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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과 사랑의 심판: 하나님의 딜레마(호세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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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조춘호 작성일13-04-05 11:09 조회4,607회 댓글2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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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과 사랑의 심판: 하나님의 딜레마(호세아)

4월 13일 안식일
일몰:오후 7시 5분

    기억절: “그런즉 너의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인애와 정의를 지키며 항상 너의 하나님을 바랄지니라”(호 12:6).

    연구범위: 호 7:11~12, 호 10:11~13, 마 11:28~30, 롬 5:8, 벧전 2:24, 호 14장.
    중심 사상: 호세아서는 고집스런 백성을 오히려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보여준다.

서론)
인간이 낙심을 하거나 교만해지는 이유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바라 볼 때이다. 자신의 힘이 남보다 강한 것처럼 보이면 교만할 수 있고 약하게 보이면 낙망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을 바라보며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살 때 겸손해 질 수 있는 것은 우리 자신이 아닌 하나님을 생각할 때이다. '그리스도인'이란 자기를 바라보지 않고 그리스도만 생각하고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사는 사람들이다. 이런 사람이 바로 신앙이 있는 사람이다. 자신을 부인하고 ‘항상 너의 하나님을 바랄지니라’(호 12:6)의 말씀처럼 주변의 다른 나라의 크고 작음에 흔들리지 말고 자신의 힘을 저울질 하지 말고 항상 그리고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우리의 시선을 자신에게 고정시키는 순간 인간은 늘 두려워하거나 혹 교만하여 질 것이다. “누구든지 일부러 겸손함과 천사 숭배함을 인하여 너희 상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저가 그 본 것을 의지하여 그 육체의 마음을 좇아 헛되이 과장하고 머리를 붙들지 아니하는지라 온 몸이 머리로 말미암아 마디와 힘줄로 공급함을 얻고 연합하여 하나님이 자라게 하심으로 자라느니라”(골2:18-19) 우리를 자라게 하고 유지하게 하는 것은 머리다. 우리는 우리의 머리가 되신 하나님을 의지하고 사는 자들이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겸손마저 일부러 하는 겸손이 되고 그리스도가 아닌 천사의 숭배에 인간의 숭배에 빠질 수 있다.

  성경 기자들은 흔히 하나님과 백성 사이의 관계를 은유적으로 묘사한다. 은유는 이미 알려진 익숙한 사물을 통해 익숙하지 않은 주제에 관하여 심오한 의미를 전달한다. 은유는 그 자체보다 다른 무엇을 설명하기 위해 사용하는 상징이다.
  하나님과 백성 사이의 관계를 묘사하는 가장 흔한 성경의 은유 두 가지는 ‘남편과 아내’ 그리고 ‘부모와 자녀’의 은유이다. 지난주 우리는 남편과 아내 은유를 살펴보았다. 이번 주에 우리는 호세아서에서 나오는 몇 가지 은유를 다루되, 주로 부모와 자녀의 은유를 살펴보려고 한다.
  예수께서는 다음과 같은 목적으로 비유를 들어 진리를 설명하셨다. 첫째, 일상에서 익숙한 소재를 통해 하나님에 관한 진리를 설명하기 위해서였다. 둘째, 매일의 삶에 적용할 수 있는 영적 원리들을 백성들의 마음속에 각인시키기 위해서였다. 같은 이유로 호세아도 은유
를 사용하였다.

  결론: 하나님의 품성과 행적에 대한 바른 이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돌아가고 그분의 신실함과 사랑과 공의를 모방하고픈 마음을 갖게 합니다.

첫째날(일)
4월 7일
쉽게 속는 어리석은 백성

  “에브라임은 어리석은 비둘기같이 지혜가 없어서 애굽을 향하여 부르짖으며 앗수르로 가는도다 그들이 갈 때에 내가 나의 그물을 그 위에 쳐서 공중의 새처럼 떨어뜨리고 전에 그 회중에 들려준 대로 그들을 징계하리라”(호 7:11~12).

도입)
위의 도입에서 언급하였듯이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백성들은 항상 하나님을 바라보며 사는 자들이다. 호세아는 이스라엘의 외교 정책에서 나타난 저들의 실수와 그들의 죄악을 나타내 보여주고 있다. 먼저 호세아 11:1-2절은 이스라엘의 죄악에 대하여 하나님이 보응하실 것을 예고하는 내용이며 호 11:3-6절은 야곱처럼 변화되어 하나님을 신실히 섬기도록 권면하는 내용이다. 호세아 12:1절에 에브라임이 ‘바람을 먹고 살며’라고 했는데 이는 에브라임이 애굽이나 앗시리아의 도움을 얻으려고 헛되이 뛰어다님을 가리킨다. 에브라임(이스라엘)은 앗시리아와 강화를 맺음과 동시에 앗시리아의 대적인 애굽에는 이스라엘 특산물인 기름을 뇌물로 바쳤다는 것이다. 이렇게 이스라엘은 양쪽을 다 의지하려고 했기 때문에 그들은 스스로의 올무에 걸리고 말았다. 이런 의미에서 ‘바람을 먹는다’는 표현은 헛된 것을 의지하려는 에브라임에 대한 허물을 지적한 것이다. 실속 없고 자신들을 도울 수 없는 나라들을 따라가려는 저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바람을 먹어 봐야 헛배만 부른 것처럼 이스라엘은 자신들을 구원할 수 없는 애굽이나 앗수르를 의지하며 강대국에 추파를 던지고 있다.

  위의 말씀은 무엇을 경고하는가? 우리는 여기서 어떤 원칙을 배워야 하는가?
  에브라임은 요셉의 아들(번역이 동생이라 한 것은 잘못된 것)이다. 후에 에브라임은 북방 왕조의 중요한 지파로 자리를 잡는다. 그래서 남방 왕조를 유다로 칭했던 것처럼 북방 왕조를 에브라임으로 칭했다. 위의 말씀에서 이스라엘은 사냥꾼의 그물에 쉽게 걸려드는 어리석은 새로 비유된다(렘 5:21과 비교해 보라.). 여기서 이스라엘이 다른 나라의 도움을 구하는 행위는 하나님께 반역이 되었다.
  이유는 무엇일까? 왜냐하면 강대국 앗시리아나 야심찬 이집트와 동맹을 맺으면 그들이 섬기는 신들의 최상권을 인정하도록 요구를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사52:4, 애 5:1~6 참고). 그들에게 가는 것은 필연적으로 여호와께 등을 돌리는 것을 의미했다. 따라서 그들에게 필요한 일은 여호와께 돌아와 회개하고 그분의 계명에 순종하며, 거짓 신을 버리는 것이었다. 이것만이 그들이 살길이었다. 이방인과의 정치적인 동맹은 그들을 구원할 수 없었다.
  “팔레스타인은 그 위치 자체가 이 두 고대 제국들의 침입에 노출되어 있었다. 이스라엘 백성의 두 나라는 이 두 강대 세력을 잇는 대로 상에 놓여 있었다. 이 강대국들이 노리며 싸움을 벌인 아주 탐스러운 보상은 바로 나일 강과 유프라테스 강의 기름진 유역들을 이어 주는 이 대로였다. 이스라엘과 유다 왕국은 이 국제적인 대립에 연루되었으며 그 두 경쟁자들 사이에 끼게 되었다. 이스라엘은 절망 가운데 영적으로 하나님을 의뢰하지 않고, 어리석게도 처음에는 이쪽, 다음에는 저쪽에 원조를 구했으나 그것은 자기 나라 복리에 올무로 변할 뿐이었다”(재림교회 성경주석 8권, 592).

부가적용)
하나님의 뜻 가운데 하나는 그의 백성들이 세상에서 구별되고 성별 되는 것이다. 그래서 출34:12절에서는 가나안 주민과 언약을 세우지 말라고 했고 삿2:2절에서도 가나안과 언약을 맺지 말고 그들의 제단을 헐라고 명령했던 것이다. 말하자면 하나님의 백성들은 세상 사람들의 사고방식과 섞이지 말고 하나님의 교회는 세속주의와 인본주의에 섞이지 말라는 것이며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 외에 롬12:2절처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명령을 망각하고 이방인들과 혼합되기 시작했고 저들과 언약을 맺었고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대신에 강대국을 의지하였다. 그러나 결과는 조금도 이스라엘에게 도움이 되지 않았다. 하나님의 능력을 신뢰하지 않으면 인간은 인간이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취하게 될 것이다.

  교훈: 이스라엘이 생존하기 위해서는 강대국을 의지하는 대신 하나님께 돌아와 회개하고 그분의 말씀에 순종해야 했다.

나의 삶 속으로
| 묵상 |
그대는 어려운 일을 당할 때 누구에게 가장 먼저 도움을 요청합니까?
우리는 어려운 일을 당하면 하나님을 찾기보다 먼저 사람들의 도움을 구하기 쉽습니다. 현실적인 답과 눈에 보이는 대책을 찾습니다. 그러다가 아무 데서도 답을 찾을 수 없을 때 비로소 하나님께 도움을 청합니다. 왜 처음부터 하나님께 가지 못할까요? 왜 처음부터 그분께 길을 인도해 달라고 요청드리지 않는 것일까요? 아직도 하나님보다 나를 또는 인간을 더 신뢰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 적용 |
그대는 지금 어떤 문제가 있습니까? 그 문제를 어떻게 하나님께 가지고 나아가겠습니까?

    영감의 교훈
  어리석은 세상의 지혜- “사람의 고안이 하나님의 계획을 방해하는 때가 자주 있다. 주의 성전을 짓는 자들은 산에서 보이신 모형 곧 하늘의 모양을 따라 지을 것이다. 하나님의 종들이 성령의 지도를 받지 아니하는 자들의 의견에 의지 할 때에 하나님은 수치를 당하시고 복음은 배신을 당한다. 세상의 지혜는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어리석다. 세상의 지혜에 의뢰하는 자들은 분명히 과오를 범할 것이다”(시대의 소망, 354).

    기도
  하나님, 저는 지금까지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스스로 해보고 그래도 안 되면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먼저 하나님께 가겠습니다. 불가능한 일뿐 아니라, 중요한 일 그리고 작은 일까지 말씀드리며 하나님과 동행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둘째날(월)
4월 8일
길들인 암소

  “너희가 자기를 위하여 공의를 심고 인애를 거두라 너희 묵은 땅을 기경하라 지금이 곧 여호와를 찾을 때니 마침내 여호와께서 오사 공의를 비처럼 너희에게 내리시리라”(호10:12).

도입)
하나님은 우리에게 묵은 땅을 기경하라 신다. 우리들의 묵은 땅 곧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말씀으로 거듭 나지 못한 옛 사람의 마음 밭을 기경 하라 하신 것이다. 우리는 하루 생활 속에서 열심히 일을 한 것이 "악을 밭 갈아 죄를 거두고 거짓 열매를 먹는" 일을 한다고 주께서 책망을 하신다. 그 이유가 우리가 우리의 길과 우리에게 속한 지혜와 재능 사람에게 주어진 능력들의 많음을 의뢰한 이유라고 하셨다. 너희는 악을 밭 갈아 죄를 거두고 거짓 열매를 먹었나니 이는 네가 네 길과 네 용사의 많음을 의뢰하였음이라(호세아10:12~13)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자신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다. 우리의 시선에서 여호와를 잊어버릴 때 우리는 하나님의 길이 아닌 자신의 길을 가게 된다. 바로 이때에 우리는 여호와를 찾아야 할 때인 것이다.

  호 10:11~13을 읽어 보라. 여기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어떤 기별을 주시는가? “마침내 여호와께서 오사 공의를 비처럼 너희에게 내리시리라”는 말씀은 무슨 뜻인가? 호세아 10장에서 하나님의 자녀 에브라임은 곡식을 주워 먹기 위해 곡식 밟기를 좋아하는 훈련된 어린 암소로 비유된다. 들판에서 일하도록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멍에를 지울 때, 공의와 인애는 자랄 것이었다.
  성경 시대에 멍에는 중요한 도구였다. 짐을 짊어질 가축은 먼저 타작 마당에서 일하면서 고분고분해지도록 길들여진다(렘 50:11). 멍에를 메고 있는 동안 송아지들은 옥수수를 밟는다. 그다음 타작 도구를 끈다(삼하 24:22 참고). 이런 일은 쟁기로 논고랑을 파는 숙련된 작업을 위한 훈련 과정이다(왕상 19:19, 렘 4:3 참고). 이스라엘 백성을 위한 하나님의 훈련 계획이 이와 비슷했다. 하나님은 에브라임의 아름다운 목에 멍에를 지워 그로 하여금 열심히 땅을 기경하게 하실 생각이었다.
  호 10:12을 보면 여호와께서 바라시는 것은 이스라엘이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다. 의와 변치 않는 사랑은 언약이 새롭게 될 때 하나님이 그의 신부에게 약속하시는 선물이다(호 2:19). 백성이 공의를 심으면 인애를 거둘 것이다. 이스라엘은 여호와를 구하고 그분의 뜻을 찾아야만 다가오는 심판으로부터 구원을 받을 수 있다. 자비의 문은 선택받은 백성이 회개하기를 기다리며 아직 열려 있다. 공의를 심으라는 권고는 백성 사이의 문제에 관한 것이며 하나님을 찾으라는 권고는 하나님과 백성 사이의 관계에 대한 것이다. 땅을 기경하는 일은 영적 또는 사회적 개혁과 부흥을 상징한다. 하나님과 백성들은 그 땅에 복이 돌아오도록 상호 협력해야 한다. 그러면 번영이 꽃 피고, 영광이 온 땅을 뒤덮을 것이다(호 14:5~7).

부가적용)
자신에게 속한 세상의 것을 의뢰 하는 모든 것들을 의뢰 하는 것은 악을 밭 갈아 죄를 거두고 거짓 열매를 먹는 죄악을 거두는 어리석은 자가 된다는 말씀이다.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을 약화시키고 그분의 신실하심을 믿지 못하고 세상을 의지하려고 하는 모든 것이 다 악하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이 아닌 세상을 의지하려는 악에서 돌아서서 하나님을 찾고 그 하나님을 의지하여야 한다. 가장 먼저 할 것은 우리가 지금 주님을 찾는 것이다. 우리가 주님을 찾는 것은 단편적 현상이 아니다. 그것은 시간을 넘어선 영원한 현재이다. 상황과 시간을 넘은 그 영원한 지금 속에서 우리는 언제나 주님을 찾아야 한다. 지금이 곧 여호와를 찾을 때이다. 그것이 우리의 오늘이다.

  교훈: 북방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훈련을 받을 필요가 있었다. 그것만이 심판을 피하고 약속하신 번영을 누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나의 삶 속으로
| 묵상 |
그대는 주님의 멍에를 메고 있습니까?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마 11:28~30).

| 적용 |
그대가 하나님의 백성으로 남아 있으려면 어떤 훈련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까?

    영감의 교훈
  참된 번영의 기초가 되는 율법- “하나님은 국가나 개인이 나를 물론하고 모든 참된 번영의 기초가 되는 원칙을 율법 가운데 나타내 보이셨다. 모세는 하나님의 율법에 대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하기를, 이것은 ‘너희의 지혜요 너희의 지식이라’, ‘이는 너희에게 허사가 아니라 너희의 생명이’(신 4:6, 32:47)라고 하였다. 이렇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보증된 축복은, 그와 동일한 조건과 동일한 정도로 천하의 모든 국가와 모든 개인에게도 보증되었다”(교육, 174).

    기도
  주님, 아직 제멋대로인 저를 주께 맡깁니다. 주인의 뜻에 순종하는 암소처럼 저를 길들여 주옵소서. 일생 도움이 되지 않는 이 고집을 꺾고 순종함으로 얻는 하늘의 복과 은혜를 누리게 해 주시옵소서.

셋째날(화) 걸음마를 배우는 자녀
4월 9일

  “이스라엘이 어렸을 때에 내가 사랑하여 내 아들을 애굽에서 불러냈거늘…그러나 내가 에브라임에게 걸음을 가르치고 내 팔로 안았음에도 내가 그들을 고치는 줄을 그들은 알지 못하였도다”(호 11:1, 3).

도입)
이스라엘과 하나님의 관계가 자식과 부모 사이로 그려진다. 여러 가족언어(家族言語)가 이를 반증한다 : "이스라엘의 어렸을 때에 내가 사랑하여 내 아들을 … 걸음을 가르치고 내 팔로 안을지라도 …."  사랑을 원수로 갚는 철부지에 지나지 않는 못나디 못난 무지렁이 같은 이스라엘(2-4)이지만 여전히 "나는 네 가운데 거하는"(호 11:9) 하나님이라 말씀하신다.  앗수르의 포로가 되어 있음에도 말이다(호 11:5-7). 자식은 정말이지 부모의 사랑을 영영 알지 못하는 그런 존재들이란 말인가(호 11:3). 애굽에서 불러낸 그날부터 바벨론의 포로가 되는 날이 임박한 날까지, 아니 세상 끝 날까지 하나님은 변함없이 이스라엘을 사랑하신다. 그럼에도 이스라엘은 의도적으로 이를 무시한다(호 11:3,7). 하나님은 이런 철이 없는 이스라엘을 앗수르 막대기를 통해 징계하시지만(호 11:5-7), 그러나 거기가 끝이 아니라 회복을 준비하는 또 하나의 시작이었다.

  호세아는 하나님의 방법이 마치 자상한 부모가 어린 자녀를 팔로 보호하면서 걸음마를 가르쳐 주는 것 같다고 말한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그렇게 이스라엘을 돌보셨다.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가 호세아서의 핵심 기별이다. 그분의 징계에는 깊은 동정이 있고, 그분의 분노에는 헤아릴 수 없는 자비가 있다.
  신 8:5, 잠 13:24, 히 12:6, 계 3:19을 읽어 보라. 이 성경절들이 공통적으로 제시하는 한 가지 사실은 무엇인가? 우리는 이 말씀들로부터 어떤 위로를 얻을 수 있는가?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이 그분의 특별한 자녀라는 사실을 애굽 왕에게 알리셨다(출 4:22~23). 애굽을 포함하여 모든 나라가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지만, 히브리인들은 그분의 장자로 선택되었다. 광야에서 하나님은 마치 “사람이 자기 아들을 안는 것같이”(신 1:31) 자기 백성들을 돌보셨다. 그뿐 아니라 “사람이 그 아들을 징계함같이”(신 8:5) 그들을 징계하셨다.
  “세상에서 하나님과 인류를 위해 참된 봉사를 하는 모든 사람은 누구나 슬픔의 학교에서 예비 훈련을 받는다. 책임이 중하면 중할수록, 봉사의 직임이 높으면 높을수록, 그 시험은 더욱더 철저하고 그 단련은 더욱 혹독하다”(교육, 151).
  부모가 사랑하는 자녀의 유익을 위해 그들을 징계하는 것은 당연하다. 결점이 있는 타락한 인간 부모도 이렇게 한다면 하나님은 어떠하시겠는가? 우리에게 시험이 온다 할지라도 우리는 얼마나 그분의 사랑을 신뢰해야겠는가?

부가적용)
하나님은 약 700년 전(前) 출애굽에서부터 이어온 '사랑이야기'를 추억하신다(호세아 11:1). 이것은 또 700년 후(後)에 마태에 의해 예수님에게서 성취되는 메시야 예언으로까지 확장된다(1, 마2:15). 그만큼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의 기초는 한결같은 사랑이다. 하나님은 그 사랑을 선지자들을 통해서 지속하기를 원하셨다(호 11:2). 그러나 문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었다. 부모이신 하나님께서 저들을 "부를수록 저희가 점점 멀리하고", 그것과 비례하여 "바알들에게 제사하며 아로새긴 우상 앞에서 분향하였"다. 부모도 아닌 가짜들에게 몸과 마음 모두를 다 주어버렸다. 이것은 부모를 무시한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가슴에 못을 박는 것이요, 배은(背恩)이자 배신(背信)이다. 누구로부터 받은 사랑이고, 어떻게 받은 은혜인데 헌신짝 버리듯 이혼사유를 만들어 가는지 모르겠다. 그러면서도 종교적 형식만 그럴 듯하게 붙들고 있으니 -한 지붕 두 가정이다.- 이거야말로 가증한 '두 마음'이 아니고 무엇이랴(2:13, 4:12, 9:4, 10:2). '그러나'(호 11:3) 하나님의 사랑은 눈물겹다. 이스라엘의 못남과 상관없이 "에브라임에게 걸음을 가르치고" 또 사랑의 팔로 저들을 안아 지극 정성으로 양육하신다(3). 2절처럼 살았고, 또 살고 있어도 말이다. 이것만이 아니라 사랑의 줄로 이끌며, 멍에를 벗기며, 또한 의식주(衣食住)에 부족함이 없도록 거두셨다(4). 그럼에도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고치시는 줄을 알지 못하였"(3)다. 이게 어찌 이스라엘만의 문제겠는가. 과연 나는 하나님과 건강한 사랑의 관계에 있는가를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죄(罪)로부터 건져냄을 받았으면서 그 은혜를 잊어버리고 사랑할 줄도 모르고, 사랑 받을 줄도 모르고, 사랑 안에 거할 줄도 모르는 '성인아이'는 아닌지 모르겠다. 어찌 보면 하나님의 사랑이란 이스라엘('나')의 어떠함 때문이 아닌 것 같다. 그렇지 않다면 이 사랑의 관계는 이미 까마득한 옛날에 끝장이 나고 말았을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다시 저들을 사람 막대기와 인생채찍으로 다스리신다(5-7): "나는 그 아비가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니 저가 만일 죄를 범하면 내가 사람 막대기와 인생채찍으로 징계하려니와."(삼하7:14)  앗수르가 의로워서가 아니다(호 11:5b). 이스라엘로 정신을 차리고, 그래서 다시 첫사랑의 관계로 회복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눈물겨운 사랑의 또 다른 색깔이 바로 앗수르 막대기를 사용하시는 것으로 그려지는 것이다. 그러나 이 어인 일인가?  "내 백성이 결심하고 내게서 물러가나니 비록 저희를 불러 위에 계신 자에게로 돌아오라 할지라도 일어나는 자가 하나도 없도다."(호 11:7)  하나님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죄의 뿌리를 끊고 새롭게 시작하게 하시고자 사랑의 채찍을 드셨으나 이스라엘의 고집불통(固執不通)은 참으로 끈질기다. 사랑하지만 죄의 값을 치르게 해야만 하는 하나님의 마음과 그에 따른 고민이 역력히 느껴지는 대목이다.  이렇듯 징계는 사랑의 또 다른 방법이다.

  교훈: 하나님은 자녀에게 걸음마를 가르치는 부모처럼 우리를 자상하게 돌보시되, 때로는 우리를 위해 징계하시기도 한다. 하지만 모든 동기는 사랑이다.

나의 삶 속으로
| 묵상 |
그대는 부모 같은 하나님의 돌보심과 애정 어린 징계를 경험하고 있습니까?
누구든지 현실이 만족스러운 경우는 거의 없을 것입니다. 나와 다른 사람을 비교하면 하나님이 정말 나를 보살피는지 의심하게 됩니다. 거기다 어려운 일이라도 겹치면 가혹한 운명을 원망합니다. 그러나 과거부터 지금까지의 인생길을 천천히 뒤돌아 보면 고비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해 주셨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분의 사랑의 동행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 적용 |
그대는 지금 겪는 어려움 또는 삶의 큰 숙제를 어떻게 믿음의 눈으로 해석하겠습니까?

    영감의 교훈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들임-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들을 취급하시는 하나님의 길을 깨닫고 그분의 가르침을 받아들인다면 그들은 그들이 걸어갈 곧은 길과 그들을 흑암과 낙망을 통하여 인도할 빛을 발견할 것이다. 다윗은 그를 취급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에서 지혜를 배우고 지존자의 징계 아래 겸손히 무릎을 꿇었다. 그의 참된 상태에 대한 선지자 나단의 충실한 묘사는 다윗에게 자신의 죄를 깨닫게 하고, 그 죄를 버리게 했다. 그는 온유하게 충고를 받아들이고 하나님 앞에 자신을 낮추었다”(교회증언 4권, 14).

    기도
  하나님이 저의 아버지이심을 믿습니다. 제가 겪는 어려움은 하나님이 저를 버리고, 저주하며, 괴롭히기 위한 것이 아님을 믿습니다. 저를 불쌍히 여기시고 제 눈물을 닦아 주옵소서. 제가 힘을 낼 수 있도록 부디 끝까지 저와 함께 계셔 주옵소서.

넷째날(수) 분노보다 강한 자비
4월 10일

  “에브라임이여 내가 어찌 너를 놓겠느냐 이스라엘이여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내가 어찌 너를 아드마같이 놓겠느냐 어찌 너를 스보임같이 두겠느냐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돌이키어 나의 긍휼이 온전히 불붙듯 하도다 내가 나의 맹렬한 진노를 나타내지 아니하며 내가 다시는 에브라임을 멸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내가 하나님이요 사람이 아님이라 네 가운데 있는 거룩한 이니 진노함으로 네게 임하지 아니하리라”(호 11:8~9).

도입)
하나님의 사랑은 징계보다 더 강하고 끈질기다. 하나님의 사랑과 이스라엘의 반항은 무구한 세월동안 반복된다. 인간을 보면 이미 끝난 것 같은데 하나님을 보면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이렇듯 사랑은 징계로 막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다시 온 몸으로 품어 그를 회복시키는 것을 다시 시작케 한다. 하나님의 사랑은 포기되지 않으며, 그것만큼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 사랑이 앗수르에까지 다시 찾아가시는 것으로 새롭게 이어진다. 앗수르에 포로로 끌려가고(BC 722), 그래서 나라가 멸문(滅門)하는 것, 진정 그것으로 끝이라면 상상만 해도 아찔하다. 놀라운 것은 포로기 이후까지를 말씀하신다는 점이다(8). 하나님은 앗수르에 있는 이스라엘을 향해 소돔과 함께 멸망한 아드마나 스보임처럼 만드는 일은 없을 것이라 언약하신다(8-9, 신29:23). 이처럼 결정하신 하나님의 마음이 찡하게 전달된다 :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돌아서 나의 긍휼이 온전히 불붙듯 하도다."(8)

  이 성경 본문은 마치 하나님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창 같다. 하나님이 정말 거역하는 아들을 율법이 요구하는 것처럼 돌에 맞아 죽도록 내주시겠는가?(신21:18~21, 창 19:17~23 참고) 위의 말씀은 인간의 죄 때문에 겪는 하나님의 고난과 우리를 구원하고픈 그분의 소망을 볼 수 있는 통찰을 제시한다.
  죄 많은 이스라엘은 멸망을 당해 마땅하지만, 하나님은 그들이 회개하기까지 애쓰시며 인내와 자비로써 자기 백성을 끝까지 사랑하신다. 아브라함 시대에 사해 남동쪽 요단 계곡에는 다섯 개의 도시가 자리를 잡고 있었다(창 14:8). 소돔, 고모라, 아드마, 스보임, 소알은 평원의 도시로 알려져 있었지만, 그중에 소알을 제외하고 네 도시는 회개하지 않는 악한 태도와 행위로 인하여 완전한 멸망의 실례가 되었다(신 29:23). 이들이 바로 위에서 호세아가 언급한 도시들이다.
  호세아 11장은 하나님의 방법이 죄 많은 인간들의 방법을 훨씬 초월한다는 사실을 가르친다. 그분은 아픔만 있는 결정을 내리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사랑으로 자기 백성에게 치유, 건강, 회복을 가져다주기를 바라신다. 하나님이 징계를 내리시는 목적은 복수와 파괴가 아닌 교정과 화목이다. 그리스도인 가운데서도 많은 이가 이러한 측면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분을 인간의 잘못을 찾아 벌하시는 복수와 분노의 하나님으로 바라본다. 심지어 어떤 이들은 그분이 구원받지 못하는 자들을 영원한 지옥불에서 고통받게 하신다고 믿는다. 그러나 여기서 보는 것처럼 하나님의 모습은 절대 그런 것이 아니다.

부가적용)
하나님의 사랑의 놀라운 일은 하나님의 구원이 좀 더 큰 그림으로 드러나고 있음이다(10-11). 애굽과 앗수르에 흩어진 이스라엘 백성들은 물론 온 열방, 곧 "자손들이 서쪽에서부터 떨며"(10) 빨리 날아올 것이라 하신다. 하나님은 이 일이 이루어지기까지 오래 참으신 셈이다. "사랑은 오래 참고 …."(고전13:4)  이것이 그토록 철부지처럼 배은망덕(背恩忘德)하던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이다. 결국 하나님의 사랑이 승리한다. 참으로 끈질긴 '사랑행전'이다. 하나님의 구원의 메시지는 사자의 울음소리처럼 강렬하다. 죄로 고장 난 이스라엘, 죄의 깊은 잠을 자고 있는 이스라엘, 이방의 포로가 되어 소망 없던 이스라엘, 하나님의 품을 떠나 이방의 객이 되어 잊혀져 가는 이스라엘을 다시 깨우신다. 다시는 들을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하나님의 음성, 그것은 거룩한 곳이 아닌, 하나님을 경배라는 곳이 아닌, 저 이방의 땅에까지 들려온다. 이제는 하나님 아버지의 품으로 새처럼 날아갈 때가 되었다. 사랑의 둥지를 향해, 영원한 안식처로 다시 돌아갈 때다. 돌아가자, 우리의 하나님의 집으로!  

  교훈: 하나님이 진정으로 바라시는 것은 백성들의 파멸과 고통이 아니라 그들의 구원과 회복이다.

나의 삶 속으로
| 묵상 |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다음의 성경절을 읽고 묵상하십시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벧전 2:24).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갈 3:13).

| 적용 |
지금 이 상황에서 하나님은 그대가 어떻게 은혜를 누리며 회복되기를 바라실까요?

    영감의 교훈
  영원지옥설이 초래한 악- “죽은 악인들이 영원히 불타고 있는 지옥에서 불과 유황으로 고통을 받는다는 것과 사람이 짧은 일생에 범한 죄 때문에…내내 고통을 받아야 한다는 교리는 사랑과 자비의 감정에 비추어 볼 때 그리고 심지어 공의에 대한 우리 자신의 견해에 비추어 볼 때에도 얼마나 모순되는가. …영원 지옥설로 말미암아 초래되어 온 악은 사람의 마음으로 능히 헤아릴 수 없다. 사랑과 자비로 충만하고 동정이 넘치는 성경의 가르침이 미신으로 어두워지고 공포로 가리워졌다”(각 시대의 대쟁투, 535~536).

    기도
  저를 죽기까지 사랑하신 주님, 저를 버리지 않고 자비를 베푸시며 용서하시고 거둬주셔서 감사합니다. 무질서하게 파괴된 제 삶을 주님의 손에 맡깁니다. 하나님의 은혜 아래서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게 해 주시옵소서.

다섯째날(목) 치유, 사랑 그리고 양육
4월 11일

  “너는 말씀을 가지고 여호와께로 돌아와서 아뢰기를 모든 불의를 제거하시고 선한 바를 받으소서 우리가 수송아지를 대신하여 입술의 열매를 주께 드리리이다”(호 14:2).

도입)
호세아서를 통해 우리의 죄악이 무엇인지를 안다. 하나님은 호세아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신앙의 배역을 돌이키고 돌아와서 세 가지를 말하라고 했다. 첫째, 수송아지를 대신해서 내 입술을 드리겠다. 둘째, 앗수르의 구원을 의지하지 않고 말(타고 다니는)을 의지하지 않겠다. 셋째, 손으로 지은 우상을 향해서 너희가 우리 신이라고 말하지 않겠다. 이렇게 말하고 돌아오면 하나님이 축복해주시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말씀을 보게 되면 신앙의 배역한 상태가 어떤 상태인지 알 수 있다.

  고대의 어떤 학자들은 신약의 예수님과 달리 구약의 여호와를 엄하고 용서하지 않는 하나님으로 보았다. 왜 그와 같은 잘못된 결론에 이르렀을까? 호세아 14장의 기별은 그와 같은 결론이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어떻게 보여 주는가? 하나님의 품성과 백성을 향한 그분의 사랑에 대하여 이 성경장은 무엇을 계시하는가?
  호세아서의 마지막 장은 선지자가 선포하는 기별의 절정으로서 하나님의 구원이 마침내 이루어질 것이라는 약속을 재확인한다. 여기서 선지자는 모든 죄악에서 돌이키도록 재차 회개를 촉구한다. 그는 예배에서 사용하는 실제 용어들을 들어 하나님께 돌아오라고 백성들을 권하였다. 그들은 다른 나라를 의지하지 말고 우상숭배를 철저하게 배격해야 했다. 성경 시대에는 누구든지 빈손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었다(출 23:15). 백성들은 희생제물 대신 감사와 진정한 회개의 고백을 드려야 했다.
  백성들이 죄를 고백한 후에 하나님은 일련의 약속을 주신다.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은 거룩한 의원이신 하나님이 그들의 질병을 치료해 주시겠다는 약속이다. 새로워진 하나님과 백성의 관계는 길고 건조한 팔레스타인의 여름철, 꽃과 나무에게 유일하게 습기를 제공할 수 있는 이슬과 같다. 그것은 또한 과일 나무 가운데 최고로 손꼽히는 감람나무에 비유된다. 그 잎사귀는 그늘을 제공하고, 그 기름은 음식과 로션 그리고 빛을 내는 연료로 사용된다. 또한 레바논의 백향목은 팔레스타인에서 가장 크게 자라는 나무로서 가장 유용하게 간주된다. 높은 등급의 백향목은 성전이나 왕궁 건축에 사용된다(왕상 6:9~10). 하나님이 심은 나무들이 울창하게 성장하는 것처럼 이스라엘은 온 세상에 나눠 줄 복이 가득한 동산이 될 것이다.

부가적용)
우리가 호세아서를 통해 배운 것은 그렇게도 못나고 패역한 이스라엘을 끝까지 품고 가시는 하나님, 아비(하나님)의 마음을 몰라주는 아들(이스라엘)임에도 부자(父子) 사이를 끊지 않으시는 하나님, 마치 탕자의 아버지처럼 나간 자식 돌아오기만을 밤새 기다리시는 하나님  이스라엘(아들) 때문에 하나님(아버지)의 체면은 물론 위엄과 권위가 땅에 떨어졌음에도 -하나님이 인간에게 모독을 당하신다.- 저희가 다시 정신을 차리고 아들 본연의 자리로 돌아올 수 만 있다면 어떤 대가도 넉넉히 지불하시겠다는 하나님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이처럼 철저하게 배신을 행한 이스라엘, 그 값으로 앗수르에 포로가 되도록 벌을 내리셨지만, 하나님은 또 다시 회복을 언약하신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바로 내가 섬기는 하나님은 이런 분이시다. 당연한 죄 값을 치르고 있음에도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은 사랑으로 요동친다.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돌아서 나의 긍휼이 온전히 불붙듯 하도다.  … 나는 네 가운데 거하는 거룩한 자니 진노함으로 네게 임하지 아니하리라."(호 11:8,9) 그 누가 나의 허물과 죄악을 보면서 이토록 아파해 주고, 회복의 날을 이처럼 목말라 하며 애타게 소망할까? 밴댕이 속처럼 좁디좁은 좁쌀 같은 우리 인간의 마음 상자로는 도저히 헤아릴 수 없는 넓고도 큰사랑의 세계라 아니할 수 없다.

  교훈: 호세아의 마지막 장은 백성들의 회개를 다시 한번 호소하면서 돌아온 자들에게 하나님의 치유와 번영을 약속한다.

나의 삶 속으로
| 묵상 |
아래에 있는 호세아서의 마지막 절을 읽고 하나님의 약속이 이뤄지기 위한 조건이 무엇인지 묵상하십시오.
“누가 지혜가 있어 이런 일을 깨달으며 누가 총명이 있어 이런 일을 알겠느냐 여호와의 도는 정직하니 의인은 그 길로 다니거니와 그러나 죄인은 그 길에 걸려 넘어지리라”(호 14:9).

| 적용 |
그대가 하나님 앞에서 송아지 대신 드릴 입술의 열매가 무엇인지 아래 적어 보십시오.

    영감의 교훈
  자비와 용서로 우리를 가까이 하시는 하나님- “그대들이 하나님의 허락들을 읽을 때에 그것들이 말로 할 수 없는 사랑과 긍휼의 표시임을 기억하라. 무한하신 사랑의 하나님은 마음속으로 죄인을 무궁한 자애(慈愛)로써 생각하신다. …하나님이 진정 그대를 돕는 자라고 믿으라. 그분은 당신의 도덕적 형상을 사람들에게서 회복시키기를 원하신다. 그대들이 자복하고 회개함으로 그분에게로 가까이 나아갈 때에 그분은 자비와 용서로써 그대들을 가까이하실 것이다”(정로의 계단, 55).

    기도
  하나님, 예수님께서 이미 희생을 드리셨으니 저는 제 회개와 사랑의 고백을 제물로 드립니다. 제게 치유와 회복을 베푸셔서 사막 같은 제 삶이 하나님의 복된 동산처럼 아름답게 재창조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여섯째날(금)
4월 12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다음의 두 인용문을 호 7~14장의 기별과 비교해 보라.
  “하나님은 천연계를 통하여, 표상과 상징을 통하여, 부조들과 선지자들을 통하여 세상에서 말씀해 오셨었다. 교훈은 사람의 말로 사람에게 전하여져야 하였다. …하나님의 정부의 원칙들과 구속의 경륜이 명백히 설명되어야 하였다. 구약의 교훈이 사람들 앞에 충분히 제시되어야 하였다”(시대의 소망, 34).
  “연달아 일어난 통치자들이 대담하게 하나님을 대적하고 이스라엘로 더욱 깊이 우상숭배에 빠지게 했던 길고 어두운 세월을 통하여 하나님은 뒤로 물러간 당신의 백성에게 연달아 기별을 보내셨다. 하나님은 당신의 선지자들을 통하여 그들이 배도의 물결을 멈추고 당신께 돌아올 수 있도록 가능한 모든 기회를 주셨다. …이스라엘 나라를 죄에서 구원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강하신 능력에 대한 훌륭한 증인들을 보내지 않고 버려둔 적은 결코 없었다. 최악의 암흑 시대 동안에도 거룩하신 통치자에게 충성을 다하고 우상숭배 중에서도 거룩하신 하나님의 면전에서 흠 없이 살고자 한 사람들이 있었다. 이 충성스러운 사람들은 상당수의 남은 무리에 속한 사람들로 계수 되었는데 그들을 통해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이 성취되도록 되어 있었다”(선지자와 왕, 108).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1. 고대 이스라엘이 어느 날 갑자기 하나님을 떠난 것이 아닙니다. 배도는 서서히 진행되었습니다. 끊임없이 변하는 세상에서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원칙에 신실하게 설 수 있을지 의견을 나눠 보십시오.
  2.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구원의 기별이 신약에서는 확실하게 제시되지만 구약에서는 그렇지 않다고 믿습니다. 이런 생각에는 어떤 오류가 있습니까?
  3. 구약은 예수님과 사도들이 사용했던 성경입니다. 신약에서 호세아를 인용한 성경절들을 찾아보십시오(마 9:13, 롬 9:25~26). 예수님과 바울은 우리에게 진리를 전하기 위해 호세아서의 복음을 어떻게 활용하였습니까?

댓글목록

김명주님의 댓글

김명주 작성일

목사님의 감동적인 교과해설 감사드립니다
길을 찾아 해메이는 양들에게 생명의 빛이 되셨읍니다
건강하시고
지속적인 영감의 말씀 기다리겠읍니다

조춘호님의 댓글

조춘호 작성일

김집사님~! 과찬이십니다. 부족한 해설이 도움이 되셨다면 감사합니다.
집사님의 열린마음과 준비된 마음에 하나님의 축복이 임한 것 같습니다.
행복한 안식일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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