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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7과 우리의 제물되신 그리스도(강해식 과정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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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조춘호 작성일13-11-10 07:05 조회4,56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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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과 우리의 제물 되신 그리스도

11월 16일 안식일
일몰:오후 5시 21분

기억절 :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벧전 2:24).

연구 범위 : 사 53:2~12, 히 2:9, 히 9:26~28, 히 9:12, 출 12:5, 히 4:15.

도입)
하나님이 인정하는 인류의 대표는 두 사람이다. 아담은 모든 인류의 조상으로서 자연적인 인류의 대표이다. 그러나 그는 불행하게도 실패한 대표가 되었으며, 하나님과의 관계를 단절하고 범죄함으로서 그가 대표하는 모든 인간이 정죄와 형벌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롬 5장이 가르치는 대로, "한 사람의 범죄로 인하여 사망이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전 인류에게) 왕노롯"하였으나,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게" 되었다. 여기서 우리는 한 사람 때문에 모두가 죄인이 되고, 한 사람 때문에 모두가 의인이 되는 대표성의 원리를 발견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본래 인간이 아니었으며, 따라서 인류의 대표가 아니었으나, 인류를 구속하기 위한 목적으로 인류의 둘째 그리고 마지막 아담이 되기로 자원하였으며 성부께서 이를 인정하고 세상에 파송하였다. 그러나, 인간의 대표가 되기 위해서는 인간의 하나가 되어야 했고, 이를 위해 인간으로의 성육신이 필요하였다. 하나님은 그에게 인류의 모든 죄를 담당시켰으며, 이러한 대표적 전가를 통하여 그는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이 되었다. 인류의 원죄도 대표성의 원리로 전가되었기 때문에, 인류의 구속도 동일한 방식을 채택하였다. 그러나 첫 아담과 달리 둘째 아담인 그리스도는 자연적으로 모든 인류를 대표하지 않고, 그에게 대표하도록 위임된 하나님의 백성, 혹은 그에게 소속될 사람들로 그 대표성이 한정되었다. 누가 그리스도에 의해 대표되는가는 신앙의 방식을 통해서 확인된다.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는 그의 대표성을 믿으며, 그의 대리적 형벌과 속죄(penal substitutionary atonement)를 믿는다. 그의 대표성을 믿지 않는 사람이 제외되는 것은 공정하고 합리적이며, 자기가 죄인이며 속죄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에게 속죄의 은혜가 부여될 수 없다.

가톨릭의 막스밀리안 콜베 신부는 그레이터 폴란드 주 난민과 이천 명의 유대인들에게 피신처를 제공한 죄목으로 아우슈비츠에 수감되었다. 그곳에서는 죄수 한 명이 막사에서 증발되면(아마도 탈옥하면), 남아 있는 열 명의 죄수를 굶겨 죽였다. 마침 보복의 대상으로 선택된 한 사람이 울며 말했다. “아, 불쌍한 아내와 내 자식들. 이제 다시는 못 보겠구나!” 그때 콜베가 망연자실한 그 남자 대신 자신이 굶겠다고 자청하였다. 깜짝 놀란 나치 장교는 그 제안을 수용하였다. 그렇게 그는 한 사람을 살리고 죽음을 앞 둔 사람들의 대열에 섰다.
콜베의 희생은 매우 감동적이지만 우리를 대신하셨던 분에 비하면 그림자에 불과하다. 성소 봉사는 예수님의 그런 행위를 상징하였다.
신약 성경은 구약의 제사 제도에서 두 가지 핵심 요소를 예수님께 적용한다. 그분은 우리의 제물이시며(히 9~10장), 우리의 대제사장이시다(히 5~10장).
이번 주 우리는 그리스도의 궁극적 희생의 여러 측면들을 연구하면서 단번에 드리신 그분의 죽음이 우리에게 무엇을 제공했는지 살펴보려고 한다.

안교 활동반과 교과 토의

※ 학습 목표
➊ 깨닫기 :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자기희생과 백성들을 향한 무조건적이고 무아적인 하나님의 사랑을 인식한다.
➋ 느끼기 : 구원의 확신을 주기 위한 하나님의 사랑과 희생에 대하여 감사한다.
➌ 행하기 :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에 굴복하고 우리를 기꺼이 영접하시는 그분을 찬양하며, 그분이 우리를 섬기는 것처럼 우리도 다른 사람을 섬기기로 결심한다.

Part 1. 인사 안교 반장 또는 소그룹 리더
서로 인사를 나누고 손님을 환영해 줍니다.
출석과 공부를 확인하고 안교헌금을 걷습니다.
결석자와 구도자에 대한 보고를 듣고 방문 계획을 세웁니다.

Part 2. 나눔 안교 교사 또는 소그룹 리더(A나 B 중 하나를 선택하십시오.)
A. ❶ 여러분은 아픈 친구를 위해 일을 대신하거나 식사 당번을 대신 해 본 적이 있습니까?
❷ 왜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위대한 어떤 사람이 아닌 하나님의 희생이 필요했을까요?
❸ 구원에 있어서 우리의 행위보다 주님의 피가 더 중요한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❹ 주님의 대속적 희생을 믿을 때 얼마나 구원을 확신할 수 있는지 서로 이야기해 봅시다.

B. ❶ 사회에서 ‘누구를 희생양으로 삼는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❷ 어떻게 예수님의 대속적 희생은 위와 같은 잔인한 개념과 근본적으로 다릅니까?
❸ 대속물이 되기 위해서 예수님이 갖추셔야 했던 조건은 우리에게 어떤 교훈을 줍니까?
❹ 각자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죽으셨다는 사실을 얼마나 확신하는지 이야기해 봅시다.

결론 :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과 희생을 받아들이면, 그분은 우리의 죄를 사하시고, 우리의 지위를 바꿔 주시며, 우리에게 복 주시고, 우리를 새로운 인생의 길로 인도하십니다.

Part 3. 실천 안교 반장 또는 소그룹(예비) 리더
❶ 번식 이전에 멤버를 최대한 확대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하여 의논합니다.
❷ 소그룹 또는 안교반의 번식을 어떻게 축하할지 이야기합니다.
❸ 기도 제목을 가지고 함께 기도합니다.

첫째 날(일) 이사야 53장이 그리는 예수님
11월 10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사 53:5).

교사강해 1)
왜 속죄를 위해 십자가의 형벌이 필요하였는가? 전능하신 하나님이 우주적 사면령을 발표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마치 대통령이 특별한 절기에 베푸는 특사나 부모가 자식의 잘못을 모른 채하고 눈감아 주는 것처럼, 하나님도 그렇게 인류의 죄를 용서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그러나 하나님은 그러지 않았다. 그로티우스는 그 이유가 하나님의 우주통치권에 있다고 생각하였다. 하나님은 우주적 통치자로서 질서를 파괴하는 사탄과 달리 우주의 질서를 유지해야 할 책임이 있으며, 따라서 범죄를 마음대로 용서해 줄 수 없고 공정한 절차와 방법을 사용한다. 만일 어떤 통치자가 어떤 사람에게는 법을 적용하고 어떤 사람에게는 법을 적용하지 않는다면, 그의 법집행적 권위는 실추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사랑을 가르친 예수님이 자기 교회를 세우기에 앞서 먼저 치리제도를 설정한 이유이기도 하다. 완전한 정의를 실현할 책임이 있는 하나님이 인류의 범죄를 용서해 주려는 사랑의 마음을 가졌을 때, 과연 어떤 해결책이 가능하였을까? 정의와 사랑의 두 원리를 모두 만족시킬 수 있는 해답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있었다. 구약시대의 엄격한 제사제도가 가르치고자 했던 것은 범죄는 아무리 하찮은 것이라도 간과될 수 없고 그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신적 원리였다. 그런데 범죄한 인간은 형벌을 받아야 할 죄인으로서 자기를 속죄할 자격이 없었으며, 따라서 인간의 구속은 외부로부터(extra nos) 온, 그러면서도 인류를 대신할 수 있는 인간이어야 했고, 모든 인간의 모든 죄를 대신 감당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인정하는 전능하고 의로운 신적 대표여야 했다. 그래서 안셈은 {왜 하나님이 인간이 되었는가(Cur Deus Homo)}에서, 신의 정의와 사랑을 만족시키기 위해 그리스도가 인간이 되어 구속을 성취하였다는 만족설을 주창하였으며, 모든 교회가 이를 수용하게 된 것이다.

사 53:2~12을 읽어 보라. 이 말씀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행하신 일들에 대하여 무엇을 가르치는가?
사 52:13~53:12은 세상 죄를 위한 그리스도의 죽음을 강렬하게 그린다. 이 말씀 속에 몇 가지 요소들은 예수님의 죽음이 형벌을 받는 대속물 형식의 속죄였다는 증거를 제시한다. 이는 그분이 다른 사람들이 받아야 할 형벌을 받았고, 그들을 위한 대속물로서 죽으셨음을 의미한다. 이 말씀은 우리를 위한 예수님의 사역을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1. 예수님은 다른 사람들을 위해 고난을 당하셨다. 그분은 그들의 질고와 슬픔(4절), 불의와 죄악(5, 6, 8, 11절)과 죄(12절)를 담당하셨다.
2. 그분은 고난을 당해야 했던 자들에게 평화와 나음(5절) 그리고 의(11절)와 같은 큰 유익을 가져다 주셨다.
3. 예수님이 고난을 받고 상하게 된 것은 하나님의 뜻이었다(10절). 예수님이 우리 대신 죽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이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예수님으로 하여금 우리 죄악을 담당하게 하셨다(6절).
4. 예수님은 강포나 거짓을 행하지 않은 의로운 분이다(9, 11절).
5. 그분은 죄를 속죄하기 위한 속건 제물이셨다(10절).
눅 22:37, 행 8:32~35, 벧전 2:21~25을 읽어 보라. 신약의 기자들은 이사야 53장을 어떻게 해석하는가?
신약 성경은 예수께서 이사야 53장의 예언을 성취하셨다고 확신한다. 심지어 예수님도 그 인물을 자신과 동일시하셨다(눅 22:37). 그리스도는 우리를 용서하고 변화시키기 위해서 우리 죄를 담당하셨다.

부가적용)
하나님은 정의를 실현하되 죄인에 대한 미움으로 단순히 형벌을 가하는 방법이 아니라, 형벌을 가하되 그가 가장 사랑하는 성자에게 형벌을 가하는 방식으로 정의와 사랑을 둘 다 아름답게 자기희생적으로 만족시켰던 것이다. 타인의 잘못에 대해 가할 채찍으로 자기의 사랑하는 외아들을 대신 때리는 사랑의 정의, 그것이 십자가의 대속이었다. 사랑의 정의가 진정한 정의이며, 정의의 사랑이 진정한 사랑이다. 따라서, 십자가는 범죄한 인류의 잘못된 사랑과 정의를 고쳐주는 치유의 실천적 가르침이기도 하다. 고린도후서 5장 19절에 "이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저희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교훈 : 이사야 53장에서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속건 제물로서 죽음의 고난을 당하는 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나의 삶 속으로

| 묵상 |
다음의 말씀을 묵상해 보십시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는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갔으나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살아 있는 자들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 때문이라 하였으리요”(사 53:4, 8)

| 적용 |
예수께서 그대의 어떤 고통과 슬픔, 죄악을 대신 짊어지셨는지 적어 보십시오.

영감의 교훈
자원하여 생명을 버리신 예수 - “인간 가족의 일원으로 예수께서는 죽을 수밖에 없는 인생이었으나 하나님으로서는 세상을 위한 생명의 근원이셨다. 예수께서는 다가오는 죽음에 저항하실 수 있었으며 죽음의 지배 아래 들어가는 것을 거절하실 수도 있으셨다. 그러나 그는 생명과 불멸을 드러내시기 위해 자원하여 그의 생명을 버리셨다. 그리스도는 사람들이 영원한 죽음을 당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세상의 죄를 지시고 죄의 저주를 견디시고 생명을 희생 제물로 바치셨다”(시대의 소망, 484).

기도
주님, 오늘도 십자가를 제 마음속에 그립니다. 날 위해 온갖 고통과 죽음을 겪고 마련하신 값진 구원을 봅니다. 모질고 무지한 인간을 가엾게 여기신 주께 고개를 숙이며 오래 참으시는 그 위대한 사랑을 노래합니다.

둘째 날(월) 충분한 대속물
11월 11일

“오직 우리가 천사들보다 잠시 동안 못하게 하심을 입은 자 곧 죽음의 고난 받으심으로 말미암아 영광과 존귀로 관을 쓰신 예수를 보니 이를 행하심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히 2:9).

교사강해 3)
'죽음을 맛본다'는 것은 참으로 위대한 사랑의 원리가 아닐 수 없다. 주님은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죽는 것보다 의로운 일은 없다 하셨다. 스펄전은  밤을 새워 어둠의 고통을 겪지 않고는 그 어둠의 고통을 알 수 없으며 눈물로 빵을 먹어보지 못한 사람은 인생을 논하지 말라 하였다. 이처럼 고난에 함께 참여하지 않고서는 그 고통을 알 수도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이미 바울은 그의 서신에서  '그는 우리의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한 자가 아니요 우리와 같이 한결 같이 시험을 받는 자'(히4:15) 하였으며 다시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셨다'(빌2:6,8) 증언하였다. 그러면 주께서 이처럼 천사보다 잠간 못하게 되어 인간의 고통에 참여하신 이유는 무엇일까? 바울은 이에 대하여 "만물이 인하고 만물이 말미암은 자에게는 많은 아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일을 저의 구원의 주를 고난으로 말미암아 온전케 하심이 합당하도다"(히2:10) 하였다. 이 말씀을 이해하는 데는 많은 생각을 요하기도 합니다만 여기서 말한 '구원의 주'는 '구원의 대장'(KJV), 곧 우리를 대표하신 분을 말한 것이다. 대장이란 어떤 그룹의 총수로서 전쟁의 선두자이다. 여기서 '많은 아들'이란 예수를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를 가르치는 말씀이다. 예수께서는 한 번 죽는 것이 정하여진 인간의 대표 주자였기 때문에 우리와 같은 죽음을 맛보아야 했다. 그러나 그의 죽음은 '많은 아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주께서 인간의 모습으로 친히 우리의 대장, 우리의 대표가 되어 육체의 고난을 받으신 것은 친히 구원할 자들의 대장이 되셔서 그를 믿는 모든 자들과 함께 영광에 들어가려 하려 하신 것을 설명한 것이다.

히 2:9을 읽어 보라. 예수께서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았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히 2:17, 9:26~28, 10:12 참고)
예수님은 죄인들을 위해 죽으셨다. 그분에게는 죄가 없었기 때문에 그분이 희생 제물로 자신의 생명을 주셨을 때에 그분은 자신의 죄 때문에 죽으신 것이 아니었다(히 4:15). 오히려 그분은 “백성의 죄를 속량하”(히 2:17)고 죄를 영원히 없이하시려고(히 9:26)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히 9:28)셨다.
히 2:9에 따르면 예수님을 천사보다 못하게 하신 목적은 죽음의 고난을 당하게 하시기 위함이었다. 죽음은 그분이 높임을 받는 필수적인 조건이었다. 간단히 말해서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예수께서 죽으셔야 했다. 다른 방법은 없었다.
이 말씀에서 성육신의 목적은 아들 하나님의 죽음이다. 오직 죽음의 고난을 통해서만이 예수님은 구원의 주가 되실 수 있었다(히 2:10).
하나님은 어떤 합당한 이유로 예수님으로 하여금 고난을 받게 하셨는가? 히 2:14~18의 문맥을 보면 예수님의 죽음은 악마와 죽음의 공포와 속박에서 하나님의 자녀들을 건져 내고, 그분으로 하여금 “자비롭고 신실한 대제사장”(17절)이 되게 한다. 간단히 말하면 십자가가 있어야 면류관도 있다.

부가적용)
시편기자는 그리스도의 그 고통과 죽음을 이렇게 표현했다. “나는 물같이 쏟아졌으며 내 모든 뼈는 어그러졌으며 내 마음은 촛밀 같아서 내 속에서 녹았으며 내 힘이 말라 질그릇 조각 같고 내 혀가 잇틀에 붙었나이다 주께서 또 나를 사망의 진토에 두셨나이다 개들이 나를 에워쌌으며 악한 무리가 나를 둘러 내 수족을 찔렀나이다 내가 내 모든 뼈를 셀 수 있나이다”(시 22:14~17) 정말 예수님은 죄인처럼 짐승처럼 벌레처럼 죽으셨다. 예수님은 친히 죽음의 고난을 하나하나 맛보셨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음의 고난을 친히 맛보신 것은 모든 죄인들의 죄를 사해 주시기 위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의 독생자 주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셔서 십자가에서 죽게 하신 것은 당신과 나의 모든 죄, 곧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든 죄, 내게 흘러내리는 아담의 원죄와 조상들과 부모의 죄와 내가 알거나 모르고 지은 모든 죄까지 전부 그에게 담당시키기 위하신 것이다. 나와 온 인류가 받을 죄의 댓가 곧 심판과 정죄와 죽음과 지옥(바로 이 땅이 지옥임)의 문제를 예수께서 모두 해결해 주셨다. 예수께서 우리를 구속(救贖)하시기 위하여 친히 사람이 되시고, 육체를 입으시고, 짐승처럼 어린양이 되시고, 마지막엔 스스로 죄인이 되셔서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고 죽으신 것은 당신과 나의 모든 죄의 문제를 다 담당하시고 해결해 주시기 위한 것이다. 우리 주님의 죽으심은 역사적이고 사실적이고 체험적일 뿐만 아니라 그것은 대속적(代贖的)이고 구속적인 것이다.

교훈 :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서는 오직 아들 하나님이 우리의 대속물이 되셔야 했다. 그런 죽음의 고난을 통해 그분은 우리의 구속주가 되셨다.

나의 삶 속으로

| 묵상 |
그대는 예수님이 ‘나를 위해’ 죽으셨다는 사실을 실감하십니까?
고무신도 귀했던 어느 시골 교회. 열심히 교회 노래를 따라하는 아이들에게 전도사님이 질문했습니다. “예수님이 누구를 위해 죽으셨어요?” 아이들은 “우리요!”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런데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전도사님은 “아니오. 예수님은 ‘날 위해’ 죽으셨어요.”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아이들은 믿기 어려웠습니다. 힘 있고, 돈 많은 집 아이를 위해서 그렇게 하셨다면 이해하겠는데, 초가집에 살며 짚신 신고 다니는 자신을 위해 그렇게 하셨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믿을 수 없는 일이 정말 ‘나를 위해’ 일어났습니다.

| 적용 |
그대는 다른 사람에게 예수님이 ‘너를 위해 죽으셨다’고 얼마나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까?

영감의 교훈
우리 대신 고난을 당하심 - “우리의 대리자요 보증인이 되시는 그리스도께 우리 모두의 죄가 놓여졌다. 우리를 율법의 정죄에서 구속하시려고 그분은 범죄자로 헤아림을 받으셨다. 아담의 모든 자손의 죄가 그분의 마음을 눌렀다. 불법으로 인하여 생긴 죄에 대한 하나님의 불쾌하심 곧 그분의 무서운 진노가 당신의 아들의 영혼을 전율하게 만들었다”(시대의 소망, 753).

기도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 23:34)하며 올리신 주님의 기도는 저를 위한 기도였습니다. 아무 죄 없으나 저를 용서하기 위해 죽으신 예수님을 찬양합니다.

셋째 날(화) 그리스도의 피
11월 12일

교사강해 3)
인간에게 죄 없는 생명이 주어져야 한다고 요구하는 것은 하나님의 거룩과 하나님의 공의때문이다. 그리스도의 보혈에는 생명이 있다. 그런고로 그 보혈은 범죄한 나를 위해 부어져야만 한다. 하나님은 바로 그 보혈이 부어지기를 요구하시는 분이다. 하나님은 그의 공의를 만족시키기 위하여 피를 요구하신다. “내가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니”라고 말씀하신 분은 곧 하나님이시다. 그리스도의 보혈은 완전히 하나님을 만족시켜 드린다. 여기서 주 안에서 자신의 죄로 인해 고민에 빠진 형제자매들에게 지적해 두고자 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흔히 여기서 올무에 빠지기 때문이다. 우리가 불신자일 때 하니님의 말씀이 우리를 각성시키기 전까지는 양심에 전혀 가책을 받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의 양심은 죽어 있었는데, 죽은 양심을 가진 사람들은 당연히 하나님께 아무 쓸모가 없다. 그러나 우리가 믿은 후로는 우리의 각성된 양심이 극도로 민감해졌을 것이다. 따라서 이것은 우리에게 실제적인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 죄의식과 죄책감이 너무나 커지고 극심해져서 나중에는 그리스도의 보혈의 진가를 보지 못하게 함으로써 우리를 거의 불구자로 만들 수 있다. 우리의 범죄는 참으로 대단해 보이고, 어떤 특정한 죄는 우리를 실로 여러 번 괴롭히므로, 마침내 우리는 우리의 범죄가 그리스도의 보혈보다 더 크게 보이는 지점에까지 이르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잘못된 신앙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보혈을 느끼려고 노력하는 데 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보혈의 가치를 느끼고, 우리에 대한 그 보혈의 가치를 주관적으로 평가하려고 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게 할 수 없다. 보혈은 그런 식으로 역사하지 않는다. 보혈은 첫째로 하나님께서 보시기 위하여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구원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렇지 않고 만일 우리가 우리의 느낌을 통해서 어떠한 평가를 얻으려고 한다면, 우리는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암흑 가운데 거하게 될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믿음의 문제이다.  우리는 보혈이 하나님께 보배롭다는 사실을 믿어야만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 보혈이 보배롭다고 말씀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구속적인 피의 개념은 성경 전반에 스며 있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한 이후 최초의 제사로부터 시작해서 동물 희생 제사가 있을 때는 항상 피가 있었다. 피의 제의는 이스라엘 제사 제도의 특징으로 피 없이는 우리가 사함을 얻을 수 없고 하나님의 임재 속에 들어갈 기회도 없다는 중대한 진리를 설명한다. 피는 하나님의 자비를 얻고 그분과 연결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히브리서에서 그리스도와 구약 제사의 피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는 아래의 성경절을 읽어 보라. 이 말씀들은 피에 대하여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치는가?
히 9:12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히 9:14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
히 9:18 “이러므로 첫 언약도 피 없이 세운 것이 아니니”
히 9:22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히 10:19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히 12:24 “…아벨의 피보다 더 나은 것을 말하는 뿌린 피니라”
히 13:12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하게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
히 13:20 “우리 주 예수를 영원한 언약의 피로 죽은 자 가운데서 이끌어 내신 평강의 하나님”
여기서 그리스도의 피는 그분의 생명을 의미하기보다는 그분의 대속적 죽음을 상징한다. 그것은 대속적 죽음의 기능적 측면을 묘사한다. 그리스도의 피는 놀라울 정도로 다양한 역할을 한다. 그분의 피는 우리에게 영원한 구원을 주고, 속죄를 베풀며, 죄 사함과 성화를 제공하고, 부활의 근거가 된다.

부가적용)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베드로전서 1:18~19) 만일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피를 우리 죄에 대한 대가와 우리 구속에 대한 값으로 받아들이신다면, 우리는 빚이 지불되었음을 확신하고 안심할 수 있다. 만일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보혈에 만족하신다면, 그 보혈은 만족스러운 것임에 틀림없다. 보혈에 대한 우리의 평가는 오로지 하나님의 평가에만 의존한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당연히 그 이상은 될 수 없고, 그 이하가 되어서도 안 된다. 하나님은 거룩하고 의로우시다는 것과, 그 거룩하고 의로우신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피가 하나님 보시기에 받아들일 만하고 그를 충분히 만족시켰음을 말씀하실 권리가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교훈 : 그리스도의 피는 우리가 죄 사함 받고 하나님의 임재로 나아가는 유일한 수단으로써 그분의 죽음이 대속적이었다는 사실을 입증한다.

나의 삶 속으로

| 묵상 |
그리스도의 피는 그대에게 어떤 영적 동기를 부여합니까?
(왼쪽 페이지에 이어서) 히브리서는 그리스도의 피가 다른 피보다 훨씬 낫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대비시킨다. 사실 다른 피로는 사함을 얻을 수 없다. 그리스도의 죽음만이 십자가 이전이든 이후든 죄가 용서받을 수 있는 유일한 근거이다(히 9:15). 그리스도의 피 흘림과 그 결과들은 그리스도의 죽음이 대속적이었으며 그분이 우리가 받아야 할 형벌을 받았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입증한다.

| 적용 |
그대가 선한 행위보다 그리스도의 피에 대한 믿음을 먼저 중요하게 여겨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영감의 교훈
교회의 생명 - “우리가 우리 죄를 고백하고 그리스도의 대속의 피의 효력을 간구할 때, 우리 기도는 우리 구주의 품성의 공로의 향기와 함께 하늘로 올라간다. 우리는 자신의 무가치함에도 불구하고 죄를 짊어지시고 죄인을 구원하실 수 있는 분이 계시다는 것을 항상 기억해야 한다. 통회하는 심령으로 하나님 앞에서 시인한 모든 죄를 그분은 제거하신다. 이러한 믿음이 교회의 생명이다”(목사와 복음교역자에게 보내는 증언, 93).

기도
아버지, 저의 행위는 구원에 조금도 보탬이 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저의 모든 노력과 헌신도 거의 무가치하였습니다. 그러나 고백합니다. 제가 구원의 은혜를 누리는 유일한 이유는 예수께서 저를 위해 피 흘리셨기 때문입니다.

넷째 날(수) 흠 없는 제사
11월 13일

“너희 어린 양은 흠 없고 일 년 된 수컷으로 하되 양이나 염소 중에서 취하고”(출 12:5).

교사강해 4)
하나님께 희생제물을 드리는 경우에 흠 없는 것만이 하나님께 열납되었다. 번제의 예물뿐만 아니라 화목제 예물 그 어떤 제물도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은 흠없이 온전해야 했다. 하나님께서는 흠이 없는 제물만을 열납하신다고 몇 번이나 강조하셨다. 그것은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온전한 제물, 흠없는 제물이 되실 것을 예표하신 것이다. 이 명령을 거역하면 형벌이 따른다는 원칙을 세우셨으니 흠있는 것을 열납하지 않으심은 우리들을 보호하시기 위함이라는 말씀이다.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뇨(히 9:14). 예수님께서는 많은 역경 속에서도 범죄치 아니하신  흠없는 분이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온전하신 삶이 하나님께 제물로 바쳐지셨고 흠 없고 점 없으신 제물인 예수님으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원하시던 열납하시는 제사가 완성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완전한 제사를 통해 완전한 은총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얻게 된 것이다.

희생 제물은 어떤 표준을 만족시켜야 하는가?(출 12:5, 레 3:1, 4:3)
희생 제물의 선택은 큰 주의를 요했다. 아무 동물이나 제물로 삼을 수 없었다. 제사의 종류에 따라 제물은 몇 가지 표준을 만족시켜야 했다.
그런데 모든 제물이 반드시 만족시켜야 하는 표준이 하나 있었다. 그것들은 흠이 없어야 했다. 히브리어 ‘타밈’은 ‘온전하다’, ‘상처가 없다’, ‘과실이 없다’, ‘완전하다’로 번역되기도 한다. 그것은 최고의 표준을 만족시킨다는 개념을 표현한다. 오직 최고만이 만족시킬 수 있는 표준이었다.
또한 백성과 관련하여 그 말은 하나님과 그들의 관계가 흠 없이 ‘완전’한 특징을 가져야 한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창 6:9, 17:1).
다음의 말씀은 예수님을 어떻게 묘사하는가?(히 4:15, 7:26, 9:14, 벧전 1:18~19) 왜 예수께서 죄가 없다는 사실이 중요한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요 1:29)이신 예수님은 흠 없는 제물로서 구약의 표준을 완벽하게 만족시키셨다. 그분의 순결한 생애는 그분이 완전한 제물이라는 사실을 입증했다. 이로써 우리의 구원이 보증되었다. 왜냐하면 오직 죄 없는 분만이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지실 수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이든 심판 때이든 우리를 덮어주는 것은 그분의 완전한 의이다. 그 의가 우리의 구원의 희망이다.
또한 ‘흠이 없다’는 뜻의 그리스어는 예수님과 그분의 흠 없는 제사뿐 아니라 그 제자들의 품성을 묘사하기 위해 사용된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봉사를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 앞에 흠 없는 자로 제시된다(유 24). 이것은 오직 흠 없는 분께서 우리를 대신하시기 때문에 가능하다.

부가적용)
속죄제물은 흠이 없어야 한다. 양이나 염소를 5일 동안 꼼꼼히 관찰하여서 흠이 있는지 없는지 살피는 것이 제사장들의 임무였다. 흠이 없는 제물에 안수하여 죄를 넘겨서 피를 흘려 죽인다. 그 거룩한 피를 여호와께서 기뻐 받으시는 것이다. 죄는 눈물 콧물 흘리면서 무조건 빈다고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무지에 용감한 사람들이 소나무 뿌리를 뽑으면서 자신의 죄가 없어지기를 바라는 것은 자신의 무지를 입증하는 것이다. 죄가 사해지는 것은 약속을 믿는 믿음으로만 가능하다 마치 수학공식과 같은 것이다. 죄인과 희생제물과 제사장이 있어야한다. 모든 인류의 죄를 위해서 성령으로 잉태한 거룩한 제물이신 예수님이 오셨다. 그리고 마지막 제사장인 침례요한이 요단강에서 예수님께 안수함으로써 모든 세상 죄가 그리스도에게로 넘어 간 것이다. 십자가에서 흘린 예수님의 피를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고 죄를 위하여 다시 제사를 드리지 않아도 된다고 하심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신 것이다.

교훈 : 제물이 되려면 흠이 없어야 했다. 이는 인간을 대속하기 위한 제물로서 그리스도의 완전한 생애와 품성을 상징하며 우리도 닮아야 하는 특징이다.

나의 삶 속으로

| 묵상 |
그대는 흠 없는 삶을 추구합니까?
죄 많은 인간은 흠 없는 완전한 삶을 살 수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그분의 흠 없고 완전한 의는 우리의 것으로 간주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흠 없는 삶을 추구하지 않아도 될까요? 만약 우리가 그리스도와 같은 삶을 소망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믿음은 공허한 고백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난 새로운 피조물이며 그분의 나라에 합당한 자녀가 될 것을 믿고 바랍니다.

| 적용 |
흠 없는 생애를 살기 위해 그대가 가장 집중해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왜 그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까?

영감의 교훈
완전해지라는 요구 - “자신의 삶과 그리스도의 품성을 비교함으로써 그들은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의 요구를 만족시키지 못하는 부분을 분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분의 영역에서 완전하신 것처럼 그들도 그들의 영역에서 완전해지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E. G. White, The Paulson Letters, 374).

기도
실패하지 않으시는 그리스도의 의에 의지합니다. 성령의 도움을 구하며, 그 음성에 귀를 기울이는 겸손한 자녀가 되기를 원합니다. 온전하신 그리스도께 매달려 완전한 나라에 이르게 하여 주시옵소서.

다섯째 날(목) 큰 위험
11월 14일

“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나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 놓고 욕되게 함이라”(히 6:4~6).
교사강해 5)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타락한 자’는 누구를 말함일까요? 우리가 어떻게 하여 내세의 능력을 맛보았을까요? 우리는 예수님께서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 세상의 빛이로라 빛이 있는 동안에 빛을 믿으라‘(요 12:35-36)고 하시면서, 예수님이 이스라엘 땅에 계실 동안에 각 사람에게 비취셨다. 즉 이스라엘 사람들은 비췸을 얻었다.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라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하늘에서 내려온 산 떡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5000명에게 떡을 나눠주심을 직접 경험했다는 말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 은사를 맛보았다. 그렇지만 이 모든 사람들이 구원을 받지는 못했다. 즉 맛만 보고 진짜는 먹지 못하는 그런 결과가 되어 버린 것이다. 또한 오순절에 성령이 강림하심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강력한 역사하심을 이스라엘 민족은 보았고 그래서 성령에 참예한 민족이 되었다.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타락한 자‘란 역시 하나님의 은사를 맛보고 믿지 않는 사람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을 사리키는 것이다. 이처럼 기회가 주어졌음에도 불구하고 복음을 일부러 배척한 사람들은 다시 회개케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즉 그 죄는 용서 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단은 히 6:4-6즐을 악용하여 그리스도인들을 혼란에 빠뜨려 왔다. 곧 의도적으로 죄를 지은 그리스도인들은 영원한 지옥(사실 지옥이란 한 번 죽는 것이 정해진 사형수들이 살고 있는 이 땅을 말함)을 피하지 못한다고 속여 온 것이다. 그러나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에게 하신 말씀이 아니라 의도적으로 믿지 않는 자들을 말하고 있는 것이며, 결론적으로 단번에 이루신 그리스도의 사랑을 배척하는 사람에게는 오직 심판만이 남아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피만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므로 그러한 그리스도의 피를 배척한 사람은 결코 구원될 수 없다는 것이다.

히브리서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희생에 대하여 신학적 이해에 집중할 뿐 아니라 몇 가지 실천적인 의미를 설명하기도 한다. 그는 여러 곳에서 이 희생을 무시하는 사람에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보여 준다.
히 6:4~6과 10:26~31을 읽어 보라. 바울은 우리에게 무엇에 관하여 경고하는가? 그는 어떤 종류의 태도에 대해서 설명하는가?
히브리서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구원이 얼마나 위대하며, 그분은 자신을 어떻게 계시하고, 신자들을 위해 무엇을 하셨으며, 무엇을 하고 계신지 보여 주었다. 하지만 그가 꼭 언급해야 하는 문제점이 있었는데 그것은 그리스도의 희생이 점점 당연하게 취급받을 위험성이었다. 바울은 그러한 위험성을 목표로부터 “흘러 떠내려”간 것이라고 묘사하였다(히 2:1). 바울의 언어는 방향을 선회하여 목표 항구에 이르지 않는 배를 그린다.
하나님을 거역하는 자들은 의도적으로 그렇게 행한다. 그들의 삶은 복음을 받은 후에도 이전과 다르지 않다. 사실 이들의 죄를 위한 제사는 없다(히 10:26~31). 물론 노골적으로 그리스도의 희생을 거부하거나 그런 행동을 마음에 두는 그리스도인은 많지 않다. 그래도 바울은 경고의 소리를 발한다. 무시와 방치의 진정한 위험성은 그것이 교묘하게 점진적으로 진행된다는 데에 있다. 그 과정은 눈에 띄지 않는다. 그러다가 점차적으로 그리스도의 봉사를 감사하게 여기지 않게 된다. 에서가 그의 장자권을 더 이상 감사하게 여기지 않았던 것도 이것과 비슷하다(히 12:15~17).

부가적용)
만약 고의로 죄를 범하는 그리스도인이 있다면, 하나님은 그 사람을 징계는 하실지언정 구원을 빼앗아 가시지는 않는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요10:27-28) 거듭난 그리스도인이 불순종하면 생애 속에 징계와 슬픔이 있을 것이므로 징계가 커지기 전에 즉시 돌이키고 바른 신앙생활을 해야 한다. 그리고 그 당시 유대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요즘에도 하나님을 말씀을 다 듣고 모든 것을 알면서도 복음을 배척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 말씀은 이러한 사람들에게도 해당되는 말씀이다.

교훈 : 우리는 그리스도의 희생을 당연하게 여기거나 그 가치를 소홀하게 여기면서 점점 그분의 은혜에서 멀어지지 않도록 주님을 바라보아야 한다.

나의 삶 속으로

| 묵상 |
그대는 이 특별한 구원과 은혜를 당연하게 여기지는 않습니까?
(왼쪽 페이지에 이어서) 바울은 그의 독자들을 두려움에 떨게 할 마음은 없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 등을 돌린 결과를 그들에게 보여 주어야 했다. 그는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기를 바랐다. 긍정적인 면에서 그는 신자들이 구원의 모든 선한 것들을 굳게 붙잡고(히 3:6, 14, 10:23), 그들의 눈을 예수께 고정시키도록 적극적으로 권유하였다(히 12:2).

| 적용 |
하나님이 베푸신 구원과 신앙생활로 인해 무엇이 감사한지 아래에 적어 보십시오.

영감의 교훈
가장 중한 죄인 - “모든 죄인들 중에 가장 중한 죄인은 하늘이 인류의 구속을 위하여 준비하신 방법을 멸시하는 자, 곧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욕을 보이’(히 6:6)는 자이다”(부조와 선지자, 580).

기도
예수님을 알지 못했다면 얼마나 허무하고 불행하게 살았을까요? 주신 은혜와 구원의 소망에 감사합니다. 세상이 줄 수 없는 빛을 경험하고 하늘의 은사와 내세의 능력을 맛보았으니 세상을 버리고 오직 믿음으로 영원에 속한 것을 붙잡습니다.

여섯째 날(금)
11월 15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로 당신의 받으실 만한 대접을 받게 하기 위하여 우리가 받아야 할 대우를 받으셨다. 그리스도께서 당신과 아무 상관이 없으신 우리의 죄를 인하여 정죄함을 받으신 것은 우리로 우리가 아무런 공헌도 한 바 없는 당신의 의로 의롭다 하심을 받게 하시기 위함이었다.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가 나음을 받았도다’ ”(시대의 소망, 25).

“그리스도의 죽으심만큼 그분의 사랑을 우리에게 효험 있게 만드는 것은 없다. 우리가 즐거움으로 그분의 재림을 바라볼 수 있는 것은 오로지 그분의 죽으심 때문이다. 예수님의 희생은 우리의 소망의 중심이다. 우리는 우리의 신앙을 그 위에 고정시켜야 한다”(시대의 소망, 660).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➊ 어떤 이는 예수께서 우리의 희생 제물이라는 개념을 싫어합니다. 그들은 그런 개념이 하나님으로 하여금 피에 굶주리고 복수심에 불타는 고대 이방신처럼 보이게 한다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일부는 성경에서 사용된 제사와 피와 관련된 언어들이 이교 개념을 반영한다고 주장합니다.) 십자가에 대한 이런 견해에는 어떤 중대한 오점이 있습니까? 죽음, 희생, 피의 개념은 죄의 심각성과 그 결과를 어떻게 보여줍니까? 죄의 대가에 대한 이러한 인식은 어떻게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삶에서 죄를 제거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구하게 합니까?

➋ 어떤 사람들은 행위와 구원의 관계로 씨름합니다.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과 그분이 그 죽음을 통해 우리를 위해 이루신 일들을 기억하는 것은 어떻게 우리로 하여금 ‘행위로 얻는 구원’의 함정에 빠지지 않도록 돕습니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돌아가시면서 이루신 일들 위에 과연 우리의 행위가 무엇을 더할 수 있을까요?

➌ 엘렌 G. 화잇은 우리가 매일 그리스도의 생애와 특히 마지막 장면들을 생각하며 명상하는 시간을 보낸다면 좋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런 습관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를 위해 그분이 이루신 일들을 감사히 여기게 할 뿐 아니라 우리와 그분의 관계를 어떻게 강화시킬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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