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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과 천지의 창조주이신 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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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조춘호 작성일13-01-01 08:11 조회3,676회 댓글6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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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과  천지의 창조주이신 예수

1월 5일 안식일
일몰: 오후 5시 28분

기억절: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 1:1).

연구 범위: 창 1:1, 히 11:3, 시 19:1 ~3, 요 1:1 ~3, 14, 골 1:15~16, 요 2:7 ~11.

[히1:2,3]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후사로 세우시고 또 저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3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케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위엄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성경의 전체를 이해하기>
  성경의 모든 이야기의 핵심과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창조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살펴보자.

1. 하나님은 어떤 분인가?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17:3)라고 말한다.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우리의 영원한 생명과 직결이 되어 있다고 말씀하고 있다. 그러므로 오늘 다룰 이 내용은 가장 중요한 주제를 다루는 것이다. 인간이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은 볼 수가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골 1:15)이라 하셨기 때문이다. 요 1:18절에도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다고 말씀하고 있다. 왜 하나님을 본 사람이 세상에는 없었을까?

2. 왜 하나님을 볼 수 없었을까?

본래 하나님은 영이시다(요 5:24). 영의 존재 상태는 어떤 것인가? 예수께서 죽음에서 부활하시고 살아나셔서 그 자신을 제자들에게 나타내 보이셨을 때 제자들은 자신들이 보고 있는 예수님을 귀신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예수께서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 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눅24:39]고 하셨다. 인간이 하나님을 볼 수 없었던 이유는 살과 뼈가 없는 이유에서 하나님을 볼 수가 없는 것이다.

3. 인간은 언제부터 하나님을 보고 살았는가?

골1:15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실존에 대하여 깊이 생각할 필요가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형상(形象)”이나 “변화(變化)”라는 말은 두개의 철학적 개념이 합성된 복합어이다. “형(形)”이라는 말은 우리말로 번역하면 “꼴”이다. 모양이라고 옮겨도 무방하다. 반면에 “象”이라는 것은 꼴에서 엿볼 수 있는 내면의 모습이다. 비유해서 말하자면 우리는 사람의 외모에서 그의 성품을 볼 수 있다. 착하고 순진하고 청순한 외모를 가진 여자가 있다고 하자. 대개 외모와 내면적인 품성은 일치한다. 만약에 한눈에도 지성적이고 교양 있게 생긴 숙녀가 천박한 말투와 경망스런 행동을 해댄다면 사람들은 형상을 가늠할 수 없어서 당황하게 된다. 형과 상이 어울리지 않는 것이다. 형상이라는 말의 의미를 알아야 변화라는 말의 의미도 알 수 있다. “변(變)”은 “형(形)”이 바뀌는 것이고, “화(化)”는 “상(象)”이 바뀌는 것을 의미한다.

*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하였는데 이는 하나님의 존재의 형이 바뀐 것이고 하나님의 상이 바뀐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본래의 참 모습은 영이시다. 그분께서 인자 같은 이(단 7:13)로서의 형(形)을 취하셨고 사람과 같이 되셨다. 존재의 변화를 취하셨지만 이 존재 속에 나타난 상(象) 본래의 하나님의 모습과 내면의 모든 모습은 본래의 하나님과 하나이신 것이다.
*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 그 꼴, 즉 모양을 취하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그분의 모양 속에서 하나님의 상을 보는 것인데 그분이 어떤 분이신지를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내면을 그분을 통해 느끼게 되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자”라고 하셨다. 우리는 하나님의 존재의 양식을 알고 이해하여야 이 말씀을 이해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모양, 어떤 꼴을 가지 아니하시면 우리는 하나님의 상을 볼 수가 없다. 인자 같은 이(단 7:13)라는 표현은 사람과 같은 모양을 취하신 하나님, 예수님께서는 이 가시적 세상을 열면서 하나님께서도 사람의 모양을 취하시고 그 하나님의 형상대로 아담의 형상을 꼴 지으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셨다는 이 말씀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가 피조물이라는 사실은 무식의 소치이다. 왜 예수님께서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자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가?

4. 왜 예수님은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자라 하였는가?

이 말씀을 보면 마치 예수님께서 피조물보다 먼저 태어나신 분처럼 여길 수 있다. 그러나 먼저나신 분에 대한 의미가 탄생이 아닌 상태를 말한다(안교교과 16p 참조)고 했다. 실상 이는 하나님의 존재의 양식의 상태의 변화를 말씀하신 것이다. 하나님은 앞에서 말한 것처럼 영이시기에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런데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서 보이지 아니하는 세계뿐만이 아니라 가시적인 세계를 창조하셨다. 하나님은 보이지 아니하실 뿐이지 없는 분이 아니시다. 그러므로 가시적인 이 세상을 창조하시면서 자신의 존재를 세상에 알리려 자신의 존재의 상태를 알리셨는데 우리는 이 분의 변화를 가리켜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말하며 그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형상과 변화에 대한 개념을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이라 말하는 그 하나님의 모습이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분만이 썩지 아니할 몸, 신령한 몸을 가지신 참 하나님이시다. 예수님의 성육신 하신 모습을 통해 우리는 비로서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의 마음, 하나님의 사랑의 상을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5.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과 독생하신 하나님

보이지 아니하시는 이 하나님을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는데 이 분은 그 자신을 이 모든 세상을 창조하시 전 창조를 계획하시며 자신의 존재를 세상 밖으로 드러내셨는데 보이지 아니하시는 분이 보이는 형상으로 인간의 육감을 통해 지각할 수 있는 존재로 자신을 드러내셨다. 그러나 예수님 자신과 하나님이 하나라고 말씀하셨다(요 10:30).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요 10:30)고 말씀하셨을 때 인간의 육감으로만 판단하는 인간일 뿐인 유대의 지도자들에게는 이런 말이 황당무계한 말일 수밖에 없었다.

6. 0과 1을 통해 하나님을 바라보기

여러분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조심스럽게 이렇게 하나님의 세계를 설명하려고 한다. 이 설명 역시 가시적인 인간의 세계에서 하나님을 이해하는 것이 불가능하기에 제한된 설명임을 이해하기 바란다. 우리가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상태를 자연수 0이라 생각해 보자. 이 0이란 수는 인간이 표현하기를 영(零), 즉 없다(無)고 말하는 것이다. 영이란 정녕 없는 것인가? 0은 있으나 보이지 아니하고 말할 수는 있지만 그것을 증명하기가 어렵다. 그러나 영이란 한자어를 보라. 영(零)이란 ‘떨어질’ 영인데 한문을 가만히 뜯어보면 비(雨)위에서 령(令)을 내리는 모습을 본다. 1(하나)은 0을 기초로 해서 나온 수이며 0을 그 근간으로 해서 하나(一), 즉 ONE, 숫자 1이 나온 것이다. 이것은 모든 자연수의 시작이고 수의 기초이다. 0에서 시작된 1은 그래서 0의 아들과 같다. 0이 없이는 1은 나타날 수가 없다. 예수를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는 이유는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요 1:18)라고 말할 때 영이신 하나님을 0에 비유하자면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요 1:18) 고 하셨을 때 0의 품속에서 1(하나)가 나왔다.
*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아들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에게서 시작된 하나님의 형상이기에 자신을 아들이라고 표현한다.

동양철학과 종교는 공교롭게도 基督敎와 더불어 ‘제 1의 시작’이 되는 “하나(one, 一)”에 대한 사유를 매우 중요한 주제로 다루고 있다. 모든 종교와 철학이 그렇듯이 자신들의 기원과 뿌리를 알려는 연구는 자신들의 존재의 정체성을 발견하려는 매우 중요한 기반이 되어왔다.  “하나(one, 一)”를 모르면 결국 둘을 모르게 되고 결국 인간의 기원을 밝히는 그 “하나(one, 一)”를 모르면 궁극적으로 인간의 모든 것을 모른다는 결론이 되는 것이다. ‘제 1의 시작’을 찾고 알려는 시도는 철학이나 과학이나 종교, 모두가 관련되어 있는 연구의 주제다. 김희정은 말하기를, “영국의 철학자 콘 퍼드는 그의 책 『종교에서 철학으로(From Religion to Philosophy)』에서 서구 철학 전통이 희랍의 종교와 신화에 뿌리를 두고 있음을 밝혔다. 서구에서 철학과 종교를 인간정신의 서로 다른 영역으로 구분하려는 사고에 대해서 그의 연구는 단절되지 않는 연속성을 지니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하물며 종교와 철학, 나아가 과학이 융합되어 있는 고대 중국 도교 전통을 그렇게 구분해 접근하는 것은 많은 왜곡을 범하기 쉽다.” 궁극적으로 ‘제 1의 시작’을 찾으려는 노력은 종교나 철학이나 또한 과학까지 포함한 모든 사상을 어우르는 그 연속선상에 있다고 보아야 한다. “과학은 우주론을 암시한다. 그리고 우주론을 암시하는 것은 무엇이나 종교를 암시한다” 고 화이트헤드(A. N. Whitehead)는 말한다.
“제 1의 시작”에 대한 종교와 철학 그리고 과학이 융합된 연구를 깊이 하면 할수록 지성인들은 ‘지성적인 창조자’의 존재를 어느 정도 수긍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흄(David Hume)은 다신교와 유일신교를 비교하면서 그의 저서 『종교의 자연사』에서 “자연의 전 체계는 지성적인 창조자를 드러내 보이며, 진지한 생각을 하는 합리적인 탐구자라면 한 순간도 참된 유신론과 종교의 일차적 원리에 관한 그의 믿음을 의심해 볼 수 없다”고 말한다. 우리가 사는 자연의 전체를 바라보며 ‘지성적인 창조자’가 있을 것이라는 의식은 과학자나 천문학자나 동양종교나 기독교 모두 인식하고 있다. 다만 그것을 동양철학과 기독교에서 바라본 시각에 차이가 있는 것은 전자는 그 ‘지성적 창조자’를 비인격적 존재인 만물의 어머니로서 “宇宙”로 여기는 것이고 후자는 “홀로 하나(one, 一)이신 여호와”(신 6:4), 즉 인격적인 신, 예수 그리스도로 보는 것에 차이가 있다.

이 세상 만물, 즉 이 모든 가시적 세계를 시작하신 분은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O)이 자신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드러내신 예수 그리스도(하나)를 통해서 시작된 것이다.
슥14:9 여호와께서 천하의 왕이 되시리니 그 날에는 여호와께서 홀로 하나이실 것이요 그 이름이 홀로 하나이실 것이며
* 하나님의 이름이 홀로 하나라고 하셨다. 이는 우리가 하나님이라 예수님을 부르는 이유다.
* 하나님은 하나라는 수사와 님이라는 조사의 합성어이다. 문법적으로 하나님이라 하는 것은 잘못된 표현이다. 성경은 그 이름을 홀로 “하나”라고 부르고 있다. 그러나 인간이 하나님을 하나로 부르는 것이 죄스러워 하나라는 말에 님이라는 존칭 조사를 붙여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 Zech.14:9 And the LORD shall be king over all the earth: in that day shall there be one LORD, and his name one.(KJV)
* 여기서 ONE은 에하드이다. 히브리어의 복합단수로서 하나를 나타낸다.
* 신명기 6:4절에도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라고 말한다. 원어적으로 모두 하나를 나타내는 에하드를 사용하고 있다.
* 여러분들이 잘 아는데로 에하드는 숫자적 하나를 나타내는 야히드 대신에 복합단수로서 에하드를 사용하고 있다.

7.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하였다는 말의 바른 이해

우리가 존재하는 이 세상은 모든 것이 우리의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 지각, 이 같은 육감(六感)을 통해서만 세상을 판단하고 이해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우리가 경험하는 것 외에 경험 밖의 세상을 잘 이해할 수가 없으므로 인간의 제한된 능력으로 하나님의 세계를 완전히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인간은 없다(無)고 말할 때 위에서 열거한 인간의 여섯 가지 감으로 판단하여 있고 없고를 판단할 뿐이다.
인간이 무(無)라고 할 때 이것은 ‘없을’무(無)인 것이다. 인간은 자신의 이런 육감을 통해 하나님이 지각되어 지지 않기 때문에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인간이 없다고 말하는 무는 무엇을 기초로 해서 없다고 말하는가? 있음(有)이란 무엇을 통해 정의하는가? 없다는 것은 무엇을 기초로 해서 없다고 정의하는가? 인간의 육감을 통해서만 사람들은 있다 없다를 정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생각해 보라 당신이 믿고 있는 이 여섯 가지 육감이란 얼마나 속기 쉬운가?
공기(空氣)를 보라. 공기는 ‘빌’ 공(空)자를 쓴다. 비었다는 것이다. 기(氣)이긴 기인데 비어있는 기(氣)라는 말이다. 우리가 공기를 보면 말 그대로 비어있어 그 공기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공기가 보이지 않는다 하여 없는 것인가? 아니다, 공기는 보이지 않지만 이 세상에 충만해 있으며 이 넓은 세계를 꽉 채우고 있다. 비어 있으면서 모든 것을 채운 것과 같은 이 현상이 무슨 말인가? 하나님께서 공기를 만드신 것은 하나님은 공기처럼 보이지 아니하시는 분이시지만 이 공기가 없으면 존재할 수 없는 존재인 것처럼 공기는 이 세상 어디든 충만하게 채워져 있다. 여러분이 방문을 꼭꼭 닫고 있어도 그곳은 공기가 채워져 있다. 우리 하나님은 보이지 않지만 온 세상에 공기처럼 편만해 계시고 무소부재하시고 어느 장소에든 느낄 수 있으신 분이시다.
과학자들은 물리적인 세계에서 일어나는 현상 안에서의 모든 것만 믿으려 한다. 그래서 모든 인간도 기계적인 입장과 물리적인 입장에서만 이해하려고 하고 진화론을 주장하지만 물리적인 세계에서 이해되지 않는 수많은 또 다른 의식의 세계는 무엇인가? 우리의 의식은 보이지 않지만 그 보이는 우리의 몸을 통해 그 의식이 느껴지고 생겨나는 것이다.
보이는 세계는 보이지 아니하는 세계로부터 온 것임을 알 수 있다.

8. 무(無)란 말의 의미를 이해하기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부르시는 이시니라”(롬 4:17)고 했다. 무란 보이지 않아 없는 것이다. 우리 인간으로 보는 입장에서는 없는 것이라는 것은 무라 말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사실 없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아 인간이 지각하지 못할 뿐임을 알 수 있다. 사람의 머리속에서 과거에 하늘을 나는 비행기라는 것을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시절에 사람들에게 비행기가 없다고 말한다면 없는 것이 사실이나 그런 상상 속에서의 비행기가 실존하는 지금에서 비행기가 없다고 말한다면 우스운 말이다. 우리의 현실 속에서 비행기가 존재하지 않을 때 없다라고 말하면 말이된다. 그러나 없었던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았을 뿐이지, 우리의 지각 속에서 그것을 상상해 내고 이런 것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해 노력해 만들면 우리의 상상이 바로 보이는 현실이 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을 하나님 자신이 생각하고 계획하신 모든 계획대로 이루시는 것 본다. 그러므로 사람이 보는 것과 하나님이 보시는 것에는 차이가 있다. 욥10:4에 “주의 눈이 육신의 눈이니이까 주께서 사람의 보는 것처럼 보시리이까”하나님께서는 인간과 다르다.

9. 인자 같은 이

골1:16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골1:17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이 세상 만물이 예수님에게서 창조되었고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아니 것들과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 권세들, 그리고 만물이 다 예수로 말미암았고 또한 예수님을 위해 창조되셨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만물보다 먼저 계신다고 하시고 만물이 그 안에서 함께 불러냄을 받은 것이다.
예수께서 이 세상의 창조의 주역이 되심은 물론 그분 자신이 가시적인 이 세상을 창조하시면서 또한 그 자신을 이 가시적인 세상에 형상과 모양을 가지신 분으로 나타내셨다. 우리가 그분의 형상을 닮았는데 이 하나님의 형상을 일컬어 인자 같은 이라고 불렀다. [단7:13]내가 또 밤 이상 중에 보았는데 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자에게 나아와 그 앞에 인도되매

* 인자는 사람의 아들인데 인자와 같이 사람과 같이 보이시는 그분이 구약에서도 소개되고 있음을 본다.
* 우리는 구약에서 이미 인자 같은 이(단 7:13)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예수 자신은 인자와 같으신 모양을 가지신 것이다. 이미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의 모습(창 3:9)이 나온다. 이것은 아담과 하와가 이미 자신과 같은 형상을 가지신 여호와와 교제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 이 세상 만물은 모두 하나(ONE)이신 예수 그리스도에서 나왔다. 그리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다. 요10:30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하신대
*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을 나타내신 하나님의 형상이 그분의 광채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댓글목록

이춘선님의 댓글

이춘선 작성일

목사님
다시 뵈니 반갑습니다^^
새해 주님의 복 많이 받으세요

조춘호님의 댓글

조춘호 댓글의 댓글 작성일

집사님~! 집사님께서 건강이 여의치 않으신가 본데 속히 쾌차하시기 바랍니다.
늘 좋은 글 감사드리고  힘내시고 강건하십시오. 새해는 집사님의 하시는 모든
일이 형통하시고 만복이 깃드시기를 기도합니다.

관리자님의 댓글

관리자 작성일

조춘호 목사님, 이곳에서 다시 뵙게 되니 반갑습니다. 저뿐 아니라 많은 분이 환영하시리라 믿습니다. 게시하는 방법에 당분간 조금 불편함이 있겠지만 교과 연구 자료 계속 올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조춘호님의 댓글

조춘호 댓글의 댓글 작성일

감사합니다. 환영해 주셔서. 시간되는데로 준비해 올려보겠습니다.

조춘호님의 댓글

조춘호 작성일

재림 성도 여러분~! 새해 복많이 받으십시오. 이번 교과는 신앙에 가장 기본이기도 하지만 이 기본에 대한 이해가 중요하기에 시간을 들여 글을 썼습니다. 참고해 보시고 좋은 관점을 얻게 되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최규현님의 댓글

최규현 작성일

조목사님!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하나님의 영감이 갑절이나 임하시길 원합니다.
좋은 해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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