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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8과 하나님의 선하심을 신뢰함(하박국)[교사들을위한강해식과정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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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조춘호 작성일13-05-17 20:49 조회4,56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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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제 8과 하나님의 선하심을 신뢰함

안식일 일몰:오후 7시 42분
5월 25일

    기억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 세상에 가득함이
니라”(합 2:14).

    연구범위: 합 1:1~17, 합 2:2~4, 갈 3:11, 히 11:1~13, 합 3장, 빌 4:11.

    중심 사상: 비극이 발생하는 이유를 항상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우리는 무슨 일이든 하나님을 신뢰해야 한다.

도입)
찬송가 가사 중에 여러 편을 쓴 스파포드(Horatio Gates Spafford, 1828-1888)가 있다. 그는 1828년 10월 20일 뉴욕주의 노드트로이(Northtroy)에서 태어나 변호사가 되었다. 1856년 뉴욕에서 시카고로 이주해온 그는 유망한 젊은 엘리트로 변호사 개업을 하면서 대학에서 강의를 했고 시카고 장로교회에서 평신도로 온갖 충성을 다했다. 그러나 그에게 겹치는 재난이 닥쳐왔다. 1871년 미시간 호반에 막대한 돈을 투자하여 호화 별장을 지었는데 시카고 대 화재 때 모두 날려버렸다. 상심한 아내와 네 딸들과 같이 유럽으로 위로 여행을 떠나기로 결정했으나 공교롭게도 화재 때 자신이 봉사하고 법정관리를 맡은 무디교회도 불타는 바람에 잔무처리로 가족만 떠나보내게 되었다. 1873년 11월 15일, 프랑스 초호화여객선 빌 드 아브르호는 뉴욕항을 예정대로 출발했다. 일주일쯤 항해하다가 22일 새벽 2시 모든 선객들이 잠들어 있는 시각에 영국의 철선 오션호와 정면충돌하여 30분만에 침몰되고 말았다. 226명의 희생자를 낸 후 구조된 승객들이 웨일즈에 도착했는데 스파포드의 가족은 부인만 살고 네 딸은 모두 익사하였다. 연속적인 재난에 망연자실할 수밖에 없었지만 그는 곧 신앙으로 모든 시련을 극복했다. 그리고 몇 편의 작시를 하던 중 많은 성도들이 감동적으로 부르는 “내 평생에 가는 길 순탄하여 늘 잔잔한 강 같든지...”의 찬송시를 작사했다. 안일과 평탄한 가운데서 감사와 찬양은 누구나 가능하다. 그러나 성경에서의 신앙적 인물들은 한결 같이 위기와 절망 그리고 온갖 고난 가운데 감사와 찬양을 끊지 아니했다. 시편 가운데 가장 긴 119편은 고난 중에 감사와 찬양을 고백한 대표적인 것으로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 “고난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등등 많은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서론)
하박국은 이 세상에 불의가 가득한 것에 대한 아픔을 느꼈다. 그러나 더 큰 아픔은 그 불의한 세상 속에 불의한 자가 득세하는 것을 보고 왜 하나님께서 그 불의한 사람들에게 아무런 조처를 취하지 않으시고 심판하지 않으시는가에 대하여 항변하고 있다. 저들은 죄를 밥 먹듯 하는데도 더 잘살고 더 흥하는데 왜 하나님은 그들을 가만히 보고만 있는가 하는 의문 때문에 속이 상해 있다. 그러나 하박국서는 하박국의 절망으로부터 궁극적으로는 마침내 하나님을 찬송하는 찬송의 과정이 나타나 있다. 그의 깊은 절망에서 결국 찬양으로 나아간 이야기인 것이다. 하박국 선지자의 경우 악인으로부터 많은 공격을 받으며 자신이 가진 모든 소유 모두 빼앗긴 후에도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인하여 즐거워하며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라고 찬양했다.

  어떤 목사가 인생의 역경 중에도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내용으로 설교를 하자, 한 여인이 울먹이며 이렇게 물었다. “목사님, 하나밖에 없는 제 아들이 죽던 날 하나님은 어디에 계셨던 것입니까?” 그녀의 얼굴에서 깊은 슬픔을 읽은 목사는 잠시 동안 침묵하다가 이렇게 대답했다. “하나님은 그분의 아들이 우리를 영원한 사망에서 구원하기 위해 죽으셨던 날에 계셨던 같은 장소에 계셨습니다.”
  하박국은 우리처럼 부정의와 폭력과 죄악을 목격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신의 약속을 믿으라고 요구하면서 그런 모든 일에 대해서는 침묵하시는 것처럼 보였다.
  선지자는 살아 있는 동안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는 것을 보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믿을 수 있었다. 하박국서는 하나님께 대한 불평으로 시작한다. 그러나 마지막에는 성경에서 가장 아름다운 노래로 마친다. 우리는 하박국처럼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 세상에 가득”하게 될 날을 믿음을 가지고 기다릴 필요가 있다.

  결론 공의는 삶의 중대한 요소로서 항상 사랑과 균형을 이루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목적에 관한 성경의 참된 지식만이 비극이나 지연된 응답에도 불구하고 우리로 하여금 그분을 신뢰하게 합니다.

첫째날(일)
5월 19일
당황한 선지자

  “여호와여 내가 부르짖어도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니 어느 때까지리이까 내가 강포로 말미암아 외쳐도 주께서 구원하지 아니하시나이다”(합 1:2).

교사강해 1)
하박국은 하나님이 자신의 기도를 듣지도 않고 구원치도 않는다고 생각했다. 우리도 기도할 때 하나님의 아무런 응답이 없는 기도를 만날 때가 있다. 우리는 하나님께 기도하면 항상 하나님은 우리가 바라는 대로 우리에게 사랑을 베풀어주시고 우리를 구원해 주시는 분으로 생각하는데 익숙해 있다. 하나님은 우리의 생각이 정한 대로 행하시는 하나님이라고 단정한다. 그러나 하박국은 하나님은 자신의 기도를 듣지도 않으시고 구원치도 않으신다고 말한다. 하박국 선지자가 왜 하나님은 듣지도 않으시고 구원치도 않는다고 절규하고 있는가? 하나님이 듣지도 않고 구원치도 않는다는 것은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이 침묵하신다는 것을 뜻한다. 왜 하나님은 이처럼 긴박한 상황에서 침묵하고 계신가? 그런데 하박국이 하나님의 침묵을 원망하면서 부르짖은 까닭은 1장 1절에 "선지자 하박국이 묵시로 받은 경고라"라는 말씀을 잠시 망각했기 때문이다. 경고장은 그 자체가 하나님이 우리에게 관심이 있어서 그 관심의 표현으로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박국의 생각처럼 하나님이 침묵하시는 것은 아니다. '하박국'은 하나님의 침묵이 아니라 분명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이 경고장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셔서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들려는 끊임없는 사랑을, 하나님의 강한 의지를 보여주신다. 이것은 하나님의 지극한 관심이었지만 하박국은 이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하박국 1장을 읽어 보라. 선지자는 하나님께 어떤 질문들을 드렸는가? 물론 그때와 지금의 상황이 다르지만, 우리도 얼마나 자주 그와 같은 질문을 하는가?
  하박국은 독특한 선지자이다. 그는 하나님을 대신하여 백성들에게 이야기하지 않고 오히려 백성들에 대하여 하나님께 이야기한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목적을 이해하기 위해 고전하며 그의 당혹스러움을 이렇게 절규한다.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리이까?” 이 질문은 성경에 등장하는 전형적인 한탄이다(시 13:1, 렘 12:4). 그 말은 화자가 구원이 필요한 위기 상황 가운데 있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선지자가 구조의 필요성을 인식할 만큼 당시 사회는 편만한 폭력의 위험성에 노출되어 있었다. ‘강포’ 또는 ‘폭력’을 뜻하는 히브리어 ‘하마스(hamas)’는 하박국서에서 6번이나 등장한다. 이 단어는 다른 이에게 육체적 또는 정신적으로 상해를 입히는 행위를 암시한다(창 6:11).
  선지자로서 하박국은 하나님이 얼마나 정의를 사랑하며 압제를 미워하시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왜 하나님이 부정의가 지속되도록 허용하시는지를 알고 싶었다. 그는 사방에서 폭력과 범법을 목격했다. 그리고 악인이 의인을 이기는 것처럼 보였다. 권력을 가진 자들이 정의를 왜곡시켰다. 그것은 아모스 시대에도 그랬고(암 2:6~8), 오늘날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의 대답은 그분이 세운 미래의 계획을 보여 준다. 여호와는 바벨론 군대를 이용하여 자신의 백성들을 벌하실 것이었다. 이 사실을 알고 선지자는 놀랐다. 그는 하나님이 그와 같이 무자비한 군대를 동원하여 유다를 징계하리라 예상하지 못했다. 합 1:8을 보면 바벨론의 기병대는 표범과 이리와 독수리로 비유된다. 이 세 포식자들은 빠른 움직임과 강한 힘으로 먹잇감의 목숨을 잔인하게 끊는다.

부가적용)
이스라엘의 죄악을 보고 계시는 하나님에 대하여 절규에 가까운 하박국의 기도와 탄식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응답하셨다. 그러나 하나님계서는 하박국의 생각과는 전혀 다른 방법으로 그 문제를 해결하고 계셨다. 그것은 놀랍게도 하나님께서 아주 사납고 무서운 갈대아인을 일으켜 유다 백성들의 악행을 심판하시는 것이었다. 자신의 힘으로 자기 신을 삼는 강하고 힘센 갈대아인 스스로가 아닌 하나님께서 유다에 대한 심판의 도구로서 포악하고 성급하며 잔혹한 그들을 사용하신다는 것이다. 선지자의 기도는 단순한 유다의 회개와 구원이었지만 하나님의 응답은 기도의 범주를 넘어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 민족까지 움직여 유다의 죄악을 다루고 계심을 보여준다. 기도는 두드리는 대로 이루어지는 도깨비 방망이가 아니다. 하나님의 역사를 내 기대치로만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기도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는 중요한 방법 중 하나이지만, 그 응답은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과 권세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할 때 우리의 생각이 아닌 하나님으로부터 위대한 일을 행하기를 기대하고 바라보아야 한다.

  교훈: 선지자 하박국은 불의한 유다 백성을 더 불의한 바벨론 백성을 사용하여 심판하시겠다는 하나님의 계획을 이해할 수 없었다.

나의 삶 속으로
| 묵상 |
세상에서 악이 승리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왼쪽 페이지에 이어서) 바벨론의 무자비와 오만은 일말의 책임을 인정한다든지, 반성의 기회를 준다든지, 피해를 보상하는 일은 없었다. 그것은 생명의 가장 근본적인 질서도 묵살해 버렸다. 하나님은 바벨론 군대를 “분노의 막대기”(사 10:5)로 사용하겠다고 말씀하셨다. 징벌은 하박국의 시대에 있을 예정이었다(합 1:5). 이 모든 상황은 하나님의 정의에 대하여 더 까다로운 질문을 일으킨다.

| 적용 |
악이 승리하는 것처럼 보이는 세상에서 우리는 어떤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까?

    영감의 교훈
  하나님의 채찍 바벨론- “그때에 장래에 대하여 의문을 가진 자들의 생전에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통치하는 나라들의 정세를 기이하게 조절하셔서 바벨론으로 하여금 통치권을 계승하게 하실 것이었다. 이 두렵고 무서운 갈대아인들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채찍으로서 유다 나라를 돌연히 습격할 것이었다. 유다의 방백들과 백성 중 가장 똑똑한 사람들은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갈 것이며 유다의 성읍들과 촌락들과 경작지들은 황폐될 것이고 아무것도 남지 않을 것이었다”(선지자와 왕, 385~386)

    기도
  아버지는 저의 억울한 심정을 이해하실 줄 믿습니다. 이 땅에서 정의를 찾아볼 수 없어 아버지께 호소합니다. 저를 신원하여 주옵소서. 의로우신 아버지께 모든 것을 맡깁니다.

둘째날(월) 믿음으로 살리라
5월 20일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나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합 2:4).

교사강해 2)
하박국의 가슴을 터지게 하였던 유다 백성들의 죄악은 겁탈과 강포였다. 하박국은 자국의 백성들에게 이런 죄악이 난무한 것에 대한 깊은 회의감이 들면서 하나님께서 징벌하지 않으심으로 하나님의 율법이 해이해지는 것을 가슴 아파하였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유다를 교육하시기 위해 더 무섭게 잔인하고 강포한 자들인 바벨론을 불러 자국의 백성들을 심판하시고 교육하시겠다고 하셨다. 처음에는 이것이 합당한 듯 보였으나 자신의 백성들이 약탈당하고 노략질 당하는 모습을 미리 공개하여 말씀하시자, 자국의 백성들이 불쌍한 생각이 들자, 차마 악을 보지 못하시는 이신 하나님께서 강포한 자를 치기 위해 더 무섭게 강포를 행하는 자들인 바벨론을 불러들이는 것에 대해 하박국은 이해할 수 없다고 항변하였다. “여호와여 주께서 심판하기 위하여 그를 두셨나이다 반석이시여 주께서 경계하기 위하여 그를 세우셨나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내 하박국은 걱정이 생겼다. 교육을 하신다고 바벨론을 불러 들였지만 그러나 자국의 백성들이 이 무섭고 긍휼과 자비가 없는 무자비한 바벨론에 의해 모두 멸망을 당하지나 않을까? 하는 염려가 생겼고 이 유다 자국의 백성들을 교육하고 경계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백성들이 이 때문에 모두 멸망을 당하지나 않을까? 하는 염려와 자국의 백성들에게 가지는 불쌍한 연민으로 인해 하박국은 하나님께 이일에 대하여 또 다른 질문을 던졌다. 악을 차마보지 못하시는 하나님께서 어찌 자신들보다 더 악한 자들인 바벨론을 사용하여 쓰시고 계시냐고 하박국은 묻고 있는 것이다.

  합 1:12~17에서 하박국의 질문에 대한 하나님의 답변은 의문을 해소하기는커녕 의문을 더 키웠다. 의로우신 하나님이 악인들을 사용하여 그들보다 의로운 자들을 벌하실 수 있는가? 하박국은 하나님의 정의에 의문을 제기하였다.
  하박국은 자기 백성들의 도덕적 퇴보뿐 아니라 그들이 그들보다 더 악한 나라에 의해 심판을 받아야 한다는 사실 때문에 당황했다. 유다의 죄는 선지자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따져 봐도 자기 백성들은 특히 그들 가운데 있는 의인들은 분명 이방인 바벨론 사람만큼 악하지는 않았다.
  합 2:2~4을 읽어 보라. 어떤 소망이 제시되어 있는가? 이 말씀은 성경에서 가장 중요한 본문 가운데 하나이다. 특히 4절은 복음의 진수요 종교개혁을 일으킨 말씀의 기원을 밝힌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의를 받는다. 즉 하나님의 의가 우리의 것으로 간주된다. 이것이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이다.
  4절은 구원의 길과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라는 성경적 가르침을 요약해 놓은 진술이다. 신약의 기자들은 이 말씀을 어떻게 이용하였는가?(롬 1:17, 갈 3:11, 히 10:38) 시련의 와중에 그리고 죄악, 정의 그리고 구원에 대한 의문이 해소되지 않는 상황에서도 합 2:4은 믿음을 가진 자들과 교만한 자들을 날카롭게 대조한다. 각 집단의 행위는 그들의 운명을 결정한다. 교만한 자들이 멸망할 때에 의로운 자들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 것이었다. ‘믿음’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에무나’는 ‘성실함’, ‘일관성’, ‘믿음직함’이라는 의미에 가깝다. 믿음으로 사는 자는 그의 행위로 구원을 얻지 않는다. 행위는 그가 믿음으로 살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 줄 뿐이다. 그러나 그의 믿음은 그의 행위로 나타난다. 그래서 그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약속받는다.

부가적용)
하박국이 내놓은 질문은 신학적으로 매우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이다. 악한 자들인 자국의 백성들을 형벌하기 위해 더 악한 자들을 사용하시는 것이 하나님께서 악을 차마 보지 못하시는 분의 할 일이신가? 하는 것이다. 이것에 대한 올바른 대답이 없다면 신학적인 딜레마가 아닐 수가 없는 것이다. 이것을 하박국이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은 매우 중요하고 난해한  질문이었고 우리의 시대에도 매우 알고 싶은 해답이 아닐 수 없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동네에서 힘깨나 쓰고 아무도 제어할 수 없는 깡패나 건달들이 있다. 누구나 무서워서 저들을 피해 다닌다. 속으로는 저 놈을 누가 손 좀 봐서 혼내 줄 사람없나? 라고 말하지만 아무도 그에게 함부로 대하지 못하는 건달이나 깡패가 있다. 그런데 이런 건달이나 깡패는 그보다 더 무서운 깡패나 건달을 만나야 제압이 되는 것이다. 다른 사람에게 폭력을 사용하는 사람들은 더 무서운 폭력을 가진 자에게만 압도당하여 굴복하게 되는 것이다. 유다가 자신들의 겁탈과 강포를 행하는 자신들의 죄된 행위를 돌아보게 된 것은 자국의 백성들에게 저들보다 더 겁탈과 강포를 행하는 더 무서운 깡패 같은 바벨론, 자신의 힘을 믿고 사는 이방나라의 무자비함을 통해서 그 자신들의 죄악을 돌아보도록 하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악을 용인할 수 없지만 자신의 힘을 의지하고 사는 강포한 자들을 처벌하는 것은 더 큰 강포한 힘을 가진 자들에 의하여 멸망을 받게 하심으로 칼은 칼로 망한다는 진실을 보여준 것이다. 희미하게나마 이 사실을 깨달은 하박국은 믿음이 생기기 시작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경영에 대하여......

  교훈: 하나님의 계획을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하박국이 깨닫게 된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어떤 상황에서도 의인은 믿음으로 구원을 받게 된다는 진리였다.

나의 삶 속으로
| 묵상 |
그대에게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믿음이란 보통 비현실적인 것처럼 보입니다.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여기는 자기 체면처럼 보이기도 하고, 자신과 연관성이 없는 사실들을 끼워 맞추는 지나친 주관화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심지어 어떤 근거도 없이 자신의 삶이 언젠가 나아지리라는 막연한 긍정으로 비춰지기도 합니다. 맞습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의 눈에게는 그렇게 보일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불합리한 세상에서 기뻐하고 감사하며 살아갈 수 있는 비결이 바로 믿음에 있습니다. 왜냐하면 다른 것은 몰라도 하나님이 분명 계시기 때문입니다.

| 적용 |
믿음의 이유를 묻는 사람에게 그대는 자신의 믿음을 어떻게 설명하겠습니까?

    영감의 교훈
  믿음이 의로 간주되는 까닭- “(죄인이) 의에 이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오직 믿음을 통해서이다. 그는 믿음에 의해서 그리스도의 공로를 하나님께 가져갈 수 있으며, 하나님은 자기 아들의 순종을 죄인의 계정에 두신다. 인간이 실패한 자리에 그리스도의 의를 받아들이시고 하나님께서는 회개하고 믿는 영혼을 받으실 뿐 아니라 용서하시고 의롭게 하시며 그를 마치 의인인 것처럼 취급하시고 당신의 아들을 사랑하신 것처럼 그를 사랑하신다”(가려 뽑은 기별 1권, 367).

    기도
  아버지, 제게 믿음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많은 사람이 삶을 포기합니다. 아니면 희망없이 살아갑니다. 그러나 저는 아무리 현실이 어려워도 예수님을 믿을 수 있어 즐겁고 감사합니다. 이 믿음으로 영원한 생명과 구원을 붙잡습니다.

셋째날(화) 세상에 가득하리라(합 2장)
5월 21일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 세상에 가득함이니라”(합2:14).

교사강해 3)
하나님께서 바벨론에 대하여 "그들은 그 힘으로 자기 신을 삼는 자라 이에 바람같이 급히 몰아 지나치게 행하여 득죄하리라"(2:11절) 하셨다. 사27:7-9절을 보라 “주께서 그 백성을 치셨은들 그 백성을 친 자들을 치심과 같았겠으며 백성이 살륙을 당하였은들 백성을 도륙한 자의 살륙을 당함과 같았겠느냐 사27:8 주께서 백성을 적당하게 견책하사 쫓아내실 때에 동풍 부는 날에 폭풍으로 그들을 옮기셨느니라” 하나님께서 비록 바벨론에게 이스라엘이 살육을 당하였지만 친자와 같은 유다와 바벨론에게는 그 차이가 있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적당하게 견책하셨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만일 하나님께서 무자비하게 이스라엘을 멸망시키려 하셨다면 이스라엘은 완전한 멸망을 당하였을 것이나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때 당신의 백성들을 치셨을 때에 적당한 선에서 하셨을 뿐만 아니라 당신의 자녀들을 지나치게 친 바벨론의 죄를 물어 더 크게 징벌하시는 모습을 보게 된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에게 시련을 주시는 목적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한다.

  하박국이 1:17에서 제기한 질문에 대하여 하나님은 2장에서 거만한 압제자들을 조롱하는 노래의 형식으로 답을 주신다. 적어도 다섯 가지의 저주가 바벨론의 멸망이 확실하다는 기별을 확인해 준다(합 2:6, 9, 12, 15, 19). 악인들은 희생자들에게 가했던 일을 그대로 당할 것이다. 그들은 심은 대로 거둘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기 때문이다(갈 6:7).
  압제자들은 결국 하나님께 심판을 받을 것이다. 반면 의인들은 이생에서 어떤 일을 당하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영생을 약속으로 받는다. 종말의 때에 신실한 남은 무리를 묘사하면서 계시록은 “성도들의 인내”(계 14:12)라는 표현을 썼다. 비록 재림의 날이 되어야 볼 수 있겠지만 의인들은 끈질기게 하나님의 개입을 기다릴 것이다.
  히 11:1~13을 읽어 보라. 오늘날 우리가 하박국이 씨름했던 동일한 질문을 가지고 씨름할 때, 이 말씀은 우리에게 어떤 도움을 주는가? 하박국의 질문에 대한 하나님의 궁극적 해답은 함께해 주시리라는 약속이었다. 하나님의 임재를 믿으라. 그리고 겉으로 보기에 상황이 반대로 흘러간다 할지라도 그분의 심판을 확신하라. 이것이 하박국서의 기별이며, 모든 성경 계시의 기별이다. 예언적 믿음이란 여호와에 대한 믿음이자 그분의 변치 않는 품성에 대한 신뢰이다.
  “극심한 시련의 때에 하박국과 모든 거룩하고 정직한 사람들을 굳게 했던 믿음은 오늘날 하나님의 백성을 유지시키는 믿음과 동일한 것이다. 가장 어두운 시간과 가장 험악한 환경 아래서도 그리스도인들은 자기의 영혼을 모든 빛과 능력의 근원에 머물러 있게 할 수 있다. 매일매일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통하여 그의 소망과 용기는 새롭게 될 수 있다”(선지자와 왕, 386~387).

부가적용)
자식이 부모의 마음과 뜻을 안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미련한 자식은 부모의 채찍의 의미를 알지 못하고 섭섭하여 반항하지만, 지혜로운 자식은 부모의 꾸지람과 징계의 목적을 깨닫고 새로운 마음 다짐으로 변화 되는 것이다. 우리는 무엇보다 하나님의 마음, 하나님의 징계의 목적, 즉 하나님께서 우리를 견책하는 그 중심의 마음을 깨달아야 한다.  징계(懲戒)라는 것은 그들을 멸하기 위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책망을 통하여 잘못된 행동을 바로잡고 수정하려는 목적에 있는 것이다. 특히 사랑하는 자에게는 반드시 징계와 꾸지람을 하는 것이며, 만약에 징계하지 않는 자식이라면 그는 사생아일 뿐이지 참 아들이 아닐 것이다(히12:7-8). 하나님께서 자기의 백성, 이스라엘을 징벌하신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 때리심, 그 채찍, 그 징벌은 그들의 원수를 징벌하는 것과는 엄청난 차이가 있었던 것이다. 그 백성을 때리심은 상처와 고통으로 몸부림치게 하는 것이지만 그들을 학대했던 원수들을 징벌하실 때에는 완전히 멸망의 형벌, 완전히 역사 가운데서 사라지게 하는 심판이었던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중심을 깨닫고 이해하는 것이 절대로 필요하다. 하나님이 나에게 원하시는 것, 나를 부르신 목적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깨닫고 분별해야 한다. 혹시 우리 자신이 징계 중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중심을 이해해야 한다. 징계의 목적은 멸망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바르게 잡아주려는 교정(矯正)에 있고 더 성장하는 모습을 보기 위한 것임을 깨달아야 한다. 그러므로 지각없는 어리석은 백성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교훈: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결국 눈으로 보이는 것에 대한 확신이 아니라 그분의 품성에 대한 신뢰이다.

나의 삶 속으로
| 묵상 |
그대는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 세상에 가득하게 될 날을 얼마나 기다립니까?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서 실현되지 않고 있습니다. 사랑과 공의의 하나님이 우주의 주인이고 통치자라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더구나 그분을 믿는 백성들이 세상의 불행에서 보호받지 못하는 모습을 보고 사람들은 그 같은 신은 없다고 조롱하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확신합니다. 만약 그분이 없다면 우리에게 사랑과 공의에 대한 갈망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것이 가장 소중하고 바르며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기에 우리는 하나님이 마침내 승리하시리라 믿고 기다립니다. 바로 그 승리의 날 온 세상이 하나님을 인정하게 될 것입니다.

| 적용 |
그대 주위의 작은 세계가 하나님의 영광을 인정하게 하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영감의 교훈
  하나님을 굳게 신뢰하라- “우리에게는 싸워야 할 치명적인 감정의 연약성이 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한다면, 그분께서는 결코 우리를 떠나시거나 우리를 버리지 않으실 것이다. 어떠한 환경 속에서도 우리는 하나님을 굳게 신뢰하여야 하며, 그분께서는 우리가 성실성을 보존하는 한 우리를 버리거나 떠나지 않으실 것이다”(교회증언 3권, 292~293).

    기도
  아버지, 저는 아버지의 뜻을 제 마음과 삶 속에 받아 들입니다. 비록 세상은 그것을 부인하고 있지만, 저는 아버지의 사랑과 공의를 제 삶을 통해 드러내기를 원합니다. 온 세상이 아버지의 영광을 인정할 때까지 저를 도구로 사용해 주시옵소서.

넷째날(수)
5월 22일
하나님의 명성을 기억함

  “주께서 주의 백성을 구원하시려고, 기름 부음 받은 자를 구원하시려고 나오사 악인의 집의 머리를 치시며 그 기초를 바닥까지 드러내셨나이다(셀라)”(합 3:13).

교사강해 4)
하박국 1장은 세상의 모순과 하나님의 무관심으로 고민하는 인간들에게 위로와 격려를 보여주는 장이다. 하박국의 그런 탄식과 절규를 보며 '그런 절규는 나의 절규이고 나의 탄식인데 선지자도 그런 탄식을 하고 있구나 선지자도 나와 같은 인간적인 성정이 있고 여러 고민 때문에 갈등을 겪는구나 나의 고민이 곧 선지자의 고민이었구나' '라고 생각하면서 1장을 통해서 비로소 위로를 받게된다. 그런데 하박국 2장은 신앙의 본질을 보여준다. 믿음의 의미를 알면 정한 때를 알게 되고, 잠잠함의 의미를 알면 하나님을 더 가까이 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하박국 3장을 통해 믿음의 본질을 이해할 때 하나님이 어떤 분으로 보이시는가를 깨닫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3장에 묘사된 하나님은 단순히 하나님의 실체를 보여준 것이 아니라 믿음을 위한 성도의 기도이며 찬양이다. 이러한 기도와 찬양이 있기까지는 반드시 2장을 거쳐야 했다. 그렇다면 우리들의 현재 모습은 지금 하박국의 몇 장에 와 는가? 나의 문제와 세상의 모순에 연연하고 하나님이 침묵하신다고 느끼는 1장의 수준에 와 있는가? 아니면 하나님의 정한 때를 지금 실감하며 오늘을 믿음으로 극복하며 하나님 앞에 잠잠하라는 말씀의 의미를 깨달은 2장의 수준에 와 있는가? 아니면 그 수준을 뛰어넘어 3장에 묘사된 하나님을 바라보는 수준에 와 있는가?

  하박국 3장을 읽어 보라. 여기서 하박국은 무엇을 하고 있는가? 만만치 않은 상황과 어려운 문제를 앞두고 왜 그것이 그토록 중요한가? 하박국은 기도 중에 하나님의 방법을 따르기로 한 그의 마음을 노래로 표현하였다(합 3:19). 그는 심판이 시작되면 자비를 기억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그는 하나님의 과거 행적을 상기하면서 지금 구원을 베풀어 달라고 기도한다. 그는 두 시대 사이에서 한쪽 눈으로는 출애굽의 사건을 응시하고 다른 한쪽 눈으로는 다가올 여호와의 날을 바라본다. 그는 현 상황에서 하나님의 권능이 나타나기를 간절히 바란다.
  하박국 3장의 찬송은 이집트의 종살이에서 이스라엘을 건져 낸 하나님의 구원을 시적으로 묘사한다. 출애굽 때에 있었던 일은 큰 심판의 전조이다. 경건한 자들은 여호와의 날로 인해 염려해서는 안 된다. 대신 그들은 소망 중에 기다리고 인내하며 기뻐해야 한다.
이 찬송은 하나님의 권능과 영광 그리고 그의 승리를 송축한다. 여호와는 온 땅을 통치하는 분으로 묘사된다. 그분의 영광은 일출의 빛과 비교된다(합 3:4).
  하나님은 백성들을 압제했던 나라를 심판하시는 반면 그의 백성들은 “구원의 병거”(합 3:8)로 구원하실 것이다. 표면적으로는 하나님의 권능이 항상 보이지는 않지만, 믿음의 사람은 무슨 일이 있든지 하나님이 함께 계심을 안다.
  하박국은 하나님이 땅에 의를 세우고 온 세상을 그분의 영광으로 가득 채우실 때, 하나님의 구원을 바라라고 호소한다. 여호와께 찬양을 드림으로써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과거의 행적을 묵상하고 영광스런 미래에 대하여 소망을 갖도록 서로에게 용기를 준다(엡 5:19~20, 골 3:16). 하박국은 우리가 어떻게 비전을 가지고 인내하며 살아갈 수 있는지 모본을 보여 주었다.

부가적용)
하나님을 원망하던 1장의 하박국과 여호와를 부르짖는 3장의 하박국은 다른 사람이었던가? 아니면 1장의 하나님과 3장의 하나님은 다른 하나님이었는가? 1장의 환경과 3장의 환경은 다른 환경이었는가? 아니다. 같은 하나님이고 같은 하박국 그리고 같은 환경이다. 3장의 이런 기도를 하는 상황에서도 여전히 바벨론 군대가 쳐들어오고 있다. 그리고 유다백성은 바벨론의 큰 힘에 곧 무릎을 꿇어야 하는 상황이다. 환경도 그대로이고 하나님도 달라진 것도 없고 하박국 자신도 여전히 하나님의 명을 전하는 선지자의 신분일 뿐이다. 달라진 거라곤 그저 하박국의 시각의 변화뿐이다. 그런데 3장과 1장에 나타나는 하나님에 관한 묘사가 왜 이토록 현저하게 다른가? 인간에게 나타난 심리적인 갈등이나 현실적인 갈등은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이 문제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살면서 때로는 불안해하고 때로는 행복을 느낀다. 행복할 때는 하나님이 내가 원하는 것을 다 들어주시니까 그 만족감에 행복을 느끼고, 불행하고 슬플 때는 하나님이 내 바람을 묵과해서 불행하게 느끼는 것이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변함이 없으시다. 언제나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 옆에 계시고 우리의 좋은 형편을 원하신다. 하나님은 어제도 사랑, 오늘도 사랑, 내일도 사랑, 여전히 사랑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분이시다.

  교훈: 큰 심판을 앞두고 하박국은 찬양을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을 노래하며, 그의 믿음과 소망을 표현하였다.

나의 삶 속으로
| 묵상 |
과거에 하나님은 그대의 삶을 어떻게 인도하셨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믿을 수 있는 이유는 비단 성경 때문만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실제 우리에게 나타나셨고 도움과 구원을 베푸셨습니다. 가장 불우하고 암울한 시절에 그대에게 소망을 주었던 분이 누구였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그대의 가정이 불행에서 극적으로 탈출할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이었습니까? 그대가 오늘날 하나님을 믿고 심령의 평안과 안정을 누리기까지 어떤 변화를 경험했는지 돌아보십시오. 앞으로 닥칠 일이 얼마나 클지 알 수 없지만 우리가 그분의 사랑과 은혜와 구원 안에 있다는 사실만큼은 확신할 수 있습니다.
| 적용 |
과거에 경험한 하나님의 은혜와 구원은 그대의 현재와 미래에 어떤 도움이 됩니까?

    영감의 교훈
  언제나 사용할 수 있는 무기- “노래는 우리가 실망을 물리치기 위하여 언제나 사용할 수 있는 무기이다. 우리가 그와 같이 구주의 임재의 햇빛을 받고자 마음을 열 때, 우리는 건강과 그분의 축복을 받게 될 것이다”(치료봉사, 294).

    기도
  아버지, 저는 믿음이 약하여 쉽게 흔들리고 염려합니다. 그때마다 하나님의 사랑과 위대하심을 생각할 수 있도록 도와주옵소서. 잠시 흔들릴지라도 결코 넘어지지 않게 하시고 가녀린 믿음이라도 끝까지 붙잡고 승리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다섯째날(목) 하나님은 우리의 힘이시라
5월 23일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를 나의 높은 곳으로 다니게 하시리로다…”(합 3:17~19).

교사강해 5)
수시로 바뀌는 것이 우리의 감정이다. 불만이 많아서 투덜대다가도 조금이라도 나에게 유익이 있으면 기분이 좋아서 하나님을 최고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문제가 아니라 인간이 문제이다. 인간은 행복과 불행을 혼자서 생각하고 판단한다. 기분이 좋으면 하나님은 좋은 하나님이고 기분이 나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하나님을 원망한다. 우리의 감정과 기분에 따라 잘못된 각도에서 인생을 바라보면 전혀 다른 시각으로 하나님을 볼 수 있다. 우리는 하나님과 바벨론의 힘을 결코 비교할 수 없다. 어떻게 그 둘을 비교할 수 있겠는가? 바벨론을 하나님과 비교하는 것은 우주를 창조하시고 통치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모독이다. 강과 바다와 해와 달 그 모든 것이 다 그 수중에 있다. 그런데도 그 위대하신 하나님과 인간 바벨론을 감히 인간 자신이 비교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진정 위대하신 모습을 자신의 여건에서 생각하는 한계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수단이 아니라 목표이다. 그분은 단순히 우리를 돕는 분이 아니라 정말로 우리를 책임져주시는 위대한 승리자이시다. 그런데도 하나님과 바벨론을 비교하기를 좋아한다. 하박국은 바벨론을 크게 생각한 나머지 너무 두려워서 하나님께 왜 침묵하느냐고 탄식했다. 그리고 바벨론과 하나님을 비교했다.

  여기서 선지자의 태도는 어떤 면에서 매우 바람직한가? 우리도 어떻게 하면 그와 같은 태도를 기를 수 있겠는가?(빌 4:11 참고)
  하박국서는 하나님의 권능과 선하심에 대한 선지자의 반응으로 끝을 맺는다(합 3:16~19). 원수의 공격이 온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구원 사역에 대한 새로운 관점이 하박국에게 용기를 주었다. 적의 침략으로 포도나무와 곡식과 가축들과 함께 팔레스타인에서 최상품으로 인정을 받는 무화과나무와 감람나무가 사라질 것이다. 그러나 선지자의 확고한 믿음은 사라지지 않았다. 왜냐하면 살아 계신 여호와가 마음속에 그려져 있기 때문이다.
  과거의 경험에 기초하여 하박국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성실성을 알고 있었다. 그가 하나님의 목적 앞에 굴복한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합 3:16~19). 상황이 내키지 않고, 전혀 희망이 없어 보일지라도 선지자는 여호와를 신뢰하고 그분의 선하심을 의지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래서 즉각적인 구원의 징조가 보이지 않을지라도 믿음으로 기다렸다. 그는 하나님과의 대화와 찬송을 통해 구속주에 대한 더 깊은 믿음으로 살아가도록 모든 시대의 신자들을 가르친 선지자였다. 그는 모본을 통하여 경건한 자들이 하나님께 대화하며, 역경의 때에 그들의 충성을 시험하고, 여호와께 소망을 두고 그분을 찬양하도록 격려하였다.

부가적용)
내 앞에 놓인 현실을 믿음으로 극복하려면 하나님이 그 어떤 방법보다도 크게 보여야 한다. 그 하나님을 3장에서 매우 역동적으로 그리고 있다. 위대하신 하나님, 그 하나님을 보는 것이 믿음이다. 그 시각이 없으면 하나님은 나약하고 처절해 보이고 대신 바벨론이 크게 보일 것이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의 발 앞에 짓밟힌 사람은 바로 바벨론이다. 우리가 부럽게 여긴 그들을 하나님은 망설임 없이 짓밟으셨다. 그런데 아직도 그들에게 미련을 두고 그들을 최고로 여긴다면 정작 우리는 어리석은 부자와 같은 사람들이다. 우리가 어디에 인생을 걸고 살아야겠는가? 위대하신 하나님 한분이시다. 우리가 진정 신앙인이라는 증거는 무엇인가? 하나님이 크게 보이는 것이다. 그런 하나님을 생각하라. 위대하신 하나님, 악을 정복하시는 하나님,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 우리를 책임져 주시는 하나님, 그 하나님이 저와 여러분의 하나님이시다.

  교훈: 믿음으로 다가오는 재난을 맞이하되 그 너머에 구원이 있음을 확신하며 주를 기다렸던 하박국의 신앙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귀감이 된다.

나의 삶 속으로
| 묵상 |
그대는 역경의 때에 하박국처럼 믿음을 가지고 노래할 수 있을까요?
(왼쪽 페이지에 이어서) 하박국은 아름다운 믿음의 표현으로 그의 책을 마무리 한다. 즉 삶이 아무리 힘들지라도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기뻐하며 힘을 얻을 수 있다. 이 책이 강조하는 기별은 끝이 보이지 않는 압제의 시기에도 인내하며 하나님의 구원을 기다릴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주를 기다림’은 하박국서를 지배하고 있는 주제이다. 이는 특별히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인들에게 대단히 현실적인 주제이다.
| 적용 |
교회와 가정에서 축복의 흔적이 사라질지라도 그대는 어떻게 믿음을 지키겠습니까?

    영감의 교훈
  곤고의 시대를 바라본 하박국- “사탄과의 마지막 대쟁투시 하나님께 충성하는 자들은 모든 세상의 생계 방도가 끊어지는 광경을 볼 것이다. …하박국은 이 곤고의 시대를 바라보고 교회가 가져야 할 믿음을 다음과 같이 나타냈다. ‘비록 무화과 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합 3:17~18)”(시대의 소망, 121~122).

    기도
  저에게 스스로 해결할 힘이 있다면 기도하지 않았을 것이며, 남은 방법이 있다면 아직 노래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오직 주님만을 믿고 의지해야 하기에 오히려 찬송하며 감사합니다. 나를 구원하여 주시옵소서.

여섯째날(금)
5월 24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하박국의 질문에 대한 답이 주어졌다. 그 답은 생각이 아니라 사건에 관한 것이었다. 하나님의 답은 일어날 뿐 말로 설명될 수 없었다. 그 답은 반드시 실현될 것이다. 그래서 ‘더딘 것처럼 보일지라도 기다려야 한다.’ 진실로 그 과정은 견디기 어렵고, 의인들조차 벌어지는 일들을 보고 놀라게 된다. 이에 대한 위대한 대답이 있다.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이 답 역시 생각이 아니라 존재에 관한 것이다. 예언적 믿음이란 그분을 신뢰하는 것이다. 그분의 임재 안에 잠잠히 기다리는 것은 깨달음의 한 형태이다.”- Abraham J. Heschel, The Prophets, 143.
  “우리는 선지자들과 사도들이 증거한 믿음 즉 하나님의 언약을 붙잡고 당신께서 정하신 시간과 방법으로 구원하여 주시기를 기다리는 믿음을 간직하고 계발하여야 한다. 확실한 예언의 말씀은 우리 주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만왕의 왕, 만주의 주로서 영광스럽게 재림하실 그때에 최종적으로 성취될 것이다. 기다리는 시간이 긴 것처럼 보이고 낙담하게 하는 환경에 의하여 영혼이 압박을 당하고 신임하였던 많은 사람이 도중에 실패할지 모르나 미증유의 배도의 시대에 유다를 격려하려고 노력한 선지자와 같이 우리도 굳게 믿고 ‘여호와는 그 성전에 계시니 온 천하는 그 앞에서 잠잠할지니라’(합 2:20)고 선언하자”(선지자와 왕, 387~388).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1. 하박국과 하나님 사이의 대화를 요약해 보십시오. 그는 무엇에 대하여 불평했습니까? 하나님의 답변에 대하여 그는 어떻게 반응하였습니까?
  2. 하나님이 보시기에 표면적인 믿음보다 솔직한 질문과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 더욱 바람직한 신앙 자세가 될 수 있을까요?
  3. 과거의 재림신도들은 그리스도께서 이미 재림하셨어야 했고, 모든 예언이 성취되어야 했다고 믿었습니다. 그다음 세대인 우리는 그분의 재림을 기다리며 어떻게 믿음을 지켜야 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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