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과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자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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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조춘호 작성일11-07-22 08:17 조회4,300회 댓글1건첨부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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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과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자로다!
7월 30일 안식일
일몰: 오후 7시 43분
도입)
재벌 100명과 박사학위를 가진 지식인 100명을 대상으로 삶의 만족도에 대한 설문 조사를 했다. 그런데 “당신은 행복하십니까?”라는 질문에 87%가 “아니오. 나는 행복하지 않습니다.”라고 부정적인 대답을 했다. 또한 “지금 현재 삶에 만족은 하십니까?”라는 질문에도 “아니오. 만족도 없습니다.”라고 대답을 했다. 재벌들이 행복하지 못하고 지식인들이 만족하지 못한다면 과연 이 세상에서 행복하게 사는 사람은 누구겠는가? 세계사 가운데 가장 행복한 사람으로 불리는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은 바로 괴테(Johann Wolfgang von Goethe ; 1749∼1832)이다. 그런데 그는 세상을 떠나면서 이런 말을 남겼다. “세상 사람들이 나를 다 행운아라고 했습니다. 불행을 모르는 사람으로 알았습니다. 그러나 제 평생 저 자신이 ‘나는 행복하다’라고 생각한 적은 단 하루도 없었습니다.” 그는 좋은 교육을 받고 국가의 재상까지 지냈다. 작가로서도 명성을 떨쳤다. 82세에 쓴 『파우스트』는 세계적인 걸작이 되었다. 가장 존경받던 최고의 인물인 괴테, 당대에 ‘가장 행복한 사람’이라고 불리었던 괴테도, 자기 스스로는 ‘행복하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는 고백을 했다. 돈이 있는 사람도 행복하지 못하다. 명예가 있는 사람도 행복하지 못하다. 권력이 있는 사람도 행복하지 못하다. 그렇다면 그냥 행복을 포기해야 겠는가? 아니면 계속해서 행복을 추구해야 겠는가? 우리는 ‘행복’에 대해서 어떤 태도를 취해야 겠는가? 스위스의 철학자 칼 힐티(Karl Hilty ; 1833∼1909)는 『행복론』이라는 책에서 “인생 최대의 행복은 하나님 가까이에 있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77세로 세상을 떠나기까지 자기가 모은, 수많은 자료와 학설, 이론을 통해 그런 결론을 얻었다. 하나님만이 가장 완전한 행복자이시다. 인간은 불완전하고 불안하고 연약하고 부족한 존재이다. 인간은 흙으로 빚어진 연약한 존재인데 어떻게 행복할 수 있겠는가? 인간 스스로는 행복할 수 없다. 행복자이신 하나님 앞에 가까이 가는 사람만이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다. 신앙 안에서의 행복이야말로 참 행복이다. 세상적인 행복은 온전한 행복도 아니거니와 오래 가지도 않는다. 갤럽 조사에 의하면 교회 생활을 열심히 하는 사람들은 교회에 나오지 않는 사람보다 더 행복한 삶을 산다고 한다. 몸도 더 건강하다. 가정생활도 안정된다. 경제적으로도 여유를 가지고 산다. 하나님 말씀 속에서, 하나님의 축복과 사랑 속에서 하나님과 함께 할 때만이 진정으로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다.
기억절 : “악을 선하다 하며 선을 악하다 하며 흑암으로 광명을 삼으며 광명으로 흑암을 삼으며 쓴 것으로 단것을 삼으며 단것으로 쓴 것을 삼는 그들은 화 있을진저 스스로 지혜롭다 하며 스스로 명철하다 하는 그들은 화 있을진저”(사 5:20~21).
결론: 하나님의 명백한 지시를 따라 예배를 드렸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축복을 누렸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명령에 대하여 자신의 길과 방법을 따른 자들은 심각한 결과를 맞이해야 했습니다.
첫째 날(일) 7월 24일
봉헌
도입)
교회에서 하나님을 예배할 때 많은 순서가 있으나 가장 귀중한 순서는 하나님의 백성을 축복하는 자리이다. 그 이유는 축도는 예배가 끝난 것을 알리는 순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봉헌예식에서 아론은 자신이 제사장으로 취임하는 예식을 행하고 또 백성들을 위해 제물을 하나님께 드린 후에 성전에서 나와, 백성들에게 손을 들고 축복하였다. "아론이 백성을 향하여 손을 들어 축복함으로 속죄제와 번제와 화목제를 필하고 내려 오니라"(레 9:22). 예배는 신자들이 하나님을 경배하고, 영화를 돌려 드리며 그를 높이고 기쁘게 해드리는 행위이지만 또 다른 의미에서 예배는 사람이 하나님을 만나는 의식이요, 우리의 소원을 하나님께 아뢰는 시간이요, 그리고 하나님의 복을 구하고, 받는 시간이기도 하다. 그 복을 받는 순서가 어느 시간이냐 하면 바로 마지막 축도 시간이다. 그래서 아론이 백성들에게 복을 빌어주면서 제사를 끝내고, 백성들도 하나님께 축복을 받고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 제사요 예배이다. 예배를 통하여 이런 하나님의 복이 임하시기를 바란다.
봉헌
“모세와 아론이 회막에 들어갔다가 나와서 백성에게 축복하매 여호와의 영광이 온 백성에게 나타나며”(레 9:23).
교훈: 진정한 예배가 되기 위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우리 자신과 예배에 속한 모든 것을 성별해야 한다.
부가적용)
"아론이 백성을 향하여 손을 들어 축복함으로 속죄제와 번제와 화목제를 필하고 내려 오니라 모세와 아론이 회막에 들어갔다가 나와서 백성에게 축복하매 여호와의 영광이 온 백성에게 나타나며"(레 9:22-23). 아론은 백성들을 한번만 축복한 것이 아니고 두 번 축복을 하였다. 이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내리시는 은혜와 복은 무궁한 복임을 가르치고 있다. 그러나 이 두 번의 축복에 대하여 바너(Baner)라는 학자는 영적으로 해석을 하였다. 첫 번째 아론이 축복한 것은 이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가 마지막으로 남긴 축복을 가르치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 축복은 근본적으로 아론이 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구주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주시는 복인데, 예수 그리스도가 처음 이 세상에 오시어 십자가를 지시고 자기의 몸을 하나님께 속죄 제물로 바친 후에 하늘나라로 가시기 전에 축복하신 것이라고 한다. "예수께서 저희를 데리고 베다니 앞까지 나가사 손을 들어 저희에게 축복하시더니 축복하실 때에 저희를 떠나 (하늘로 올리우)시니 저희가 (그에게 경배하고) 큰 기쁨으로 예루살렘에 돌아가 늘 성전에 있어 하나님을 찬송 하니라"(눅 24:50-53). 예수 그리스도는 베다니 앞에서 제자들에게 손을 들고 축복하셨다고 하였는데 지금도 예수 그리스도는 믿는 우리를 향하여 하나님 우편에서 이렇게 축복하고 계시는 사실을 믿으라.
•영감의 교훈 •
▶ 성소는 구별되어야 함
“집은 가족을 위한 성소이며, 골방이나 외딴 숲은 개인의 예배를 위한 장소가 될 수 있다. 그러나 교회는 회중을 위한 성소이다. 거기에는 예배의 시간, 장소, 방법에 관한 규칙이 있어야 한다. 거룩한 것, 하나님을 예배하는 데 속한 것은 어떤 것이라도 부주의하거나 무관심하게 취급되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 최선의 일임을 보여 주기 위하여 그들의 모임은 마음속에서 거룩한 것과 일반적인 것을 구별하는 그런 것이어야 한다”(증언보감 1권, 193).
둘째 날(월) 7월 25일
여호와 앞에서 불이 나옴
도입)
레위기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어떻게 제사지내야 하는지를 기록해 놓은 책이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과 함께 사시기 원하셨다. 그러나 죄를 지은 사람은 하나님과 함께 살 수가 없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죄를 범한 사람을 용서하시고 그들과 함께 사시기 위해 제사제도를 마련하신 것이다. ‘불이 여호와 앞에서 나와 단 위의 번제물과 기름을 살랐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제사를 받으셨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렇게 제물을 태웠던 불이 이번에는 공포의 불이 되어 두 사람을 죽이는 일이 생겼다(10:2). 아론의 두 아들이 죽은 것은 불 때문에 생긴 일이라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1절은 이들이 “여호와의 명하시지 않은 다른 불을 담아 여호와 앞에 분향하였더니”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 제사드릴 때 사용하는 불은 아무 것이나 사용할 수 없었다. 제사에 사용되는 불은 하나님께 드렸던 번제 단에서 사용된 불을 써야 한다. 그런데 이 두 사람은 다른 불을 사용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하여튼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이들이 하나님께서 명하시지 않은 불을 사용하였다는 점이다.
“ 아론은 아들들의 도움을 받아 하나님께서 요구하신 희생 제물을 드렸고, 손을 들어 백성을 축복하였다. 모두 하나님께서 명하신 바대로 이루어졌다. 그분은 그 희생 제물을 가납하셨으며, 특별한 방법으로 당신의 영광을 나타내셨으니, 곧 불이 여호와께로부터 나와 제단 위의 제물을 사르었다. 백성들은 경외심과 열렬한 관심을 가지고, 이 같은 하나님의 능력의 놀라운 현현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그 가운데서 하나님의 영광과 은총의 증거를 보았고, 다 한결 같이 찬양과 존경의 함성을 올렸으며, 여호와의 존전에 있는 것처럼 그들의 얼굴을 가리고 엎드렸다”(부조와 선지자, 359).
“아론의 아들 나답과 아비후가 …다른 불을 담아 여호와 앞에 분향하였더니”(레 10:1).
교훈: 나답과 아비후가 불의 심판을 받은 것은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신 그리스도의 대속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고 임의로 하나님의 뜻을 거역했기 때문이다.
부가적용)
나답과 아비후를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치고자 하시는 사실은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이 하나님께 나아올 때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기 원하신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는 때는 언제인가? 우리는 예배드릴 때와 기도드릴 때 등을 통해 하나님께 나아간다. 우리가 이렇게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 때문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에 의지해서만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 그런데 우리는 이렇게 하나님께 나아갈 때 빈 마음과 다른 생각으로 나아오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또한 하나님께 나아올 때 마음에 합당한 표현을 하도록 힘써야 한다. 우리가 이렇게 하나님께 온전히 나아올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과 태도를 받으시고 풍성한 은혜를 베풀어 주실 것이다.
•영감의 교훈 •
▶ 스스로를 기만하지 말라
“사람들이 큰 빛을 받고, 이스라엘의 통치자들처럼, 산에 올라가 하나님과 교통하고, 그분의 영광의 빛 가운데 거할 특권을 받았었다는 이유로, 그 후에 죄를 지어도 벌을 받지 않을 수 있으며 그처럼 높임을 받은 까닭에 하나님께서 그들의 죄악을 엄격히 형벌하시지 않으시리라고 스스로 믿지 않도록 해야 한다. 이와 같은 생각은 치명적인 기만이다”(부조와 선지자, 359).
셋째 날(화) 7월 26일
7월 26일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한 사람이로다!
도입)
행복”은 모든 사람이 추구하는 공통분모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복하다고 자족하며 사는 사람은 많지 않고 늙어 죽는 날까지 행복을 찾아 헤매다가 두 손 들고 간 사람이 많다. 행복은 환경에 있는 것도 아니고 부귀영화에 있는 것도 아니며 물질에 있는 것도 아니다. 행복론의 저자 힐티는 말하기를 "모든 참다운 행복은 우리의 힘닿는 곳에 있다는 것을 기억하라 힘이 미치지 않은 먼 곳에 있다고 생각지 마라" 고 했다. 신명기 33장 29절에는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자(幸福者)로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말은 바로 모세가 한 말이다. B.C. 1406년경 모압 평지에서 모세가 죽음 직전에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마지막으로 축복한 기도이다. 오늘날도 행복을 모르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하나님의 축복과 사랑과 은혜 속에 살면서도 행복을 모르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도, 하나님의 도움을 많이 받았으면서도 자신들이 행복하다는 것을 미처 깨닫지 못했던 것 같다. 그래서 모세가 말했다. “당신들은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 앞에 선택을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축복을 받고 하나님의 보호를 받았기 때문에, 당신들이야말로 세계 어느 민족보다도 세계 어느 나라보다도 행복자입니다.”라고 말했다. 모세는 40년째 정착하지 못하고 광야를 떠돌고 있고 강한 군사력도, 발달된 문화도, 물질적 풍요함도 없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너희는 행복한 사람들이라고 했다. 예수를 믿었다고 해서 돈을 잘 버는 것도 아니고 남보다 좋은 집에 사는 것도 아니다. 하는 일이 다 잘되는 것도 아니다. 우리 모두에게 나름대로 어려움이 있고 고통이 있다. 그런데도 성경은 '너는 행복한 사람이라고 한다. 왜 그런가? 첫째는 하나님이 도와주시는 자이기에 행복한 사람입니다.(신 33:26-) 도와주는 사람이 있는 것은 행복한 것인데 하나님이 도와주시는 성도는 물질의 넉넉함이 아니라도 초막이나 궁궐이나 그 어디나 하늘나라이다. 430년 종살이 하는 자리에서 출애굽을 시키시고 홍해를 갈라 육지같이 건너게 하실 뿐 아니라 애굽 군대를 수장시키시고 광야 40년 동안 만나와 메추라기를 내려 먹여주시면서 광야에서 적군과 대립에서 승리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도움을 받아 왔던 그들에게 앞으로도 도와주실 것을 믿기에 행복자라는 것이다. 우리 하나님의 백성들은 세상에서 구원해 주시고 마귀의 손아귀에서 건져주시며 모든 문제에서 해결 받아 자유하게 하시는 은혜를 받아 누리는 성도는 행복한 사람이다. 둘째는 하나님이 처소가 되어 그 안에 살게 하시니 행복한 사람이다. 신 33:27-에 영원하신 하나님이 네 처소가 되시니 하였다. 처소라는 말은 하나님이 우리의 거처요 우리의 집이라는 생각을 갖게 한다. 비록 우리 집이 누추한 오두막이나 볼품없는 다락방이라 해도 우리 집 하면 우리 마음에 항상 소중한 곳이다. 엄마의 품에 안겨있는 어린아이가 행복하게 보이듯이 암탉이 병아리를 품고 있는 모습이 안전하게 보이듯이 하나님이 우리의 처소가 되어 주시는 삶은 초막이나 궁궐이나 그 어디나 하늘나라이다. 다윗은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부족함이 없다(시23:1)고 고백을 했다. 안전한 곳이며 보호가 있는 곳이고 사랑이 있는 곳이 처소이다. 셋째는 하나님이 이슬을 내리는 곳에 거하게 하시니 행복한 사람이다.(신 33:28-) 땅에 생존하는 식물은 햇빛과 비를 맞고 살지만 열매를 맺는 것은 아침 마다 내리는 이슬을 받아먹어야 영글어지는 것이다. 이슬은 밝은 낮에 내리는 것이 아니고 어두운 밤에 내리며 구름 끼는 흐린날 내리는 것이 아니라 맑은 날 내리며 온 천지에 차별 없이 내리지만 생명 있는 나무나 풀잎에 이슬이 맺히는 것이고 이슬을 받아먹는 생물은 지혜롭고 식물은 열매가 영글어지는 것이다. 하나님의 이슬 같은 은혜를 누리는 성도는 지혜롭게 되고 성령의 열매를 많이 맺히는 행복한 삶을 살게 될 것이다.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한 사람이로다 여호와의 구원을 너같이 얻은 백성이 누구냐…”(신 33:29).
교훈: 우리가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행하신 일들을 잊지 않고 찬양한다면 우리는 영원토록 그분의 축복을 누리는 여수룬이 될 수 있다.
부가적용)
신명기에 3번 나타나고 이사야 44장에 한번, 성경에 총 4번 나타나는 '여수룬'이라는 단어는 애칭이었다. '의로운 자'라는 뜻을 가진 여수룬이 언제부터 이스라엘의 별명이 되었는지 기원은 분명치 않습니다만 하나님이 그들을 부를 때 쓰는 애칭으로 모세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서로 이해했던 이름이었던 것 같다. 아마도 이는 우리 어머니들이 자녀들의 태명으로 사랑이라고 부르든지 혹은 우리 강아지, 내 새끼, 우리 똘똘이라고 부른 것과 같았을 것이다. 그런데 모세는 그의 120년 생애를 마무리하고 출애굽 이후 광야 40년을 마무리하는 신명기 마지막 부분에서 이스라엘을 애칭 '여수룬'이라고 불러 그 호칭으로 잊었던 하나님의 정과 사랑을 기억하게 하고 있다.
•영감의 교훈 •
▶ 하나님을 기억하라
“하나님께 대한 참된 경외심은 하나님의 무한히 위대하심을 깨닫고 또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인식함으로 생겨난다. 각 사람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서 그곳에 임재하고 계심을 마음속 깊이 인식하여야 한다”(교회에 보내는 권면, 250).
넷째 날(수) 7월27일
굴복의 자세
도입)
한나는 인간의 힘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통곡하며 기도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서원 기도를 드렸다. 사무엘상 1장 11절을 보면 “만군의 여호와여 만일 주의 여종의 고통을 돌보시고 나를 기억하사 주의 여종을 잊지 아니하시고 주의 여종에게 아들을 주시면 내가 그의 평생에 그를 야훼께 드리고 삭도를 그의 머리에 대지 아니하겠나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서원 기도는 하나님께 대한 변경할 수 없는 약속이다(참조, 민 30:1∼2). 그런데 한나는 하나님께서 아들을 주시면 그를 평생 나실인(1)으로 하나님께 바치겠다고 약속한 것이다. 한나는 아브라함처럼 '만군의 여호와'를 믿었다. 그녀는 믿음으로 하나님 앞으로 달려갔고, 하나님께 부르짖어 그의 슬픔을 아뢰었다. 그녀는 '내가 너의 하나님이 되리라'(출 6:7 레 26:12)는 주의 약속을 굳게 믿었던 것이다. 이것은 한나가 하나님께 응답받을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였다. 우리도 하나님께 응답받기 위하여 하나님을 전적으로 믿고 의지한다면 그 같은 열매가 주어질 것이다.
“한나가 마음이 괴로워서 여호와께 기도하고 통곡하며”(삼상 1:10).
교훈: 진실한 예배는 자기를 높이거나 스스로 만족하는 정신과 거리가 멀며 우리의 필요를 살피시는 하나님께 자아를 굴복시킬 때만 성립된다.
부가적용)
한나는 애통하면서 그녀의 문제를 하나님께 맡기고 아이를 얻기 위해 그를 의지했다. 그녀의 괴로움을 극복하는 방법으로써 취한 첫번째 단계는 그녀가 다른 곳에 가지 아니하고 성전에 간 것이었다. 우리 모두에게 주는 교훈은 "우리의 짐을 주님께 가져가서 거기에 내려놓아야 함"을 알려준다. 그녀는 기도로 그녀의 슬픔을 하나님께 아뢰었다. 그녀는 하나님께서 자기의 간청을 들으셨다는 것을 알 때까지 기도하였다.
•영감의 교훈 •
▶ 하나님만을 높임
“오늘날,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도 존경심과 경건한 경외심을 잃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성경 말씀은 사람이 겸손과 경외심과 거룩한 중재자이신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을 통하여 저희 창조주께 나아가야 한다고 가르친다”(선지자와 왕, 47).
다섯째 날(목) 7월 28일
예배와 순종
도입)
“순종이 없는 제사는 신성모독이다.”라고 윌리엄 거널이 말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기 원하신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인간을 지으셨고 하나님이 인간에게 복된 길을 가장 잘 아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대로 따라가면 나도 살고 남도 살리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다. 그러나 죄악된 인간생각을 따르면 자기도 망하고 남도 망하고 하나님도 슬프게 한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는 마음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다고 하셨다.(요7:17) 지금 우리에게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은 무엇인가? 순종할 마음을 가진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오고 하나님은 그들을 통하여 이 땅을 구원하실 것이다. 순종하려는 마음이 강할수록 하나님은 더 많은 음성을 들려주시고 그를 통하여 더 놀라운 일들을 행하실 것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사람들은 핍박을 받게 되지만 결국 100배의 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막10:30)
“사무엘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이는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 하니”(삼상 15:22~23).
1. 하나님은 우리의 제물보다 우리의 마음을 받기 원하신다. 만약 우리가 그분께 마음을 드린다면 당연히 제물도 드릴 것이다.
2. 순종은 제사보다 그분을 더 기쁘게 한다. 순종은 참된 제사가 어떠해야 하는지 우리가 이해했음을 나타내는 방법이다.
3. 나의 방식을 고집스럽게 주장하는 것도 우상숭배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 자신과 우리의 욕망과 견해를 하나님과 같이 여기는 것이기 때문이다.
교훈: 하나님께서 받기를 원하시는 예배는 형식적으로 드리는 제사가 아니라 마음으로 드리는 순종의 제사이다.
부가적용)
구약 시대에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것이 제사이다. 그런데 성경은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라고 말씀을 하신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순종은 곧 제사와 연결이 되기 때문이다. “나는 능력보다 순종을 원한다.” 교회개혁가 마르틴 루터의 고백이다. 당시 루터가 부패한 교회를 향해 개혁의 횃불을 든 용기는 성령께서 주신 능력에 있었다. 그러나 그는 능력보다는 순종하는 편을 택하겠다고 고백했다. 능력은 순종에서 나온다. 어거스틴이 “주여, 많이 명령하시옵소서. 그리고 명령하신 것을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한 것도 하나님은 명령에 순종하는 자에게 그것을 감당할 능력 또한 주신다는 깨달음의 표현이다. 초대 안디옥교회의 주교 이그나티우스는 주후 107년 순교를 당했다. 처형이 임박하자 성도들은 그의 구명을 위해 총독에게 탄원했다. 그러나 이그나티우스는 “나는 차라리 맹수의 이빨에 갈려서 하나님의 성결한 떡이 되기를 원한다”면서 성도들을 만류하고, 기꺼이 순종함으로써 순교의 제물이 되었다고 한다.
•영감의 교훈 •
▶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예배
“우리 앞에 사울의 죄와 그 결과가 나타나 있음에도 불구하고 얼마나 많은 사람이 그와 동일한 길을 따라가고 있는가! 그들은 여호와의 요구하시는 바는 믿고 순종하기를 거절하면서도 형식적인 예배를 하나님께 드리는 일에 힘을 기울인다. 그와 같은 예배에는 하나님의 성령의 아무런 응답이 없다. 그들이 종교 의식을 준수하는 데 아무리 열성이 있다 할지라도 여호와께서는 그들이 만일 고의로 당신의 명령 중 하나라도 범하기를 고집한다면 그들을 가납하실 수 없으시다”(선지자와 왕, 634).
•기도 •
하나님, 무익한 예배를 드리는 저를 불쌍히 여기시옵소서. 성령의 갈급함을 잃어버리고 메마른 심령으로 성전만
밟고 가는 저를 불쌍히 여기옵소서. 지금의 이 신앙생활을 바꾸고 싶습니다. 성령을 부어 주시고 인도하옵소서. 하나님께서 새 일을 행하실 때 순종하기를 원합니다.
예비일(금) 7월 29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독서 과제: 부조와 선지자, 359~362 “나답과 아비후의 죄”, 616~626 “사울의 외람됨.”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계명을 떠나 속된 것과 거룩한 것을 구별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저주를 선언하셨다”(부조와 선지자, 360).
“사울의 치명적인 오만은 사탄의 흉악한 마법에서 나온 것이 분명하였다. 사울은 우상숭배와 사술을 진압하는 데 큰 열심을 나타냈으나 하나님의 명령을 불순종함으로 인하여 그는 하나님을 반대하는 정신으로 행했고, 사술을 행하는 자처럼 사탄의 감동을 받아서 책망을 받을 때에 더욱 완고하게 반역하였다. 만일 사울이 드러내 놓고 우상 숭배자들과 연합하였더라면 하나님의 성령을 그처럼 크
게 모독하지는 않았을 것이다”(부조와 선지자, 635).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➊왜 그리스도를 예배의 중심으로 삼는 것이 그토록 중요합니까? 그러나 교묘하게 우리의 예배에 침투하여 예배의 초점을 주님으로부터 옮겨 놓은 것들은 무엇입니까? 단지 예배의 형식을 갖추기 위해 우리가 부르는 노래와 찬양에 주님의 이름을 사용하는 것은 어떻게 우리를 위험에 빠트릴 수 있습니까?
➋우리는 어떻게 위선적으로 예배하게 됩니까? 예배할 때는 경배와 찬양으로 충만하나 밖에서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살아간다면 그것이 시사하는 바는 무엇입니까? 우리가 비록 완전하지는 않지만, 우리의 삶이 우리가 드리는 예배와 연결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불행히도 어떤 사람들은 교회에서는 예배하지만, 집에서는 배우자와 자녀를 학대하고 악한 행위를 일삼습니다. 그러한 삶은 어떻게 우리의 예배를 조롱거리로 만듭니까?
7월 30일 안식일
일몰: 오후 7시 43분
도입)
재벌 100명과 박사학위를 가진 지식인 100명을 대상으로 삶의 만족도에 대한 설문 조사를 했다. 그런데 “당신은 행복하십니까?”라는 질문에 87%가 “아니오. 나는 행복하지 않습니다.”라고 부정적인 대답을 했다. 또한 “지금 현재 삶에 만족은 하십니까?”라는 질문에도 “아니오. 만족도 없습니다.”라고 대답을 했다. 재벌들이 행복하지 못하고 지식인들이 만족하지 못한다면 과연 이 세상에서 행복하게 사는 사람은 누구겠는가? 세계사 가운데 가장 행복한 사람으로 불리는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은 바로 괴테(Johann Wolfgang von Goethe ; 1749∼1832)이다. 그런데 그는 세상을 떠나면서 이런 말을 남겼다. “세상 사람들이 나를 다 행운아라고 했습니다. 불행을 모르는 사람으로 알았습니다. 그러나 제 평생 저 자신이 ‘나는 행복하다’라고 생각한 적은 단 하루도 없었습니다.” 그는 좋은 교육을 받고 국가의 재상까지 지냈다. 작가로서도 명성을 떨쳤다. 82세에 쓴 『파우스트』는 세계적인 걸작이 되었다. 가장 존경받던 최고의 인물인 괴테, 당대에 ‘가장 행복한 사람’이라고 불리었던 괴테도, 자기 스스로는 ‘행복하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는 고백을 했다. 돈이 있는 사람도 행복하지 못하다. 명예가 있는 사람도 행복하지 못하다. 권력이 있는 사람도 행복하지 못하다. 그렇다면 그냥 행복을 포기해야 겠는가? 아니면 계속해서 행복을 추구해야 겠는가? 우리는 ‘행복’에 대해서 어떤 태도를 취해야 겠는가? 스위스의 철학자 칼 힐티(Karl Hilty ; 1833∼1909)는 『행복론』이라는 책에서 “인생 최대의 행복은 하나님 가까이에 있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77세로 세상을 떠나기까지 자기가 모은, 수많은 자료와 학설, 이론을 통해 그런 결론을 얻었다. 하나님만이 가장 완전한 행복자이시다. 인간은 불완전하고 불안하고 연약하고 부족한 존재이다. 인간은 흙으로 빚어진 연약한 존재인데 어떻게 행복할 수 있겠는가? 인간 스스로는 행복할 수 없다. 행복자이신 하나님 앞에 가까이 가는 사람만이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다. 신앙 안에서의 행복이야말로 참 행복이다. 세상적인 행복은 온전한 행복도 아니거니와 오래 가지도 않는다. 갤럽 조사에 의하면 교회 생활을 열심히 하는 사람들은 교회에 나오지 않는 사람보다 더 행복한 삶을 산다고 한다. 몸도 더 건강하다. 가정생활도 안정된다. 경제적으로도 여유를 가지고 산다. 하나님 말씀 속에서, 하나님의 축복과 사랑 속에서 하나님과 함께 할 때만이 진정으로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다.
기억절 : “악을 선하다 하며 선을 악하다 하며 흑암으로 광명을 삼으며 광명으로 흑암을 삼으며 쓴 것으로 단것을 삼으며 단것으로 쓴 것을 삼는 그들은 화 있을진저 스스로 지혜롭다 하며 스스로 명철하다 하는 그들은 화 있을진저”(사 5:20~21).
결론: 하나님의 명백한 지시를 따라 예배를 드렸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축복을 누렸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명령에 대하여 자신의 길과 방법을 따른 자들은 심각한 결과를 맞이해야 했습니다.
첫째 날(일) 7월 24일
봉헌
도입)
교회에서 하나님을 예배할 때 많은 순서가 있으나 가장 귀중한 순서는 하나님의 백성을 축복하는 자리이다. 그 이유는 축도는 예배가 끝난 것을 알리는 순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봉헌예식에서 아론은 자신이 제사장으로 취임하는 예식을 행하고 또 백성들을 위해 제물을 하나님께 드린 후에 성전에서 나와, 백성들에게 손을 들고 축복하였다. "아론이 백성을 향하여 손을 들어 축복함으로 속죄제와 번제와 화목제를 필하고 내려 오니라"(레 9:22). 예배는 신자들이 하나님을 경배하고, 영화를 돌려 드리며 그를 높이고 기쁘게 해드리는 행위이지만 또 다른 의미에서 예배는 사람이 하나님을 만나는 의식이요, 우리의 소원을 하나님께 아뢰는 시간이요, 그리고 하나님의 복을 구하고, 받는 시간이기도 하다. 그 복을 받는 순서가 어느 시간이냐 하면 바로 마지막 축도 시간이다. 그래서 아론이 백성들에게 복을 빌어주면서 제사를 끝내고, 백성들도 하나님께 축복을 받고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 제사요 예배이다. 예배를 통하여 이런 하나님의 복이 임하시기를 바란다.
봉헌
“모세와 아론이 회막에 들어갔다가 나와서 백성에게 축복하매 여호와의 영광이 온 백성에게 나타나며”(레 9:23).
교훈: 진정한 예배가 되기 위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우리 자신과 예배에 속한 모든 것을 성별해야 한다.
부가적용)
"아론이 백성을 향하여 손을 들어 축복함으로 속죄제와 번제와 화목제를 필하고 내려 오니라 모세와 아론이 회막에 들어갔다가 나와서 백성에게 축복하매 여호와의 영광이 온 백성에게 나타나며"(레 9:22-23). 아론은 백성들을 한번만 축복한 것이 아니고 두 번 축복을 하였다. 이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내리시는 은혜와 복은 무궁한 복임을 가르치고 있다. 그러나 이 두 번의 축복에 대하여 바너(Baner)라는 학자는 영적으로 해석을 하였다. 첫 번째 아론이 축복한 것은 이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가 마지막으로 남긴 축복을 가르치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 축복은 근본적으로 아론이 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구주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주시는 복인데, 예수 그리스도가 처음 이 세상에 오시어 십자가를 지시고 자기의 몸을 하나님께 속죄 제물로 바친 후에 하늘나라로 가시기 전에 축복하신 것이라고 한다. "예수께서 저희를 데리고 베다니 앞까지 나가사 손을 들어 저희에게 축복하시더니 축복하실 때에 저희를 떠나 (하늘로 올리우)시니 저희가 (그에게 경배하고) 큰 기쁨으로 예루살렘에 돌아가 늘 성전에 있어 하나님을 찬송 하니라"(눅 24:50-53). 예수 그리스도는 베다니 앞에서 제자들에게 손을 들고 축복하셨다고 하였는데 지금도 예수 그리스도는 믿는 우리를 향하여 하나님 우편에서 이렇게 축복하고 계시는 사실을 믿으라.
•영감의 교훈 •
▶ 성소는 구별되어야 함
“집은 가족을 위한 성소이며, 골방이나 외딴 숲은 개인의 예배를 위한 장소가 될 수 있다. 그러나 교회는 회중을 위한 성소이다. 거기에는 예배의 시간, 장소, 방법에 관한 규칙이 있어야 한다. 거룩한 것, 하나님을 예배하는 데 속한 것은 어떤 것이라도 부주의하거나 무관심하게 취급되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 최선의 일임을 보여 주기 위하여 그들의 모임은 마음속에서 거룩한 것과 일반적인 것을 구별하는 그런 것이어야 한다”(증언보감 1권, 193).
둘째 날(월) 7월 25일
여호와 앞에서 불이 나옴
도입)
레위기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어떻게 제사지내야 하는지를 기록해 놓은 책이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과 함께 사시기 원하셨다. 그러나 죄를 지은 사람은 하나님과 함께 살 수가 없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죄를 범한 사람을 용서하시고 그들과 함께 사시기 위해 제사제도를 마련하신 것이다. ‘불이 여호와 앞에서 나와 단 위의 번제물과 기름을 살랐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제사를 받으셨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렇게 제물을 태웠던 불이 이번에는 공포의 불이 되어 두 사람을 죽이는 일이 생겼다(10:2). 아론의 두 아들이 죽은 것은 불 때문에 생긴 일이라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1절은 이들이 “여호와의 명하시지 않은 다른 불을 담아 여호와 앞에 분향하였더니”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 제사드릴 때 사용하는 불은 아무 것이나 사용할 수 없었다. 제사에 사용되는 불은 하나님께 드렸던 번제 단에서 사용된 불을 써야 한다. 그런데 이 두 사람은 다른 불을 사용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하여튼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이들이 하나님께서 명하시지 않은 불을 사용하였다는 점이다.
“ 아론은 아들들의 도움을 받아 하나님께서 요구하신 희생 제물을 드렸고, 손을 들어 백성을 축복하였다. 모두 하나님께서 명하신 바대로 이루어졌다. 그분은 그 희생 제물을 가납하셨으며, 특별한 방법으로 당신의 영광을 나타내셨으니, 곧 불이 여호와께로부터 나와 제단 위의 제물을 사르었다. 백성들은 경외심과 열렬한 관심을 가지고, 이 같은 하나님의 능력의 놀라운 현현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그 가운데서 하나님의 영광과 은총의 증거를 보았고, 다 한결 같이 찬양과 존경의 함성을 올렸으며, 여호와의 존전에 있는 것처럼 그들의 얼굴을 가리고 엎드렸다”(부조와 선지자, 359).
“아론의 아들 나답과 아비후가 …다른 불을 담아 여호와 앞에 분향하였더니”(레 10:1).
교훈: 나답과 아비후가 불의 심판을 받은 것은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신 그리스도의 대속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고 임의로 하나님의 뜻을 거역했기 때문이다.
부가적용)
나답과 아비후를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치고자 하시는 사실은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이 하나님께 나아올 때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기 원하신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는 때는 언제인가? 우리는 예배드릴 때와 기도드릴 때 등을 통해 하나님께 나아간다. 우리가 이렇게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 때문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에 의지해서만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 그런데 우리는 이렇게 하나님께 나아갈 때 빈 마음과 다른 생각으로 나아오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또한 하나님께 나아올 때 마음에 합당한 표현을 하도록 힘써야 한다. 우리가 이렇게 하나님께 온전히 나아올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과 태도를 받으시고 풍성한 은혜를 베풀어 주실 것이다.
•영감의 교훈 •
▶ 스스로를 기만하지 말라
“사람들이 큰 빛을 받고, 이스라엘의 통치자들처럼, 산에 올라가 하나님과 교통하고, 그분의 영광의 빛 가운데 거할 특권을 받았었다는 이유로, 그 후에 죄를 지어도 벌을 받지 않을 수 있으며 그처럼 높임을 받은 까닭에 하나님께서 그들의 죄악을 엄격히 형벌하시지 않으시리라고 스스로 믿지 않도록 해야 한다. 이와 같은 생각은 치명적인 기만이다”(부조와 선지자, 359).
셋째 날(화) 7월 26일
7월 26일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한 사람이로다!
도입)
행복”은 모든 사람이 추구하는 공통분모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복하다고 자족하며 사는 사람은 많지 않고 늙어 죽는 날까지 행복을 찾아 헤매다가 두 손 들고 간 사람이 많다. 행복은 환경에 있는 것도 아니고 부귀영화에 있는 것도 아니며 물질에 있는 것도 아니다. 행복론의 저자 힐티는 말하기를 "모든 참다운 행복은 우리의 힘닿는 곳에 있다는 것을 기억하라 힘이 미치지 않은 먼 곳에 있다고 생각지 마라" 고 했다. 신명기 33장 29절에는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자(幸福者)로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말은 바로 모세가 한 말이다. B.C. 1406년경 모압 평지에서 모세가 죽음 직전에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마지막으로 축복한 기도이다. 오늘날도 행복을 모르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하나님의 축복과 사랑과 은혜 속에 살면서도 행복을 모르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도, 하나님의 도움을 많이 받았으면서도 자신들이 행복하다는 것을 미처 깨닫지 못했던 것 같다. 그래서 모세가 말했다. “당신들은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 앞에 선택을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축복을 받고 하나님의 보호를 받았기 때문에, 당신들이야말로 세계 어느 민족보다도 세계 어느 나라보다도 행복자입니다.”라고 말했다. 모세는 40년째 정착하지 못하고 광야를 떠돌고 있고 강한 군사력도, 발달된 문화도, 물질적 풍요함도 없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너희는 행복한 사람들이라고 했다. 예수를 믿었다고 해서 돈을 잘 버는 것도 아니고 남보다 좋은 집에 사는 것도 아니다. 하는 일이 다 잘되는 것도 아니다. 우리 모두에게 나름대로 어려움이 있고 고통이 있다. 그런데도 성경은 '너는 행복한 사람이라고 한다. 왜 그런가? 첫째는 하나님이 도와주시는 자이기에 행복한 사람입니다.(신 33:26-) 도와주는 사람이 있는 것은 행복한 것인데 하나님이 도와주시는 성도는 물질의 넉넉함이 아니라도 초막이나 궁궐이나 그 어디나 하늘나라이다. 430년 종살이 하는 자리에서 출애굽을 시키시고 홍해를 갈라 육지같이 건너게 하실 뿐 아니라 애굽 군대를 수장시키시고 광야 40년 동안 만나와 메추라기를 내려 먹여주시면서 광야에서 적군과 대립에서 승리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도움을 받아 왔던 그들에게 앞으로도 도와주실 것을 믿기에 행복자라는 것이다. 우리 하나님의 백성들은 세상에서 구원해 주시고 마귀의 손아귀에서 건져주시며 모든 문제에서 해결 받아 자유하게 하시는 은혜를 받아 누리는 성도는 행복한 사람이다. 둘째는 하나님이 처소가 되어 그 안에 살게 하시니 행복한 사람이다. 신 33:27-에 영원하신 하나님이 네 처소가 되시니 하였다. 처소라는 말은 하나님이 우리의 거처요 우리의 집이라는 생각을 갖게 한다. 비록 우리 집이 누추한 오두막이나 볼품없는 다락방이라 해도 우리 집 하면 우리 마음에 항상 소중한 곳이다. 엄마의 품에 안겨있는 어린아이가 행복하게 보이듯이 암탉이 병아리를 품고 있는 모습이 안전하게 보이듯이 하나님이 우리의 처소가 되어 주시는 삶은 초막이나 궁궐이나 그 어디나 하늘나라이다. 다윗은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부족함이 없다(시23:1)고 고백을 했다. 안전한 곳이며 보호가 있는 곳이고 사랑이 있는 곳이 처소이다. 셋째는 하나님이 이슬을 내리는 곳에 거하게 하시니 행복한 사람이다.(신 33:28-) 땅에 생존하는 식물은 햇빛과 비를 맞고 살지만 열매를 맺는 것은 아침 마다 내리는 이슬을 받아먹어야 영글어지는 것이다. 이슬은 밝은 낮에 내리는 것이 아니고 어두운 밤에 내리며 구름 끼는 흐린날 내리는 것이 아니라 맑은 날 내리며 온 천지에 차별 없이 내리지만 생명 있는 나무나 풀잎에 이슬이 맺히는 것이고 이슬을 받아먹는 생물은 지혜롭고 식물은 열매가 영글어지는 것이다. 하나님의 이슬 같은 은혜를 누리는 성도는 지혜롭게 되고 성령의 열매를 많이 맺히는 행복한 삶을 살게 될 것이다.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한 사람이로다 여호와의 구원을 너같이 얻은 백성이 누구냐…”(신 33:29).
교훈: 우리가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행하신 일들을 잊지 않고 찬양한다면 우리는 영원토록 그분의 축복을 누리는 여수룬이 될 수 있다.
부가적용)
신명기에 3번 나타나고 이사야 44장에 한번, 성경에 총 4번 나타나는 '여수룬'이라는 단어는 애칭이었다. '의로운 자'라는 뜻을 가진 여수룬이 언제부터 이스라엘의 별명이 되었는지 기원은 분명치 않습니다만 하나님이 그들을 부를 때 쓰는 애칭으로 모세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서로 이해했던 이름이었던 것 같다. 아마도 이는 우리 어머니들이 자녀들의 태명으로 사랑이라고 부르든지 혹은 우리 강아지, 내 새끼, 우리 똘똘이라고 부른 것과 같았을 것이다. 그런데 모세는 그의 120년 생애를 마무리하고 출애굽 이후 광야 40년을 마무리하는 신명기 마지막 부분에서 이스라엘을 애칭 '여수룬'이라고 불러 그 호칭으로 잊었던 하나님의 정과 사랑을 기억하게 하고 있다.
•영감의 교훈 •
▶ 하나님을 기억하라
“하나님께 대한 참된 경외심은 하나님의 무한히 위대하심을 깨닫고 또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인식함으로 생겨난다. 각 사람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서 그곳에 임재하고 계심을 마음속 깊이 인식하여야 한다”(교회에 보내는 권면, 250).
넷째 날(수) 7월27일
굴복의 자세
도입)
한나는 인간의 힘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통곡하며 기도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서원 기도를 드렸다. 사무엘상 1장 11절을 보면 “만군의 여호와여 만일 주의 여종의 고통을 돌보시고 나를 기억하사 주의 여종을 잊지 아니하시고 주의 여종에게 아들을 주시면 내가 그의 평생에 그를 야훼께 드리고 삭도를 그의 머리에 대지 아니하겠나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서원 기도는 하나님께 대한 변경할 수 없는 약속이다(참조, 민 30:1∼2). 그런데 한나는 하나님께서 아들을 주시면 그를 평생 나실인(1)으로 하나님께 바치겠다고 약속한 것이다. 한나는 아브라함처럼 '만군의 여호와'를 믿었다. 그녀는 믿음으로 하나님 앞으로 달려갔고, 하나님께 부르짖어 그의 슬픔을 아뢰었다. 그녀는 '내가 너의 하나님이 되리라'(출 6:7 레 26:12)는 주의 약속을 굳게 믿었던 것이다. 이것은 한나가 하나님께 응답받을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였다. 우리도 하나님께 응답받기 위하여 하나님을 전적으로 믿고 의지한다면 그 같은 열매가 주어질 것이다.
“한나가 마음이 괴로워서 여호와께 기도하고 통곡하며”(삼상 1:10).
교훈: 진실한 예배는 자기를 높이거나 스스로 만족하는 정신과 거리가 멀며 우리의 필요를 살피시는 하나님께 자아를 굴복시킬 때만 성립된다.
부가적용)
한나는 애통하면서 그녀의 문제를 하나님께 맡기고 아이를 얻기 위해 그를 의지했다. 그녀의 괴로움을 극복하는 방법으로써 취한 첫번째 단계는 그녀가 다른 곳에 가지 아니하고 성전에 간 것이었다. 우리 모두에게 주는 교훈은 "우리의 짐을 주님께 가져가서 거기에 내려놓아야 함"을 알려준다. 그녀는 기도로 그녀의 슬픔을 하나님께 아뢰었다. 그녀는 하나님께서 자기의 간청을 들으셨다는 것을 알 때까지 기도하였다.
•영감의 교훈 •
▶ 하나님만을 높임
“오늘날,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도 존경심과 경건한 경외심을 잃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성경 말씀은 사람이 겸손과 경외심과 거룩한 중재자이신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을 통하여 저희 창조주께 나아가야 한다고 가르친다”(선지자와 왕, 47).
다섯째 날(목) 7월 28일
예배와 순종
도입)
“순종이 없는 제사는 신성모독이다.”라고 윌리엄 거널이 말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기 원하신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인간을 지으셨고 하나님이 인간에게 복된 길을 가장 잘 아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대로 따라가면 나도 살고 남도 살리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다. 그러나 죄악된 인간생각을 따르면 자기도 망하고 남도 망하고 하나님도 슬프게 한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는 마음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다고 하셨다.(요7:17) 지금 우리에게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은 무엇인가? 순종할 마음을 가진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오고 하나님은 그들을 통하여 이 땅을 구원하실 것이다. 순종하려는 마음이 강할수록 하나님은 더 많은 음성을 들려주시고 그를 통하여 더 놀라운 일들을 행하실 것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사람들은 핍박을 받게 되지만 결국 100배의 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막10:30)
“사무엘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이는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 하니”(삼상 15:22~23).
1. 하나님은 우리의 제물보다 우리의 마음을 받기 원하신다. 만약 우리가 그분께 마음을 드린다면 당연히 제물도 드릴 것이다.
2. 순종은 제사보다 그분을 더 기쁘게 한다. 순종은 참된 제사가 어떠해야 하는지 우리가 이해했음을 나타내는 방법이다.
3. 나의 방식을 고집스럽게 주장하는 것도 우상숭배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 자신과 우리의 욕망과 견해를 하나님과 같이 여기는 것이기 때문이다.
교훈: 하나님께서 받기를 원하시는 예배는 형식적으로 드리는 제사가 아니라 마음으로 드리는 순종의 제사이다.
부가적용)
구약 시대에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것이 제사이다. 그런데 성경은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라고 말씀을 하신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순종은 곧 제사와 연결이 되기 때문이다. “나는 능력보다 순종을 원한다.” 교회개혁가 마르틴 루터의 고백이다. 당시 루터가 부패한 교회를 향해 개혁의 횃불을 든 용기는 성령께서 주신 능력에 있었다. 그러나 그는 능력보다는 순종하는 편을 택하겠다고 고백했다. 능력은 순종에서 나온다. 어거스틴이 “주여, 많이 명령하시옵소서. 그리고 명령하신 것을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한 것도 하나님은 명령에 순종하는 자에게 그것을 감당할 능력 또한 주신다는 깨달음의 표현이다. 초대 안디옥교회의 주교 이그나티우스는 주후 107년 순교를 당했다. 처형이 임박하자 성도들은 그의 구명을 위해 총독에게 탄원했다. 그러나 이그나티우스는 “나는 차라리 맹수의 이빨에 갈려서 하나님의 성결한 떡이 되기를 원한다”면서 성도들을 만류하고, 기꺼이 순종함으로써 순교의 제물이 되었다고 한다.
•영감의 교훈 •
▶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예배
“우리 앞에 사울의 죄와 그 결과가 나타나 있음에도 불구하고 얼마나 많은 사람이 그와 동일한 길을 따라가고 있는가! 그들은 여호와의 요구하시는 바는 믿고 순종하기를 거절하면서도 형식적인 예배를 하나님께 드리는 일에 힘을 기울인다. 그와 같은 예배에는 하나님의 성령의 아무런 응답이 없다. 그들이 종교 의식을 준수하는 데 아무리 열성이 있다 할지라도 여호와께서는 그들이 만일 고의로 당신의 명령 중 하나라도 범하기를 고집한다면 그들을 가납하실 수 없으시다”(선지자와 왕, 634).
•기도 •
하나님, 무익한 예배를 드리는 저를 불쌍히 여기시옵소서. 성령의 갈급함을 잃어버리고 메마른 심령으로 성전만
밟고 가는 저를 불쌍히 여기옵소서. 지금의 이 신앙생활을 바꾸고 싶습니다. 성령을 부어 주시고 인도하옵소서. 하나님께서 새 일을 행하실 때 순종하기를 원합니다.
예비일(금) 7월 29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독서 과제: 부조와 선지자, 359~362 “나답과 아비후의 죄”, 616~626 “사울의 외람됨.”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계명을 떠나 속된 것과 거룩한 것을 구별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저주를 선언하셨다”(부조와 선지자, 360).
“사울의 치명적인 오만은 사탄의 흉악한 마법에서 나온 것이 분명하였다. 사울은 우상숭배와 사술을 진압하는 데 큰 열심을 나타냈으나 하나님의 명령을 불순종함으로 인하여 그는 하나님을 반대하는 정신으로 행했고, 사술을 행하는 자처럼 사탄의 감동을 받아서 책망을 받을 때에 더욱 완고하게 반역하였다. 만일 사울이 드러내 놓고 우상 숭배자들과 연합하였더라면 하나님의 성령을 그처럼 크
게 모독하지는 않았을 것이다”(부조와 선지자, 635).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➊왜 그리스도를 예배의 중심으로 삼는 것이 그토록 중요합니까? 그러나 교묘하게 우리의 예배에 침투하여 예배의 초점을 주님으로부터 옮겨 놓은 것들은 무엇입니까? 단지 예배의 형식을 갖추기 위해 우리가 부르는 노래와 찬양에 주님의 이름을 사용하는 것은 어떻게 우리를 위험에 빠트릴 수 있습니까?
➋우리는 어떻게 위선적으로 예배하게 됩니까? 예배할 때는 경배와 찬양으로 충만하나 밖에서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살아간다면 그것이 시사하는 바는 무엇입니까? 우리가 비록 완전하지는 않지만, 우리의 삶이 우리가 드리는 예배와 연결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불행히도 어떤 사람들은 교회에서는 예배하지만, 집에서는 배우자와 자녀를 학대하고 악한 행위를 일삼습니다. 그러한 삶은 어떻게 우리의 예배를 조롱거리로 만듭니까?
댓글목록
아름다운향기님의 댓글
아름다운향기 작성일
안녕하세요.
언제나 변함없이 좋은 말씀으로 은혜나누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늘 열심히 보고 많이 얻고 잘 활용합니다.
너무감사하구요.
주님과 동행속에 늘 건강하시고 사랑 많이받으시고
많이 나누어 주세요.
다시금 감사드리고 행복한 안식일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