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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1과 개혁 : 새로운 생각을 품음(강해식성경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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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조춘호 작성일13-09-09 07:51 조회4,50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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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1과  개혁 : 새로운 생각을 품음

9월 14일 안식일
일몰:오후 6시 42분

연구 범위
골 3:1~4, 고후 3:17~18, 고후 10:3~5, 롬 12:2~3, 요 10:10, 마 5:13~15.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골 3:1~2).

도입)
삶에 불만이 많은 두 청년이 한 스님을 찾아왔습니다. "스님, 직장에서 무시 받고 일하는게 너무 힘듭니다. 직장을 그만둬야 할까요? 아님, 그냥 참고 다니는게 나을까요? 하고 스님에게 물었답니다. 스님은 눈을 감고 한참 동안 생각한 뒤 짧게 한마디를 남겼다고 하네요. "밥 한 공기만도 못하구나," 그러고는 손을 내저으며 물러가라고 했답니다. 그 후, 한 사람은 회사에 돌아와 곧바로 사표를 낸 뒤 고향에 내려가 농사를 지었고, 다른 한 사람은 계속 회사에 남았다고 하네요. 그러는 사이 눈 깜짝할 사이 10년이라는 세월이 지났고, 고향에 내려가 농사를 지었던 사람은 현대화된 기법을 이용해 품종개량을 연구하여 농업 전문가가 되었고, 또 한사람 회사에 남았던 사람은 인내심을 갖고 열심히 일한 끝에 좋은 성과를 올려 CEO 자리까지 올랐다고 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두 사람이 10년 만에 만나게 되었는데요. 서로 주고받은 이야기는!!! "스님의 밥 한 공기만도 못하구나'라는 말씀에 서로가 난 마치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고 하면서 한 청년은 그 말을 듣고 나서 '그깟 몇 푼 때문에 지금의 생활을 포기하지 않고 불행하게 사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일까? 어차피 짧은 인생 괴로워하며 지내서 뭐해, 단 하루라도 맘 편하게 살아야지'라고 생각했지, 굳이 직장에 매달릴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서 사표를 썼던 것이고. 한 청년은 사표를 쓰지 않았는데 그 청년에게 자네는 왜 스님의 말을 듣지 않았나?"라고 농업 전문가가 묻자 CEO가 웃으며 대답했다. "무슨 소리! 나도 분명 스님의 말씀을 따랐다구. 난 스님의 말씀을 '넌 그 정도도 못참느냐! 그렇게 그릇이 작아서 이 험한 세상 어떻게 살아가겠느냐!' 라는 의미로 받아들었지. 그래서 나는 상사가 뭐라고 해도 참고 견뎠어. 그리고 그런 꾸지람들을 마음속에 담아두지 않았지." 두 사람은 다시 스님을 찾아갔다고 하네요. 스님은 10년 전과 다름없이 한참 동안 눈을 감고 있다가 짧게 또 말했다고 합니다. "생각의 차이일 뿐이네." 그러고는 또다시 손을 내저으며 물러가라고 했답니다. 그제야 두 사람은 스님의 뜻을 이해했다고 합니다.  무엇인가 변화를 가져오는 첫걸음은 우리의 생각이다. 생각은 씨앗과도 같다. 그것을 받아들이면 씨앗이 자라듯이 우리 안에서 그 생각도 함께 자라게 된다. 처음에는 상상을 하지만 결국은 행동으로 옮기게 된다. 그래서 좋은 의미에서든지 나쁜 의미에서든지 변화는 먼저 생각에서 시작된다. 하나님께서 우리로 승리케 하실 때에 먼저 좋은 생각을 품게 하신다. 생각이 변화되면 마음이 변화된다. 마음은 하나님의 활동 무대이다. 개혁은 우리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생각을 품을 때 마음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변화이다.

*교과반이 서로 기도해 주고 돌봐 주는 친밀한 모임이 되도록 노력합시다.

아이작 와츠는 750개의 찬미를 지은 것으로 유명하다. 그 가운데 많은 곡이 오늘날에도 애창되고 있다. 한번은 런던에서 와츠를 위한 퍼레이드가 있었다. 사람들은 이 유명인을 구경하기 위해 거리로 몰려들었다. 와츠를 태운 마차가 구경꾼으로 가득한 한 발코니 아래를 지나갈 때, 어떤 여인은 그토록 감동적인 찬양 작사자가 백 세가 넘은 작은 노인이라는 사실을 알고 깜짝 놀라서 이렇게 외쳤다. “설마, 당신이 아이작 와츠라고요?” 와츠는 마차를 세우도록 손짓했다. 그리고 몸을 일으켜 세우고서 이렇게 말했다. “여인이여, 내 키가 양극에 이르고, 내 손이 대양을 움켜쥘 수 있다 해도 나는 여전히 영혼에 의해 평가를 받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정신이야말로 사람을 평가하는 기준이기 때문입니다.”
아이작 와츠의 말이 옳다. 사람을 평가하는 기준은 정신이다. 그래서 개혁은 정신에 관한 것이다. 우리의 생각 속에 개혁이 있다면, 우리의 행동에도 개혁이 있을 것이다. 개혁은 성령께서 우리 생각을 그리스도의 생각과 일치시킬 때에 일어난다. 그러면 행동이 따를 것이다.

결론 : 우리의 사고를 변화시키시도록 성령께 우리를 맡길 때에 변화는 이르러 옵니다. 사고의 변화는 행동의 변화로 이어집니다. 우리의 감정은 안전한 안내자가 아닙니다. 우리의 감정과 상관없이 우리를 설득하는 성령께 굴복하고 하늘이 공급하는 변화의 능력을 받아들이기로 결심하는 것은 품성의 변화로 가는 통로입니다.

첫째날(일) 생각의 중요성
9월 8일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고후 3:17~18).

도입)
얼마 전에 한국 외대에서 사회학 박사인 ‘정가현’ 교수가 ‘생각의 차이가 인생의 차이다’라는 주제로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앞으로 도래할 미래와 생각의 중요성에 대해 강연을 했다. 정 박사는 인류가 농업혁명, 산업혁명, 지식혁명을 거치며 현 시대는 인간의 이성이 극에 도달한 상태라고 진단했다. 인류 역사의 흐름을 볼 때 앞으로는 영적혁명의 시대가 올 것이라며, 이러한 영적 혁명의 시대에는 인간의 본성과 이성을 뛰어넘는 신성이 중요함을 강조했다. 또한 인류 역사의 패러다임을 바꾸었던 이러한 혁명의 시기가 짧아지고 있고 앞으로 수십년 이내에 영적 혁명의 시대를 보게 될 것이라고 했다. 그렇기에 이에 대한 준비를 해야 한다며 앞으로는 정신 분석학자, 정신 상담자, 성직자 등의 직업이 유망한 직업이 될 것이라고 피력했다. 성공과 미래의 리더를 꿈꾸는 청소년들이 인간의 본능과 감각만을 자극하는 저급한 대중문화 속에 빠져들 것이 아니라, 이러한 사실을 제대로 인식하고 내면에 잠재되어 있는 신성을 개발하고 긍정적 생각의 힘을 통해 삶의 에너지를 만들어 내야 한다는 것이다. 최근 뇌 혁명, 뇌 과학, 뇌 교육 등에 관한 책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고 인간의 생각과 의식이 현실과 연결되는 시대가 올 것이라고 많은 미래학자들이 이야기하는 부분과 그 내용이 일치하고 있다. 생각은 그 사람의 인품이요 속사람이다. 인간은 누구나 행복한 생각을 하면 행복해지고 비참한 생각을 하면 비참하게 되는 것이다.
새의 소리를 듣고 어떤 사람은 새가 노래한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새가 운다고 한다.
그러므로 실패를 생각하면서 성공하지는 못할 것이며 생각이 병들어 있으면서 건강할 수는 없다." 80-20법칙에 의하면 20%의 생각이 80%의 삶을 좌우한다고 한다. 우리의 손과 발은 우리의 사고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부정적인 생각은 긍정적인 결과를 낳지 못한다. 좋은 생각과 행동은 결코 나쁜 결과를 낳을 수 없다. 나쁜 생각과 행동은 결코 좋은 결과를 낳을 수 없다. 우리의 긍정적이며 적극적인 생각은 우리의 손과 발을, 그리고 우리의 행동을 그렇게 만들 것이다. 우리는 긍정적이고 신앙적인 눈으로 매일의 삶을 경이로운 삶으로 만들어 가야 한다.

생각은 행동을 좌우한다. 우리의 사고방식이 행동 방식에 영향을 미친다. 그와 반대 역시 옳다. 반복된 행동은 우리의 생각에 영향을 준다. 그리스도인은 새로운 피조물이다. 옛 사고방식은 새로운 사고방식으로 대체된다(고후 5:17).
범선이 바다를 향해 출항하려면 돛을 단다. 돛은 배의 방향을 결정한다. 여정 중에 항로를 유지하려면 돛을 조정할 필요가 있다. 돛을 무시하면, 배는 신속히 항로를 이탈한다. 돛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생각도 우리의 영적 삶의 방향을 결정한다. “위의 것을 생각하”(골 3:2)라는 바울의 훈계는 생각을 하늘을 향해 집중시키라는 호소이다. 우리의 생각은 우리가 그 안에 무엇을 넣는지에 따라 꼴 지워지며, 무엇을 생각하는 데 시간을 사용하느냐에 따라 형성된다.
하나님의 말씀에서 그분의 영광을 볼 때에 우리의 삶에는 어떤 은혜의 기적이 일어나는가?(고후 3:17~18)
하나님의 말씀에서 예수님을 볼 때에 우리는 변화된다. 새로운 생각이 옛 것을 대신한다. 그분을 바라봄으로 우리는 더욱 그분처럼 된다. “지적·영적인 면에서 바라봄으로 변화하게 된다는 것은 하나의 법칙이다. 사람의 마음은 숙고하도록 허락된 사물에 점차적으로 적응된다. 그러므로 마음은 습관적으로 사랑하고 존경하는 것에 동화된다. 사람은 자신이 정한 순결과 양선과 진실의 표준 이상으로 향상할 수 없다. 만일 자아를 자신의 최고의 이상으로 삼는다면 그는 자기 이상의 표준에 결코 도달할 수 없다. 오히려 그는 점점 더 퇴보되어 갈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만은 사람을 고상하게 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자기 자신만을 신뢰하면 그는 필연적으로 퇴보할 수밖에 없다”(각 시대의 대쟁투, 555).

부가적용)
철학자 하워드 블룸은 이런 말을 했다. “우리는 잔인한 세상을 바로 세울 책임이 있으며, 고통을 이해와 즐거움으로 바꾸어야 한다. 또 아직 오지 않은 세대들을 위해 상상의 세계를 현실로 구현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 우리가 받은 가장 훌륭한 선물인 열정과 상상력, 고통, 욕망을 캐내고 바꾸어야 한다. 이러한 것들은 신의 일이지만, 그 신은 바로 우리 안에 살고 있는 힘이다.” 우리 속에 내재해 계시는 성령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 우리의 생각을 주님께 굴복시키고 주님의 뜻을 이루려 할 때 인간에게는 분명히 변화가 올 것이다.

교훈 : 생각은 무엇을 보느냐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에 우리가 예수님을 바라보며 그분의 삶을 묵상할 때 우리의 생각과 삶에 큰 변화가 일어난다.

나의 삶 속으로

| 묵상 |
그대가 하루 중에 가장 많이 생각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왼쪽 페이지에 이어서) 개혁은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과 관계가 깊다. 그것은 우리의 생각을 예수님으로 채우는 것이고, 예수님으로 하여금 우리의 생각을 빚고 우리의 행동을 지도하게 하는 것이다. 예수님을 바라볼 때, 그분은 단순히 엄격한 규율보다 더 높은 표준으로 우리를 인도하신다. 우리가 정말 예수님을 의지한다면 같은 모습으로 남아 있을 수 없다. 우리가 그분의 생각을 생각할 때, 우리는 단 하나의 소망, 즉 그분의 뜻을 행하고 싶은 소망을 갖게 될 것이다.

| 적용 |
생각을 예수님께 집중시키기 위해 그대는 무엇을 결심하겠습니까?

영감의 교훈
예수를 생각하라 -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입은 형제들아 우리의 믿는 도리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히 3:1). 그리스도를 연구하라. 그분의 품성을 한 면 한 면 연구하라. 그분은 우리가 우리의 생애와 품성에서 모방해야 할 우리의 모본이시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으면 우리는 예수를 대표하는 일에 실패할 것이며 세상에 사이비 사본을 제시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가려 뽑은 기별 3권, 170).

기도
제 생각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는 것들을 내려놓습니다. 마땅히 계셔야 할 예수님을 그 자리에 모십니다. 내 사고와 행동의 주인이 되시고, 내가 추구해야 할 삶의 목적이 되어 주시옵소서.

둘째날(월) 생각의 여과 장치
9월 9일

“끝으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받을 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받을 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빌 4:8).

교사강해 2)
한 사람의 인격은 그 사람의 마음에 달려 있다. 그 마음속에 무엇이 담겨 있고, 마음을 어떻게 다스리는가에 따라서 그 사람의 됨됨이가 드러나게 된다. 따라서 마음을 어떻게 다스리고, 지키는가가 중요하다. 피터 모펫이라는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우물을 청소하는 데 주의를 기울이기보다는 차라리 그대의 마음을 청소하는데 주의를 기울이라. 그대의 양떼보다는 그대의 마음을 살찌게 하라. 그대의 집을 방어하기보다는 그대의 마음을 지키기를 더욱 힘쓰라. 그대의 돈을 지키기보다는 그대의 마음을 지키기에 더욱 힘쓰라" 우리에게 중요한 교훈을 주는 말이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겉으로 보이는 우물은 청소하지만 보이지 않는 마음을 청소하는 데는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 에덴동산에서 하나님과 함께 행복한 삶을 살기를 원하셨다. 그러나 사단의 유혹에 넘어간 인간은 하나님의 마음을 상실했다. 이것이 바로 인간 비극의 출발이다. 창세기 6장에서 하나님을 떠난 인간, 타락한 인간의 마음을 이렇게 표현한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창 6:5-6)
하나님의 품을 떠난 인간의 마음과 계획은 항상 악했다. 그 결과 세상은 죄로 가득 차게 되었다.

어른들은 자녀들의 인터넷 검색 습관을 염려하여 유해 사이트를 차단시키는 프로그램을 설치한다. 텔레비전에도 비슷한 차단 기능이 있다. 이런 ‘가상의 여과 장치’를 사용하는 목적은 수용할 것과 배제할 것을 가리기 위해서이다. 하나님은 우리 생각을 위해 ‘영적 여과 장치’를 제공하신다. 그것은 우리가 예수님과 영적으로 교제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들만 우리의 생각에 들여보내도록 정교하게 만들어졌다.
바울은 동료 신자들에게 악의 영향으로부터 그들의 생각을 지키는 하나의 여과 장치로써 어떤 실질적인 지침을 주었는가? 이 권고는 오늘날 TV, 인터넷, 동영상을 보는 우리의 습관에 어떻게 적용되는가?(빌 4:7~8, 롬 12:2)
우리의 생각에 폭력, 부도덕성, 탐욕, 물질주의가 들어온다면 깊은 영적 사고를 발전시키기란 불가능하다. 이것은 매우 단순한 진리이다. 우리의 감각은 생각의 문과 같다. 우리의 생각이 할리우드 영화의 자극적 장면들로 폭격을 당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의 원리보다 감각적인 경험들에 의하여 틀이 잡힌다. 우리의 감각을 조종하고 사고를 길들이며 가치관을 바꾸기 위해 매체 제작사들은 엄청난 재정을 퍼붓는다. 이런 오락 매체들의 관심은 ‘어떻게 하면 이런 작품들을 통해 사람들로 하여금 곧 있을 예수님의 재림을 준비하게 할까?’가 아닌 것이 분명하다. 그들의 가장 근본적인 동기는 돈이다. 재림을 준비하는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인들은 자신을 매우 깊이 성찰함으로써 세상 오락의 제단에 자신의 영혼을 바치지 말아야 한다.

부가적용)
영적 전쟁은 생각의 전쟁이다. 하나님 이외의 모든 것은 예수의 이름으로 쳐서 복종시키고 내려놓아야 할 불순물들이다. 이러한 것들이 내 안에 남아있게 된다면, 하나님의 바른 소리에 귀 기울이기가 힘이 들며, 사단은 그러한 약점을 지속적으로 공격하며 기회가 있을 때마다 우리가 하나님께 올바로 순종하며 나아가는 것을 가로막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창조하실 때 영과 육과 혼을 만드셨다. 여기서 가장 치열한 영적 전쟁이 일어나는 곳은 바로 ‘혼’이다. 사탄은 혼으로 침투하여 우리에게 영적인 혼동을 일으키며 하나님 말씀에 집중할 수 없게 한다. 우리는 보는 것의 통로를 잘 지켜야 한다. 통로가 더러우면 언제나 더러운 것이 나오게 되어 있다. 한용운 선생은 일제 때 나라를 잃고 민족이 암울할 때 철저하게 민족을 사랑하는 애국자로서 호적까지 없애고 살았던 분이시다. 한번은 한용운 선생에게 설법을 해달라는 요청했다. 전국의 스님들이 모인 자리에서 그는 지팡이를 들고 강단에 서서 이렇게 말했다. “사람의 더러운 것은 몸에서 나가는 배설물이니라” 이 말을 한 후 조금 있다가 “그보다 더 더러운 것은 사람의 시체가 썩는 냄새니라” 또 조금 있다가 지팡이로 책상을 탁탁 치면서 “그보다 더 더러운 것은 염불에는 마음이 없고 잿밥에만 마음이 있는 중놈의 마음이니라”라고 말하고 그 자리를 떠나갔다고 한다. 인간이 아무리 수행을 하고, 도덕적 삶을 살기 위해 몸부림쳐도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마음은 더럽다. 마음의 생각이 악하고, 거짓되고, 헛된 것들로 가득 차 있다. 성경은 그것을 ‘마음이 상했다’ 라고 말씀한다. 상한 마음(broken heart), 즉 하나님의 형상이 깨졌다는 의미이다. 깨어진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것, 잃어버린 하나님의 마음을 발견하는 것, 그것이 바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이다.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교훈 : 생각은 감각을 통해 들어오는 정보들에 의하여 틀이 잡히기 때문에 우리는 영적 여과 장치를 두어서 세상의 유해한 것들로부터 생각을 지켜야 한다.

나의 삶 속으로
| 묵상 |
그대는 영원한 것에 대하여 얼마나 자주 생각합니까?
(왼쪽 페이지에 이어서) 이탈리아 밀라노의 한 대성당에는 나무로 만든 세 개의 거대한 출입문이 있다. 왼쪽 문에는 이런 글이 새겨져 있다. ‘모든 쾌락은 순간이다.’ 오른쪽 문에는 이런 글이 또렷하게 새겨져 있다. ‘모든 고통도 잠깐이다.’ 그리고 가운데 문에는 굵은 글씨체로 다음과 같은 명언이 새겨져 있다. ‘영원한 것만이 남으리라.’

| 적용 |
그대는 생각을 오염시키는 것들을 어떻게 걸러 내겠습니까?

영감의 교훈
하나님만 섬기라 - “사람들로 하여금 여호와 하나님, 그분만을 경배하고 섬기게 하자. 이기적인 자부심을 높여서 신처럼 섬기지 않도록 하자. 돈이 신이 되게 만들지 않도록 하자. 감각이 심령의 높은 능력으로 통제되지 않으면, 저열한 열망이 존재를 지배하게 된다. 마음을 잡아끄는 합당하지 않은 사상과 숭배의 주제가 되는 모든 것은 여호와 이전에 선택된 하나의 신이다. 하나님은 심령을 살피는 분이시다. 그분은 진정한 심령의 봉사와 우상 숭배를 분별하신다”(설교와 강연 2권, 185).

기도
아버지, 좋은 생각을 갉아먹는 나쁜 생각으로부터 저를 지켜 주시옵소서. 제 속에 정결하고, 경건한 것만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시고, 악은 모양이라도 버릴 수 있도록 단호한 믿음을 주시옵소서.

셋째날(화) 생각의 보호 장치
9월 10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 4:7).

교사강해 3)
사단이 침투하고자 하는 틈새가 있다. 바로 사단 자신이 타락한 원인이 되었던 생각이다. 사단은 하나님보다 높아지고자 하는 생각만을 품었을 뿐, 사실 하나님을 거역하는 어떠한 구체적인 행동을 하거나 실천을 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사단은 하나님보다 높아지고자 하는 생각 때문에 타락했다. 그래서 생각은 사단이 그리스도인들을 넘어뜨리는 데 자주 사용하는 통로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창조하실 때 영, 육, 혼을 만드셨는데, 여기에서 가장 치열한 영적 전쟁이 일어나는 곳은 혼적인 마음이다. 우리의 혼은 전쟁터 이다. 하루에도 수십번, 수백번씩 ‘혼적인 마음’에서는 하나님의 소리, 사단의 소리, 자아의 소리가 들려온다. 사단은 혼으로 침투하여 영적 혼동을 일으키며, 정확한 분별력을 가지고 있지 않은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에서 멀어지게 만든다. 우리는 말씀에 입각한 정확한 영분별의 은사를 받고 늘 사단의 소리, 자아의 소리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복종시켜서 하나님의 소리가 우리의 삶을 다스리도록 해야 한다. 우리의 생각의 통로는 성령의 통로가 되어야 한다. 성령의 충만함이 없을 때 우리는 사탄의 소리, 자아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되고, 자신의 이론과 생각, 견고한 진들에 이끌리어 하나님과 멀어지게 되는 것이다. [엡5:18]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행4:31]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청령이 충만하여...” [갈5:16-18]. 성령의 충만함을 받기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기도이다. 또한 우리의 생각은 매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씻김을 받아야 한다.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은 단지 큰 죄를 지을 때 뿐만이 아니다. 매일 말씀과 기도로 깨어있지 않는다면 사단은 어느새 우리의 생각에 하나님을 거역하고 하나님의 뜻 가운데서 멀어지게 하는 생각들을 심어 놓을 것이다. 천국 가는 그 순간까지 우리는 늘 생각을 지키며 하나님의 소리에 귀 기울이며 매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나아가야 한다. 사탄은 단 한순간도 쉬지 않는다. 이에 대적하기 위하여 매일 깨어서 기도하며 말씀의 검을 들고 늘 싸워 승리해야 한다.  

이 말씀은 위대한 약속이다. 그러나 이 약속을 우리 삶 속에 실현하려면 적극적으로 그것을 추구해야 한다. 우리는 여러 방식으로 우리의 보호 장치를 해제한다. 우리는 이 세상 오락의 오물 속에 빠진다. 우리의 생각은 분노, 괴로움, 후회감에 정복되기도 한다. 그것은 또한 쾌락 또는 중독적인 습관의 홍수에 잠기기도 한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우리 자신을 그분께 맡기면 예수님은 우리 마음을 지켜 주시리라고 약속하셨다.
고후 10:3~5을 읽어 보라. 우리의 무기는 육체적인 것이 아니라 영적인 것이라는 바울의 말은 무슨 뜻인가? 무엇이 영적 무기일까? 또한 사도 바울이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하”(고후 10:5)라고 말한 의미는 무엇인가? 어떻게 그것이 이루어질 수 있는가?
빌리 그레이엄이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그대가 머리 위로 나는 새를 막지는 못해도, 그것이 머리에 둥지를 틀지 못하도록 막을 수는 있다.” 다시 말해, 여러 사상이 우리의 생각을 파고든다. 우리의 사고를 자극하는 다양한 장면과 소리와 냄새가 있다. 각각의 경험은 각각 다른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우리는 우리 생각 속에 흐르는 사상들을 항상 골라낼 수는 없다. 하지만 우리가 그것을 곰곰이 생각할 것인지 또는 그것이 우리의 생각을 지배하도록 허용할 것인지 선택할 수는 있다.
모든 생각이 그리스도께 복종하게 하려면 우리의 생각을 예수님께 굴복시켜야 한다. 육체적 사상은 단지 그것이 없어지기를 바란다고 없어지지 않는다. 그것들은 우리의 생각이 다른 무엇으로 채워질 때만 밀려난다. 하나님 말씀의 긍정적인 원리에 초점을 맞춘 마음은 안전 보호 장치가 구비된 마음이며, 악한 자의 간교로부터 하나님의 은혜가 지키는 마음이다.

부가적용)
만일 어떤 사람이 거듭나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면 그에게는 3 가지의 대적이 생긴다. 그것은 세상, 사단, 그리고 타락한 옛 본성이다. 이 3 가지 모두 참된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 매우 힘겨운 대적들이며 우리가 시급하고 진지하게 다루어야 할 주제들이지만, 특별히 나는 지금 타락한 옛 본성에 대해 나누는 것이 매우 필요함을 느낀다. 왜냐하면 이 주제에 대해서 우리가 제대로 듣지 못하고 있다는 마음의 부담이 매우 크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성경이 명확히 가르치는 것은, 죄와 타락으로 말미암아 인간 가운데 있는 모든 것이 삐뚤어지고 어그러졌으며, 그 타락한 본성은 심지어 거듭난 성도들 가운데서도 남아 역사하여 격렬한 내적 갈등을 일으킨다는 것이다. 이를 명확히 해야 한다! 성경의 가르침에 따르면 죄로 인한 인간 본성의 타락은 단지 수동적인 연약함이 아니다. 그것은 적극적이고 의지적인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과 반역이며 거부인 것이다. 타락한 본성은 결코 하나님께 순종할 수 없다! 그리고 어떤 사람이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어 그 속 중심이 초자연적인 성령님의 역사하심으로 재창조된 후에도, 이 '육에 속한' 옛 본성은 종종 그리스도인들에게 격렬한 갈등을 일으키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롬7:21) 이제 명확히 해야 하는 것은, 우리를 대적하는 것은 단지 세상이나 마귀 및 악한 영들의 활동만이 아니라는 것이다! 더 교묘하고 치명적인 내부의 적이 있는 것이다. 세상이나 마귀가 성을 둘러싼 외부의 적이라고 한다면, 이 타락한 본성은 성 안쪽에서 외부의 대적에게 문을 열어줄 기회만을 노리는 첩자와도 같은 것이다! 우리는 이 사실을 알고 있는가? 우리가 정직하게 대면해야 하는 것은, 우리 가운데 있는 모든 시험과 걸림돌들을 그저 외부의 악한 영들의 '묶임'과 '견고한 진'의 탓으로만 돌릴 수는 없다는 것이다. 누구를 탓하겠는가?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약1:14) 우리 가운데 여전히 남아 있는 타락한 본성, 옛 자아, 내재하는 죄, 정욕! 이것 역시 우리가 가장 격렬하게 대적해야 할 무서운 내부의 대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저 기도 시간에 예수님의 이름으로 악한 영들을 대적했다는 것만으로 다 되었다고 만족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만일 그저 큰 소리로 대적하는 것으로 모든 것이 해결되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치명적인 미신이다! 우리가 양심적으로 생각해 보면 결국 자신의 속에 남아있는 악한 정욕과 죄에 대한 욕망이 시험과 유혹의 근본적인 원인임을 알 수 있지 않은가? 전적으로 악한 영들의 탓이 아니라 여전히 본능적으로 하나님을 미워하고 그분께 반역하려는 남아있는 옛 본성의 문제임을 알 수 있지 않은가? 우리가 참된 그리스도인일진대 남아있는 이 내부의 적, 타락한 자아와 우리 가운데 있는 죄성을 날카롭게 인식하고 슬퍼하며 반드시 대적해야 한다. 우리는 끊임없이 우리 내부의 "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고후10:5) 해야 한다. 그리고 이 내부의 대적에 대한 싸움은 참으로 길고 치열하며 가장 미묘하고 분별하기에도 어려우며 이 땅에서 우리의 평생에 걸친 장기전임을 기억해야 한다. "사랑하는 자들아 나그네와 행인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벧전2:11)

교훈 : 우리는 주께서 우리의 생각을 지켜 주시도록 기도하면서 육에 속한 생각이 자리 잡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나의 삶 속으로

| 묵상 |
무차별적인 정보의 홍수 속에서 그대는 어떻게 자신의 생각을 지키고 있습니까?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빌 2:5). 우리는 세상의 갖가지 정보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그것들은 우리가 원하든지 원치 않든지 우리의 눈과 귀를 통과합니다. 황사가 싫으면 마스크를 써야겠지만, 사상의 먼지 때문에 눈과 귀를 가리고 살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건강한 사상이 먼저 우리의 사고를 점유하도록 해야 합니다. 그래서 나쁜 정보의 씨가 우리 안에서 발아하여 뿌리를 내리고 줄기가 뻗어 나가지 못하도록 해야 합니다.

| 적용 |
그대 마음에 허용해서는 안 되는 육체적 사상은 무엇입니까?

영감의 교훈 기 도
바울의 능력의 근원 - “그(바울)의 능력은 자신 속에 있지 아니하고 그의 영혼에 충만한 거룩한 성령의 임재와 능력에 있었고 모든 생각을 그리스도의 뜻에 복종시킨 데 있었다. 선지자는 ‘주께서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에 평강으로 지키시리니 이는 그가 주를 의뢰함이니이다’(사 26:3)라고 하였다. 바울의 얼굴에 표현된 하늘에서 온 평화가 많은 영혼들을 복음으로 인도하였다”(사도행적, 510).

기도
아버지, 보이는 것과 들리는 것들이 우리로 하여금 죄를 짓도록 유혹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에 둘러싸여 있다 할지라도 흔들리지 않도록 제 마음을 하늘의 생각으로 채워 주시옵소서.

넷째날(수) 마음과 육체의 관계
9월 11일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의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살전 5:23).

교사강해 4)
55세 된 중년의 아주머니가 어느 날 외래로 진료를 신청하였다. 항상 가슴이 답답하고 숨쉬기가 곤란하다는 이유에서였다. 내과에서 심전도, 가슴 X-ray촬영, 기관지 내시경, 위내시경, 심지어 가슴 MRI까지 시행하였으나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고 한다. 아주머니의 남편은 유명대학의 교수로 덕망 있는 분이셨고 자녀들은 모두 명문대학에 다니며 큰 말썽 없이 부모님 말에 순종하며 지내는 외관상 아무런 문제도 없이 보이는 가정의 주부였다. 이 환자는 유명하다는 의사와 한의사는 모두 찾아보았고 좋다는 약도 모두 복용해 보았지만 효험을 볼 수 없었다. 여러 가지 검사를 시행하였지만 특별한 이상을 발견할 수 없다는 말만 들어오던 터에 결국 신경정신과로 의뢰된 것이었다. 이 환자를 자세히 면담해 본 결과 외견상 아무런 이상이 없어 보이는 환자의 마음속엔 오랜 세월을 참아온 갈등과 어려움이 해소되지 못한 채 남아 있었다. 환자의 남편은 연구에 바빠 아내와 대화를 나눌 시간이 없었고 환자는 늘 혼자서 집을 지켜야 했다. 또한 효부상을 받을 정도로 늙으신 시부모님을 지성으로 모셔서 2년전 노부모들이 돌아가실 때까지 직접 모시며 수발을 해왔던 것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환자는 자녀들이 훌륭하게 성장하는 것을 낙으로 삼고 자식들 교육과 양육에 헌신하였으나 자녀들마저 훌쩍 커버리고 진학을 위해 집을 떠나고 어머니의 보살핌을 예전처럼 필요로 하지 않게 된 것이다. 자녀들이 모두 대학에 합격하여 자신을 이전처럼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실망한 환자는 우울한 감정에 빠지게 된 것이었다. 자신은 모든 것을 희생하며 시부모, 남편과 자식들을 위해 헌신하였는데 이제 자신에게 남은 것은 외로움뿐이라는 생각이 들면서 자신의 풀리지 않는 갈등과 문제들을 신체적인 증상으로(즉 정신적인 문제가 신체적인 문제로 변환되어) 표출하면서 가슴이 답답하고 숨을 쉬기가 곤란한 증상을 얻게 된 것이었다. 이러한 증례는 신경정신의학을 전공하는 의사들에게는 흔히 접하는 예로 이러한 병은 진단분류상 정신신체의학의 분야에 속하는 것이다. 이러한 환자는 신경정신과 전문의만이 적절히 치료할 수 있으며 그 이외에 어떤 검사나 내·외과적인 치료 방법에도 반응하지 않는다. 또한 치료도 육체와 정신의 모든 약점들을 잘 파악한 후에야 가능하다. 그러므로 이러한 병을 치료하는 신경정신과 의사는 환자의 마음과 육체에 대한 관심을 모두 가지고 있어야 하며 환자의 마음속에 숨어 있는 갈등이나 문제들을 잘 파악하지 못하고 표면적인 증상만을 치료하고자 할 때 문제 해결을 못하는 돌팔이가 되고 마는 것이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일종의 이원론을 가르쳤다. 그들은 육체와 정신 사이에 큰 차이가 있다고 믿었다. 반면 성경은 인간이 육체적, 정신적, 정서적, 영적 측면이 있는 전인적 존재라고 가르친다. 그래서 한쪽 측면이 다른 모든 부분에 영향을 미친다. 사도들은 육체적, 정신적, 정서적, 영적인 건강이 상호 연결되어 있으며 따로 분리할 수 없다고 가르쳤다.
살전 5:23은 이 사상을 어떻게 설명하는가?
신약 시대의 신자들에게 신체적, 정신적, 정서적 온전함이란 영적 온전함과 뗄 수 없는 관계였다. 사도 바울은 신자들에게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 6:20)고 호소하였다. 그는 하나님이 대가를 지불하고 인류를 사셨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것이 아니라고 믿었다(고전 6:19). 더욱 건강한 생활 방식을 채택함으로써 우리 몸을 돌보는 것은 단지 수명을 몇 년 늘리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다. 즉 바른 동기로 우리 몸을 돌보는 것은 그 자체가 하나의 예배 행위이다.
롬 12:2~3, 요 10:10, 고전 10:31은 우리의 신체와 영적 건강 사이의 밀접한 관련성을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가?
성령께서 우리에게 성장의 필요성을 깨우쳐 주실 때에 그분은 우리의 삶의 한 부분에만 자신을 제한시키지 않으신다. 개혁은 단면적이지 않다. 성령께서는 모든 영역에 있어서 우리의 삶이 그리스도의 뜻에 완전히 순응하도록 돕기를 바라신다. 만약 우리에게 하나님의 뜻과 일치하지 않는 육체적인 생활 습관이 있다면, 하나님은 그분의 영광을 위해 우리가 그것들을 내려놓도록 권유하신다.

부가적용)
정신신체의학은 1930년대에 의학의 생물학적인 면만을 강조하는 경향에 대한 반응으로서 대두되어 정신의학과 의학의 타 분야와의 교량역할을 해왔다. 역사적인 고찰을 해보면 인간이 정신과 육체에 관한 생각을 한 것은 고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고대 사람들은 질병은 영적인 힘에 의해서 일어나므로 영적 수단으로 대항해야 한다고 생각했으며 그리스 시대에 이르러서 히포크라테스(Hippocrates)는 신체질환의 치료에 있어서의 ‘신체적인 것’에 대한 지식을 강조한 바 있다. 소크라테스(Socrates)는 “머리 없는 눈, 몸 없는 머리를 치료할 수 없는 것처럼 영혼이 없는 몸을 치료할 수 없다”고 했다. 이런 움직임은 정신과 신체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는 것을 깨닫고 있다는 증거로 받아들여진다. 정신신체의학의 기본태도는 “어떤 개체의 건강상태나 질병상태는 그에 관한 심리학적 원인과 생리학적 원인 사이의 상관관계 및 그 작용기전을 파악하고 환자의 태도, 감정상태 및 행동을 조절하여 질병을 예방 및 치료할 수 있을 것이다.”라는 것이다. 인간이란 참으로 오묘하다. 이처럼 마음의 병이 육체의 병을 유발하고 육체의 병이 마음의 병을 만드는 경우를 생각해 보면 우리의 정신과 육체를 어떻게 건강하게 유지해야 하는지 걱정이 앞서게 된다. 우리의 마음과 육체는 다르면서도 같은 것이며 서로 공생 관계에 놓여 있으니 오늘 내 마음을 들여다보고 그 곳에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깊이 살펴보고 살아야 한다.

교훈 : 인간은 육체와 정신과 감정과 영적 측면이 있는 전인적 존재이기 때문에 우리는 성령이 거하시는 성전으로써 우리 몸을 건강하게 보존할 책임이 있다.

나의 삶 속으로

| 묵상 |
그대는 육체를 얼마나 소중하게 취급하고 있습니까?
(왼쪽 페이지에 이어서) 사탄은 우리의 육체를 통해 정신을 지배하려고 한다. 반면 예수님은 우리의 정신을 통해 육체를 지배하기를 바라신다. 우리의 몸은 유령의 집이 아니라 성전이다. 하늘의 원칙들을 따를 때에 우리는 더욱 기쁨에 충만하고, 생산적이며, 풍요롭고 건강한 삶을 살 수 있다.

| 적용 |
영적 중요성을 생각하여 그대는 어떻게 육체를 관리하기로 결심하겠습니까?

영감의 교훈
가장 중요한 학과 - “인간의 정신과 육체 사이에는 밀접한 관계가 있으므로 도덕적으로나 지적으로 높은 수준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신체를 지배하는 법칙들에 주의하여야 한다. 강하고 잘 조화된 품성을 얻기 위하여 지적·육체적 능력을 행사하고 발전시켜야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맡기신 이 경이로운 신체 조직을 다루고 이를 건강하게 보존할 수 있게 하는 법칙을 연구하는 것보다 청년들에게 더 중요한 학과가 무엇이겠는가”(부조와 선지자, 600).

기도
아버지, 몸을 함부로 사용했던 어리석은 과거를 후회하고 회개합니다. 제가 이 몸을 어떻게 간수해야 할지 알려 주시옵소서. 제게 지혜를 주시옵소서. 그래서 온 영과 혼과 몸이 예수님 재림하실 때까지 온전하게 보전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다섯째날(목) 감화력의 이미지
9월 12일

교사강해 5)
인디언의 우화 가운데 이런 이야기가 있다. 해가 어둠이 무엇인지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별이 해를 데리고 아주 컴컴한 굴로 갔다. 그러나 그 굴에 해가 들어서자마자 어둠은 완전히 사라졌기 때문에 역시 해에게 흑암을 보여줄 수 없었다는 것이다. 해가 있는 곳에 어둠은 전혀 없다. 해가 가는 곳이면 어디서나 어둠은 물러가고 빛으로 충만하게 된다. 해 자체에는 어둠이 전혀 없다. 다만 그 햇빛이 가려지는 곳에 어둠이 깃들일 뿐이다. 해가 지면 날이 어두워지고 밤이 오지만, 밤은 영원한 것이 아니고 일시적인 것이다. 곧 또다시 아침이 오면 어둠은 물러가고 환한 낮이 되는 것이다. 겨울에는 낮보다 밤이 더 길지만 그렇다고 어둠이 본질적인 것이고 빛이 부차적인 것이라고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아무리 밤이 길어도 그것은 곧 낮에 의해서 물러가고 마는 것이다. 우리가 아는 대로 깜깜한 밤에도 해가 없는 것은 아니다. 해는 반대편에서 계속 빛을 발하고 있는 것이다. 밤에 뜨는 달을 보면서 우리는 밤에도 해가 빛나고 있음을 아는 것이다. 이런 자연의 원리는 곧바로 영적인 원리이기도 하다. 요한일서 1장 5절에 보면, "우리가 그리스도에게서 들어서 여러분에게 전하는 소식은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요, 하나님 안에는 어둠이 조금도 없다는 것입니다"라는 말씀이 있다. 하나님은 모든 빛의 근원이 되시는 분이요, 빛 그 자체이시기 때문에 그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다는 것은 곧 이해가 된다. 따라서 그가 계신 곳에는 언제나 빛이 있게 마련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어디에나 계신 분이니까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세계에 빛이 충만하여 있는 것이다. 다만 잠시 그 빛을 가리는 것들이 있어서 거기에 어둠이 깃들이지만, 그 어둠은 영원한 것이 아니다. 가리는 것들이 치워지는 순간 곧 어둠은 물러가고 빛으로 충만하게 되는 것이다. 때로는 어둠이 빛보다 우세하게 보일 때가 있다. 그러나 그때도 빛은 언제나 빛나고 있는 것이며, 결코 어둠은 영원할 수가 없다. 빛은 영원하지만 어둠은 일시적인 것이다. 하나님의 빛의 역사는 영원하지만 그것을 가리는 악의 어둠의 훼방은 일시적이며, 결국은 물러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참 빛 되신 예수 그리스도가 이 어두운 세상에 들어오시므로 세상의 어둠은 물러가고 빛으로 충만하게 된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이다. 어둠이 지배하는 세상에 빛을 비추시므로 그 어둠을 몰아내고 빛의 나라를 만드신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참 빛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를 때 어둠 속에 다니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게 되는 것이다

예수님은 자신과 교회를 묘사하기 위해 여러 이미지를 사용하셨다. 그 가운데 하나가 ‘빛’이다. 그분은 “세상의 빛”이시다(요 8:12). 그분은 또한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참빛”이시다(요 1:9). 그분은 우리에게 “빛이 있을 동안에” 다니고 “빛을 믿으라”고 격려하였다(요 12:35~36).
마 5:13~15과 빌 2:14~16을 비교해 보라. 이 세상에서 그분의 백성에게 바라시는 주님의 목표는 무엇인가? 그것은 실질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가? 어떻게 하면 우리가 부르심에 합당한 사람이 될 수 있을까?
모든 부흥과 개혁의 목표는 우리의 삶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사랑, 은혜 그리고 진리의 빛을 비추는 것이다. 예수님은 그분의 삶의 방식이 우월하다는 사실을 증명하시기 위하여 세상의 삶과 구별된 방식으로 살도록 우리를 부르셨다. 그분은 우리가 이기적이고 탐욕적이며 자기중심적인 세상에서 자비롭고, 서로를 돌보고, 관심을 기울이며 살도록 요구하신다. 그분은 쾌락에 도취한 사회에서도 우리가 유희의 높은 표준을 유지하도록 요구하신다(골 3:1~2). 수많은 사람이 자신을 해하는 퇴행적인 질병으로 젊은 나이에 죽어 가는 시대에 그분은 건강한 삶으로 우리를 부르신다(요 10:10). 과도하고, 성에 탐닉하며, 설렘이 사라진 세대 속에서 예수님은 뭔가 특별한 삶으로 우리를 부르신다. 그분은 우리를 단정함과 적당함과 도덕적 순수함으로 부르신다(벧전 3:3~4).
이사야는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칠백 년 전에 이스라엘 여론을 향하여 개혁을 호소하였다. 그의 말은 재림을 기다리는 교회와도 관련이 있다.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사 55:8~9). 교회와 우리 개인을 위한 그분의 이상은 우리가 상상한 것보다 높다. 하늘은 하나님의 백성이 그분의 품성을 드러내기를 바란다.

부가적용)
예수님은 왜 이 세상에 오셔야만 했을까? 그가 오시지 않아도 이미 빛으로 창조된 세계인데, 어째서 다시 참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야만 했을까? 그것은 마귀가 이 세상을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빛을 막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세상은 어둠으로 덮이게 되었다. 그 이후 세상은 하나님의 빛이 없는 캄캄한 밤과 같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요한복음에는 '세상'이란 단어가 78회 나오는데, 대체로 모두 부정적인 뜻으로 사용하고 있다. 즉 '세상'은 사단이 지배하는 곳이며, 따라서 어둠으로 덮여 멸망할 수밖에 없으며, 그 세상은 참 빛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미워하며, 그를 영접하지 않는 것이다. 빛이 없는 세상은 온갖 범죄와 죽음이 지배하는 곳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본래 빛으로 창조된 세상이기 때문에 빛을 받지 않으면 그 세상이 병들고 시들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것은 햇빛을 전혀 보지 못한 식물이 자라지 못하고 죽는 것과 똑같은 원리이다. 사람들도 햇빛을 오래 보지 못하면 우울증에 걸리게 된다. 겨울이 긴 캐나다 같은 곳에 사는 사람들은 우울증에 많이 걸리게 되는 것이 바로 해가 짧기 때문이다. 서양 사람들이 자주 햇볕에 벌거벗고 누워 햇볕을 쪼이는 것은 건강을 위해서이다. 특히 북유럽의 경우 흐린 날이 많고 해가 짧기 때문에 개인 날에는 많은 사람들이 썬팅을 하는 것이다. 육체적 건강만 아니라 영적으로도 우리가 하나님의 빛을 받지 못하면 병들게 되는 것이고 그것이 오래 갈 때 많은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다. 사랑 대신 미움으로 살게 되며, 감사와 기쁨 대신 짜증과 불평으로 가득 차게 되며, 화해와 관용과 용서 대신에 분쟁과 갈등으로 조용할 날이 없으며, 정의와 평화는 사라지고 불의와 부정부패가 판을 치며, 불평등과 착취와 억압이 일상화되는 것이다. 이 모두가 하나님의 빛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다. 어둠 속에서는 빛의 열매인 선(善)과 의(義)와 진실(眞實)은 없고 악과 불의와 거짓만이 독버섯처럼 돋아나는 것이다. 우리가 늘 감사함과 기쁨과 사랑 대신 짜증과 불평과 원망으로 살아갈 때는 하나님의 빛이 필요한 때이다. 서구 사람들이 웃통을 벗고 햇볕을 쪼이는 것처럼, 우리 자신의 위선과 체면의 꺼풀들을 벗어 던지고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하면 그의 빛이 우리 가운데 들어오면서 우리 속에 자리 잡았던 모든 어둠의 요소들을 몰아내실 것이다. 세상의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세상의 어둠과 대결하시어 그 어둠의 세력들을 꺾어 놓으셨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그 안에 우리가 거하게 되면, 우리 속에서 모든 어둠은 물러가고 빛으로 말미암아 생명의 역사가 시작되는 것이다.

교훈 : 예수님은 세상의 빛으로 이 땅에 오셨다. 그리고 우리는 그분의 빛을 세상에 반사하면서 하늘의 표준과 생활 방식대로 살도록 부르심을 받았다.

나의 삶 속으로

| 묵상 |
그대는 그리스도의 마음과 하늘의 삶을 반사하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까?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 5:14, 16). 하나님은 우리를 더 좋은 삶으로 인도하십니다. 그분이 제시하는 삶의 표준은 우리의 생각보다 훨씬 높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을 통해 사람들이 하늘의 차원 높은 삶을 맛보기 바라십니다. 우리는 빛에 따라 사는 생활을 통해 그 특권과 행복을 전할 책임이 있습니다.

| 적용 |
그대는 생활의 표준을 어떻게 높이겠습니까?

영감의 교훈
세상의 빛 -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은 사람들 사이에 있는 단순한 빛 이상이 되어야 한다. 그들은 세상의 빛이다. 예수께서는 당신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너희는 자신을 나에게 바쳤고 나는 너희를 나의 대표자로 세상에 보냈다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당신을 세상에 보내신 것같이 ‘나도 그들을 세상에 보내었’(요한복음 17장 18절)다고 말씀하신다. 그리스도께서 아버지를 나타내는 통로이신 것처럼, 우리도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통로가 되어야 한다”(산상보훈, 40).

기도
아버지, 지금의 제 삶으로는 누구에게도 빛을 전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성령님의 인도를 따라 예수님의 모습을 하나씩 하나씩 본받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조금씩 하늘의 빛을 전하는 통로가 되게 해 주시옵소서.

여섯째날(금) 더 깊은 연구를 위해
9월 13일

“많은 사람이 주님의 편에 있다고 공언하지만 사실에 있어서 그렇지 않고, 그들의 모든 행동의 비중을 사탄의 편에 둔다. 우리가 어느 편에 있는가를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누가 마음을 소유하고 있는가? 우리의 생각이 누구에게 가 있는가? 누구에 대하여 우리가 이야기하기를 좋아하는가? …만일 우리가 주님 편에 있다면, 우리의 생각은 그분에게 가 있게 될 것이며 그분에 대한 생각이 가장 달콤한 생각이 될 것이다. 우리는 세상과 우정을 맺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의 모든 소유와 우리 자신을 그분께 이미 드렸다. 우리는 그분의 형상을 나타내며, 그분의 영을 호흡하고, 그분의 뜻을 행하며, 모든 일에 있어서 그분을 기쁘게 해 드리고자 소원한다”(교회증언 2권, 262).
“모든 사람은 그들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귀한 은혜와 그분의 측량할 수 없는 부요함이 세상에 나누어질 수 있는 산 통로가 될 특권을 가졌다. 그리스도께서는 무엇보다도 이 세상에서 그분의 영과 품성을 대표할 자들을 가장 크게 원하신다. 사람을 통하여 구주의 사랑이 세상에 나타나는 것보다 더 절실한 요구는 없다. 온 하늘은 사람의 마음에 즐거움과 축복이 될 거룩한 기름을 부어 줄 수 있는 통로의 역할을 할 사람이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다”(실물교훈, 419).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➊ 하나님의 백성들의 높은 부르심을 묘사하기 위해 바울은 어떤 용어들을 사용했습니까?(고후 5:18~20, 6:17~18) 이런 이미지들은 실질적으로 어떤 의미입니까? 어떻게 하면 우리의 삶이 여기서 말하는 것을 나타낼 수 있을까요?

➋ 우리가 정직하다면 성경에서 읽은 약속들을 주장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유혹의 순간 우리가 바람직한 것에 마음을 고정하기로 의식적인 결정을 내리지 않는다면, 우리는 유혹에 굴복하게 될 것입니다. 유혹이 올 때, 그대의 생각을 통제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원칙 또는 행동은 무엇입니까?

➌ “생각은 어쩔 수 없지만 행동과 생활에 흠이 없으면 되는 것 아니냐?”고 주장하는 사람에게 그대는 어떻게 말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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