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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9 과 미혹하는 말을 믿지 말라: 선지자와 예배 (하나님 품성 중심의 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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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박용범 작성일11-08-19 17:17 조회3,127회 댓글2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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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9 과 “미혹하는 말을 믿지 말라”: 선지자와 예배

기억절: “내가 옛날 백성을 세운 이후로 나처럼 외치며 고하며 진술할 자가 누구뇨 있거든 될 일과 장차 올 일을 고할지어다”(사44:7)

첫째 날(일) 천천의 수양


미가서 6장 6-7절의 기록은 보통 사람들이 갖고 있는 예배와 관련된 마음의 고민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핵심은 하나님께 나아갈 때 내가 무엇을 준비해서 나아갈까에 대한 고민입니다.
사람들이 하나님께 나아갈 때 무엇을 가지고 나아갈까를 고민하는 이유는 사람의 본질과 하나님의 품성에 대한 오해 때문입니다.

무엇인가를 드릴 수 있다고 하는 생각은 사람이 지금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생각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의 무엇인가를 받을 수 있는 분이라는 것이 전제가 될 때 성립되는 입니다.

성경은 인간의 본질을 없는 것으로(고전15:22 전반부) 정의하고 있고 하나님 또한 받으시는 분이 아니라 주시는 분(행17:25)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아담이 하나님의 품성을 오해하여 하나님을 떠나는 선택을 할 때 아담은 스스로 생명이 있는 존재가 아니었으므로 그 때 그는 죽었습니다.(창2:17)
아담이 죽었을 때 아담의 생명 속에서 태어날 모든 인류도 그때 함께 죽었습니다.(엡2:1)
하나님의 책임지시는 사랑에 의해 당장 무(無)로 돌아가는 것을 유예했을 뿐 아담과 아담으로 인해 태어날 모든 인류는 그때 이미 하나님 보시기에는 죽은 자들입니다.

죽은 자란 다른 말로 하면 없는 자입니다.
없는 자가 어떤 행위를 행할 수가 없습니다.
그 사람 자체가 없으므로 그가 하는 행위도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하나님 보시기에 없는 자라고 정의함에도 불구하고 정작 사람들은 자신이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생명을 담보로 유예된 삶으로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눈에는 서로가 보이고 자신도 보이기 때문에 우리의 눈에 보이는 대로 존재하고 있는 것처럼 생각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우리의 본질을 죽은 것, 없는 것으로 정의합니다.
풀처럼 싱싱하게 보이고 꽃처럼 아름답게 보여도 여전히 그 본질은 하나님 보시기에는 없는 것이고 사람의 본질이 없는 것임을 사람이 죽을 때에 드디어 깨닫게 됩니다.(사40:6-8)

뿐만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은 우리와 절대적 관계 속에서 우리를 창조하셨으므로 상대적 개념의 관계로 변환되실 수 없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은 우리를 창조하신 분으로서의 책임감을 갖고 자신의 생명을 지속적으로 공급하셔야만 우리는 살 수 있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은 언제나 주시는 분의 위치에 계셔야만 합니다.
하나님이 받으시는 분의 위치로 전환될 때 모든 피조물들은 존재할 수 없게 됩니다.

인간의 본질과 하나님의 품성을 깨달을 때 하나님과 인간이 절대적 사랑의 관계로 연결되어 있음을 받아들이게 되고 그 하나님의 사랑에 반응하는 것이 예배입니다.
하나님과 사람간의 절대적 관계는 예배를 통해서 매 안식일 마다 새롭게 깨닫고 받아들이게 되고 그 깨달음을 일상생활 속에서도 적용시켜 우리의 일상적인 삶에도 하나님의 사랑과 생명과 지혜가 나의 삶에 절대적으로 필요함을 느낌으로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살게 합니다.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생명을 받아들여서 그 사랑과 생명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흘러가게 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둘째 날(월) 이사야를 부르심


이사야와 하나님과의 만남이 이사야 6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사야가 자신의 존재를 깨닫게 되고 하나님의 품성에 대한 오해를 벗어 버리게 되고 하나님의 품성을 바라보게 되는 매우 중요한 장입니다.

이사야가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되었습니다.(사6:1-4)
하나님의 영광이란 하나님의 품성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이사야가 하나님의 품성을 보았을 때의 이사야의 반응은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 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5절) 이었습니다.

왜 이사야는 하나님의 품성을 보고는 화가 임했고 망하게 되었다고 부르짖었을까요?
그것은 당시에 이사야가 하나님의 품성에 대하여 오해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사야가 알고 있던 하나님의 품성은 부정한 행위를 한 사람에 대하여 그 사람의 행위대로 화를 내고 망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이사야의 악이었고 이사야의 죄이었습니다.(사6:7)

이사야의 행위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품성에 대한 문제였습니다.
하나님의 품성을 오해할 때 성경은 악이라고 하며 그것은 죄(죽음)입니다.(마25:24-26)

하나님의 품성을 오해하였으므로 하나님께서 죽이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품성을 오해하여 하나님을 두렵다고 느낄 때 그것은 이미 하나님과 마음으로 멀어진 것이고 하나님과 멀어질 때 하나님의 생명과 단절됨으로 죽음이 됩니다.(사59:2; 시34:21)

하나님의 품성을 오해하여 생명과 떨어진 상태 속에 있는 이사야에 대하여 이사야를 창조하신 분이시라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의 선택에 대해서 벌을 주셔서는 안 됩니다.

이사야의 오해를 풀어주셔야 합니다.
그가 오해하고 있는 여호와 하나님의 품성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셔야만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스랍을 통해서 “단에서 취한 바 핀 숯을 손에 가지고 와서 이사야의 입에 대”(사6:6-7)에 주시도록 하셨습니다.

“단에서 취한 핀 숯”은 번제단 위에 벌여놓은 나무위에서 속죄 제물이 된 양이 하늘에서 온 불에 의해 태워지고 남은 것이 숯입니다.
이것은 우리를 대신하여 돌아가시는 어린 양되시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상징합니다.
이사야의 오해로 인해 하나님을 떠나 죽은 이사야를 살리기 위해 이사야를 창조하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대신 돌아가시는 분임을 보여줄 때 드디어 하나님을 오해함으로 인한 이사야의 악과 하나님의 품성을 오해함으로 하나님을 떠나 죽었던(죄)를 제하게 되었고 사하게 된 것입니다.

죄의 용서는 행위의 용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품성을 보여주셔서 하나님의 품성을 깨닫는 것이고 회개란 잘못한 행위를 다 고치고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품성을 보게 되어 하나님을 오해하여 멀리 떠나 있는 자신을 살리기 위해 하나님 자신의 생명을 바치시는 하나님의 품성을 깨닫고 하나님께로 다시 돌아오게 된 것을 말합니다.

이제 이사야는 하나님의 품성을 보게 되었습니다.
자신을 창조하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자신의 선택에 대하여 대신 그 책임을 지시는 품성을 가지신 분임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제 이사야는 생명이신 하나님과의 연결로 인해 생명 속에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자신처럼 하나님을 오해하여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져서 악과 죄에 있는 자신의 백성들이 생각났습니다.

그들이 다시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품성을 다시 바로 알아야만 되었으므로 주께서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8절)라고 말씀하실 때에 자신의 경험처럼 자신이 가서 백성들의 오해를 풀어주어 하나님과 화목하고 하나님의 품성 속에 하나님과 생명으로 연결되기 원하시는 창조주 하나님의 일을 하고픈 생각 속에 자신이 자원하게 됩니다.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8절)


셋째 날(화)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하나님의 품성과 인간의 본질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 인간은 상대적 개념의 하나님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 하나님께 잘 보이기 위해 뭔가를 드리려고 시도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많은 제물과 아무리 좋은 제물을 가져온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받으시는 분이 아니시고 사람은 있는 존재가 아니므로 제물이 성립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알지 못한 채 행하는 모든 행위는 생명과는 상관이 없으므로 하나님을 그것들을 헛된 제물이라고 말씀하셨고 다시는 가져오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진정한 예배는 하나님의 품성을 깨닫게 됨으로 반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는 것이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게 되자 하나님의 사랑이 나를 감동시켜서 내가 하지 못하던 사랑의 일을 나로 하여금 하게 만듭니다.

“나의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 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 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케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 또 주린 자에게 네 식물을 나눠 주며 유리 하는 빈민을 네 집에 들이며 벗은 자를 보면 입히며 또 네 골육을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아니하는 것이 아니겠느냐”(사28:6-7)


넷째 날(수) 다 허망하도다

우상은 생명 없는 것이므로 다 허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다섯째 날(목) 이것이 여호와의 성전이라

성전에서 예배를 드리는 것으로 종교적 의무를 다했다고 생각하거나 행위로 생각한다면 아무리 거룩한 예배처럼 보인다 할지라도 하나님과의 만남이 있는 예배가 아니므로 그것은 헛된 예배가 됩니다.
교회에 올 때 혹은 예배에 참여할 때 사랑과 생명과 만물을 주시기 원하셔서 예배에 오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생각하지 못한다면 교회 참석이나 예배가 큰 의미가 없게 됩니다.
예배를 통해, 안식일을 통해 우리의 창조주께서 우리에게 사랑과 생명을 주시기 위해 오시는 사랑의 하나님 되심을 확신하고 그 사랑과 생명을 받아들이는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예비 일(금) 더 깊은 연구를 위해

“성전 마당에 있을 때에 본 계시에서 이사야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품성을 밝히 보았다. ”지존 무상하며 영원히 거하며 거룩하다 이름하는 자가“ 크신 위엄으로 그의 앞에 나타났으나 선지자는 주님의 자비로운 성품을 이해할 수 있었다”(선지자와 왕. 314)

개인블로그에 오시면 지금까지의 모든 교과해설을 보실 수 있습니다.
http://blog.naver.com/01hyung

댓글목록

자작나무님의 댓글

자작나무 작성일

"우리 눈에는 서로가 보이고 자신도 보이기 때문에
우리의 눈에 보이는 대로 존재하고 있는 것처럼 생각되는 것입니다."  라는 말씀에 깊이 공감합니다

그럼, 어떻게 일상생활속에서 '우리가 없는 존재'라는 인식안에서 살아갈 수 있을까요?

박용범님의 댓글

박용범 작성일

그것이 우리의 한계입니다. 보이는대로 믿지 않고 성경에서 말하는 인간의 본질대로 믿는 믿음이 필요합니다.(히11:1) 그런데 결국은 사람이 죽을 때에 우리는 없는 존재임을 확신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너는 청년의 때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전,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가 가깝기 전에 너의 창조자를 기억하라"(전12:1)의 말씀대로 사는 삶이 중요한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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