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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과 속죄와 하나님의 주도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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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폴쵸 작성일08-10-17 09:15 조회4,48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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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과 속죄와 하나님의 주도권
10월 25일 안식일 (일몰: 오후 5시 42분)

도입)
그리스도의 구원사역의 핵심은 속죄(贖罪)이다. 이 속죄의 핵심은 십자가 사건이다. 이러한 십자가의 속죄에 대한 연구가 초대교회 시대부터 계속되고 있는데, 그것이 다양하고 어렵고 중요하다. 속죄는 하나님이 거룩하시고 의롭기 때문에 필요하다. 하나님께서는 거룩한 율법을 짓밟고 더럽히는 것을 간과하실 수 없다. 속죄는 하나님의 이 거룩성과 의 때문에 필요하였다(롬 3:25,26). 구속(救贖)이란, 값을 치름으로써 노예에서 해방시키는 것을 뜻한다. 성경에서 구속이란, 우리를 죄의 속박에서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마련하신 대비책을 의미한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는 죄의 용서(容恕)뿐 아니라 구속(救贖)과 하나님의 가족으로의 입양(入養)을 가능하게 하였다(갈 4:4~6, 엡 1:7~8). 그리스도가 없이는 이 중 어느 것도 가능할 수 없었다. 죄의 용서는 우리가 결코 그 값을 매기거나 지불할 수 없는 것이지만, 우리에게 값없이 제공되었다. 그러나 하나님 편에서는 이 용서를 위해 예수님의 보혈이라는 엄청난 대가가 지불되어야만 했다. 죄는 그 속성상 죽음을 요구하는데, 죄인이 죽지 않으려면 대속적인 죽음이 필요하였다. 구약의 성소제도에서 하나님은 흘려진 동물의 피에 근거하여 용서를 베푸셨다. 모든 희생제도는 “하나님의 어린양”이신 그리스도께서 세상 죄를 지고 가실 것을 예표하였다(요 1:29). 예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우리 죄의 형벌을 갚으셨다. 그분의 흘리신 피는 죄의 용서를 가능하게 하였다(롬 5:8~9, 엡 2:13, 골 1:20). 우리의 구속과 양자됨은, 우리에게 넘치게 부어진 “하나님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엡 1:7~8), 십자가에 의해 가능하게 되었다.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풍성’이란 단어를 6번 사용하였다(1:7, 18, 2:4, 7, 3:8, 16). 우리는 가난하고 여러 면에서 궁핍하지만,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넘치도록 부유하게 된다. 우리는 죄책감에서 자유롭게 된다. 어떤 사람이 부유한 실업가에게 얼마나 더 가지면 만족스럽겠느냐고 물었다. 그 억만장자는 “항상 조금만 더 있으면 좋겠소.”라고 대답했다. 만약 그리스도인에게 묻는다면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빌 4:19)고 대답할 것이다.

기억절: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셨으니 곧 그 기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엡 1:9-10)

연구범위: 롬 3:19-22, 5:6-8, 5:20-21, 엡 1:4, 골 1:26-27, 딤후 1:8-9, 딛 1:2.

중심 사상: 인간의 타락을 예상하신 하나님께서는 죄가 생겨나기 오래 전에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계획을 세워놓으셨다.

안식일 오후
인간에게는 선택할 자유가 주어졌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지구상의 다른 어떤 피조물에게도 이런 능력은 주어지지 않았다. 하나님께서 일단 이 자유를 주신 후에는 그것은 그들의 것이 되며, 그분의 본성이 바뀌지 않는 한 그 자유는 제거될 수 없었다. 그들은 사랑과 감사와 신실한 순종으로 그분을 섬김으로써 이 자유를 사용할 수도 있었고, 이 생명의 선물을 거절하고 여호와께 불순종함으로써 이 자유를 오용할 수도 있었다. (만약 인간이 불순종을 선택할 수 없었다면 그들은 진정으로 자유롭다고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무서운 불순종의 가능성을 내다보시고 그것을 위한 대비책을 세우셨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창조되기 오래 전에, 죄와 악이 실제로 생겨나기 전에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생애를 중심으로 세워진 구원의 계획을 생각하셨던 것이다.

일요일(10월 19일)
하나님의 사랑의 신비(롬 5:6-8)

도입)
하나님도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설명하려는 것은 공중에다 누각을 짓는 것과 비슷할 때가 있다. 하나님은 너무 크고, 너무 멀고,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우리는 너무 작고 연약하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가 하나님을 이해할 수 있는 차원으로 이끌어 온다. 하나님의 사랑이 하나님의 실존을 구체화한다. 우리는 하나님을 이해할 수는 없어도 하나님의 사랑은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이 기회가 되어서 하나님의 사랑을 통하여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되는 것이다. 요한1서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라고 말씀하고 있다. God is Love, 다른 방법이 아니라 사랑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 수 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두려움의 차원에서 이해하려고 한다. 그런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두려운 분이시다. 또 어떤 사람은 철학적이고 윤리적인 관점에서 하나님을 이해하려고 하는데 그런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이론이다. 그러나 복음은 하나님을 사랑의 관점에서 우리에게 계시한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니라’ 이것이 우리에게 복음이다. 복음은 기쁜 소식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말은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뜻이다. 사도바울은 하나님의 사랑을 구체화했다. 엡 4:19절에서 하나님 사랑의 규격을 말하는데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장광고심(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 하나님의 사랑을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의아한 구절이다. 안개에 규격이 있는가? 공기의 규격을 말할 수 있는가? 그런데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 또한 어떻게 그 규격을 어떻게 말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구체적으로 말하는 것이다.

1.로마서 5:6-8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우리에게 구원을 가져다주신 동기는 무엇이었습니까?
답:
하나님께는 인류를 구원할 의무가 없으셨다. 그것은 강요된 일도 아니었다. 인류가 타락의 상태에 빠진 것은 인간 스스로 자초한 일이었다. “하나님이 사람을 정직하게 지으셨으나 사람은 많은 꾀를 낸 것이니라.”(전 7:29)
만약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실 의무가 있으셨다면, 그것은 우리에게 구원받을 자격이 있다는 의미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우리는 구원받을 자격이 없었으나 하나님께서 기꺼이 우리에게 구원을 주셨다. 이 사실은 우리에게 주어진 구원을 한층 더 값진 것이 되게 한다. 왜냐하면 그분께서 우리를 위해 행하신 일은 어떤 의무감에 의해 된 것이 아니라 사랑의 선택으로 된 일이기 때문이다. 창조주이신 그분께서는 피조물인 우리를 구원할 의무가 없으셨다.
2. 로마서 3:19-22에서 바울은 우리가 어떻게 구원을 얻는다고 말하고 있습니까? 율법은 죄가 일으킨 문제를 해결하는 데 어떤 역할을 합니까?
답:
인간은 죄를 지었기 때문에 더 이상 율법에 순종함을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 불가능해졌다(참조 롬 8:3, 갈 3:21). 율법은 더 이상 우리를 살게 하지 못하였다. 하나님께서는 관계 회복을 위하여 친히 주도권을 잡으셨으며,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통하여 당신의 의(義)를 나타내셨다. 이 의는 율법의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 말미암아 신자들에게 이르러 온다. 만약 구원이 순종을 통해 우리가 획득할 수 있는 그 어떤 것이라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실 의무를 지셔야 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사역을 통해서만 인류가 용서받고 당신과의 영원한 교제를 회복하도록 지정하셨다.

교훈: 하나님께서는 무한한 사랑으로 타락한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독생자 예수님을 내어 주셨다. 우리는 믿음으로 그 사랑에 반응하기만 하면 된다.

부가적용)
하나님의 사랑은 역사적인 사건으로 확증되었다. 어린 아이들에게 성경을 가르칠 때 주로 사용하는 예화가 있다. 누가 예수님에게 ‘예수님, 나를 얼마나 사랑하세요?’ 라고 물으면 ‘이만~큼 사랑한단다.’ 하고 말씀하시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다는 얘기이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다. 이것은 전설도, 어떤 교훈도, 비유도 아니다. 예수님은 이천년 전에 오셔서 마리아의 몸에서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사흘 만에 살아나셨다. 이것은 역사적인 사건이요, 이 사건을 통해 하나님은 당신의 사랑을 우리에게 확증하신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 ’ 대단한 말씀이다. 우리는 사랑이 어디 있느냐고 묻지만 성경은 말씀하신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요일 4:10) 이것이 역사적인 사건으로 확증된 하나님의 사랑이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신비한 사건이다. 영원과 순간이 만나는 사건이다. 무한함과 유한함이 만나는 사건이다. 영적인 것과 육적인 것이 서로 터치하는 순간이다. 우리는 영적인 것은 영적인 것이고 육적인 것은 육적인 것이라 둘이 공존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성령은 교회에서만 역사하시고 술집에서 역사하실 것을 기대하지 않는다. 어느 목사님이 신학교에 가기 전에 직장생활을 했는데 어느 날 아가씨들이 나오는 회식자리에 갔단다. 그 자리에서 그 목사님이 그 아가씨에게 교회에 나가느냐고 물었더니 그 자리에서 울더란다. 성령은 바람과 같아서 막을 수가 없다. 죄가 있는 곳에 성령의 바람이 들어온다. 사람이 실족하고 떠나간 곳에 성령의 바람이 역사한다. 성령을 막을 수는 없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사랑을 막을 수 없다. 하나님의 사랑은 신비한 것이다. 우리 인생의 가장 큰 밑천이다. 다른 것은 떠나갈지라도 하나님의 사랑은 떠나가지 않는다. 우리가 세상 떠나는 날, 하나님은 그 순간에도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천국으로 인도하실 것이다. 이런 하나님께 우리가 반응하고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오면 되는 것이다.

월요일(10월 20일)
하나님의 은혜의 신비(엡 1:7)

도입)
유명한 성자 성 프란체스코가 제자로부터 이런 질문을 받았다. “선생님은 자신을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성자라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그러자 성 프란체스코는 이렇게 대답했다. “내가 무슨 성자야. 나야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악한 사람이지. 생각해 보게나.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이 망극한 은혜를 이 세상의 저 도둑들이나 깡패나 살인강도에게 주었다면 그들은 나보다 훨씬 훌륭한 사람, 하나님께 더 많은 영광을 돌리는 성자가 되었을 것이네. 그러니 하나님께서 내게 은혜를 베풀어 주시지 않았다면 내가 이 세상에서 가장 악한 자가 아니겠는가?” 그렇다. 오늘도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이다. 만일 하나님의 은혜가 내게 임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이 세상에서 가장 추악한 자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엇보다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해야 하며 또한 내게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에 항상 감사하며 살아야 한다. 은혜란 국어사전에 보면 ‘베풀어주는 혜택’‘고마움’‘신세’라고 풀이하고 있다. 세상 사람들에게는 공의롭지 못한 사적인 욕망과 이기심을 충족시켜 주는 행위를 일컬을 수도 있다. 가령 남의 것을 빼앗아 그것으로 이웃에게 혜택을 베풀거나 권력을 이용하여 도의와 질서를 무시하고 소위 특혜를 베푸는 행위를 받는 자의 입장에서는 ‘고마움’이요 ‘신세’이므로 은혜가 된다. 하나님의 은혜는 물질적으로 풍요한 삶이나 육신적으로 편안하고 만족한 삶을 위한 교인들의 교제(Give and Take)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일방적인 사랑으로 나눠주고 용서하고 대접하고 희생하고 섬기고 위로하고 권면하고 선을 좇는 행위이며 아울러 자신의 불의와 불법을 다스릴 수 있는 능력이다. 다시 말하면 범한 죄에 합당한 징계를 받는 것 곧 회개의 열매를 맺는 것이다.(마 3:8, 행 26:20)

죄가 세상에 들어왔을 때, 타락하지 않은 세계의 거민들과 우주의 천사들은 하나님께서 이 반역한 인류를 위해 행하시려는 일에 대해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천사들과 타락하지 않은 존재들에게는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들은 과거에 결코 보지 못했던 일을 보게 된 것이다. 그들은 아담과 하와가 타락한 후에 하나님께서 나타내 보이신 사랑과 능력의 일면을 보았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은혜'의 능력으로써 이 지구상의 죄를 소멸시키실 것이었다. 그분께서는 이 죄 많고 반역하는 사람들에 대하여 친절과 자비로 다가가셨다. 예수께서는 아버지에 관하여, “그는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로우시니라”(눅 6:35)고 증언하셨다.

1. 바울이 죄의 현상을 하나님의 은혜의 계시와 대조시킨 것에서 어떤 중요한 의미를 발견할 수 있습니까?(롬 5:20-21)
답:
성경에서 은혜는 하나님의 사랑의 한 면으로 나타나는데, 그것은 특별한 방법으로 죄인들에게 주어졌다. 그것은 하나님의 속성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하나님은 언제나 죄인들을 당신과의 충만한 관계 속으로 회복시키고자 하신다. 은혜는 우리에게 주어진 선물이라고 성경은 말한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속죄의 사역임을 가리킨다. 그것은 우리에게 너무나도 과분한 구원의 역사이다. 하나님의 은혜는 또한 우리가 죄에 대해 변명할 수 없으며, 그래서 영원한 죽음에 처해지는 것이 마땅하다는 사실을 지적해 준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죽음 대신 영생의 소망과 약속이 주어졌다. 마침내 하나님의 이 놀라운 속성은 그리스도와 그분의 사역을 통해 온 우주에 드러났다. 우리가 “그의 은혜의 풍성함”(엡 1:7)을 발견하고 누릴 수 있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를 통해서 가능해진 것이다.

교훈: 하나님의 은혜는 그분의 놀라운 사랑의 한 면으로서, 아주 특별한 방법으로 죄인들에게 주어졌다. 그것은 다름 아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주어졌다.

부가적용)
하나님 자신이 바로 구원이시다. 이 하나님이 내안에 들어오시는 것을 은혜라고 하고 그것은 바로 그분 자신이 나라는 육신을 입은 자안에서 사시는 것이고 이것이 비밀이고 은혜이다. 하나님은 더 이상 하늘 보좌에만 계신분이 아니시다. 이 은혜가 내게 임할 때 그것을 구원이라고 본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 은혜를 자신이 인식하지 못하고 지낸다. 구원이 임했지만 여전히 생활 속에서 그분을 체험하고 만지고 그분을 살아내고 표현하지 못하고 산다. 여전히 그분은 은혜로 우리 안에 거처를 정하시고만 계신다. 그러나 그분은 은혜가 우리 안에 더 확대되시길 원하신다. 그 확대하는 하나님의 방법은 바로 우리를 더욱 공허하게 하고
우리 자신 안에 더 역사하여 더 우리 자신을 낮추고 비우게 하신다. 그 비워진 그릇에 그분자신을 분배하시는 것이 바로 구원이다. 이것은 객관적인 구원이 내게 체험되고 인식되고 반응하게 되는 방면으로서 주관적인 구원이 되는 것이다. 사람은 마음이 부유할 때...이미 그분은 우리를 하나님의 주권적인 손길을 움직여서 그분의 구원의 손길이 그곳에서 타락되고 흑암에 쌓인 그곳에서 우리를 구원하시려 내안에서 역사하고 있다. 내가 주님에게서 둔감해지고 무감각 해질 때 그분은 많은 환경과 고난을 통해서 세미한 음성으로 쉴 새 없이 내 마음의 문을 두드리신다. 그분은 모든 환경과 고난 속에서 우리자신을 비우게 하시고 그분의 이름을 부르게 하시고 그분을 바라보게 하시는 은혜이신 하나님 즉 그리스도이시다.

화요일(10월 21일)
영원한 계획(엡 1:4)

도입)
무궁화 위성이 발사될 때에 몇 번이나 발사계획이 연기되고, 수정된 끝에 발사가 되었었다. 또한 무궁화 위성 2호를 발사하려는 계획 또한 원래 계획대로 되지 못하고 연기되었었다. 몇 번씩 계획이 수정될 때마다 국민들은 불안하다. 많은 돈을 들여서 시도하는데 혹 실패하지 않을까 하는 염려가 생긴다. 사람들이 세운 계획은 언제든지 수정될 수 있다. 주위의 여건에 따라 바뀔 수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이 세우신 계획은 변하지 않는다. 즉흥적으로 어떤 것을 계획하지도 않는다. 우리 하나님은 정확하신 분이시다. 그러기에 그 분이 창세전에 인류를 구원하기로 작정하신 것도 일점일획도 틀림이 없이 이루어졌다. "그는 창세전부터 미리 알리신바 된 자나 이 말세에 너희를 위하여 나타내신바 되었으니"(20절)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의 범죄를 아시고,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의 어린양을 통해 구원하실 계획을 이미 세워두셨다. 그리고 때가 차매 그 분을 이 땅에 보내시어 십자가에서 자신의 몸을 바치게 하셨다. 그 분은 창세전부터 미리 알리신바 된 분이시며 이 말세에 우리를 위하여 나타내신바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타락한 인류를 구원할 책임이 없으셨다. 하지만 그분께서는 그 일을 자원하셨다. 이 결정은 당신의 아들의 생명을 내어주어야 할 만큼 엄청나게 비싼 대가를 치루는 일이었으나, 그분께서는 당신의 아들의 희생에 관해 망설이시면서 시간을 낭비하지 않으셨다.

1. 우리를 구원하기 위한 계획의 수립에 관하여 다음 성경절들은 무엇을 말해 줍니까?(엡 1:4, 골 1:26-27, 딤후 1:8-9, 딛 1:2)
답:
신약은 하나님의 비밀에 관한 몇 가지 사실을 드러내준다.
첫째, 이 비밀은 “창세 전”(엡 1:4)에 세워진 것이었다. 즉, 인간이 타락하여 죄에 빠지기 오래 전에 하나님께서 그 문제를 다루실 방법을 계획해 두셨다는 것을 의미한다.
둘째, 하나님의 이 비밀은 “만세와 만대로부터 옴으로 감취었던 것”이다(골 1:26). 그것은 미리 계획되었을 뿐 아니라 어느 특정한 시점에 발효될 것이 정해져 있었다. 그리하여 그 비밀은 오랜 세월 동안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었던 것이다.
셋째, 그 비밀은 특별히 그리스도와 동일시되었다(골 1:27). 이것은 죄 지은 인류를 위한 그리스도의 인성과 공생애와 죽음, 그리고 부활과 중보의 신비를 가리키는 것이었다. 그것은 근본적으로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기쁜 소식이요, 그리스도인의 복음인 것이다.(엡 6:19)
넷째, 이 비밀은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시는(엡 1:10) 하나님의 목적이었다. 하나님께서는 그 계획을 통해 죄로 인해 파괴된 우주의 조화를 그리스도를 통하여 회복시키고자 하셨다. 이 계획은 교회 안에서의 이방인과 유대인의 연합을 통해 성공이 이미 예견되었다(엡 3:6).
다섯째, 세상이 창조되기 전에 하나님에 의해 은밀히 계획된 그 비밀은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역사 속으로 오심으로써 이제 알려진바 되었다.

교훈: 하나님께서는 영원 전부터 타락한 인류의 구원을 위하여 한 영원한 계획을 세우셨으며, 마침내 그리스도의 생애와 봉사를 통하여 성취하셨다.

부가적용)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로 미리 택정하셨다는 개념을 오해하는데, 이는 그 표현 속에 어떤 이들은 잃어버린바 되도록 미리 정해 놓으셨다는 의미가 넌지시 배어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성경적인 가르침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영원한 목적을 따라, 모든 사람이 구원 얻게 하고자 미리 구원의 계획을 마련하셨다(딤전 2:6, 벧후 3:9). 모든 인류를 포함하는 구원의 계획 자체는 세상이 시작되기 이전에 결정되었지만, 그 계획에 대해 우리 개인들이 어떤 반응을 할지는 미리 결정되지 않았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영원한 운명을 아신다는 것과, 그분께서 그 운명을 예정하셨다는 말은 서로 다르다. 구원은 우리가 창조되기도 전에 우리를 위해 시행될 계획, 곧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행하실 일 때문에 우리에게 제공되었다. 문제는, 우리가 어떻게 반응하느냐이다. 다만 구원과 영생은 예수님 안에서 모든 사람에게 제공된 하나님의 선물이지만(요 3:16, 엡 2:8~9), 오직 그분을 믿는 자들만이 구원을 얻을 것이다. 그 구원의 선물은 보편적인 의미에서 예정된 것이며, 개별적인 의미에서는 각자의 선택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하나님은 누구를 선택하고, 누구를 거절하지 않으신다. 다만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일을 받아들이는 자들은 처음부터 계획되었던 것을 단순히 성취하는 것일 뿐이다.

수요일(10월 22일)
십자가의 길(막 10:45)

도입)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길에 자신을 향해 우는 여인들을 향해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는 말씀이 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러 올라가는 도중에 슬피 우는 여자들에게 말씀 하신 것을 통해 생각해 볼 것은 그들은 왜 울었으며 주님은 왜 그들에게 나를 위하여 울지 말라고 하셨을까? 이 말씀을 통하여 우리가 느낄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은 예수님을 따라오며 울고 있는 여인들의 눈물의 의미를 알고 있었던 것 같다. 그 여인들에게는 여러 가지 마음에 심정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그렇게 울고 있을 때 예수님은 그 우는 여인들을 향하여 가슴을 찌르는 말들을 던지셨다.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왜 나를 위하여 우냐 왜 내가 당하는 이 고통만을 위하여 우느냐, 주님은 이렇게 그들의 울음을 지적하고 있다. 그렇다면 무엇을 위하여 울라고 하시는가? 주님은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고 말씀하고 있다. 이것은 예수님의 고통을 바라보면서 슬퍼하는 여인들에게 주님은 십자가를 져야 하는 고통의 이유가 무엇인지를 알라고 선언하는 것이다. 예수님을 위해 울고 있는 그 여인들의 죄와 허물이 아니라면 십자가를 지지 않아도 되는 것을 모르는 여인들을 향하여 그리고 백성들을 향하여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죄 때문에 죽을 수밖에 없는 너희를 위하여 울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지 않으시면 구원받을 수 없는 타락한 인간들에게 자기 발견을 이제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십자가의 길은 바로 우리에게 우리의 모습, 즉 자기를 발견하라고 요구하시는 선언인 것이다. 이것은 십자가를 져야 하는 그분에 대한 연민 때문에 울지 말고 바로 우리 때문에 죽어야 하는 주님의 구속의 뜻을 알고 오히려 우리 자신을 발견하도록 권고하시는 주님의 은혜를 깨달아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반역을 여러 가지 다른 방법으로 처리하실 수 있으셨다. 그분은 아담과 하와를 멸망시키시고 지구까지도 즉시 파괴하실 수 있으셨다. 혹은 그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죄로 인해 고통당하고 영원한 죽음에 이르도록 내버려두실 수도 있으셨다.
그러나 한편 그분께서는 그들의 반역을 묵과하지도 않으셨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이전과 똑같이 그들과의 관계를 계속 허용하지도 않으셨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멸망시키지 않으시고, 내버려두지도 않으셨으며, 그들의 반역을 묵인하지도 않으셨다면, 그분은 과연 무엇을 행하셨는가? 그분께서는 그리스도를 통한 영원한 구원의 계획을 실행시키셨다.

1. 다음 구절들은 구원의 계획에 대하여 무엇을 말해 줍니까?(막 10:45, 갈 1:4, 2:20, 엡 5:2, 딛 2:14)
답: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로 정하셨을 때, 그 일을 수행하기 위한 방법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사실상 오직 한 가지 방법 밖에 없었다. 오직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사역, 죽음과 부활, 그리고 중보를 통해서만 죄의 문제가 해결될 수 있었다. 우리를 영원한 죽음에서 건져낼 수만 있다면, 예수께서는 우리를 위해 당신 자신을 기꺼이 '주실' 것이었다.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죽음은 우리의 구원을 위해 불가피한 일이었다. 즉, 하늘로 가는 길은 오직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의 심장을 통과하는 길 뿐이었다.
예수께서 겟세마네에서 세상 죄를 짊어지시고 죽음의 고통을 경험하셨을 때(마 26:36-46), 그분께서는 십자가 외에 다른 구원의 길이 없는지 물으시는 기도를 아버지께 드리셨다. 침묵 가운데 응답이 왔다. 그리스도의 희생을 통한 길 외에는 인류를 구원할 다른 길이 없었다. 하나님의 아들께서는 이미 창세전에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시기로 자신을 구별하셨다.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주신바 되었다. 다른 길이 없었다.

교훈: 타락한 인간에게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심장을 통과하는 길 외에는 다른 구원의 길이 없다. 예수께서는 친히 우리를 위해 그 길이 되셨다.

부가적용)
예수님께서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우리가 죄의 죽음아래 있다는 것을 지적하고 그 사실을 알고 울라는 것이다. 성경은 모든 사람은 죄를 범하여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는 상태에 있다고 말씀한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말씀한다. 죄의 삯은 사망이며 우리는 죄로 말미암아 다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라고 말씀하신다. 이것은 우리가 십자가의 구원을 말하면서도 그 십자가가 나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것처럼 우리가 너무 의연하게 십자가를 바라보고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주님이 지신 그 십자가를 보면서도 구속의 역사를 알지 못하는 자들이 불쌍하다는 것을 가르쳐 주시기를 원하셨다. 그러므로 연민의 눈물을 흘리지 말고 십자가의 의미를 알고 구원의 눈물을 흘리라는 것이다. 예수님이 지시는 십자가의 고통 앞에서도 자신의 타락한 모습을 깨닫지 못하다면, 우리는 누가복음 23장28절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는 이 말씀을 다시 읽어야 한다. 왜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셔야 하는가, 왜 그분이 고통을 당하셔야 하는가? 이 중요한 질문을 울고 있는 여인들을 향하여 예수님은 던지신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는 이 말씀의 가장 중요한 핵심은 우리의 죄 때문에 울고 애통하라는 말씀이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향하여 울라고 하는 그 목적은 우리가 슬퍼하라는 것이 아니라 그 눈물을 흘릴 때 십자가의 용서와 치유를 누릴 수 있기 때문에 또한 우리로 하여금 울라고 하는 것이다. 예수님이 고통의 십자가를 대신 질 테니 죄와 교만과 깨어진 관계로 얼룩지어진 우리 자신을 위하여 울므로 용서되어지고 화평케 되어지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랑을 발견하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 외에는 구원의 다른 길이 없으며 십자가 외에는 우리에게 속죄와 구원의 다른 길이 없음을 알라고 말씀하고 계시다.

목요일(10월 23일)
하나님의 계획이 예수님 안에서 성취됨(눅 4:43)

도입)
우리는 무언가를 위하여 살아가는 존재들이다. 사람을 위하든 돈을 위하든 권세를 위하든 쾌락을 위하든 아니면 주님을 위하든 무언가를 위해 자신의 일생을 바치게 마련이다. 나름대로 삶의 목적과 방향을 정해놓고 그것을 향해서 열심히 살아간다는 말이다. 우리 예수님만큼 자신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이 분명한 분은 없으셨다. 예수님께서도 33년이라는 짧은 인생을 살다가 가셨지만 그의 인생이 그토록 위대할 수 있었던 것은 언제나 삶의 목적이 분명하였기 때문이다. 그는 한 번도 하나님께서 이 땅에 자기를 보내신 삶의 목적과 방향을 잊어 본적이 없었으며 그 일을 성취하기 위하여 자신의 일생을 초개같이 불살라 바치셨다. 예수님은 길을 걸어가시든지, 집에 머물러 계시든지, 전도여행을 하실 때든지, 일을 하실 때든지 그 어느 때라도 항상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목적을 기억하고 계셨다. 시간이 있을 때마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그분이 하신 말씀이 있다. 내가 이 일을 위하여 왔노라고 하시면서 자신이 이것 때문에 살고 이것 때문에 죽어야한다는 것을 누누이 강조하셨던 것이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죽으시고 다시 사신 것 또한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시는 예수님의 성취였음을 보여준다. 행 2:23에 “그가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어 준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어 못 박아 죽였으나” 베드로는, 예수님의 죽으심까지도 하나님께서 이미 정하신 뜻이며 그 사실을 예수님도 알고 계셨다고 말한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은 하나님이 태초에 예정하신 인류 구속 계획을 이루신 일이다. 베드로는 십자가의 죽음이 인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구속 섭리의 중심인 것을 선포한 것이다. 하나님의 계획이 예수님 안에서 성취된 사실을 증명하고 있다. 예수님의 모든 삶은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시는 성취였음을 보게 된다.

1. 예수께서 구원의 계획을 성취하시기 위해 '행하셔야만' 했던 일에 대해 다음 구절들은 무엇이라고 말합니까?(눅 4:43, 9:22, 17:25, 19:5, 22:37, 24:7, 24:26, 24:44)
답:
이 구절들에 공통적으로 나오는 하나의 동사는 헬라어로 데이(dei)인데, '~해야 한다'로 번역할 수 있다. 이 동사는 예수님의 생애의 매우 중요한 일면을 나타내 준다. 예수님의 모든 생애는 그분의 사명을 성취하기 위해 필요한 일들을 완수하는 것으로 이루어졌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요 9:4). 그분께서는 공생애 초기에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다른 동네에서도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전하여야 하리니 나는 이 일로 보내심을 입었노라”(눅 4:43)고 하셨다. 예수님의 생애의 모든 부분은 구원의 계획과 관련이 있었다. 그분께서 삭개오를 보시고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눅 19:5)고 말씀하신 것을 예로 들 수 있다.
그러나 예수님의 사역의 진정한 목표는 하나님의 왕국의 복음을 전파하는 것 그 이상이었다. 그분께서 걸어가셔야 할 어두운 길이 있었다. 그분은 예루살렘으로 가셔야만 했다. 그분은 가지 않기로 선택하실 수도 있으셨으나 그 길이 하나님의 계획을 위해 피할 수 없는 길임을 아셨다. 그래서 그분께서는 제자들에게,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할 것(마 16:21)을 말씀하셨다. 그분께서는 악한 세대에게 버린바 되시기 위해 그곳으로 가셔야만 했다(눅 17:25). 그분께서는 불법자의 동류로 여김을 받으셔야 했다(눅 22:37). 그리고 그분은 십자가에 높이 들리셔야만 했다(요 3:14, 12:34). 그러나 죽는 것만으로는 그분의 사명이 성취되기에 충분치 않았다. 그분께서는 부활하셔서 영광 가운데 영접 받으시고(행 17:3), 모든 예언들이 성취될 때까지 거기에 머무셔야만 했다(행 3:21). 그분은 삼위 하나님이 세우신 영원한 계획을 따르고 계셨던 것이다.

교훈: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빈틈없이 성취되었다. 예수님의 지상 생애는 매 걸음마다 구원의 계획을 성취하는 삶이었다.

부가적용)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이루시고자 하신 궁극적인 성취는 인간의 구원에 있다. 요3: 16절을 보면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해서 구원하기 위해서 예수를 보냈다”고 했다. 왜 예수를 세상에 보내셨는가? 구속을 위해서 예수님 자신을 제물로 바치기 위해서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애굽도 포기하시고 구스와 스바도 포기하시고 심지어는 예수까지 포기하셨다. 성경을 보면 관통해서 흐르는 사상이 하나 있는데 그것이 바로 이 구속사상이다. 성경 속에 들어있는 가장 깊은 이 구속사상의 중심에 바로 내가 있다. 성경에 보면 나 한사람을 구속하기 위해서 펼치시는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 그리고 예수의 오심과 오셔서 죽으심 그리고 부활하심 승천하심 등 이 모든 내용들이 모두 우리의 구원과 구속을 위한 목적 때문에 일어난 사건들이다. 나 한사람을 구속하시기 위해서 이 모든 일들이 일어났다는 말이다. 이것이 진정한 나의 값이고 구속의 주인공은 바로 나, 이 글을 읽는 독자 여러분들 각 개인이다. 이 성경을 읽는 모든 사람이 바로 성경의 구속의 경험이 나 한사람을 위한 것임이 개인적으로 체험이 되어야 한다. 성경은 한사람의 생명은 천하보다 귀하다고 했다. 이 사실을 모르면 자신을 우습게 취급할 수밖에 없다. 또한 자신을 업신여기게 된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 귀한 세월을 방탕하고 허비하고 무의미하게 사용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렇게 구속받은 존재인 나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사람인가” 하는 문제이다. 우리는 세상의 주인공처럼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이다. 하나님은 왜 우리를 그렇게 고가의 값을 치루고 구속하였는가? 그것은 이 세상을 살면서 하나님을 표현하고 증거 하는 주인공으로 살게 하시려고 하는 것이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성취해야 할 일이 있으셨던 것처럼 우리도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살아야한다. 그래서 우리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께서 택하신 주인공처럼 살아야 하는 책임이 주어졌다.

금요일(10월 24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만약 인류가 타락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결코 '은혜'라는 단어의 의미를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섬기고 모든 명령에 순종하는 죄 없는 천사들을 사랑하시지만 그들에게 은혜를 주시지는 않는다. 이 천사들은 은혜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한다. 그들은 결코 죄를 짓지 않았기 때문에 은혜가 필요하지도 않다. 은혜는 그것을 받을 자격이 없는 인간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우리가 그것을 구하지 않았을 때에 그것이 우리에게 베풀어졌다. 하나님께서는 이 은혜를 찾아 구하는 모든 이들에게 그것을 기꺼이 주신다. 이는 우리가 그것을 받을 만한 가치가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럴 만한 가치가 없기 때문이다."(엘렌 G. 화잇, 오늘의 나의 생애, 100)
"세상의 기초가 놓이기 전부터,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창조하기로 결정하셨다. 그분께서는 그들에게 당신의 뜻을 행할 능력을 주셨다. 전지하신 분께서는 인간의 반역과 그 모든 결과를 미리 내다보셨으나 당신의 영원한 목적의 이행을 멈추지 않으셨다."(엘렌 G. 화잇,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 129)
"예수께서는 당신의 죽음이 얼마나 두렵고 잔인한 것인지를 미리 아셨다. 사실상 그분은 십자가 위에서 수치스런 죽음을 당하실 의무가 없으셨다. 그러나 그분은 당신의 영혼을 속죄 제물로 드리셨다. 세상을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마음은 곧 그리스도의 마음이었다. 그분의 사랑은 아버지의 사랑과 하나가 되었으며 그 사랑 때문에 그렇게 하셨다."(엘렌 G. 화잇, 바이블 에코우, 1895년 11월 25일자)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1. 하나님께서는 어떤 일이 일어날지를 아시면서 왜 인간을 창조하셨을까요? 위의 구절은 이 질문에 대하여 어떤 도움을 줍니까?

2. 이번 주 교과를 통해 새롭게 깨달은 영적 교훈이나, 한 주일을 살아가면서 꼭 실천하고 싶은 내용은 무엇입니까?

요약: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일은 그분의 사랑의 본성에서 자발적으로 우러나온 것이었다. 하나님의 은혜로운 구원의 계획은 인간이 창조되기 전에 수립되었다. 그 계획은 예수님의 생애와 사역, 죽음과 부활을 통해 온전히 드러났으며 정확히 이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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