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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편 시편 속에 나타난 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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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조춘호 작성일11-08-05 08:56 조회3,901회 댓글4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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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편 시편 속에 나타난 예배

8월 13일 안식일
일몰: 오후 7시 28분

도입)
한 노부인이 안내원의 도움으로 유럽의 대형 성당 안을 둘러보고 있을 때 안내원이 조심스럽게 그 건물 디자인이 숨막힐 듯 아름답다는 말을 꺼냈다. 그는 뛰어난 조각상들과 훌륭한 그림들에 특별히 관심을 환기시켰다. 하지만 영적인 일에 관심이 많은 그 노부인은 건물의 외적인 장식물에 그다지 감동을 받지 못했다. 그 관광 코스가 끝나자 그녀는 안내원에게 “올해 여기서 구원받은 영혼은 몇 사람이나 되는가요?” 라고 물었다. 당황한 안내원은 “할머니 여기는 예배당이 아니라 성당입니다”라고 대답했다. 불행하게도 인상적이고 화려한 수많은 대형 교회 건물들이 이러하다.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는 진리로 충만한 예배보다는 사람들에게 인상적으로 보이기 위해 지어진 화려한 성당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어떤 교회든 건물의 화려함과 장식과 벽돌이 중요한 관심이 되어서는 안된다. 시설에 관련 없이 일차적인 관심사는 항상 교회 내부에서 드려지는 예배의 순수성이어야 한다. 교회는 신자들이 예배를 드리러 올 때마다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고 하나님의 이름이 영광을 받으며 하나님의 뜻이 추구되는 장소가 되어야 한다. 하나님은 그 건물의 웅장함이 아니라 자신이 영광받으심을 가장 중시하신다. 이런 의미에서 모든 교회는 성당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예배의 처소가 되어야 한다. 구약 시대에 하나님의 영광의 현현이 일어난 장소인 예루살렘의 이스라엘 성전은 매우 중요한 곳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편 기자가 성전에 대한 자신의 애정을 이야기할 때 그는 실제로 그 위대하심으로 성전을 가득 채우신 하나님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이 시편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에 대한 복을 선언한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그것은 진실로 중요한 것이다.

기억절 :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장막이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지요 내 영혼이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여 쇠약함이여 내 마음과 육체가 생존하시는 하나님께 부르짖나이다”(시 84:1~2).

결론: 시편은 탄원과 확신과 축복과 찬양과 감사의 생생한 언어로 하나님을 찾는 자들의 심령을 토로하고 있다.

첫째 날(일) 8월 7일
우리를 만드신 여호와께 경배하라

도입)
참된 경배는 오직 우리를 만드신 하나님만이 경배를 받으실 만한 분이심을 전제한다. 가장 극한 용례에서도 “경배”라는 단어는 그 대상의 엄청난 우월성을 내포한다. 예를 들어 어떤 운동선수나 영웅을 누가 경배한다면 그것은 그의 능력이 자신보다 훨씬 우월하기 때문일 것이다. 하나님과 인간들에 관하여서 이 문제를 말한다면 그 차이는 물론 무한한 것이다. 어떤 사람이 말했다. “기도에 관한 모든 실수는 하나님에 관한 실수이다.” 경배에 관해서도 마찬가지다. 경배에 관한 모든 실수는 하나님에 관한 실수들이다. “만일 사람들이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한다면 또 자신들이 하나님의 피조물임을 시인한다면 그들은 참된 경배를 얼마든지 할 수 있게 될 것이다. 하나님을 경배할 의무는 그분께서 창조주가 되시며 만물이 그분 때문에 존재하게 되었다는 사실에 근거를 둔다. 성경이 하나님께서 이방의 신들보다 나으며 존경과 예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한 분이심을 기록할 때마다 반드시 그분의 창조력의 증거를 들어 말한다. “만방의 모든 신은 헛것이요 여호와께서는 하늘을 지으셨음이로다”(시 96:5). “그런즉 너희가 나를 누구에게 비기며 나로 그와 동등이 되게 하겠느냐…너희는 눈을 높이 들어 누가 이 모든 것을 창조하였나 보라”(사 40:25, 26).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요 1:2~3).

시편 19편은 창조주 하나님을 찬양하는 시편 가운데 하나이다. 이 시편의 핵심 기별은 무엇이며, 세상이 자연적인 힘에 의하여 우연히 창조되었다고 주장하는 시대에 이 시편이 특별히 중요한 이유는 무엇인가?

교훈: 주님은 우리의 창조주와 구속주가 되시기 때문에 찬양과 경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하다.

부가적용)
'창조'라는 말에는 깊은 영적인 뜻이 있다. 창조라는 뜻은 없는데서 있게 할 뿐 아니라, 만든 것을 하나님께서 통치하고 다스리고 관리하고 유지하고 보수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마치 아이를 낳기만 하고 부모역할을 다 했다며 떠나는 부모가 부모라고 할 수 없듯이 하나님께서도 이 모든 것을 창조하실 뿐만 아니라 관리하고 통치하고 끝까지 지켜주신다는 것이다. 이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지 않겠는가? 여인이 어찌 젖먹는 아이를 버리겠는가? 그 여인은 버릴지라도 나는 너희를 버리지 않겠다고 맹세하신 분이 하나님이시다. 이 하나님을 신뢰하면 이 약속의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통치하고 다스릴 것이다. 그러나 여러분이 하나님을 믿지 않고 그분의 통치를 받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지 못하는 것이다. 창조주 하나님, 하나님의 창조를 믿는 신앙은 성경 신앙의 기초석이요 신앙의 핵심이다. 이 [창조]의 신앙을 가진 사람은 창조주의 말씀을 순종하는 삶의 자세와 목적을 가진다.

•영감의 교훈 •
▶ 창조주를 경배함
“그 권고에 깊이 유의하고 저희 우상들을 버리고 돌이켜 여호와를 경배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저희 창조주의 사랑과 자비와 부드러운 동정심을 배워 알았다”(선지자와 왕, 320).

둘째 날(월) 8월 8일
성소로부터 오는 심판

도입)
인간의 시간은 직선으로 표현되며 하나님의 시간은 원으로 표현된다. 직선적 시간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로 구분되지만 원으로서의 시간은 영원으로 귀일한다. 인간의 시간은 현재로 단절되지만 하나님의 시간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하나로 승화된다. 그러므로 단절된 시간에서 인간은 하나님의 시간의 흐름을 알 수가 없다. 하나님의 활동, 그것은 영원한 시간에서의 활동이므로 인간에게는 쉽게 드러나지 않는다. 성경은 하나님의 의로 심판하시는 날을 홀로 정해 놓으셨다고 말씀하고 있다. 그 속에 대표적인 심판의 개념이 성소에 나타나 있다. 개인을 심판하시고, 역사를 심판하시고, 세상을 심판하실 때는 하나님만 아시는 절대적인 시간 속에 정해져 있다. 하나님이 정해 놓으신 시간은 가장 합당한 시간이며, 가장 의미 있는 시간이며, 또한 가장 효과적인 시간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정의가 결정하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정의가 행사되는 시간 앞에서 아무도 이 정의의 시간을 알지 못하므로 항상 깨어 있으라고 하셨다(참조, 롬 13:11). 깨어 있는 자만이 하나님의 시간이 인간의 시간과 접촉하는 때를 알게 된다.

“주의 말씀이 내가 정한 기약이 이르면 내가 바르게 심판하리니”(시 75:2).

성경의 다른 부분과 마찬가지로 시편에서 말하고 있는 심판도 이중적이다. 즉 악인들은 형벌을 받고, 억압당한 가엾은 자들은 보호를 받는다(시 7:9~10, 9:7~12, 75:2, 94:1~3, 20~22, 98:9). 시 68:24에서 악인들은 성소로 행차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있는 것처럼 그려졌다. 지성소의 언약궤는 공의와 자비의 상징인 하나님의 보좌를 대표했다. 그래서 성소는 고통 받는 자들의 피난처가 되었다.

교훈: 공의의 하나님께서 세상을 심판하실 때, 지금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많은 것들이 해결될 것이다.

부가적용)
한 개인의 운명뿐 아니라 국가와 민족의 운명도 하나님의 절대주권 아래 있다. 하나님은 역사의 주관자이시며, 온 우주를 통치하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은 온 세상의 창조주이시며 그분의 주권이 미치지 않는 곳은 없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있는 자들은 아무도 없다. 하나님 집에서(tou' oi kou tou' qeou')는 구약에서는 '하나님의 심판의 성소'(렘25:29, 겔9:6, 말3:1-6)로 사용되었으며, 신약에서는 하나님의 가족, 그리스도인의 모임으로 이해되었다(행1:13, 행12:12, 행16:40, 롬16:23, 몬2:12, 골4:15).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나니 만일 우리에게 먼저 하면 하나님의 복음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들의 그 마지막이 어떠하며 베드로의 종말 사상을 반영한 것으로 교회에서 이미 심판이 시작되었다는 뜻으로 다음과 같은 의미를 들 수 있다. 첫째, 그리스도인들이 당할 고난이 결코 오래가지 않을 것이라는 암시. 둘째, 그리스도인의 공동체로 믿고 모이는 교회 안에서 조차 가짜(복음을 순종치 않는)교인이 있을 수 있다(요15:1-3, 딤전1:19-20, 딤후2:16-18, 히6:4-6). 셋째, 참된 그리스도인에게는 소망을 거짓 그리스도인에게는 회개의 촉구를 담고 있다. 넷째, 악을 행하는 자들, 복음을 복종치 않는 자들에게 반드시 하나님의 심판이 있다.

•영감의 교훈•
▶ 하나님의 정의를 기억함
“하늘 성소에 거하시는 그분은 공의대로 심판하신다. 그의 기쁨은 보좌를 둘러선 천사의 무리보다도 죄악 세상에서 온갖 유혹과 싸우고 있는 당신의 백성에게 있다”(실물교훈, 175).

셋째 날(화) 8월 9일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

도입)
어느 인터넷 까페에 나온 글이다. 글 제목이 무엇인가를 깨닫게 한다. 애완견을 무척 싫어하던 남편이 있었다. 어느 날 아내가 끔찍이 사랑하는 그 애완견을 없애버리기로 작정하였다. 그래서 차에 애완견을 태워 20분 정도 떨어진 곳까지 운전을 해 가서 내버렸다. 그런데 집에 돌아온 그 남자는 기절초풍을 했다. 개가 먼저 집에 와 있었던 것이다. 다음날 그 남자는 좀 더 멀리 갔다. 차로 40분가량 떨어진 곳에 개를 버렸다. 그런데 또 다시 그 개는 그 집을 찾아왔다. 그렇게 몇 번을 시도했는데 개는 귀신같이 집을 찾아 왔다. 화가 머리끝까지 난 그 남자가 단단히 각오를 하고 며칠 후 수백km 떨어진 곳까지 운전을 해 갔다. 어느 도시에 들어서 우회전, 좌회전, 다리 건너 또다시 우회전 좌회전 쭉~직진하다 유턴 그리고 골목길로 접어들어 이리 저리 다니며 개의 방향 감각을 잃게 했다. 드디어 완벽한 장소라고 생각한 그 곳에 버리고 집으로 돌아섰다. 그리고는 한참 후 휴대폰으로 아내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 애완견 집에 있어?” “당연히 옆에 있죠. 근데 왜 묻는 거죠?” “그 개 좀 바꿔줘 봐요! 할 말이 있어요!” “네? 무슨 말?” “응, 내가 길을 잃어버려서 집으로 가는 길 좀 물어보려고”.......글 제목이 “개만도 못한 인간”이었다. 세상에는 개만도 못한 짓을 하는 인간이 많다고들 말한다. 애완견을 기르는 사람들이 무심코 하는 말 “ 이 개가요 어지간한 사람 보다 낫습니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 말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이다. 하나님이 창조한 최고의 작품인 인간, 하나님의 형상을 받은 인간이 어찌 개만도 못 하겠는가? 그러나 인간이 구원을 주시려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그분을 깨닫지 못하고 거절한다면 멸망하는 짐승과 다를 것이 무엇이겠는가?

“존귀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시 49:20).

교훈: 하나님은 우리가 이 세계에서 누리는 물질의 풍요를 신뢰하지 말고 대신 하나님께 회개하며 돌아오기를 바라신다.

부가적용)
사람은, 지존자 곧 하나님의 존귀한 아들들이다. 무덤이 없는 하나님나라의 영존하시는 지존자의 아들들이요, 마침내 죽음이 없는 신들처럼 되도록 ‘자녀’를 삼아 주시고 ‘영원한 생명’의 후사 또는 장자로 내정하고 약속하셨는데 범인같이 죽어버린다. 무지무각하여 죽음의 길, 멸망의 길을 무감각하게 받아들이고 썩는 길, 무덤을 향해서 재고조차 없이 내닫는 멸망하는 짐승처럼 되었다는 것이다. 놀랍도록 존귀한 존재임을 칠흑과도 같은 흑암이 드리워서 깨닫지 못한다는 것이다. 장구한 존재인데 그렇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빛이 꺼져버린, 흑암 중에서 왕래하다가 믿는다하여도, 무덤으로 내려가는 멸망하는 짐승같이 되어버렸다는 내용이 아삽의 시에도 동일하게 표현되고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우리 주님께서 또다시 결정적으로 똑같이 동일하게 말씀하셨다. 아니, 그 흑암을 송두리째 흔들어 바로잡아 주시려고 신들의 모임 가운데 오셨었다. ‘너희는 신들이야!!~’ “가라사대 너희 율법에 기록한바 내가 너희를 신(神)이라 하였노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성경은 폐하지 못하나니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신이라 하셨거든, 하물며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사 세상에 보내신 자가 나는 하나님 아들이라 하는 것으로 너희가 어찌 참람하다 하느냐(요10:34~36)” 하신 것이다. 이사야를 통해서 미리 말씀하신대로, 사람들의 생명의 빛이 되어 오신 주님!!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하던 자들(사9:2)”에게, 곧 아담이후, 모든 인류가 무덤을 안고 출생을 해서 무덤으로 가고 있는 ‘죽음의 행렬’을 멈춰주시려고 생명의 큰 빛이 되어 이 땅으로 찾아오셨던 것이다. 그리고는, 나인성 과부의 죽어버린 독자 아들의 슬픈 상여의 행렬을 실제로 멈춰 세우는 것을 보여주셨다. 병든 나사로를 고쳐주시기 원했으나, 죽어서 냄새가 날 때까지 기다리셨다가 나흘 만에 살려 주셨다. 무덤 앞에서 ‘벌써 냄새가 난다’고 절망하던 마르다, 주님! ‘부활의 날에나 다시 살아나지 않겠나요?’하는 막연한 유형의 신앙들을 향해서 통분히 여기시던 우리 주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요8:12)”하셨다.

•영감의 교훈 •
▶ 무엇을 예배하는가?
“하나님을 믿는 용사들은 세상의 어떠한 재물보다도 더욱 가치 있는 유업을 받을 후사들이다. 그들이 받을 유업은 영혼의 갈망을 만족시킬 것이다. 세상이 비록 저희를 알지 못하고 인정하지 않을지라도, 하늘 녹명책에는 그들이 하늘 시민으로 등록되었으며, 높은 존귀와 영원한 큰 영광은 저희의 것이 될 것이다”(복음교역자, 18).

넷째 날(수) 8월 10일
예배와 성소

도입)
성막, 즉 성소는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하나님께서 친히 거하시기 위해 모세에게 보여주신 식양대로 건축되었던 하나님의 집이다. 성막에는 하나님의 충만한 임재가 있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이 성막 가장 깊은 곳 지성소의 속죄소 위에 나타나 있었다. 우리는 성막을 통해 죄인이 하나님의 충만한 임재 앞에 나아가도록 하나님이 마련하신 길을 배우게 된다. 또한 성막은 그리스도의 완벽한 모형이라고 할 수 있다. 성막에는 그리스도의 온전한 인성과 영광스런 신성의 완전한 결합, 그리스도의 영원한 구속사역의 능력, 생명의 빛과 양식이 되시는 그리스도와의 충만한 연합과 교제가 풍성하게 모형과 그림으로 나타나 있다. 우리는 성막에 대한 연구를 통해 우리의 주인과 구원자가 되시는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영광을 보며 그분을 찬미하는 마음으로 가득 차게 된다. 그리스도는 유대인의 모든 성소 제도의 기초이다. 아벨의 죽음은 가인이 하나님의 계획을 거부한 결과이다. 하나님의 계획은 그리스도를 가리켜 보이는 희생 제물로 표상된 그분의 피로 구원을 받고 순종의 학교에서 순종을 배우는 것이다. 가인은 세상을 위하여 흘리실 그리스도의 피를 상징하는 피흘림을 거부하였다. 이 모든 의식은 하나님이 예비하신 것이요, 그리스도가 그 모든 제도의 기초가 되셨다. 이것은 죄 많은 인간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여 그리스도를 깊이 생각케 하는 몽학 선생의 일의 시작이다. 성소와 관계있는 예배를 드린 사람들은 모두 다 인류를 위하여 중재에 나서신 그리스도에 관하여 계속 교육을 받고 있었다. 이 예배는 모든 이들의 마음에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사랑을 창조하기 위하여 고안된 것이었다. 희생 제물은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의 실물교훈이 되어야 했다.

“나의 기도가 주의 앞에 분향함과 같이 되며 나의 손드는 것이 저녁 제사같이 되게 하소서”(시 141:2).

위 말씀에서 어떤 비유가 사용되었는가? 이 말씀이 가리키려는 것은 무엇인가?
구약의 모든 성소 봉사의 중심에는 희생의 개념이 자리를 잡고 있다. 물론 원수는 그 의미를 왜곡시켜서 진노한 신을 달래기 위해 자기의 자녀를 희생시키는 자들까지 생겼지만, 구약의 희생제도는 모든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예수님의 죽음을 가리키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희생제도는 우리의 노력이 우리를 구원하기에 무력함을 보여 주어야 했다. 그것은 죄의 대가로 무죄한 자의 생명이 바쳐졌음을 보여 주어야 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한 계획을 세우셨으며 그 계획에 의하여 죄인들이 용서받고 정결케 되며 그분의 은혜로 용납되었음을 보여 주어야 했다.

교훈: 성소 봉사는 예배의 중심이신 예수님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우리는 이제 십자가의 예수님과 하늘 성소에 일하시는 그분의 사역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부가적용)
그리스도의 중보사역과 우리의 구원의 관계는 성소에 잘 나타나 있다. 우리가 갈보리의 십자가에 가까이 나아갈 때에 그곳에서 비할 데 없는 사랑이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우리가 믿음을 가지고 희생의 의미를 깨닫게 될 때에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법을 어기고 범죄하여 정죄를 받은 죄인임을 알게 된다. 바로 이것이 회개이다. 우리가 겸손한 마음으로 나아갈 때에 하나님께로부터 사유하심을 얻게 되는데, 그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속적으로 번제단에서 세상의 죄를 위하여 희생제물을 바쳐지는 자로 상징되었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사람의 손으로 만들지 않고 하나님께서 만드신 참 하늘 성전에서 봉사하시는 분이시다.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었던 지상 성소는 지금에 와서 아무런 의미가 있지 못하다. 날마다 드리는 것과 해마다 드리는 상징적인 속죄는 이 이상 더 드릴 필요가 없다. 참 유월절 양이신 예수님의 희생이 그 상징의 원형이셨다. 그러나 인류들이 끊임없이 범죄를 계속하고 있으므로 우리의 중보자이신 대제사장 예수님의 보혈을 항상 다시 적용시키는 일이 필요하다. 이 지상 성막에서 피우는 모든 분향, 즉 우리들의 기도는 그리스도의 깨끗하게 하시는 핏방울에 젖어야 한다. 예수님은 하늘 아버지 앞에서 당신 자신의 공로를 담은 향로를 들고 계시는데, 그 가운데는 세상에 썩어질 것으로 더러워진 것은 하나도 없다. 주님께서는 이 향로 안에 성도의 기도와 찬송과 자복을 모아 담으시며 이 가운데, 당신 자신의 흠 없는 의를 섞으신다.

•영감의 교훈 •
▶ 성소에 계신 그리스도
“하늘에 있는 성소는 인류를 위한 그리스도의 사업의 바로 중심이 된다. 이것은 세상에 사는 모든 영혼들과 관계를 가진 것이다. 그것은 구속의 계획을 밝히 드러내 주고, 때의 맨 나중까지 보여 주며, 의와 죄 사이에 있는 투쟁에서 의의 편이 최후의 승리를 거두게 될 것을 나타내 준다”(복음전도, 222).

다섯째 날(목) 8월 11일
우리가 잊지 않도록!

도입)
수치스러운 역사를 잊어버리면 또 다시 수치를 반복하게 된다."는 말이 있다. 이 말은 우리가 과거의 역사를 잘 알면 과거의 실패를 현재와 미래에 되풀이하지 않게 된다는 말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들의 역사를 기억함으로 순종하기를 원하셨다. 구약성경은 하나님과 그분이 선택하신 백성 사이에 이루어지는 대화를 기록한 것이며, 하나님의 선택과 구원, 그리고 그 백성과 맺은 관계를 핵심 주제로 다룬다. 이스라엘의 역사(구약성경)는 하나님께서 이 백성을 영적으로 교육하신 역사였다. 구약성경은 시대를 초월하여 신의 문제와 인간의 문제 그리고 그 관계를 진지하게 다루고 있다. 그래서 구약성경 안에서 하나님을 만났던 믿음의 조상들의 체험을 오늘의 나의 체험과 교훈으로 받아들일 때 언제나 구약성경은 우리에게 새로운 책으로 다가온다. 그래서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전해주는 가르침에 반드시 귀를 기울여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시 78편은 출애굽에서부터 다윗 왕 시대까지의 역사를 요약해 놓고 있는 말씀이다. 시편 기자는 이스라엘의 범죄와 실패가 망각에서 비롯되었다고 말하면서 자신들이 경험했던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의 정하신 율법들을 다음 세대에 반드시 전해주라고 요청하고 있다.[

“이는 그들로 후대 곧 태어날 자손에게 이를 알게 하고 그들은 일어나 그들의 자손에게 일러서 그들로 그들의 소망을 하나님께 두며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을 잊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계명을 지켜서”(시 78:6~7).

시 78:1~8을 읽어 보라. 본문에 따르면 하나님께서 백성들이 역사를 기억하기 바라시는 이유는 무엇인가?(신 6:6~9, 고전 10:11 참고) 이스라엘의 역사적 상황과 큰 차이가 있지만 동일한 원칙을 우리의 상황과 경험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까?
역사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드러내는 방법 가운데 하나이다. 그러나 모든 세대는 그러한 역사를 기초로 하여서 하나님을 새롭게 경험할 필요가 있다. 그런 이유 때문에 과거에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간직하기 위해서는 예배에 있어서 음악뿐 아니라 말씀의 선포가 구세대와 신세대 모두에게 중요한 것이다. 시편 78편은 같은 역사가 되풀이 되지 말아야 함을 경고하는 동시에 다루기 힘든 백성들을 은혜롭게 대하셨던 하나님을 기억하게 한다. 위엄 있는 약속 가운데는 절실함이 스며 있다. “그의 능력과 그가 행하신 기이한 사적을 후대에 전하리로다”(시 78:4). 시 105:2도 “그를 찬양하며 그의 모든 기이한 일들을 말할지어다”라고 초청하고 있다.
가장 긴 시편 119편이 자주 “주의 율례들을 내게 가르치소서”라고 언급한 이유는 경건한 생활과 의를 교육하기 위한 기초로서 성경의 중요성을 말하려는 것이다. 바울도 동일한 사상으로 젊은 목사 디모데를 훈련시켰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딤후 3:16).
바울은 디모데에게 “말씀을 전파하라”(딤후 4:2)는 사명을 맡겼다. 예배에서 말씀 선포를 소홀히 하면 마음을 감동시키고, 삶을 변화시키며, 신자들의 예배 경험을 풍성하게 만들어 줄 복음의 능력을 약화시키게 된다.

교훈: 말씀 선포는 예배의 아주 중요한 요소로서 하나님께서 행하신 역사를 기억하게 하며 우리에게 의로운 삶을 교육시키는 기초가 된다.

부가적용)
존 드레인은 “성서는 진공 상태에서 기록된 게 아니다. 성서는 저자들이 살아있던 시대의 사회·문화적 상황을 고스란히 반영한다. 신에 대한 믿음과 사회·문화적 상호작용, 이 두 가지가 없다면 성서는 한낱 이질적인 기록 모음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라고 했다. 성경은 왜 역사책인가?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를 설명하기 위해 왜 역사를 동원하는가? 역사는 개인뿐 아니라, 공동체의 이야기다. 한 세대뿐 아니라, 두 세대, 세 세대, .....열 세대...로 이어진다. 한 세대에 이뤄지지 못한 것은 둘 셋, 넷....열 세대 다음에 이뤄지곤 한다. 한 지역의 문화와 환경의 지배를 받는 특정 저자에 의해 기록되어 있다. 하나님은 공동체 안에서 일하시며, 시간 속에서 일하시고, 문화와 환경 속에서 일하신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교회라는 공동체의 지나온 시간과 사건들을 돌아보는 것은 하나님의 역사와 섭리의 숨결이 묻어있는 성경 속 역사를 돌아보는 것과 비교될 수 있는 것이다.

•영감의 교훈 •
▶ 과거의 교훈을 기억하라
“그들은 언제 그리고 어떻게 시험을 받았고, 또한 어느 지점에서 실패했으며, 어디에서 그들의 불신과 자부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업을 위태롭게 했던가를 마음에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의 자비와 붙들어 도우시는 섭리 그리고 영원히 기억할 구원을 한 계단 한 계단 차례로 회상해야 한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와 같이 과거를 회상할 때 그들은 주님의 처사가 언제나 반복되고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저희에게 주신 경고를 이해하게 되고 이전의 실수들을 반복하지 않고자 주의하게 될 것이다”(증언보감 3권, 190).

예비일(금) 8월 12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독서 과제: 부조와 선지자, 44~51 “창조”, 교육, 159~168 “시와 노래”, 교회증언 8권, 107~115 “망각.”

“시편은 성경의 고유한 목적을 성취하고 있다.… 성서 속에서 시편은 이스라엘 역사의 심장고동과도 같다. 이 기도의 책에서 언약의 백성은 하늘로 가는 계단을 발견한다. 시편이 취급하는 영역은 인간의 가장 깊은 좌절과 고통에서부터 하나님과 교제하는 최상의 기쁨에까지 이른다. 애가와 절망적인 울부짖음이 감사와 찬양의 노래와 교차한다.… 이와 같이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교통이 있기 때문에 모든 시대에 하나님을 구하는 자들은 히브리 성경 가운데 시편을 보석처럼 소중히 여기게 된다. 그뿐 아니라 시편은 하나님의 심중을 드러낸다.… 시편은 하나님께서 모세의 책에 기록된 자신의 인격과 행위에 관한 직접적인 계시에 대하여 그의 백성들이 어떻게 반응하기를 바라시는지 보여 주는 영감의 예증이다.” - 한스 K. 라론델(Hans K. LaRondelle), 시편에 나타난 구속, (Berrien Springs, MI: First Impressions, 1983), 3, 4.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➊우리는 마지막 때에 하나님께서 궁극적이고 공의로운 심판을 베푸실 것임을 믿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지금 우리가 공의와 심판을 위해 일할 필요가 없다는 의미일까요? 현재 공의를 구하는 것과 미래에 그것이 이루어질 것을 기다림 사이에서 우리는 어떻게 균형을 유지해야 합니까?

➋예배와 형식에 관하여 수요일 교과의 문제를 더 심도 있게 토의해 보십시오. 어떻게 음악, 설교, 순서와 같은 것들이 하나님을 가리키는 수단이 아닌 목적이 될 수 있습니까? 우리는 상징을 그 이상으로 취급하는 실수를 범하기 쉽습니다. 우리의 예배에서 이런 위험성을 막을 방법은 무엇이겠습니까?


댓글목록

이예님의 댓글

이예 작성일

매순간 연약한 우리를 회복시키시는 주님의 크신은혜에 감사드림니다 .. 매일 재 창조함의 경험으로 주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생활 인이 되도록 이끌어 주신 말씀 감사합니다,,,,,

임윤자님의 댓글

임윤자 작성일

제가 원했던 부분을 보충하고 공부하고 갑니다.
성소 문제는 중요하면서도 공부할때마다  어려운데
예수님께 촛점을 맞춘 해설을 읽으며 예수님의 사랑에 눈물이 납니다.

노병욱님의 댓글

노병욱 작성일

매번 좋은 예화와 풍부한 내용에 감동을 받고 감사드림니다
많은 도움을 받고 있으며 계속해서 많은 분들이 은혜를 함께 나누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조춘호님의 댓글

조춘호 작성일

세분의 격려에 감사드립니다. 더 좋은 글이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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