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과 창세기 속에 나타난 예배: 두 종류의 예배자(질문, 대답, 부가설명)07/02/11 > 교과토의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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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과 창세기 속에 나타난 예배: 두 종류의 예배자(질문, 대답, 부가설명)07/0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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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명호 작성일11-06-23 10:25 조회6,126회 댓글3건

본문

│교과 총론│

“만드신 이를 경배하라…”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인들에게 가장 잘 알려진 성경절은 아마도 요한계시록 14장 6, 7절의 말씀일 것이다. “또 보니 다른 천사가 공중에 날아가는데 땅에 거주하는 자들 곧 모든 민족과 종족과 방언과 백성에게 전할 영원한 복음을 가졌더라 그가 큰 음성으로 이르되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라 이는 그의 심판의 시간이 이르렀음이니 하늘과 땅과 바다와 물들의 근원을 만드신 이를 경배하라 하더라”(계 14:6~7). 우리는 이 말씀을 종말의 사건이라는 문맥 속에서 이해하고 있지만, 이 말씀은 이번 기 주제인 예배의 기본 개념을 형성하는 데도 도움을 준다. 우리는 이 말씀에서 예배하도록 부르심을 받고 있을 뿐 아니라 예배란 진정 무엇인지 알려 주는 핵심 주제들을 발견하게 된다.
먼저 사도 요한은 “영원한 복음”을 가지고 있는 천사를 보았다. 그 복음은 영원한 언약의 복음이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성을 입고 오셔서 세상 죄를 짊어진 대속자로서 죽으셨다는 좋은 소식이다. 그러므로 모든 예배는 우리를 위한 예수님의 죽음에 기초해야 한다. 예배는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사역에 대한 우리의 반응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그분의 대속적 사역은 십자가에서 뿐 아니라, 하늘 성소 봉사를 통해서도 이어지고 있다(히 8:1).
그 다음에 요한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라”고 말한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과 사랑하는 것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라는 말은 창조주와 구속주 앞에서 피조물과 구원받는 자가 두려움과 경외심을 가지고 서야 한다는 말이다. 예배를 드릴 때, 우리가 마치 친구나 동무처럼 하나님께 나아간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격하시킬 뿐 아니라, 우리를 스스로 합당치 않은 위치에 올려놓는 셈이 된다. 예배를 드릴 때에는 반드시 경외심과 두려운 마음에 젖어야 한다. 그러한 태도는 참된 예배에 꼭 필요한 겸손과 순복의 정신을 갖게 한다.
또 “그에게 영광을 돌리라”고 하였다.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결정적인 사실은 예배란 하나님에 관한 것이지 우리에 관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우리는 예배가 인간 중심적, 문화 중심적, 사람의 필요 중심적이 아니라, 하나님 중심적임을 분명히 해야 한다. 예배는 그분에 관한 것이며 그분께 영광을 돌리는 행위이어야 하지, 음악이나 문화나 예배 형식에 관한 것이 되면 안 된다.
그런데 우리는 왜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려야 하는가? 왜냐하면 “그가 심판하실 시간이 이르렀”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구속주만 되시는 게 아니다. 심판자도 되신다. 우리의 가장 깊고 어두운 비밀을 아시는 심판자요, 마음속 가장 깊은 곳까지 헤아리시는 심판자이다. 그러므로 예배를 드릴 때, 우리는 우리가 행한 것들에게 대하여 하나님께 맡기는 심령을 가져야 하며, 그분께 숨길 것이 아무것도 없음을 깨닫고 십자가로 나아가야 한다. 왜냐하면 십자가만이 이 심판에 임하는 우리의 유일한 소망이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창조주를 경배하라는 음성을 듣는다. 창조는 모든 예배의 기초가 된다. 왜냐하면 우리의 모든 믿음은 예외 없이 하나님께서 창조주라는 사실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우리는 창조주, 구속주 그리고 심판자로서의 하나님께 경배를 드린다. 창조와 구속과 심판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모든 참된 예배는 이러한 객관적이고 신학적인 진리에 뿌리를 내릴 필요가 있다.
요한계시록 14장 7절에서 안식일 계명을 떠올리는 어휘들을 본다는 것은 또 얼마나 흥미로운가? 안식일은 하나님께 드리는 진정한 예배에서 떼려야 뗄 수 없는 날이지 않은가?
이번 기 우리가 예배에 대하여 연구할 때, 위의 주제들이 계속 반복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참된 예배가 무엇인지 알려 주는 핵심 주제들이기 때문이다.



7월 2일 안식일
일몰: 오후 7시 57분

기억절 :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이에 두려워하여 가로되 두렵도다 이곳이여 다른 것이 아니라 이는 하나님의 전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다”(창 28:16~17).

연구 범위: 창 3:1~13, 4:1~4, 6:1~8, 12:1~8, 22:1~18, 28:10~22, 딛 1:2.

우리는 인간으로서 무엇인가 중요한 대상을 경배할 필요가 있다. 물론 예배는 매우 중요한 의미들로 가득 차 있다. 그러나 예배의 대상이 누구인지는 무엇보다 중요한 문제이다. 특히 두 부류의 예배자들이 등장하는 마지막 때에는 더욱 그렇다. 한 부류는 창조주를 예배할 것이고, 다른 한 부류는 짐승과 그 우상에게 예배할 것이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이런 차이의 발단이 이미 오래전부터 존재했던 것으로 보인다.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에서 이미 두 종류의 예배가 등장한다. 한 명은 마땅히 경배를 받아야 할 참 하나님께 예배하는 반면 다른 한 명은 거짓 종류의 예배에 참여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한 예배는 받으시고, 다른 예배는 받지 않으신다. 왜냐하면 한 예배는 믿음으로 얻는 구원에 기초해 있는 반면 그 외의 모든 거짓 예배는 행위에 기초해 있기 때문이다. 이는 성경에서 계속 반복되어 등장하는 주제이다.
오직 하나님과 그분의 능력과 영광과 은혜에 초점을 맞추는 예배가 있는가 하면, 인간성과 자아에 초점을 맞추는 예배도 있다.

※ 핵심 요지
➊깨닫기 : 가인과 아벨로 대표되는 두 종류의 예배자들을 비교한다.
➋느끼기 : 하나님의 은혜를 소중히 여기는 예배자와 자신의 행위에 초점을 맞추는 예배자의 차이점을 본다.
➌행하기 :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아들을 희생시키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경배를 드린다.

결론: 창세기에 등장하는 참예배자들의 제의 행위는 우리를 죄로부터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께
서 베풀어 주신 은혜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습니다.

첫째 날(일) 6월 26일

에덴동산에서의 예배

“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창 2:3).

질문: 창 3:1~13에 나오는 타락의 이야기를 읽어 보라. 아담과 창조주 사이의 관계에 어떤 변화가 일어났는가?(8~10절) 하나님의 질문에 아담은 어떻게 대답하였는가?(11~13절) 그의 대답은 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음을 드러내고 있는가?
[창3:1~13] 여호와 하나님의 지으신 들짐승 중에 뱀이 가장 간교하더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가로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더러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2 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실과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3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4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5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6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실과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한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7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 자기들의 몸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하였더라 8 그들이 날이 서늘할 때에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아담과 그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9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10 가로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11 가라사대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고하였느냐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실과를 네가 먹었느냐 12 아담이 가로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하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실과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13 여호와 하나님이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하였느냐 여자가 가로되 뱀이 나를 꾀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12 아담이 가로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하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실과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13 여호와 하나님이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하였느냐 여자가 가로되 뱀이 나를 꾀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답: 아담이 창조주 만나기를 피하여 숨는 일이 일어났다. 하나님의 부름에 아담은 벗었기 때문에 두려워 숨었다고 대답하였다. 하나님이 먹지말라고 한 나무 실과를 먹은 것을 시인하였으나 핑계를 대었다. 이런 대답은 아담이 영원한 생명을 잃어버렸음을 나타낸다.

<부가설명> 하나님은 아담을 창조하셨을 때 그에게 빛의 옷을 입히셨다.(시8:5, 부조45p.) 그 옷은 하나님이 입고 계시는 옷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된다.(시102:2) 그랬기 때문에 인간의 옷을 입지 않은 상태, 곧 벌거벗은 상태로 있어도 결코 부끄럽지 않았다. 그런데 선악과를 먹었을 때 그  빛의 옷이 사라진 것이다. 빛은 하나님의 생명의 성질이다.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다.(요1:4) 빛의 옷이 사라졌다는 것은 생명이 없어졌다는 나타난 표시였다. 아담은 자기가 사망이 된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그는 그 잃어버린 생명의 빛의 옷을 대신하여 나뭇잎으로 엮은 옷을 입었으나 그것이 생명을 회복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는 사망의 존재가 되어서 생명이신 하나님의 생명의 빛 앞에 설 수 없었다. 그는 숨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방문과 그를 부르신 부름과 그의 대답으로 다시 생명을 회복할 길이 열리게 되었다. 찾아오신 하나님을 인하여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교훈: 범죄 전에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과의 밀접한 관계를 누리며 순수한 예배를 드렸지만, 범죄 후에 그들의 관계와 예배에는 커다란 변화가 일어났다.

둘째 날(월) 6월 27일

에덴 밖에서의 예배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창 4:3~5).

질문: 예배에 대한 최초의 기록을 자세히 읽어 보라(창 4:1~7).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사는 받고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신 이유는 무엇인가?
[창4:1~7] 아담이 그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잉태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2 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이었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이었더라 3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4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하셨으나 5 가인과 그 제물은 열납하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심히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6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찜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찜이뇨 7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답: 나타난 기록대로는 가인이 하나님이 지시하신 방법대로 제사를 드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부가설명> 우리가 이 본문을 자세히 읽으면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신 것이 제물이기 전에 사람을 받지 않은 것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은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하시고 가인과 그 제물은 열납하지 않으셨다.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신 것은 제물이기 전에 가인을 받지 않으신 것이다. 우리는 너무 오래 가인의 제물을 받지 않았고 아벨의 제물은 받았다고 들어왔기 때문에 성경을 읽으면서도 가인과 그 제물, 아벨과 그 제물이라고 한 “과”를 빼먹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제물보다 사람을 받으시는 하나님의 뜻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아벨을 받으셨지만 가인을 받지 않으셨다. 사실은 받지 못하신 것이다. 이유가 무엇일까? 그가 제물을 잘못 드린 것이 가장 중요한 원인일까? 그것은 틀림없는 이유가 된다. 그러나 그보다 더 근본적인 이유가 있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것을 다 밝히 설명하려면 많은 지면이 필요하다. 간단히 설명하면, 아담이 선악과를 먹은 후에는 영원한 생명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그의 생명의 씨로 태어나는 사람들은 이미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죽은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그 죽은 상태에서 다시 살아나게 하기 위하여 구주가 대신 죽을 것이다. 그것을 믿을 때 아담의 후손들은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게 된다. 구주가 대신 죽는다는 사실을 믿는 믿음을 속죄제로 드리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그는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긴 산 사람으로 여김을 받는 것이다. 아벨이나 가인이나 다 이미 아담 안에서 죽은 상태에 있다. 그런데 아벨은 양의 첫 새끼로 제사를 드리므로 구주가 자기의 죽음을 대신하여 죽어주실 것을 믿는 믿음을 나타내었다. 하나님은 아벨을 산 자로 여기시고 살아 있는 아벨을 받으신 것이다. 그러나 가인은 죽어 있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죽은 상태에 있는 대로 감사의 제물을 드렸다. 죽은 자가 드리는 것은 아무 것도 없는 것이다. 하나님은 죽은 가인을 받을 수 없었다. 그러니까 당연히 그의 제물도 받을 수 없었다. 그래서 하나님은 가인에게 죄를 다스리라고 부탁했다. 가인을 받으시려는 하나님의 간절한 사랑이다. 죄를 다스리는 것은 속죄제를 드리는 것이다. 그러나 가인은 오히려 아벨을 죽이고 끝까지 속죄제를 드리지 않았다. 하나님은 결국 가인을 받을 수 없게 된 것이다. 그가 살기를 거절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제물도 못 받았다. 예배의 핵심은 하나님의 생명을 받는 것이다. 그때 하나님은 그 사람과 함께 그 예배를 받으신다. 이 사실을 명백히 깨닫는 것은 아주 중요하다.
  이후 두 부류의 예배란 그리스도의 속죄를 통하여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긴다는 것을 믿는 믿음으로 드리는 예배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만 자기들의 행위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 자들의 예배의 두 예배이다. 숫제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은 예배 하지 않는다. 하나님을 안다고 생각하고 예배 하는 사람들 중에 이 두 무리가 있는 것이다. 나는 어느 무리에 속해 있을까?

교훈: 아벨의 제사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에 기초를 둔 예배를, 가인의 제사는 행위로 얻는 구원에 기초를 둔 예배를 상징한다.

셋째 날(화) 6월28일

예배의 두 혈통

“노아가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모든 정결한 짐승과 모든 정결한 새 중에서 제물을 취하여 번제로 제단에 드렸더니”(창 8:20).

질문1: 창 6:1~8을 읽어 보라.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 그것이 그토록 위험한 이유는 무엇인가? 이로 인해 어떤 결과가 빚어졌는가?
[창6:1~8] 사람이 땅 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 그들에게서 딸들이 나니 2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의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는지라 3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일백이십 년이 되리라 하시니라 4 당시에 땅에 네피림이 있었고 그 후에도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을 취하여 자식을 낳았으니 그들이 용사라 고대에 유명한 사람이었더라 5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6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7 가라사대 나의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 버리되 사람으로부터 육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하시니라 8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답: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에 반해 결혼하고 육체에 거하게 되었으며, 네피림이 태어나게 되었다. 그런 경로로 죄악이 땅에 관영하게 되었고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심을 한탄하게 되었다.

질문2: 성경은 홍수 후에 노아가 방주에서 나오자마자 가장 먼저 무엇을 했다고 기록하고 있는가? 그것이 중요한 이유는 무엇인가?(창 8:20)
[창8:20] 노아가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고 모든 정결한 짐승 중에서와 모든 정결한 새 중에서 취하여 번제로 단에 드렸더니.

답: 노아는 가장 먼저 정결한 짐승과 정결한 새로 하나님께 번제를 드렸다. 이것은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는 것이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임을 가르친다.

<부가설명> 여기 말하는 하나님의 아들들은 천사가 아니다. 어떤 교단에서는 천사로 해석하여 천사가 사람과 간음했고 그래서 태어난 것이 네피림이라고 가르친다. 이것은 전혀 성경적이 아니다. 예수님은 친히 말씀하시기를 천사는 장가고 시집가는 일이 없다고 하셨다.“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가고 시집도 아니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마22:30 그러므로 천사가 사람과 간음했다는 것은 거짓이다. 뿐만 아니라 성경은 “하나님께서 어느 때에 천사 중 누구에게 네가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다 하셨으며 또 다시 나는 그에게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게 아들이 되리라 하셨느뇨?”히1:5) 이 말씀은 천사 중 아무에게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신 일이 없다는 말이 아닌가. 그러므로 창6:1의 하나님의 아들들은 천사가 아니다. 그러면 누구인가? 창세기 6장은 5장과 관련하여 이해해야 한다. 5장에는 셋의 후손들의 족보가 기록되어 있다. 그들은 하나님의 형상을 보존하고 있는 사람들로 표현되어 있다. “아담 자손의 계보가 이러하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 아담이 일백삼십 세에 자기 모양 곧 자기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 아담이 셋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그가 구백삼십 세를 향수하고 죽었더라 셋은 일백오 세에 에노스를 낳았고 에노스를 낳은 후 팔백칠 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그가 구백십이 세를 향수하고 죽었더라.”(창5:1~8) 이 말씀을 자세히 읽어보면 셋의 후손이 하나님의 형상을 이어받은 사람들로 기록한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그들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이런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의 아들들이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사람들의 딸들과 결혼한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결과는 배도가 급속하여진 것이다. 결과로 혼수를 불렀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이 세상에서 제 몫을 올바르게 수행하지 않으면 세상에 재난이 된다. 우리는 이런 사실에 대하여 두려하고 조심해야 할 것이다. 노아는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직무를 잘 감당하였다. 그가 홍수 후에 제일 먼저 단을 쌓고 하나님께 제사한 것은 창조주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유지하는 믿음의 길을 나타내고 있다. 우리가 이 세상이나 오는 세상에 함당한 사람이 되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과 그 보혈을 믿는 길 외에 결코 다른 길이 없다.

교훈: 홍수 이후에 노아는 가장 먼저 하나님께 희생제사를 드림으로써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구원받지 못한다는 믿음을 보여주었다.

넷째 날(수) 6월 29일

아브라함의 믿음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창 12:1).

질문: 창 12:1~8을 읽어 보라. 이 말씀은 아브람과 하나님의 부르심에 관하여 어떤 사실을 알려 주는가?
[창12:1~8]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2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3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 4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좇아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그 나이 칠십오 세였더라 5 아브람이 그 아내 사래와 조카 롯과 하란에서 모은 모든 소유와 얻은 사람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떠나서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갔더라 6 아브람이 그 땅을 통과하여 세겜 땅 모레 상수리나무에 이르니 그 때에 가나안 사람이 그 땅에 거하였더라 7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가라사대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하신지라 그가 자기에게 나타나신 여호와를 위하여 그 곳에 단을 쌓고 8 거기서 벧엘 동편 산으로 옮겨 장막을 치니 서는 벧엘이요 동은 아이라 그가 그 곳에서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더니.

답: 하나님은 아브람을 불렀고, 아브람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즉시 응답하여 지시하신 대로 수행하였다. 하나님은 아브람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시고 그 땅을 줄 것을 약속하였고 아브람은 단을 쌓고 여호와께 예배하였다.

질문2: 창 22:1~18을 읽어 보라. 왜 아브라함에게 이토록 끔찍한 시험이 주어졌는가? 하나님께서 그에게 이해시키고자 하셨던 진정한 기별은 무엇인가?(창 22:8, 13~14).
[창22:1~18]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 그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2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3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찌기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사환과 그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떠나 하나님의 자기에게 지시하시는 곳으로 가더니 4 제 삼 일에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그 곳을 멀리 바라본지라 5 이에 아브라함이 사환에게 이르되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서 기다리라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경배하고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하고 6 아브라함이 이에 번제 나무를 취하여 그 아들 이삭에게 지우고 자기는 불과 칼을 손에 들고 두 사람이 동행하더니 7 이삭이 그 아비 아브라함에게 말하여 가로되 내 아버지여 하니 그가 가로되 내 아들아 내가 여기 있노라 이삭이 가로되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 8 아브라함이 가로되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하고 두 사람이 함께 나아가서 9 하나님이 그에게 지시하신 곳에 이른지라 이에 아브라함이 그 곳에 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 놓고 그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단 나무 위에 놓고 10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 아들을 잡으려 하더니 11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그를 불러 가라사대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시는지라 아브라함이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매 12 사자가 가라사대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아무 일도 그에게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13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살펴본즉 한 숫양이 뒤에 있는데 뿔이 수풀에 걸렸는지라 아브라함이 가서 그 숫양을 가져다가 아들을 대신하여 번제로 드렸더라 14 아브라함이 그 땅 이름을 여호와이레라 하였으므로 오늘까지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 하더라 15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두 번째 아브라함을 불러 16 가라사대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를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17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 18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셨다 하니라.

답: 아브라함에게 구원의 실상을 이해하게 하려는 하나님의 배려이다. 즉 인류를 구원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희생하는 고통을 조금이라도 이해하도록 하기 위한 조처였다. 그때 아브라함은 예수님을 보았다.

<부가설명> 이삭을 제물로 드리도록 하신 것은 하나님의 대안이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 분부에는 아브라함의 신앙의 진정성을 스스로 깨닫도록 하시는 하나님의 의도가 있다. 우리는 입으로, 글로 좋은 내용을 얼마든지 표현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내용을 말하는 사람이, 글을 쓰는 사람이 그대로 사는지는 모른다. 심지어 그렇게 말하고 쓰는 본인도 모를 수 있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 될 것이었다. 그에게 그 믿음의 기초가 무엇인지 깊은 인상으로 인식하게 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희생시키는 사건이었다. 우리는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를 처리하셨음을 믿는다. 이삭을 드리라는 뜻은 바로 이런 하나님의 의도를 체험 하게 하셔서 믿음의 조상이 되게 하신 것이다. 아브라함이 갈 바를 알지 못한 상태에서 고향 친척집을 떠나서 하나님이 지시한 땅으로 간 것은 그를 부르신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상태를 보여주었다. 그러나 아직도 부족한 것이 있었던 것이다. 세상을 완전히 놓아버리는 것이다. 아브라함이 부여잡고 있는 세상이 바로 아들 이삭이었다. 그를 제물로 드림으로 아브라함은 세상을 완전히 놓고 오직 하나님만을 붙잡는 믿음을 확정지었다.

교훈: 아브라함은 참 하나님을 섬기는 나라의 시조로 구별되었고, 시험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만이 우리를 구원한다는 진리를 깨달았다.

다섯째 날(목) 6월 30일

하나님의 집 벧엘

“두렵도다 이곳이여 이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집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다”(창 28:17).

질문: 도망가는 야곱의 이야기를 읽어 보라(창 28:10~22). 꿈을 통해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셨던 용기와 보증의 말씀에 주목하라. 야곱은 어떻게 반응하였는가?
[창28:10~22] 야곱이 브엘세바에서 떠나 하란으로 향하여 가더니 11 한 곳에 이르러는 해가 진지라 거기서 유숙하려고 그 곳의 한 돌을 취하여 베개하고 거기 누워 자더니 12 꿈에 본즉 사닥다리가 땅 위에 섰는데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고 또 본즉 하나님의 사자가 그 위에서 오르락내리락하고 13 또 본즉 여호와께서 그 위에 서서 가라사대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너 누운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14 네 자손이 땅의 티끌같이 되어서 동서남북에 편만할지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을 인하여 복을 얻으리라 15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 16 야곱이 잠이 깨어 가로되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17 이에 두려워하여 가로되 두렵도다 이 곳이여 다른 것이 아니라 이는 하나님의 전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다 하고 18 야곱이 아침에 일찌기 일어나 베개하였던 돌을 가져 기둥으로 세우고 그 위에 기름을 붓고 19 그 곳 이름을 벧엘이라 하였더라 이 성의 본 이름은 루스더라 20 야곱이 서원하여 가로되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사 내가 가는 이 길에서 나를 지키시고 먹을 양식과 입을 옷을 주사 21 나로 평안히 아비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오면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 22 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전이 될 것이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 하였더라.

답: 하나님은 야곱에게 땅과 많은 후손을 주실 것을 약속하셨다. 야곱은 돌기둥을 세우고 기름 붓고 하나님께 경배하였다. 그리고 십일조를 드리며 하나님을 자신의 하나님으로 모시고 충실할 것을 약속하였다.

<부가설명> 하나님은 야곱에게 나타나셔서 조상에게 하신 약속에 의하여 야곱을 돌보시고 그 약속을 야곱과 그의 후손을 통하여 이루실 것을 확인하신다. 야곱은 이 약속을 경외의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생활할 것을 약속하고 다짐하였다. 야곱의 반응은 하나님의 임재 앞에 생활하는 생활예배의 다짐이다. 우리의 예배 개념은 예식예배에 있는 것 같다. 공중집회를 하고 정해진 순서를 따라 함께 예배드리는 집회예배를 예배라고 생각한다는 말이다. 물론 그것은 예배이다. 예배는 개인예배, 가정예배, 공중예배 등으로 구분하여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모든 예배든 생활예배의 연장선에서 이해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생활자체가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이 예배가 올바르게 이루어질 때 집회예배나 가정예배, 개인예배가 합당하게 될 것이다. 집회하여 예식예배를 드리고 나오면서 이미 개인의 삶이 예배를 깨뜨리면 공중예배는 받으시기에 합당한 예배가 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생활자체가 예배가 되도록 살아야 한다. 궁극적으로는 우리의 존재와 인격이 바로 하나님의 영광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전부터 바라던 우리로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엡1:12)

교훈: 야곱은 도망 중에 하나님의 임재를 깨닫고 두려움과 경외심을 가지고 하나님께 예배하며 그분의 은혜를 구하였다.

예비일(금) 7월 1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독서 과제: 부조와 선지자 47~51 “창조”, 60~62 “유혹과 타락”, 71~74 “가인과 아벨이 시험을 받음”, 105~107 “홍수 후”, 148~153 “믿음의 시험”, 197~203 “씨름하던 밤.”

“이 맹세는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의 보증에 대한 감사로 그의 마음에서 넘쳐 나온 것이었다. 야곱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요구하신 것들을 시인해야 한다고 느꼈으며 또 자신에게 부여된 하나님의 은총의 특별한 표에 보답해야 한다고 느꼈다. 그와 같이 우리에게 내려 주신 모든 축복은 우리에게 모든 긍휼을 베푸신 분에게 보답하기를 요구한다. 때때로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지난 생애를 회고하며
… 하나님의 귀중한 구원을 감사함으로 회상하여야 한다. 그는 그 모두를 하늘 천사들의 돌봄의 증거로 인식하여야 한다. 이 헤아릴 수 없는 축복들을 고려하여 그는 종종 겸허하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꼬’(시 116:12)라고 자문해 보아야 한다”(부조와 선지자, 187).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➊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행하는 일 가운데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가 모든 예배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주제를 더 깊이 묵상해 보십시오. 그리고 다음과 같은 질문을 곰곰이 생각해 보십시오. ⑴ 우리는 왜 하나님께 예배해야 합니까? ⑵ 그분은 경배받기에 합당한 무슨 일을 행하셨습니까? ⑶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는 어떤 목적에 도움이 됩니까?

※ 하나님은 우리의 창조주시며 구원자이시기 때문에 그분이 없으면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식할 때 예배하게 된다.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은 자기 존재의 합리적 확인이다. 창조주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은 자기의 존재를 확인하는 생활이며 그 모든 근원이 창조주 하나님께 있다는 것을 정직하게 시인하는 삶이다. 그것이 예배이다.

➋우리가 드리는 예배가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세상에 증거하는 효과적인 도구가 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이번 과에서 공부한 예배의 요소 가운데 특별히 전도에 도움이 될 만한 요소는 무엇입니까?

※ 우리가 올바르게 예배하면 우리가 예배하는 대상이 바로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이심을 증거하는 것이 된다. 그래서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며 그날에 공주예배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예배에 대하여 배우면서 사람들이 이미 아담 안에서 죽은 상태에 있으며 창조주와 구속주이신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은 그분 안에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길 수 있다는 것을 증거하는 것이다. 예배하는 사람이 이 사실을 분명히 인식할 때 전도할 확신이 생길 것이다.

댓글목록

mayfield님의 댓글

mayfield 작성일

목사님!
일찌감치 좋은 말씀 올려 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손영식님의 댓글

손영식 작성일

안녕하세요.
이곳은 필리핀 민다나오 입니다
여기에서는 한국 안교 교과서를 구입할 수 없는데 이렇게 올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물론 영문 교과서 이곳에서 구입해서 공부하지만 그래도 우리말로 공부할 수 있어 더 감화가 큼니다.

그런데 글쓴이가 김명호 목사님이라고 하셨는데 번연이시가요 아니며
 3기 교과서는 영문(전세계) 교과공부와 다릅니까? 단지 한국교과서만이 다릅니까?
2기까지는 영문교과뿐만 아니라 이 나라 교과책도 같았습니다.

꼭 좀 답을 올려 주셧으면 좋겟습니다

도루시님의 댓글

도루시 작성일

은혜를 주신 목사님께 감사 드립니다.
언제나 건강하시고 더 풍성한 말씀으로
가르쳐 주세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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