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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2과 하늘이 주는 최고의 선물(스가랴)[교사들을위한강해식과정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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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조춘호 작성일13-06-14 21:21 조회4,59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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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2과  하늘이 주는 최고의 선물(스가랴)

6월 22일 안식일
일몰:오후 7시 57분

    기억절: “이날에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자기 백성의 양 떼같이 구원하시리니 그들이 왕관의 보석같이 여호와의 땅에 빛나리로다”(슥 9:16).

    연구범위: 슥 8장, 슥 9:9, 마 21:9. 슥 12:1~10, 요 19:37, 슥 13:7~9, 슥 14장.

    중심 사상: 스가랴는 예수님을 지목하고 메시아에 대한 우리의 믿음을 확고하게 해 주는 몇 가지 아름다운 예언을 남겼다.

도입)
어떤 보석상에서 있었던 일이다. 보석을 이것저것 살피던 손님이 어떤 보석을 가리키며 "이 보석은 별로 좋아 보이지 않는데 가격이 왜 이렇게 비쌉니까?"하고 물었다. 그 보석은 '오팔'이라는 보석이었다. 보석상 주인은 아무 말 없이 그 보석을 두 손으로 꼬옥 감싸듯 어루만졌다. 잠시 후 손을 펴자 그 보석은 무지갯빛으로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다. 보석상 주인은 손님에게 이렇게 말했다. "오팔은 사람 손으로 따뜻하게 감싸주면 아름다운 빛을 낸답니다." 라고 말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양떼 같이 구원하신다고 하시고 왕관의 보석같이 여호와의 땅에 빛나겠다고 하셨는데, 사람은 하나님께서 감싸주시고 사랑하시는 때에 진정한 그 가치가 빛을 낼 수 있는 보석과 같다. 우리 주님의 십자가의 몸값, 그분의 사랑의 값으로 산 바 된 당신의 백성들이 주님 안에 있을 때에만 하나님의 백성들은 보석처럼 빛나는 백성들이 될 것이다.

서론)
하나님께서는 제사장이 입을 제사장의 옷에 12보석을 달라 하셨다. 왜 제사장의 옷에 보석을 달았을까? 이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 보석처럼 귀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보석에 이스라엘의 이름을 새기라 하시고 이스라엘 지파의 숫자만큼 보석 12개를 가슴에 붙이라 하셨다. 하나님에게는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은 보석과 같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내 자식이 다른 사람에게는 몰라도 내게도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보석 중에 보석인 것처럼 하나님께도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보석과 같은 존재이다. 오늘의 기억절의 말씀을 보면 “이 날에 그들이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자기 백성의 양떼같이 구원하시리니 그들이 면류관의 보석 같이 여호와의 땅에 빛나리로다”(슥 9:16)에서 볼 수 있듯,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양떼 같이 구원하시겠다는 말씀은 인간의 자력으로는 구원을 이룰 수 없는 인간, 그 스스로의 노력으로 자기를 방위할 수 없는 양과 같은 우리의 인생을 주님의 공로와 그의 능력으로 죄로부터 구원을 받은 백성들을 의미한다. 이는 그들이 전적으로 자신들의 무능을 깨닫고 하나님을 목자로 섬기며 하나님을 의지한 자들, 즉 하나님이 그 능력으로 그들을 돌보신 백성들을 의미한다. 자신들을 의지하지 않고 오직 주를 의지한 그들은 왕의 면류관에 보석이 빛남과 같이 하나님의 왕권에 빛으로 자신들을 드러날 사람들이다. 곧, 하나님은 다스리고 저들은 다스림을 받는 관계가 드러난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세계에 언제나 나타나는 현상이다.

  성경이 전하는 기별의 중심에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야기, 즉 창조주께서 인류를 죄에서 구원하고 생명을 주기 위해 하늘의 영광을 버리셨다는 아들 하나님의 이야기가 자리하고 있다. 스가랴서 후반부는 이런 메시아 예언(예수님에 관한 구약의 예언적 약속)을 몇가지 소개한다.
  하나님은 스가랴 시대에 살았던 그분의 백성들이 구속의 약속에 집중하도록 이 특별한 예언들을 주셨다. 물론 이 예언들의 일차적인 정황을 무시해서는 안 되지만, 그 중요성을 과거의 성취로만 제한해서도 안 된다. 대신 우리는 그 예언들이 예수님의 시대에 지역을 넘어 전 세계적으로 어떻게 성취되었는지 보려고 한다. 왜냐하면 그 예언들이 고대 이스라엘이나 유다뿐 아니라 궁극적인 세계의 운명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결론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을 믿는 자들을 구원하기 위해 정확한 시기에 오셨습니다. 그분의 초림은 세계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이야기이자 가장 결정적인 사건입니다. 우리 각자가 맞이할 미래의 운명은 초림하셨을 뿐 아니라 재림하실 메시아와 우리 사이의 관계에 달려 있습니다.

첫째날(일) 유대 사람 하나의 옷자락
6월 16일

  “만군의 여호와가 이와 같이 말하노라 그날에는 말이 다른 이방 백성 열 명이 유다 사람 하나의 옷자락을 잡을 것이라 곧 잡고 말하기를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하심을 들었나니 우리가 너희와 함께 가려 하노라 하리라 하시니라”(슥 8:23).

교사강해 1)
이것은 많은 열국들의 그 구원의 놀라운 소식들이 많은 열국 가운데 확장되고, 그리고 수많은 열국들이 유대로 몰려오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유다 사람의 영향력, 즉 이방 백성 열명이 유다 사람 하나의 옷자락을 잡는 것은 우리의 영향력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구원의 위대한 역사가 다른 사람들에게 넘쳐나는 모습으로서 수많은 이방인들이 유대인들과 연합하여 그 공동체가 확장되어 가는 놀라운 모습을 그린 것인데 이는 사도행전의 공동체에서 그런 놀라운 성취를 볼 수 있었다. 사도행전의 시대에 구원받는 사람들이 날마다 더해갔다. 그 영향력이 놀라웠다. 물론 핍박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사단의 역사로 교회를 핍박하는 세력도 있었다. 그러나 사도행전의 그리스도인들은 핍박만 받은 것이 아니라, 핍박과 동시에 강조된 것은 저들의 칭송이다. 핍박과 칭송을 함께 받았던 교회. 핍박받으면서 칭찬할 수밖에 없었던 어떤 매력이 있었고 그래서 사람들을 잡아당기고 있었다. 계속 사람들은 몰려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 공동체는 자라가고 있었고 커져가고 있었다. 하나님의 예언은 이루어져 가고 있었다. 오직 성령이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사도행전 전체의 역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그 비전이 이루어져 가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계속해서 그 영향력이 확산되고 확장되고 하나님의 나라는 확장되고 있었다. 성장의 공동체, 확장의 공동체, 땅 끝까지 나아가는 공동체, 이것이 하나님의 백성의 공동체의 모습이었다.

  8장에서부터 스가랴서의 반전이 시작된다. 여호와께서는 세상의 미래와 그 속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감당해야 할 역할에 대하여 일련의 기별을 주셨다. 어떤 부분은 이해하기 어렵지만 최종 미래가 긍정적이라는 사실만큼은 확실하다.
  스가랴 8장을 읽어 보라. 하나님이 제 칠일 안식일 예수 재림 교인으로서 우리에게 주신 소명에 비춰 볼 때에 우리는 여기서 어떤 원칙들을 배워야 하는가?
  예루살렘을 소년 소녀가 거리에서 뛰어 놀고 이를 노인들이 앉아 지켜볼 수 있는 안전한 곳으로 만들려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이었다(슥 8:4~5). 정복자들이 득실거리는 도성의 거주자들에게 안전한 거리는 꿈과 같은 이야기이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의 작은 종속 국가로 영원히 남기보다 온 세상의 왕이신 여호와께 경배하도록 많은 나라를 끌어들이는 자석과 같은 나라가 되어야 했다(슥 14:9). “말이 다른”(슥 8:23)이란 표현은 이 예언이 전 세계적 확산을 염두에 두고 있음을 암시한다.
  이사야나 그와 동시대인이던 미가와 마찬가지로 스가랴도 수많은 도시와 나라에서 여호와께 기도하며 간구하려는 무리들이 예루살렘을 찾는 날이 오리라는 이상을 보았다. 모든 백성이 시온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과 그분께 경배하는 자들에게 복이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복음서의 기사들은 이 메시아 예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통해 성취되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말해 준다. 예를 들어 한번은 예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다.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요 12:32).

부가적용)
스가랴서를 살펴보면 4개의 커다란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첫째는 서론으로서 1장 1절부터 8절까지, 나머지 부분은 두 번째로서 8가지 환상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 다음에 세 번째 부분은 두개의 메시지로서 7장과 8장이다. 7장과 8장이 두개의 메시지로 이루어져 있고, 9장부터 마지막 장까지가 두개의 예언, 혹은 신탁이라고도 할 수가 있다. 두개의 예언, 혹은 신탁. 두개의 메시지, 세 번째 구조에서 첫 번째 부분인 7장은 지난 시간에 배웠던 금식에 대한 메시지였고, 오늘 살필 8장은 회복에 대한 메시지라고 할 수가 있다. 우리가 이 8장을 보면 8장에 열 번씩 반복되는 중요한 문구가 있다. 우리가 8장을 풀어가는 중요한 열쇠라고 할 수가 있다. 8장 2절을 보면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시온을 위하여 크게 질투하며 그를 위하여 크게 분노함으로 질투하노라" 8장 2절이 무슨 말로 시작이 되는가?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이다. 이 말의 반복은 3, 4, 6, 7, 9, 14, 19, 20, 23에 나와 2절을 포함해 10번이 나온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그 회복에 대한 하나님의 축복의 약속과 어떻게 회복될 것인가를 약속하고 계시다. 약속과 동시에 그러한 축복이 이루어져 가기 위해서는 어떠한 책임을 감당해 가야 할 것인가? 그 책임에 대한 격려가 10가지 메시지 안에 요약되어 있다. 한마디로 말해서 이 회복이라는 것은 우선 예루살렘 성전의 회복. 그리고 예루살렘 도성의 회복에 그 중요한 초점이 있다. 예루살렘 성전이 회복된다. 그리고 예루살렘 도성이 회복된다. 그러나 한걸음 더 나아가서 이것은 단순히 예루살렘 성전의 회복이나 도시의 회복만을 겨냥한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이라는 공동체, 믿음의 공동체가 어떻게 회복될 것인가를 말해주고 있다. 그리고 이것은 더 나아가서 비단 구약시대의 이스라엘 공동체 회복뿐만이 아니라, 이것은 신약까지 연장되어서 모든 시대를 통한 신앙 공동체의 궁극적인 회복, 다시 말하면 신약에 있어서의 신앙 공동체의 회복인 교회의 회복까지도 바라보고 있는 메시지가 여기에 있다라고 할 수가 있다.

  교훈: 스가랴는 수많은 이방 백성이 예루살렘에서 하나님께 기도하며 경배하는 이상을 보았는데, 이는 예수님의 사역과 교회의 선교를 통해 성취될 예언이다.

나의 삶 속으로
| 묵상 |
그대는 스가랴 8장의 예언을 어떻게 자신의 사명으로 받아들이겠습니까?
(왼쪽 페이지에 이어서) “하나님의 이스라엘”(갈 6:16)이라고 불리는 그리스도의 교회에는 이 사명의 일익을 감당할 특권이 있다. 우리는 구원의 빛을 세상 끝까지 전해야 한다. 하나님의 백성은 이런 방식으로 세상의 큰 복이 되어야 한다. “너희가 행할 일은 이러하니라 너희는 이웃과 더불어 진리를 말하며 너희 성문에서 진실하고 화평한 재판을 베풀고 마음에 서로 해하기를 도모하지 말며 거짓 맹세를 좋아하지 말라 이 모든 일은 내가 미워하는 것이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슥 8:16~17).
| 적용 |
그대가 어떻게 살 때에 주변의 사람들이 하나님을 찾을 수 있을까요?

    영감의 교훈
  오랫동안 고대해 오신 하나님- “온 교회가 봉사의 정신을 가지고 각자 자기의 능력에 따라 그분을 위해 일하게 되기를 하나님은 오랫동안 고대해 오셨다. 하나님의 교회의 교인들이 복음 사명을 성취하기 위하여 국내외에서 필요되는 분야에 들어가 그들에게 맡겨진 일을 할 때에 온 세계는 오래지 아니하여 경고를 받게 될 것이고, 주 예수께서는 능력과 큰 영광으로 이 땅에 재림하시게 될 것이다.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 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마 24:14)”(사도행적, 111).

    기도
  수많은 사람이 사랑이며 진리이신 하나님을 알기 위해 우리를 찾아오는 날이 속히 이르면 좋겠습니다. 하지만 그들을 받아들이고 감당할 수 있도록 우리를 먼저 준비시켜 주시옵소서. 그들에게 하나님의 품성과 진리를 잘 보여 주기를 원합니다.

둘째날(월) 평화의 왕
6월 17일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슥 9:9).

교사강해 2)
스가랴 9장 이후의 예언은 주로 경고의 형식을 취하는 데, 첫째 부분(9-11장)은 초림하실 메시아에 대한 거부를 경고하는 내용이고, 둘째 부분(12-14장)은 메시아의 재림과 통치와 관계되는 경고이다. 메시아와 관련되는 사건을 드러내기 위해 쓰인 이 부분은 구약 여러 선지자들의 예언을 거의 반영하고 있는 구약 예언서의 정수이며, 예수님의 생애와도 밀접한 관계를 갖는 값진 예언이다. 스가랴 9장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지는데 첫 부분(1-8절)에서는 열방들에 대한 심판이 선포되고 있고 둘째 부분(9-17)에서는 도래할 메시아에 대한 예언이 주어진다. 먼저 슥 9:1-8절에서는 열방들의 멸망에 대해 말씀한다. ‘하드락’, 두로 ‘두로’, 5-6절의 아스글론, 가사, 에그론 그리고 아스돗은 블레셋 나라의 도시들이다. 이 도시들 모두가 알렉산더 대왕에 의해 멸망당한다. 이곳에 열거된 나라들은 하나님을 무시하고 교만하다가 결국 이렇게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되었다. 성경은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7절에서 이 블레셋 사람들도 나중에는 복음을 받아들일 것을 예언한 말씀이다. 8절은 이스라엘의 적국들은 망해도 이스라엘 나라만큼은 하나님의 보호를 받아 안전할 것을 예언한다. 실제로 알렉산더 대왕이 침략할 때 유다는 침략당하지 않으므로 성취되었다. 이런 배경 하에 9절은 매우 유명한 말씀이다. 도성 시온과 도성 예루살렘은 같은 뜻으로 이스라엘 민족을 가리킨다. 이방 민족들은 멸망당해도 메시아가 오셔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것이므로 즐거이 부를 것을 말씀한다. 메시아는 만왕의 왕으로 첫째 공의로우신 분이시다. 모든 불의를 공평히 심판하신다. 그리하여 구원을 베푸시는 분이시다. 그런데 그 방법은 겸손하여 나귀를 타시며 마침내 십자가에서 자신의 생명을 내어 주심으로 이루어진다. 그 구체적인 예증이 바로 나귀를 타신 것이며 이것은 그대로 성취된 것을 우리는 기억한다. 교만하여 멸망해 가는 세상의 왕국과 대비하여 겸손한 하나님의 나라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여준 것이다.

  슥 9:9을 읽어 보라. 신약은 이 부분을 어떻게 예수님께 적용하였는가?(마 21:9, 막 11:9~10, 눅 19:38, 요 12:13~15). 예수님의 승리의 입성은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들어오시는 미래의 왕을 상징하였다. 성경에서 기쁨의 환호성은 특별히 왕이신 하나님을 송축하는 것과 연관이 있다(시 47, 96, 98편 참고). 이 자비로운 왕은 공의와 구원과 지속적인 평화를 가져오고, 그의 통치는 땅끝까지 이를 것이었다.
  예수께서 돌아가시기 며칠 전에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당당하게 입성하셨을 때, 거대한 군중이 그분의 오심을 환호했다. 어떤 이들은 그리스도께서 로마의 권세를 물리치고 예루살렘에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시리라는 기대를 가지고 기뻐하였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왕이 되기보다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고, 무덤에서 부활하셨다. 그분이 군사적인 지도자가 되어 주기를 바랐던 추종자들의 기대는 여지 없이 무너졌다. 그러나 그들이 바라던 바는 예수님의 죽음을 통해서 얻게 될 것들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리스도께서는 왕의 입성에 관한 유대인의 풍습을 따르고 계셨다. 그분이 타신 짐승은 이스라엘 왕들이 탄 것이었던바 이와 같은 방법으로 메시아가 당신의 나라에 임하시리라고 예언되었다. 그분께서 나귀 새끼를 타시자마자 승리의 함성은 하늘을 찌르는 듯하였다. 군중들은 그분을 저희 왕 메시아로서 환호하였다. 예수께서는 지금, 전에는 결코 허락하신 적이 없으셨던 충성의 맹세를 받으셨다. 제자들은 이것을 그분이 보좌에 오르심으로써 그들의 즐거운 희망은 실현될 것이라는 증거로 받아들였다. 군중들은 해방될 시간이 이르렀다고 확신하였다”(시대의 소망, 570).

부가적용)
하나님께서 팔레스타인 땅의 사람들의 교만과 사치와 또 그들의 하나님을 향한 불신앙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았다. 그러나 그 심판 속에서도 당신의 집을 구별하고 그 백성들을 지켜 보호하시고 예루살렘성에 하나님의 소망을 두신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심판하시면서도 당신의 백성들을 눈동자같이 지키셨다. 다른 모든 나라들을 멸망시키면서도 예루살렘은 보호하였던 알렉산더를 보라. 알렉산더는 어떤 의미에서 메시야가 오실 길을 준비하는 하나님의 사자였다. 그 자신은 몰랐겠으나 그러나 하나님이 그를 쓰셨다. 세계를 향한 우리의 전도의 방해는 언어가 아니다. 선교에서 제일 어려운 것은 문화적인 장벽인데 이 문화적인 장벽을 알렉산더가 무너뜨리고 헬라 문화의 통일을 통해 세계를 하나의 세계로 만들어 놓았다. 이 모든 것이 복음을 세계에 쉽게 전하기 위해 주님께서 오시기 전에 계획하여 이루신 하나님의 뜻이다. 알렉산더는 그의 할 일을 다 하고 33세의 나이에 요절하여 죽지만 알렉산더는 그리스도의 길을 예비한 것이다.

  교훈: 슥 9:9에서 나귀를 타고 등장하는 메시아에 관한 예언은 예수님을 통해 성취되었고, 그분은 평화의 왕으로서 세상을 구원하셨다.

| 묵상 |
예수님이 그대의 기대에 어긋난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우리 각자는 메시아로서 예수님께 기대하는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에게 그것은 정치적인 문제였습니다. 오늘날 우리도 메시아에게 건강, 행복, 성공과 관련된 기대가 있습니다. 그러나 때로 우리는 기다리던 결과를 얻지 못합니다. 일부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그들의 기대와 다르자 그를 못 박고 다른 예수(바라바)를 풀어주었습니다. 혹시 우리도 참구원을 주시는 진짜 예수를 못 박고 다른 예수를 원하지는 않습니까?
| 적용 |
예수님에 대한 그대의 기대를 어떻게 수정해야 할지 아래에 적어 보십시오.

    영감의 교훈
  예수 재림의 희미한 전조- “그리스도께서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개선의 입성을 하신 일은 천사들의 환희와 성도들의 기쁨 가운데 능력과 영광으로 하늘 구름을 타시고 재림하실 일의 희미한 전조였다. 그리스도께서 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게 ‘너희는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할 때까지 나를 보지 못하리라’(마 23:39) 하신 말씀이 그때에 성취될 것이다”(시대의 소망, 580).

    기도
  예수님, 우리는 “평화에 관한 일”을 알지 못하는 백성이 되기를 원치 않습니다. 작고 부수적인 것을 바라는 대신 가장 소중한 것은 놓치는 어리석은 자가 되기를 원치 않습니다. 주께서 우리의 구원과 영생의 소망이 되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셋째날(화) 창에 찔린 분
6월 18일

  “내가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 주민에게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 주리니 그들이 그 찌른 바 그를 바라보고 그를 위하여 애통하기를 독자를 위하여 애통하듯 하며 그를 위하여 통곡하기를 장자를 위하여 통곡하듯 하리로다”(슥 12:10).

교사강해 3)
하나님의 목적과 계획 속에서 하나님께서 회복시킬 공동체의 모습이 차지하고 있는 위치에 대한 것이 스가랴 1~8장의 대체적인 관심사이다. 예루살렘의 귀환은 이스라엘의 새로운 출애굽이고, 새로운 구원의 경험이었다. 그러나 이것이 최종적인 구원은 아니었다. 포로 생활로부터의 귀환이 의미하는 모든 것들에도 불구하고 장차 일어날 보다 완전한 구원은 여전히 저들 앞에 놓여져 있었다. 이 완전한 구원이 바로 9~14장의 관심사이다. 포로생활로부터의 귀환은 장차 다가올 보다 큰 구원의 상징이자 예시였다.

  죄로 말미암은 인간의 형벌은 사망이었고, 이 사망은 이미 하나님께서 정하신 운명이었다. 아무도 이 사망을 돌이킬 수 없는 것으로서 사람이 한 번 죽는 것은 이미 정해진 운명이라는 것이다(히 9:27). 그러나 인간의 정해진 이 운명으로 끝나지 않도록 하나님께서 사람의 살 길을 열어주셔서 구원자 예수를 보내셨다. 예수께서는 죽은 자를 살리시고 인간이 가지고 있는 온갖 질병으로부터 인간을 자유롭게 하였으며 또한 소경의 눈을 뜨게 하셨다. 그러나 자신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오신 주를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이다. 나를 구원하기 위해 오신 주를 못 박은 인간들, 이 십자가의 사건을 통해 우리의 죄 때문에 죽으신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우리는 마치 나의 독자, 나의 장자를 잃은 아픔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인간의 죄 때문에 죽으신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건은 우리 모두의 가슴을 숙연하게 하는 사건인 것이다.

  슥 12~14장은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신실했더라면 반드시 일어났을 일들을 보여 준다. 첫째, 여호와께서는 그분의 구원의 계획을 저지하려고 했던 악의 세력과 적국들을 물리치고 완전한 승리를 이루셨을 것이다(슥 12:1~9). 비록 예루살렘이 이런 승리를 이루기 위한 하나님의 도구가 되어야 했지만, 승리는 여호와의 개입에서 비롯될 것이었다. 결과적으로 원수는 철저하게 패하고 멸망했어야 했다.
  슥 12:10은 이스라엘의 육체적 구원에서 하나님의 신실한 백성에게 허락된 영적 구원으로 초점을 옮긴다. 승리한 뒤에 하나님의 백성들은 온전하게 그들의 주를 영접할 것이다. 하나님은 지도자들과 백성들에게 은총과 간구의 영을 부어 주실 것이다. 영의 활동의 결과로 오늘날의 교회가 절실히 필요로 하는 그와 같은 회개와 영적 부흥이 확산될 것이었다.
  하나님이 그의 영을 부어 주시자, 그의 백성들은 자신들이 찌른 분을 보고 마치 독자의 죽음을 슬퍼하는 자처럼 그분을 위해 애도한다. ‘찌르다’는 의미의 히브리어는 항상 죽음을 초래하는 유형의 신체적 가해를 뜻했다(민 25:8, 삼상 31:4). 자신들의 죄가 예수 그리스도를 죽게 했다는 깨달음에서 슬픔의 처절함이 고조된다.
  슥 12:10을 읽어 보라. 사도 요한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재림을 이 말씀과 어떻게 결부시켰는가?(요 19:37, 계 1:7 참고)
  흥미롭게도 한 전통적인 유대교 해설서는 이 성경절을 메시아의 경험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했다. 맞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에 관한 이야기이다(사 53장과 비교).

부가적용)
하나님의 백성들은 자신들이 찔러 죽인 이가 메시아임을 깨닫고 뒤늦게야 애통하게 될 것이다. 그 애통은 질적으로는 독자를 잃은 어머니의 처절한 절규와도 같고, 양적으로는 므깃도 골짜기에서 요시야 왕이 죽었을 때 유다 온 백성이 통곡했던 것 같은 큰 통곡이 될 것이다(10-11절, 왕하 23:29-30). 그러한 통곡의 대열에는 왕족이나 제사장은 물론이요, 모든 백성들과 그 아내들에 이르기까지 다 동참하게 될 것이다(슥 12:12-14절). 이러한 애통은 그들 스스로 반성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회개의 영을 부어주셔야 가능한 것이다(10a). 이 예언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오순절 성령강림, 그리고 그 후에 이어진 대대적인 회심 사건들을 통해 성취되었다. 내가 찔린 아픔 때문에 우는 것은 성령의 도움이 없이도 가능하지만, 주님이 나를 위해 찔리신 아픔 때문에 우는 것은 성령의 도움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나는 하나님이 주시는 회개의 영으로 진정으로 회개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가?

  교훈: 스가랴는 장래에 하나님의 영이 임하면 그분의 백성들이 메시아의 죽음을 애도하며 회개할 것을 보았다.

나의 삶 속으로
| 묵상 |
그대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어떻게 바라봅니까?
성령의 감화가 없다면 우리는 예수님을 주라고 부를 수도 없고, 그분의 죽음을 슬퍼하며 죄를 회개할 수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십자가를 바라볼 때 하늘은 우리에게 자비와 용서의 빛을 비춥니다. “거기에 우리의 모든 소망이 달려 있다. 십자가로부터 구주의 사랑의 빛이 비쳐 나오므로 십자가의 발 아래에서 죄인이 그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돌아가신 분을 쳐다볼 때에, 그는 충만한 기쁨으로 기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그의 죄가 사함을 받은 까닭이다. 죄인이 십자가 곁에 믿음으로 무릎을 꿇을 때, 그는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장소에 도달한 것이다”(사도행적, 209).
| 적용 |
그대는 얼마나 자주 십자가 곁에 가기로 결심합니까?

    영감의 교훈
  측량할 수 없는 사랑- “갈보리의 장면은 매우 깊은 감동을 불러일으킨다. 이 주제에 대해서만큼은 열광해도 무방하다. 탁월하고, 무죄한 그리스도께서 왜 무거운 세상 죄를 지고 고통스런 죽음을 당하셔야 했는지 우리의 생각과 상상력으로는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교회증언 2권, 213).

    기도
  십자가만큼 하늘을 이 땅으로 내리시고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가 어떠한지 죽음으로 증명하신 주님, 가장 겸손한 마음으로 십자가 아래 무릎을 꿇습니다.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해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나아갑니다.


넷째날(수) 선한 목자
6월 19일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칼아 깨어서 내 목자, 내 짝 된 자를 치라 목자를 치면 양이 흩어지려니와 작은 자들 위에는 내가 내 손을 드리우리라”(슥 13:7).

교사강해 4)
예수님은 겟세마네로 가는 도중에 모든 제자들이 자신을 버리고 흩어질 것이라고 예고하셨다. 이 일은 다음과 같은 스가랴 선지자의 말씀을 성취한 것이었다.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칼아 깨어서 내 목자, 내 짝된 자를 치라. 목자를 치면 양이 흩어지려니와 작은 자들 위에는 내가 내 손을 드리우리라(슥 13:7). 예수님은 이러한 스가랴의 예언이 바로 자신과 제자들을 통해서 성취될 것을 아셨다. 스가랴는 메시아 시대에 "죄와 부정을 씻는 샘이 이스라엘을 위해 열릴 것"을 예언했다(슥 13:1). 예수님은 이 예언대로 인류의 죄를 용서하시는 샘이 되어 스가랴가 말한 새 시대를 여셨다. 하나님은 칼에게 명하여 "자신과 짝(파트너)이 된 목자"를 치라고 명령하셨다(슥 13:7). 이 목자는 바로 메시아에신 "예수 그리스도"였다. 스가랴는 칼이 목자를 칠 때에 "양들이 흩어질 것"이라고 예언했다. 이 흩어지는 양들이 바로 예수님의 제자들이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이 고난을 당할 때에 신앙을 지키는 일에 실패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예수님의 고난은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 일어난 것이었다. 스가랴는 예수님을 치라고 명령하신 분이 바로 하나님이었다고 말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칼로 칠 때에 그 목자를 따르는 양들을 보호해 주실 것을 약속하셨다. 하나님께서 양 떼를 흩어지게 하신 것은, 그들로 하여금 예수님으로 인해 해를 입지 않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후에 체포되실 때에 제자들을 건드리지 말도록 요청하셨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자기 편에 서서 싸우면 그들이 크게 해를 입거나 목숨을 잃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계셨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그들이 흩어질 때에 그들이 다치지 않도록 그들이 흩어지도록 하셨다.

  수세기 동안 유대교와 기독교 신자들은 스가랴서에서 메시아나 메시아 시대를 언급하는 많은 성경절을 보았다. 물론 기독교인들은 그 성경절들을 승리의 왕이지만 평화의 왕이고(슥 9:9), 찔린 분이며(슥 12:10), 공격을 당한 선한 목자(슥13:7)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와 사역에 관한 말씀으로 보았다.
  슥 13:7~9에서 선지자는 여호와의 심판의 칼이 선한 목자를 향해 가는 장면을 목격한다. 이전에 선지자는 그 칼이 “못된 목자”(슥 11:17)를 향해 일어서는 것을 보았었다. 그런데 여기서는 선한 목자가 공격을 당하고 양 떼는 흩어진다. 그의 죽음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큰 시험을 초래하며, 그 사이에 얼마는 멸망하지만 신실한 자들은 모두 정결하게 된다.
  마 26:31과 막 14:27을 읽어 보라. 예수님은 이 예언을 그날 일어날 사건에 어떻게 적용하셨는가? 어려움이 닥치자 도망해 버린 제자들을 보면서 우리는 이 사건에서 하나님의 성실함과 인간의 불성실함에 관하여 무엇을 깨닫게 되는가?(마26:56, 막 14:50 참고)
  하나님은 성경 여러 곳에서 선한 목자의 모습으로 등장하신다. 창세기로부터 시작해서 계시록에 이르기까지 그렇다(창 48:15, 계 7:17 참고). 에스겔서에서 하나님은 무책임한 목자들을 꾸짖으시고 잃은 양을 찾아 돌보겠다고 약속하셨다. 이 말씀을 적용하면서 예수께서는 자신이 양들을 위해 목숨을 버리는 선한 목자라고 선언하셨다(요 10:11).

부가적용)
"그러나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막 14:28)."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에 제자들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실 것이라고 예고하셨다(28). 예수님은 인류의 죄값을 지불하기 위해서 유대 종교지도자들과 이방인(로마)의 손에 넘겨질 것이며, 그때에 제자들은 사방으로 흩어질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인류의 죄값을 지불하신 후에 다시 극적으로 살아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은 제자들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셔서 그곳에서 흩어졌던 제자들을 다시 모으실 것이다(막 16:7 참고). 스가랴는 하나님께서 자기 짝인 목자를 치고 양 떼를 흩은 후에, "남은 자기 백성을 연단하실 것"이라고 예고했다(슥 13:9). 예수님은 그 후에 그들을 다시 자기 백성으로 삼으시고, 친히 그들의 하나님이 되어주실 것을 약속하셨다(슥 13:9).

  교훈: 스가랴는 못된 목자를 심판하던 칼이 하나님의 선한 목자를 치는 장면을 보았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닥칠 고난에 대한 예언이다.

나의 삶 속으로
| 묵상 |
그대가 하나님께 불성실했던 때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럼에도 그분은 어떻게 계속하여 그대에게 자비와 은혜를 보이셨습니까?
우리는 여러 가지 유혹에 휩쓸려 그분을 배반합니다. 또는 바쁜 생활 때문에 그분에게서 관심이 멀어집니다. 항상 충성을 외치지만 교회가 가장 어려운 순간에 도망하기도 합니다. 아무리 신실한 신자라도 이렇게 배반을 일삼는 동료를 오래 참기는 힘듭니다. 마지막까지 우리를 되찾기 위해 남아 계신 분은 오직 예수님뿐입니다. 예수님은 잃은 양을 찾는 목자이며, 떠난 자식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사랑 많은 아버지이십니다.
| 적용 |
그대는 그와 같은 자비와 은혜에 어떻게 반응하겠습니까?

    영감의 교훈
  부지런한 목자 그리스도- “부지런하며 수고를 아끼지 않는 목자의 생애와 그의 책임하에 맡겨진 무력한 동물에 대한 그의 부드러운 동정심은 영감받은 성경 기자들로 말미암아 복음의 가장 귀중한 어떤 진리를 설명하는 데 사용되었다. …양 떼를 돌보시는 그분의 노력은 지치지 않는다. 그분께서는 연약한 자에게 힘을 주고, 고통당하는 자를 구하며 어린양들을 당신의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신다. 그분의 양들은 그분을 사랑한다”(부조와 선지자, 190~191).

    기도
  주님 곁을 지키기는 커녕, 떠나기를 반복하는 저에게 용서와 은혜를 베풀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제 저는 제 사랑으로 주님을 붙들지 못함을 고백합니다. 오직 주의 사랑으로 붙들리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다섯째날(목) 온 세상의 왕
6월 20일

  “여호와께서 천하의 왕이 되시리니 그날에는 여호와께서 홀로 한 분이실 것이요 그의 이름이 홀로 하나이실 것이라”(슥 14:9).

교사강해 5)
스가랴 14장은 그 마지막 절인 슥14:21에 “예루살렘과 유다의 모든 솥이 만군의 여호와의 성물이 될 것인즉 제사드리는 자가 와서 이 솥을 취하여 그 가운데 고기를 삶으리라 그 날에는 만군의 여호와의 전에 가나안 사람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고 있다. 왜 스가랴의 마지막 결론의 여호와의 전에 가나안 사람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고 있는가? 또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자손들에게 가나안 땅을 약속하고 계신가? 가나안은 하나님께서 저주를 내린 백성의 표본으로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왜 그토록 큰 저주의 상징이 가나안 족속으로 귀결되고 있는가? 노아에게는 세 아들이 있었는데 셈과 야벳과 함이다. 그런데 가나안의 조상은 함이다(창 9:18) “함은 가나안의 아비라 불리웠다. 그런데 왜 가나안은 저주의 대명사가 되었을까? 하는 것이 궁금하지 않은가? 창 9:20-29을 보면 노아가 포도주를 먹고 취하여 옷을 벗고 잠이 들었다. 이것을 본 함이 아버지의 벗은 것을 덮고 가려주지 않고 그것을 형제들에게 고하였다. 아버지가 벗은 모습을 가리고 허물을 덮어야 할 아들이 다른 형제들에게 아버지가 술 먹고 저렇게 벗고 누웠다고 조롱하듯 고했다. 그러나 셈과 야벳은 아버지의 하체의 벗은 모습을 보지 않고 뒤로 걸으면서 아버지의 허물을 덮었다.  주목할 것은 설령 아비가 술에 취해 벌거벗는 실수를 범했을지라도 형들은 아버지에게 마땅한 존경심과 예의를 갖추어서 대했다는 사실이다. 그 아버지의 하체를 절대로 보지 않으려 했다. 본문에서의 하체는 생식기가 있는 부분이기에 하나님께 한 인간에게 부여하신 생명을 대변한다는 기본적인 의미를 넘어선다. 특별히 아비와 아들의 관계에서 그 하체를 대해야 하였다. 노아 개인으로 봐서도 그러하지만, 아들에게는 더더욱 그 하체는 아비의 인격은 물론 존엄성과 영광의 상징이다. 형들의 처신과 비교해 보면 함이 저주 받은 이유를 짚어보면  그는 아비에게 마땅히 보여야할 존경과 예의를 갖추지 않았던 것이다. 이 사건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사실 노아가 포도주에 취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자신들과 함께 살았던 자신들의 이웃과 모든 인류의 멸망을 바라본 노아의 마음에는 포도주라도 마시지 않으면 잠들 수 없는 마음의 큰 충격으로 그는 포도주를 즐겼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버지의 흉허물을 자식된 함은 조롱하듯 형제들에게 고한 것이다. 잠 30:17절에 ”아비를 조롱하며 어미 순종하기를 싫어하는 자의 눈은 골짜기의 까마귀에게 쪼이고 독수리 새끼에게 먹히리라”고 말씀한다. 우리의 생명의 근원이 되고 우리를 낳아주신 부모를 조롱하고 불순종하는 행위는 하나님께서 저주하시는 일이시다. 저들의 눈은 골짜기의 까마귀에게 쪼이고 독수리의 새끼에게 먹힐 것이라는 저주를 하고 있다. 결국 함이 가졌던 품성 중에 부모에게 대한 조롱의 정신은 결국 하나님께 대한 더 큰 배도로 이어졌다. 부조 선지자 117p에서는 이 사건의 전말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노아는 하나님의 영감을 받아 말하면서 이 인류의 조상들로부터 일어날 삼대 인종의 역사를 예언하였다. 그는 함의 자손에 대하여, 아버지가 아닌 그 아들을 통하여 함의 자손들의 역사를 추적해 가면서,“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그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하노라”(창 9:25)고 선언하였다. 함의 비인도적 범죄는 그의 마음에서 부모에 대한 존경심이 사라진 지 오래라는 것과 그의 성격이 불경건하고 비루하다는 것을 나타냈다. 이 악한 특징은 가나안과 그 후손들에게 물려진 바 되었고, 그들의 계속적인 죄는 그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을 불러왔다.(PP 117)고 기록하였다. “가나안의 후손들은 가장 타락한 이교의 형식에까지 전락되었다. 예언적 저주를 통하여 그들은 노예가 될 운명에 처하였었으나, 수세기 동안 그 운명은 보류되었다. 하나님께서 그들이 당신의 오래 참으심의 한계를 넘을 때까지 그들의 불경건한 부패를 참으셨다. 그렇게 되자 그들은 재산을 빼앗기고 셈과 야벳 자손들의 노예가 되었다. (PP 117p)고 말씀하였다.

  스가랴 14장을 읽어 보라. 우리는 이 말씀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책의 마지막 장에서 스가랴는 회개하지 않은 모든 나라가 예루살렘을 대항하여 모일 날을 묘사한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에 여호와께서 개입하셔서 그분의 백성들을 해방시키고 땅 위에 영원한 나라를 세우신다. 그를 대적했던 자들이 모두 멸망하면 열국이 유일한 참하나님을 경배할 것이고, 여호와는 온 세상을 다스리는 왕이 되실 것이다. 그분은 유일한 주가 되실 것이며 그분의 이름은 모든 이름 위에 높임을 받을 것이다. 이스라엘이 신실하게 남아 있었다면 이 모든 일이 일어났겠지만, 그것들은 온 세상에 퍼져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마지막으로 구속을 받는 동안 더 큰 규모로 성취될 것이다.
  스가랴가 메시아의 강림을 선언했을 때, 그는 그분의 초림과 재림을 구별하지 않았다. 다른 선지자들처럼 그도 메시아 나라를 영광스런 미래의 나라로 보았다.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에 비추어서 이제야 그 둘을 구별하며, 주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 십자가에서 이루신 모든 것에 감사하고, 하나님의 영원한 나라를 소망하며 기쁨으로 미래를 내다보게 되었다(단 7:14 참고).
  스가랴서의 마지막 부분은 예루살렘의 영광과 명성을 묘사한다. 그곳은 백성들로 가득하며 안전한 거처가 될 것이다. 열국에서 구원을 받은 백성들이 영원한 왕께 드리는 경배에 참여할 것이다. 예루살렘 도시 전체에 성전의 거룩함이 가득할 것이다.
  이 영광스런 약속들을 성경 전체의 교훈과 함께 연구한다면 우리는 이 예언들이 새 예루살렘에서 궁극적으로 성취될 것이라는 결론에 이를 것이다.

부가적용)
스가랴 14장 마지막 절에 여호와의 전에 가나안인이 없을 것이라는 말씀은 우리 인간을 창조하신 참 부모이신 하나님에게 욕을 돌리는 모든 인류를 멸망시키실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창10:15 가나안은 장자 시돈과 헷을 낳고 창10:16 또 여부스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기르가스 족속과 창10:17 히위 족속과 알가 족속과 신 족속과 창10:18 아르왓 족속과 스말 족속과 하맛 족속의 조상을 낳았더니 이 후로 가나안 자손의 족속이 흩어져 처하였더라 창10:19 가나안의 지경은 시돈에서부터 그랄을 지나 가사까지와 소돔과 고모라와 아드마와 스보임을 지나 라사까지였더라” 가나안의 자녀들과 그 자손들이 이룬 부족들, 시돈 헷, 여부스 족속, 아모리 족속 기르가스 족속, 히위족속, 신 족속 아르왓 족속, 스말 족속, 하맛 족속 등 소돔과 고모라 까지 이들이 결국 멸망을 당하게 되는 모습을 보게 된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자신을 낳아준 부모에 대한 조롱은 결국 하나님께 대한 불경으로 이어진다. 마찬가지로 우리를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께 대한 불경은 결국 우리 모두가 영원한 멸망을 당하게 될 것이라는 말이다. 인간은 하나님께 불경한 죄로 인해 멸망당하게 됨을 알게 되어야 한다. “여호와께서 천하의 왕이 되시리니 그날에는 여호와께서 홀로 한 분이실 것이요 그의 이름이 홀로 하나이실 것이라”(슥 14:9).

  교훈: 스가랴는 책의 마지막 장에서 모든 악인이 사라지고 여호와께서 온 세상의 왕으로서 경배를 받는 영광의 왕국을 내다보았다.

나의 삶 속으로
| 묵상 |
그대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서 어떻게 완성되리라고 기대합니까?
(왼쪽 페이지에 이어서) 전 세계에서 구원받은 백성들이 그곳에 모여 영원토록 하나님을 경배할 것이다. 이 모든 일은 재림 이후에 일어난다. 유명한 홍해의 노래가 “여호와께서 영원무궁하도록 다스리시도다”(출 15:18)라고 결론을 내렸던 것처럼, 구원받은 백성들이 영원무궁토록 부를 찬양의 주제는 그분의 선하심과 능력 그리고 하나님의 구원이 될 것이다. 고대의 선지자들과 신실한 백성들은 모두 이런 결정적인 사건을 간절한 기대를 가지고 내다보았다.
| 적용 |
주께서 온 세상을 통치하시리라는 소망이 그대에게 중요한 이유를 적어 보십시오.

    영감의 교훈
  하늘의 왕으로 다시 오실 그리스도-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영광과 아버지의 영광과 거룩한 천사들의 영광으로 오실 것이다. 천천만만의 천사들과 놀랍도록 아름다움과 영광을 지닌 하나님의 아들들이 승리의 개가를 부르며 그분을 호위할 것이다. 그때 그분은 영광의 보좌에 앉으실 것이며 천하만국이 그분 앞에 모이게 될 것이다. 모든 눈이 그분을 볼 것이며 그분을 찌른 자도 역시 볼 것이다. 가시관 대신에 그분은 면류관 속에 면류관이 든 영광의 면류관을 쓰실 것이다”(시대의 소망 739).

    기도
  예수님, 속히 오셔서 이 불신의 땅을 심판하시고 주님의 사랑과 공의로 우리를 다스려 주시옵소서. 주님의 통치 아래에서 하늘의 평화와 행복을 누리며 영원무궁토록 하나님을 찬양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여섯째날(금)
6월 21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하나님의 교회는 악과의 오랜 투쟁 중 가장 불우한 시대에 여호와의 영원한 목적에 대한 계시를 받았다. 당신의 백성들은 현재의 시련 저편의 승리, 곧 투쟁이 끝나고 구속받은 이들이 약속의 땅을 차지할 미래의 승리를 바라볼 허락을 받았다. 하나님의 손으로 묘사된 장면 곧 미래의 영광에 대한 계시는 각 시대의 투쟁이 신속히 끝나고 약속된 축복들이 모두 완전히 실현되려고 하는 오늘날 당신의 교회에게 매우 귀중한 것이다.…구원받은 민족들은 하늘의 율법만을 알게 될 것이다. 모두 찬양과 감사로 옷 입게 될 것이며 한 가족이 되어 행복하게 살 것이다. 새벽별들이 함께 노래하고 하나님의 아들들이 기뻐 부르짖는 광경을 보시면서 하나님과 그리스도께서는 연합하여 ‘다시는 죄도 없고 죽음도 없으리라’고 선언하실 것이다”(선지자와 왕, 722, 732~733).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1. 아무리 인간이 세상을 더 좋게 만드려고 노력할지라도 세상은 계속 나빠지고 있습니다. 성경에 따르면 예수께서 다시 오셔서 이 세상을 새롭게 창조해야만 우리가 그토록 바라는 낙원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런 사실을 알지라도 가능한 한 이 세상에 위로와 치유 그리고 위안을 가져다줄 소명이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2. 목요일 소지에 따르면 구약의 예언들은 예수님의 강림을 두 개의 사건이 아닌 한 개의 사건으로 보았습니다. 이는 구속의 경륜의 관점에서 볼 때 초림과 재림이 얼마나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말해 줍니까?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초림이 없다면 재림이 없고 재림이 없다면 초림이 소용없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3. 우리가 부흥과 개혁을 바란다면 스가랴서 연구에서 무엇을 배워야 합니까? 스가랴서를 통해서 우리 각자와 교회는 부흥과 개혁에 필수적인 성령의 부으심을 어떻게 준비해야 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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