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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9과 여호와의 날(스바냐)[교사들을위한강해식과정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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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조춘호 작성일13-05-26 10:27 조회4,411회 댓글2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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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제 9과 여호와의 날(스바냐)

6월 1일 안식일
일몰:오후 7시 47분


    기억절: “여호와가 그들에게 두렵게 되어서 세상의 모든 신을 쇠약하게 하리니 이방의 모든 해변 사람들이 각각 자기 처소에서 여호와께 경배하리라”(습 2:11).

    연구범위: 습 1:14~18, 욜 2:1~11, 습 2:1~3, 사 11:4, 습 3:1~5, 사 62:5, 나 1~3장.

    중심 사상: 심판이 이를지라도 간절히 구하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가 있을 것이다.
  
도입)
한 간악한 스코틀랜드인 변호사가 있었다. 한번은 말을 빌렸는데 사고였는지 거칠게 다루었는지 모르지만 그 말이 죽고 말았다. 자연히 주인은 자기가 입게 된 손해보상과 함께 말 값을 지불하라고 주장했다. 변호사는 손해배상은 기꺼이 지불하겠지만, 당장 현금이 없으니 현금대신 약속 어음을 받겠냐고 말 주인에게 묻자, 그 말 주인은 기꺼이 승낙했다. 그러자 변호사는 지불할 기한이 필요하다고 했다. "시간은 마음대로 하시죠."라고 말 주인이 말했다. 그러자 간악한 그는 심판의 날에 지불하도록 어음을 발행했다. 결국 말 주인은 그 문제를 법정에 가져갔고, 거기에서 변호사는 자신의 변호에서 판사에게 어음을 보라고 말했다. 그러자 판사는 어음을 보고 나서 이렇게 대답했다. "약속어음은 완전히 유효합니다. 그리고 오늘은 심판의 날이므로 내일 지불할 것을 판결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의 맷돌은 쉬지 않고 천천히 돌아간다. 마치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가 쉬지 않고 돌고 있는데도 느끼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악인은 자신이 하나님의 심판의 맷돌이 돌아감에 따라 갈린다는 것을 느끼지 못한다. 하나님의 맷돌은 천천히 돌아가는 것 같아도 확실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악의 모양을 버리고 정의롭게 살아야 하는 것이다.

서론)
스바냐는 유다 왕 요시야 재위 기간 중에 활동한 선지자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요시야 왕이 종교개혁을 하기 전 주전 630년경이다. 그렇다면 그는 예레미야, 나훔, 그리고 아마도 하박국 선지자와 거의 동시대에 활동한 것으로 보인다. ‘스바냐’라는 말의 뜻은 ‘여호와께서 숨겨 주시는, 보호해 주시는 자’라는 뜻이다. 그는 1장 1절에 의하면 유다 왕 히스기야의 4대 손이므로 사회적인 지위가 높은 사람이었음에 틀림없다. 본서의 수신 대상은 유다 백성들과 열국의 모든 백성들이다. 그 당시 유다 백성들은 사악한 므낫세와 아몬의 실정으로 인해 각종 우상 숭배의 죄악에 젖어 있었다. 아마도 당시의 유다는 실질적으로 앗수르의 식민지와 다름없는 상황이었다고 한다. 따라서 므낫세와 아몬 왕은 니느웨에서 수입된 우상들과 타락한 문화, 자연숭배, 그리고 미신 등을 거부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에 대해 여호와 하나님께서 스바냐 선지자를 통해 ‘여호와의 날’이 임박하였음을 경고하면서 회개를 촉구하였던 것이다. 하나님께서 스바냐를 통하여 보여주시는 환상은 이스라엘의 회복에 머물지 않고, 이스라엘 주변 국가들을 징치하시는 하나님! 그들의 우상숭배와 깨어있지 못함과 하나님의 백성을 향한 그들의 괴롭힘과 교만으로 인하여 그들이, 그들의 처소가 황페케 될 것임을 고지하신다! 해변국가들과 암몬과 모압, 그리고 아프리카의 구스, 당시의 열강 앗수르와 니느웨의 멸망까지, 스바냐의 영적 통찰력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을 돌이키실 뿐 아니라, 당신을 대적하시는 하나님의 경륜가운데, 온 인류구원의 구원이 당신의 뜻이심을 알게 하신다! 선지서의 곳곳에서 하나님은 종국에 온 세상에 주님의 영광이 가득 차게 될 것임을 보여주고 계신다! 사도 바울 역시 하나님은 모든 이들의 구원을 소망하심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다! 딤전2:4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선지서들을 연대순으로 배열한다면 스바냐서는 이사야서와 예레미야서 사이에 있을 것이다.
스바냐는 유대 사회의 뿌리 깊은 부패를 정죄하였다. 그는 겸손과 성실함으로 그의 백성들을 부르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기초한 회개의 필요성을 지적하였다. 그는 다음과 같은 이중 기별을 전하였다. 즉 하나님의 백성들을 포함하여 전세계적인 심판이 임박한다. 그러나 만국에서 구원받은 백성들이 이스라엘의 남은 무리와 연합하여 하나님을 섬기며 그분의 복을 누리게 될 것이다. 스바냐의 기별은 오늘날 타락한 세상에 소망의 기별을 전하는 자들에게 여전히 중요하다. 우리는 이번 주 교과 연구를 통해서 이러한 사실을 보려고 한다.

  결론: 살아 계신 하나님은 열방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은 모든 사람을 사랑할 뿐 아니라 구원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분은 우리가 그분의 사랑에 반응하여 새 사람이 되고 그분께 경배할 때 기뻐하십니다.

첫째날(일) 암흑의 날
5월 26일

  “주 여호와 앞에서 잠잠할지어다 이는 여호와의 날이 가까웠으므로 여호와께서 희생을 준비하고 그가 청할 자들을 구별하셨음이니라”(습 1:7).

교사강해 1)
성경의 교리, 특히 종말에 관한 교리를 공부할 때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 바로 "날"에 관한 부분이다. 특히 "주의 날", "그리스도의 날", 그리고 "하나님의 날"은 항상 예언과 함께 등장하는데, 그것은 단지 24시간으로 된 하루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특정한 "기간"을 나타낸다. 이러한 날들은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왕국과 구속에 대한 각각의 경륜들과 맞물려지는데, 성도들에게는 소망의 날이요,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두려움과 심판의 날이 된다. 이 세 가지의 "날"들 중에 가장 두드러지고, 성경에서 가장 많이 초점을 맞추어 설명하는 날은 "주의 날"(the day of the Lord)이다. 구약의 예언서에서 이 날은 너무도 강조되어 있어서 성경 전체의 주제가 될 만큼 중요한 날인데,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기 때문이다. 또한 "주의 날"이라는 표현이 나올 때마다 그 날은 큰 심판과 연관되는데, 이는 대 환난을 포함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시에 있게 될 커다란 심판이기 때문이다(사 2:12; 13:6-9, 렘 46:10,21, 암 5:18, 습 1:7, 슥 14:1, 말 4:5).

  스바냐가 전하는 기별의 핵심은 “여호와의 날”(습 1:7)이다. 성경에 나오는 선지자들에게 여호와의 날이란 하나님이 구원이나 심판을 목적으로 인간의 역사에 개입하시는 특정 기간을 의미한다. 대부분의 고대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그날에 이스라엘을 구원하고 높이시는 반면 원수들은 영원히 멸하시리라고 믿었다. 그러나 놀랍게도 선지자는 여호와의 날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도 멸망의 날이 되리라고 선언하였다(습 1:1~5 참고). 왜냐하면 그들이 그분께 죄를 범했기 때문이다(슥 1:17).
  습 1:14~18을 욜 2:1~11, 암 5:18~20과 비교해 보라. 이 성경절들을 읽을 때, “여호와의 날”에 대하여 어떤 그림이 떠오르는가?
  스바냐는 다가올 심판을 모든 생명이 멸절했던 노아 홍수에 비유한다(창 6~8장 참고). 습 1:2~3에 언급된 사망의 목록은 창조의 역순, 즉 인간, 육지 동물, 공중의 새, 물고기 순으로 배열되었다(창 1:20~27과 비교해 보라.).
선지자는 심판에서 벗어날 방법은 없다고 백성들에게 경고한다(습 1:18). 금과 은으로도 여호와의 진노에서 그들을 보호하지 못할 것이었다. 그럼에도 안일한 예루살렘 백성들은 하나님이 유익을 주시지도 해를 가하시지도 않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들은 여호와께서 무엇을 하시리라 예상조차 하지 않았다(습 1:12). 그러나 하나님의 심판은 그분의 신실한 백성들을 위한 미래를 보증하려고 하나님이 얼마나 적극적으로 일하고 계시는지 보여 준다.

부가적용)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땅위에서 모든 것을 진멸하리라 내가 사람과 짐승을 진멸하고 공중의 새와 바다의 고기와 거치게 하는 것과 악인들을 아울러 진멸할 것이라 내가 사람을 땅 위에서 멸절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스바냐 1장 2절~3절)  고 하신 말씀을 보면 마치 노아의 때를 연상하게 하는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이다. 주전 630년 경에 하나님은 스바냐의 입을 통하여 마지막 때에 대한 계시를 이렇게 말씀하신다. 모든 것을 진멸하리라.....이것이 여호와의 분노의 날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어떤 자들을 진멸하실 것인지 하나 하나 설명하신다. 바알을 그곳에서 멸절하며 그마림이란 이름과 및 그 제사장들을 아울러 멸절하며...(스바냐 1장 4절) 이들은 우상들과 우상숭배 하는 자들이다. 골로새서에는 탐심이 우상숭배라고 하였다. 교회 안에서 탐심으로 가득한 우상숭배자들은 얼마든지 볼 수 있다. 또 지붕에서 하늘의 뭇 별에게 경배하는 자들과 경배하며 여호와께 맹세하면서 말감을 가리켜 맹세하는 자들과(스바냐 1장 5절). 이들은 혼합주의 이며 종교 다원주의 자들이다. 이미 많은 교회들과 사역자들이 이 길을 가고 있다. 여호와를 배반하고 따르지 아니하는 자들과(스바냐 1장 6절). 이들은 배도한 자들이다. 배도의 전제조건은 하나님을 알았던 사람이라는 것이다. 은혜를 받았었고 은사를 받았었고 사역도 했었으며 직분도 있었던 사람이 하나님을 배반하는 것이다. 여호와를 찾지도 아니하며 구하지도 아니한 자들을 멸절하리라(스바냐 1장 6절). 이들은 불신자들과 또한 교회 안에 있으나 하나님과 상관이 없는 자들이다. 지금 우리 주변에서 혹은 주변의 교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닌가......이러한 사람들을 멸절시키는 날이 여호와의 분노의 날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자들에게는 행복과 소망의 날이 될 것이다.

  교훈: 스바냐가 전하는 여호와의 날은 이스라엘을 포함하여 인류의 역사를 마감하는 날이다. 그러나 그분을 찾는 자들에게는 미래를 여는 날이 될 것이다.

나의 삶 속으로
| 묵상 |
그대에게 여호와의 날은 구원의 날입니까? 아니면 심판의 날입니까?
(왼쪽 페이지에 이어서) 스바냐는 심판의 목적이 징계뿐 아니라 교정에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보여 준다. 여호와는 그분을 찾는 자들에게는 피난처를 주리라는 약속을 제시하신다(습 2:3). 따라서 여호와의 날은 세상의 끝 그 이상의 의미가 있다. 그날은 영원한 하나님의 통치가 수립되는 미래의 출발점이 될 것이다.
| 적용 |
여호와의 날에 그대는 무엇을 그대의 피난처로 삼을 수 있을까요?

    영감의 교훈
  우리 앞에 해야 할 사업- “우리는 신속히 일해야 하며 끈기 있게 전진해야 한다. 우리는 여호와의 큰 날을 위해서 예비하고 있어야만 한다. 우리에게는 낭비할 시간이 없으며 이기적인 목적에 종사할 시간이 없다. 이 세상은 경고의 기별을 받아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각자에게 할 일을 맡기셨으며 모든 사람은 자신이 담당해야 할 분야가 있고 우리들은 자신의 영혼의 위험을 무릅쓰지 않고서는 이 사업을 등한히 할 수 없다”(가려 뽑은 기별 1권, 126).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죄를 생각하면 심판의 큰 날이 두렵기만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피난처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 숨습니다. 우리의 죄를 뉘우치며, 속죄하는 주님의 피를 의지합니다. 은혜와 자비를 베푸시옵소서. 주의 의를 옷 입게 해 주시옵소서.

둘째날(월)
5월 27일
세상의 겸손한 자들

  “여호와의 규례를 지키는 세상의 모든 겸손한 자들아 너희는 여호와를 찾으며 공의와 겸손을 구하라 너희가 혹시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숨김을 얻으리라”(습 2:3).

교사강해 2)
당시 유다 백성들이 사악한 므낫세와 아몬의 실정으로 인해 각종 우상 숭배의 죄악에 젖어 있을 때 하나님께서 스바냐 선지자를 통해 ‘여호와의 날’이 임박하였음을 경고하면서 회개를 촉구하였다. 1장은 주로 유다를 향한 심판을 선포하였다면 2장은 좀 더 폭넓게 열방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볼 수 있는데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2:1-3절까지는 심판의 임박성을 경고하면서 회개를 요청하고 있고, 2:4-15절까지는 열방에 대해 심판을 선포하고 있는 말씀이다. 이러한 내용은 예수님께서 공생애 초기에 선포하셨던 말씀 즉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와 직결된다. 또한 복음이 유대인들뿐만 아니라 이방에까지 전파되어야 할 필연성을 증거 한다고 볼 수 있다.

  습 2:1~3에서 우리는 회개하라는 선지자의 호소를 듣는다. 비록 멸망이 가까웠지만, 만약 그 나라가 회개한다면 아직 재난을 피할 시간은 있다. 회개를 거부한 악인들은 심판날에 겨같이 불에 탈 것이다. 시 1:4에서도 겨에 비유된 악인들은 마침내 멸망한다.
  스바냐는 “여호와를 찾으라”는 말로 하나님 앞에서 겸손히 믿음을 굳게 지킨 자들을 격려한다. 선지자는 여호와를 찾는 것과 의와 겸손을 구하는 것이 같다고 가르친다. 회개는 다가올 심판을 피하기 위해 필수적인 태도이다.
  스바냐는 회개한 백성들을 “세상의 겸손한 자들”이라고 부른다(습 2:3). 다음의 성경절들은 ‘세상의 가난한 자들’로 번역할 수도 있는 이 표현에 대하여 어떤 빛을 비추고 있는가?(마 5:3, 시 76:9, 사 11:4, 암 8:4)
겸손한 자들이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지키고 그분께 인도를 받으며 배우는 자들을 말한다. 시편 기자는 “여호와는 선하시고 정직하시니 그러므로 그의 도로 죄인들을 교훈하시리로다 온유(겸손)한 자를 정의로 지도하심이여 온유(겸손)한 자에게 그의 도를 가르치시리로다”(시 25:8~9)라고 말하였다. 선지자는 겸손한 자들에게 심판의 날을 대비하여 하나님을 찾고, 그의 공의와 겸손을 구하라고 호소하였다.
  겸손한 자들이 생존할 가능성은 ‘혹시’라는 말로 표현되었다. 즉 생존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달려 있다는 의미이다. 은혜를 절대 당연시 여겨서는 안 된다. 임박한 멸망 전에 자비하신 하나님으로부터 미래에 대한 소망이 주어진다. 여호와는 자신을 믿는 자들은 모두 보호하겠다고 약속하셨다(욜 3:16, 나 1:7). 이런 종류의 믿음은 자기 의존과 속임수와 기만을 몰아낸다.

부가적용)
구원이란 인간 행위에 대한 보상이 아니라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이다. 따라서 겸손한 자라고 할지라도 결코 그들의 행위로 구원받는 것이 아님을 스바냐는 ‘혹시’, 다른 번역에는 ‘행여’라는 말로 강조한다. 우리가 아무리 올바르게 살려고 노력해도 부족한 부분이 있다. 그러므로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 안에 살면서 구원을 낙관한 채 방종한 행동을 하지 말고 더욱 겸손한 태도를 지닐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이다.(믹 6:8; 롬 12:3; 빌 2:5; 약 4:10; 벧전 5:5) 즉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행하기를 간절히 원하며 발버둥치는 동시에 언제나 부족함을 느끼고 겸손히 회개해야 하는 것이다.

  교훈: 선지자는 심판을 피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그날이 이르기 전에 회개하여 여호와를 찾으며 공의와 겸손을 구하는 것밖에 없다고 호소하였다.

나의 삶 속으로
| 묵상 |
그대는 하나님께 겸손한 백성입니까?
겸손한 사람이란 자신의 의가 누더기에 불과함을 인정하고 자신의 영광을 티끌 속에 버린 사람입니다. 그는 자신의 힘으로 죄의 소망을 억누르지 못함을 시인하고 오직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기 위해 무릎 꿇습니다. 그는 경험적으로 자신의 판단이 옳은지 확신할 수 없기에 이제는 말씀의 교훈과 원칙에 순종하기로 결심합니다. 그리고 구원은 하나님께 있음을 알고 그분의 자비와 은혜를 구합니다.
| 적용 |
그대가 겸손한 신앙인으로서 갖추어야 할 자세에 대해서 적어 보십시오.

    영감의 교훈
  가장 성공적인 방법- “사람이 자신의 무력함을 느끼고 구주의 공로에 완전히 의지하는 것보다 더욱 속절없이 보이는 것이 없지만 실상은 그보다 더 강력한 것도 없다. 기도와 말씀 연구와 그분께서 함께 계심을 믿는 믿음으로 가장 약한 사람도 살아 계신 그리스도와 연결되어 살 수 있다. 그리고 그분께서는 그들을 붙드셔서 그들이 결코 떠나가지 못하게 하실 것이다”(치료봉사, 182).

    기도
  아버지, 제가 교만한 죄인이 될까 두렵습니다. 고집이 세고, 자기 주장이 강하며, 자기를 내세우고,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그런 사람이 되지 않게 해 주옵소서. 제게 의가 없을지라도 가난하고 겸손한 죄인이 되어서 주님의 은혜를 입기 원합니다.


셋째날(화) 타락한 도시
5월 28일

  “패역하고 더러운 곳, 포학한 그 성읍이 화 있을진저 그가 명령을 듣지 아니하며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여호와를 의뢰하지 아니하며 자기 하나님에게 가까이 나아가지 아니하였도다”(습 3:1~2).

교사강해 3)
당시 유다 백성들이 사악한 므낫세와 아몬의 실정으로 인해 각종 우상 숭배의 죄악에 젖어 있을 때 하나님께서 스바냐 선지자를 통해 ‘여호와의 날’이 임박하였음을 경고하면서 회개를 촉구하였다. 1장은 주로 유다를 향한 심판의 선포였고 2장은 좀 더 폭넓게 열방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했다. 3장은 다시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1-8절에서는 심판 선언의 결론부로서 다시 유다에 대한 심판과 관련하여 다시금 예루살렘의 죄악이 지적되면서 이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가 따를 것이 선포되고 있다. 특별히 하나님을 떠남으로 인하여 자신들의 본분에서 탈선한 지도자들(방백, 재판장, 선지자, 제사장)의 죄악을 규탄하고 강력한 어조로 심판을 예언한다. 후반부인 9-20절에서는 심판의 선언 후 다시 하나님의 구원을 선포한다. 이방인들과 이스라엘의 구원 및 회복을 강조하면서 참혹한 심판과는 정반대로 구원의 기쁨과 희락을 구가한다. 이 날은 여호와의 날로서 세상 만민을 향하여는 심판의 날이지만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구원의 날이다.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날이며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완전히 회복되어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되는 날임을 분명히 말씀하고 있다.

  속담에 “등잔 밑이 어둡다.”는 말이 있다. 이 말은 스바냐 시대에 예루살렘의 도덕적 상태에도 적용된다. 선지자는 유다 인접 국가, 즉 서쪽의 블레셋, 동쪽의 모압과 암몬, 남쪽의 구스, 동쪽의 앗수르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이제 막 선고하였다(습 2장 참고). 하지만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그는 이 땅에 있는 하나님의 도성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자들의 죄악상을 폭로하였다.
  습 3:1~5을 읽어 보라. 누가 정죄를 당하고 있으며 그 이유는 무엇인가? 어떻게 그토록 많은 빛과 진리를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끝내 타락할 수 있을까? 우리에게 같은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스바냐의 주된 관심사는 유다의 수도 예루살렘이었다. 그는 도시의 도덕적 퇴보에 관하여 지도자들을 고발한다. 타락의 직접적인 원인은 부여된 역할과 책임을 다하지 못한 지도자들의 실패에 있었다(렘 18:18, 겔 22:23~30과 비교해 보라.). 부패한 법관들은 ‘부르짖는 사자’로 비유되었고, 재판장들은 ‘저녁 이리’로 간주되었다. 성전이라고 더 나을 것이 없었다. 제사장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지 않았고 선지자들도 진리를 말하지 않았다.
  “요시야가 통치하는 동안 여호와의 말씀이 스바냐에게 임하여 계속된 배도의 결과를 하나하나 분명히 열거하고는 미래의 영광스러운 전망에 교회의 관심을 환기시켰다. 유다에 내릴 절박한 형벌에 대한 스바냐의 예언들은 똑같은 능력으로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에 회개하지 않는 세상에 내릴 형벌에 적용된다”(선지자와 왕, 389).

부가적용)
“망하고야 말 도성”은 예루살렘 성을 가리킨다. 예루살렘 사람들은 계속해서 반복되는 경고에도 불구하고 잘못을 뉘우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한 채 패역한 도시로 전락했다. 예루살렘의 타락상은 렘 5:1; 9:5; 14:32-35; 23:13에 잘 나와 있다. 징계와 책망을 통해 당신의 백성들을 깨우치시는 하나님을 불순종한 죄를 지적한다. “대신들은 ... 사자요”- 백성들을 위해 사악과 부정을 앞장서서 제거해야 할 지도자들이 권력을 앞세워 부정 축재를 일삼고 양민들을 무자비하게 학대했다. 재판장들은 정의의 편에 서지 않고 판결권을 악용해서 뇌물을 착복했다.(저녁 이리: 겔 22:27; 미 3:11) 이와 같이 지도층에 있는 사람들이 권력을 남용해서 국민을 억압하고 부정부패에 탐닉하게 될 때 그 사회는 불신과 반목에 휩싸이게 되고 결국에는 망할 수밖에 없다는 것은 오고 오는 세대에 영원히 적용되는 만고불변의 진리이다(렘 23:2; 겔 34:2,3).

  교훈: 스바냐는 예루살렘의 타락을 지적하며 그 책임이 정치적인 지도자와 종교적인 지도자들에게 있다고 경고하였다.

나의 삶 속으로
| 묵상 |
하나님께 부름을 받은 지도자와 백성으로서 우리는 과연 안전합니까?
때로 교회에서 수치스러운 일이 일어납니다.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믿는다면 절대 생겨서는 안 될 일도 벌어집니다. 우리에게 세상의 소금과 빛의 사명을 기대하셨던 주님께 너무도 죄송스럽습니다. 지도자들이 세속적 관심을 멀리하고 오직 영적인 일에 몰두했으면 좋겠습니다. 백성들이 예배를 회복하고 그리스도인다운 경건한 생활을 실천했으면 좋겠습니다. 교회가 세상에 부끄럽지 않는 본연의 모습을 찾았으면 좋겠습니다.
| 적용 |
그대가 또는 우리가 어떤 면에서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고 있는지 살펴 보십시오.

    영감의 교훈
  하나님을 만나는 지도자- “하나님께서 지도자로 책임을 맡기신 사람들이 일의 책임을 인하여 그분 앞에서 두려워하며 떨 때에, 그들이 자신의 무가치함을 깨닫고 겸손히 하나님을 구할 때, 그분을 불쾌하게 하는 모든 것에서 자신을 깨끗케 할 때, 그들이 용서와 평화를 얻었다는 것을 알 때까지 그분께 간구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통하여 자신을 나타내실 것이다. 그리하면 사업은 힘 있게 진전될 것이다”(교회증언 6권, 51).

    기도
  아버지께서 토하여 내치시고 싶을 정도로 우리는 부패하였습니다. 복음 전파는 고사하고 우리 자신도 구원하기 힘듭니다. 그러나 아버지께서 이 교회를 아끼신다는 사실을 믿습니다.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이 교회를 바르게 세워 주옵소서.

넷째날(수)
5월 29일
하나님의 최고의 기쁨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습 3:17).

교사 강해 4)
습 3:17절은 비록 짧지만 성도들을 향한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이 구구 절절이 넘치는 한편의 대연가(大戀歌)라 할 수 있다. 여기에는 구원자이신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이 표현됨과 동시에 하나님의 기쁨은 성도들 안에서 성도들을 통해서 성취됨을 감동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성도들에 대한 하나님의 완전하고 위대하며, 자기희생적인 영원한 사랑을 ‘잠잠히 사랑하시며’ 또는 ‘사랑으로 새롭게 하시며’라고 표현하고 있다(렘 3:13; 롬 5:8; 엡 2:4).

  스바냐는 책 말미에 주제를 진노에서 회복으로 전환한다(습 3:9~20). 하나님의 최종 목적은 심판 너머에 있다. 나라들이 징계를 받으면 그들은 다같이 여호와를 찾고 진심으로 그분을 섬길 것이다. 입술이 정결케 되어서 만인이 여호와를 섬기며 경배와 찬양을 드릴 것이다. 적지만 겸손하고 신실한 남은 무리들은 유다에서 생존하여 교만한 지도자들의 자리를 대신할 것이다.
  무엇보다 하나님이 백성들과 함께 거하실 것이며 과거의 모든 잘못을 바로잡으실 것이다. 여호와께서 그들과 함께 계시기 때문에 백성들은 더 이상 두려워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하나님은 그들의 구주가 되실 것이다. “이스라엘의 남은 자는…먹고 누울지라도 그들을 두렵게 할 자가 없으리라”(습 3:13).
  그런 행복이 있다면 당연히 백성들이 하나님께 감사하며 기뻐해야 할 텐데, 오히려 선지자는 하나님이 그들 때문에 기뻐하실 것이라고 말한다. 백성들을 너무도 사랑하고 좋아한 나머지 하나님은 그들로 말미암아 기쁨을 노래한다.
  선지자 이사야는 구원받은 백성들에 대한 하나님의 기쁨을 어떻게 묘사했는가?(사 62:5, 65:19)
  위대한 왕이요 거룩한 전사이신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을 보호하고 옹호하실 것이다. 그분은 십자가에서 이루신 승리의 모든 혜택을 우리에게 주실 것이다. 그분은 겸손한 자들을 높이시고, 수욕과 고통과 소외를 존귀와 행복의 경험으로 바꾸실 것이며, 친히 그들과 함께하실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이 선포하신 기별의 핵심 주제처럼 저는 자들과 쫓겨난 자들이 명성과 칭찬을 얻을 것이다.

부가적용)
심판에 대한 경고를 중심 주제로 하는 스바냐의 메시지는 환난과 공포와 혼돈과 울부짖음 등 전쟁의 참상을 비극적으로 묘사하고 있으면서도 그 안에 면면히 흐르는 하나의 소망과 밝은 미래상을 제시하고 있다. 그런데 이 소망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요 그의 주권적인 능력에 기인하는 것이다. 강력한 바벨론 제국에 의해 유다, 블레셋, 모압, 암몬, 구스, 앗수르 등의 파멸을 필연적이며 또한 결정적인 것으로 묘사하면서 스바냐는 오직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나라와 민족만이 이 재난에서 구원될 수 있음을 선포한다. 이 세상의 어떠한 국가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관심과 사랑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나라는 없으며, 어떤 민족이라도 하나님의 능력이 미치지 못할 만큼 왜소한 나라도 없다. 따라서 선지자는 누구든지 하나님을 찾고 그분을 의지하며 그분께 소망을 둔다면 결단코 하나님의 은혜를 입게 될 것이라는 진리를 확증해 준다. 여기서 또한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그에 준하는 책임이 따르며, 그 책임을 잘 감당하지 못할 경우에는 하나님의 징계를 받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분명히 알게 된다.

  교훈: 하나님의 진정한 목표는 심판이 아니라 구원과 회복에 있다. 그분은 구원받은 자들이 누리는 행복을 보시며 우리보다 더욱 기뻐하실 것이다.

나의 삶 속으로
| 묵상 |
하나님 아버지는 그대의 어떤 모습을 보고 기뻐하시리라 생각합니까?
사실 우리에게는 하나님께 기쁨을 드릴 수 있는 조건이 없습니다. 인간으로서 하나님께 진정한 기쁨을 드린 사람이 있다면 예수님이 유일할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예수님을 일컬어 종종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께 기쁨을 드릴 수 있는 방법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영접하고 겸손하게 그분 안에 거하며 거저 주시는 구원과 복을 누리는 것 뿐입니다.
| 적용 |
사람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기쁨에 참여하기 위해 그대는 누구에게 어떤 일을 하기로 결심합니까?

    영감의 교훈
  하나님과 나누는 기쁨- “그대 자신이 오직 그대의 천부의 사랑으로써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안다면 그대는 죄 가운데서 고생하는 자들을 불쌍히 여길 것이다. 그리고 그대는 불행을 당한 자와 참회하는 자들을 질투하거나 비난하지 않을 것이다. 그대의 마음에서 이기심의 얼음이 녹아내리면 그대는 하나님과 같은 동정심을 가지게 되고 잃어버린 자를 구원하는 일에 하나님과 함께 기쁨을 나누게 될 것이다”(실물교훈, 210~211).

    기도
  우리의 구원과 행복을 우리보다 더 바라고 기뻐하시는 아버지, 다시는 죄로 인해 고통을 당하고 불순종하여 불행을 자초하지 않도록 저를 구원해 주시고 예수 안에 붙들어 주시옵소서.

다섯째날(목) 부정의에 대한 하나님의 해결책
5월 30일

  “여호와는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권능이 크시며 벌 받을 자를 결코 내버려두지 아니하시느니라 여호와의 길은 회오리바람과 광풍에 있고 구름은 그의 발의 티끌이로다”(나 1:3).

교사강해 5)
요나서와 같이 나훔은 니느웨성에 대한 예언이나 요나서는 요나의 예언으로 니느웨성이 구원받았음을 보여 주고 있다. 그러나 나훔은 하나님의 공의와 엄위를 보여주며, 니느웨성이 그들의 죄과로 인해 멸망 받을 것을 예언하는 것이다. 즉 니느웨의 철저한 굴욕과 치욕을 선포하는데 직접적인 목적이 있으며 더 나아가 잔인무도한 인간은 반드시 공의심판을 받아 보응 받게 된다는 사실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나훔서의 주제는 니느웨의 멸망에 대한 내용이다. 니느웨는 요나의 심판경고를 듣고서 회개함으로 용서를 받았으나 나중에 극도로 악해져서 결국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폐허가 될 것을 예언하였다. 이 멸망은 단순히 한도시의 종말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을 괴롭히는 원수들의 종말을 경고하는 뜻을 동반한다.

  나훔 1~3장을 읽어 보라. 어느 절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품성을 알게 되는가?
  여기서 배운 사실을 우리는 마지막 시대의 사건에 어떻게 적용해야 하는가?
  나훔의 예언은 니느웨를 대표로 세상 나라들에게 경고하는 하나님의 말씀이었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손이 앗시리아 제국을 향해 움직이는 모습을 보았다. 그는 앗시리아의 수도 니느웨가 곧 멸망하고 다시는 재건되지 못할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나훔은 하나님의 품성을 알았기 때문에 절대적인 확신을 가지고 말하였다. 하나님은 예언의 은사를 통하여 그에게 무슨 일이 벌어질지 보여 주셨다(나 1:1). 여호와는 범죄를 벌하지 않은 채 방치하지 않으실 것이다(나 1:3, 출 34:6~7).
  앗시리아 백성은 수많은 나라를 약탈했지만 그 탐욕은 만족을 몰랐다. 그들의 잔인성은 악명이 높았다. 하나님의 삭도로서 그들은 즐겨 그들의 이웃을 제거했다(사 7:20). 그러나 이제 그 삭도가 부러질 때가 되었다. 심판의 도구 역시 심판에서 제외되지 않았다. 지금 니느웨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지만, 예언적 권면은 아직 남아 있다. 이는 하나님의 공의가 더딘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아무것도 그것을 막지 못한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앞에서 보았던 것처럼 나훔 시대 이전에 하나님은 요나의 기별을 듣고 회개한 니느웨를 심판하지 않으셨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그 백성들은 옛 생활로 돌아갔다. 니느웨의 압제 아래 고통을 당했던 수많은 민족이 그 멸망의 소식을 듣고 크게 박수치며 기뻐할 것이었다. 앗시리아의 권세가 그 신들과 함께 깨지리라는 복음을 전하기 위해 전령이 올 것이다(사 52:7).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들은 다시 평화롭게 예배를 드릴 수 있을 것이다(나 1:15).

부가적용)
본 예언의 주요 메시지는 임박한 니느웨의 멸망이지만 그 결과, 니느웨 국인 앗수르로부터 압제받던 유다가 구원을 받게 되는 것을 가르치기도 함이다. 나훔은 자기 백성에 대해서는 심판이나 징벌을 한마디도 선포하지 않았고 오직 위로의 말만 하였다. 그는 여호와의 이름으로 선포하면서 ‘내가 전에는 너를 괴롭게 하였으나 다시는 너를 괴롭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 이제 네게 지운 그의 멍에를 내가 깨뜨리고 너의 결박을 끊으리라’(1:12,13)고 위로하였다. 우린 나훔서를 통하여 하나님의 백성을 심히 괴롭힌 자는 반드시 멸망하게 됨을 기억해야 하겠다. 막강한 니느웨는 왜 순식간에 무너진 것이며, 무슨 죄로 무너진 것인가? 물론 여러 가지 죄가 있겠지만 니느웨라는 나라가 침략과 전쟁과 살인을 일삼았기에 무너진 것이고, 나 2:2절에서 언급된 대로 택한 나라 택한 백성(포도나무)을 살인하고 약탈하였기에 무너진 것이고, 나 2:9절에서 언급된 대로 은금을 노략질하였기에 무너졌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니느웨 멸망이 오늘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이겠는가? 그것은 첫째 한 나라가 이웃 나라를 침략하고 전쟁을 일삼고 살인하여 한때 부강하게 되고, 그리하여 은금이 풍부하게 된다 할찌라도 반드시 망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한때 잘나갔던 니느웨의 멸망을 타산지석으로 삼아 침략, 전쟁, 살인을 일삼지 않고 이웃 나라를 도와주고 세우며 세계를 섬기는 나라와 민족이 되어야 할 것이다.

  교훈: 하나님의 공의는 더딘 것 같지만 반드시 실현된다. 그분은 죄악을 심판하며 자기를 의뢰하는 자를 구원하실 것이다.

나의 삶 속으로
| 묵상 |
그대는 멸망과 구원 사이에서 어느 편에 서 있습니까?
(왼쪽 페이지에 이어서) 여호와의 진노가 큰 만큼 그분의 자비는 더욱 은혜롭다. 하나님은 그분의 선하심을 갈망하는 자들을 보호하신다. 하나님은 그분을 신뢰하는 자들은 돌보시지만, 원수들은 홍수를 보내 어둠 속으로 몰아내신다(나1:8). 하나님은 이 모든 일의 배후에 계시며, 니느웨를 곧 심판하시기로 작정하셨다. 선지자는 하나님께 권능이 있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모든 피조물이 그분 앞에서 두려워 떤다. 그분은 죄악을 영원히 참지 않으시나, 그분을 의지하는 자들에게는 구주가 되신다. 중간 지대는 없다. 이편 아니면 저편을 선택해야 한다. 예수님은 “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라고 말씀하셨다(마 12:30).
| 적용 |
항상 하나님 편에 서기 위해서 그대는 어떤 믿음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까?

    영감의 교훈
  앗수르의 실물 교훈- “앗수르의 교만과 그 멸망은 세상 끝날까지 실물 교훈이 되어야 한다. 거만하고 교만함으로 그분을 반대하는 오늘의 세계 열국에게 하나님은 질문하신다. ‘너의 영화와 광대함이 에덴 모든 나무 중에 어떤 것과 같은고 그러나 네가 에덴 나무와 함께 지하에 내려갈 것이’(겔 31:18)라”(선지자와 왕, 386).

    기도
  세상에 잘못된 모든 것을 심판하시고 이 땅에 공의를 가져오시는 주님을 기다립니다. 주의 의로움이 나타나기를 소망하며 주의 편에 섭니다. 세상이 끝나는 날까지 주께 충성할 수 있는 견고한 믿음을 제게 주시옵소서.


여섯째날(금)
5월 31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무한하신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정확하게 열국과 계산하신다. 회개하도록 부르시며 당신의 은혜를 베푸시는 동안 이 계정은 열려 있으나 그 숫자가 하나님께서 정하신 액수에 달할 때 당신의 분노의 역사는 시작된다. 그때는 계산은 끝나고 하나님의 참으심도 그친다. 자비는 더 이상 그들을 위하여 호소하지 아니한다”(선지자와 왕, 364).
  “타락하지 않은 세상과 하늘 우주 앞에서 세상은 온 땅의 심판자, 그들이 정죄하고 십자가에 못 박은 바로 그분께 회계해야 한다. 어떠한 심판의 날이 되겠는가! 그날은 하나님의 복수의 큰 날이다. 그때에 그리스도께서는 빌라도의 심판대 앞에 서지 않으신다. 빌라도와 헤롯 그리고 그분을 모욕하고, 채찍질하고, 거절하고, 십자가에 못 박은 이들은 어린양의 진노를 느끼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깨닫게 될 것이다. 그들의 행위들의 그 진정한 성격이 그들 앞에 나타날 것이다”(목사와 복음교역자에게 보내는 증언, 132).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1. 스바냐 시대의 어떤 이들은 하나님과 동료 백성들에게 해서는 안 될 짓을 저질렀던 반면 어떤 이들은 그런 죄를 보고도 안주하였습니다. 그대는 하나님이 어떤 죄를 더 무겁게 여기신다고 생각합니까? 왜 그렇게 생각합니까?
  2. “사람이 자신의 무력함을 느끼고 구주의 공로에 완전히 의지하는 것보다 더욱 속절없이 보이는 것이 없지만 실상은 그보다 더 강력한 것도 없다.”는 증언의 말을 곱씹어 보십시오. ‘구주의 공로에 완전히 의지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우리는 이 말에서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는 구원의 위대한 진리에 대하여 어떤 사실을 깨닫게 됩니까? 왜 이 진리가 우리가 믿는 모든 것의 핵심입니까? 우리가 그분의 공로에 의지하지 않는다면 누구의 공로를 의지하게 될까요?
  3. 부하고 평안하게 사는 사람들은 왜 우리의 모든 소유가 하나님께 의존되어 있음을 잊기 쉬울까요? 어떻게 하면 우리가 그런 착각에서 우리를 지킬 수 있을까요?
  4. 하나님이 우리로 인하여 노래하며 기뻐한다는 말씀은 무슨 뜻일까요? 현재 우리의 절망적인 상황을 고려한다면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할까요?

댓글목록

josephlso님의 댓글

josephlso 작성일

감사합니다.  목사님

최성현님의 댓글

최성현 작성일

다시 글을 주시게 되어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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