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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2과 창조와 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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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조춘호 작성일13-03-15 08:52 조회3,36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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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2과 창조와 복음동반과 교과 토의

3월 23일 안식일
일몰:오후 6시 46분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고전 15:22).

연구 범위
창 3:21, 시 104:29~30, 요 1:4, 롬 5:6~11, 갈 3:13, 마 27:46.

도입)
죽음의 문제, 그리고 죽은 후의 세계에 관한 문제는 인류가 고대로부터 끊임없이 제기해온 근본문제의 하나이다. 바울이 활동할 시대의 대부분의 그리스인들은 사람의 몸이 죽은 후에 다시 살아난다는 것을 믿지 않았다. 그들은 사후의 삶이라는 것은 오직 영혼에만 일어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리스 철학자들에 따르면 영혼만이 진정한 인격적 존재였다. 그 영혼이 육신이라는 감옥에 갇혀 있다가 죽으면 풀려나는 것이라고 여긴 것이다. 육체의 불멸은 없고 영혼만 영원한 상태로 들어간다는 것이다. 이에 반해 기독교는 육신과 영혼이 부활 때 다시 결합이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리스문화의 중심에 있던 고린도였기에 그곳 교인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몸의 부활을 믿는 데 어려운 시기를 거쳐야 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신자들에게 편지를 쓰며 부활에 관한 혼란을 명쾌하게 정리하려 했고 그래서 그 문제를 다루기 시작하는 것이 오늘의 기억절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몸으로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은 기독교 신앙의 중심을 이루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약속하신 대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아나셨기 때문에 우리는 그가 말씀하신 것이 진실하며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것이다. 그의 부활은 그의 삶과 말씀의 진실성을 증언하는 것이다. 그의 부활은 오직 그만이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라”(요11:25) 말할 수 있는 권위를 지녔음을 확증시켜주는 것이다. 부활은 하나님의 창조와 더불어 재창조를 이루실 하나님의 사역의 가장 중요한 핵심이다. 창조와 복음 이 제목에 걸 맞는 가장 중요한 것이 예수 그리스도와 부활에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첫째날(일) 3월 17일
동산에서의 은혜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창 3:21).

도입)
우리는 하나님께서 입히신 가죽 옷에 대한 몇 가지 생각을 할 수 있는데 이 가죽옷의 일차적 의미는 물론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나타내는 대속의 옷일 상징하는 것일 것이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가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였다(창 2:15)는 사실과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 자기들의 몸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하였더라”(창3:7)고 말한 것에는 대단한 차이가 있다. 저들이 벌거벗고 있었던 상태는 동일한데 왜 몸의 수치를 느끼고 저들은 무화과 잎으로 몸을 덮으려 했을까? 이것은 단순히 저들의 마음의 심정적 문제이고 다만 영적인 문제였던 것인가? 아니면 저들의 몸에 실제적이고 급격한 변화나 이상이 생겼던 것일까?

부가적용)
실상 아담과 하와가 벗고 있었는데 왜 벌거벗어 부끄러웠다고 말하고 있었는지에 대해 우리는 실제적인 이해가 부족하다. 저들의 몸은 실제로 벌거벗고 있었는데 무엇을 벗었다고 하는지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 시편 34:5절에 보면 “저희가 주를 앙망하고 광채를 입었으니 그 얼굴이 영영히 부끄럽지 아니하리로다”고 하였는데, 이는 아담과 하와가 주를 앙망하였을 때 광채를 입고 있었다는 말이며, 이 말은 썩지 아니할 신령한 몸의 상태, 즉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이것은 고전 15:44절에 나타난 대로 인간에게 본래 가지고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형상과 같은 신령한 몸이었으나 인간이 타락하면서 육의 몸(낮은 몸, 빌 3:21)의 상태로 변화된 것을 의미한다.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신령한 몸이 있느니라”(고전15:44) 우리 인간의 몸은 빌 3:21절에 말한 대로 “그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고 하셨을 때 아담과 하와 타락 전과 후에 어떤 몸을 가지게 되었는지를 보여준다. 아담과 하와는 타락 이전이나 타락이후에도 똑같이 벌거벗고 있었으나 이것은 심정적인 문제만이 아니라 실제로 아담과 하와는 썩을 몸, 즉 낮은 몸, 육신의 몸으로 바뀌게 된 것을 의미한다. 저들은 타락 전이나 후에 똑같이 벌거벗은 것은 동일한 상태였으나 타락한 후에 실제로 저들의 몸에는 즉각적인 변화가 찾아오게 되었는데 질적인 변화가 오게 된 것이다. 타락한 후 저들은 더 이상 저들이 가졌던 신령한 상태의 몸이 아닌 낮은 몸으로, 육의 몸으로 변화된 자신들을 발견하였을 때 저들은 갑자기 수치스러움을 느꼈던 것이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는데 이는 무화과 잎과 같이 썩을 옷이 아닌 썩지 아니할 영원한 옷, 저들의 몸을 가리워 줄 그리스도의 옷이 필요했던 것이다. 저들의 몸을 가리워 줄 옷이란 실제로 썩지 아니할 아들의 형상과 같은 우리의 몸을 다시 회복시켜 주실 것이라는 복음의 예표가 가죽 옷이었다.

교훈: 하나님은 인류가 죄를 짓자마자 복음을 제시하고 동물의 희생을 통해 옷을 지어 입히심으로써 구원의 은혜를 보여 주셨다.

둘째날(월) 3월 18일

죄와 죽음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창 3:19)

도입)
하나님께서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라는 이 선언은 결국 아담과 하와가 입고 있었던  영생하는 영광의 옷, 신령한 몸의 옷이 벗겨졌음을 말하는 것이며 저들은 영생하는 신령한 몸에서 이제는 낮은 몸, 썩어져 죽을 몸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제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께 불순종하므로 썩어질 몸, 낮은 몸(빌 3:21)이 되고 말았다. 그럴 때 저들은 갑자기 부끄러움을 느꼈던 것이다. 우리는 욥의 탄식을 들어보면 더 분명하게 되는데 우리가 벗었다는 참된 의미가 무엇인지를 알게 된다(욥 7:5, 욥 19:26). ‘내 살에는 구더기와 흙 조각이 의복처럼 입혔고 ‘내 가죽’은 합창되었다가 터지는구나(욥7:5) “나의 이 가죽, 이것이 썩은 후에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 욥19:26)  욥은 결국 자신이 입고 있는 자신의 가죽 옷이 결국 썩어져 버릴 옷을 입고 있었음을 분명히 알았다.

부가적용)
인생이 부정하고 더러운 것은 우리가 다 썩어져 버릴 가죽 옷을 입고 있기 때문이다. 나아만 장군이 바로 인간의 참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데 죄의 문둥병으로 썩어 없어질 인간의 피부 가죽의 상태, 점점 썩어 문드러져 가는 인간의 가죽을 입고 살아가는 것이 불쌍한 인간의 모습인 것이다. 이 가죽 밖에서 하나님을 볼 수가 있겠다고 고백한 욥의 고백처럼, 우리의 살에는 구더기와 흙 조각이 의복처럼 입혀졌다고 했다. 이것은 인간이 무덤에서 썩고 없어질 가련한 살가죽을 걸치고 있음을 탄식한 것이다. 사람마다 몸의 가죽이 좀 차이는 있을 수 있다. 질기고 좋은 가죽이 있고 그렇지 못한 가죽이 있다. 그러나 우리가 입고 있는 이 사람 가죽은 짐승의 가죽과 마찬가지로 다 썩어 없어질 부끄러운 가죽인 것을 기억하시기 바란다. 8,90년 세월이 지나면 다 기미가 나고 점이 생기고 곰팡이가 피는 가죽이라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란다. 그렇기 때문에 아담과 하와가 부끄러움을 느꼈던 것이다.

교훈: 생명은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고 유지시킬 수 있지만, 죄로 인한 하나님과의 단절이 곧 죽음을 불러왔다.

셋째날(화) 3월 19일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

도입)
1800 년대 가장 뜨거운 사랑을 했던 이들이 바로 엘리자베스 브라우닝과 로버트 브라우닝이었다. 당시 주위의 반대를 물리치고 여섯 살 연하의 남자와 결혼하고 나서 자신이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시를 썼는데 그 시가 오늘날까지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당신을 어떻게 사랑하느냐구요? 헤아려 보죠. 비록 그 빛 안보여도 존재의 끝과 영원한 영광에 내 영혼에 이를 수 있는 그 도달할 수 있는 곳 까지 사랑합니다. 권리를 주장하듯 자유롭게 당신을 사랑합니다. 칭찬에 돌아서듯 순수하게 당신을 사랑합니다. 옛 슬픔에 쏟던 정열로써 사랑하고 내 어릴 적 믿음으로 사랑합니다. 세상 떠난 성인들과 더불어 사랑하고 잃는 줄로만 여겼던 사랑으로써 당신을 사랑합니다. 나의 한평생 숨결과 미소와 눈물로써 당신을 사랑합니다. 주의 부름을 받더라도 죽어서 더욱 사랑합니다.” 엘리자베스 브라우닝의 시는 주의 부름을 받더라도 죽어서 더욱 사랑합니다로 그 사랑을 고백하였다. 사랑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기는 하지만 우리 예수님의 사랑은 이보다 더하다. “죽어서 사랑합니다”가 아니라 사랑하기 때문에 자신의 목숨을 바쳐 죽으셨고 엘리자베스 브라우닝의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사랑하였지만 예수님의 사랑은 경건치도 않고 죄인인 사랑받지 못할 사람을 사랑하시어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말씀하셨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요한복음 15 장 13 절). 예수님은 이보다도 더한 사랑으로 죄인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다.

부가적용)
프랑스와 영국간에 전쟁이 있었을 때 프랑스에서는 제비를 뽑아 사람을 군대에 보냈다. 예외는 뽑힌 사람 대신 누군가 자원해주면 면제되었다. 한 사람이 뽑혔는데 징집위원 앞에 서서 자기는 2년 전 사형 당했다고 주장했다. 위원들은 “당신은 살아 있는데 무슨 소리냐, 정신 이상이 된 것 아닌가?”하고 의아해 했다. 내용인 즉 이 사람이 2년 전 징집됐을 때 자기 친구가 대신 군대에 갔다는 것이다. “자네는 결혼했고 가족이 많은데 나는 아직 독신이니 내가 자네 대신 가겠네” 이렇게 말하고 그 친구가 대신 군대에 들어가 영국군에 포로로 잡혀 사형 당했다는 얘기였다. 기록을 조사해본 결과 사실이었다. 이를 나폴레옹에게 보고하자 황제는 그 사람을 징집하지 말게 하고 자유를 주었다. 친구가 그 사람을 위해 죽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하신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
사람들은 조건적으로 사랑한다. 저마다의 옳고 그름의 기준을 가지고 그 기준에 충족되는 사람만 사랑한다. 그러나 바울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의를 위해 목숨을 던지는 사람이 많지 않고, 선한 사람을 위해 죽음을 각오하는 용감한 사람도 많지 않은 세상인데, 누가 과연 죄인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겠습니까? 세상의 흐름과 방향은 이렇게 흘러가는데, 여기 놀라운 사랑이 있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자격 없는, 가치 없는 인간을 위해 고귀한 희생을 감수한 놀라운 신이 계십니다. 그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은 우리를 위해 기꺼이 죽으심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에게 확증해 주셨습니다. 이 사랑은 사람들에게서 발견할 수 없는 초월적이고 신비한 사랑입니다.” 그분의 사랑은 지금도 끊임없이 하늘에서 부어지고 있다.

교훈: 하나님은 우리를 우리의 죄대로 처치하지 않고 먼저 십자가의 용서와 화해의 기회를 주신다.

넷째날(수) 3월 20일

죄를 짊어진 대속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갈 3:13).

도입)
나무에 달린 마다 저주 아래 있다는 말은 무슨 말인가? 왜 나무에 달린 자가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을까?  신21:22에 “사람이 만일 죽을 죄를 범하므로 네가 그를 죽여 나무 위에 달거든 신21:23 그 시체를 나무 위에 밤새도록 두지 말고 당일에 장사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고 하였다. 나무에 달린 자는 저주를 받았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것으로 땅을 더럽히지 말라고 하셨다. 왜 나무에 달린 것이 저주의 상징인가? 나무에 사람을 단 것은 그 십자가로 만든 나무는 죽은 나무였기 때문이다. 이는 생명의 근원인 땅에서 뽑혀 죽은 나무였던 것이다. 바로 죽은 나무, 죽은 나무에 달려 죽은 것은 더러움의 상징이 되었다. 사람의 죽음은 땅을 더럽히는 상징이 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나무에 달린 자는 해질 때까지 놔두지 말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죽은 나무에 달린 것은 저주의 상징이다.

부가적용)
나무에 달린 것은 다시는 살 길이 없는 인간의 모습, 둘째 사망을 표상하는 것이다. 실제로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것은 우리 인간의 죄를 위해 죽으신 둘째 사망, 영원한 죽음을 표상하기 때문이다. 나무가 땅에서 뽑혀 사람을 달기 위해 나무를 베어 죽인 것처럼 나무에 죄인이 달린 것은 더 이상 인간이 살 길이 없는 둘째 사망에 처해 진 것이다. 이것은 그 어떤 방법으로도 다시 살 수 없는 인간의 저주를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가 삼일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을 보여주셨다. 인간이 저주를 받아 죽어야 할 둘째 사망을 담당하고 죽으신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을 거절한 모든 인생이 당할 그 마지막은 죽음, 둘째 사망을 의미하는데, 죽은 나무에 달린 것처럼 더 이상 살 길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죄인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죽어서 다시 살 수 있는 길은 오직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다시 태어나는 길 밖에 없는 것이다.

다섯째날(목) 3월 21일

새로운 피조물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시51:10).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도입)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죽음을 통해 모든 인간의 죄를 안고 죽으셨다. 그러므로 인간은 더 이상 죄로 인해 책임을 추궁을 당할 이유가 없게 되었다. 사도 바울이 새로운 피조물이라 한 것은 오직 심정적인 문제만이 아니라 실제로 인간은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침례 받은 자(롬 6:3)는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었다. 그리스도 그리스도와 합하여 침례 받은 자는 그리스도와 같은 새 생명을 얻게 된 것이다(롬 6:3). 침례는 우리 자신의 죽음과 더불어 새로운 피조물로서 썩지 아니할 하나님의 백성, 부활할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연합을 상징한다. 그래서 그리스도와 함께 침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다(갈 3:27)고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로 옷 입었다는 것은 바로 그리스도의 형상, 썩지 아니할 몸을 입게 된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는 의미인 것이다.

부가적용)
여러분과 제가 이 성경의 본질을 잘 이해하고 깨달아야 한다. 이 성경은 영생의 복음, 구원의 복음이다. 그리고 이 모든 영생이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믿음으로 얻어지는 하나님의 은혜이다. 우리는 성경에 예복에 대한 비유가 나오는데 예복을 입지 아니한 자가 결국 이 잔치에서 쫓겨나게 되는데 침례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로 옷입는 거룩한 예식이다. “믿고 침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막16:16)고 했다. 그러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입게 될 이 옷을 입지 아니한 자는 결국 하늘에서 쫓겨나게 될 것이다. 탕자가 아버지께 돌아왔을 때 이 탕자에게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혀주라고 하셨는데, 그 제일 좋은 옷이란 구원의 옷, 의의 옷인데 “내가 여호와로 인하여 크게 기뻐하며 내 영혼이 나의 하나님으로 인하여 즐거워하리니 이는 그가 구원의 옷으로 내게 입히시며 의의 겉옷으로 내게 더하심이 신랑이 사모를 쓰며 신부가 자기 보물로 단장함 같게 하셨음이라”(사61:10) 하신 것처럼 우리가 입은 옷은 구원의 옷, 의의 겉옷, 뿐만 아니라 우리의 몸이 썩지 아니할 몸의 옷, 우리의 낮은 몸, 이 썩어질 이 몸의 가죽 옷이 썩지 아니할 몸을 입게 된, 거룩한 하나님의 속성을 가진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을 의미한 것이다. “죽은 자의 부활도 이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고전15:42) 이것이 바로 새로운 피조물의 진수인 것이다.

여섯째날(금) 3월 22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 ‘감추어진 일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속하였거니와 나타난 일은 영원히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속하였’(신 29:29)다. 하나님은 창조 사업을 어떻게 성취하셨는지 결코 사람들에게 나타내지 않으셨다. 인간의 과학으로는 지존자의 오묘를 찾아낼 수 없다. 그분의 창조력은 그분의 존재와 마찬가지로 이해할 수 없다”(부조와 선지자, 113).
“그 짙은 어두움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임재가 가리워졌다. 그분은 어두움으로 장막을 만드시고 그분의 영광을 인간의 눈으로부터 감추셨다. 하나님은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십자가 곁에 계셨다. 아버지께서는 아들과 함께 계셨으나 그분의 임재는 나타나지 않았다. 만일 하나님의 영광이 구름 속에서 번쩍였다면 모든 관중들은 멸망하고 말았을 것이다. 또 그리스도께서는 그 무서운 시간에 아버지의 임재 하심에서 오는 위로를 받지 못했다. 그분은 홀로 포도즙 틀을 밟으셨으며 백성 가운데 그분과 함께한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시대의 소망, 753~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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