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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교교과해설 제 2 과 (하나님 품성 중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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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박용범 작성일11-07-04 15:57 조회2,86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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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범 목사의 안교교과해설에 대한 3가지 기본 원칙

1. 성경은 비록 사람이 기록하였지만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이므로 모든 말씀 을 하나님께서 그 말씀을 하실 때의 하나님의 품성 안에서 이해하려고 노력한 다.(요5:39-40)

2. 교과의 모든 내용을 다루기보다는 생명과 관련된 핵심적인 부분과 하나님 의 품성에 비추어 볼 때에 오해되거나 이해되어야 할 부분을 중심으로 해설한 다.(눅10:26)  

3. 생명 없는 글 자체에 머물기 보다는 그 글을 말씀하신 생명이신 하나님께 초점 을 맞추어 생명력을 느끼게 하는 해설을 한다.(고후3:6; 요14:6)

  
제 2 과 예배와 출애굽기: 하나님의 존재를 이해함

기억절: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너의 하나님 여호와로 라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출20:2-3)
  

우리 입으로 찬양과 영광을 돌리는 주님에 대하여 우리는 무엇을 알고 있는가?

그분은 누구인가? 그분의 이름은 무엇이며, 그분은 어떤 분인가?

이번과는 초기 이스라엘 역사의 기사들과 함께 그들이 하나님을 만남으로 하나님의 품성과 속성에 대하여 무엇을 알게 되었는지 연구할 것이다.


첫째 날(월) 거룩한 땅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출3:5)


출3:1-15 은 하나님과 모세가 처음으로 만나는 장면이다.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사라지지 아니하는”(출3:2) “큰 광경을”(3절)을 보기 위해 가까이 다가서는 순간 여호와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셨다. 그리고 처음으로 모세에게 하시는 말씀이 “이리로 가까이 하지 말라 너의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5절)였다.

모세를 만나시기 위해 오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정작 모세가 가까이 오자 “가까이 하지 말라”고 하시는 말씀이 모순처럼 보인다. 그리고 “너의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는 말씀도 조금 낯설게 느껴진다.

  하나님은 스스로 거룩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거룩하지 못한 우리와 자신을 구별하시는 것처럼 느껴지고, 또한 “신을 벗으라”고 말씀하심으로 무서운 왕 앞에 신까지 벗겨서 왕의 권위를 한 없이 높이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이 부분은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탕자가 집에 돌아왔을 때의 아버지의 태도와는 사뭇 다르게 보인다. 누가복음 15장의 아버지는 탕자가 집에 다 이르기도 전에 상거가 멀지만 아들을 기다렸다는 듯이 달려 나가서 영접하고 집에 와서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눅15:22)고 말씀하셨다.

모세에게 나타나 말씀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이나 탕자의 아버지는 동일하신 같은 여호와 하나님이시다. (히13:8)

히브리서 13:8의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다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품성을 가리킨다. 여호와 하나님의 품성은 언제나 동일하시다. 여호와 하나님은 언제나 여호와 하나님의 품성인 사랑으로만 행하시는 분이시다.

그러므로 모세에게 자신을 구별하여 가까이 하지 말고 거룩한 땅에서 신을 벗으라는 말씀과 탕자에게 자신과 일치시키고(눅15:20) 발에 신을 신기라는 말씀은 글자적으로는 서로 반대처럼 보이지만 반대적의미로 받아드리면 안 된다.

글자적으로는 분명히 반대의 상황이지만 그것을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품성 속에서,사실이 아닌 하나님의 마음으로 성령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다시금 살펴보아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을 떠나는 선택을 한다할지라도 우리에게 벌을 주시거나 우리를 배척하시는 분이 아니시다.(요12:47) 하나님을 떠나는 것이 사망이므로 사망의 선택으로 사망한 사람에게 벌을 주는 것은 무의미 하고 또한 선택의 자유를 주신 분이시면 선택의 결과에 대해서 선택의 자유를 주신 분이 책임지셔야 한다.

  오히려 하나님은 “죄가 많을수록 은혜를 더 많이 주셔서”(롬5:20) 하나님의 품성을 깨닫고 하나님께 돌아오길 원하시며 우리에게 사랑과 생명을 주시기 위하여 우리와 함께 있으시고 싶어 하시는 하나님이시다.(겔33:11)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있고 싶으심을 알지도 못하고 믿지도 못하는 우리들을 위해서 하나님은 아예 하나님 자신의 이름을 임마누엘(마1:23)이라고 하면서까지 추가적으로 지으셨다.

그런데 이런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나타나셔서 “하나님의 은혜를 필요로 하는 죄인 모세와 자신을 분명히 구분하”시는 것처럼 보여 지는 말씀을 하셨다면 그것은 모세에게 그렇게 해야만 되는 특별한 필요가 있기에 하신 말씀임이 분명하다.

더욱이 그것으로 인해 “모세가 하나님 뵈옵기를 두려워하여 얼굴을 가리”(출3:6)우게 되었다면 그것 자체가 여호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상태이므로, 하나님의 품성을 오해하여 하나님을 두렵게 하여 하나님과 멀어지게 하는 것이 죄이고 사망이므로 모세에게 생명을 주셔야 하고 구원을 주셔야 하는 모세의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두려움을 주기 위해 그렇게 했다는 것처럼 보여 지는 글이라면 반드시 다른 해석이 필요하다.(요일4:18-“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그렇다면 이것을 하나님의 품성 안에서의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사건보다 더 중요한 것이 해석이고 글보다 더 중요한 것이 해석이다.(눅10:26)

모세는 하나님의 품성에 대해서 오해하고 있었다. 모세는 하나님을 두려워했다.
모세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두려움은 말 그대로 무서워서 두려워 한 것이었다.

모세가 하나님의 품성을 오해하여 무서움의 두려움 속에 있었다면 그것은 사랑과 반대편에 있는 상황이고 또한 생명과 끊어져 있는 상태이다. 사랑과 생명은 하나님 안에서 동의어이다.  

하나님을 떠나 있는 상태는 어두움의 상태이다. 하나님은 생명이시고 그것이 “사람들이 볼 때에는 빛이”(요1:4)기 때문에 하나님의 품성을 오해하여 하나님과 떨어져 있으면 사람은 어두움이 되어 버린다.

어두움(사망)은 빛(생명)이 필요하지만 동시에 그것은 어두움 자신의 존재에 사라질 것 같은 두려움이 밀려온다.

생명이셔서 사람들에게 빛으로 보이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오해하여 어두움 속에 있는 모세를 찾아 오셨다. 하나님은 모세의 오해를 풀어주셔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그 사랑을 받게 하여 생명 속에 있게 하고 싶으셔서 오셨지만 모세의 오해로 오히려 모세가 생명의 빛에 의해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다.

그래서 하나님은 죽음의 위험 속에 빠질 모세를 생각하셔서 “이리로 가까이 하지 말라”고 부드럽게 말씀하셨고 “너의 선 곳은 (하나님께서 생명이시므로 생명의 빛으로) 구별된 곳이므로” 생명의 빛에게 다가와도 죽지 않게 네가 하나님의 품성에 대해 오해하고 있는 너 자신의 생각(신발)을 벗어버리라고 부탁하시는 말씀이다.(룻4:7에는 사람이 신을 벗는 것을 어떤 일에 대한 확정의 의미로 사용했다.)

모세와 하나님의 만남을 설명하는 본문이 예배라고 한다면 참된 예배의 기본요소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품성에 대한 두려움으로 멀리 있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품성인 사랑(우리의 선택에 대해서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대신 그 결과를 책임지는 두려우리만큼 놀라운 사랑)을 보여주셔서 하나님의 사랑을 보고 그 사랑에 비례하여 하나님께 나아오게 하는 것이 예배라고 할 수 있다.

모세를 찾아오신 하나님은 참된 예배 속에서 모세를 부르신 것이다.


둘째 날(월) 장자의 죽음(유월절 예배)

애굽의 재앙과 관련하여 한 가지 오해할 수 있는 것은 재앙을 하나님께서 내리셨다는 오해이다. 월요일 소지의 기억 절에도 오해할 수 있는 구절을 그대로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에게 재앙을 내리 실 때에...”(출12:27)

이 말은 여러 성경 구절과 모순이 된다. (요일1:5 요일2:9, 11- 하나님은 결코 미워하지 않는 사랑 그 자체이신 분이다. 미워하지도 못하시는 분께서 미움보다 더 심한 벌을 주거나 재앙을 주신다는 말은 모순이 된다.)

여호와께서 재앙을 내리시는 것이 아니라 애굽 사람들의 선택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장면이다. 창조주 하나님이 보여주셨지만 하나님을 거절하는 애굽 사람들의 선택을 인정하실 때에 사단이 그들을 온전히 지배하게 되고, 강제하지 아니하시는 사랑의 품성대로 행하시는 하나님께서 그동안 천연계의 모든 질서를 유지하시는 손길이 더 이상 작동되지 못할 때 모든 천연계의 질서가 깨져서 개체수의 변화와 부작용들이 일어난다.  

이런 것이 초래 된 것은 전적으로 애굽 사람들의 선택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애굽 사람을 창조하신 창조주의 사랑 속에서 그들이 행한 일 조차도 자신의 책임으로 돌리시는 사랑의 하나님이다. 그래서 마치 하나님께서 재앙을 내리시는 것처럼 표현하시는 것이다.

장자의 죽음도 같은 의미로 적용된다. 모든 장자가 죽는 상황 속에서 유일하게 살아남는 비결은 장자를 대신하여 돌아가실 하나님의 독생자(장자)때문이다.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아들 아담을 잃어버렸을 때 자신이 아담의 선택에 대한 모든 책임을 대신 하기로 선언하셨고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 되어 이땅에 오신 것이다. 아들인 아담과 아담 안에서 태어날 모든 인류를 되찾기 위해 아버지 이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들이 되신 것이다.

예수님의 피 흘리심을 상징하는 어린 양의 피를 문설주와 인방에 바름으로 창조주께서 나의 죽음에 대신 책임지시는 분임을 믿게 될 때 우리를 위한 생명은 나의 것이 되고 그래서 죽음을 면하게 된 것이다.

유월절 예배는 창조주 하나님의 책임지시는 사랑을 보고 반응하는 것이었다.



셋째 날(화) 다른 신이 없음

십계명에 대한 큰 오해는 십계명을 명령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자유의지를 허락하신 여호와 하나님은 결코 우리에게 명령하지 않으신다. 사랑이신 하나님의 품성에 따라 명령하지 아니하시고 부탁하셔야 한다.(레8:35)

하나님의 품성 속에서 하신 말씀을 우리는 우리의 품성 속에서 이해하려고 함으로 오해하게 된다. 무엇이라 기록되었는지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읽느냐의 문제가 더욱 중요하다.(눅10:26)

하나님은 우리를 생명 속에 있게 하기 위해서 10개의 사랑의 부탁을 하신다.

첫째부터 넷째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어떻게 해야 생명 속에 있는지를 가르쳐 주시고 그렇게 하도록 부탁하는 내용이고, 다섯째부터 열째는 사람들 간의 관계를 어떻게 해야 하나님께서 주신 생명을 잃어버리지 않고 계속 유지할 수 있는지를 가르쳐 주시고 그렇게 하도록 부탁하는 내용이다.

이 말씀 중 첫째부터 넷째에서 예배에 대해 중요한 요소를 발견 할 수 있다.
예배 속에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보여주는 요소가 있어야 한다. 왜 하나님을 예배하는지의 이유가 설명되어져 있다.

여호와 하나님을 예배하는 이유는 여호와 하나님과 같은 신이 없기 때문이다. 여호와 하나님만이 창조주시고, 여호와 하나님만이 절대적 사랑을 가지신 신이다.

이방신들은 사람에 의해서 만들어진 신들이고 상대적 개념 속에 있는 신들이다.

이방 신들은 받는 신이다. 사람들의 정성과 재물과 서원을 받는 신인 반면 여호와 하나님은 주시는 신이시다.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자이심이라”(행17:25) 여호와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분이 아니라 주시는 분이신 이유를 행17:24에서 설명한다.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유를 지으신 신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스스로 생명을 가지신 창조주 하나님이신 여호와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에 대해서 그 사랑과 생명을 주셔야만 모든 피조물들이 존재할 수 있다. 모든 피조물들은 창조주 하나님의 사랑과 생명을 받아야만 사는 존재들이므로 주는 존재가 아니라 받아야만 하는 존재들이다. 여호와 하나님은 주시는 분이시고 우리들은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받아야만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을 확실히 믿고 받아드려야만 우리의 존재가 하나님 안에서 확실해 진다.

다른 이방신들은 우리의 행위에 따라 길흉화복을 준다고 믿지만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의 행위에 따라 달리 행하시는 분이 아니라 언제나 사랑과 생명으로만 주시는 분이시다. (눅6:35)

다른 이방신들은 섬김을 받고자 하는 신이지만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를 섬기시는 신이시다.(요13: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는 예수님, 눅12:35-37 -우리의 수종드시는 하나님, 시23편 -양의 필요를 알아서 인도하심으로 채우시는 하나님 등등..마20:26-28)

다른 이방신들은 사람에게 모든 책임을 돌리지만 여호와 하나님은 사람들의 모든 선택에 대한 책임을 우리를 만드신 하나님 자신이 지신다. (사53:6; 롬5:8)

여호와 하나님과 같은 품성을 가지신 신이 이 세상에 없다. 이 세상에 절대적 사랑의 품성을 가지신 여호와 하나님의 품성을 볼 때에 드디어 마음으로부터 감사와 찬양과 영광의 예배를 하고 싶어진다.(빌2:5-11)


넷째 날(수) 너희 신이로다
  

여호와 하나님의 품성을 확신하지 못하면 우리의 품성대로 이해하게 되고 그렇게 되면 하나님이 아닌 우상에 빠지게 된다. 우리의 본성이 이방신 혹은 우상의 품성과 일치되기 때문이다. 우리의 본성은 상대적 개념의 사랑이다.

그리고 눈에 보이는 것만 보는 한계를 가진 존재들이므로 보이지 않는 여호와 하나님을 놓치게 되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이는 형상으로 바꾸어야 안심하게 된다.

시내산 아래에서의 우상숭배는 위의 두 가지 요소가 작용한 결과물이다.

오늘날 우리들도 위의 두 가지 요소를 잃어버리게 되면 하나님을 형상화한 다른 우상들을 만들게 된다.

우리의 연약함을 알기에 더욱 여호와 하나님께 집중하는 신앙이 필요하다. 우리의 한계를 알게 될 때만 나의 하나님을 보게 된다.(사40:6-9)


다섯째 날(목) 주의 영광을 보이소서
  

처음 미디안 광야에서 하나님을 만났을 때 하나님의 품성을 오해하여 하나님을 두려워했던 모세는 출애굽의 과정과 시내산까지의 여정을 통해 드러내신 하나님의 품성을 봄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서서히 확신하기에 이르렀다.  

시내산 밑에서의 우상숭배로 인해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의 선택을 그대로 인정하려고 할 때에 모세는 여호와 하나님의 품성으로만 할 수 있는 탄원을 하나님께 한다.(출32:31-32 -백성들의 잘못을 자신이 자신의 영생까지도 포기하면서까지 책임지고 싶어 하는 모습은 모세가 하나님의 품성을 드디어 확신하였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모세는 지난날의 미디안에서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상태로 무서워서 두려워하는 두려움이 아닌 하나님의 품성으로 인한 두려우리만큼 놀랄만한 경외감으로 담대히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 달라고 요청한다.

그런데 모세가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 달라고 했을 때 여호와 하나님은 하나님의 선한 형상, 여호와의 이름, 품성을 보여준다.(출33:18-19)

하나님의 영광과 동의어는 형상, 이름, 품성이다.

하나님의 영광 즉 품성을 가장 잘 볼 수 있는 방법은 “반석 틈”(출33:22)에서 보는 방법이다. 반석 틈은 반석 되시는 예수님의 옆구리 틈이다.

아담이 하나님을 떠나는 선택의 결과로 인한 사망을 해결하기 위해서 아담의 아버지 이신 여호와께서 아들의 위치 속에 예수의 이름으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고 창으로 옆구리를 찔림 받아 죽음이 확실함을 보여주셨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을 볼 때에 창조주 하나님 여호와의 책임지시는 사랑인 여호와의 품성을 가장 잘 볼 수 있다. 예수님의 책임지시는 사랑 속에서 창조주 하나님의 사랑을 보게 된다.

예수님의 십자가에 보여 진 사랑을 통해 생명이 누구에게로부터 오며, 주시고자 하시는 사랑과 생명을 예배를 통해서 받아야만 산다는 진리를 가르쳐 준다.

예배는 사랑과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을 만나는 시간이다.

예배는 내가 하나님께 뭔가를 드려야 만족하는 시간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주시는 분임을 깨닫고 하나님의 주시고자 하시는 사랑과 생명을 받는 시간이다.

예배는 하나님의 사랑의 품성을 확신하며 그 사랑을 받아드리는 시간이다.

예배를 통해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기에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싶어지고 하나님께 내 자신을 내어 맡기는 시간이 된다.


예배 일(금) 더 깊은 연구를 위해  

“하나님께 대한 진정한 경외심은 그분의 무한하신 위대하심을 알고 그분의 임재를 깨달을 때에 고취된다. 모든 사람은 보이지 않는 분에 대한 이 같은 느낌으로 마음속에 깊은 감명을 받아야 한다.”

개인 블로그에도 있습니다.

http://blog.naver.com/01hyu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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