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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과 하나님의 법과 그리스도의 법(질문과 대답과 부가설명)05/2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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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명호 작성일14-05-17 11:29 조회8,50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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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24일 안식일
일몰:오후 7시 41분

기억절 :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요 15:10).

연구 범위 : 마 19:16~22, 요 13:34~35, 갈 6:1~5, 행 17:31, 요 5:30.

대부분의 나라마다 법의 단계가 존재한다. 최상위에는 국가 기관이 제정한 법이 있다. 국가의 법은 국토 안에 거주하는 모든 사람에게 구속력이 있다. 그 아래에는 지방 거주자에 해당하는 지방 차원의 법이 있다. 그 아래에는 가장 작은 단위의 지역을 통제하는 지역법이 있다. 나라 안에 여러 지역마다 자체 헌장에 조화되는 법을 만들 수 있지만, 국가의 법과 충돌하는 법을 제정할 수는 없다. 물론 어떤 상황에서는 같은 법을 다른 방법으로 적용하도록 요구한다. 그러나 그 적용이 법의 취지에서 벗어나서는 안 된다.
우주의 최고 지도자이신 창조주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을 위한 법을 제정하셨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원하여 인간의 육체를 입고 오셔서 아버지와 그분의 계명에 순종하는 생애를 사셨다(빌 2:5~11).
그래서 율법에 대한 예수님의 관점과 그분이 주신 새 계명까지 그분이 가르치신 모든 것은 언제나 하나님의 법과 완전히 조화로웠다.

※ 학습 목표
➊ 깨닫기 : 하나님의 법은 온전히 사랑의 원칙에 기초해 있다는 사실을 인식한다.
➋ 느끼기 : 예수님이 우리의 구주이자 재판장이 되신다는 사실을 확신한다.
➌ 행하기 : 삶의 모든 일에서 하나님과 다른 사람에 대한 사랑을 나타낸다.

A.
❷ 사랑을 실천하는 것과 십계명을 지키는 것은 어떤 관계라고 생각합니까?
※ 진실로 사랑을 행하면 십계명이 실천되는 것이다.
❸ 사랑에 기초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는 모습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 상대를 살려주려는 정직한 마음으로 붙들어주고 도와주고 일으켜주는 것이다.
❹ 사랑의 계명을 지키기 위해 어떻게 서로 도와야 할지 이야기해 봅시다.
※ 예수님의 생명을 받았으면 그 생명이 사랑하게 하는 능력이 된다.

B.  
❷ 예수님이 제시하신 새 계명과 명령들은 십계명과 어떤 관계라고 생각합니까?
※ 십계명의 정신을 풀어서 가르쳐주신 것이고, 핵심을 형제에 생명을 얻게 하기 위하여 희생도 하는 사랑의 실천이다.
❸ 계명이 심판의 표준이 된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우리의 어떤 면을 살핀다는 뜻일까요?
※ 삶에서 실천한 여부를 살핀다는 뜻으로 이해하는 것 같다. 그러나 그가 예수 생명을 가진 여부를 살피는 것이 핵심이 아닐까?
❹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 무엇을 실천할 것인지 각자 이야기해 봅시다.
※ 이웃에게 예수 안에서만 얻을 수 있는 영생의 생명을 나누어주는 것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을 실천하게 된다. 이 생명을 얻게 하기 위하여 자아 희생이 요구되는 것이다. 그것은 예수께서 지라고 한 십자가를 지는 것이다.

결론 : 예수님이 주신 새 계명을 포함하여 그분이 가르치신 모든 것은 하나님의 율법과 완전히 조화롭습니다.

첫째날(일) 율법과 선지자
5월 18일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 22:37~40).

어떤 사람은 모세가 시내산에서 받은 십계명은 단지 십자가 이전의 이스라엘 백성에게만 해당되지, 은혜의 신약 시대에는 구속력이 없다고 믿는다. 또 그리스도인들은 옛 법으로부터 자유롭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이 아닌 유대교 전통을 이어받은 자들만이 여전히 옛 법을 지키면 된다고 믿는 자들도 있다. 그러나 이미 살펴 본 것처럼 율법의 행위로는 아무도 구원받을 수 없지만 그렇다고 우리에게 율법을 범할 면허를 주었다고 말한 성경 말씀은 없다. 만약 있다면 그것은 죄를 지어도 된다는 면허라고 할 수 있을 텐데, 그렇다면 성경은 중대한 문제에 있어서 스스로 모순에 빠지게 된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맺은 언약의 조항을 율법이 새겨진 돌판 위에 계시하셨던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그러나 성경에는 십계명이 직접 언급하지는 않지만 세부적인 사항을 다루는 수많은 명령이 있다. 하나님의 뜻을 종합적으로 이해하려는 노력 끝에 랍비들은 십계명에 기초한 613개의 율법을 성경에서 발견했다. 그런데 자신이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것이 아님을 천명하셨을 때에 예수님은 랍비들보다 더 넓게 생각하셨던 같다(마 5:17). 즉 하나님의 법은 십계명으로 요약되었지만 선지자들에게 또는 그들을 통해 말씀하신 모든 거룩한 명령도 다 포함한다.

1. 마 19:16~22과 22:34~40을 비교해 보라. 두 말씀은 예수님과 십계명에 대해 뭐라고 말하는가?
[마19:16~22] 어떤 사람이 주께 와서 가로되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17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선한 이는 오직 한 분이시니라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 18 가로되 어느 계명이오니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거짓 증거하지 말라,  19 네 부모를 공경하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니라 20 그 청년이 가로되 이 모든 것을 내가 지키었사오니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 21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시니 22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
[마22:34~40] 예수께서 사두개인들로 대답할 수 없게 하셨다 함을 바리새인들이 듣고 모였는데 35 그 중에 한 율법사가 예수를 시험하여 묻되 36 선생님이여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37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38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39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40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답: 예수님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고 말씀하시면서 십계명의 조문들을 제시하셨고, 그 계명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요약된다고 가르치셨다.

물론 하나님이 말씀을 통해 계시한 수많은 명령이 있지만, 십계명은 다른 여러 법에 적용할 수 있는 견고한 원칙을 제공한다.
그래서 예수님은 젊은 부자 법관에게 말씀하실 때에 십계명 중 다섯 계명을 언급하셨다. 심지어 신 6:5과 레 19:18에는 하나님의 율법을 더 축약한 계명이 등장한다. 곧 하나님을 사랑하며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 22:40)고 선언하셨다. 궁극적으로 예수님과 하늘 아버지는 두 분이 서로 사랑하시는 것처럼 피조된 백성들이 서로 사랑하라고 권유하려는 목적에 있어서 하나가 되신다. 그리고 율법에 대한 순종은 그러한 사랑을 표현하는 방법의 기초이다.

<부가설명> 성경을 읽으면 하나님이 입법자라고 가르친다.(약4:12) 그러므로 우주의 모든 법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입법하신 것이다. 천연계의 법칙은 물론 모든 생명 있는 것들의 생명의 법칙도 창조주께서 제정하신 것이다. 예수께서는 그 중에 가장 기본적인 법을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이라고 정의하셨다. 그리고 하나님은 사랑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사랑을 생활에 실천하도록 최소한으로 성문화한 것을 하나님의 품성의 사본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요일3:14에는 사랑이 생명의 본질이라고 가르친다.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거하느니라.” 우리가 생명에 들어간 증거가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사랑은 생명이신 하나님의 생명이 우주에 나타나는 모습이다. 십계명 역시 그렇다. 우리가 예수 안에서 영생의 생명을 얻었으면 그것이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으로 나타나게 되는데 그것을 최소한으로 정리하면 바로 십계명의 조문이 되는 것이다. 이런 까닭으로 성경은 십계명을 도덕법이라고 하지 않과 생명의 도라고 하였다.(행7:38) 또 원문에는 십계명이라는 말이 없는 것 같다. “여호와께서 그 언약을 너희에게 반포하시고 너희로 지키라 명하셨으니 곧 십계명이며 두 돌판에 친히 쓰신 것이라”(신4:13) 이 구절에서 십계명이라고 번역한 말이 “열 마디 말씀(에셰레트 하데바림)”이다. 그것을 언약이라고 하였다. 우리가 예수의 생명을 받았으면 이 언약이 생활이 된다. 예수님은 생명자체였기 때문에 이 언약이 생활에 그대로 이루어졌다. 모든 법의 기초은 바로 자존하신 여호와 하나님 자신이며 그분은 생명 그 자체이시다. 그래서 그분은 사랑이다.

교훈 : 십계명은 성경에 나오는 모든 법의 기초이며, 모든 율법에 내포되어 있는 원칙 곧 하나님과 인간에 대한 사랑의 정신을 제시한다.

둘째날(월) 사랑의 ‘규범들’(요 15:10)
5월 19일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 13:34~35).

성경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법에 충성하셨던 많은 경우를 제시한다. 예를 들어 눅 2:49을 보면 예수님은 어린 나이에 자신의 정체성을 깨달으신 것으로 보이나 그분이 가족의 행렬에서 이탈해서 마리아가 속상한 감정을 표현하자 겸손하게 부모와 집으로 돌아가 그들에게 순종하셨다(눅 2:51). 또한 예수님은 광야에서 시험을 받을 때에 사탄에게 절하기를 거절하셨다. 왜냐하면 경배는 오직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기 때문이다(눅 4:8). 그 밖에 예수님이 안식일을 준수하신 예도 있다(눅 4:16 참고). 바울은 예수님이 평생 하나님께 순종하는 생애를 사셨다고 기록했다(빌 2:5~11). 히브리서도 그분이 유혹을 받으셨지만 전혀 죄를 범하지 않으셨다고 말한다(히 4:15). 그래서 예수님은 마지막이 가까웠을 때에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요 15:10)였다고 말씀하실 수 있었다.

1. 요 13:34~35을 읽어 보라. 예수님이 어떤 의미에서 이것을 새 계명이라고 말씀하셨는가?
[요13:34,35]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35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답: 예수께서 사랑하신 것 같이 사랑하라고 하신 것이 새 계명의 핵십이다.

예수님은 계명의 준수와 사랑 사이에 중요한 관계가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셨다. 물론 우리는 사랑의 ‘규범들’에 대해 말하는 것이 익숙하지 않지만, 실제로 십계명이 그러한 규범이다. 십계명은 우리가 하나님과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사랑을 표현하기를 하나님이 바라시는지 보여준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요일 4:16). 그래서 제자들에게 계명을 주심으로써 예수님은 하늘 아버지에게서 기원한 사랑의 율법을 확대하셨다(요 13:34~35, 요 3:16).
이제 우리는 단지 다른 사람을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을 초월하여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셨던 것처럼 사랑해야 한다.

<부가설명> 성경을 강론하면서 새 계명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대부분이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라고 대답한다. 새 계명이 무엇인지 잘 모르는 것을 드러내는 대답이다. 서로 사랑하라는 것은 구약성경에도 있다. 새 계명이라고 하신 이유는 예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 같이 서로 사랑하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셨는지 요한은 잘 가르쳐준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요일3:16)고 하였다. 우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시므로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사랑이 어떤 것인지 보여주셨다. 새 계명은 바로 그렇게 서로 사랑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요15:12에서 이 사실을 다시 한 번 가르쳐주셨다.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그리고 말씀하신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 너희가 나의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요15:13,14) 생명이 있어야 이 사랑을 실현할 수 있다. 우리가 예수를 믿음으로 참으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을 때 그 생명이 나타나는 형태가 바로 이런 사랑이다. 그래서 십계명을 생명의 도(道)라고 한 것이다.

교훈 : 예수님은 십계명의 정신이 사랑이며 사랑은 계명의 준수를 통해 표현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가르치기 위해 새 계명을 주셨다.

셋째날(화)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습이 됨
5월 20일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에 있는 자이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고전 9:21).

1. 고전 9:19~23에 나오는 율법에 대한 언급을 자세히 살펴보라. 여기서 바울은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가? 율법에 대해 그와 같이 강조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고전9:19~23] 내가 모든 사람에게 자유하였으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20 유대인들에게는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 있는 자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21 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 있는 자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 22 약한 자들에게는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여러 사람에게 내가 여러 모양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몇 사람들을 구원코자 함이니 23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여하고자 함이라.

답: 바울은 복음을 전하는데 문화적 장애를 잘 극복한 사실을 말하고 있는데, 그런 장애를 만났을 때 예수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 있는 자신의 신앙을 잘 지키면서 문화적 환경에 적응한 것을 간증하고 있다.

하나님의 바람은 모든 사람이 영생의 선물을 받고 영원한 나라의 시민이 되는 것이다. 고린도전서 9장에서 바울은 사람들을 하나님의 나라로 이끄는 자신의 방법을 드러낸다. 그는 사람들이 복음을 듣고도 결심하지 못하도록 가로막는 문화적 장벽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바울은 그들을 구원하려는 유일한 목적을 위하여 전도할 집단의 문화에 기꺼이 적응하였다.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나라의 일원이 될 자들은 모두 그분의 율법에 순종할 것이며, 또한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은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뜻과 일치해야 한다. 그래서 바울은 재빠르게 자신이 비록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 혁신적인 방법을 사용하더라도 항상 하나님의 법의 요구 아래 있다는 사실을 천명하였다. 사람들을 구원하고 싶은 소망이 있다고 하나님의 법을 양보하도록 허용할 수는 없다. 그는 최상위 법과 충돌되지 않는다면 문화적인 법에 적응하였다. 그의 방식을 지배하는 원리는 “그리스도의 율법”이었다(고전 9:21).
우리는 “그리스도의 율법”을 그리스도께서 사용하신 방법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것은 선택 받은 소수가 아니라 모든 사람을 위한 사랑에 기초한 방법이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율법을 하나님의 법의 대안으로 삼을 의도가 없었다. 그 둘은 조화롭게 작용한다. 그리스도의 사랑의 법은 은혜로 구원받은 자들을 사랑의 하나님의 법으로 인도하기 위해 사용된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9장에서 잃은 자들을 구원하기 위해 기꺼이 감내할 모든 내용을 설명한다. 그런데 사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율법”에 계시된 자기희생적인 사랑에 완벽하게 들어맞는 예이다.

<부가설명> 성경의 진리를 거스르지 않고 생활하는데 문화 환경은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한국은 불교와 유교 문화가 민족정신과 풍습이 사회 저변에 널리 깔려있다. 성경을 공부하고 성경의 신앙생활을 한다고 해도 민족 저변에 깔려있는 이런 문화적 영향이 기독교 신앙과 신조에 물들어 있는 것을 자주 느낀다. 그런 문화영향이 성경의 기본원리에 충돌하지 않으면 바울이 한 것과 같은 처신으로 적응하는 것은 복음을 전하는데 유용할 것이다. 그러나 성경을 그런 문화로 해석해서 본의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각별한 주의가 필요하다. 바울이 자신은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 있지만 율법 없는 자 같이 된다는 말은(고전9:21) 이런 사실을 암시하는 것이다. 우리는 기도하면 성령의 지도로 바르게 증거해야 할 것이다.

교훈 : 그리스도의 율법에 나타난 사랑은 잃은 자들을 구원하기 위해 그들의 문화와 사회에 맞는 방법을 따르는 동시에 하나님의 법과 조화를 이루는 것이다.

넷째날(수)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함(갈 6:2)
5월 21일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갈 6:2).

문서에 또는 천연계에 계시된 하나님의 법은 이해력을 가진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의 뜻을 공개한다(롬 1:20, 2:12~16). 그래서 아무도 하나님의 기본적인 요구를 몰랐다고 주장할 수 없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롬 3:23)했고 그 결과 멸망할 운명에 처했다(롬 6:23, 겔 18:4). 그러나 모두가 멸망하는 것은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와 죽음, 부활을 통해 저주가 영생의 선물로 바뀌었다(엡 2:8).
비록 모두가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우리는 마땅히 할 만큼 순종하며 신실하게 살지 못한다. 그러나 바울에 따르면 은혜는 신자로 하여금 순종의 생애를 살도록 힘을 준다(롬 6:15, 엡 2:10, 딛 2:11~14).

1. 갈 6:1~5에 따르면 “그리스도의 법”을 나타내는 한 가지 방법은 무엇인가?
[갈6:1~5]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네 자신을 돌아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 2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 3 만일 누가 아무것도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생각하면 스스로 속임이니라 4 각각 자기의 일을 살피라 그리하면 자랑할 것이 자기에게만 있고 남에게는 있지 아니하리니 5 각각 자기의 짐을 질 것임이니라.

답: 범죄한 형제들을 사랑으로 바로잡아주고 짐을 서로 지는 일로 그리스도의 법을 시행한다.

누구나 연약한 순간에 유혹에 빠져 죄에 굴복할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그런데 이런 사실을 알면서도 타락한 동료 신자를 곧바로 정죄한다는 것은 몰인정한 처사이다. 예수님은 비록 죄를 지은 적이 없지만 죄에 빠진 자들을 기꺼이 돕고자 하셨다. 엘렌 G. 화잇은 예수님이 “인간의 약점을 비난하지 않으셨다”(시대의 소망, 353)고 기록하였다. 바울은 신자들에게 회복의 목적을 위해 도움을 주라고 권면하였다(갈 6:1). 다시 말해 죄를 지은 자는 다시 하나님의 율법의 교훈을 따르도록 격려를 받아야 한다.
그리스도의 법은 자비에 따라 움직인다. 예수님의 희생적인 죽음이 없었더라면 하나님의 율법을 지킬 이유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영생이 가능하도록 하셨기 때문에 연약한 순간 이후에 다시 하나님의 법을 지키는 신실한 자들에게 보상이 주어진다. 동료 신자들은 그리스도의 법을 하나의 운반 수단으로 사용해서 회개한 죄인들이 사랑의 법 영역으로 돌아올 수 있게 해야 한다.

<부가설명> 예수 그리스도의 법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다. 바울은 이 법을 성취하는 가장 손쉬운 방법을 제시했다. 짐을 서로 지는 것이다. 내 짐도 무거운데 다른 사람의 짐까지 져주는 일은 쉬운 것은 아니다. 바울은 이어지는 구절 가운데 각각 자기 짐을 질 것이라고도 했다.(갈6:5) 이 말씀들에 의하면 서로 져 주어야할 짐이 있고 자기가 져야할 짐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각자가 져야할 자기 짐은 헬라어로 “포르티온”이다. 2절에 서로 지라고 한 짐은 “바로스”이다. 여기서 말하는 짐은 근본적으로 주님의 사업을 하는 것과 관련된 짐이다. 교회에서 공동으로 감당해야할 일을 뜻한다. 그러나 성도 개인이 지기 힘든 짐들, 즉 심한 시험과 곤경에 처한 경우 도움의 손길을 내미는 것을 나타낸다. 예수께서 곤경에 처한 사람들을 도운 것 같이 그렇게 도울 때 그리스도의 법을 이루는 것이다. 형제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려는 정신을 나타내는데, 핵심은 형제를 살리려는 정신을 역으로 표현한 것이다.(요일3:16) 그리고 프로티온은 그리스도인 생활에 남이 감당해줄 수 없는 것들을 뜻한다. 개인의 기도를 남이 대신할 수 없고, 개인의 깨어있어야 하는 것을 남이 대신 깨어 있어줄 수 없다. 파수꾼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내가 배 고플 때 남이 대신 먹어서 내 배를 부르게 할 수 없는 것과 같은 일을 뜻한다. 우리는 각각 자기 짐을 잘 져야하고 서로 짐을 져주는 것도 잘 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는 것이다. 곧 예수께서 사랑하신 것 같이 서로 사랑하는 것이다.

교훈 : 우리는 그리스도의 자비의 법에 따라 범죄한 신자가 다시 하나님의 법을 지킬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다섯째날(목) 율법과 심판(요 5:30)
5월 22일

“내가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 듣는 대로 심판하노니 나는 나의 뜻대로 하려 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이의 뜻대로 하려 하므로 내 심판은 의로우니라”(요 5:30).

하나님의 율법이 비록 자비의 법이라 하지만 하나님은 결국 그것을 심판의 표준으로 사용하실 것이다. 하나님은 죄인들에게 회개하고 그분에게 충성을 다짐할 기회를 지속적으로 제공하셨다. 그러나 “불의를 행하는 자는 그대로 불의를 행하고 더러운 자는 그대로 더럽고 의로운 자는 그대로 의를 행하고 거룩한 자는 그대로 거룩하게 하라”(계 22:11)는 음성이 울려 퍼질 때가 오고 있다. 이 선언은 최후의 심판을 알리는 전조이다.

1. 여러 성경절이 ‘그리스도의 심판’에 대해 말하는 반면(예를 들면 행 17:31, 딤후 4:1, 고후 5:10), 계 14:7에서는 첫째 천사가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한다. 요 5:30은 심판의 기간 동안 예수님의 역할을 이해하는 데 얼마나 도움이 되는가?
[행17:31]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저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하니라.
[딤후4:1] 하나님 앞과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의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
[고후5:10]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계14:7] 그가 큰 음성으로 가로되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라 이는 그의 심판하실 시간이 이르렀음이니 하늘과 땅과 바다와 물들의 근원을 만드신 이를 경배하라 하더라.
[요5:30] 내가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 듣는 대로 심판하노니 나는 나의 뜻대로 하려 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이의 뜻대로 하려 하므로 내 심판은 의로우니라.

답: 예수께서는 심판을 수행하시는 본인이신데, 아버지 하나님의 뜻대로 하신다는 것을 확인하게 하는 말씀이다.

비록 그리스도께서 인간이 되셨을 때 자신의 신성을 내려 놓으셨지만(빌 2:5~11), 아버지와의 특별한 관계를 유지하셨다. 종교 지도자들이 그분을 신성모독죄로 고소했을 때, 그분은 하나님이 자신에게 특별한 사명을 행할 권위를 주셨으며 그 가운데 하나가 심판이라는 사실을 공표하셨다(요 5:19~30). 그리스도께서 심판의 책임을 위임받았다는 사실은 하나님의 자비를 드러낸다. 그리스도께서 인류와 같이 되셨기 때문에 그분은 공정하게 심판하실 수 있다. 인간의 경험에 익숙하기 때문에 그분은 아무도 부당하게 정죄하시지 않을 것이다. 사실 그리스도께서는 정죄가 자신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며, 회개하지 않은 죄인이 하나님의 명령에 귀 기울이기를 거부할 때 자신을 정죄할 뿐이라고 말씀하신다(요 12:48).
많은 사람이 하나님의 율법이 어떤 내용인지는 익숙한 반면 어떻게 지켜야 할지는 잘 모른다. 율법은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 나라에 가까워졌는지 확인하기 위해 사용하는 점검 목록이 아니라 다양한 사랑의 원칙을 설명하는 수단이다.
율법을 지키라는 것은 우리가 개인적으로 하나님의 호의를 얻으려면 율법에 순종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필요로 하는 자들에게 그 사랑을 나누도록 모든 그리스도인을 초청한다. 심판의 표준이 되는 율법은 각자가 하나님과 인류에게 나눈 사랑의 정도를 측정하는 역할을 한다. 최후의 심판을 베푸실 때,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변치 않는 사랑의 율법을 심판의 표준으로 사용하실 것이다(약 2:12).

<부가설명> 예수님은 심판을 친히 담당하신 심판장이시다. 아버지 하나님께서 예수님께 심판하는 권세를 다 주셨다.(요5:22)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대로 심판하신다고 하셨다. 예수님은 또 “또 인자됨을 인하여 심판하는 권세를 주셨느니라.”(요5:27)고 하셨다. 예수께서는 “각각 선악 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 위의 성경구절들이 계시하고 있다. 우리는 심판을 받을 사람들이 세상에서 생활한 모든 행위에 대하여 심판을 받는다고 배웠고 가르쳤고 그렇게 믿고 있다. 아마도 그럴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예수님은 인자됨을 인하여 심판하는 권세를 받으셨다. 교과 저자는 “그리스도께서 인류와 같이 되셨기 때문에 그분은 공정하게 심판하실 수 있다. 인간의 경험에 익숙하기 때문에 그분은 아무도 부당하게 정죄하시지 않을 것이다.”라고 설명한다. 나도 이렇게 배웠고 그렇게 가르쳤다.
요즘 성경을 더 자세히 읽으면서 각각 선악 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이라는 말이 어떤 뜻일까 많이 생각해본다. 예수께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긴 사람들은 영생을 얻었기 때문에 심판에 이르지 않는다고 하셨다.(요5:24) 그렇다면 선악 간에 행한 것은 예수님을 믿고 사람에서 생명으로 옮기는 것이 선이고 예수를 믿지 않고 사망에 그냥 머물러 있는 것이 악이라는 뜻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결국 예수님은 심판하실 때 산 자인가 죽은 자인가를 살피시는 것이 아닐까 그것이 심판의 핵심이 아닐까라고 생각해본다. 아무튼 우리는 예수 안에서 산 자가 되어 있어야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 아니겠는가? 한 번 생각해 보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적었다.

교훈 : 하나님의 율법은 자신의 구원을 위한 행위가 아닌 하나님과 다른 사람에게 나눈 사랑의 정도를 측정하는 심판의 표준이 될 것이다.

여섯째날(금) 더 깊은 연구를 위해
5월 23일

<교회증언 7권>, 260~264 “교회의 징계”, 265~266 “서로를 존중하라”를 읽어 보라.

“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갈 6:1~2). 여기에 다시 우리의 의무가 우리 앞에 분명히 제시되어 있다. 그리스도를 따르노라고 공언하는 자들이 영감으로 주어진 이 명령을 어떻게 그처럼 경하게 여길 수 있겠는가?… 우리는 우리 자신의 마음을 조금밖에 모르고 하나님의 자비가 우리에게 필요하다는 것도 별로 깨닫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나타내시고 우리가 피차간에 나타내야 할 그 귀중한 동정을 그처럼 조금밖에 간직하고 있지 않다. 우리는 우리의 형제들이 연약하고 우리 자신과 마찬가지로 실수하는 사람들임을 기억해야 한다. 어떤 형제가 방심한 결과 유혹에 넘어져 그의 평소의 처신과는 달리 어떤 잘못을 범했다고 생각해 보자. 그럴 때 그에게 대하여 어떤 태도를 취할 것인가? 우리는 하나님이 사용하셔서 위대하고 선한 사업을 이루어 오신 사람들이 중한 죄를 지은 것을 성경에서 알게 된다. 주님께서는 이 사람들을 견책하지 않고 지나쳐 버리신 적도 없고, 그분께서 당신의 종들을 버리지도 않으셨다. 그들이 회개했을 때, 그분께서는 그들을 자비롭게 용서하시고 그들에게 그분의 임재를 나타내시고, 그들을 통하여 역사하셨다. 가련하고 연약한 사람들은 그들이 하나님과 그들의 형제들로부터 받아야 할 동정과 인내의 필요가 얼마나 절실한지 생각해 보도록 하라. 그들이 다른 사람들을 어떻게 판단하고 정죄하고 있는지 조심하도록 하라”(치료봉사, 210).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➊ 성경의 인물 가운데 죄에 빠졌지만 하나님이 용서하시고 계속 사용하셨던 자들에 대해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는 이러한 예에서 어떤 중요한 교훈을 배워야 합니까?
※ 다윗이 대표적인 예가 될 것이다. 아브라함, 아론, 베드로 등등. 하나님께서는 허물진 사람들을 사유하시고 회개할 때 여전히 중용하시는 분이심을 깨닫는다. 우리도 우리 형제들에게 그런 정신으로 대해야 할 것이다.

➋ 죄를 범한 자들에게 어떻게 하면 교회의 징계를 집행하는 동시에 은혜와 자비를 보일 수 있을까요? 왜 우리는 징계와 은혜를 서로 반대 개념이라고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까?
※ 징계는 그 사람이 다시는 허물에 빠지지 않도록 권고하는 것이다. 징계받는 사람이 그것을 처벌로 느끼지 않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나 본인이 그것을 용납하지 못하면 다른 도리가 있는 지 생각해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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