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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과 예배와 출애굽기: 하나님의 존재를 이해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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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조춘호 작성일11-07-01 08:26 조회3,738회 댓글2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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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제2과 예배와 출애굽기: 하나님의 존재를 이해함

7월 9일 안식일
일몰: 오후 7시 56분

도입)
해왕성이란 별은 우리들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이 별을 보려면 망원경을 통하여야 보인다. 바람을 볼 수는 없으나 나무가 흔들리고 빨래 감들이 펄럭이는 것으로 알 수 있다. 바이러스는 맨눈에는 보이지 않는다. 이 바이러스를 보려면 현미경을 통하여야 보인다. 우리의 마음은 어떠한가? 마음은 바람처럼 자취가 없다. 마음은 망원경으로도, 현미경으로도 보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이 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도연명은 結廬在人境 而無車馬喧 問君何能爾 心遠地自偏라고 하였다. 사람 사는 시중에 집을 짓고 살건마는 도무지 마차 소리, 말울음 소리가 들리지 않는도다. 그대에게 묻건대 어찌 그 소란스러움이 들리지 않을 수 있는가? 마음이 그런 소리에 관심이 없으면 자연히 들리지 않는 법이라고 하였다. 마당에서 여러 아이들이 소란스럽게 어울려 놀고 있다. 방 안에는 여러 엄마들이 모여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러던 중 한 아이가 미끄럼틀에서 떨어져 운다. 아이들 소란에 묻혀 그 아이의 울음소리는 잘 들리지 않았다. 그런데 그 소란한 중에도 한 엄마가 문득 일어나 달려 나온다. 다른 엄마는 못 들었어도 그 엄마는 들었다. 왜 인가? 그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으로 냄새도 없고, 색깔도 없고, 무게도 없으나 마음의 존재가 분명하다는 것을 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보여 달라 그러면 믿겠다!>고들 한다. 이런 경우 딱히 무어라고 대답 할 말이 없어 당황 할 경우가 있다. 이에 대한 변증으로 위에 말씀드린 이런 설명이 아주 호소력 있다고 생각한다. 즉, 육안으로 보이지 않는 해왕성을 보려한다면 망원경을 통하여야 볼 수 있다. 맨 눈으로 볼 수 없는 바이러스는 현미경을 통하여야 볼 수 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바람은 바람의 작용을 통하여야 볼 수 있다. 형체도 없고 냄새도 없고 빛깔도 없는 마음은 문득 자신의 속을 들여다보아야 찾을 수 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을 보는 데도 방법이 있다. 하나님은 믿음을 가지고 성경을 읽고 묵상하여야 보인다. 하나님은 믿음을 가지고 간절히 기도하여야 보인다. 훗날 누군가가 <하나님을 보여 달라!>하면 그 사람 눈에 성경이라는 망원경을 대어 주라. 그 사람 눈에 기도라는 현미경을 대어 주라. 그리하면 그 사람도 하나님을 보고 하나님께 부르짖을 것이다.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그에게 응답하시고 하나님의 크고 비밀한 일을 보이실 것이다.

기억절 :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너의 하나님 여호와로라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출 20:2~3).

결론: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까이 임하셔서 그들을 애굽으로부터 건지시고, 여러 구체적인 방법으로 백성들에게 자신을 드러내셨지만, 그분의 거룩함과 초월적인 속성을 우리가 인정하고 존중해 주기를 요구하십니다.

첫째 날(일) 7월 3일날(일)
거룩한 땅

도입)
신을 벗는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내가 아무것도 아님을 고백하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 내가 사랑과 존경을 드린다는 것을 나타내고 보여주는 것이다. 또 신을 벗는다는 것은 나의 죄의 모습을 벗는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다. 신이 무엇인가? 땅을 밟고 다니는 것이다. 그러다보니까 땅의 먼지가 묻고, 때가 묻고, 더러운 것이 묻는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사는 동안에 하나님 앞에 설 수 없을 정도로 더러운 죄가, 때가 묻어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거룩하지 않은 우리가 설 수 없다. 그래서 이 죄의 때 묻은 신을 벗어야 되는 것이다.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출 3:5).

광야에서 불타는 떨기나무를 목격하는 것은 모세에게 예사로운 일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전과 다른 것이 있었다면 불타는 떨기나무가 계속 타오를 뿐 소화(燒火)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 순간 모세는 자신이 초자연적인 “큰 광경”을 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출 3:1~15을 읽어 보라. 참된 예배의 토대가 되는 요소들은 무엇인가? 시작부터 우리는 거룩하신 하나님에 대하여, 그분께 나아갈 때 갖추어야 할 태도에 대하여 중요한 교훈을 배운다. 하나님은 그 땅이 거룩하기 때문에 모세에게 신을 벗으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은 은혜를 필요로 하는 죄인 모세와 자신을 분명하게 구분하셨다. 존경, 경외심 그리고 두려움은 참된 예배자가 갖추어야 할 태도이다.

교훈: 참된 예배의 기본 요소는 경외심, 하나님 중심 그리고 예수님의 죽음을 통해 성취된 구원과 구속이다.

부가적용)
하나님 앞에 신을 벗는다는 것은 이제 다 포기하고 주님께 다 맡깁니다. 주님만 바라보고 나갑니다. 라는 결단의 표시이다. 모세가 신었던 신발이 어떠한 신발이었는가? 그의 신발은 더러운 세상을 밟던 신발이었다. 그는 살인자로서 살인하던 그 신발을 신고 있었다. 광야를 헤매면서 추위와 고독, 실패와 상처로 얼룩진 절망의 신을 신고 있었다. 그는 사명을 저버리고 광야에서 숨어 지내는 도망자의 신을 신고 있었다. 그는 열등의식과 또 한편에 교만의 신을 신고 있었던 것이다. 그 신발을 가지고는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가 없는 것이다. 그 신발을 벗어야 했다. 이제 모세가 더 이상 광야생활의 시대를 이제는 청산하고, 도피의 시대를 청산하고, 방황의 시대를 청산하고, 사명의 시대로 걸어 나가야 되는데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과감하게 신발을 벗어야 되는 것이다. 옛 모습을 벗어버려야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회개이다.

우리는 십자가의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죄 때문에 마음이 괴로우면 십자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죄지은 형제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는 예수님이 그곳에 계시기에 용서받기 원하면 언제든지 십자가로 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어려운 일이 있을 때도 십자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엄청난 고통을 당하신 주님께서 우리를 누구보다 잘 이해하시기 때문에 용기 얻기 원하면 언제든지 십자가로 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십자가의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영감의 교훈 •
▶ 하나님의 사명에 집중함
“그는 자기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대변자가 되기에는 무능하다는 생각으로 압도당했다. 그러나 일단 그 임무를 받아들인 이상 그는 모든 일에 여호와를 전적으로 신뢰하고 전심으로 그 일에 착수하였다. 그의 사명의 중대함이 그로 하여금 그의 최대의 지력을 행사하게 만들었다”(부조와 선지자, 255).

둘째 날(월) 7월 4일
장자의 죽음(유월절 예배)

도입)
항상 그렇듯이 하나님의 심판은 구원과 함께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장자의 죽음과 함께 그 죽음을 피하는 유월절의 구원을 마련하셨다. 이스라엘은 동물의 희생을 통해 자발적으로 참여해야 하였다. 구원의 길을 마련하시지만 이스라엘의 자발적 참여도 구원의 필수적 요소였다. 이스라엘은 구원 받기를 소망해야 했고 직접 양을 잡아 그 피를 문설주에 바르는 믿음을 보이고 구원에 참여해야 하였다. 하나님은 죽음의 천사가 문설주에 피를 바른 이스라엘 집을 그냥 넘어간(유월) 이 구원의 역사를 기억하고 대대로 지키라고 하시며 유월절 절기를 만드셨다. 하나님이 구원하셨음을 이스라엘이 잊지 않기를 원하셨던 것이다. 이 유월절 절기에는 희생으로 쓴 양의 고기와 쓴 나물을 함께 먹어 애굽에서의 고통을 잊지 않기를 원하셨고 미처 숙성시키지 못한 무교병을 먹어 이스라엘이 급히 탈출하였음을 기억하라고 하셨다. 지금도 구원 받은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이 유월절 절기의 고기와 쓴나물과 무교병의 의미를 기억해야 한다. 여기서 경배의 문제가 나온다. 세상 많은 민족이 인사하는 방법은 약간씩 다르지만 머리를 숙여 인사하는 것은 최고의 인사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머리를 숙인다는 것은 나의 모든 것을 겸손히 낮춘다는 뜻이다. 하나님께도 머리 숙여 경배해야 한다. 고개 뻣뻣이 들고 있는 사람은 아직 하나님께 겸손을 보이지 않는 사람이다.

“너희는 이르기를 이는 여호와의 유월절 제사라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에게 재앙을 내리실 때에 애굽에 있는 이스라엘 자손의 집을 넘으사 우리의 집을 구원하셨느니라 하라 하매 백성이 머리 숙여 경배하니라”(출 12:27).

“경배하니라”고 번역된 히브리어는 “숙이다”, “엎드리다”라는 뜻의 단어에서 유래되었다. 이 말은 반복적인 의미를 더하기 위해 항상 동사 형태로 사용된다. 경외심, 두려움, 감사의 마음으로 고개를 들었다 숙였다를 반복하고 있는 모습이다. 정황을 고려한다면 이해하기 어려운 일도 아니다.
출 12:1~36, 첫 번째 유월절 밤 이야기를 읽어 보라. 이 이야기는 복음이 예배의 중심이 되어야함을 어떻게 나타내고 있는가?
문틀에 피를 칠하지 않았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장자를 잃게 됐을 것이다. 그들에게 있어서 장자는 특권과 책임을 의미했다. 후에 모든 이스라엘의 장자는 레위인들에 의하여 대속되었다(민 3:12). 이스라엘 민족 전체가 창조주와의 특별한 관계를 가리키는 여호와의 “장자”의 운명을 가지고 있었다(출 4:22). 신약에서는 예수께서 “맏아들”로 불리셨다(롬 8:29, 골 1:15, 18).
여기서는 비록 장자의 생명이 보존되었지만, 예수께서는 실제로 문틀에 칠한 피가 상징하는 죽음을 당하셔야 했다. 그러므로 유월절 의식은 예수님의 대속적 죽음을 예표하는 강력한 상징이 되었다. 예수께서 죽으심으로 “장자”로 부르심을 받은(히 12:23 참고)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은 마땅히 당할 죽음을 모면하게 되었다.

교훈: 유월절 예배는 장자의 죽음을 대속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상징하였다.

부가적용)
'유월절'이라 하면, 한자로 써서 '逾越(유월)'이라 하면 지난다할 때의 '지날 유(逾)'와 넘어간다 할 때의 '넘을 월(越)'자를 써서 유월절이라 하는데, 영어로 하면 'PASSOVER,' 즉 '넘어서 지나간다'는 뜻인데, 사실은 이 언어의 어원을 보면 히브리 사람들이 쓸 수 있는 그런 '넘어 간다'는 말 이외의 단어를 썼다.  그 단어는 "Pescha라는 말인데 애굽 사람들이 쓰던 단어에서 따온 것으로 본다.  그 단어의 뜻은 단순히 넘어서 지나간다는 말이 아니라 무엇을 보호하기 위해서 어미 닭이 날개를 펴듯이, 독수리가 그 큰 날개를 펴서 새끼를 보호하기 위해 날개를 펴듯이, 누구를 보호하기 위해서 날개를 펴서 덮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유월절 행사에서는 흠 없는 일 년 된 수양을 잡고 그 피를 문 인방에 뿌리고 칠해서 무교병, 누룩 없는 떡을 먹고 쓴 나물을 취하여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은혜를 기억하는데, 이스라엘 백성의 입장에서 보면 죽음의 사자가 지나가다 문 인방에 묻힌 그 유월절 어린양의 피를 보고 그 집은 들어가지 아니하고 지나가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마치 독수리가 자기의 새끼를 보호하기 위해서 날개를 펴 보호하는 것 같이, 하나님의 은혜의 날개를 넓게  높이 펴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해 내신 은혜를 생각하는 것이다. 이것이 유월절의 의미이다.  

우리는 큰 재앙이 임하기 직전에 구원을 얻었습니다. 멸망과 심판을 앞두고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 백성처럼 몇 번이고 고개를 숙이고 엎드려서 하나님께 경배드림이 마땅합니다. 그 은혜를 결코 잊지 않고 예배 때마다 어린양의 희생을 기억하며 그분께 감사과 찬송을 드림이 마땅합니다.

•영감의 교훈 •
▶ 표상과 실체
“죽임을 당한 어린양의 피가 이스라엘 백성의 집들을 보호한 것처럼 그리스도의 피는 그들의 영적 생명을 구원할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믿음으로 예수의 생명을 그들 자신의 것으로 삼을 때에만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을 얻을 수 있었다. 표상적 예식은 그것이 예배자들을 그들의 구주이신 그리스도께로 향하게 할 때에만 효력이 있었다”(시대의 소망, 82).

셋째 날(화) 7월 5일
다른 신이 없음

도입)
때때로 우리는 너무 알고 믿으려 하지 말고 무조건 믿으라는 말을 듣는다. 그러나 과연 알지 못하는 존재를 믿는다는 것이 가능한 일일까? 알지 못하는 존재를 믿는다는 명제는 논리적으로 불가능한 명제이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할 때에 자신이 믿는 하나님이 어떤 존재인지 알지 못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가진 존재이기만 하면 어떤 존재이든 상관없이 시키는 대로 따르겠다는 것이 되고 만다. 예수께서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는 사람들에게는 구원이 없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그래서 요17:3에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라고 말씀하고 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라는 진리를 증거한 수많은 구절들은 הוהי[야훼]와 함께하는 다른 신이 없다고 한결같이 증거하고 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하나님이라면 요한이 증거한 대로 바로 그 유일한 분이 사람이라는 장막을 입고 자기 땅 자기 백성에게 오신 전능한 하나님이 분명하다(요한복음 1:11, 14절 원문 참고). <나 הוהי[야훼]가 말하노라 너희는 나의 증인, 나의 종으로 택함을 입었나니 이는 너희로 나를 알고 믿으며 내가 그인 줄 깨닫게 하려 함이라 나의 전에 지음 받은 신이 없었느니라 나의 후에도 없으리라 나 곧 나는 הוהי[야훼]라 나 외에는 구원자가 없느니라 내가 고하였으며 구원하였으며 보였고 너희 중에 다른 신이 없었나니 그러므로 너희는 나의 증인이요 나는 하나님이니라 הוהי[야훼?]의 말이니라 과연 태초로부터 나는 그니 내 손에서 능히 건질 자가 없도다 내가 행하리니 누가 막으리요>(이사야 43:10-13)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출 20:3).

십계명은 이스라엘 백성이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면서 시작된다. 오직 유일하시고 참되신 하나님만이 그런 일을 행하실 수 있다. 애굽의 신들을 포함하여 그 외의 모든 신들은 거짓 신이며, 인간의 상상력이 만들어 낸 결과로써 단 한 사람도 구원할 수 없다. 이 신들에게서 나타나는 이기심, 채울 수 없는 욕구, 때로는 부도덕한 속성 등은 그것들의 기원이 인간이라는 사실을 말해 주고 있다. 사랑이 많고 자기희생적인 창조주 또는 구속주로서의 하나님과 얼마나 대조적인가? 그래서 수백 년간 조잡한 다신론적인 이방 문화에 젖어 있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과 언약의 관계에 들어가는 특별한 순간에 그들의 하나님이 유일한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필요가 있었다.

교훈: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에 들어가기 위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유일한 신임을 깨달을 필요가 있었다.

부가적용)
하나님께서 피, 개구리, 이, 파리, 악질, 독종, 우박, 메뚜기, 흑안, 장자의 죽음 등으로 재앙을 애굽에 내리셨는데, 이것은 모두 애굽 사람이 신으로 섬기는 것들이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애굽에 내리신 열 가지 재앙은 애굽 사람이 섬기는 모든 신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었다. ... 애굽 땅에 두루 다니며 사람과 짐승을 무론하고 애굽 나라 가운데 처음 난 것을 다 치고 애굽의 모든 신에게 벌을 내리리라 나는 여호와로라 (출12:12) '애굽'은 세상을 뜻한다. 즉 하나님께서 애굽에 열 가지 재앙을 내리신 것은 세상 사람이 섬기는 신들은 모두 헛된 것이며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이 유일한 신이라는 것을 보여 주신 것이었다. 어떤 신이 와서 시험과 이적과 기사와 전쟁과 강한 손과 편 팔과 크게 두려운 일로 한 민족을 다른 민족에게서 인도하여 낸 일이 있느냐 ... 이것을 네게 나타내심은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요 그 외에는 다른 신이 없음을 네게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신 4장 34~35절) 인류의 역사를 보더라도 한 민족이 다른 민족에게서 해방된 것은 대부분 그보다 강한 민족의 힘이나 영웅에 의한 것이었다. 어떤 신이 직접 개입하여 한 민족을 다른 민족에게서 이끌어 낸 일은 없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경우는 어떤가? 어떤 민족이나 어떤 영웅도 이스라엘을 위하여 애굽의 바로와 맞서 싸우지 않았다. 오직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열 가지 재앙으로 애굽을 제압하시고 그들을 바로의 손에서 구원하여 내셨는데, 이처럼 특별한 일을 통해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것은 "여호와 하나님이시요 그 외에는 다른 신이 없음을 네게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라고 말씀하고 있다. 세상 사람이 섬기는 모든 신은 헛된 것이며,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이 유일한 신이라는 것으로, 세상 만민으로 알게 하기 위하여 열 가지 재앙을 내리셨다.

하나님의 첫 번째 계명은 그분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고 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하나님보다 세상의 사물에 더 많은 애정과 관심을 기울임으로써 실제로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두고 있는 실정입니다. 우리가 섬기고 있는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이란 때로 우리가 추구하는 성공이 될 수도 있고, 우리가 소유하려는 재물이 될 수도 있고, 우리가 버리지 못하는 습관이나 활동이 될 수도 있고, 아니면 하나님처럼 여기고 숭배하는 사상이나 사람이 될 수도 있습니다.

•영감의 교훈 •
▶ 현대의 우상들
“주님을 기다리고 있노라고 공언하는 사람들 중에도 세상을 사랑하는 자들이 있다. 부와 명예에 대한 야망이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날이 세상에 거하는 모든 자들에게 덫과 같이 임하리라고 선언하셨을 때 이 부류에 속한 자들을 묘사하신 것이다. 이 세상이 그들의 집이다. 그들은 세상의 재물을 얻는 것을 그들의 사업으로 삼는다. 그들은 값진 주택들을 짓고 온갖 좋은 것들로 장식한다. 그들은 의복과 식욕의 탐닉에서 기쁨을 찾는다. 세상의 사물들이 그들의 우상이다”(교회증언 5권, 456).

넷째 날(수) 7월 6일
너희 신이로다

도입)
아론은 새로운 신을 요구하는 백성들의 기세가 폭력으로 연결될 기미가 보이자, 그들의 요구에 응하게 되었다. 유대인들의 전승에 의하면 아론의 동료이던 훌은 그때 백성들의 요구를 반대하다가 돌에 맞아 죽었다고 한다. 이에 아론이 금고리를 가져오라고 했고, 백성들은 이 같은 헌신을 합당하게 여기며 출애굽 시에 받아 나온 금고리들을 가지고 왔다. 하나님께서 애굽 사람들을 통해 이 같은 패물들을 주신 이유는 성막을 만드는 데 쓰게 하시기 위함인데, 백성들은 이를 오히려 우상숭배에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이 주신 재물을 헛되고 죄악된 일에 허비하는 우리의 모습을 생각하게 해준다. 한편, 아론은 그 금을 녹여 조각해 금송아지를 만들었다. 이것은 애굽의 영향이다. 애굽 사람들은 “힘”과 “생산”을 상징하는, 소 형상의 '아피스'나 '오리시스'같은 신들을 숭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백성들이 그것을 보고 기뻐하자 그들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다음날을 '여호와의 절일'이라고 선포했다. 죄를 책망하지 않으면 이처럼 죄에 말려들기 마련이다. 그러자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음날 일찍부터 금송아지 신에게 예물을 드리면서 먹고 마시고 뛰놀았다. 여기서 뛰놀았다는 것은 육체적인 환락을 찾는 난잡한 성행위를 의미한다. 얼마 전에 출애굽한 언약의 백성들이 이렇듯 속히 부끄러운 죄에 빠져들게 된 것이다.

그들은 “일어나서 뛰놀”았고, “부패하였”으며, 명령한 길에서 “속히 떠”났다(출32:6~8). 참된 예배의 특징인 두려움과 경외심을 찾아볼 수 없다. 그렇지 않은가?
분명 섞인 무리들(출애굽 시 이스라엘을 따라 나온 애굽인들 또는 이스라엘 백성과 결혼자 애굽인들)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영향을 미쳤을 것이고, 그들에게 익숙한 예배 형식을 아론에게 요구했을 것이다. 여호수아는 산 아래에서 들리는 잡음을 듣고, 진중에 다툼이 일어난 것 같다고 모세에게 보고하였다. 그러나 모세는 애굽의 궁전에서 살아본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그 잡음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분명 그 소리를 음탕한 연회, 춤, 시끄러운 음악, 노래, 환호와 우상숭배의 특징인 혼잡함으로 이해했을 것이다(출 32:17~22).
그들이 참하나님을 경배했을 때는 겸손하고 경외심에 가득하였다. 하지만 금송아지를 경배할 때는 짐승처럼 변했다. 그들은 “자기 영광을…소의 형상으로 바꾸었”다(시 106:20). 우리는 여기서 인간은 본성상 자신이 경배하는 대상 그 이상이 될 수 없다는 원리를 보게 된다.

교훈: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잊고 금송아지를 숭배할 때에 그들에게 우상숭배의 저급한 특성들이 나타났다.

부가적용)
이스라엘이 행한 행동을 하나님께서 보고 계셨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내 백성”이라고 말하지 않고, “네가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네 백성”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무지한 행동이 하나님을 반역한 행동임을 드러내고 있다. 그렇기에 그들은 구속의 백성이 아니라 부패한 백성이다. 그들은 하나님께 구속된 백성임에도 불구하고 그분의 명령을 속히 떠나 다른 신을 만들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런 백성을 향하여 목이 곧은 백성이라고 말씀하신다. 목이 곧은 백성은 구속의 은총에 감사할 줄 모르는 백성이다. 이런 백성에게는 하나님의 진노만이 남아 있었다.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구속의 은혜를 잊고 세속의 쾌락에 젖어 사는 사람들이 많다. “목이 곧은 백성”이 오늘을 사는 나와 현대 그리스도인들을 향한 말은 아닌가?

•영감의 교훈 •
▶ 우상숭배의 결과
“사람들은 하나님을 그들의 지식 밖에 두고 그들이 상상해서 만든 피조물들을 숭배하였다. 그리고 그 결과로 그들은 점점 더 타락하게 되었다. …바라봄으로 변화하는 것이 인간의 마음의 법칙이다. 사람은 진리와 순결과 거룩함에 대하여 자신이 가지고 있는 개념 이상으로 높아지지 않는다. 만일 마음이 보통 인간성의 수준 이상으로 높여지지 아니하고, 그것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무한하신 지혜와 사랑을 명상하도록 높여지지 않는다면, 사람은 계속적으로 점점 더 타락하게 될 것이다”(부조와 선지자, 91).

(목) 다섯째 날 7월 7일
주의 영광을 보이소서

도입)
하나님은 하나님을 강청하는 곳에 임재하시기를 기뻐하신다. 열정도 없고 갈망도 없는 곳에 임재하기를 원하시지 않으신다. 오늘날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잃어버린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그것은 갈망의 상실인 것이다. 하나님을 갈망하는 마음을 상실했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은 분이 아니다. 하나님이 없으면 살 수 없음을 인식하고 부르짖어야 한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가 하나님의 사랑을 입고, 하나님을 찾는 자가 하나님을 만날 것이기 때문이다(잠 8: 17). 갈망이 없는 곳에는 헌신도 없다. 헌신하는 마음이 없는 것이 오늘날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잃어버린 원인이기도 하다. 헌신할 마음이 없는 곳에 하나님은 임재하기를 기뻐하시지 않기 때문이다. 갈망과 헌신은 하나님의 보좌와 같다. 하나님이 임재하기를 기뻐하는 자리가 된다는 것이다. 갈망과 헌신이 없는 것은 아직도 우리가 죽지 않고 살아있기 때문이다. 자신을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주를 따르라고 하신 이유가 그 때문이다(마 16: 24). 자신이 죽지 않으면 십자가를 질 수 없고 주를 따를 수도 없다. 갈망도 헌신도 있을 수 없다는 이야기다.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지 않는 것은 아직도 자기를 신뢰하고 있다는 이야기와 같다.

“모세가 이르되 원하건대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출 33:18).

출 33:13을 주의 깊게 살펴보라. 모세는 하나님께 그분을 알기 원한다고 말하였다. 하나님께서 수많은 일을 행하셨지만, 모세는 여전히 그의 부족과 연약함, 속절없음을 느꼈기 때문에 하나님께 더욱 가까워지기를 원했다. 흥미롭게도 수세기 후에 예수께서는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라고 말씀하셨다(요 17:3). 모세가 어떤 일을 하도록 부르심을 받았었고, 어떤 도전에 직면해야 했었는지 보라. 모세가 하나님을 알 필요를 느끼는 것도 당연하지 않은가? 여기서 우리는 예배의 중요한 요소를 보게 된다. 예배는 하나님에 관한 것이어야 하며, 그분을 더 잘 알고, 그의 길을 구하는 우리의 겸손과 믿음과 굴복에 관한 것이어야 한다.

교훈: 모세는 하나님을 더욱 알기 원했고, 그분의 영광을 보기 원했다. 예배란 하나님을 알기 위한 것이며, 그분 앞에서 내 자신을 낮추는 것이다.

부가적용)
하나님의 영광의 필요성을 가장 잘 알았던 사람은 모세였다. 그는 이미 하나님을 여러 형태로 체험한 사람이었다. 불타는 가시덤불 속에서 부르시는 하나님을 체험하기도 했다(출 3: 1-12). 캄캄한 시내산으로 올라가 하나님과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십계명을 받아 내려오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 달라고 다시 강청하고 있다.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없이 살아간다고 하는 것은 얼마나 끔직한 것인가를 잘 알기 때문이다. 그가 미디안 광야에서 40년 동안 양을 칠 때 하나님의 영광을 체험했다는 기록이 없다. 이는 그가 하나님의 영광 없이 광야를 거쳐 왔다는 이야기가 된다. 다시 그 광야를 거쳐야 가야 한다는 것이 얼마나 삭막하고 어려운 것인가를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또 다른 측면에서 보자면 강대한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해방시킬 수 있었던 것도 하나님의 영광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것이라는 것을 체험적으로 알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애굽에 열 가지 재앙을 내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 시키실 때 그 영광을 그는 잊지 않았던 것이다. 모세는 하나님의 영광 없이 살 수 없다는 것을 잘 아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 달라고 강청한다.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 달라고 하는 것은 그분의 필요성을 강력히 구하는 것이다. 하나님 없이는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하나님이 가라고 지시하는 땅으로 인도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기도이기도 하다.

우리가 정말 하나님을 안다면 이렇게 무력하게 살지 않을 것입니다. 정말 그분을 알고 있다면 불안하지도 성급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것을 달라고 기도하기보다 주님을 더 잘 알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계획이 성공하기를 하나님께 빌기보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며 그분의 길이 무엇인지 물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상급이 바로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영감의 교훈 •
▶ 하나님과 접촉하라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라고 요청하라. 이 영광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품성이다. 이것이 그분께서 모세에게 선포하셨던 것이 살아 있는 믿음으로 영혼이 하나님께 매달리게 하라. 혀로 그분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라. 그대가 서로 사귈 때, 영원한 실재들에 대해 경건하게 명상하는 일에 마음을 쏟으라. 그렇게 함으로 그대는 영적인 마음가짐을 갖도록 서로 간에 돕게 될 것이다”(목사와 복음 교역자에게 보내는 권면, 499).

예비일(금) 7월 8일
예비일(금)
더 깊은 연구를 위해

독서 과제: 부조와 선지자, 303~314 “이스라엘에게 주신 율법”, 315~330 “시내에서의 우상숭배”, 331~342 “율법에 대한 사탄의 적의”, 시 105:26~45, 106:8~23.

“겸손과 존경이 하나님 앞에 나오는 모든 사람들의 태도를 특징지어야 한다. … 위대하시고 전능하시고 거룩하신 하나님께 그들과 동등한 사람이나 그보다 못한 사람에게 하듯이 함부로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지상의 통치자의 알현실(謁見室)에서도 감히 하지 못할 행동을 하나님의 집에서 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사람들은 스랍과 하늘의 천사들이 얼굴을 가리고 경배하는 분의 면전에 그들이 서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은 크게 존경을 받으셔야 한다”(부조와 선지자, 252).

“하나님께 대한 진정한 경외심은 그분의 무한하신 위대하심을 알고 그분의 임재를 깨달을 때에 고취된다. 모든 사람은 보이지 않는 분에 대한 이 같은 느낌으로 마음속에 깊은 감명을 받아야 한다. 기도하는 시간과 장소는 하나님께서 거기 계시기 때문에 거룩하다. …천사들도 그분의 이름을 말할 때에는 얼굴을 가리는데 하물며 타락하고 범죄한 우리가 여호와의 성호를 말할 때에 얼마나 경의를 표해야 하겠는가!”(선지자와 왕, 48~49).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➊하나님의 친밀하심(내재성)과 비교하여 그의 위대함이나 거룩함(초월성)과 같은 하나님의 속성들에 대하여 토의해 보십시오. 두 가지 요소가 우리의 예배에서 어떻게 조화와 균형을 이루어야 하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➋금송아지를 숭배했던 이스라엘의 비극적 이야기에서 배워야 할 교훈은 무엇입니까? 그대가 속한 사회에서 흔히 숭배되는 우상은 무엇입니까? 주님이 오시기를 오랫동안 기다리는 오늘날의 교회에 적용해 볼 때, 이 이야기가 주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댓글목록

알밤님의 댓글

알밤 작성일

언제나 감사드립니다.  좋은 자료를 올려주시는 노고에 하나님의 축복이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조춘호님의 댓글

조춘호 댓글의 댓글 작성일

댓글 감사합니다. 행복한 안식일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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