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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3과 재창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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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조춘호 작성일13-03-24 05:03 조회3,28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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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3과 재창조

3월 30일 안식일
일몰: 오후 6시 53분

기억절: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가 있는 곳인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벧후3:13).

연구 범위: 계 21:1~5, 창 3:19, 고전 15:52~58, 창 6:11~13, 사 11:6~9, 요 14:1~3.

도입)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하여 이해하는 것은 재림 이후에 하나님의 백성들이 살아갈 생활에 대하여 이해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재림 이후에 우리의 생명체는 신령한 몸으로서 살게 되는 생명, 시공을 초월할 수도 있는 생명체, 이 세상 질서와는 전혀 다른 질서를 가진 생명체로서 살아가게 될 것이다. 그러면 이런 생명체가 사는 곳이 어디인가? 그것이 바로 새 하늘과 새 땅이다. 그러므로 새 하늘과 새 땅을 이해하는 것은 재림 후에 우리가 살게 될 생활을 이해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또 새 하늘과 새 땅을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의 구속 계획을 바르게 이해하는 길이기도 하다. 구속이란 우리 인간이 부활하여서 영원히 사는 것만이 구속이 아니기 때문이다. 구속은 이 우주까지 새롭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사는 현재의 이 세상은 인간의 죄로 인하여 오염되고 더러워졌다. 저주란 사람만이 저주를 받은 것이 아니라 이 세상도 저주를 받았다. 그러므로 사람이 구속 되듯이 이 세상도 새롭게 되어야 한다. 그래야 구속이 완전하게 된다. 그러므로 구속을 말할 때 우리는 반드시 새 하늘과 새 땅까지 이야기해야 구속을 옳게 말하는 것이 되며, 하나님의 나라를 옳게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결론: 재창조는 하나님의 통치가 합당하다는 사실을 믿음으로 받아들였던 자들에게 그것을 현실로 보여 줄 것입니다. 새로운 창조의 핵심은 인간 한계의 축소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무제한적인 교제에 있습니다.

첫째날(일) 3월 24일
새로운 시작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계 21:1).

도입)
사람들이 볼 수 없었던 곳, 알 수 없었던 곳, 상상할 수 없었던 곳 …거기는 이 세상에서 찾을 수 없는 완벽한 나라이다. 거기는 새 하늘과 새 땅이라 불리는 하나님의 나라 천국이다. 거기는 지금 세상과는 전혀 다른 곳이다.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1절)고 하였는데 바다는 고대인들에게는 엄청난 공포의 대상이었다. 바다가 사라졌다는 것은, 주님이 다스리는 세상이 어떤 불안이나 공포와는 무관한 평안과 안정이 보장된 나라라는 것을 뜻한다.

<부가설명>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하여서는 구약에서도 말하고 있다. 이사야 11:6-9에는 이런 말씀이 있다. “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거하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명에서 장난하며, 젖 뗀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나의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라고 말한다. 이 말씀은 물론 메시야가 초림하여 오실 것과 연결하여서 말씀하고 있다. 하지만 이 말씀 속에는 에덴의 상태가 완전하게 회복될 상태를 말하고 있다. 즉 죄악과 저주가 완전히 사라져서 자연 세계 동식물까지도 완전히 에덴의 상태를 회복하는 것을 말하고 있다. 이렇게 회복되는 것은 새 하늘과 새 땅에서라야 가능하다고 생각 된다. 이렇게 볼 때에 새 하늘과 새 땅은 반드시 실제적으로 와야 예언이 완전하게 성취된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새 하늘과 새 땅은 어쨌든 와야 한다. 인간은 죽음을 지닌 존재이기 때문에 슬플 수밖에 없고 질병과 배고픔으로 인한 고통 때문에 괴로워하지 않을 수 없다. 이 모두는 죄로 인한 저주의 결과이다. 그런데 새 하늘과 새 땅에서는 "이런 것에 대하여는 기억되거나 생각나지 아니할 것이라."(사 65:17)하신다. 그 이유는 내가 완전한 환경에 알맞도록 변화되었기 때문이다. 죄가 없으니 죽음이 없고 저주가 없으니 배고픔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인간은 이 땅에서 살면서 누구나 '파라다이스'를 꿈꾸며 산다. 바로 새 하늘과 새 땅은 인간이 그리는 파라다이스와 같은 곳이다. 더욱 나아가서는 성령의 열매로 신령한 성품이 된 성도들과 기쁜 교제를 하는 곳임으로 낙원이 아닐 수가 없다.

교훈: 사망과 고통이 사라진 새로운 세상에서 우리는 새로운 시작을 누리게 될 것이다.

둘째날(월) 3월 25일
진토에서 생명으로

“주의 죽은 자들은 살아나고 그들의 시체들은 일어나리이다 티끌에 누운 자들아 너희는 깨어 노래하라 주의 이슬은 빛난 이슬이니 땅이 죽은 자들을 내놓으리로다”(사 26:19).

도입)
영국의 윌리암 제닝스 브라이언(William Jennings Bryan)이 이집트 카이로를 방문했다가 3,000년 된 미라에서 곡식단지를 발견했는데 그 속에는 완두콩이 들어 있었다. 3,000년이나 되었기 때문에 돌덩이같이 딱딱하고 쪼글쪼글해서 도무지 생명이 있어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을 가지고 가서 심었더니 싹이 나고 잎이 나더니 열매를 맺었다. 그 후부터 그는 전도하면서 "1년생 식물도 3,000년 만에 죽었다가 다시 살아서 열매를 맺는데 만물의 영장인 사람이 100년도 못살고 죽어서 없어지겠는가? 반드시 부활이 있고 영원한 세계가 있다"고 역설했다. 식물에게도 생명의 잠재력이 있지만, 하물며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우리 인간에게 생명의 잠재력이 있음은 틀림없는 확고부동한 진리인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도 1800년이나 된 창포씨를 심었더니 싹이 났다고 한다. 1800년 된 씨에서 싹이 나고 3000년 된 씨에서도 싹이 나는데 …이 세상을 사는 우리 인생이 이것으로 끝이 아니다. 고린도전서 15장 9절에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고전 15:9)고 했다.

<부가설명>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살아있는 것들은 모두 하나님께서 주신 생명으로 살아간다.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않은 생명은 없다. 그래서 생명은 고귀한 것이다. 인간의 인간됨은 생명의 가치에 대해 눈을 뜨는 순간부터 시작된다. 생명의 가치를 바르게 이해하고 깨닫는 순간부터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다. 생명의 가치를 무시한 정치, 경제, 종교, 학문, 사상은 매우 위험스러운 것들이다. 인류 역사를 돌이켜 볼 때 인류를 위해 유익한 일을 한 사람들의 공통점은 그들이 생명의 가치를 알고 그것을 존중히 여긴 점이다.

교훈: 부활은 하나님의 또 다른 창조의 역사가 될 것이며, 창조를 진화론으로 설명하려는 시도는 부활의 진리 앞에서 좌절된다.

셋째날(화) 3월 26일
지배권의 회복

“이제 이 세상에 대한 심판이 이르렀으니 이 세상의 임금이 쫓겨나리라”(요 12:31).

도입)
주님은 자신의 죽음을 예고하시고, 그 죽음이 가져올 결과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제 이 세상에 대한 심판이 이르렀으니 이 세상의 임금이 쫓겨나리라.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 하시니, 이렇게 말씀하심은 자기가 어떠한 죽음으로 죽을 것을 보이심이러라.”(요 12:31-33) 이 세상에 대한 심판이 이르렀다! 이 세상 임금이 쫓겨난다!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다! 이 모든 일들은 주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이루어질 일들이다. “이에 무리가 대답하되 우리는 율법에서 그리스도가 영원히 계신다 함을 들었거늘 너는 어찌하여 인자가 들려야 하리라 하느냐 이 인자는 누구냐?”(요 12:34)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신 것은 십자가에 매달려 죽으신다는 뜻이다. 넓은 의미로는 주님의 부활과 승천까지 포함한 말씀이다. 무리들은 이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유대인들은 메시아가 십자가에 죽는 일은 상상도 못했다. 메시아가 왜 죽지? 메시아는 왕으로 오셔서 원수들을 섬멸하고, 왕국을 세우고, 세상에 군림해야지. 들림을 받는다니? 도대체 어디로 들림을 받는단 말인가? 지상 왕국이 아니고 어디로 간단 말인가? 유대인들은 메시아가 오면 예루살렘에 왕국을 세우고 지상에서 통치를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주님은 십자가에서 죽어야 된다고 한다. 도대체 무슨 소린가?    

<부가설명>
주님은 자신이 죽음으로써 먼저 세상 임금이 쫓겨난다고 하다. “이제 이 세상에 대한 심판이 이르렀으니 이 세상의 임금이 쫓겨나리라.”(요 12“ 31) 이제 주님이 죽으심으로써 이 세상에 심판이 이르렀다! 본문은 “이제”(nu'n, now)라는 표현을 두 번 반복한다. 이제, 지금, 심판이 도래했다! 주님의 죽으심은 이 세상에 대한 심판의 시작이다. 그런데 그 심판은 사람들을 향한 심판이 아니다. 그 전에 먼저 이 세상의 임금을 쫓아내는 심판이다. 이 세상의 임금이 누구인가? 지상 어느 나라의 통치자가 아니다. 이 세상 인류를 실질적으로 지배하는 왕! 사람들의 마음을 지배하는 왕! 바로 사탄, 마귀를 의미한다.(요14:30,16:11, 고후4:4, 엡2:2) 아담이 타락한 이후로 마귀는 전 인류의 지배자가 되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창3:15)셨던 그 목표대로 주님은 십자가에서 마귀의 머리를 깨뜨리셨다. 마귀의 계획은 사람들이 죄에 매여 죄의 종이 되고 파멸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그러나 주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마귀의 계획을 파괴하셨다. 즉, 죄로 말미암아 심판 받고 죽어야 하는 사람들을 정죄로부터 풀어주신 것이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은 현재와 과거와 미래의 모든 죄로부터 자유로워진다. 어떤 죄를 지었어도 결코 정죄 받지 않는다. 용서 받는다. “자녀들은 혈과 육에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심은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히2:14-15) 마귀가 사람에게 죄를 짓게 만들어도 예수님의 십자가 속죄 때문에 정죄할 길이 없어졌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죄를 없이하셨기 때문이다. “이제 자기를 단번에 제물로 드려 죄를 없이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셨느니라”(히9:26) “그가 우리 죄를 없애려고 나타나신 것을 너희가 아나니 그에게는 죄가 없느니라”(요일3:5), 예수께서 인류의 죄를 대속하여 죄를 없애 버렸기 때문에 마귀의 정죄할 수 있는 일이 끝나 버려 그는 결국 쫓겨 난 것과 같다. 그러나 마귀는 세상 끝 날까지 사람들을 정죄하고 사망에 떨어지게 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택하신 자녀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사람들은 머리터럭 하나 상하지 못한다. 주께서 철저하게 보호하시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아무 죄를 지어도 좋다는 뜻은 아니다. 구원 받은 자녀들은 마땅히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들이다.(벧후1:4) 하나님이 거룩한 것처럼 거룩하게 살아야 한다.(벧전1:16) 주님은 마귀를 이기신 유일하신 분이시다.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16:33)

교훈: 아담이 빼앗겼던 지구의 지배권은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되찾으셨으며 새 땅에서 구원받는 자들에게 다시 주어질 것이다.

넷째날(수) 3월 27일
새 땅

“이리와 어린양이 함께 먹을 것이며 사자가 소처럼 짚을 먹을 것이며 뱀은 흙을 양식으로 삼을 것이니 나의 성산에서는 해함도 없겠고 상함도 없으리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니라”(사 65:25).

도입)
태국의 스리라차 동물원(Sriracha Zoo)에서는 호랑이 새끼들이 돼지로부터 우유를 먹기 위해 모여 있다. 마찬가지로 새끼 돼지들은 어미 호랑이의 등에 올라가 평화롭게 낮잠을 자고 있다. 태국의 촌부리 주(Chonburi Province) 동쪽에 위치한 스리라차 동물원은 호랑이 새끼들의 성장 속도를 빠르게 하기 위한 독특한 기법을 사용하고 있다. 그것은 매우 간단한데, 호랑이의 성장 시에 돼지의 젖을 먹이는 것이다.....즉, 사육된 암퇘지에게 호랑이 새끼들을 데려가 직접 젖을 빨리게 하는 것이다! 이 혁신적인 시도로 성공한 동물원은, 호랑이 새끼들이 돼지의 젖을 먹음으로서 호랑이의 젖을 먹을 때보다 훨씬 빠르게 성장함을 보여주었다. 1997년 이후 동물원이 호랑이들을 이와 같은 방법으로 기르기 시작하면서, 300여 마리의 벵갈 호랑이들이 이 사육 프로그램을 졸업한 것으로 보고되었다. 어느 누가 이러한 난폭한 육식성 동물이 돼지 어미로부터 돌보아질 수 있을 것이라고 상상할 수 있었겠는가? 동물원 관계자들의 말에 의하면, 사실 이러한 방법으로 자라난 호랑이들은 자연적인 어미 호랑이로부터 자라난 호랑이들보다 훨씬 온순하다는 것이다. 방문자들은 동물원 안에 있는 몇 개의 지역에서, 호랑이 새끼들이 어미 돼지를 따라다니며 다른 돼지새끼들과 뒤섞여서 놀고 있는 모습을 분명히 볼 수 있다. '놀랍게도 그들은 서로가 매우 친한 친구처럼 즐겁게 놀고 있다. 사람들은 스리라차 동물원에서 약육강식의 동물 세계와 맞지 않는 이러한 장면을 보면서 ‘놀랍다’, ‘믿을 수 없다‘ 등의 반응을 보이고 있다. 즉, 사자와 호랑이 같은 강하고 민첩한 동물들은 어린 가젤이나, 영양, 통통한 돼지 같은 약한 동물들을 잡아먹으며 살아가는 것이 ‘자연적(natural)’인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아담이 범죄 하기 이전에, 육식이 시작되고 고통과 죽음이 들어오기 이전에, 호랑이와 새끼돼지가, 사자와 송아지가, 그리고 이리와 양이 (또는 홍수 이전에 각각의 종류를 대표하는 동물들이) 평화롭게 함께 지냈던 시기가 잠시였지만 있었다. 그리고 저주(Curse)의 결과로 고통당하는 세계에 익숙해진 사람들에게 그것은 매우 놀라운 일로 보여 지는 것이다. 성경은 그러한 때가 다시 올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부가설명>
이리와 어린 양이 표범과 어린 염소가 그리고 암소와 곰이 함께 살며 함께 먹고 있는 그림은 상상이나 가능한 이야기이다. 이들은 서로 함께 할 수 없는 존재들이다. 이것은 범죄 이전의 모습이다. 아담의 범죄 이전에는 모든 짐승이 함께 있었다. 에덴동산에서 평화로이 살았다. 이런 평화는 죄와 함께 사라졌다. 죄가 들어오면서 적대적인 관계로 바뀌었다. 서로 먹고 먹히는 관계로 만들어 졌다. 죄는 분리시키는 성질이 있다. 죄가 들어오면 관계는 파괴되고 둘 사이가 분리 된다. 부부 사이에도 죄가 들어오면 분리가 일어난다. 서로를 공격하기 시작한다. 다정하게 찍었던 사진은 어색한 그림이 된다.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사 11:1). 앗수르는 거대한 나무였다. 유다는 마른 나무의 줄기와 같았다. 거대한 나무였던 앗수르가 한순간에 꺾였다. 죄로 인해 나무의 뿌리가 땅에서 분리되었다. 땅에 뿌리 내린 마른 가지에서는 한 싹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하나님께서 이새의 줄기에서 난 싹 위에 여호와의 영이 임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이 임하면서 여호와께서 통치하는 시대가 열렸다. 메시아 시대의 서곡이다. 하나님의 통치로 불의와 죄는 떠나고 공의와 성실로 몸의 띠를 삼았다. 죄가 떠나면서 깨어진 관계가 회복되었다. 이리와 어린 양 사이에 깨어진 관계가 범죄 이전 에덴으로 돌아간다. 그곳에서는 먹고 먹히는 관계가 아니다. 이 시대는 죄가 세상을 지배하고 있다. 온갖 술수가 난무하고 있다. 관계는 갈기갈기 찢어져 있다. 서로 잡아먹으려고 으르렁 거리고 있다. 메시아 시대는 하나님께서 통치하신다. 지혜와 공의, 사랑으로 통치하신다. 사랑하기에 배려하고 공평하기에 평안하다. 서로를 세워주는 평화로운 땅이다. 이리와 어린 양이 있는 것이 정상이다. 죄가 없는 평화로운 시대가 처음 인류의 모습이었다. 이제 죄로 인해 관계들은 깨어지고 두려움이 몰려왔다. 평화로운 시대는 반드시 돈다. 메시아의 때가 바로 그날이다. 그날에는 모든 깨어진 관계가 회복 될 것이다. 두려움은 사라지고 평화가 찾아 올 것이다.

교훈: 타락과 홍수 이후에 동물들의 세계는 폭력과 죽음이 지배했지만 새 땅에서는 모든 동물 사이의 평화와 조화가 회복된다.

다섯째날(목) 3월 28일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계 21:3).

도입)
인간이 존재한다는 것은 바로 관계 속에서 존재한다는 말도 된다. 한자에서 사람 "人"자를 보면  두 획이 서로 기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는 사람을 관계 속에서 이해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희랍의 철인이 인간을 사회적 동물이라고 말한 것도 모두가 관계를 표현해 주는 말이다. 인간은 관계 속에서 태어난다. 어머니와 아버지의 관계 속에서 우리 모두는 태어난다. 세상 속에 태어나면 새로운 관계 속에서 삶을 살아가게 된다. 아버지, 가족, 친구들과의 관계, 또 세상과의 관계 속에서 자라가게 된다. 이 같은 관계 속에서 영향을 받기도 하고, 또 영향을 주기도 하면서 살아간다. 성년이 되어 결혼을 하게 되면 배우자와의 관계가 중요성을 가지고 등장하게 된다. 직장, 일터에서의 관계도 중요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자녀들이 태어나면 이 자녀들과의 관계 역시 삶의 중요한 요소들로 등장하게 된다. 나이가 들게 되면, 한없이 넓고 다양하게 보이던 관계도 차츰 차츰 좁아지고 줄어들게 된다. 그리고 죽음을 맞이하게 되면, 이 모든 관계에도 종말이 찾아오게 된다. 결국 인생은 관계 속에서 태어나서 관계의 종말과 함께 인생을 마감하게 된다. 그런데 이같이 관계 속에서 펼쳐지는 우리의 인생 속에서 제일 중요한 관계가 있다면, 누구 혹은 무엇과의 관계이겠는가? 어떤 관계가 우리의 인생 속에 가장 깊고, 가장 넓은 영향력을 발휘하는가? 여러 가지 관계를 말할 수 있을 것이나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가장 중요한 관계는 하나님과의 관계이다.  왜 그런가? 무엇보다도 하나님은 우주 만물의 창조주(창1:1)이시기 때문이다. 그분이 우리 인생과 우주 만물을 만드셨고, 그분은 우주의 주관자이시며 국가흥망성쇠의 주관자이시며 또한 우리들의 생사화복의 주관자이시기 때문이다. 그 분은 우리에게 복을 주시는 분이시며 그리고 그 분은 우리의 심판주가 되시기 때문이다.

<부가설명>
하나님과의 관계는 영원한 운명과 직결되기에 중요하다. 우리의 삶에 하나님이 안 계시다면, 이 땅의 삶이 전부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이 계시다면, 우리의 생명은 이 땅 위에서 사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죽음은 끝이 아니다. 사람이 한번 죽는 것은 정한 이치요 죽음이후에는 심판이 있다. 구원받은 자는 영생으로 구원받지 못한 인생을 영멸의 둘째 사망 곧 영원한 불 못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그런데 이 영원한 미래는 바로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에 따라 결정된다. 하나님과의 관계는 우리의 영원한 운명을 결정짓는다. 그러기에 이 관계처럼 중요한 관계는 없다. 그런데 인생들은 하나님을 떠나서 살고 있다. 하나님을 잊어버린 채 살고 있다. 하나님을 안 믿는 것이 가장 인간적인 삶의 길이라고 생각하는 바로 이것이 하나님을 잃어버린 인생의 대표적인 모습이다. 이러한 인간 현실을 성경은 죄인이라고 말한다. 오늘 본문 로마서 5:10의 표현을 빌리면, 하나님과 원수가 되어 있었다고 말하고 있다. 하나님 없이 사는 것이 가장 인간적인 삶이라는 생각, 이 생각이야말로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모습을 여실히 보여주는 증거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 같은 인간의 구원을 위하여 일하셨다. 오늘 본문 로마서 5:1∼11에 있는 말씀은 이 같은 인간의 구원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이룩하신 역사를 말해준다. 인간의 가장 중요하고도 근원적인 관계,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시키기 위한 하나님의 역사를 증거하고 있다. 롬  5:6 이하의 말씀을 보라.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이 본문 말씀은 로마서 속에서 가장 중요한 구절 가운데 하나다. 하나님께서는 깨어진 인간과의 관계를 회복시키기 위하여 먼저 시작하셨다. 세상을, 인생들을 이처럼 사랑하사 그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셨다. 그리고 우리가 아직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분명히, 확실히 보여주셨다.  아직 사랑 받을만한 자격이 없지만,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분명히 보여 주셨다. 이제 우리는 5:9의 말씀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하심으로부터 구원을 얻게 되었다. 이제 깨어졌던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됨으로 새로운 인생을 살아가게 되었다.

교훈: 죄가 없는 새로운 세상에서 우리가 회복해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의 친밀하고 영원한 관계이다.

여섯째날(금) 3월 29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그리고 영원한 세월이 흘러감에 따라 하나님과 그리스도에 대한 더욱 풍성하고 더욱 영광스러운 계시가 나타난다. 또한 지식이 발전되어 감에 따라 사랑과 존경과 행복도 증가할 것이다. 사람들이 하나님에 대하여 배우면 배울수록 그분의 품성에 대한 그들의 감탄은 더욱 커질 것이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속죄의 풍성한 부와 사탄과의 대쟁투에 있어서의 놀라운 결과를 제시해 주실 때 구속받은 자들의 마음은 더욱 열렬한 헌신의 마음으로 감동되고, 그들은 더욱 충만한 기쁨으로 금거문고를 탄다. 그리하여 천천만만의 무리는 음성을 합하여 찬양의 대합창을 한다. …
대쟁투는 끝났다. 죄와 죄인들은 없어졌다. 온 우주는 깨끗해졌다. 오직 조화와 기쁨의 맥박만이 온 우주의 만물을 통하여 고동(鼓動) 한다. 생명과 빛과 환희가 만물을 창조하신 분에게서 끝없이 넓은 우주로 퍼져 나간다. 가장 작은 원자(原子)로부터 가장 큰 세계에 이르기까지, 만물은 생물계와 무생물계를 막론하고 조금도 흠이 없는 아름다움과 완전한 기쁨으로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선포한다”(각 시대의 대쟁투, 6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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