를 숙고해 보십시오. 우리는 어떻게 우리 자신을 위해 이 약속을 주장하며 또 어떻게 그 믿음대로 살아야 합니까?

➋ 하나님은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에게 율법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기록된 계시를 접할 수 없는 백성들에게 하나님은 다른 방법으로 그분의 뜻을 알리신다고 설명합니다(롬 1:20, 2:14, 행 17:26~27). 만약 하나님이 모든 백성에게 말씀하고 계신다면 선교사와 전도자들이 있어야 할 목적은 무엇입니까?

➌ 요 1:17은 “은혜와 진리”가 예수님에게서 나왔다고 진술합니다. 많은 사람이 이 말씀을 보고 ‘은혜와 진리’를 율법의 반대편에 둡니다. 왜 이것이 이분법적인 오류입니까? “은혜와 진리”는 어떻게 율법과 함께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품성을 나타냅니까?


댓글목록

최성현님의 댓글

최성현 작성일

정성어린 목사님의 글들을 매주 보면서 공부하는 것이 행복합니다.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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