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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과 - 형제자매를 사랑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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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등불과기름 작성일09-08-19 13:56 조회4,56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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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8월 22일 안식일 (일몰: 오후 7시 16분)

제8과 형제자매(兄弟姉妹)를 사랑함

<기억절(記憶節)>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요일 4:21)

<핵심(核心) 토의주제(討議主題)>
1. 요한은 사랑의 중요성을 어떻게 가르치고 있는가?
2. 구속의 경륜은 사랑의 참된 의미를 깨닫는 데 어떤 도움을 주는가?
3. 우리 죄인들이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있는 비결은 무엇인가?
4.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사랑을 나타내야 하는가?

(깨닫기) :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로 하여금 형제자매를 사랑하도록 강권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느끼기) : 우리의 관계를 파괴하는 의심과 죄책감에서의 해방을 경험한다.
(행하기) : 하나님의 사랑을 영적 가족들과의 관계에서 실천하기로 결심한다.

<요점(要點)>
구속(救贖)의 경륜(經綸)은 죄인들을 위한 하나님의 사랑이 어떤 것인지 보여준다.
우리는 그 사랑을 다른 사람들에게 나타낼 의무(義務)를 가지고 있다.

일(日) (8월 16일)
<사랑에 관한 두 구절(句節) (요일 3:11~24, 4:7~5:4)>

◉ 하나님의 구속적(救贖的) 사랑.
1. 사랑은 하나님의 속성(屬性)중에 하나가 아니다. 그것은 그분의 본성(本性)그 자체(自體)이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요일 4:8, 16)
2. 우리는 하나님의 율법과 진노까지, 그분에 관한 모든 것들을 그분의 사랑과 연관을 지어 이해해야 한다.
(마 22:36-40; 롬 1:18-32)
3. 우리의 구원(救援)의 근거(根據)는 하나님 사랑의 본성에서 발견 할 수 있다.
(요 3:16; 엡 2:4-7; 딛 3:3-5)
4. 신약(新約)은 하나님 사랑을 표현 하는데 있어서 헬라어 "아가페"를 사용한다.
하나님의 아가페 사랑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면에서 인간의 사랑과 다르다.
⑴ 인간사랑은 조건적이고, 하나님 사랑은 무조건적(無條件的)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의 선(善)함이나 가치(價値)와는 무관하게 그분으로부터 발생하는 것이다.
(행 15:11; 엡 1:7; 2:8-9; 딛 1:14)
⑵ 인간사랑은 가변적(可變的)이고, 하나님의 사랑은 불변(不變)하다.
그분의 사랑은 결코 패(敗)함이 없다. (렘 31:3; 롬 8:35-39; 고전 13:8)
⑶ 인간의 사랑은 추구적(追求的)이고, 하나님의 사랑은 자기희생(自己犧牲)적이다. (빌 2:6-8)
5. 예수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둘째 사망을 당하실 때,
하나님의 무조건적(無條件的)이고 불변(不變)하는 자기희생적 사랑이 극명하게 드러났다. (롬 5:8; 히 2:9)
6. 세 가지 사랑의 세 가지 다른 복음(福音)의 개념(槪念)들을 낳는다.
⑴ (행함으로 말미암는 의)
이 복음은 자아(自我)사랑에 근거(根據)하는 것으로,
인간들은 선(善)한 행위로 하나님을 기쁘게 하여 그들 자신들을 구원(救援)하고자 한다.
이것은 율법주의(律法主義)로서 모든 비기독교(非基督敎) 종교의 축을 이룬다.
⑵ (믿음+행함으로 말미암는 구원(救援))
소위 이 "복음"은 자아 사랑과 자아 희생적(自我犧牲的) 사랑의 혼합(混合)을 그 축으로 한다.
즉 구원(救援)을 원한다면 우리가 먼저 우리의 선(善)한 행위를 나타내 보여야 한다.
그러면 하나님이 중간 지점쯤에서 우리를 만나 구원(救援)해 주신다는 내용이다.
이 믿음 + 행함의 "복음(福音)"은 로마 카톨릭 신학의 핵심으로 율법주의 형태와 흡사하다.
⑶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
이 복음은 자아 희생적(自我犧牲的) 사랑(아가페)에 그 근거(根據)를 두고 있는데,
우리가 속절없고 반역한 죄인(罪人)이었을 때에 하나님은 그 분과 완전한 화해(和解)를 이룰 수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서 우리를 향한 그분의 사랑을 선보이셨다.
신약(新約)은 이 가르침을 분명히 하고 있다. (요 3:16; 롬 5:6-10; 엡 2:1-6; 딤전 1:15)

◉ "아가페"(사랑)와 "대 쟁투(大 爭鬪)"
사단이 하늘에서 하나님께 대항하여 반역(叛逆)을 일으킨 것은 실제로 율법(律法)의 원리인 하나님의 아가페사랑에 대항해서 일으킨 반역이었다. (마 22:36-40; 롬 13:10; 갈 5:13-14)
루스 벨은 아가페 사랑을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않는" (고전 13:5) 사랑으로 너무 속박하는 것이라고 여겼다.
그는 반역하면서까지 자아(自我) 사랑의 원리 혹은 에로스 사랑을 퍼트렸다. (겔 28:15; 사 14:12-14)
그의 타락 이후 사단은 자기희생적 사랑을 증오(憎惡)하게 되었다.
하나님께서 복음전파(福音傳播)를 통하서 인류에게 이 사랑의 원리를 회복(回復)시키려하자 사단은 그가 할 수 있는 모든 능력을 총동원하여 이것과 대항(對抗)해서 싸웠다(계 12:10-12).
그가(사단) 교회에 가한 첫 번째 공격은 안식일(安息日)진리(眞理)도 아니고 죽음의 상태에 관한 교리도 아니었다. 이러한 진리들에 대한 사단의 맹렬한 공격은 후에 이루어졌으며,
그가(사단) 제일먼저 공격(攻擊)의 목표(目標)로 삼은 것은 하나님의 "아가페 사랑"의 개념(槪念)이었다.

◉ 마음이 맞는 사람들이 함께 사는 것, 그것이 세상에서 가장 선(善)하고도 즐거운 일이다.
그것이 바로 행복(幸福)이 아닌가!
마음이 맞는 한 남자와 한 여자가 한 집에서 같이 사는 것, 그것이 결혼(結婚)으로 이루어진 가정(家庭)의 행복이며, 마음이 같은 부모와 자식이 함께 지내고, 마음이 통하는 형제와 이웃이 어울려 사는 것, 그것이 인생의 가장 큰 즐거움이요 행복인 것이다. 이러한 즐거움, 이러한 행복이 어떻게 묘사(描寫)되어 있으며 또 이르러 오는가?

<마음이 같아진 사람들>
세상을 온통 변화시킨 이처럼 놀라운 오순절의 도래(到來)를 위해 약속하신 성령을 기다리는 동안 제자들은 시온산 기슭의 다락방에 모여 무엇을 경험(經驗)하고 있었는가?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전혀 기도(祈禱)에 힘쓰"(사도행전 1장14절)며 그 후에도 계속 "서로 교제(交際)하며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聖殿)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純全)한 마음으로 음식(飮食)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讚美)하"(사도행전 2:46-47)였다.
얼마 전까지 길을 가다가도 "서로 누가 크냐하고 쟁론(爭論)"(마가복음 9:34)을 일삼던 그들이 아니었는가?
마지막 송별회(送別會) 자리인 성만찬(聖晩餐)에서도 "저희 사이에 그 중 누가 크냐 하는 다툼"(누가복음22:24)을 벌여 주님의 마음을 아프게 했던 제자들이 아니었던가?
그러나 시기심(猜忌心)으로 충동(衝動)된 그러한 다툼은 사라졌다.
이제는 곁을 떠나신 구주(救主)에 대한 온갖 회상(回想)이 그들의 심금(心琴)을 울렸으며 주님이 생전(生前)에 그처럼 철부지였던 자신들의 처신이 그분의 마음을 얼마나 슬프고 아프게 해드렸는지를 생각할 때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인간의 몸을 입으신 하나님이셨던 주님의 그 겸손(謙遜), 그 온유(溫柔), 그 인내(忍耐), 그 사랑 모두가 뼈에 사무치는 회상(回想)이 되어 밀물처럼 몰려왔다.
모두 십자가(十字架)가 초래한 충격(衝擊)이였으며 영원한 감격(感激)이였다.
지난날의 잘못을 서로 고백(告白)하며 서로를 용서(容恕)하고 서로서로 얼싸안은 그들은 이제 서로 마음이 맞뚫린 한 마음이 되어 연합(聯合)함으로써 시편 133장1절을 성취(成就)하고 있었다.
"형제가 연합(聯合)하여 동거(同居)함이 어찌 그리 선(善)하고 아름다운지!"

<영원(永遠)히 함께하는 행복(幸福)>
이처럼 선하고 아름다운 장면을 흐뭇하게 바라보시며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이제는 모두 모여 영원히 함께 살아도 되겠구나. 저렇게 서로 마음을 맞추어 더불어 살 줄 알게 되었으니."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福)을 명(命)하셨으니 곧 영생이로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영생은 죽지 않고 오래만 사는 그런 장수(長壽)가 아니라 마음이 맞는 사람끼리 영원히 함께 "연합하여 동거(同居)하는" 그러한 행복한 영생인 것이다. 그러한 영생이 진정한 행복인 것이다.
이와 같이 주님은 영원한 행복을 범죄로 불행해진 인간들에게 가져다주시려고 상처받은 나무가 흘려내는 고통의 진액인 쓰디쓴 몰약, 죽음의 악취(惡臭)를 영원히 제거하는 몰 약을 흘려내시려고 십자가의 죽음을 죽으셨다.
매 맞아 찢기고 벗겨져 상처(傷處)난 몸은 계피와 육계가 되고, 흘리신 그 진한 피와 땀과 눈물은 창포가 되어 감람유(橄欖油)에 섞여져 관유가 된 것이다.
말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을 통하여 이뤄진 구속(救贖)이 성령의 놀라운 역사를 마침내 초래한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는 십자가에서 흘려낸 끈끈한 사랑으로 마음이 엉겨져 영원히 함께 삶으로 참으로 행복할 수 있는 백성을 마침내 산출한 것이다. 영원히 함께할 수 있는 행복한 사람들을 위하여 베푸신 그 사랑을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이 곧 불신자(不信者)인 것이다.

◉ <형제(兄弟) 사랑과, 하나님 사랑의 관계(關係)>
“우리가 형제들에게 나타내는 정신이 곧 우리가 하나님께 대하여 어떤 정신을 가지고 있는가를 선언하는 것이다. 마음속에 하나님께 대한 사랑이 있을 때에만 이웃에 대한 사랑이 솟아난다.”(시대의 소망, 505)

◉ 우리를 향(向)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을 때에만,
하나님의 자녀들이 형제자매(兄弟姉妹)를 사랑하는 일이 가능(可能)하다고 사도 요한은 말한다.

월(月) (8월 17일)
<사랑의 정의(定義) (요일 3:11~16, 4:7~16)>

◉ 사랑이란
헬라어 "아가페(agape)"는 사랑 받는 사람이나 대상에게서 가치 있는 것을 감지하고 고상한 유형의 사랑이고, 감정이 아니라 원칙에 기초한 사랑이며, 사랑의 대상의 훌륭한 특성에 대한 존경심에서 자라나는 사랑이며.
이 사랑은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님 간에 드러난 사랑이고 (요한복음 15:10; 17:26 참조), 잃어버린 인류를 위한 삼위 하나님의 구속(救贖)의 사랑이며 (요한복음 15:9; 요한일서 3:1; 4:9, 16절 참조), 그리스도인의 상호관계에서 실증되는 특별한 특성이고 (참조 요한복음 13:34-35; 15:12-14), 하나님과 신자(信者)의 관계를 나타내기 위해 사용된다. (참조 요일 2:5; 4:12; 5:3).
하나님을 향한 사랑은 그분의 뜻에 일치함으로 입증되는데, 이것이야 말로 사랑의 증거(證據)이다.
(참조 요일 2:4-5).
"Charity"(자애(慈愛:제임스역(譯))라는 단어는 "아가페"라는 단어에 포함된 것처럼, 다른 사람의 복리에 관한 광범위한 관심을 가리킬 만큼 포괄적이지 못하다.
사실 "Charity"(자애(慈愛)로는 복지 원 조라는 극히 제한된 개념만을 전달할 수 있다.
"Love"라는 단어가 낫긴 하지만 그것도 사랑에 관해 고전13장에서 나온 모든 것에 비춰서 이해해야만 한다.
이 아가페 사랑을 때때로 소위 사랑이라는 것 곧 자아와 자아의 욕망을 중심으로 하여 주로 느낌과 감정으로 이뤄진 특성과 혼동해서는 결코 안 된다.
아가페는 다른 사람에 관한 관심과 염려가 중심을 이루며 거기서 적합한 행동으로 이끈다.
(본교 성경주석(한) 12권296p 참조)

◉ 인류와 하나님 사이에 존재해야 할 관계에 대한 이론적인 이해와 함께 이 세상의 풍부한 지혜를 갖고 있는 사람일지라도 사랑에 관한 체험적인 지식이 없다면 여전히 잃어버린바 될 것이다.
다른 사람에게 선을 행하려는 그의 노력은 결실을 맺지 못하고, 그의 생애 목표가 되어야 할 것, 곧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리는 일도 달성 되지 못할 것이다. (본교 성경주석(한) 12권297-298p 참조)

◉ 품성의 모든 특성 가운데 영감의 말씀에서 하나님의 본성을 묘사하기 위해 사용된 것이 바로 사랑임을 깨닫는다면, 사도가 성령의 모든 은사 중에서 왜 사랑이 제일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는지 이해하기는 쉬울 것이다. (참조 요일 4:7-8, 16)
◉ 하나의 생활 방식인 사랑은 고린도전서 12장에 열거된 성령의 여러 은사를 소유하여 활용하는 것보다 더 효과 적이고, 승리하는데 더 유리하고 더욱 큰 만족을 준다.
하나님과 동료인간을 향한 사랑은 하나님과 일치됨을 나타내는 최고의 표현이다.
(참조 마 22:37-40; 교회증언 Ⅷ.139).

◉ 신자(信者)의 생애에서 사랑이 실천되느냐는 신앙의 신실함을 알 수 있는 중대한 시금석(試金石)이다.
(참조 사 58:6-8; 마 25:34-40; 교회증언 Ⅵ.273-280)
◉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두루 다니시며 착한 일을 행하"(사도행전 10:38)신 그리스도와 같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예수의 정신으로 두루 다니면서 도움이 필요한 모든 사람에게 선을 행한다.
그리스도인은 단지 마음속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이 다른 일을 할 수 없게 만들기 때문에 사리사욕(私利私慾) 없이 선을 행한다. (참조 교회증언 Ⅵ.268: 교회증언 Ⅲ. 524).

◉ 사랑은 탁월한 길인데, 이는 사라의 실제 표현이 모든 사람의 영원한 운명을 결정하는 시금석이기 때문이다.
사랑이 단지 형식과 의식의 준수에 그치는 자들은 하나님이 그런 신앙을 가납(嘉納)하시지 않음을 알게 될 것이다. (참조, 교회증언 Ⅴ.612)

◉ 신자들의 연합을 도모하는 헌신적인 사랑을 통해 세상은 하나님이 인류를 구원하기위해 그분의 아들을 세상에 보내셨음을 확신할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이 자기 백성에게 복음의 진리를 증거할 때 사용하라고 정하신 하나님의 방법이다. (참조, 요한복음 17:21, 23).

◉ 자아(自我)를 높이거나 옳다고 여기거나 충족시키려는 어떤 욕망도 드러내지 않고 사심 없이 궁핍한 자들을 섬기는 데 헌신하는 사랑은 회심하지 않은 사람들이 반박하지 못하는 논증이다. 그 들은 그 속에서 자기들의 삶의 철학으로는 이해하지 못하는 무엇인가를 본다. 그들의 마음은 감동을 받고, 그들의 지성은 회심한 사람들의 생애에 나타난 경건한 능력의 증거에 반응한다. 그리하여 사랑은 복음을 전파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발전시키는 가장 위대한 길이라는 점이 입증된다. (본교 성경주석(한) 12권305p :참조)

◉ 사도 요한은 요한일서 3:12절에서 구약(舊約)의 사건에 대하여 유일하게 직접적으로 이곳에서 언급하고 있다.
요한은 가인을 형제애(兄弟愛)가 결여된 최고의 본보기로 제시한다.
가인이 아벨을 죽인 사실의 역사성에 이의가 제기되지 않음을 주목할 만하다.
사도는 창세기의 이야기를 참된 것으로 받아들이며 가인의 행위의 원인을 분석한다. (참조. 창 4:8-15)
그리스도인이 스스로 하나님의 자녀임을 입증하듯이, 가인도 스스로 마귀의 자녀임을 입증(立證)하였다.
사도요한은 가인의 사건의 내면을 살피면서 두형제의 "행위"또는 행동을 대조(참조; 히 11:4)하면서 아벨에 대한 가인의 증오와 시기(猜忌)의 진정한 이유를 통찰한다.
사람들의 생각에서 기인(起因)된 행위는 품성을 드러내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그것은 가인은 살인이라는 극단적인 행위 이전에 그의 참된 본성을 드러냈음을 보여준다.
아벨에게는 그 끔직한 행위의 구실이 되거나 아벨의 겸손한 순종이 그의 형의 시샘어린 증오를 일으켰다.
아벨의 유일한 잘못은 의로움이었다.
가인의 양심은 삶에 대한 자신의 처신을 책망했고 그렇기 때문에 그는 자신의 지를 인정하거나, 그로 하여금 자신의 죄 됨을 너무도 잘 일깨워 주는 아벨을 파멸시키거나 하는 선택에 직면했음을 알았다. (부조와 선지자 74)
그와 마찬 가지로 유대 지도자들도 예수에게 사형 선고를 내리도록 몰아갔다. (본교 성경주석(한)14권330p)

◉ <참된 성화(聖化)의 길>
“참된 성화는 사랑의 원칙을 실천함으로 이룩된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 안에 거하시느니라.'(요일 4:16). 그들의 마음에 그리스도께서 거하시는 사람들의 생애에는 실제적 경건이 나타날 것이다. 품성은 순결하고, 향상되고, 고상하고, 영화롭게 될 것이다. 순결한 교리가 의의 행위와 섞이고 하늘의 규례가 거룩한 행실과 혼합될 것이다.”(사도행적, 559)

◉ 사랑은 다른 사람의 유익(有益)을 위해 자기를 희생(犧牲)하는 것을 의미(意味)한다.
이러한 사랑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독생자 예수님을 보내신 구속(救贖)의 계획 속에 잘 나타나 있다.

화(火) (8월 18일)
<확신(確信)이 흔들릴 때(요일 3:19~21)>

◉ 흔들린다는 것은 기초(基礎)가 부실(不實)하기 때문이다.
집을 지을 때 고층(高層)이 높을수록 그에 기초(基礎)가 튼튼해야 하는 것처럼, 신앙에 있어서도 기초가 없을 때 외부의 유혹과 압력(壓力)이 있으면 흔들릴 수밖에 없다. (참조, 마태복음 7:24-27 : 모래위에 지은 집)

▶ 성경에서 기초(基礎)가 튼튼하여 흔들리지 않은 사람 중에 한 사람으로
☞ 욥을 생각하여 보자.
사단의 간계(奸計)로 욥의 신앙을 흔들었지만( 세상적인 재물(財物)의 시험과 자녀들의 죽음과 자신의 악창(惡瘡)으로 인한 건강(健康)등의 흔들림을 통하여 욥을 흔들었지만 "내가 모태(母胎)에서 적신(赤身)으로 나왔사온 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가 올지라. 주신자도 여호와시오 취하신 자도 여호와 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 이다 하고" (욥 1:21) 믿음에 굳게 선 욥도 있으며,
확고하게 굳은 믿음위에선
☞ 다니엘의 세 친구인
"하나냐 와 미사 엘과 아시랴"가 있었더니 우상숭배의 강요에도 굴(屈)하지 아니하고 극열(極熱)히 타는 풀무 불에까지 들어갈 마음이 있었던 요동(搖動)하지 아니한 히브리인의 세 친구들을 보자
"만일 그럴 것이면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서 능히 건져 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 내시리. 이다.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神)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의 세우신 금 신상(神像)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 (단 3:17-18)
세상의 유혹(誘惑)과 쾌락에 굳게 선
☞ 요셉의 경우를 보자.
"그 후에 그 주인의 처가 요셉에게 눈짓하다가 동침(同寢)하기를 청하니, 요셉이 거절(拒絶)하며 자기 주인의 처에게 이르되 나의 주인이 가중 제반 소유를 간섭(干涉)지 아니하고 다 내 손에 위임(委任)하였으니, 이 집에는 나보다 큰 이가 없으며 주인이 아무 것도 내게 금(禁)하지 아니하였어도 금(禁)한 것은 당신뿐이니 당신은 자기 아내임이라 그런즉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득죄(得罪)하리이 까. 여인이 날마다 요셉에게 청(請)하였으나 요셉이 듣지 아니하여 동침(同寢)하지 아니할 뿐더러 함께 있지도 아니하니라, 그러할 때에 요셉이 시무하러 그 집에 들어갔더니 그 집 사람은 하나도 거기 없었더라. 그 여인이 그 옷을 잡고 가로되 나와 동침(同寢)하자 요셉이 자기 옷을 그 손에 버리고 도망(逃亡)하여 나가매, 그가 요셉이 그 옷을 자기 손에 버려두고 도망(逃亡)하여 나감을 보고. (창 39:7-13).

◉ 하나님 앞에서 또는 하나님의 존전(尊前)에 조사가 인간의 표준에 비추어 행해질 때는 사람이 자신의 마음을 다시 "굳세게 하"기가 비교적 쉽지만, 하나님의 임재 앞에 서서도 여전히 평정심을 갖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하지만 요한은 그것이 가능함을 우리에게 보증한다. 우리가 하나님에게 가까이 갈수록 우리자신의 불완전함을 더 의식하게 되고 구주의 공로를 의지해야 하는 많은 이유(참조 요일 2:1-2)를 열거할 필요가 더 많아진다.
이처럼 우리가 형제들을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하기에 우리가 진리에 속했음을 알고 우리가 진리에 속했기에 우리는 하늘 아버지 앞에 담대히 설수 있다. (본교 성경주석(한)14권333p)

◉ 때때로 우리는 자신의 실수와 과오로 인해 낙담하게 된다. 그러한 때에라도 우리는 사랑과 자비가 풍성하신 하나님께 나아가기를 두려워하지 말라고 요한은 말한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요일 4:18)

◉ 사람은 자신의 힘으로 원수의 비난을 막을 수 없다. 죄로 얼룩진 의복을 입고 자신의 죄를 자백하면서 하나님 앞에 서야 한다. 그러면 우리의 대언자(代言者) 예수께서는 회개와 믿음으로 자신의 영혼을 그분께 의탁하는 모든 자들을 위해 간절히 탄원하신다. 그분께서는 갈 바리의 힘 있는 논증으로 비난자(非難者)를 물리치신다. 그분은 하나님의 율법에 대해 완전히 순종하심으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받으셨으며, 그분은 하늘 아버지로부터 죄인을 위한 자비와 회복을 주장하신다.”(하나님의 놀라운 은혜, 316)

◉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나니…….>
“요한은 신도들로 하여금 사랑의 정신을 나타냄으로 그들에게 이르게 될 고귀한 특권들을 깨닫게 하고자 노력하였다. 마음에 가득 찬 이 구속(救贖)하는 능력은 모든 다른 동기를 제어하며 이 능력의 소유자들을 세상의 부패시키는 감화에서 벗어나게 한다. 그리고 이 사랑이 완전히 지배하도록 허용되고 생활의 원동력이 될 때 하나님께 대한 신뢰심과 그들에 대한 그분의 관계가 완성될 것이다. 그 때에 그들은 완전한 믿음의 신뢰심을 가지고 당신께 나아올 것이며 그들은 현세와 영원의 행복을 위하여 필요한 모든 것을 그분에게서 받으리라는 것을 알 것이다.”(사도행적, 551)

◉ 아무리 의로운 사람도 자신의 힘만으로는 하나님 앞에 결코 설 수 없다.
그러나 아무리 연약한 자라도 예수님을 의지하면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다.

수(水) (8월 19일)
<사랑을 실천(實踐)함 (요일 3:17~18, 4:19~21)>

◉ 우리말 속담(俗談)에 구슬(玉)이 서 말(3斗)이라도 꿰어야 그 가치(價値)가 있다는 말이 있다.
하나님을 아무리 설명한다 해도, 하나님이 사랑의 실체(實體)라 해도, 하나님을 만난 경험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사랑의 진가(眞價)를 모를 것이다. 십자가(十字架)가 어떻고, 구속(救贖)의 경륜이 어떻고, 구원(救援)이 어떤 것이라고 제아무리 설명을 한다 해도 하나님의 사랑을 잘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배곱픈 사람에게 따스한 밥과 음식을 주면서 예수님의 심부름으로 왔다고 하거나, 헐벗고 돌봄이 없는 이웃에게 따스한 옷과 필요한 물건을 주면서 예수님의 심부름으로 전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아마도 그런 이웃에게는 하나님이 예수님이 어떤 분이라는 것을 알 것이다. 지금 우리는 가진 것이 너무나 많다.

☞ 그 한 가지 예(例)를 들어보자
만약에 우리들이 출석하는 교회에 단 한권의 성경책만 있다고 가정(假定)해보자.
아마도 서로가 빌려가서 필사(筆寫)를 하며 열심히 정해진 순서와 시간을 아끼면서 읽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집집마다 개인마다 성경책이 몇 권씩이나 있고 흔하기 때문에 귀한 것을 가치를 모르고 살아간다.
귀한 것이 풍족(豊足)하면 그 고귀(高貴)함을 모르고 망각(妄覺)한다.
우리들 집이나 직장이나 사무실이나 교회에서 부족(不足)함이 없이 너무나 풍족(豊足)하기 때문에 고마움이나 감사(感謝)함을 모르고 산다. 이로 인(因)하여 우리의 이웃들이 헐벗고 굶주리고 소외(疏外)되고 고통(苦痛)받고 있는 이웃과 형제자매(兄弟姉妹)들이 얼마나 있는지 조차도 모르고 산다.
교회의 출석도 중요하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사랑을 우리가 실천(實踐)해야 된다.
이로써 우리는 크리스천이며 그리스도인이라는 징표(徵表)가 곧 "아가페 사랑"이며 그 사랑을 실천(實踐)하는 자가 곧 주님의 진정한 제자가 아닐까?
하나님의 사랑의 빛의 통로가 되며, 예수님의 사랑의 향기를 전하는 우리 그리스도인이 됩시다.

◉ "서로 사랑하라"라는 구절은 신약(新約)에서 상당히 빈번히(요 13:34; 벧전 1:22; 요일 3:11등) 쓰인 반면, "형제를 사랑하라"는 말씀은 요일3:14절에만 나타나기 때문에, 여러 해석(解釋)이 주어질 수 있다.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자들은 자신들과 매우 친숙한 일단의 사람들에 대하여 그들의 애정을 제한하지 않으며, 오히려 모든 동료 신자(信者)에게 그들의 사랑을 베풀 것이다. (벧전 2:17 참조) 그렇게 함으로 그들은 그들이 사망의 세상에서 떠나 영원한 생명의 왕국으로 들어갔음을 입증한다.
그들은 영원히 그들의 것이 될 미덕, 하늘 왕국의 기초가 되는 그러한 미덕들을 이미 실천하기 시작했다.
그리스도인이 그의 형제들을 사랑하는 기술, 곧 그가 위하여 준비하고 있는 왕국의 원칙들과 조화를 이룰 수 있는 것을 실천하는 것은 얼마나 중요한가!

◉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들은 사람이 여전히 죄 가운데 죽어 있음을 나타낸다.
형제애(兄弟愛)의 표명이 영생의 소유를 입증한다면 그 사랑의 결핍(缺乏)은 그 사람이 아직 "생명으로" 들어가지 않았고 다른 이들은 그곳으로부터 구원받은 본래의 "사망"에 머무르고 있음을 입증한다.
(본교, 성경주석(한)14권331p)

◉ 사랑은 실천(實踐)되어야 한다. 말로 사랑을 표현(表現)하는 것도 물론 중요(重要)하지만,
예수님이 보여주셨듯이 희생(犧牲)을 감수(甘受)하고 행동(行動)으로 나타내는 사랑이 더 중요하다.

목(木) (8월 20일)
<사랑과 계명(誡命)들(요일 3:22~24, 4:21~5:4)>

◉ 사랑은 생명을 싸고 있는 생명 싸개와 같다.
엄마의 모태(母胎)에서 태반(胎盤)이 아가를 싸고 있지 않다면 그 태아(胎兒)가 어찌 새 생명으로 이 땅에 태어 날수가 있겠는가? 하나님의 계명은 우리 인간들을 보호하는 생명의 생명싸개이다.
계명(誡命)에는 하라는 것과, 하지 말라는 것으로 구분(區分)되어있다.
하나님께서 10가지 중에서 8가지는 하지 말라고 울타리를 쳐 놓으셨고, (1, 2, 3, 6, 7, 8, 9, 10,계명(誡命))
2가지( 4, 5,계명(誡命))는 얼마든지 할 수 있도록 하라는 문을 만들어 놓으셨다.
이는 너무나 우리 인간을 사랑하는 생명의 보자기인 생명 싸개인 것이 사랑의 계명이다.
"사람이 일어나서 내 주를 쫓아 내 주의 생명을 찾을지라도 내 주의 생명은 내 주의 하나님 여호와와 함께 생명싸개 속에 싸였을 것이요 내 주의 원수들의 생명은 물매로 던지듯 여호와께서 그것을 던지 시리이다."(삼상 25:29)

◉ 요한은 "그의 계명(誡命)"들에 대하여 정의(定義)하며 그의 정의가 모든 것을 포괄(包括)하는 믿음과 사랑에 대한 하나의 법을 다루기 때문에 단수(單數)를 사용 한다. (참조, 마 22:36-40)

하나님의 계명(誡命)들을 무시(無視)하는 죄는 사람과 그의 하나님 사이에 장벽(障壁)을 쌓고 그의 기도가 하늘에 상달(上達)되지 못하도록 방해(妨害)하고,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주시려고 기다리고 있을 응답(應答)을 받기에 그를 부적합(不適合)하게 만든다. 그 분의 계명(誡命)들에서 드러나는 하나님의 뜻에 대한 순종은 응답받는 기도의 문제와 긴요(緊要)하게 관계되어 있다. 이 순종(順從)은 하나님의 자녀에게 약속(約束)된 거룩한 능력을 통해 가능(可能)하게 된다.
그리스도인은 항상(恒常) 하나님이 좋다거나 적합하다고 언명(言明)한 것들을 행하기 원할 것이며, 하나님이 위험하다고 보는 것들을 행하기를 삼갈 것이다. 이것은 구주(救主)의 생애(生涯)가운데 지침(指針)중 하나였다. (요 8:29). 동일한 지침이 우리 생애에서 지켜질 때 우리는 우리기도(祈禱)에 대한 더욱 분명(分明)한 응답을 기대할 수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나 율법을 범(犯)하는 것을 피하는 것 그 이상을 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들을 의식적으로 계속 행해야 한다. 우리는 "하늘에 계신 너희(우리) 아버지의 온전(穩全)하심같이 너희도 온전 하라"는 명령을 기억하면서, 적극적으로 그리스도인 생애를 살아야 한다. (참조 마 5:48; 빌 3:12-15) 사도 요한은 하나님의 계명(誡命)인 하나님의 요구들을 사랑의 법안에 요약을 한다.
사랑은 예수님의 이름을 믿는 믿음에 실제적으로 따라오는 것이다. 믿음과 함께 행(行)함도 있어야한다. (약 2:17) 우리가 하나님의 계명들을 지킨 다면 하나님을 확신(確信)하게 되고, 우리가 구(求)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받으며(요일 3:22), 또한 더 나아가 그 결과로 우리는 하나님과 밀접(密接)한 교제(交際)를 갖게 된다.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자는 그의 집에 하나님이 거(居)하시는 특권(特權)을 누린다.

다른 비유(譬喩)를 사용하면서 아모스는 "두 사람이 의합(意合)지 못하고야 어찌 동행(同行)하겠느냐"(암 3:3)고 묻는다. 아무도 하나님이 나타내신 뜻에 반대(反對)되게 살면서 하나님과 함께 거(居)할 수 없지만, 하나님의 뜻을 기꺼이 행하고자 하는 자는 영구(永久)히 그의 집에 전능자(全能者)가 함께 거(居)하도록 할 수 있다.
(본교, 성경주석(한)14권334-336p)
◉ 거(居)함은 항상 상호적(相互的)이다. (참조, 요 15:4-5).
하나님과 거(居)하고자 하는 자는 하나님이 항상 그와 거(居)하기를 원(願)해 왔음을 확신(確信)할 수 있다.
하지만 사람이 그분의 계명(誡命)들을 자원(自願)하여 지킴으로 그가 주와 일치되어 있음을 보여 줘야 한다.

◉ 계명을 지키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이고, 그것은 또 하나님 안에 거하는 것이다.
그런 사람들은 기도할 때 응답을 받는다.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있기 때문이다.
자녀들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게 된다. (본교, 성경주석(한)14권336p)

◉ 예수께서 계명을 요약해 주심
“모든 계명이 사람에 대한 사랑과 하나님께 대한 사랑으로 요약되어 있으므로 한 계명을 범하면 이 원칙을 범하지 않을 수 없게 되어 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율법은 어떤 것은 크게 중요하고 다른 어떤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기 때문에 그것을 무시할지라도 벌을 받지 않을 수 있는 어떤 분리된 계율이 아니라고 예수께서는 청중들에게 가르치셨다. 우리 주님은 처음 네 계명이나 나머지 여섯 계명을 다 거룩하고 완전한 것으로 나타내시고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그분의 모든 계명에 대한 순종으로 나타날 것이라고 가르치신다.”(시대의 소망, 607)
◉ 하나님의 계명(誡命)들은 우리의 유익(有益)을 위한 것들이다.
그 계명들은 하나님을 경외(敬畏)하고 내 형제자매를 사랑하라는 말씀으로 요약(要約)될 수 있다.

◉ 이 모든 것은 율법의 원칙, 즉 선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 가운데 예증되고 예수님의 생애에서 명백하게 나타나 있다. 예수님의 품성은 율법의 참 의미를 드러내며 우리의 이웃을 우리 자신처럼 사랑한다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보여 준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모든 사람들에게 자비와 친절과 사랑을 나타낼 때에 그들 역시 하늘 법도의 성격을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 … 마음속에 하나님께 대한 사랑이 있을 때에만 이웃에 대한 사랑이 솟아난다.”(시대의 소망, 505)

◉ “그대는 매일의 삶 속에서 부드러움과 우정의 감정을 계발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대는 진정한 예의와 그리스도인 예절을 나타내야 한다. 진정으로 예수님을 사랑하는 자들은 그분께서 위하여 죽으신 이들을 사랑할 것이다. … 죄인들의 구원을 위해서 일함으로 그리스도의 사랑은 마음속에 따뜻하게 간직되고, 그 사랑은 적절한 성장과 발전을 가져다 줄 것이다.”(교회증언, 3권, 466)

<초점(焦點)>
1. 사랑은 하나님의 속성(屬性)중에 하나가 아니다. 사랑은 그분의 본성(本性)그 자체(自體)이다.(요일 4:8, 16)
2. 우리의 구원(救援)의 근거(根據)는 하나님 사랑의 본성(本性)에서 발견 할 수 있다.
3. 사랑은 받았음을 깨달을 때, 사랑이 있게 되며 그래야 있는 사랑을 줄 수가 있다.
4.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만이 형제를 사랑할 수가 있다.
즉 형제를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인간사랑은 조건적이고, 하나님 사랑은 무조건적(無條件的)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의 선(善)함이나 가치(價値)와는 무관(無關)하게 그분으로부터 발생하는 것이다.
○ 인간사랑은 가변적(可變的)이고, 하나님의 사랑은 불변(不變)하다.
그분의 사랑은 결코 패(敗)함이 없다. (렘 31:3; 롬 8:35-39; 고전 13:8)
○ 인간의 사랑은 추구적(追求的)이고, 하나님의 사랑은 자기희생(自己犧牲)적이다. (빌 2: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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