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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과 선지자들의 글들을 해석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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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목사 작성일09-03-11 17:08 조회4,90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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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과 선지자들의 글들을 해석함


3월 14일 안식일 (일몰: 오후 6시 38분)




기억절: “이에 모세와 및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눅 24:27)




연구범위: 사 65:17, 막 1:15, 롬 2:14-16, 엡 2:8-9, 약 2:14-26, 요일 5:12-13.




학습 포인트: 성경 본문을 사용함에 있어서 해석학과 설교학은 어떻게 다른가? 문맥을 고려하는 것은 왜 그렇게 중요한가? 복음을 들은 적이 없는 사람도 구원 받을 수 있는가? 은혜의 왕국과 영광의 왕국은 어떻게 구분되는가?




안식일 오후

우리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인들은 엘렌 G. 화잇을 통해 예언의 은사가 주어졌다고 믿는다. 그렇다면 예언의 신의 증언을 어떻게 해석하느냐 하는 문제가 따르게 된다.

만약 화잇 여사가 받은 영감이 신구약의 선지자들과 동등한 것이라고 믿는다면, 우리는 성경을 해석할 때 적용하는 동일한 해석 원칙을 그녀의 글을 해석할 때에도 적용해야 할 것이다. 물론 성경의 권위는 예언의 신의 권위보다 위에 있지만, 성경을 해석하는 원칙은 엘렌 G. 화잇의 글을 해석할 때에도 적용될 수 있다. 미국 사법부의 제도에서 유추하자면, 대법원의 법 해석 원칙과 판결의 원칙을 하등 법원에서도 동일하게 따르도록 하고 있다. 그러나 결국 대법원의 판결이 최종적인 권위를 가진다.




핵심본문: 눅 24:27




<학습 목표>

깨닫기: 성경과 예언의 신의 증언을 바르게 이해하고 적용하는 법을 배운다.

느끼기: 더 깊이 있는 개인적 성경 연구에 대한 열망을 갖는다.

행하기: 깊이 있는 성경 연구를 위해 시간과 열정을 바친다.




< 교과 개요 >

I. 해석학과 설교학(고전 6:19-20)

A. 이 본문이 의도했던 문맥상의 의미는 무엇인가? 이 구절은 어떤 의미로 확대, 적용될 수 있는가?

B. 원래 성경 기자의 의도와는 달리, 설교자가 어떤 중요한 진리를 설명하기 위해 그 성경절의 표현만을 빌린 예를 들 수 있겠는가?




II. 시간과 장소(렘 4:23-26)

A. 예레미야가 이 구절에서 묘사한 것은 무엇이며, 말세의 사람들을 위해 함축된 의미는 무엇인가?

B. 성경 시대의 배경에 익숙하려면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은가?

C. 엘렌 G. 화잇의 글을 더 잘 해석하기 위해 그 시대와 장소를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III. 문맥(사 65:17-20)

A. 이 본문의 앞뒤 문맥을 이해하는 것은 이 구절을 해석하는 데 어떤 도움을 주는가?

B. 문맥을 무시한 채 엘렌 G. 화잇의 글을 인용한다면 어떤 위험이 따를 수 있는가? 글의 배경을 이해하는 것은 왜 그렇게 중요한가?




요점: 성경을 바르게 해석하기 위해서는 건전한 해석 방법이 필요하듯이, 엘렌 G. 화잇의 글들을 해석할 때에도 진정한 의미를 깨닫기 위한 조심스런 연구가 필요하다.




일요일(3월 8일) 해석학(롬 2:14-16)




해석학은 본문의 저자가 최초의 독자들에게 말하고자 했던 원래의 의미가 무엇이었느냐에 초점을 맞춘다.




1. 로마서 2:14-16의 본래의 의미 혹은 해석학적인 의미는 무엇입니까?(비교 겔 3:17-19, 롬 10:12-17)

롬2:14-16 (율법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15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송사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 16 곧 내 복음에 이른 바와 같이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람들의 은밀한 것을 심판하시는 그 날이라.

겔3:17-19 인자야 내가 너를 이스라엘 족속의 파수꾼으로 세웠으니 너는 내 입의 말을 듣고 나를 대신하여 그들을 깨우치라 18 가령 내가 악인에게 말하기를 너는 꼭 죽으리라 할 때에 네가 깨우치지 아니하거나 말로 악인에게 일러서 그 악한 길을 떠나 생명을 구원케 하지 아니하면 그 악인은 그 죄악 중에서 죽으려니와 내가 그 피 값을 네 손에서 찾을 것이고 19 네가 악인을 깨우치되 그가 그 악한 마음과 악한 행위에서 돌이키지 아니하면 그는 그 죄악 중에서 죽으려니와 너는 네 생명을 보존하리라.

롬10:12-17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저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 13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14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15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 16 그러나 저희가 다 복음을 순종치 아니하였도다 이사야가 가로되 주여 우리의 전하는 바를 누가 믿었나이까 하였으니 17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답: 이 말씀은 하나님께로부터 율법을 받은 유대인이나 그런 율법을 받지 못한 이방인이나 다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것이며, 엄밀한 의미로는 하나님의 율법을 받지 않은 사람은 하나도 없다는 것을 지적한다. 양심에 새겨진 하나님의 율법에 올바르게 반응하는 것은 성령의 감화이며, 성령은 궁극적으로 구주 예수를 증거하는 분이시다. 그가 예수 이름을 모르는 중에 양심을 주장하시는 성령의 인도를 따라 바르게 살았을 때 영원한 나라에 들어가면, 거기서 그의 구원이 예수님 때문이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예수를 떠나서 자기 양심의 선행만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는 사람은 결코 없다.


천국에는 복음을 들어본 적이 없는 사람도 분명히 있을 것이다. “이방인 가운데서 하나님을 잘 알지 못한 채 섬긴 자들 즉 인간의 도움을 통해 한 번도 빛을 받지 못한 자들도 잃어버린바 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기록된 하나님의 율법은 알지 못했으나 천연계를 통하여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율법의 요구를 준행하였다. 그들의 행위는 성령께서 마음을 감화하신 증거이며 그들도 하나님의 자녀로 인정을 받는다.”(시대의 소망, 638)

때때로 하나님께서는 인간 기별자들과 관계없이 이방 땅에 있는 자들의 마음을 움직이셔서 그들을 구원하신다. 그러나 그들이 구원받은 것은 성령께서 그들의 마음을 감화하셨기 때문이며, 그들이 행위로써 반응했기 때문이다. 그들이 구원받는 것은 단순히 양심을 따라 살았기 때문이 아니다. 만일 그들이 그렇게 구원을 받는다면, 그것은 율법을 지킴으로써 구원을 받는 것이 되는데, 신약은 그러한 가능성을 명백히 부인하고 있다(롬 3:28, 갈 2:16). 하나님께서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으신다는 사실(11절)은, “무릇 율법 없이 범죄한 자는 또한 율법 없이 망하고 무릇 율법이 있고 범죄한 자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으리라”(롬 2:12)는 바울의 말 속에 잘 나타나 있다. 여기서 율법이 없는 자들이란 시내산에서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기록된 법을 갖지 않은 이방인을 가리킨다. 심판의 때에 유대인들은 기록된 율법으로, 이방인들은 “그 마음에 새긴 율법” 곧 양심에 따라 심판을 받을 것이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롬 3:10)고 성경은 말하는데, 이것은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가 죄인임을 의미한다. 이들은 모두 같은 방법으로 구원을 받을 것인데, 율법을 지킴으로써가 아니라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에 의해 구원을 받는다.




그리스도께서 칭찬하실 자들

“심판 때에 그리스도께서 칭찬하실 자들은 신학이란 학문을 알지 못했을는지도 모르나 그리스도의 원칙들을 마음에 품고 있었다. 거룩한 성령의 감화를 통하여 그들은 주위에 있는 이들에게 축복이 되었다. 비록 이방인 가운데서일지라도 친절한 정신을 품고 있는 자들이 있으며 생명의 말씀을 듣기 전에라도 그들은 선교인들을 도와주었으며 저희 자신의 위험을 무릅쓰고 그들을 섬긴 자들이 있다. 이방인 가운데서 하나님을 모르고 섬긴 자들 즉 인간의 도움을 통하여 한 번도 빛을 받지 못한 자들일지라도 멸망을 당하지 않을 것이다.”(시대의 소망, 638)




<부가설명> 위의 “답”에서 설명을 했지만, 부연하여 설명하면 하나님께서는 비록 타락하여 아담 안에서 사망이 되고 육체의 생명만 유지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도 그 마음에 말씀하신다. 그래서 성경은 사람들의 마음을 같게 지으셨다고 계시한다. “저는 일반의 마음을 지으시며 저희 모든 행사를 감찰하시는 자로다”(시33:15). 일반의 마음이라는 말은 마음을 같게 지으셨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일반”이라는 말이 “야하드”인데 “똑같이, 같은 방식으로, 마찬가지로” 등의 뜻도 있는 말이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을 깨닫는 마음이 있다. 그것을 신약에서는 “양심”이라고 하였다. 헬라어 양심이라는 말은 재미있다. “순에이데시스”인데 “함께”라는 말인 “순”과 “본다”는 뜻이 있는 “에이데시스”의 합성어로서 “함께 본다”는 의미가 된다.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들의 마음을 같게 지으셨기 때문에 인간의 양심을 하나님의 형상을 안다는 의미가 담긴 말이라고 생각해본다. 그래서 모든 사람이 다 하나님을 알게 되어 있다. 게다가 하나님께서 전도하셨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말하노니 저희가 듣지 아니하였느뇨 그렇지 아니하다 그 소리가 온 땅에 퍼졌고 그 말씀이 땅 끝까지 이르렀도다 하였느니라”(롬10:17,18)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저희에게 보이셨느니라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롬1:19,20).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양심과 천연계를 통하여 태초부터 복음을 전하셨다. 그 복음은 곧 그리스도이시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서만 구원을 얻는다.




교훈: 성경의 기자가 본래의 독자들에게 말하고자 했던 원래의 의미를 밝혀내는 학문을 해석학이라 하는데, 이것은 성경 해석의 기본이 되고 있다.




월요일(3월 8일) 설교학(막 1:15)




설교학은 설교의 예술을 배우는 과목이다. 설교학 수업 시간에 학생들은 설교 준비 방법과 설교 시 성경을 사용하는 법을 배운다. 때때로 설교자는 설교의 핵심을 끌어내거나 호소를 위하여 본래의 의미에 주목하지 않고 본문의 표현만을 사용할 수도 있다.




1. 예수께서는 어떤 왕국이 가까웠다고 하셨습니까?(막 1:15)

막1:15 가라사대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답: “가라사대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막 1:15). 예수께서 선포하신 하나님 나라는 은혜의 왕국이었으나 오늘날 우리는 그것을 영광의 왕국에 적용할 수 있다.




예수께서 그 당시에 선포하신 왕국은 그분께서 초림 시에 세우실 은혜의 왕국이었다. 그러나 이 본문을 오늘날 우리의 상황에도 적용할 수 있다. 안식일 아침에 설교자가, “여러분, 하나님의 왕국이 가까웠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야 합니다.”라고 호소할 수 있다. 하지만 설교자가 염두에 둔 왕국은 예수님의 재림 시에 시작될 영광의 왕국을 가리킨다. 마가복음 1:15에 대한 전자의 해석은 해석학에 따른 것이고, 후자는 설교학에 따른 해석이다.

마가복음 1:17에 보면, 예수께서 갈릴리 바닷가를 거니시다가 어부인 시몬과 그의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고, 그들에게,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고 하셨다. 그러자 그들은 곧 그물을 버려두고 그분을 좇았다.

오늘날의 설교자는 마가복음 1:17절을 본문으로 하여, 우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부르시는 예수님을 따르자고 호소할 수 있다. 해석학적으로는 그 본문이 시몬과 안드레에게 적용되지만, 설교학적으로는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적용될 수 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는 우리 모두가 사람 낚는 어부가 되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마 28:19-20)

엘렌 G. 화잇도 종종 성경을 설교학적으로 사용하였다. 예를 들어 교육(Education)이라는 책의 ‘생리학의 연구’라는 장에서 바른 자세에 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무엇보다도 첫째로 가르쳐야 할 일은, 앉고 설 때 올바른 자세를 갖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바로 서도록 지으셨다”(교육, 198). 그녀는 “하나님이 사람을 바르게 지으셨”다(전 7:29)는 성경절을 인용하였는데, 솔로몬이 전도서에서 말한 것은 바른 자세가 아니라 정직성에 관한 것이었다.


은혜의 왕국과 영광의 왕국

“그분의 왕권은 그분의 두 왕국을 상징하는 두 보좌에 의해 묘사되고 있다. ‘은혜의 보좌’(히 4:16)는 은혜의 왕국을 대표하며 ‘영광의 보좌’(마 25:31)는 영광의 왕국을 대표한다. … ‘예수님은 이 왕국이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눅 17:20-21)고 가르치셨다. 이것은 이 세상의 왕국이 아니라 진리의 왕국이라고 그분은 말씀하셨다. … ‘영광의 왕국은 천년기 끝에 지상에 최종적으로 세워질 것인데, 그때 새 예루살렘이 하늘에서 내려올 것이다(계 20, 21).”(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 기본교리, 한국어판, 2007년, 79-81)




<부가설명> 성경이 기록될 당시의 독자들이나 기록 속에 등장하는 사람들에게 하신 말씀은 지금도 살아계셔서 이 세상 사람들에게 말씀하시는 바로 그 말씀이기 때문에 설교학적으로 적용하는 해석이 성경의 목적에 더 합당한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해석학적으로 이해하는 것으로 그친다면 성경은 오늘 우리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다. 이스라엘의 역사가 오늘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다는 말인가. 그러나 그것은 복음을 해석해주는 역사적 사건이라는 것을 이해할 때 우리에게 의미와 가치가 있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설교학적 해석이다. 이 해석이라야 성경이 우리에게 살아 증거되는 생명의 말씀이 된다. 성경을 깨닫는 성경이 제시한 그 길을, 우리는 학문적 방법이라는 이름으로 경시하지 않아야 한다.




교훈: 성경의 기자가 그 당시의 독자들에게 전하고자 했던 본래의 의미를 뛰어넘어 오늘날 회중에게 적용하는 해석 방법을 설교학적 해석이라고 한다.




화요일(3월 10일) 시간과 장소(렘 4:23-26)




성경 해석의 중요한 또 하나의 원칙은 그 본문이 누구에 의해, 그리고 어떤 시대와 상황 하에서 기록되었는지를 살펴보는 것이다.




1. 예레미야 4:23-26에서 예레미야는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까?

렘4:23-26 내가 땅을 본즉 혼돈하고 공허하며 하늘들을 우러른즉 거기 빛이 없으며 24 내가 산들을 본즉 다 진동하며 작은 산들도 요동하며 25 내가 본즉 사람이 없으며 공중의 새가 다 날아갔으며 26 내가 본즉 좋은 땅이 황무지가 되었으며 그 모든 성읍이 여호와의 앞 그 맹렬한 진노 앞에 무너졌으니.




답: 당시 상황으로는 첫째 예루살렘 멸망에 대한 예언이다. 그러나 이런 기록들을 다 종말 사건을 예표하고 있다. 그것은 이스라엘의 출애굽 사건이 복음의 진행을 예표하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일반적인 해석학적 접근으로 이 말씀들을 다루면 구속사적 의미를 찾지 못하게 된다.


대부분의 재림교인들은 이 구절을 읽을 때 천년기(millennium)를 떠올린다. 그러나 주전 600년경에 예레미야가 이 본문을 기록할 때에는 천년기를 염두에 둔 것이 아니다. 이 구절은 주전 586년에 있었던 예루살렘의 멸망에 관한 것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아 네가 돌아오려거든 내게로 돌아오라. 네가 나의 목전에서 가증한 것을 버리”라(렘 4:1)고 말씀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를 통해 당신의 백성이 악한 길에서 돌이키기를 탄원하셨지만 그들은 들으려 하지 않았다. 23-26절에서 예레미야는 그들의 불순종의 결과로 어떤 일이 일어날지 이상을 통하여 보고, 유다 땅에 임할 임박한 파멸과 황폐를 시적인 언어로 묘사하였다.

주전 586년에 유다와 예루살렘에 일어난 일은 미래에 있을 천년기의 표상이다. 따라서 예레미야 4:23-26은 해석학적으로 예루살렘의 멸망을 언급한 것이지만, 상징적으로는 천년기에 관한 언급이 된다. 엘렌 G. 화잇은 천년기 동안의 지구의 형편을 묘사하기 위해 이 구절을 인용하였다.(각 시대의 대쟁투, 659)

엘렌 G. 화잇의 글을 읽을 때에도 우리는 시간과 상황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1897년에 화잇 여사는 “자전거와 의복과 기타 불필요한 것에 사용한 돈에 대하여 우리는 셈하여야 한다”(목사와 복음 교역자에게 보내는 증언, 398)고 기록했다. 19세기 후반에 자전거는 경제적인 교통수단이라기보다는 부자들의 장난감이었다. 초기에 좋은 자전거 한 대의 가격은 150달러를 호가했는데, 오늘날로 치자면 아주 값비싼 자동차를 사는 것에 비교될 수 있었다. 몇 년 지나지 않아서 자전거가 저렴한 교통수단이 되자, 화잇 여사는 더 이상 자전거를 반대하는 말을 하지 않았다. 자전거에 대한 화잇 여사의 생각은 선한 청기기에 관한 성경적 원칙에 기초하고 있었다.




증언의 말씀을 해석할 때 주의할 점

“어떤 이들은 하나님의 남은 백성을 구성할 자들을 경고하고, 권면하고, 책망하고, 위로하고, 격려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교회에 주신 기별들을 그릇 해석하고, 그릇 적용한다. 증언을 하나님의 기별로 받아들이는 자들은 그것에 의해서 도움과 축복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단지 자기의 어떤 이론이나 생각을 뒷받침하기 위해서, 또한 자기들의 잘못된 노선을 옹호하기 위해서 부분적으로 받아들이는 자들은 그들이 가르치는 것에 의해 축복이나 유익을 얻지 못할 것이다.”(목사와 복음 교역자에게 보내는 증언, 42)




<부가설명> 자전거에 대한 언급이나 기타 그런 종류의 언급은 원리를 이해해야하는 것들이다. 그것을 문자적으로 이해하려고 하면 오해가 생긴다. 성경 말씀 중에도 그런 것이 많다. 오른 눈 범죄하면 그 눈을 빼버리라는 말과 같은 것은 원리를 이해해야 하는 말씀이다. 이처럼 성경에는 예언이라도 원리를 이해해야 하는 말씀이 있고, 문자적으로 이해하고 적용해야 하는 말씀도 있는 것이다. 화잇의 글도 그와 같다. 어떤 것은 상징과 비유이고 어떤 것은 실제적인 사실이고 어떤 것은 실제적인 것이지만 원리를 다루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은 다 구속의 복음을 이해하도록 하기 위한 것임을 명심하고 항상 창조론, 구속론, 종말론이라는 성경에 일관되게 흐르는 맥락을 놓지지 않고 이해하려고 해야 한다. 화잇의 글들도 성도를 온전하게 하기 위하여 주신 성령의 기별임을 이해하고 바르게 적용할 때 엄청난 복을 누리게 될 것이다.



교훈: 우리는 성경이나 예언의 신을 해석할 때에 그 본문이 어떤 시간과 장소, 그리고 어떤 특수한 환경 하에서 기록되었는지를 반드시 고려해야 한다.




수요일(3월 11일) 직접적인 문맥(사 65:17)




1. 이사야 65:17에서 이사야가 언급한 새 하늘과 새 땅은 어떤 것입니까? 그리스도인들이 고대하는 미래의 그 새 땅입니까?

사65:17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나니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아니할 것이라/ 20 거기는 날 수가 많지 못하여 죽는 유아와 수한이 차지 못한 노인이 다시는 없을 것이라 곧 백 세에 죽는 자가 아이겠고 백 세에 못되어 죽는 자는 저주받은 것이리라.




답: 일차적으로 이스라엘 민족이 포로에서 돌아와 국토가 회복될 것을 예언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영원한 신천지에 대한 올바른 예언이기도 하다.




이사야는 그 다음 구절에서 이렇게 말했다. “거기는 날 수가 많지 못하여 죽는 유아와 수한이 차지 못한 노인이 다시는 없을 것이라. 곧 백 세에 죽는 자가 아이겠고 백 세에 못되어 죽는 자는 저주받은 것이리라”(사 65:20). 새 땅에서도 죽음이 있는가? 이것은 우리가 천년기 이후에 있을 것으로 기대하는 새 땅의 모습이 될 수 없다. 그렇다면 17절에서 말하는 새 하늘과 새 땅은 무엇을 가리키는가?

본문에서 이사야는, 이스라엘이 바벨론 포로에서 귀환한 후에 하나님께 신실히 행하고, 이방의 빛이 되라는 거룩한 명령(사 42:6)을 성취시킬 때 곧 있게 될 ‘새로운 창조’를 묘사하고 있다. 불행하게도 이 조건적인 예언은 성취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차적인 의미에서 이 구절은 천년기가 끝날 때 있게 될 새 하늘과 새 땅을 가리키는 것이다. 하지만 그 ‘새 하늘과 새 땅’에서는 더 이상 죽음이나 슬픔이 없을 것이므로(계 21:4), 우리는 그 비유적 표현을 어디까지 적용해야 할지 주의하지 않으면 안 된다.




2. 엘렌 화잇은 실물교훈에서 “구주를 받아들인 사람들이 아무리 진실하게 회개했다 할지라도 우리는 그들이 구원을 받았다는 말을 해 주거나 그런 생각을 갖도록 가르쳐서는 안 된다.”(실물교훈, 155)고 했습니다. 우리는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없다는 뜻입니까?




답: 화잇 여사 당시에 많은 사람들이 ‘한 번 구원받으면 영원히 구원받는다’는 교리에 빠져 있었으므로 그것을 경고한 말씀이다.




이 글의 문맥을 연구해 보면, 사람이 회심 후에 자기 확신과 유혹의 문제를 이야기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화잇 여사 당시에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한 번 구원받으면 영원히 구원받는다’는 교리를 믿고 있었다. 우리는 결코 유혹에 대해 안전하지 못하며, 결코 타락할 수 없다고 말할 수도 없고, 이미 구원 받았으므로 유혹으로부터 안전하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이 말하려는 요점이다. 이것은 우리가 날마다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없다는 뜻이 아니다.




구원을 장담하지 말 것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고, 그들의 최초의 확신을 가지고 ‘나는 구원을 얻었다’고 말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의지할 위험이 있다. 이러한 사람들은 자신의 연약함을 볼 줄 모르며 항상 하나님의 능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잊어버린다. 그들은 사단의 음모에 대처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므로 시험이 올 때에 베드로처럼 매우 깊은 죄의 구덩이에 빠져 버린다.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권면이 있다.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 10:12). 우리의 유일한 안전책은 자신을 의지하지 말고 그리스도를 의지하는 것이다.”(실물교훈, 155)




<부가설명> 성경 구절의 전후의 문맥을 살피는 것은 아주 중요하다. 그럴 때에 사용된 단어의 바른 의미를 이해하는데 확실한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또 그 글의 대상이 어떤 상태에 있는지도 생각해야 한다. 같은 사실을 말하면서도 대상에 따라 표현을 정반대로 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공자는 그의 제자 자로가 “의를 배우면 곧 실행해야 합니까?”라고 물었을 때 “부형이 계시는데 어떻게 곧 실행하겠는가.”라고 대답하였다. 그런데 염유가 같은 질문을 했을 때, 공자는 “그럼 곧 실행해야한다.”고 대답했다. 공자를 모시고 이 두 제자가 드나들며 묻고 대답하는 것을 다 들은, 공서화가 “어떻게 똑 같은 질문에 정반대의 대답을 하시는지 저는 도무지 모르겠습니다.”라고 말하자, 공자는 “구는(염유)는 뒤로 물러서는 편이기 때문에 앞으로 밀어내 주었고, 유(자로)는 기승스러운 사람이기에 뒤로 물러나게 해 준 것이다.”라고 대답하였다(논어 선진편 25장). 공자의 대답한 말만 가지고 이야기 하면 이런 모순이 없다. 그러나 자로나 염유의 상태를 두고 공자의 말을 생각하면 똑 같은 사실을 가르친 것을 알 수 있다. 다 의를 바르게 실천하라고 교육한 것이다. 화잇여사의 글들 중에 이런 성질의 글들이 많이 있다. 이런 사실을 올바르게 이해해야 할 것이다.




교훈: 성경이나 예언의 신을 해석할 때에 문맥을 살피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직접적인 문맥을 무시할 때 그 구절을 곡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목요일(3월 12일) 폭넓은 문맥(엡 2:8-9)




폭넓은 문맥이란 특정한 주제에 관해 말한 앞뒤 문맥 외에, 같은 책의 다른 장이나 그 책 전체나 성경책 전체의 흐름을 말한다.




1. 우리가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은혜로 구원을 받는다면, 행함은 필요하지 않습니까?(엡 2:8-9, 약 2:14-26). 바울과 야고보는 구원 문제에 있어서 서로 대립됩니까? 다음 구절들은 이 주제에 관해 무엇이라고 말합니까?(롬 3:21-28, 4:3, 갈 3:6-12)







엡2:8,9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9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약2:14-26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15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16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더웁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17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18 혹이 가로되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19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20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 줄 알고자 하느냐 21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드릴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22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 23 이에 경에 이른 바 이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응하였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 24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 아니니라 25 또 이와 같이 기생 라합이 사자를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26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롬3:21-28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22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25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26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 27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뇨 있을 수가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 28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롬4:3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이 저에게 의로 여기신 바 되었느니라.

갈3:6-12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 함과 같으니라 7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아들인 줄 알지어다 8 또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모든 이방이 너를 인하여 복을 받으리라 하였으니 9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 10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11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나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이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니라 12 율법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라 이를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리라 하였느니라.




답: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 2:8).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 아니니라.”(약 2:24)


이 주제에 관한 폭넓은 문맥을 살펴볼 때, 야고보는 선행을 구원의 조건으로 내세운 것이 아니라, 두 종류의 믿음 곧 건전한 믿음과 건전하지 못한 믿음에 관해 주장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바울은 선행이 따르는 건전한 믿음에 대해 말했고, 야고보는 지적으로 동의하는 데 그쳐버린, 건전하지 못한 믿음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바울은 우리가 참되고 건전한 믿음에 기초하여 의롭게 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아브라함의 예를 들었고, 야고보는 아브라함의 믿음이 선한 행실 즉 순종을 낳았기 때문에 참된 것이었다고 주장하였다. 우리는 구원 받기 위하여 오직 건전한 믿음이 필요하며, 우리의 믿음이 건전한지의 여부는 행동으로 나타난다.

우리는 엘렌 G. 화잇의 글을 읽을 때에도 폭넓은 문맥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가령 육식 문제에 관한 진술을 보면 단호하게 말한 경우와 융통성 있게 말한 경우가 있다. 예를 들면, “채소와 과실과 곡식들이 우리의 음식물로 구성되어야 할 것이다. 약간의 고기도 우리의 위장에 들어가지 않게 해야 한다. 육식하는 것은 자연 법칙을 위반하는 것이다”(음식물과 식생활에 관한 권면, 380)라고 말한 경우가 있다. 이 구절만 읽으면 누구든지, 어떤 상황에서든지 고기를 먹어서는 안 된다는 결론에 이를 것이다. 그러나 몇 페이지만 더 넘겨보면 “육식은 가장 건강적인 음식이 아니다. 그러나 나는 모든 사람이 고기를 끊어야 한다는 입장을 취하지 않는다. 소화 기관이 연약한 사람들이 채소와 과실 또는 오트밀 죽을 먹을 수 없다면, 가끔 고기를 사용할 수 있다”(음식물과 식생활에 관한 권면, 394-395).




순종이 따르는 참된 믿음

“백성들은 이 명령을 순종함으로 그들의 믿음에 대한 증거를 나타내야 했다. 그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로 구원 얻기를 바라는 사람들은 모두 그들의 구원을 확보하기 위하여 그들 스스로 해야 할 일이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우리는 범죄의 형벌에서 속량하실 수 있는 분은 오직 그리스도뿐이시지만 우리가 할 일은 죄에서 순종으로 돌아서는 것이다. 사람은 행함이 아닌,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되어 있다. 그러나 그의 믿음은 행함으로 말미암아 나타나야 한다.”(부조와 선지자, 278)




<부가설명> 믿음의 핵심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시고 부활하게 하신다는 사실을 믿는 것이다(롬4:17). 예수를 믿는 것은 그가 믿을 만한 확실한 증거를 주셨기 때문이다. 그 증거가 무엇인가? 예수의 부활이다.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저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하니라”(행17:31).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고전15:17,18).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예수의 부활을 믿을 때 믿는 사람이 예수의 부활의 생명을 얻는 것이다. “저에게 의로 여기셨다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 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롬4:23-25). 우리가 믿음으로 부활의 생명 곧 의를 얻으면 그 생명이 우리를 생활하게 한다. 그것이 믿음으로 행하는 행함이다. 이 생명이 없으면 행함이 나올 수 없다. 믿음과 행함은 생명과 생활의 관계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침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롬6:4). 우리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성경적 실상을 알아서 믿음과 행함의 관계를 바르게 이해했으면 좋겠다. 바울과 야고보는 이 사실을 잘 알고 그렇게 기록했다.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약2:17).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26). 야고보도 바로 생명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것이다. 생명이 있으면 행하게 된다는 사실을 가르치고 있다. 그러므로 행하지 않는 믿음이란 생명이 없는 것이며 그것은 성경이 계시한 믿음이 아니라는 것이다.




교훈: 성경이나 예언의 신을 연구할 때에 폭넓은 문맥을 살핌으로써 우리는 균형 잡힌 견해를 갖게 되고 그릇된 해석에 빠질 위험에서 보호를 받는다.




금요일(3월 13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독서 과제: 엘렌 G. 화잇, 믿음과 행함, ‘그리스도 우리의 의’(35-39), ‘엘렌 화잇이 경계를 분명히 함’(47-50)




영감 받은 글들을 해석하기 위한 추가적인 지침

이번 주에 공부한 지침 외에도 우리는, (1)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할 때에 성령의 인도를 간구해야 하고, (2) 한두 개의 좋은 번역 성경을 사용해야 하며, (3) 모든 사람, 모든 장소, 모든 시대에 적용되는 보편적인 원칙들을 살펴야 하고, (4) 우리가 발견한 진리에 순종하고자 하는 마음을 가져야 하며, (5) 기존에 가지고 있던 견해를 기꺼이 굴복시키고자 하는 열린 마음을 가져야 하고, (6) 극단적인 해석을 경계해야 하며, (7) 경험 있는 사람들과 함께 일해야 하고, (8) 상식을 따라야 한다.

한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라는 주장에 대한 화잇 여사의 견해

“교만보다 하나님께 더 가증스럽고 우리에게 더 위험한 것은 없다. 교만은 모든 죄 중에 가장 절망적이고 가장 고치기 어려운 죄이다. 베드로의 타락은 갑자기 일어난 것이 아니라 오랫동안 점진적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자만심은 그로 하여금 구원을 얻었다는 생각을 갖게 하였고 그로 하여금 한 계단씩 내려가도록 만들어 마침내 자기 스승을 부인하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하였다. 이 세상에서 자아에 대한 확신을 갖거나 시험에 대한 위험성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결코 안전치 못하다. 구주를 받아들인 사람들이 아무리 진실하게 회개했다 할지라도 우리는 그들이 구원을 받았다는 말을 해 주거나 그런 생각을 갖도록 가르쳐서는 안 된다. 그렇게 하는 것은 그들을 그릇 인도하는 것이 된다. … 비록 우리가 자신을 그리스도께 바치고 그분이 우리를 받으셨다는 사실을 안다 할지라도 우리가 전혀 시험을 받지 않을 곳에 있는 것이 아니다.”(실물교훈, 154-155)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1. 우리가 성경이나 예언의 신의 증언을 인용할 때 문맥을 무시하지 말아야 하는 중요한 까닭은 무엇입니까?

* 전체적인 사상을 파악하지 못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2. 이번 주 교과를 통해 새롭게 깨달은 영적 교훈이나, 한 주일을 살아가면서 꼭 실천하고 싶은 내용은 무엇입니까?

* 성경을 이해하고 해석하는데 필요한 눈을 크게 뜨는 공부를 하였다. 성경이나 예언의 신의 증언을 읽을 때 이런 안목으로 읽고 깨닫는 훈련이 매일 이루어지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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