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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과 영적 간음(호세아)[매단락 도입과 부가적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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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조춘호 작성일13-03-31 07:23 조회4,670회 댓글2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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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제1과 영적 간음(호세아)
4월 6일 안식일
일몰:오후 6시 59분

    기억절: “내가 나를 위하여 그를 이 땅에 심고 긍휼히 여김을 받지 못하였던 자를 긍휼히 여기며 내 백성 아니었던 자에게 향하여 이르기를 너는 내 백성이라 하리니 그들은 이르기를 주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리라 하시니라”(호 2:23).

    연구범위: 호 1:1~3, 겔 4:1~6, 호 2:12~18, 호 4:1~3, 약 5:1~7, 계 14:6~12.

중심 사상: 백성들은 영적으로 간음을 저지르고 하나님은 그들을 심판하시지만 자기 백성들에 대한 그분의 사랑은 변함이 없다.

도입)
우리는 성경을 연구할 때 항상 돌아가야 할 원칙이 있다. 그것은 요한복음 5:39절이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고 한 말씀이다. 성경은 영생의 말씀을 가르치는 책이며 이 책의 모든 내용의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를 가르치는 책이다. 그래서 우리가 모든 책을 읽기 전 한 가지 반드시 집중해야 할 점이 행 20:24절의 말씀이다.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고 한 것에 나타난 것처럼 성경의 모든 내용은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거 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마음 속에 잊지 말고 염두에 두어야 한다. 이 성경에 나타난 모든 기록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하고 그분의 은혜의 복음을 증거 하는 것이 되어야 할 것이다. 호세아의 전체적인 기별이야 말로 하나님을 떠난 인간을 어떠한 사랑으로 사랑하셨는지를 보여주는 가장 위대하고 훌륭한 하나님의 은혜의 기별 중의 하나일 것이다. “어느 나라가 그 신을 신 아닌 것과 바꾼 일이 있느냐 그러나 나의 백성은 그 영광을 무익한 것과 바꾸었도다”(렘2:11)고 하셨는데 호세아의 기별은 이스라엘 역사에서 반복되는 하나님 갈아치우기의 반복적 사실을 고발하고 이런 음란한 이스라엘 백성을 사랑하신 하나님의 극진한 사랑의 이야기이다.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그들이 생수의 근원 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그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들이니라”(렘 2:13절). 이스라엘은 생수의 근원인 하나님을 버렸다. 그리고 “물을 담을 수 없는, 터진 웅덩이”인 바알을 택한 것이다. 바알은 아무런 유익을 줄 수 없기 때문에 터진 웅덩이로 비유된다. 그들은 출애굽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들에게 구원을 베푸신 여호와 하나님을 배반하고, “아무것도 아닌 것”이요 “도움이 못되는 것” 곧 바알을 추종한다. 그들을 “내 백성”이라고 불러주시는 하나님은 철저히 버림받고 있으나 그들을 그래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안타까운 이야기가 호세아서의 이야기의 중심에 있다.

  결론: 우리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듣고 돌아가면, 그분은 우리를 용서하시고, 우리의 지위를 바꿔 주실 뿐 아니라 우리에게 복을 주시고, 새로운 생명으로 우리를 이끄십니다.

첫째날(일) 낯선 명령
3월 31일

  “여호와께서 처음 호세아에게 말씀하실 때 여호와께서 호세아에게 이르시되 너는 가서 음란한 여자를 맞이하여 음란한 자식들을 낳으라 이 나라가 여호와를 떠나 크게 음란함이니라 하시니 이에 그가 가서 디블라임의 딸 고멜을 맞이하였더니 고멜이 임신하여 아들을 낳으매”(호 1:2~3).

도입)
우리는 호세아서에서 음란한 여자에게 장가들어 음란한 자식을 낳으라는 이 낯선 내용에 많은 혼란이 올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창녀와 결혼을 시킨 것이라느니 정말 몸을 파는 여자들에게 장가를 들게 하였다느니 하는 말을 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조금만 깊이 살펴보면 이곳에서 말하는 음란한 여자란 누구를 의미하는지를 알게 된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사람들을 지으셨지만 사람들이 하나님을 떠나 하나님을 찾는 자들이 없었다는 것을 알 것이다. 이곳에 나타난 음란한 여자란 바로 저와 여러분들을 포함한 모든 인생들을 의미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 채게 될 것이다. 이 호세아의 주인공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들이다. 그에 대한 반증이 시편 73:27절에 “대저 주를 멀리하는 자는 망하리니‘음녀같이 주를 떠난 자’를 주께서 다 멸하셨나이다”고 하였는데 ‘주를 떠난 자’가 바로 음녀라는 말이다. 이것을 더욱 확증하는 말이‘이 나라가 여호와를 떠나 크게 음란함이니라 하시니’ (호 1:2)에 라는 말씀을 언급해 하나님을 떠난 이스라엘 백성들의 음란함을 직접 언급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경에 나타난 음녀란 일차적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지만 사실 주를 떠난 모든 자를 의미하고 있다.

  부가적용)
우리는 이 세상에 사는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을 떠나 우상을 섬기는 사람들로서 얼마나 자주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에게서 다른 우상에게로 우리의 마음을 빼앗기고 사는가? 호세아를 음란한 여자에게 장가들라 하신 것은 하나님을 떠난 음녀 같은 인생들을 위해 자신을 버리고 이 땅에 온 인류를 위해 자기를 버려 장가드신 예수 그리스도를 표상한다. 삼손이 이방여자와 결혼한 것도 바로 하나님을 알리 못하였던 이방인들을 위하여 죽으신 그리스도를 표상하듯 말이다. 호세아 선지자는 예수님의 생애를 예표하는 선지자이다. 그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음란한 여자와 결혼을 하는 희생을 감수했다. 호세아의 이러한 순종은 온 세상을 구원하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 아들 하나님으로서의 영광과 존귀를 다 버리고 낮고 천한 이 세상에 가장 초라하게 말구유에 탄생하시어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마음을 돌이키시려는 예수님의 생애를 보여준다.

  교훈: 고멜의 부도덕한 행실과 무책임한 결혼 생활을 감내함으로써 호세아 선지자는 이스라엘의 타락과 배도를 슬퍼하시는 하나님의 심정을 이해하였다.

    영감의 교훈
  신실하신 하나님 - “하나님의 위대하심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대부분의 시간 동안 그분으로부터 떨어져 나가 방황하였다(레 26; 신 28). 하나님은 남편이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것처럼 이스라엘을 사랑하시는 것으로 묘사되었다. 호세아서는 악명 높은 불성실과 배반에 직면해서도 하나님이 얼마나 신실하신 분인지를 뼛속 깊이 느끼도록 묘사한다. 계속해서 용서하시는 모습을 통해 그분의 무조건적인 사랑의 품성을 계시한다”(기본교리, 35).

    기도
아버지, 이제야 알겠습니다. 제가 상처를 입고 슬픈 일을 당해 보니, 아버지께서 저 때문에 얼마나 아프고 슬퍼하셨을지 조금 이해가 됩니다. 그런데도 계속 사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둘째날(월) 영적 간음
4월 1일

  “…그들이 바알을 위하여 쓴 은과 금도 내가 그에게 더하여 준 것이거늘…”(호 2:8).

도입)
행17:28-29절에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있느니라 너희 시인 중에도 어떤 사람들의 말과 같이 우리가 그의 소생이라 하니 이와 같이 신의 소생이 되었은즉 신을 금이나 은이나 돌에다 사람의 기술과 고안으로 새긴 것들과 같이 여길 것이 아니니라”고 하신 것처럼 우리가 받은 생명과 기동하여 살 수 있는 능력을 하나님께로부터 받고서 돌에 새기고 금이나 은에 새긴 우상을 섬기는 자들의 삶을 볼 때 그러하다. 어느 나라를 가보아도 그들의 신과 다른 신을 바꾼 사례는 없다. 그런데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은 여호와 하나님을 신도 아닌 것과 바꾼 것이다(렘 2:11). 그들은 하나님을 “가치가 더 떨어지는 것”과 바꾸었을 뿐 아니라 이를 위해 “전혀 가치가 없는 것”을 취하였다. 이 같은 행실은 세계사적으로 유일회적인 사건이다. 창조 이후 전 세계의 역사와 이스라엘의 역사를 지켜보고 있는 하늘도 믿을 수 없는 이 광경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너 하늘아 이 일로 말미암아 놀랄지어다 심히 떨지어다 두려워할지어다”(렘 2:12절). 이스라엘은 하늘도 놀랄 “신(神)-갈아치우기”라는 죄악을 저지른 것이다. 물질과 풍요의 화신인 바알이 무익한 것으로 보이지 않고 물리칠 수 없는 유혹의 대상이 되고 있음이 오늘의 현실이다. 그렇다면 그것에 끌려 사는 하나님의 백성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님-갈아치우기”라는 무서운 죄악에 빠져 있는 것이다.

사54:5에 “이는 너를 지으신 자는 네 남편이시라 그 이름은 만군의 여호와시며 네 구속자는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시라 온 세상의 하나님이라 칭함을 받으실 것이며” 이스라엘 백성을 지으신 분은 자신을 일컬어 남편이라고 하셨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종되었던 애굽에서 꺼내어 낸 하나님의 아내들이었다. 저들이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모든 물질과 생명은 모두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이것들을 가지고 우상 숭배에 빠진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하여 하나님께서는 마음 아파하신 것이다. 고멜이 간음을 행했을 때, 호세아는 배신감과 치욕과 수치를 겪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자신의 고통을 지켜보는 이웃과 친구들에게 하나님의 아내인 이스라엘이 마치 고멜과 같다는 그분의 기별을 말과 행동으로 전하였다. 택함을 입은 백성이 영적인 간음을 저지르고 있었던 것이다.
  선지자 예레미야는 모든 것을 공급하시는 하나님의 자비에도 불구하고 그분께 신실하지 않은 이스라엘을 다른 남자들과 놀아나는 한 창녀로 비유하였다(렘3:1). 선지자 에스겔도 우상숭배에 젖은 이스라엘을 남편을 떠나 “간음하는 아내”로 일컬었다(겔 16:32). 이렇게 성경은 우상숭배를 영적 간음으로 간주한다.
  
  “하나님이 베푸신 복에 대하여 고마움도 감사함도 없는 우리를 그분은 어떻게 여기실까? 우리가 하나님의 선물을 남용하거나 하나라도 가볍게 볼 때, 그분을 향한 우리의 마음과 손은 닫힌다. 해마다 날마다 하나님의 자애로운 선물을 받은 자들이 그 풍요를 허비하면서도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생명을 주신 영혼들은 소홀히 하고 있다. 하나님이 그분의 사업을 유지하고 그의 나라를 세우도록 위탁하신 수단들이 가옥과 토지에 투자되고 과시와 자기만족을 위해 아낌없이 사용되고 있는 동안 그것을 주신 분은 잊혀지고 있다”(The Adventist Review & Sabbath Herald, 1886년 12월 7일).

부가적용)
우리가 누리는 물질적 번영과 축복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나님의 사업을 위해 써야 하고 하나님의 나라의 발전을 위해 써야 할 우리의 재정을 우리의 헛된 우상에 우리의 재물을 쏟고 우리의 마음을 빼앗겨 향락에 빠져 있지는 않은가?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들을 우리의 삶에 나둔 채 살아가고 있지는 않은가?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죄악은 없는가?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에게서 떠난 우리 자신을 살펴보면서 우리의 신랑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죄악을 가지고 있지는 않은지 살펴보아야 한다.

  교훈: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베푸신 풍요를 그분을 섬기기 위한 목적이 아닌 우상숭배를 위해 사용함으로써 영적 간음을 행하였다.

    영감의 교훈
  하나님의 선물에 대한 책임- “이 교회가 혼수상태에서 깨어나 세상의 정신을 떨쳐 버리지 않는다면 그들은 그들의 기회와 특권을 잃어버리되, 영원히 잃어버렸다는 것을 너무 늦게 깨닫고 슬퍼할 것이다. 주는 때때로 세속적인 사물에서의 번영을 통하여 당신의 백성들을 시험하신다. 그러나 그분은 그들이 당신의 선물들을 올바로 사용하도록 의도하신다. 그들의 재물, 그들의 시간, 그들의 힘, 그들의 기회들은 모두 하나님의 것이다. 그들은 이 모든 축복을 주신 분께 책임을 져야 한다”(교회증언 4권, 619).

셋째날(화) 회복의 약속
4월 2일

  “…너는 또 가서 타인의 사랑을 받아 음녀가 된 그 여자를 사랑하라…”(호 3:1).

도입)
부부간에 살면서 가장 치명적인 아픔을 주는 것은 한 사람의 마음이 다른 사람에게로 옮겨가는 것일 것이다. 모든 것이 다 용서될 수 있어도 다른 남자에게로 몸과 마음을 빼앗긴 여자를 사랑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일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타인의 사랑을 받아 음녀가 된 그 여자를 사랑하라고 하셨다. 너무나 자주 하나님을 떠나 우리의 마음을 세상에 빼앗긴 인생들을 여전히 버리지 아니하시고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는 것일 것이다.

  호세아 2장을 읽어 보라. 여기서 하나님이 백성들에게 전하는 바탕 기별은 무엇인가? 이곳에서 제시하고 있는 복음은 무엇인가?
  호세아의 기별이 제시하는 심오한 진리는 이것이다. 하나님은 자격 없는 백성들에게 당신의 변치 않는 사랑을 베푸시지만 그의 백성들은 하나님을 배신한다. 호세아 2장은 이스라엘의 배도에 대한 하나님의 장문의 연설을 담고 있다. 그래서 남편은 심판을 베푼 후에 아내를 광야로 끌고가 거기서 다시 결혼식을 올릴 예정이다. 호세아 2장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전처럼 자신을 사랑해 달라고 구애하시는 미래의 장면을 그리면서 마친다(호 2:12~15). 들짐승도 더 이상 아내의 포도밭과 무화과 나무를 해치지 않고 오히려 새 언약의 동반자가 될 것이다(호2:18). 하나님은 모든 자녀에게 새 이름을 주시고, 과거에 지은 모든 죄를 사하며 즐거이 그들을 치유해 주실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거저 용서하신다. 용서를 위해 하나님은 어떤 값을 치르셨는가? 이 교훈을 얻기 위해 호세아는 어떤 값을 치렀는가?(호 3:1~2)
  이스라엘의 남자로 성장한 호세아는 선조들이 이룩한 사회에서 특권적 지위를 누릴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특권에는 큰 책임이 따랐다. 그는 고대 이스라엘의 남자로서 불경한 아내를 용서하고 집으로 다시 데리고 오기 위해 대단한 노력을 기울였고, 말할 것도 없이 아빠가 누군지 모르는 아이들을 자기 자식처럼 받아들여야 했다. 아내와 그녀가 데려온 아이들과 함께 사회적 거부를 참고 견디기란 생애 가운데 가장 힘든 경험이 될 것이었다. 그럼에도 호세아는 그녀를 다시 샀다.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도 인류를 위해 그와 같은 일을 행하신다. 그리고 그 대가는 십자가의 죽음이었다. 오직 십자가에서 우리는 죄가 야기한 파멸에서 우리를 되사기 위해 하나님이 어떤 대가를 치르셨는지 더욱 분명한 그림을 볼 수 있다.

부가적용)
호세아는 고멜을 데려오는데 은 열다섯과 보리 한 호멜 반으로 샀다. 이를 돈으로 환산해 보면 은 삽십 세겔에 해당한다고 한다. 이는 예수께서 인류를 다시 사기 위해 자기 몸을 은 30냥에 팔렸다. 고멜을 다시 산 가격은 예수께서 자신의 몸을 판 은 30냥의 가격과 같다. 이것이 보통 이스라엘 사회에서 보통 노예의 몸값이었는데(출21:32; 레27:4), 예수께서 자신을 팔아 우리를 다시 사신 십자가의 사랑을 예표하고 있다. 다른 남자에게로 가 버린 타락한 음녀인 아내를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호세아의 모습에서 우리는 롬3:25에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인간의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여 주심으로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시고” 있음을 본다. 호세아의 정신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정신이다. 자기를 사랑치 않는 자를 자신의 목숨 값을 지불해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사랑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바로 호세아의 기별에서 볼 수 있는 것이다.

  교훈: 배도로 말미암아 백성들에게 심판이 이르겠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다시 회복시키리라 약속하셨고, 그 바탕에는 하나님의 희생, 곧 십자가가 있다.

나의 삶 속으로
| 묵상 |
하나님이 그대의 여러 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대를 사랑하며 그대의 영적 생명을 회복시켜 주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을 그대는 얼마나 알고 있습니까?

우리는 자주 그분을 배신하지만 우리에 대한 그분의 사랑은 변함이 없습니다.
우리가 그분의 사랑과 용서를 확신하는 이상 우리는 다시 그분께 돌아갈 수 있으며,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문제는 그런 과정을 반복하면서 우리가 스스로 점점 그분에게서 멀어진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습관적으로 그분의 뜻을 고의로 어기는 태도를 매우 심각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 적용 |
하나님이 우리를 용서하고 회복시키신 뒤에 우리가 다시 배신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영감의 교훈
  구속의 대가-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고전 6:19~20). 얼마나 놀라운 값이 우리를 위하여 지불되었는가! 십자가와 그 위에 높이 달리신 분을 바라보라. 잔혹한 못에 뚫어진 그 손들을 보라. 대못으로 나무에 고정된 그 발을 보라. 그리스도께서는 그 몸으로 친히 우리의 죄를 담당하셨다. 그 고통, 그 고민은 그대의 구속의 대가이다. ‘저희를 구원하여 영원한 파멸을 당하지 않게 하라 내가 한 몸값을 찾았도다’ 하는 명령이 주어졌다”(증언보감 3권, 77).
    기도
  아버지, 하루에도 아버지를 떠났다 돌아오기를 몇 번이고 하는 우리를 늘 변함없이 사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영적 철부지를 부디 붙잡아 주옵소서. 언약에 굳게 설수 있도록 도와주옵소서.

넷째날(수) 재판에 회부된 이스라엘
4월 3일

  “…여호와께서 이 땅 주민과 논쟁하시나니 이 땅에는 진실도 없고 인애도 없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없고 오직 저주와 속임과 살인과 도둑질과 간음뿐이요…”(호 4:1~2).

도입)
호세아 4장과 5장은 음란으로 인해 배도 가운데 있는 이스라엘의 모습을 보여 주는데, 특히 4장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법정으로 소환하는 내용이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이스라엘 땅에 있어야 할 것은 없고, 없어야 될 것들로 가득 찼기 때문이다. 없는 것은 진실, 인애,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다. 그리고 있는 것은 저주, 사위, 살인, 투절, 간음, 강포함이다. 언약 백성인 이스라엘은 마땅히 진실과 인애와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이 땅을 가득 채워야 할 의무가 있다. 그러나 그들은 없어야 할 것으로 땅을 가득 채웠다. 인간이 인애 대신 보복과 이기심으로 통치하면 그는 물론 자신과 함께하는 공동체와 피조물까지도 파멸 속으로 끌고 들어가게 된다. 언약 공동체는 그가 속한 사회에 대한 책임이 있다. 우리는 사회적 책임을 다하고 있는가? 내가 속한 이 땅을 무엇으로 채우려고 하는가? 호세와와 음란한 여자와 사는 것은 한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이스라엘이라는 전 민족적 범죄로서 한 개인의 범죄가 아니라 한 나라의 범죄였다. 이것은 또 온 인류의 범죄였다. 자기 땅에 오매 자기의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다고(요 1:11) 하신 말씀처럼 말이다.

  호 4:1~3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책임을 묻는 또는 법적인 논쟁(히브리어로 ‘리브’)을 벌이는 분이다. 하나님께 택함을 받은 나라가 언약에 따라 사는 데 실패함으로 그분 앞에 피고가 되어 섰다. 진리, 자비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이스라엘과 그분 사이의 관계를 설명하는 특징이 되어야 했다. 호 2:18~20에 따르면 하나님은 언약을 새롭게 할 때 이 선물들을 베푸신다.
  그러나 죄로 인하여 이스라엘의 삶에는 이러한 은혜의 선물들이 없었다. 호세아가 열거한 죄악들은 이 나라를 무정부 상태 직전까지 몰고 갔다. 이스라엘이 겪는 파국적 상황은 제사장과 선지자를 비롯한 종교지도자들에게 책임이 있었다. 그들이 학대에 맞서고 불의한 행동을 지적했다면 하나님께 견책을 받지는 않았을 것이다.
  구약에서 우상숭배는 가장 심각한 죄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국가와 개인의 삶에 필요한 여호와 하나님의 역할을 부정하기 때문이다. 건조한 기후로 인하여 강우는 이스라엘 땅에서 생사의 문제였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생명을 주는 축복의 비가 바알에게서 온다고 믿게 되었다. 그러다 마침내 이방신을 위해 신당을 짓고 도덕적으로 문란한 예배 의식을 행하는 심각한 문제가 발생했다.
  동시에 사회 부정의가 그 땅에 만연하였다. 이스라엘의 부유층은 앗시리아에 조공을 바치기 위해서 농부들을 착취하였다. 많은 이가 사기와 부조리를 일삼았다(호 12:7~8). 이러한 부정의로 말미암아 평화와 번영의 시기가 가고 정치적, 사회적 혼란기가 왔다. 나라 전체가 총체적인 혼란에 빠졌다.

부가적용)
구원의 공동체인 이스라엘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아름다운 문화를 세우지 못하고 오히려 반대적인 것으로 채웠을 때 하나님은 탄식하셨다. 호세아 4장은 약속의 땅을 악으로 채운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탄식이다. 하나님께서는 아무 사람이든지 다투지 말고 책망하지 말라고 말씀하셨다(4절). 그 이유는 제사장이나 백성들이나 다 똑같이 부패했기 때문이다(4,9절). 그래서 호세아 선지자는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라고 탄식하였던 것이다. 하나님의 대한 지식의 결핍은 사회적 혼란과 타락을 야기한다. 그래서 말씀하시기를 “네가 지식을 버렸으므로, 나도 너를 버려,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고” 선언하고 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된 것이다. 우리는 구별된 하나님의 백성이기에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과 구별되는 점이 있어야 한다.

  교훈: 하나님과 멀어진 이스라엘 백성은 지도자로부터 부유층 그리고 일반 백성에 이르기까지 우상숭배와 각종 부조리 등을 일삼았다.

나의 삶 속으로
| 묵상 |
약 5:1~7을 읽어 보고 세 천사의 기별(계 14:6~12)과의 관계를 생각해 보십시오.
“들으라 부한 자들아 너희에게 임할 고생으로 말미암아 울고 통곡하라 …너희가 말세에 재물을 쌓았도다 보라 너희 밭에서 추수한 품꾼에게 주지 아니한 삯이 소리 지르며 그 추수한 자의 우는 소리가 만군의 주의 귀에 들렸느니라 …너희는 의인을 정죄하고 죽였으나 그는 너희에게 대항하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께서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약 5:1~7).

| 적용 |
말세에 사회적, 경제적 부정의에 편승하지 않으려면 어떤 삶의 태도가 필요할까요?

    영감의 교훈
  잘못된 부- “하나님을 섬긴다고 공언하는 가난한 부자들은 연민의 대상이다. 그들은 말로는 하나님을 안다고 하지만 행함으로는 그분을 부인한다. 얼마나 큰 흑암인가! 그들은 진리를 믿는다고 하지만 그들의 행실은 그들의 고백과 일치하지 않는다. 부를 사랑함이 사람을 이기적이며, 각박하며, 거만하게 만든다. 부는 힘이다. 그리고 흔히 그것을 사랑하는 태도는 사람 속에 있는 고귀하고 경건한 모습을 말살시키고 마비시킨다”(교회증언 2권, 682).

    기도
  하나님, 이 세상은 물질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사람들은 돈을 얻기 위해 신념과 도덕을 버립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우리마저 때때로 유혹에 굴복하며 사랑과 공의를 외면합니다. 이 심각한 죄악에서 우리를 건져 주시옵소서.

다섯째날(목) 회개하라는 호소
4월 4일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17:3).

도입)
호세아는 심판과 회복의 메시지 전파를 통해 회개를 촉구함으로써 패역한 이스라엘 백성과 하나님간의 화목을 도모한 중보자의 역할을 감당하였다. 이는 죄인과 하나님 사이의 유일 절대한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가 된다(호 6:1-3). 음부(淫婦)인 고멜에 대한 호세아의 사랑은 불의한 선민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절대적 사랑을 상징한다. 그리고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통하여 이러한 죄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의 최절정을 보게 된다(호 4:14).

  히브리어로 호세아라는 이름의 뜻은 ‘여호와께서 구원하시다.’이다. ‘여호수아’, ‘이사야’ 심지어 ‘예수’도 이와 비슷한 이름이다. 선지자는 백성들에게 죄를 버리고 여호와 하나님 안에서 피난처를 찾으라고 촉구한다. 왜냐하면 그분은 그들의 창조주이며 구속주이기 때문이다. 거룩한 심판의 목적은 죄인들로 하여금 그들의 생명과 능력의 근원이신 분을 상기시키기 위해서였다. 그들은 그분께 돌아가야 했다. 그래서 심판을 선포하고 경고하는 와중에도 호세아는 인간의 회개와 함께 하나님의 용서를 제시한다. 선지자는 “지식이 없으므로”(호 4:6) 죄 가운데 멸망하게 될 나라에 촉구하기를 하나님을 온전히 알고 그분의 영원한 원칙에 맞게 살도록 노력하라고 말한다. 그들이 반역하여 마침내 심판에 이르게 된 이유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의 결여 때문이었다.
  그들은 믿음과 순종을 통해 스스로 하나님에 대하여 알 수 있었다. 그 지식은 그들에게 심히 가까웠다. 여호와와 우리의 관계가 결혼으로 비유되고, 기독교 신앙 생활에서 살아 계신 하나님과의 관계가 중요시되며, 하나님이 백성들에게 자신에 대하여 알고 온 마음으로 그분의 뜻을 따르도록 촉구하시는 이유가 다 이때문이다. 죄 문제는 하나님과 인류 사이에게 분리를 가져왔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으로 말미암아 우리 각자가 주님과 함께 가까이 동행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우리는 정말 그분을 알 수 있다.
  하나님에 대해 아는 것과 하나님을 아는 것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 이런 차이는 우리의 일상에 어떻게 반영되는가? 하나님을 어떻게 알 수 있는지 질문을 받는다면 어떻게 대답하겠는가? 다음 성경절들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중요성에 대하여 무엇을 가르치는가?(출 33:12~13, 렘 9:23~24, 단 11:32, 요일 2:4)

부가적용)
선지자 호세아가 자신의 아내로 정숙한 여인을 택하지 않고 음란한 여인인 고멜을 택한 것은 하나님께서 의인을 택하시지 않고 죄인을 택하신 것과 그 맥을 같이한다. 이는 죄인이었던 우리가 늘 감사해야 할 제목인 것이다(롬 5:8). 집을 나가 창부가 된 아내를 찾는 남편의 심정을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집에 가자고 그녀의 손을 붙들기보다는 한 차례 뺨을 후려칠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를 아내를 구타하는 몰염치한 자라고 규탄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런 아내를 버린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도덕적으로 그리 거리낄 것이 없는 행동이다. 왜냐하면 그녀는 결혼의 계약을 파기했고 혼인의 순결을 배반했으며 가정을 파괴시킨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러워진 그녀를 향해 집에 가자고 손을 내미는 호세아의 행동은 선택한 백성이 비록 타락할 지라도 결코 포기하지 않으시고 끝내 돌이켜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절대적 십자가의 사랑, 죽기까지 사랑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준다(호 3:1-3). 이 얼마나 감동적인 사랑인가? 이제 우리는 그런 하나님의 사랑을 돌이켜 매순간 경배하고 우리 주님을 찬양하는 일에 게으르지 말아야 할 것이다.

  교훈: 하나님이 정말 바라시는 것은 우리가 그분을 알고 그분의 뜻에 따라 사는 것이다. 그분을 알지 못하면 우리는 멸망의 길로 향하게 된다.

나의 삶 속으로
| 묵상 |
그대는 하나님을 어떤 분으로 알고 있습니까?
하나님을 엄한 분으로 생각하면 우리의 신앙과 삶도 엄격해질 것입니다. 하나님을 세상에 무관심한 신으로 생각하면 우리는 자신의 선택과 결정을 중요하게 여길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운명을 미리 다 결정해 놓았다고 믿는다면 우리는 모든 것을 운명으로 받아들이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저 복 주고 저주하는 분으로 바라본다면 우리의 신앙도 거기에 맞춰질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의 신앙은 곧 우리가 하나님을 어떻게 알고 있는지를 보여 주는 잣대일지도 모릅니다.

| 적용 |
하나님을 바르게 알려면 어떤 노력과 과정이 필요합니까?

    영감의 교훈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받아들임- “신자가 복음의 신앙을 받아들인 다음에 할 일은 그의 품성에 덕을 더하여 마음을 정결하게 하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받아들이기 위하여 마음을 준비하는 것이다. 이 지식은 모든 참교육과 모든 참봉사의 기초이다. 이것이 유혹에 대한 유일의 참 방벽이며 이것만이 사람의 품성을 하나님과 같게 만들 수 있다. 하나님과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이 신자에게 주어졌다”(사도행적, 530~531).

    기도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하나님을 알고 섬길 수 있는 특권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삶의 순간마다 하나님이 어떠한 분인지 생각하며 믿음 가운데서 살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그 믿음과 생각대로 내 모습이 하나님 닮아가기를 원합니다.

여섯째날(금)
4월 5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시간이 흐르자, 호세아는 자신의 운명이 하나님의 비애의 거울이었음을, 자신의 슬픔이 하나님의 슬픔의 메아리였음을 깨달았다. 하나님의 비애에 공감하는 행위였던 동료애적 고난을 통해 선지자는 하나님의 간청으로 맺어진 결혼의 의미를 보았으리라. …이스라엘의 위로자가 겪는 삶을 통해서만이 선지자는 하나님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결혼은 상징이나 의식이었다기보다 하나의 공과이자 예증이었다.”- Abraham J. Heschel, The Prophets (Mass.: Prince Press, 2001),
56.

  “호세아는 표상적인 언어로 지상에 있는 당신의 교회와 연합할 모든 회개한 영혼들에 대한 하나님의 회복의 계획과 약속된 땅에서 저희가 하나님께 충성하던 시대에 약속된 축복들을 열 지파 앞에 제시하였다.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서 은혜 베푸시기를 몹시 갈망하는 분이라고 말씀하시면서 ‘내가 저를 개유하여 거친 들로 데리고 가서 말로 위로하고 거기서 비로소 저의 포도원을 저에게 주고 아골 골짜기로 소망의 문을 삼아 주리니 저가 거기서 응답하기를 어렸을 때와 애굽 땅에서 올라오더 날과 같이하리라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그날에 네가 나를 내 남편이라 일컫고 다시는 내 바알(내 주)이라 일컫지 아니하리라 내가 바알들의 이름을 저의 입에서 제하여 다시는 그 이름을 기억하여 일컬음이 없게 하리라’(호2:14~17)고 선언하셨다”(선지자와 왕, 298).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1. 우리는 신상을 보고 절하는 것이 우상숭배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사탄은 어떤 교활하고 기만적인 방식으로 우리를 우상숭배에 빠뜨릴까요?
  2. 여호와를 아는 것이 무엇인지 묵상해 보십시오. 그대가 하나님을 안다면 그것은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어떻게 얻을 수 있습니까?
  3. 고대의 어떤 신학자는 하나님이 인간의 행동으로 인해 고통이나 기쁨을 느끼지 못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무엇이 사람으로 하여금 그러한 주장을 하게 했을까요? 왜 우리는 그런 주장을 거부해야 합니까?

댓글목록

관리자님의 댓글

관리자 작성일

교과토의 연구위원으로의 복귀를 환영합니다^^
목사님 덕에 전국의 안교 교사들이 큰 도움을 받으리라 믿습니다.

조춘호님의 댓글

조춘호 작성일

감사합니다. 열심히 준비해서 올려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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