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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과 그리스도와 산상수훈에 나타난 율법(교사강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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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조춘호 작성일14-04-18 22:00 조회4,57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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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과 그리스도와 산상수훈에 나타난 율법

4월 26일
일몰:오후 7시 17분

기억절 :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
전케 하려 함이로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개역, 마 5:17~18).

연구 범위 : 마 5:17~20, 눅 16:16, 마 5:21~32, 롬 7:24, 마 5:33~37, 마 5:38~48.

도입)
예수님은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오지 않고 완전케 하러 왔다고 하셨다. 여기서 율법은 구약 전체를 가리키며, 완전한 형태의 용어로는 율법과 선지자다. 따라서 위의 말씀은 내가 온 것은 전 구약성경을 해쳐서 멸하러 온 것이 아니란 뜻이다. 여기 완전케 한다는 말씀은 충만케 한다는 뜻이다. 그러면 어떻게 예수님이 율법과 선지자를 온전케 하시는가? 율법과 선지서의 주제는 사실상 오실 메시아에 대한 예언이요, 그에게서 이루어질 구속 사역이었다. 그러니 구약성경은 메시아이신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완전하게 될 수가 없었다. 정말 율법이란 형식 안에 그리스도는 내용을 채우신 것이었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님은 요한복음 5:39에서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 하는 것이로다"라고 말씀하셨다. 이처럼 예수님은 구약에 약속된 메시아로 오셨으니 그 일부가 이미 이루어졌으며 이제 십자가와 부활과 승천의 큰 사건들을 통해서 그 모든 예언들이 성취되어질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구약성경(율법과 선지자)을 폐하는 대신에 이루어지도록 하시기 위해 오셨다. 유대 지도자들의 오해는 율법과 예수님과의 이런 관계에 대한 몰이해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산상수훈을 말하면 사람들은 대부분 자동적으로 ‘팔복’을 떠올린다(마 5:1~12). 그러나 산상수훈은 세 장에 걸쳐 기록되었으며 네 부분으로 이루어졌다. 그중 팔복이 첫째 부분이다. 둘째 부분에서 예수님은 그리스도인들을 소금과 빛으로 설명하셨다(마 5:13~16). 그리고 셋째 부분에서 예수님은 율법에 대하여 새롭고 심오한 관점을 제시하신다(마 5:17~18). 그리고 마지막으로 가장 긴 넷째 부분에서 예수님은 그리스도의 행위에 대하여 명확한 가르침을 베푸신다(마 6:1~7:23). 그리고 하나님의 요구에 대한 순종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해 ‘지혜로운 건축자와 어리석은 건축자의 비유’로 산 위에서 주신 모든 설교를 마치신다(마 7:24~27).
이 가운데서 우리는 마 5:17~48에 기록된 산상수훈의 셋째 부분을 공부하려고 한다. 신학자들은 여기에 극명한 대조가 나타난다 해서 이 부분을 ‘반명제들(antitheses)’이라고 부른다. 이번 주에 우리는 그것이 율법에 대해 무엇을 가르치고 있는지 볼 것이다.

*신자들과 반생들이 서로 공부하도록 권합시다.

안교 활동반과 교과 토의

※ 학습 목표
➊ 깨닫기 : 예수님이 율법을 파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본질을 밝히기 위해 오셨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➋ 느끼기 : 율법이 강조하는 것은 단지 행위가 아닌 동기라는 사실을 인식한다.
➌ 행하기 : 표면적인 준수보다 성령에 이끌리는 행동, 사고 그리고 동기를 나타낸다.

Part 1. 인사 안교 반장 또는 소그룹 리더
서로 인사를 나누고 손님을 환영해 줍니다.
출석과 공부를 확인하고 안교헌금을 걷습니다.
결석자와 구도자에 대한 보고를 듣고 방문 계획을 세웁니다.

Part 2. 나눔 안교 교사 또는 소그룹 리더(A나 B 중 하나를 선택하십시오.)
A. ❶ 평범한 이웃이 갑자기 무서운 범죄자가 된 경우를 기억합니까?
❷ 예수님이 죄를 이해하는 차원은 바리새인과 어떻게 달랐습니까?
❸ 산상수훈을 따르는 사람의 신앙과 생활에는 어떤 특색이 있을까요?
❹ 우리가 예수님이 요구하는 의를 실천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B. ❶ 형식적인 서비스나 의무적인 접대를 받을 때 어떤 기분이 듭니까?
❷ 행위를 중요시하는 신앙과 마음의 동기를 중요시하는 신앙은 어떤 차이점이 있습니까?
❸ 산상수훈의 기준으로 율법을 제대로 지키는 것은 어느 정도의 수준을 말하는 것일까요?
❹ 우리가 진정한 천국 백성으로 살려면 어떤 변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까?

결론 :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그분이 율법을 폐지하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님을 보여 주셨습니다. 오히려 그분은 율법을 높이고 그것을 지키기 위해서는 우리 안에 성령이 필요함을 보여주기 위해 오셨습니다.

Part 3. 실천 안교 반장 또는 소그룹(예비) 리더
❶ 친교 모임(산행 또는 소풍)에 참석할 수 있는 명단을 확인하고 역할을 분담합니다.
❷ 친교 모임에 오는 손님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안내합니다.
❸ 기도 제목을 가지고 함께 기도합니다.

첫째날(일) 일점일획
4월 20일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마 5:17~18).

교사강해 1)
율법과 선지자를 예수님께서 이루시겠다는 말씀은 어떤 관계가 있는가? 그것은 두 가지인데 첫째는 불연속성이다. 예수님의 가르치심은 율법의 가르치심을 넘어가기 때문에 앞서 불완전했던 것을 완전케 하였다. 그 실례가 마태복음 5:21-48에 나오는데 “너희가 들었거니와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였다. 이렇게 예수님의 메시지 안에는 새로운 질, 다시 말해서 보다 더 완전한 요구가 들어 있었다. 둘째로 역시 연속성도 있다. 왜냐하면 율법이 앞서 예수님의 메시지를 지적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율법과 선지자가 침례 요한때까지 예언했다고 하셨다(마 11:13). 예수님이 율법을 이루신다고 말했을 때 예수님은 그가 성취되고 있는 예언에 대해서 말씀할 때와 같은 의미에서 이루어짐에 대해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선지자들은 예수님의 사명과 일을 앞서서 지적하였고 율법은 그의 교훈을 미리 지적하였다. 예수님은 구약율법으로 예시되었던 하나님의 요구에 대한 그의 가르침의 의미에서 율법을 이루셨다. 그러므로 18절에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고 하셨다. 여기 일점일획은 흠정역(KJV)에서는 히브리어에 제일 작은 글자 요드(‘)로 번역했고 개정표준역(RSV)에서는 헬라어에서 가장 작은 글자 이오타(τ)로 번역했다. 한극 개역성경에서는 점과 획이라 했다. 사실 히브리어에서 베드(כ)와 카프(ב)의 알파벳은 별개의 글자이나 구별하기 어렵다. 위의 말씀은 율법의 가장 작고 세밀한 것까지도 무가치한 것이 아니란 뜻인데 적어도 두 가지 일이 일어날 때까지는 그렇다. 첫째, 천지가 있는 한이요 둘째, 그것이 다 이루어질 때까지이다. 이는 시간적 한계와 내용적 한계라고 할 수 있겠다.

마 5:17~20을 다시 읽어 보라. 예수께서 율법을 그토록 강조했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동시에 그분도 율법을 크게 강조하셨다니 정말 흥미롭다. 이 말씀에서 우리는 율법에 진정으로 순종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어떤 중요한 교훈을 배워야 하는가?
예수님은 시작부터 자신이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고 보증하신다(마 5:17). ‘율법과 선지자’라는 말이 성경을 뜻한다는 언급은 없지만, 많은 사람이 그 말을 전체 구약 성경을 말하는 관용적 표현으로 여긴다(마 7:12, 11:13, 22:40, 눅 16:16, 행 13:15, 24:14, 롬 3:21 참고). 반대자들의 주장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을 계시하는 성경을 공격하지 않으셨다. 대신 그분의 목적은 ‘율법과 선지자’를 폐하는 것이 아니라 이루시는 것이었다.
‘이루다’라고 해석된 그리스어 ‘플레로(plero)’는 문자적으로 ‘채우다’, ‘완성하다’라는 뜻이 있으며 어감상 ‘넘치도록 가득 채우다’라는 뜻을 내포한다. 여기서 우리는 ‘이루다’를 두 가지 방식으로 이해할 수 있다. 첫째는 성경을 성취하는 분으로서 예수님께 강조점을 두는 것이다(예, 눅 24:25~27, 요 5:39). 그러나 이 말씀을 이해하는 열쇠는 예수님이 성경을 폐하기 위함이 아니라 그 안에 있는 본질을 나타내시기 위해 오셨다는 문맥에 있다.
자신의 종합적인 의도를 밝히기 위해 예수님은 일반적인 의미의 구약성경에서 특정 의미의 율법으로 강조점을 바꾸셨다. 마치 언젠가 백성들이 율법을 폐하는 자로 그분을 고소할 것을 아신 것처럼 그분은 하늘과 땅이 남아 있는 한 율법이 다 이루어지는 때까지 존재하리라고 경고하셨다(마 5:18).

교훈 : 예수님은 율법을 폐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 본질을 밝히고 그 뜻을 완성하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다.

부가적용)
예수님에게 율법은 하나님의 뜻의 표현이었다. 하나님의 뜻은 영원하며 불변한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수정하러 오시지 않고 그것을 성취하러 오셨다. 사법적인 법과 의식법이 모두 십자가에서 종결되었다. 도덕법만은 예수님에 의해 이루어 졌으나 그의 제자들에 의해 아직도 성취되고 있다. 따라서 예수님은 유대 지도자들이 염려했던 것같이 율법을 폐하러 온 분이 결코 아니었다. 사실은 그 반대였다. 결론적으로 예수님은 우리의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것보다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오지 못하리라고 하신다. 이 말씀은 우리의 구원이 은혜와 믿음의 구원이나 역시 행위가 따라야 함을 암시해 준다(전 12:14; 마 25:37-45; 롬 2:16; 고후 5:10; 계 20:1-13). 하나님의 자녀의 충성의 정도가 이 세상에서 같지 않으니 하늘나라와 부활 때의 영광의 정도도 다를 것이다(고전 15:41). 그러면 율법의 세칙까지 정해 놓고 문자적으로 지키기를 힘썼던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보다 어떻게 우리의 의가 나을 수 있단 말인가? 정말 천국에 들어가기는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기 만큼이나 어려운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그렇지는 않다. 바리새인들이 율법을 철저하게 지키기는 하였으나 그들은 율법을 지킴에 있어 두 가지 점에 문제가 있었다.

나의 삶 속으로

| 묵상 |
그대의 삶 속에서 율법의 본 의미는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습니까?
(왼쪽 페이지에 이어서) 예수님은 이 진술을 통해 율법의 항구성을 확증하셨다. 율법은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그 교훈을 어기는 자들은 모두 하나님의 나라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게 될 것이다. 이 말은 그들의 행위에 잘못이 있다는 뜻의 표현 방식이다. 예수님은 곧바로 그분이 장려하는 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공허한 의가 아닌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뜻을 행하기 원하는 심령에서 비롯된 의라는 사실을 지적하셨다.

| 적용 |
생활 속에서 계명의 참의미를 성취하기 위해 그대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영감의 교훈
그리스도의 죽음이 실증하는 사실 - “만일 율법의 요구가 취소될 수 있었다면 하나님의 아들이 율법을 범한 죄를 속하기 위하여 당신의 생명을 바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율법의 불변성을 입증한다. 무한한 사랑이 아버지 하나님과 아들을 강권하여 죄인들을 구원하고 자 치르게 한 희생, 곧 이 속죄의 계획 이외의 다른 방법으로는 할 수 없었던 그 희생은 공의와 자비가 하나님의 율법과 그분의 정부의 기초가 된다는 사실을 온 우주에 실증해 준다”(각 시대의 쟁투, 503).

기 도
어느 하나도 소홀히 할 수 없는 소중한 계명의 말씀을 제 마음에 새겨 주시옵소서. 천지가 없어질지언정 절대 변할 수 없는 그 큰 뜻을 저의 노력으로 이룰 수 없음을 고백합니다. 오직 그 뜻을 온전하게 이루시는 예수님만 믿고 따르기를 원합니다.

둘째날(월) 살인(마 5:21~26)
4월 21일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마 5:22).

교사강해 2)
율법에 대한 순종이나 불순종은 내적으론 마음속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했다. 이것이 예수님의 가르치심이요 원래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뜻이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그렇지 않았다. 마틴 로이드존스 (Martyn Lloyd Jones)는 그들의 문제점을 이렇게 지적하였다. 그들은 원리보다 세부에 더 관심이 있었고 동기보다 행동에 인간됨보다 행함에 더 관심이 있었다. 결국 바리새인들은 외적, 의식적, 계율적 의를 추구했으나 예수님은 내적, 도덕적, 영적 의를 말씀하셨다.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행함으로 의로워지려는 인간의 의에 외식을 더하였다.
그것은 참 의가 아니었다. 참 의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내 죄를 위해 죽으신 사실을 깨닫고 내 죄를 회개하고 예수그리스도를 내 구주로 영접할 때에 얻어지는 의다. 그것은 옛 사람이 죽고 새 사람이 된 거듭난 사람의 의이다(요 3:3). 이것은 행위의 의, 율법의 의가 아니라 믿음의 의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 미치는 의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을 의로 여기신다(롬 4:5). 그러므로 진심으로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성도는 거듭난 사람이요 그리스도의 의를 옷 입은 사람이요 그 의에서 바리새인과 서기관보다 나은 사람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은 그리스도의 보다 나은 의로 누구나 천국에 들어감을 얻는다.

예수님은 율법을 높이려는 의도를 밝히신 후에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를 능가하는 의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하셨다. 그분은 먼저 제6계명을 인용하셨고(출 20:13), 법을 위반할 경우 받을 형벌을 요약하셨다(출 21:12, 레 24:17).
제6계명은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죽이는 모든 경우를 포괄하지 않는다. 과실치사의 경우 가해자는 도피성으로 달아나 일시적인 보호를 받았다(출 21:13, 민 35:12). 그러나 고의적으로 다른 사람의 생명을 해한 사람은 신속한 재판을 받았다. 예수님은 이것을 설명하면서 행위 자체보다는 행위자의 동기와 의도에 초점을 맞추셨다. 우발적으로 생명을 해하는 경우도 있지만 살해 목적이 있는 자는 계획 단계를 거친다. 죄는 끔찍한 행위를 저지르기 전에 이미 발생한다. 수많은 잠재적 살인범들은 단지 기회를 놓쳐 단념할 뿐이다.
마 5:22을 읽어 보라. 예수님은 살인을 무엇과 동일시하셨는가? 요일 3:15은 이런 관점을 어떻게 강조하는가? 여기서 예수님이 지적하신 진정한 문제는 무엇인가? 우리는 이것으로부터 진정으로 하나님의 법을 지킨다는 것에 대해 무엇을 배우는가?
성경은 종종 말의 능력에 대해 언급한다. 그런데 예수님은 여기서 더 깊은 차원에서 그 주제를 다루신다. 험담과 저주의 유일한 목적은 피해자에게 부정적 감정을 유발시키는 것이다. 예수님의 관점은 매우 분명하다. 살인죄는 범죄를 저지른 자들뿐 아니라 다른 이에게 험담을 하거나 살인할 생각을 품은 자들에게도 해당한다. 예수님은 이런 생각을 품은 자들에게 제단에 오기 전에 피해자들과 화해하라고 권유하신다(마 5:23~26).

교훈 : 예수님은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보다 더 나은 의에 대해 설명하시면서 형제에게 화를 내며 욕하거나 살인을 생각하는 것도 살인죄라고 말씀하셨다.
부가적용)
예수님의 살인에 대한 가르침은 사람의 목숨을 취하는 것도 살인이지만 그 이전에 내면적 마음의 태도와 동기가 더 중요한 것임을 밝혀 주셨다. 즉 1) 마음의 분내는 것은 살인의 직접적인 동기가 됨으로 이미 살인한 것이요, 2) 남에게 ‘라가’라는 굴욕적인 말이나 욕설을 하는 행위도 분을 참지 못하고 죄악된 마음으로 행한 것이니 역시 살인을 포함하는 것이요, 3) 상대를 미련하다고 무시하고 경멸하는 것도 살인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알리요마는 나 여호와는 심장을 살피며 폐부를 시험하고 각각 그 행위와 그 행실대로 보응하나니”(렘17:9-10)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하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요일3:15) 이 말씀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불편함을 준다. 우리 역시 모두 살인자가 되기 때문이다. 여러분, 남을 미워하고 시기하며, 화를 내고 욕을 하고 상대를 무시하는 마음의 행위와 입술의 말은 바로 살인하는 것임을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배운다.

나의 삶 속으로

| 묵상 |
그대는 언어 살인, 마음의 살인으로부터 자유롭습니까?
‘그 사람이 여기에 없었으면’, ‘다시는 보고 싶지 않다’, ‘뭐 저런 사람이 있을까?’ 등등 우리는 어떤 사람의 존재를 부정하는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엄밀하게 그 모든 생각의 뿌리는 살인의 동기와 닿아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하거나 위축시키는 말과 분노의 표출은 다반사입니다. 우리는 매순간 그리스도의 의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생각과 동기를 성령께 굴복시켜야 합니다.

| 적용 |
증오의 감정을 품거나 격한 발언을 할 위험이 있을 때 필요한 조치는 무엇일까요?

영감의 교훈
여섯째 계명의 위반 - “생명을 단축시키는 모든 부정한 행위와 증오와 복수의 정신과 또는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는 행위를 하게 하거나 우리로 그들이 해 받기를 바라는 마음을 품도록 만드는 감정에 빠져드는 것과 가난한 사람들이나 고통당하는 사람들을 보고도 이기심 때문에 돌보는 일을 게을리한 행위와 모든 방종이나 불필요한 소모나 건강을 해치는 경향이 있는 과중한 노동 등 모든 것은 정도에 차이는 있으나 다 여섯째 계명을 범하는 것이다”(부조와 선지자, 308).

기 도
아버지, 제 마음을 보옵소서. 담지 말아야 할 생각과 저주가 생기고 있습니다. 성령의 불로 이 죄의 씨를 태워 주옵소서. 속히 제 마음을 지배하시고 하늘의 평화로 채워 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셋째날(화) 간음(마 5:27~32)
4월 22일

“또 간음하지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마 5:27~28).

교사강해 3)
‘간음하지 말라’고 하신다. 말씀의 구조는 ‘살인하지 말라’는 앞에 부분과 같다. 즉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로부터 ‘간음하지 말라’는 말을 너희가 들었지만,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고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형식적, 외형적인 믿음생활보다 진실한 내면의 믿음생활이 우선적이다. ‘살인하지 말라’는 교훈에서 살펴본 것처럼 사람의 목숨을 취하는 행위만이 살인한 것이 아니라 형제에게 노하는 것도 이미 마음으로 미워하여 살인한 것임을 주님은 말씀하셨다. 마찬가지로 ‘간음하지 말라’는 뜻을 예수님은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고 간음죄에 대한 근본(본질)을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마음의 죄도 행동의 죄와 같다는 말씀이며, 오히려 마음의 죄로 인해 행동의 죄를 일으킴으로 마음의 죄가 더 심각한 것임을 일깨워 주시는 말씀이다. 당시에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간음하지 말라’는 7계명을 “행동으로 다른 사람의 아내와 잠자리를 함께하지 말라.”고 이해했기 때문에 스스로 성적인 면에 깨끗하다고 생각했고, 거룩하다고 믿고 사람들을 가르쳤다. 또한 그들은 스스로 속마음으로 더러운 생각을 하며 죄를 지으면서도 겉으로는 깨끗한 척, 거룩한 척, 하며 연약한 사람들이 행동으로 죄를 지었을 때 그들을 가차 없이 정죄하고 심판했던 것이다. 그들을 향해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고 하신 말씀은 “너희 모두가 간음 죄인이다”라고 지적하신 것이다.

예수님은 그다음 간음에 대한 계명을 예로 들면서 “간음하지 말라”는 제7계명을 인용하셨다. 모세의 법에 따르면 간음은 결혼한 사람이 배우자 외의 다른 사람과 성적으로 관계를 맺을 때 발생한다. 율법은 간음을 저지른 두 사람을 사형에 처하도록 명시한다. 예수님은 제6계명을 설명하실 때처럼 이 계명에 대해서도 더 깊은 의미를 제시하셨다.
간음은 행위가 발생하기 훨씬 이전부터 시작된다. 살인이 한 개인에게 항구적인 상해를 가할 의도에서 시작되는 것처럼 간음은 기혼자든 미혼자든 배우자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 대해 음욕을 품는 순간 시작된다.
마 5:29~30을 읽어 보라. 예수님이 죄의 위험성을 어떻게 이보다 더 강경하게 설명할 수 있겠는가? 이 말씀을 본 다음 롬 7:24을 읽어 보라. 어떤 중요한 진리가 있는가?
여기서 예수님은 폭로된 죄들에 대하여 즉각적인 해결책을 제시하신다. 그것은 죄에 끌려다니지 말고 마음을 돌이키는 것이다. 예수님은 강력한 비유를 들어 문제를 안고 있는 자들이 만약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를 원한다면 필요한 조치를 취하라고 권유하신다. 이는 다른 행동 경로를 택하거나 이전 관계를 단절하라는 뜻이다. 하지만 영원한 이득은 순간의 고통보다 훨씬 가치가 있다.
앞서 보았듯이 모세는 이혼이 하나님의 계획의 일부가 아님을 알면서도 허용했다. 예수님은 한눈파는 자들에게 충동을 조절하도록 훈계하시면서 백년해로하도록 격려하신다.

교훈 : 간음죄는 음욕을 품는 순간부터 시작된다. 하나님의 나라를 얻으려면 우리는 죄를 유발하는 환경과 관계에서 과감하게 벗어나야 한다.
부가적용)
예수님은 이 7계명의 참된 뜻을 오늘 말씀을 통해 가르쳐 주셨다. 정상적인 성관계는 하나님의 창조역사를 이루시기 위해 주신 도구이며,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그러나 간음죄는 영혼을 타락시키고 파멸시키는 무서운 죄인데 오늘날 각 나라와 민족의 상황은 어떤가? 가정의 파괴, 사회의 무질서와 타락이 간음죄로부터 오고 있다. 성적인 자유를 주장하는 것이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는 것인지 우리는 이 시대에 심각하게 생각해야 한다. 성적인 욕망을 무질서하게 부추기는 책자들, TV매체, PC매체, 광고나 드라마, 동성연애의 자유가 지배하는 사회와 국가가 세계를 뒤덮고 있다. 소돔과 고모라 시대보다 더 타락한 오늘날이다. 눈이 성적인 유혹을 당하게 했다면 그 눈이 없는 것 같이 살아야 되고, 손이 성적인 유혹을 당하게 했다면 손이 없는 것 같이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죄지은 한쪽 눈을 빼버려도 또 다른 쪽 눈으로 죄짓고 마음속으로 또 죄짓는다. 죄지은 손을 찍어버려도 또 다른 손으로 죄짓고 마음속으로 또 죄짓는다. 내 힘과 노력으로는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자기 눈과 귀와 손과 발을 자기 뜻대로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한 사람도 없다. 내가 원치 않아도 그것들은 죄로 향한다. 이것이 죄성을 가진 인간의 모습이다.

나의 삶 속으로

| 묵상 |
그대는 자신의 의지로 죄를 거부하기 어렵다고 느낍니까?
우리는 스스로 육체의 욕망을 통제하지 못합니다. 자신이 영적 불구임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희망이 없습니다. “만일 네 오른 눈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마 5:29~30).

| 적용 |
영적 순결을 유지하기 위해 그대는 어떤 경로를 차단할 필요가 있습니까?

영감의 교훈
최고의 유익에 이르는 길 - “의지를 굴복시키는 것을 눈을 빼 버리거나 손을 베어 버리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다. 의지를 하나님께 굴복하는 것이 평생을 병신이나 절뚝발이로 보내기로 동의하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자주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병신이 되고, 상처를 입고, 절뚝발이가 되더라도 생명을 얻을 수 있다면 그것이 더욱 좋다고 말씀하신다. 그대가 재난으로 생각하는 그것이 최고의 유익에 이르는 길이 된다”(산상보훈, 61).

기 도
아버지, 욕망에 끌려다니는 저를 불쌍히 여기시며 용서해 주시옵소서. 세상 죄에 대하여 눈멀고, 귀먹고, 손발을 쓰지 못 하는 대신 하늘 영광에 눈을 뜨고, 주의 음성에 귀가 열리며, 의를 위해 일하는 팔과 복음을 전하는 발을 주시옵소서.

넷째날(수) 맹세, 맹세…(마 5:33~37)
4월 23일

“또 옛 사람에게 말한 바 헛 맹세를 하지 말고 네 맹세한 것을 주께 지키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부터 나느니라”(마 5:33, 37).

교사강해 4)
맹세자체가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금하신 것은 아니다. 옛 계명에 따르면 하나님은 그들에게 1)‘헛맹세를 하지 말라’는 말씀을 하시며 더 나아가  2) ‘일단 맹세한 것은 반드시 지키라' 고 요구하신다. 하나님은 우리가 앞에서 "헛맹세를 하지 말고 네 맹세한 것을 지키기를 기대하셨다."  하나님 앞에 거짓은 하나님의 신뢰와 사랑을 얻지 못한다. 이것은 건강한 신앙생활에 치명적인 손상을 입히어 하나님 안에 들어오지 못하게 만든다. 그러나 주님의 새로운 견해로는 사람들의 말이 너무 허황되고 거짓말을 많이 하니 차라리 맹세하지 말라는 것이다. 사람들의 거짓말에 너무 지쳤다는 것이다. 말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거창하게 맹세하며 말하지만 실재 행동은 1) 자기 기쁜 대로  2) 자신의 편리에 따라 행동한다는 것이다. 차라리 맹세를 하지 말라는 것이다.

살인과 간음에 대한 첫째와 둘째 반명제(antithesis)는 십계명에 기초해 있다. 반면 이혼과 그 이후의 반명제들은 모세법의 다른 부분에서 비롯된다. 예를 들면 거짓 맹세와 하나님께 서원을 행하는 문제이다.
레 19:11~13을 읽어 보라. 이곳에 어떤 특별한 점이 있는가?(출 20:7 참고)
예수님이 인용하신 모세의 법은 여러 기만적인 행위를 정죄하는 레위기 한 부분에 열거되어 있다. 여기서도 예수님의 관심은 확실히 내적인 의도에 있다. 약속을 지킬 의도가 없이 약속한 사람은 의식적으로 죄를 짓기로 작정한 것이다.
거짓 맹세를 금하는 명령이 다른 사람과의 약속에도 관련이 있지만 두 번째 명령은 하나님께 드린 약속에 관한 것이다.
신 23:21~23을 읽어 보라. 이 말씀은 마 5:33~37에 있는 예수님의 말씀과 어떻게 관련되어 있는가?(행 5:1~11 참고)
거짓 맹세를 한 사람의 잘못과 다르게 하나님께 헌금을 드리기로 맹세한 사람은 속일 의도가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러나 예수님은 인간의 본성을 아시고 나중에 후회할 약속은 하지 말도록 당부하신다. 그리스도인들은 개인의 능력으로 지키기 힘든 약속을 하기보다 그의 대답이 ‘예’는 ‘예’이고, ‘아니오’는 ‘아니오’를 의미하는 정직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교훈 : 지킬 마음이 없이 다른 사람과 약속하는 것은 죄이며, 하나님께 지키지 못할 서원은 하지 않는 것이 낫다.

부가적용)
사람들이 맹세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맹세란 상대에게 자기 말의 진실성을 믿도록 하기 위해 다른 믿을만한 근거를 내거는 행위이다. 예루살렘으로 맹세한다는 것은 오늘날로 말하자면 교회의 이름으로 즉 자기가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으로 맹세한다는 것이다. 교회와 그리스도가 하나이며 이것은 다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이다. 하늘과 땅은 다 하나님의 것이요 하나님의 집이다. 결국 하나님 앞에서 말하는 것이다. 어떤 이는 교회의 장로로서 자신의 말의 진실함을 맹세한다. 기독교인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한다. 장로의 직위를 걸고 말할 때 장로로 세우신 분은 하나님이시고 교인의 이름을 걸고 이야기 할 때 결국 더럽혀지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이다. 교인이 사람 앞에서 말하지만 결국 모든 헛맹세가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히는 결과를 가져온다. 진실한 말이 아닌 모든 말은 다 거짓말이다. 정치가들은 때때로 이렇게도 저렇게도 해석할 수 있는 말을 한다.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어 두고 이중적 의미의 말, 어떤 부분은 말하면서 어떤 부분은 감추어 상대로 하여금 사실을 정확하게 알 수 없도록 말한다. 이것도 다 거짓말이다. 그리스도인의 말은 단순해야 한다. 그래서 예수님은 "너희는 '예'할 때 '예'하고 '아니오' 할 때 '아니요'하라. 여기서 빗나가는 것이나 그 이상의 말은 악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옳음을 거짓이라 하고 거짓을 옳다 하는 자들이 되어서는 안 된다. 이랬다저랬다 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렇게 될 때, 서로 간에 불신이 쌓이게 된다. 자신의 편리에 따라 말을 바꾸지 말아야 한다.

나의 삶 속으로

| 묵상 |
그대는 자신이 한 약속에 대하여 얼마나 확신을 가지고 있습니까?
성경은 하나님께 서원할 때 신중하라고 당부합니다. 사람과 하는 약속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는 우리의 연약성에 관한 문제입니다. 많은 사람이 약속을 지키는 일에 실패합니다. 심지어 공개적으로 하나님께 서약한 것도 지키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자신의 연약성을 시인하고 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 보장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구별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하지만 이런 연약성을 핑계로 지킬 생각 없이 서약하는 것은 더 악합니다.

| 적용 |
최근에 지키지 못한 약속이 있다면 그대는 그것을 통해 어떤 교훈을 배웠습니까?

영감의 교훈
진실을 말하려면 - “그리스도인이 하는 모든 것은 햇빛과 같이 투명해야 한다. 진리는 하나님께 속한 것이나, 무수한 형태를 가진 악은 모두 사탄에게 속한 것이다.… 진실을 알기 전에는 진실을 말할 수 없다. 선입관념과 편견, 불완전한 지식과 오판으로 얼마나 자주 우리와 상관된 문제들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하는가! 우리의 마음이 진리이신 분의 인도를 끊임없이 받지 않는 한 진리를 말할 수 없다”(산상보훈, 68).

기 도
아버지, 그동안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다짐과 약속을 어긴 저의 죄를 용서해 주시옵소서. 지킬 수 있는 약속은 꼭 지키고, 허풍이나 과장, 자기 과신의 태도를 버리고 겸손하고 정직하며 진실한 삶을 살 수 있도록 도와주옵소서.

다섯째날(목) 탈리오 법칙(마 5:38~48)
4월 24일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 5:43~44).

교사강해 5)
탈리오의 법칙이란 피해자가 입은 피해와 같은 정도의 손해를 가해자에게 가한다는 보복의 법칙이다. 탈리온이라고도 하며, 반좌법(反坐法) ·동해보복법(同害報復法)이라고도 번역된다. 응보(應報)원칙의 가장 소박한 형태이며, 고대사회규범 중에서 볼 수 있는 정의 관념의 원시적 표현인데, 무제한 복수를 허용하던 단계에서 동해보복의 정도까지 보복을 제한하여 권력적 질서 하에 둔 것은 큰 진보라고 할 수 있다. 이 법칙은 함무라비법전(法典)에 규정되어 있고, 성경에도 이와 유사한 것이 있는데, ‘생명에는 생명으로써, 눈에는 눈으로써, 이에는 이로써’ 라고 표현되어 있는 것이 그것이다. 이는 가해와 복수의 균형을 취하여 응보적 정의감을 만족시킴으로써 사투(私鬪)를 종결시키려는 것이므로 가해자측의 재복수는 허용되지 아니한다. 고대국가가 형성되면서 그때까지 무차별 ·무제약적(無制約的)으로 행사되었던 집단적인 복수로부터 가해자 개인에 대한 복수라는 관념이 나타남에 따라서, 제재(制裁)도 피해자가 입은 해와 동일한 보복으로 법률을 정하여 제약한 점이 주목할 만하다. 비교법적(比較法的)으로 본다면 탈리온주의(主義)는 전기(前記)한 것 이외에 그리스 ·중국의 고대에서도 볼 수 있지만, 게르만이나 인도에는 없었다고 한다. 오늘날에는 응보형의 순수이념형을 나타내는 말로 쓰이고 있다.

오늘의 주제는 보복이다(마 5:38~48). 이 주제는 모세의 법이 말하는 여러 명령과 관련이 있는데 그 명령들은 어떤 범죄에 대하여 동등한 형벌로 되갚는 원칙에 기초해 있다. 이런 개념은 라틴어로 ‘렉스 탈리오니스(lex talionis: 보복의 원칙)’라고도 불린다.
성경의 여러 곳에서 율법은 가해자로 하여금 피해자가 당한 동일한 고통을 겪도록 요구한다(출 21:22~25, 레 24:17~21, 신 19:21). 피해자가 눈, 팔, 발 또는 생명을 잃으면 가해자도 같은 것을 잃게 된다. 이와 같은 보복의 원칙은 여러 고대사회에서 통용되었다. 이 원칙은 단순한 정의의 원리를 나타낸다는 면에서 긍정적이다.
우리는 이 원칙이 보복을 제한하기 위한 것임을 깨달아야 한다. 즉 이것은 사람들이 받은 피해에 대하여 앙갚음하도록 주어진 법적 권한 이상의 해를 가하지 못하도록 방지하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이 법은 정의가 왜곡되지 않도록 보장하는 장치였다.
그러므로 마 5:38~42에서 예수님은 범죄 사실에 대하여 어떤 사람에게 형벌을 요구하는 법의 정당성을 공격한 것이 아니다. 대신 그분은 자신들을 이용하려는 타인에게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에 초점을 맞추셨다. 그리스도인들은 보복의 기회를 구하기보다 오히려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라면 할 수 없는 그런 친절과 행위를 통해 ‘보복’해야 한다. 예수님은 이러한 호소를 통해 주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 더 깊은 차원의 이해로 우리를 이끄신다.

교훈 : 성경에서 보복의 법칙은 보복을 제한하기 위한 장치이며 예수님은 그리스도인들이 그것을 초월하여 원수까지 사랑하도록 가르치셨다.

부가적용)
반좌법(反坐法) ·동해보복법(同害報復法)등과 같은 왜 이런 법을 만들었는가 하면 사람들은 자신의 상해를 받은 것 그 이상으로 다른 사람에게 보복하려는 것을 막으려고 한 것이다.  법의 잣대를 이렇게 엄격하게 함으로 죄를 더 이상 확대하지 못하게 막으려 하였다. 즉, 생명은 생명으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남에게 손상을 입힌 만큼 자신도 똑같은 보복을 받게 한다는 것이다. 이 규례는 한편으로 하나님의 엄격한 공의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지만 본래의 의도는 더 큰 보복의 악순환을 방지하고자 하는 데 있는 것이다. 사람의 복수심은 내가 타인으로부터 눈을 다쳤으면 그 복수심으로 상대방의 눈뿐만이 아니라 상대방의 다리도 부러뜨려 놓을 수 있는 복수심을 경계하기 위해 자신이 받은 피해 이상으로 다른 사람에게 위해를 가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이 죄는 매우 기억하기 쉬운 법으로서 내가 타인의 눈을 다치게 했으면 내 눈으로 그것을 배상해야 하는 것은 나와 다른 사람의 생명의 가치가 동일하다는 정신을 보여준 것이다. 이 법은 타인의 생명의 존중을 통해 자신의 생명의 존중을 생각할 수 있도록 동해보복법은 기억하기 쉽고 자신이 저지르는 결과에 따라 동일한 죄값을 받아야 함으로 함부로 남을 위해 하거나 상해를 입히지 못하게 한 것이다. 이 부분은 ‘동해보복법(同害報復法, lex talionis)’에 관한 규례이다.(레 24:17-20; 신 19:21) 이 규례는 개인적인 보복의 정당성을 부여하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보복의 남용을 방지하려는 것이다. 그 근본정신은 복수를 최대한으로 억제하고 용서와 사랑의 정신을 심어주려는 데 있다. 이러한 율법의 정신은 신약 시대에 와서 ‘오른뺨을 맞으면 왼뺨도 돌려대라.’는 주님의 가르침(마 5:38-44)으로 발전되었다. 26,27: 사람이 그 남종의 한 눈이나 여종의 한 눈을 쳐서 상하게 하면 그 눈 대신에 그를 놓을 것이며 그 남종의 한 이나 여종의 한 이를 쳐서 빠뜨리면 그 이 대신에 그를 놓을지니라. 종의 주인의 소유물이기 때문에 동해보복법의 적용을 받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종이 인격의 침해나 신체의 제재를 받아서도 안 되었다.  주인은 종을 교훈할 목적으로 매질할 권리는 있었지만, 종의 신체 중 어떤 부위라도 상해하면 그 대가로 종을 해방시켜야 했다. 이런 사실은 고대 근동의 어떤 법률에서도 나타나지 않는다. 종이지만 종의 신체적 권리를 최대한으로 보장하기 위한 법이었다.

나의 삶 속으로

| 묵상 |
원수를 사랑하고 선으로 악을 이기는 사람의 생각은 어떨까요?
(왼쪽 페이지에 이어서) 마지막 반명제는 친구에 대한 사랑과 원수에 대한 증오를 장려하는 태도를 다룬다.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명령은 레 19:18에 있다. 하지만 원수를 미워하라고 요구하는 뚜렷한 말씀은 없다. 그나마 신 23:3~6도 그런 말은 없다. 예수님 시대의 유대인들은 로마의 군의 압재를 받고 그들의 땅에서 2등 시민으로 살아야 했다. 그들은 로마의 박해를 받을 때마다 그들을 강압적으로 핍박하는 적군을 증오하는 것이 정당하다고 느꼈을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비록 이상적인 상황이 아니더라도 더 잘 사는 길이 무엇인지 보여주셨다.

| 적용 |
내게 피해를 주는 사람에게 관용과 친절로 ‘보복’할 수 있도록 기도하십시오.

영감의 교훈
고상한 신분을 알려주는 분명한 표 - “그러나 증오에 대하여 사랑을 나타내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영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감사할 줄을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 친절하게 하고, 보수를 전혀 바라지 않고 선을 행하는 것은 하늘 왕족의 표 곧 지극히 높으신 분의 자녀들이 그들의 고상한 신분을 알려 주는 분명한 표이다”(산상보훈, 75).

기 도
예수님, 마음속에 피어오르는 증오와 원한을 십자가 앞에 내려놓습니다. 원수의 편에 있던 우리를 사랑하고 용서하셨던 예수님의 충만한 은혜로 저도 그 사람을 사랑하고 용서하며 은혜 베풀 수 있도록 도와주옵소서.

여섯째날(금) 더 깊은 연구를 위해
4월 25일

<시대의 소망>, 298~314 “산상수훈”을 읽어 보라.

“예수께서는 계명을 하나하나 들어서 강조하시고 그 요구의 깊이와 넓이를 설명하신다. 예수께서 그 계명의 효력을 조금도 제거하시지 않으시고 그 원칙이 얼마나 원대한가를 보여주시고 유대인들이 외관적으로 순종하는 체함으로 치명적인 과오를 범하고 있음을 폭로하신다. 예수께서는 악한 생각이나 음탕한 모습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율법이 범해진 바 된다고 선언하신다. 가장 작은 불의라도 그것과 관계하는 자는 율법을 범하고 자신의 도덕성을 저하시키고 있는 것이다.
살인은 먼저 마음속에 존재한다. 마음에 증오심을 품는 자는 자신의 발을 살인자의 길에 놓고 있다. 하나님은 그가 드리는 예물을 몹시 싫어하신다”(시대의 소망, 310).

사랑은 하나님의 율법에 있는 통합적인 원칙이다. 각 반명제에서 예수님은 사랑의 원칙을 높이셨다. 사랑은 형제자매에 대한 증오를 품지 못하도록 막는다. 사랑은 남편과 아내가 하나가 되게 한다. 사랑은 다른 사람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그리스도인들이 항상 정직하도록 요구한다. 사랑은 부당하게 대우를 받아도 친절하게 반응하게 한다. 사랑은 자신이 대접받기를 원하는 방식으로 원수를 대할 수 있도록 힘을 북돋아 준다.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➊ 이번 주 교과에서 예수님은 “옛 사람에게 말한 바 ~하라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하며 반명제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옛 사람에게 했던 말이 구약의 말씀이라는 사실에 주목하십시오. 문제는 인용보다는 해석하는 방법에 있습니다. 이와 관련해서 우리는 말씀을 해석하는 방법에 대해 어떤 교훈을 배워야 합니까? 우리도 깊은 의미를 놓친 채 너무 표면적인 것들만 볼 위험성이 얼마나 많습니까?

➋ 많은 사람은 성경 한 절만 읽고 말씀을 해석하는 덫에 빠집니다. 예를 들면 마 5:48은 우리에게 아버지처럼 완전하라고 가르칩니다. 문맥을 고려하여 이 말씀을 이해하는 것은 신중한 성경 연구의 중요성을 어떻게 보여줍니까? 이 말씀이 죄 없는 삶을 가르친다고 주장하는 사람에게 우리는 어떻게 대답해야 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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