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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과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자로다 (하나님 품성 중심의 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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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박용범 작성일11-07-26 18:14 조회3,10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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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5 과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자로다!

기억절: “악을 선하다 하며 선을 악하다 하며 흑암으로 광명을 삼으며 광명으로 흑암을 삼으며 쓴 것으로 단것을 삼으며 단것으로 쓴 것을 삼는 그들은 화 있을진저 스스로 지혜롭다 하며 스스로 명철하다하는 그들은 화 있을진저”(사5:20-21)


“진정한 예배란 창조와 구속의 역사 가운데 드러난 하나님의 위대한 일에 대하여 그리스도인들이 나타내는 진심 어린 반응이다(첫째 천사의 기별). 참 예배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우리의 반응에서 나오며, 삶의 모든 영역에 영향을 미치게 마련이다. 진정한 예배는 안식일에 드리는 예배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교회뿐 아니라 우리의 삶 전역에 스며있어야 한다.”(교과 64쪽)

첫째 날(일) 봉헌

봉헌이란 단어의 국어사전적 정의는 “물건을 받들어 바침”입니다.
일요일 소지를 국어사전적 정의로 이해하면 성경의 전체 사상과 조화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드리는 것을 받으시는 분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에게 주시는 분이십니다.(행17:25)
하나님께서 우리가 드리는 것을 받으시는 분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에게 주셔야만 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창조주이시기 때문이고(행17:24) 또한 우리는 태어나기 전에 이미 아담 안에서 죽은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고전15:22 전반절)
하나님의 생명을 담보로 유예된 생명을 살고 있을 뿐 인간의 본질은 하나님 보시기에 죽은 것이고 죽은 것에 대한 하나님의 해석은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지니라”(창3:19)입니다.
이 말은 창조되기 전의 상태 즉 무(無)의 상태로 돌아감을 의미합니다.
결국 아담이 하나님을 거절하고 떠난 그 순간 아담과 아담의 생명으로 태어날 모든 인류는 그때 함께 죽었고 함께 없어져서 무(無)가 되어버렸습니다.
없는 사람이 봉헌(물건을 받들어 바침)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일요일 소지의 봉헌이란 하나님께서 하시는 행위의 측면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레위기 9장은 하나님께서 어떤 일을 우리를 위해, 그리고 하나님 자신을 위해 행하시는지를 보여주고 있고,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사랑의 행위에 대한 반응이 예배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생각할 때에 레위기 9장에서 예배의 요소를 발견 할 수 있습니다.
레위기 9장에는 속죄제와 번제와 화목제와 소제가 나옵니다.
이 모든 제사의 핵심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없어진(죽은) 우리를 다시 있게(구원, 생명주심) 하기 위해서 어떻게 행하실 것인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아담에게 주신 자유의지의 선택에 대해 자유의지를 주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어떻게 자신이 책임지셔서 해결하실 것인지를 보여주는 의식들입니다.
그것은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아담과 아담의 생명으로 태어날 모든 인류를 구원하기 위하여 하나님 자신의 생명을 속죄제의 제물처럼, 번제의 제물처럼, 화목제의 제물처럼, 소제의 곡물들처럼 피가 흘려지고 가루가 되어서 아담이 선택한 무(無)로 가는 경험을 대신하시는 일에 대한 예표들입니다.

잃어버린 아들을 찾기 위해 아담을 창조하신 여호와 하나님께서(사9:6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표현함- 눅3:38) 하나님의 아들의 위치가 되셨고, 여호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의 위치가 되시자 또 다른 여호와 하나님은 아버지의 위치가 되셨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이란 칭호가 우열적 칭호가 아니라 우리의 구원을 위한 자원하는 선택의 결과에 의한 칭호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로서 아담의 위치를 대신한 예수님(두 번째 아담)이 레위기 9장의 속제제물, 번제제물, 화목제물, 소제제물로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심으로 아담(첫째 아담)의 선택에 대한 모든 책임이 완료되었습니다.(롬5:14; 19)
예수님께서 아담의 죄를 대신 진 자로서 십자가에 섰을 때 그 제물을 받으시는 분은 여호와 하나님이셨습니다.
아버지 하나님께서 제물 되신 예수님을 통과해야 언약은 체결되고 죄가 용서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로 인해 하나님께서 받으신바 되었습니다.

십자가는 하나님들의 이야기 입니다.
죄가 되신 하나님과 죄를 처리하시기 위해 예수님의 몸을 통과하신(창15:17; 슥13:7) 하나님과 함께 모든 고통을 나누신 하나님들의 이야기 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고 운명하시기까지의 정오 12시부터 오후 3시까지의 세 시간은 어두움(마27:45)이 가득하였고 사람들의 눈에는 가리워졌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대신하여 자신의 생명으로 책임지시는 사랑의 행위를 하나님께서 받으셨습니다.
받으셨음에 대한 표시로 불이 내려와 제물을 살랐습니다.
그것이 “여호와의 영광”(레9:23)이었습니다.
아담과 우리의 선택에 대한 결과를 아담을 창조하시고 우리를 창조하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대신 책임져주셔서 없어짐의 선택을 하신 것에서 하나님의 영광 즉 품성이 온 백성들에게 드러났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실 일에 대하여 하나님의 품성을 확신함으로 창조하신 하나님이시라면 우리의 선택에 대한 모든 책임을 창조주 하나님께서 자신의 생명으로 책임지심을 확신하는 믿음 속에서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방법대로 할 것을 선택할 때 그것이 예배였습니다.


둘째 날(월) 여호와 앞에서 불이 나옴


아론의 아들 나답과 아비후가 다른 불을 담아 여호와 앞에 분향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이 일로 인해 나답과 아비후가 불에 살라졌습니다.
이것에 대해서 부조와 선지자에서는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큰 빛을 받고, 이스라엘의 통치자들처럼, 산에 올라가 하나님과 교통하고, 그분의 영광의 빛 가운데 거할 특권을 받았었다는 이유로, 그 후에 죄를 지어도 벌을 받지 않을 수 있으며 그처럼 높임을 받은 까닭에 하나님께서 그들의 죄악을 엄격히 형벌하시지 않으시리라고 스스로 믿지 않도록 해야 한다. 이와 같은 생각은 치명적인 기만이다”(부조와 선지자 359쪽)
성경의 기록이나 화잇의 주석을 보면 하나님께서 다른 불을 담아 분향한 나답과 아비후의 행위에 대해서 불로 형벌하신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이 문제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벌을 주실 수 있을까요?
요한일서 1장 5절에 의하면 “하나님은 빛이시니라. 그에게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시니라”고 말씀하셨고 어두움의 의미를 같은 책 2장 9절과 11절에서 “빛 가운데 있다 하며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지금까지 어두운 가운데 있는자요” “그의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두운 가운데 있고”라고 해석하여서 하나님은 조금도 미워할 수 없는 분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품성을 설명하고 있는 고린도전서 13장 5절의 말씀에서 “성내지 아니하며”처럼 하나님은 사람들의 품성처럼 성을 내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미워하고 성내는 것보다 심화된 것이 벌을 주는 것이고 죽이는 것이기 때문에 조금도 미워하지 않으시는 분께서 벌을 주신다고 상상할 수 없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자유의지를 주셨는데 사람에게 주신 자유의지대로 어떤 선택을 했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그 선택의 결과에 대해 자유의지를 주신 하나님 자신이 책임을 지셔야만 합니다.
그래서 아담에게 주신 자유의지로 하나님을 거절하는 선택을 했을 때도 하나님은 그에게 성은 내거나 벌을 주시지 않으시고 그의 선택의 결과가 무엇임을 선언하신 것이고(창3:19) 아담의 선택의 결과에 대한 창조주의 책임지심으로 구속의 경륜을 밝히신 것입니다.(창3:15)

아담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여자의 후손으로 오셔서 아담의 선택의 결과인 무(無)로 돌아가는 상태를 친히 십자가에서 당하시고 처리 하셔서 아담과 아담으로 태어날 모든 인류를 유예의 상태가 되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것 자체가 죽음이고 없어진 것인데 굳이 형벌을 주는 것이 필요할까요?
사랑이신 하나님이시고 창조하신 하나님이시라면 사람의 선택에 대한 모든 결과를 하나님께서 책임지셔야 하고 생명을 멀리하여 죽은 사람을 위해서 사랑을 더 많이 주셔서 감동케 하셔서 하나님께로 다시 돌아오게 하셔서 생명 속에 있게 하셔야만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진노는 사람의 진노와 달라야 합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하나님을 거절하여 죽음 속에 있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주셔서 다시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생명 속에 있게 하고픈 열망과 그 사랑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을 볼 때의 가슴 답답함이 하나님의 진노입니다.(호11:8; 롬12:19-20)

우리를 구원하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열망과 구원을 받지 못해 죽어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답답해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진노라면 하나님의 진노는 매일 매순간 모든 사람들에게 하셔야 합니다.
그래서 다음의 성경절들은 매일 생명주고 싶어 하시는 하나님의 심정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시90:9; 시7:11; 렘30:24)

화잇의 글에도 위의 부조와 선지자의 말씀처럼 “하나님께서 그들의 죄악을 엄격히 형벌하시지 않으시리라고 스스로 믿지 않도록 해야 한다.”라고 기록하고 있는 반면에 다르게도 표현하고 있음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죄인을 벌하려고 기다리고 계시는 분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죄인이 자기 스스로 벌을 자초하는 것이다. 죄인 자신의 행동들이 분명한 결과를 가져오는 연속적인 사건들을 돌발시킨다.”(1SM 235)
“범죄의 모든 행위는 죄인 자신에게 반응을 보이며 품성의 변화를 일으키고 그가 더욱 쉽게 또다시 죄를 짓게 만든다. 죄를 짓기로 선택함으로 인간은 저들 스스로가 하나님에게서 분리되며 축복의 통로에서 저들 자신을 차단시키며, 그 분명한 결과는 패망과 사망이다.”(1SM. 235)
"유대인들은 그들이 찰 착고를 스스로 만들었고, 그들이 마실 복수의 잔을 스스로 채웠다. 그들이 국가적으로 당한 완전한 멸망이나, 그들의 방황하는 처지에서 받은 저주는 그들 자신의 손으로 뿌린 것을 거두는데 불과했다. 선지자는 “이스라엘아 네가 네 자신들을 멸망케 하였나니”(호13:9 ; 14:1 한글 KJV)고 말하였다. 그들이 당한 고난을 하나님께서 직접 내리신 선고에 의한 징벌로 흔히들 이야기 한다. 대 기만자는 이와 같이 하여 자기가 행한 일을 숨기려고 애쓴다.”(쟁투 35-36)
“악과 죄와 죽음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지 않으셨다. 그것들은 사단에게서 나온 불순종의 결과였다.”(5증언 503)

그렇다면 위의 부조와 선지자의 내용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위의 부조와 선지자의 내용은 하나님의 책임지시는 표현법입니다.

사람들이 불순종의 결과를 하나님께서 엄격히 형벌하시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선택의 결과로 고통과 죽음이 오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사람을 만드신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형벌하심으로 그런 일이 온 것처럼 표현하셔서 그들의 선택으로 인한 사람들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만드신 하나님 자신이 그들을 형벌해서 멸망하게 되었다고 말씀하고 싶으신 하나님의 품성대로의 표현법입니다.

이런 것은 성경에도 무수하게 많이 나오는 표현방식입니다. (삼하24:1 과 대상 21:1을 비교해 보십시오.)

나답과 아비후의 선택에 대해서 그들이 더 이상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지도 않을 것을 보셨기 때문에 강제하실 수 없는 하나님의 품성대로 그들의 선택을 인정하시게 될 때 그들을 보호하셨던 하나님의 손길이 거두어질 때 사단이 그들에게 불을 내려 사르게 할 수도 있고 이런 모습을 볼 때에 하나님의 품성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게 되어 하나님을 두려움 속에서 경배하도록 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행할 수 있습니다.
“바다와 땅에서 활동하여 재난과 고난을 가져오고 그의 먹이로 확실히 잡아 두기 위하여 수많은 사람들을 쓸어버리는 것은 사단의 능력이다.”(14MR, 3, 1883)
"모욕 받고 거절당하고 학대 받은 하나님의 영은 이미 지상에서 거두어 지고 있다. 하나님의 영이 거두어져 버리면 즉시 사단의 잔인한 사업이 땅과 바다에서 이루어질 것이다.“(MS. 134. 1898)
"하나님께서는 범제에 대한 판결을 집행하시는 분으로 죄인 앞에 서지 않으신다.”(쟁투 36)
“나는 하나님의 심판이 직접 주님께로부터 그들에게로 임하지 않고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오는 것을 보았다. 그들은 그들 스스로를 하나님의 보호가 미칠 수 없는 곳에 둔다. 그분은 사랑으로 경고하고 교정하고 책망하고 또한 유일의 안전한 길을 가르쳐 주신다. 그런데 그 분의 특별한 보호의 대상이 되어 있는 자들이 반복된 경고를 받고서도 하나님의 영의 지시를 떠나 그들 스스로의 길을 따른다면, 그들이 그들 자신의 길을 택한다면 그분은 그들에게 대한 사단의 결정적인 공격을 방어해 주도록 당신의 천사들을 명하지 않으신다.”(14. MR. 3. 1883)


셋째 날(화)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한 사람이로다!

“언제나 그랫 듯이 초점은 자기 백성들을 위한 하나님의 행위에 있다. 원수를 이김, 안전, 구원, 그 땅의 열매 등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어질 모든 것은 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해 행하신 일로 말미암았다. 이는 절대 잊어서는 안 될 중대한 진리이다. 예배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수많은 유익 가운데 하나는 예배가 ”여수룬의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을 끊임없이 상기시켜 주는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입술로 하든지 마음과 생각으로 하든지 찬양과 경배와 송축은 우리 자아나 우리의 문제가 아닌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는데 도움을 준다”(교과 70쪽 밑에서 7째줄부터 있는 말씀)


넷째 날(수) 굴복의 자세

예배를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품성을 깨닫게 되고 그 하나님의 품성에 따라 우리의 삶도 변화되어 하나님의 뜻과 품성을 닮아가게 됩니다.
굴복은 스스로 할 수 없습니다.
나의 자아에 대한 사랑 대신 하나님의 사랑을 선택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볼 때입니다.
하나님의 사랑 속에 거하고 싶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 속에서 우리가 하지 못할 일일 행하십니다.(요14:10; 빌4:13)
진실한 예배는 우리의 필요를 채우시는 나의 창조주 하나님을 만날 때 그 하나님의 사랑의 행위에 대한 감격으로 인해 나의 자아의 요구를 선택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선택하게 될 때 이루어집니다.


다섯째 날(목) 예배와 순종

순종도 하나님의 품성을 알게 될 때의 반응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사랑을 알게 될 때 우리도 하나님의 뜻을 받들고 싶어지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 싶어집니다.
하나님의 품성을 보게 되고 확신하게 될 때 드디어 순종하고 싶은 마음이 들게 되고 그런 순종의 모습이 하나님께 기쁨이 됩니다.
이것이 참된 예배로 반응하게 됩니다.


예비일 (금)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계명을 떠나 속된 것과 거룩한 것을 구별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저주를 선언하신다.”(부조와 선지자 360)는 말씀 속에서 하나님다운 사랑의 표현법임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떠난 사람은 생명이 없는 죽음의 상태입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사람의 자유의지의 선택으로 인한 것입니다. 그 선택의 결과로 인해 죽음 속에 있게 된 것을 하나님은 그를 창조하신 사랑의 하나님으로서 그의 선택의 결과에 대해 책임지시는 표현법을 사용하셔서 마치 하나님께서 저주하셔서 죽음 속에 있게 된 것처럼 말씀하신 것입니다.


개인 블로그에도 있습니다.
http://blog.naver.com/01hyu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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