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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과 부흥 : 우리의 가장 절실한 필요(질문의 대답과 부가설명)07/06/13

페이지 정보

작성자 김명호 작성일13-06-27 20:28 조회5,953회 댓글2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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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6일 안식일
일몰:오후 7시 57분

연구 범위
계 3:14~21, 히 12:7~11, 마 25:1~13, 슥 3:1~5, 아 5:2~5.

기억절 :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
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계 3:20).

라오디게아 교회는 계시록에 나오는 일곱 교회 중에 마지막 교회이다. ‘심판받은 백성’이라는 뜻을 가진 라오디게아는 마지막 때를 사는 하나님의 백성에게 알맞은 이름이다.
라오디게아는 터키 남서부의 한 계곡에 위치해 있다. 그 도시는 중요한 경제 수도이자 의류 산업과 교육 그리고 의료의 중심지였다. 그리고 그 시민들은 독립적이고, 자부심이 강했으며, 부유하였다.
하지만 그 도시에 필수적인 천연자원 하나가 부족하였으니 그것은 물이었다. 그래서 로마식 송수로를 통해 남쪽으로 8킬로미터 떨어진 수원에서 물을 공급받았다. 그런데 그 물이 라오디게아에 도착할 즈음에는 수온이 미지근해졌다. 예수께서는 이 상징을 사용하여 미지근한 남은 교회의 상태, 곧 자만과 안주, 냉담과 영적 무관심을 설명하셨다. 그 교회는 열정을 상실하였다. 그래서 영적 부흥이 필요하였다.
그럼에도 라오디게아 교회에 보내는 기별은 희망이 넘친다. 그리스도는 그분의 백성에게 사랑으로 말씀하시며 그들의 내적 필요를 채우고 깊은 영적 갈망을 소생시키라고 권하신다.

※ 학습 목표
➊ 깨닫기 : 1세기 라오디게아 교회의 역사적 배경과 영적 상태를 이해한다.
➋ 느끼기 : 자만, 안일, 독립보다 예수께 온전히 의지하고 굴복하는 태도를 경험한다.
➌ 행하기 : 주님을 더 깊이 알고 사랑하려는 마음을 가로막는 모든 장애를 성령을 통해 제거해 주시도록 주님께 자신을 맡긴다.

A.
❷ 예수님은 왜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차지도 덥지도 않다고 책망하셨다고 생각합니까?
※ 그들이 자기들이 신앙 상태에 대하여 오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❸ 영적으로 그들에게 필요했던 것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 성령의 역사를 받아들이고 회개하고 열심을 내는 것이다.
❹ 예수님이 바라시는 영적 친밀감은 우리의 생활에서 어떻게 실현되어야 합니까?
※ 예수 이름으로 성도들과 이웃들과 사랑의 친교를 통하여 실현되어야 한다.

B.
❷ 우리는 라오디게아 교회의 착각을 어떻게 바라봐야 합니까?
※ 우리 자신의 모습을 바르게 깨닫는 마음의 반면교훈으로 봐야 한다.
❸ 예수께서 제시하신 치유책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라고 생각합니까?
※ 우리가 그 치유책을 받아들이고 치유되어야 한다.
❹ 우리 교회가 영적으로 부흥하려면 해결되어야 할 문제는 무엇일까요?
※ 성경 진리를 올바르게 깨닫고 겸손하게 성령께서 주신 진리의 말씀에 굴복해야한다.

결론 : 우리가 예수님을 더 깊이 알고, 그분의 사랑으로 우리의 마음을 채우도록 설득하는 성령께 반응할 때에 주님은 이런 관계를 가로막는 모든 장애물을 제거하시고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방식으로 그분과 더 친밀한 관계를 맺도록 이끄십니다.


첫째날(일) 라오디게아인들에게 주는 소망
6월 30일

“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계 3:14~15).

계시록 2~3장에서 예수님은 일곱 교회에 편지를 보내면서 그들의 영적 상태에 맞는 칭호를 가지고 자신을 소개하신다. 그 가운데 라오디게아 교회에 보내는 기별에서 사용하신 칭호는 그분의 호소에 주의하는 자들을 위한 영적 갱신을 보장하는 음성으로 가득하다.

1. 다음의 말씀을 읽어 보라(계 3:14~15, 고후 1:20, 요 3:10~11, 골 1:13~17). 예수께서는 왜 라오디게아 교회에 자신을 “아멘”이요, “충성된 증인”이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로 소개했다고 생각하는가?
[계3:14,15] 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가 가라사대 15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고후1:20]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
[요3:10,11]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이러한 일을 알지 못하느냐 11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우리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거하노라 그러나 너희가 우리 증거를 받지 아니하는도다.
[골1:13~17]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14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구속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 15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16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17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답: 예수님은 창조주이시고 증인이시고 진리(아멘)이신 분이시기 때문에 라오디게아 교회 시대의 교인들을 창조적 능력으로 진리를 따라 참된 증인의 삶을 살도록 하실 능력이 있으신 분으로 자신을 나타내신 것이다.

계 3:14에 “근본”이라고 번역된 그리스어는 ‘아르케’이다. 그것이 사람을 지칭할 때는 어떤 사건이나 행위를 시작한 사람이란 의미에서 ‘시작’을 뜻할 수 있다. 이 문맥에서 ‘아르케’는 모든 창조의 첫째 원인 또는 창조를 시작한 분으로서의 예수님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그분은 창조주라는 뜻이다(요 1:1~3, 엡 3:8~9).
이는 대단히 중요한 문제이다. 예수님은 말씀으로 우주와 지구를 창조하셨고, 말씀으로 생명을 만드신 분이다. 동일한 예수님이 라오디게아 교회에 소망을 말씀하셨다. 전능하신 창조주께서는 능히 새로운 생명을 창조하실 수 있다. 그분은 우리 마음속에 새로운 영적 갈망을 일으키고 우리의 영적 생활을 변화시키실 수 있다.

2. 고후 5:17과 갈 6:14~15을 읽어 보라. 이 말씀은 그대에게 개인적으로 어떤 의미인가?
[고후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갈6:14,15]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15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은 자뿐이니라.

답: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을 때, 그는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 우리는 개인적으로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야 한다. 진정으로 거듭나면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이다.

<부가설명> 예수님은 창조주이시며, 진리이시다. 누구든지 예수를 개인의 구주로 믿으면 성령께서 그 사람을 거듭나게 하신다. 거듭나면 새로운 피조물이 된다. 새로 지음을 받지 않았으면 그는 썩어져가는 구습을 좇는 옛사람(엡4:22)이요, 썩어짐의 종노릇을(롬8:21) 하고 있는 생명이 없는 사람이다. 썩은 것은 썩지 않는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고전15:50) 라오디게아 교회는 생명이신 예수님을 밖에 세워놓은 교회이다. 생명이 없으면 죽은 것이다. 그러니까 대단한 착각으로 있다. 살아있다고 착각하고 있는 것은 예수 생명은 없어도 육체의 생명이(레17:11) 활동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거듭난 생명인지, 썩어져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사람의 생명인지 스스로 분별해보아야 한다. 만일 아직도 옛사람의 육체의 생명으로 생활한다면 진정한 회개를 통하여 거듭난 생명을 얻어야 한다. 예수께서는 그렇게 해 주시려고 문밖에 오래 기다리고 계신다. 얼마나 큰 자비인가!

교훈 : 라오디게아 교회에 소개된 예수님의 호칭은 그분이 그들에게 필요한 새로운 영적 갈망과 변화를 일으키실 수 있는 창조주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둘째날(월) 사랑의 책망
7월 1일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계 3:15~16).

계 3:15~16을 주석하면서 엘렌 화잇은 이렇게 말했다. “라오디게아 교회에 보내는 기별을 가장 결정적으로 적용시킬 수 있는 대상은 신앙 경험이 무미건조한 사람들, 곧 단호한 태도로 진리를 증언하지 않는 사람들이다”(화잇 주석, 계 3:14~18). 무미건조한 신앙 경험이란 생명이 없는, 즉 기독교 신앙의 껍데기는 있으나 알맹이는 없고, 외형을 갖췄으나 생명력은 부족한 신앙 경험을 말한다. 라오디게아 신자들은 이단자나 극단적 광신도들이 아니라 단지 영적으로 무관심한 자들이었다. 그들은 도덕적으로 선량한 사람으로 보였을 것이다. 바울의 말처럼 그들은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딤후 3:5)는 자들이었다. 예수님도 당시의 종교인들에 대하여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마 15:8)라고 말씀하셨다.

1. 히 12:7~11, 욥 5:17~19, 시 94:12, 잠 29:15, 17을 읽어 보라. 하나님이 백성들을 책망하셨던 목적은 무엇인가?
[히12:7~11]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비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8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 9 또 우리 육체의 아버지가 우리를 징계하여도 공경하였거늘 하물며 모든 영의 아버지께 더욱 복종하여 살려 하지 않겠느냐 10 저희는 잠시 자기의 뜻대로 우리를 징계하였거니와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여케 하시느니라 11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달한 자에게는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나니.
[욥5:17~19] 볼지어다 하나님께 징계받는 자에게는 복이 있나니 그런즉 너는 전능자의 경책을 업신여기지 말지니라 18 하나님은 아프게 하시다가 싸매시며 상하게 하시다가 그 손으로 고치시나니 19 여섯 가지 환난에서 너를 구원하시며 일곱 가지 환난이라도 그 재앙이 네게 미치지 않게 하시며.
[시94:12] 여호와여 주의 징벌을 당하며 주의 법으로 교훈하심을 받는 자가 복이 있나니.
[잠29:15,17] 채찍과 꾸지람이 지혜를 주거늘 임의로 하게 버려 두면 그 자식은 어미를 욕되게 하느니라/ 17 네 자식을 징계하라 그리하면 그가 너를 평안하게 하겠고 또 네 마음에 기쁨을 주리라.

답: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참여하게 하시고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사랑이다.

우리 하나님은 그분의 백성을 너무도 사랑하시기에 그들이 멸망하도록 내버려두지 못하신다. 그분은 그들의 심령 속에 영적 불꽃을 일으키기 위해 어떤 대가도 치르실 것이다. 그분이 강력하게 책망하시는 이유는 우리를 그만큼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이런 마음은 회개를 호소하는 호세아서에서도 공명된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호 6:1).

<부가설명> 하나님은 사랑이신데, 하나님의 사랑은 죽은 자를 영원한 생명으로 살려주시려는 열정으로 나타난다. 이 세상에 산다고 하는 사람들은 실상은 아담 안에서 죽은 사람들일 뿐이다. 그들에게는 생명이 없다. 그래서 썩어져가는 구습을 좇으면서 매일 썩어 가는데, 썩는 것이 끝날 때가 일반적으로 말하는 죽는 때이다. 그들이 육체의 생명을 잃으면 영원도 잃는다. 그러므로 육체의 생명, 곧 살아가는 것이 죽어가는 기간에 영원한 생명,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그 생명을 얻어야 한다. 이것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을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징계도 하시고 체벌도 하시고 꾸짖기도 하시고 위협도 하신다. 생명으로 옮긴 사람들은 그 생명을 잃지 않고 잘 유지하도록 하기 위하여 징계하시고 타이르시고 바른 길로 이끌기 위하여 온갖 노력을 아끼지 않으신다. 우리는 그 음성을 잘 듣고 정로로를 걸으라는 바로 그 정로로 걸어서 주신 그 생명이 손상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교훈 : 하나님은 라오디게아 교회의 무미건조한 신앙을 호되게 책망하셨다. 그 이유는 그만큼 자기 백성을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셋째날(화) 자각과 실재
7월 2일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계 3:17).

라오디게아 교회는 말과 행동에 차이가 있었다. 심지어 그들이 소유했다고 생각하는 영적 경험과 실제 영적 경험 사이에는 큰 간격이 있었다.

1. 계 3:17을 읽어 보라. 라오디게아 교회는 자신에 대하여 어떤 평가를 내렸는가? 반면 주께서는 그 교회에 대하여 어떤 평가를 내리셨는가? 어떻게 그들은 자신의 진정한 영적 상태에 대하여 그토록 어두웠는가?
[계3:17]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답: 성경구절에 있는 대로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주님은 곤고하고, 가련하고 가난하고 눈멀고 벌거벗었다고 평가했다. 눈이 멀었기 때문에 그런 평가를 내렸다.

사탄의 가장 위협적인 기만은 우리가 실제 영적 필요를 보지 못하도록 눈을 가리는 것이다. 예수님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도 자신의 영적 가난함에 대하여 눈이 어두웠다. 모두 성경을 읽으며, 안식일을 준수하고, 십일조를 드리며 메시아의 강림을 기다리는 신자들이었는데도 말이다. 많은 이가 눈이 어두워서 주께서 소개하려 했던 영적 왕국이 어떤 모습인지 알지 못했다. 예수님은 그들을 일컬어 “맹인 된 인도자”(마 23:24)라고 불렀다. 바울도 고린도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세상 신으로 말미암아 마음이 혼미하게 된 자들에 대하여 기록했다(고후 4:4). 그래서 예수님은 눈먼 자들의 시력을 회복시켜 주기 위해 자신이 온 것이라고 말씀하셨다(눅 4:18). 우리가 우리 자신을 그분께 맡기면 그분은 우리의 잃은 영적 시력을 회복시켜 주실 것이다. 신약 성경에서 맹인들이 눈을 뜰 수 있게 해 주셨을 때마다 예수님은 우리가 그분을 확실히 알아볼 수 있도록 마음의 눈을 여시고자 하는 그분의 소망을 나타내셨던 것이다.

2. 마 25:1~13을 읽어 보라. 어리석은 처녀와 라오디게아 신자들 사이에 비슷한 점은 무엇인가?
[마25:1~13] 그 때에 천국은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다 하리니 2 그 중에 다섯은 미련하고 다섯은 슬기 있는지라 3 미련한 자들은 등을 가지되 기름을 가지지 아니하고 4 슬기 있는 자들은 그릇에 기름을 담아 등과 함께 가져갔더니 5 신랑이 더디 오므로 다 졸며 잘새 6 밤중에 소리가 나되 보라 신랑이로다 맞으러 나오라 하매 7 이에 그 처녀들이 다 일어나 등을 준비할새 8 미련한 자들이 슬기 있는 자들에게 이르되 우리 등불이 꺼져가니 너희 기름을 좀 나눠 달라 하거늘 9 슬기 있는 자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우리와 너희의 쓰기에 다 부족할까 하노니 차라리 파는 자들에게 가서 너희 쓸 것을 사라 하니 10 저희가 사러 간 동안에 신랑이 오므로 예비하였던 자들은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힌지라 11 그 후에 남은 처녀들이 와서 가로되 주여 주여 우리에게 열어 주소서 12 대답하여 가로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 하였느니라 13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시를 알지 못하느니라.

답: 어리석은 처녀들은 등을 준비하고 있었기 때문에 충분하다고 생각하였던 것 같다. 그러나 그들은 여분의 기름을 준비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충분하다고 생각했으니까. 라오디게아 교회도 부족한 것이 없다고 생각하였다. 같은 정신이다.

<부가설명> “준비의 실패는 실패의 준비다.”라는 말은 기억할만한 말이다. 예수님을 맞을 준비는 항상 해야 하는데, 미련한 처녀는 등만 들고 등에 있는 기름만으로 준비가 된 줄 알았다. 그러나 슬기 있는 처녀들은 등에 기름을 채웠을 뿐만 아니라 그릇에 기름을 담아서 함께 가지고 있었다. 이 그릇에 담긴 기름이 밤 중 늦게 오는 신랑을 맞을 준비이다. 그릇은 무엇이고, 거기 담긴 기름을 무엇인가? 나는 2009년 서부 야영회 교재에서 이 문제를 자세히 설명했다. 예언의 선물이다.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증거가 견고하게 되어야 한다.(고전1:5~7) 그리스도의 증거가 견고하게 되지 않으면 모든 은사에 부족함이 없는 상태에 있는 것이 아니다. 모든 은사에 부족함이 없기 위하여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가 견고히 되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는 대언의 영이다.(계19:10) 대언의 영의 인도를 받을 때 부족함이 없는 은사로 성령의 충만함을 경험하게 될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그릇에 담아 주신 기름의 증거를 등불이 꺼지지 않도록 잘 활용해야 할 것이다.

교훈 : 라오디게아 교회는 자신에 대하여 매우 긍정적으로 평가했지만 예수님은 그들이 영적으로 눈멀었다고 진단하셨다.

넷째날(수) 신령한 치료제
7월 3일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계 3:18~19).

영적 냉소주의와 무관심으로 병든 모든 자에게도 희망이 있다. 마찬가지로 라오디게아 교회에도 희망이 있다. 우리 주님은 신령한 치료제가 있다. 주께서 이 교회에 말씀을 주셨다는 사실 자체가 백성들이 그분의 권면을 수용하고 따른다면 그 교회에 희망이 있음을 보여 준다.

1. 계 3:18~19에 있는 예수님의 권면을 묵상하라. 불로 연단한 금을 사고, 흰옷을 입고, 안약을 사서 바르라는 말씀이 무슨 뜻이라고 생각하는가?(벧전 1:7, 슥 3:1~5, 계 19:7~9, 엡 4:30 참고)
[벧전1:7]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
[슥3:1~5] 대제사장 여호수아는 여호와의 사자 앞에 섰고 사단은 그의 우편에 서서 그를 대적하는 것을 여호와께서 내게 보이시니라 2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사단아 여호와가 너를 책망하노라 예루살렘을 택한 여호와가 너를 책망하노라 이는 불에서 꺼낸 그슬린 나무가 아니냐 하실 때에 3 여호수아가 더러운 옷을 입고 천사 앞에 섰는지라 4 여호와께서 자기 앞에 선 자들에게 명하사 그 더러운 옷을 벗기라 하시고 또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 죄과를 제하여 버렸으니 네게 아름다운 옷을 입히리라 하시기로 5 내가 말하되 정한 관을 그 머리에 씌우소서 하매 곧 정한 관을 그 머리에 씌우며 옷을 입히고 여호와의 사자는 곁에 섰더라.
[계19:7~9]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여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 아내가 예비하였으니 8 그에게 허락하사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게 하셨은즉 이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 9 천사가 내게 말하기를 기록하라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입은 자들이 복이 있도다 하고 또 내게 말하되 이것은 하나님의 참되신 말씀이라 하기로.
[엡4:30]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속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

답: 인용한 성경구절들에 대답이 있다. 금=믿음, 흰옷=의, 안약=성령의 은사를 가르친다고 말씀한다.

“예수님은 집집마다 다니며, 모든 영혼의 성전 앞에 서서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하며 말씀하신다. 하늘의 상인으로서 그는 보화를 풀어 놓으시고 호소하시기를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라’고 하신다. 그분이 내미는 금은 불순물이 없는 금으로서 오빌의 정금보다 더욱 귀한 것이다. 이는 그것이 믿음과 사랑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영혼에 입으라고 호소하시는 흰옷은 그리스도 자신의 의의 두루마기이다. 바르는 기름은(안약) 그의 은혜의 기름으로서 눈이 멀어 어둡게 된 영혼에 영적 시력을 줄 것이며, 이로 말미암아 그는 하나님의 영께서 하시는 일과 원수의 영이 하는 일을 구별할 수 있게 된다. 크신 상인이시요, 영적 보화를 가지신 그분은 ‘그대의 문을 열라’고 말씀하신다. ‘나와 거래하자. 내 물건을 사라고 권면하는 자는 나 곧 너의 구속자니라.’고 하신다”(화잇 주석, 계 3:18~20).

<부가설명> 모든 문제는 살아 있는 사람인가, 죽은 사람인가 하는데 달렸다고 생각한다. 바울은 일락을 사랑하는 사람은 살았으나 죽은 자라고 했다.(딤전5:6) 또 모든 사람이 아담 안에서 죽었다고 했다.(고잔15:22) 그러므로 세상 사람의 눈으로 보아서 살아 활동한다고 하나님의 눈에 살아 있는 사람으로 보이는 것은 아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이라야 하나님께 살아 있는 사람이다. 이렇게 살아 있으면 생명력이 능력으로 활동하게 된다. 보게 되고, 믿음으로 살게 될 것이며 흰옷을 입을 것이다. 흰옷은 어린양의 피에 씻을 때 이루어지는 것이다.(계7:14)

교훈 : 영적 무관심과 냉소주의에 대하여 예수님은 참된 믿음과 사랑 그리고 영적 분별력이라는 치료제를 우리에게 제공해 주신다.

다섯째날(목) 끝없는 사랑
7월 4일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계 3:20).

1. 계 3:20과 아 5:2~5을 비교해 보라. 두 곳의 말씀에는 어떤 비슷한 점이 있는가? 이 말씀들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하여 어떤 사실을 계시하는가?
[계3:20]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아5:2~5] 내가 잘지라도 마음은 깨었는데 나의 사랑하는 자의 소리가 들리는구나 문을 두드려 이르기를 나의 누이, 나의 사랑, 나의 비둘기, 나의 완전한 자야 문 열어다고 내 머리에는 이슬이, 내 머리털에는 밤 이슬이 가득하였다 하는구나 3 내가 옷을 벗었으니 어찌 다시 입겠으며 내가 발을 씻었으니 어찌 다시 더럽히랴마는 4 나의 사랑하는 자가 문틈으로 손을 들이밀매 내 마음이 동하여서 5 일어나서 나의 사랑하는 자 위하여 문을 열 때 몰약이 내 손에서, 몰약의 즙이 내 손가락에서 문빗장에 듣는구나.

답: 문 밖에서 문 열기를 기다리는 것이 비슷하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가운데 들어오셔서 우리와 함께 식탁 친교를 나누기를 간절히 원하신다. 함께 먹는 것은 즐거운 사랑의 친교이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중동에서 저녁 식사는 매우 중요하였다. 남자들이 일을 마치고 들에서 돌아오면 온 가족이 저녁 식사를 위해 식탁에 모였다. 사람들은 대부분 대가족을 이루어 함께 살았다. 그래서 저녁 식사에 참여하는 인원은 상당히 많았다. 할아버지, 할머니, 형제자매, 고모와 삼촌, 사촌과 조카들을 포함하여 어른, 아이가 한자리에 모였을 것이다. 고된 하루를 마치고 온 가족이 모여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경험을 나누고, 조언을 받았다. 저녁 식사 시간은 교제의 시간이자, 가족의 온기와 친밀함을 경험하는 시간이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은 우리와 이런 친교를 나누기 원하신다.

2. 계 3:21에 나오는 그리스도의 약속은 우리 각자를 위한 그분의 진실한 소망을 어떻게 그리고 있는가?
[계3:21]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답: 예수께서 승리하시고 아버지의 보좌에 함께 앉으신 것처럼 우리와 함께 그 보좌에 앉기를 원하신다.

요한계시록은 하나님의 보좌에 대하여 40번 이상 언급한다. 다른 어느 책보다 보좌에 대한 언급이 많다. 보좌 앞에서 우리는 천사들과 함께 기뻐 외친다. “죽임을 당하신 어린양은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 하더라”(계 5:12). 그분은 지겨운 죄의 역사가 끝나면 우리가 장엄한 찬양의 축제에 참여하게 되리라고 약속하신다.
그리스도는 영적으로 냉담한 남은 백성을 위해 가장 큰 동기를 사용하신다. 우리를 영적 졸음에서 깨워야 하는 가장 큰 동기는 예수님의 끝없는 사랑이다. 왜냐하면 그분은 우리와 영원토록 함께 살기를 바라시기 때문이다.
그분의 사랑 말고 우리를 영적 냉담함에서 깨우기에 충분한 것이 무엇이며, 우리로 하여금 무릎 꿇고 부흥을 간구하게 할 것이 무엇이겠는가? 우리의 혈관에는 왕족의 피가 흐르고 있다. 우리는 우주의 왕의 아들과 딸들이다. 우리는 그분의 보좌에 앉아 영원토록 그분과 함께 세상을 다스릴 것이다.

<부가설명> 식탁 친교는 특별한 의미가 있다. 손님들의 식성을 생각하여 음식을 준비하겠지만, 그러나 식탁을 차리는 사람의 원칙을 벗어나지 않도록 음식을 준비할 것이다. 여기 식탁은 예수님이 차리는 식탁이다. 예수께서 음식이라고 말씀하신 그런 음식을 차릴 것이다. 예수님과 식성이 같지 않으면 예수님과 한 식탁에 앉을 수 없을 것이다. 식탁에 함께 앉을 뿐만 아니라 보좌에도 함께 앉게 하신다. 얼마나 큰 사랑의 상급인가? 모르드게는 왕복을 입고 왕의 말을 타고 총리가 마부가 되어 수산 도성을 돌았다. 얼마나 큰 여예인가.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과 한 보좌에 앉는 특권을 누릴 것이라고 약속하셨다. 일체되는 친교를 뜻하는 것이다. 얼마나 큰 사랑인가. 우리는 정말 생명의 말씀을 예수님과 함께 잘 먹고 또 예수님 지시하신 대로 음식을 먹고 마시며 마음껏 사랑으로 친교를 나누다가 마침내 하나님의 보좌에 함께 앉는 최고의 친교를 누리게 될 것이다. 예수 안에 있어야 하고 예수님의 생명이 나의 생명이 되어야 한다. 그런 사람만이 그 약속을 누릴 것이다.

교훈 : 예수님은 우리가 진실로 그분과 함께 영원토록 친밀한 교제를 나누며 행복하게 살기를 바라신다.

여섯째날(금) 더 깊은 연구를 위해
7월 5일

“부흥과 개혁은 성령의 사역 하에 이루어져야 한다. 부흥과 개혁은 별개의 것이다. 부흥이란 영적 생애를 새롭게 하며, 정신력과 마음의 힘을 일깨워 주고 영적 죽음에서 부활하는 것을 의미한다. 개혁은 재조직, 사상과 이론의 변화 및 습관과 제도의 개선을 뜻한다. 개혁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부흥과 연결되지 않는 한 의의 선한 열매를 맺을 수 없다. 부흥과 개혁은 각각 주어진 역할이 있다. 따라서 이 사업을 이루기 위해서는 두 가지가 병행되어야 한다”(디 애드벤트 리뷰 앤드 쌔버스 헤럴드, 1902년 2월 25일).

“참된 증인이신 분의 권면은 격려와 위로로 충만하다. 교회는 여전히 진리와 믿음과 사랑의 정금을 얻어 하늘의 보화로 부요해질 수 있다.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흰 옷은 품성으로 짜인 그리스도의 의이다. 마음의 순결, 동기의 순결은 자신의 옷을 빨아 어린 양의 피로 희게 하는 모든 이의 특징이 될 것이다”(상동, 1888년 7월 24일).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➊ 무엇 때문에 영적으로 미지근해지는 것이 그토록 위험합니까? 그것은 어떻게 우리를 쉽게 자기기만으로 인도합니까?
※ 그렇게 되면 옳고 그른 것을 분별하는 능력을 잃어버리고 자기의 현 상태를 최고로 착각하는 정신에 사로잡히게 되기 때문이다.

➋ 어떤 신자는 매우 활발해 보이는 반면 어떤 이는 매우 무관심해 보이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성격이 다른 것입니까? 아니면 심각한 어떤 문제가 있는 것입니까?
※ 성경이 다르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러나 예수께서 그의 생명이 되지 않았으면 무관심해질 수밖에 없다.

➌ 영적으로 무관심해지지 않는 방법에 대해서 토의해 보십시오. 어떻게 하면 우리의 영적 경험을 활기차고 건강하게 유지할 수 있을까요? 교회로서 우리가 미지근해지지 않기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요?
※ 영적 필요를 절실히 느껴야 한다. 우리는 몰라도 생활에 불편하지 않으면 배우려고 하지 않는다. 영적 무관심은 영적 사물에 대하여 몰라도 신앙하는 것에 불편이 없다고 생각할 때 나타나는 현상이다. 진리의 말씀을 모르면 신앙생활에 엄청 불편을 느끼는 사람만이 참으로 무관심에서 벗어날 것이다. 그것이 의에 주리고 목마르게 생각하는 모습이다.

➍ 하나님은 왜 우리가 미지근하기보다 차가운 것이 낫다고 하셨을까요? 얼음장 같은 차가움보다 미지근한 게 낫지 않습니까? 미지근한 것과 차가운 것 중에 무엇이 더 나은지 생각해 보십시오.
※ 미지근한 것은 그것이 정상으로 생각하는 기만에 빠지게 한다. 뜨겁지 않은데도 그만하면 괜찮은 열기라고 착각하게 만든다. 그러나 싸늘하게 차가우면 뜨거워져야 한다는 열망을 일으키게 된다.

댓글목록

고송자님의 댓글

고송자 작성일

목사님 안녕하세요.
안식일날 해가 지고나면 컴퓨터를 열고 목사님께서 다음과 교과공부 내용을 탑제 하셨는지 살표보고
공부를 시작합니다.
저는 교과책이 없어서 목사님께서 올리시는 내용을 노트에 필기를 하면서 공부를 하게 됩니다.
그러다 보니 한주동안 날마다 공부를 하고 중요하고 마음에 크게 감동 받은 부분에 대해서는
몇번이고 되풀이 하여 거의 외울 정도로 자습을 하게 된답니다.
지난기 소선지에서도 많은 도움이 되었고 지난주 말라기에서 "중풍병자"에 대한 이야기를 교과시간에
하게 되었는데 시간이 모자랄 정도로 흥미진진 했으며 그런 문제 또한 깊이 생각지 못했던 부분이라
사람들의 대답이 예상한데로 정말 쉽게 하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제가 공부한 내용대로 사람들에게 정리를 했지만 시간이 없을 정도로 아쉬웠답니다.
제 3기에도 깊이 있게 다루어 주시는 내용 정말 고맙고 감사합니다.
제가 정말 큰 덕을 보게 됩니다.
감사합니다. 하나님의 성령께도 함께 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임윤자님의 댓글

임윤자 작성일

목사님!
아직도 미숙하지만 4년째 안교 교사를 맡고 있습니다.
교사로서 먼저 말씀을 이해하려고 노력합니다.

목사님의 자상한 설명과 다른 분이 간과하는 중요한 부분까지도 짚어주시며
깊은 영적은 교훈을 주시니 감사드립니다.
오래 전에 회기동 교회에서 "기초 교리 및 신조"  평신도 단기 신학을 갔었지요.
그때는 제가 스물 한 살 이었는데 이제는 오십대가 되었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목사님은 좋은 교수님이십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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