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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과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선지자 이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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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등불과기름 작성일08-09-19 23:00 조회7,11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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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9월27일(안) 일몰 오후6시21분

제13과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 선지자(先知者) 이사야
<확대경(擴大鏡)>
1. ◎ 선지자(先知者)란 어떤 사람인가?
선지자들은 대개가 그들 시대(時代)에 있어서 제일 환영(歡迎)받지 못한 사람들이었으니 그것은 그들이 국가(國家)의 도덕(道德)및 종교생활(宗敎生活)에 대해 언급(言及)했기 때문이다.
국가(國家)와 백성들의 생활이 하나님의 도(道)에서 멀리 벗어났을 때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서 불순종(不順從)의 발걸음을 걷고 있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선지자(先知者)들을 보내셨습니다.
백성들의 죄상(罪狀)을 꾸짖고 규탄(糾彈)하는 선지자의 “말”은 극(極)히 날카로웠습니다.
진리(眞理)라는 말과 진실(眞實)한 말은 항상 죄인에게는 환영(歡迎)을 받지 못합니다.

선지자(先知者)라는 말의 정의(正義)를 성경에서 찾아보면 신명기 18장18절에“내가 그들의 형제 중에 너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그들을 위하여 일으키고 내 말을 그 입에 두리니 내가 그에게 명(命)하는 것을 그가 무리에게 다 고(告)하리라.”또 19절에 “무릇 그가 내 이름으로 고(告)하는 내 말을 듣지 아니하는 자는 내게 벌(罰)을 받을 것이요.”라고 하였다.

또한 그들의 말은 그 한 시대(時代)뿐 아니라 모든 시대에 걸쳐 작용(作用)되었다.
그들은 모두 택(擇)함 받은 백성의 실족(失足)함과 메시아의 오심을 예언(豫言)했으며 선지자 각 사람은 어떻게 하나님께서 메시야를 통하여 그의 목적을 이루실 것인지 보여주었다.

오늘날에 있어서 우리는 유다인 들이 어떻게 실족(失足)하였는지 명확(明確)히 볼 수 있다.
(요 1:11)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迎接)지 아니하였으나.”
그들은 도리어(요 19:15),
“저희가 소리 지르되……. 가이사 외(外)에는 우리에게 왕(王)이 없나이다.”라고 외쳤다.
그들은 메시야를 거절(拒絶)하였다.
그러나 메시아의 왕국(王國)은 반드시 이 땅에 세워지고야 마는 것이다.
이사야 선지자는 유다가 세상에서 수행(遂行)해야 할 의무(義務)를 다하지 않으므로 받게 될 심판(審判)에 대하여 말하였다.

그러나 이사야서 전체 내용을 통하여 우리는 고통(苦痛)과 죽음으로 최후(最後)의 승리(勝利)를 거두실 하나님의 참 사자(使者)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계획(計劃)과 궁극적(窮極的)인 승리(勝利)를 찾아볼 수 있다. (사 53장)

2. ◎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구원(救援)하시기 위하여 인간 대리자(代理者)로 선지자(先知者)를 보내셨다.
성경의 기록을 보면 인간들이 도움이 필요할 때 마다 언제든지 필요한 상황에서 선지자(先知者)가 없었던 때 는 한 번도 없었다.

◎ 선지자의 직분(職分)은 인간 자신이 요청(要請)(요구(要求))해서 되는 직분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 스스로 자청(自請)한다든지 또는 하고 싶어서 선지자(先知者)가 되는 것을 절대(絶對)로 용납(容納)하지 않으셨다. 렘 14:14, 23:21 참조)

◎ 선지자(先知者)는 히브리어로 나비(Nabi)는 하나님의 “대변자(代辯者)” 혹은 “통역자(通譯者)”를 의미(意味)한다.

◎ 선지자의 직분은 평탄(平坦)하지가 않고 으레 비난(非難)받고, 감옥(監獄)에 갇이고, 공격(攻擊)을 받고, 죽임을 당하기도 한다. 어떤 선지자는 매를 맞고 돌에 맞아 순교(殉敎)당하기도 하고 톱에 켜 죽기도 한다. (렘 20:1-2, 대하 24:21)
선지자란 백성들에게 즐거운 이야기만 해주는 직업이 아닙니다.
선지자란 좋은 기별이든지 나쁜 기별이든지 백성들이 듣기 원하든지 원하지 않든지 간에 하나님께로 오는 기별을 전해야하는 것이다.

◎ 하나님께서는 어느 누구도 필요한 준비를 갖추지 않는 상태로 결코 부르시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특별한 도구로 이스라엘 백성을 택하셨지만 다른 나라사람들보다 더 많이 사랑하고 돌보신 것이 아니라 그들로 모든 인간에게 하나님의 구원(救援)에 이르도록 하시기 위해서 택하셨을 따름이지 차별(差別)을 두신 것은 절대(絶對)로 아닙니다.
하나님의 구원(救援)에는 차별(差別)을 둔 인간이란 절대로 없다는 것입니다.

일(日) 9월21일
<“화(禍)로다. 나여!” (사 6:1-6)>
◎ 하나님의 얼굴
사람들을 대표하는 것이 얼굴이기에 체면(體面)이 있느니 없느니 라는 말을 사용하게 된다.
그래서인지 얼굴을 보고 관상(觀相)을 보아주고 돈을 벌어먹는 사람도 생겨났다.
그만큼 얼굴은 중요한 것이다.

우리말에 ‘얼굴에 다 쓰여 있다’라는 말도 있다.
사람의 마음의 표현이 얼굴에 나타난다는 말이다.
어떤 이의 환한 얼굴을 보면 자신의 마음도 환해지기도 하고,
또한 환한 얼굴은 상대의 노(怒)함도 가라앉히기도 한다. 그래서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 라는 우리 속담(俗談)도 있다.

옛 이스라엘 사람들도 얼굴은 모든 이의 마음의 표현(表現)이라고 여겼다.
잠언 15장 13절은
“마음의 즐거움은 얼굴을 빛나게 하여도 마음의 근심은 심령을 상하게 하느니라.”라고 말한다.
특히 성경(聖經)의 기자(記者)들은 종종 하나님의 마음을 그의 얼굴로 표현(表現)한다.
하나님의 저주(詛呪)는 곧 그가 자신의 얼굴을 돌렸기 때문이며, 이완 반대(反對)로 하나님의 은혜(恩惠)와 축복(祝福)은 하나님이 당신의 얼굴을 당신의 백성들에게로 향(向)하는 것으로 보았다.

신명기 31장 7절에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진노(震怒)하여 그들을 버리며 내 얼굴을 숨겨 그들에게 보이지 않게 할 것인즉 그들이 삼킴을 당하여 허다한 재앙(災殃)과 환난(患難)이 그들에게 임(臨)할 그 때에 그들이 말하기를 이 재앙(災殃)이 우리에게 임함은 우리 하나님이 우리 중에 계시지 않은 까닭이 아니뇨 할 것이라.”

욥은 고난(苦難)중에 “주께서 어찌하여 얼굴을 가리우시고 나를 주의 대적(對敵)으로 여기시나이까?”(욥 13:24)라고 외친다.
시편 13편 1절엔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나를 영영히 잊으시나이까. 주의 얼굴을 나에게서 언제까지 숨기시겠나이까. 라고 울부짖는다.

이와는 반대로 민수기 6장 25절에서 26절에 보면, “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 비취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平康)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지니라. 하라”고 여호와께서 모세를 불러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다음과 같이 축복하라고 명(命)한다.

하나님의 얼굴이 우리에게 비취기를 기도(祈禱)한다는 말은 우리가 하나님의 얼굴을 뵌다는 말 일 것이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얼굴을 본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했다.

출애굽기 33장 20절에 모세가 하나님께 주의 영광을 뵙기를 청(請)하자 하나님께서 이르시기를 “또 가라사대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라고 한다.
또한 모세가 하나님의 산에 오를 때 백성들은 하나님을 보면 죽을까 두려워 산 아래 머물게 하였다. 선지자 이사야가 소명(召命)을 받을 때에도 그가 하나님을 본 이유로 두려워하는 장면(場面)이 나온다. 이사야 6장 5절에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禍)로다 나여 망(亡)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不淨)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不淨)한 백성 중에 거(居)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사 6:5)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을 본다는 것은 금기(禁忌) 사항이었다. 그것은 만일 그를 본 사람이 있다면 무엇인가 하나님을 표현할 수가 있을 것이지만 하나님의 존귀(尊貴)하심과 그의 영광은 그 무엇으로도 표현할 수도 없고 감히 나약(懦弱)한 인간이 절대자 하나님을 본다는 것은 당시 고대(古代)인의 세계상으론 상상도 못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성경은 그와는 다른 기록도하고 있다.
인간이 하나님을 볼 수는 없지만 하나님이 택하시면 그를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사사기 6장 22절에서 23절에 보면 하나님이 사사 기드온을 택하셨을 때, “기드온이 그가 여호와의 사자(使者)인줄 알고 가로되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내가 여호와의 사자(使者)를 대면하여 보았나이다.”라고 두려워하는 기드온을 향해 23절엔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너는 안심(安心)하라 두려워 말라 죽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고 기록하고 있다.

출애굽기 24장 11절에도 모세가 하나님의 산 시내 산에 오를 때 하나님께서 택한 백성의 대표들이 있었다. 그들은 하나님을 보았고 하나님과 함께 먹고 마셨다고 기록하고 있다. 성경의 이런 상이(相異)한 기록들은 하나님을 본다는 것은 우리가 쉽게 생각하는 그의 어떤 실제 모습을 보는 것이라는 생각이 아니라, 이는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받는 것이요 그의 전적인 선택을 말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죄를 지으면 낯을(얼굴을)피하기 위하여 숨게 된다.
어린 아이들일지라도 잘못을 저지르면 누가 가르쳐 주지도 않는데 부모의 얼굴을 피해서 숨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는 그 시발(始發)점이 아담과 하와로 거슬러 올라간다. (창 3:8)
요나도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다시스로 도망(逃亡)을 하려고 한다. (요나 1:3, 10)

◎ 죄(罪)는 하나님의 얼굴을 볼 수가 없는 것이다.
이사야는 이상(異像)중에 높이 들린 보좌(寶座)위에 앉으신 하나님을 뵌 후에 자신의 부정(不淨)한 모습(模襲)을 소상(消詳)하게 보았으며 자랑할 것이 전혀 없는 존재임을 깨닫게 되었다.
그러므로 이사야는 크게 외치기를 “화(禍)로다, 나여 망(亡)하게 되었도다.”라고 부르짖게 되었다.
우리 자신들도 하나님을 뵙기를 원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을 뵙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보는 순간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서 매일 매일 성경의 거울에서 우리 자신을 비쳐보는 삶을 합시다.
월(月) 9월22일
<“네 죄(罪)가 사(赦)하여졌느니라.” (사 6:6-7)>
◎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거울”과 같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고전 10:11, 롬 15:4 참조)
거울을 보면 자신의 얼굴에 더러움이 묻은 것을 발견(發見)하게 되고 그 더러움을 씻기 위해서는 자신의 얼굴을 닦아야 깨끗이 지워지는 것을 누구나 알고 있자만,
예수님을 잘 모르는 사람들은 자신의 얼굴에 더러움을 지우기 위해서 얼굴을 닦지 않고 거울을 닦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다시 설명하자면

거울인 성경(聖經)말씀을 읽거나 묵상(黙想)하지 않으면 자신이 행하는 모든 것이 옳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즉 하나님의 말씀이 없을 때에는 (사사기 21:25)에“사람이 각각 그 소견에 옳은 대로 행(行)하였더라.”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우리들의 생애에 거울인 것입니다.
삶에 하루하루를 거울이 되는 성경을 보고 나의 삶의 모습을 비추어 보십시오.
내가 행하는 것은 이기심(利己心)과 아집(我執)과 교만(驕慢)과 육체(肉體)의 일들뿐일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5:19-21참조)
그러므로 우리 죄인들은 죄에서 우리를 구원(救援)해주실 분인 예수그리스도가 절대로 필요한 것입니다.

◎ “죄인은 그리스도가 필요함
사람은 본래 고상한 능력과 공정한 마음이 품부(稟賦)되었다.
그의 본성은 완전하였고 하나님으로 더불어 융화되었다. 그의 사상은 순결하였고 그의 목적은 신성하였다.
그러나 불순종(不順從)으로 말미암아 그의 능력은 악용되어 사랑의 자리는 이기심으로 점령한바 되었다.
그의 천성(天性)은 범죄로 말미암아 너무 약(弱)하여졌으므로 그 자신의 힘으로는 악의 세력을 저항하기가 불가능하게 되었다.
사람은 사단에게 사로잡힌 자가 되었으니 만약 하나님이 특별히 간섭하시지 아니하셨다면 그는 영원히 그대로 사로잡힌 자가 되었을 것이다.
인류 창조의 하나님의 계획을 실패(失敗)케 하고 이 세상을 재화(災禍)와 황폐로 충만케 하려는 것이 유혹자 곧 사단의 목적이다.
그리고 그는 이 모든 재화(災禍)가 하나님의 인류를 창조하신 사업의 결과로 된 것이라고 비난(非難)하는 것이”다. (정로, 17)

◎ “우리는 우리가 빠진 죄의 구렁텅이에서 우리 자신이 힘으로 피해 나올 수는 없다.
우리의 마음은 악(惡)한데 우리가 그것을 고칠 수 없다.
“누가 깨끗한 것을 더러운 것 가운데서 낼 수 있으리이까 하나도 없나이다.”(욥 14:4).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롬 8:7). 교육과 수양과 의지력(意志力)의 연단과 인간의 노력은 각각 상당한 분한(分限)을 가졌으나 이것들이 마음을 변화시키는 일에는 무력한 것이다.
이것들이 혹 행위의 외모적 단정을 만들어 낼 수는 있다 할지라도 마음을 고칠 수는 없으며 생애의 동기(動機)를 깨끗케 할 수도 없다. 사람이 죄에서 벗어나서 성결하여지려면 먼저 마음속에서 동작하는 능력이 있어야 하나니 곧 위로부터 새 생명을 받아야 한다. 이 능력은 곧 그리스도이시다. 오직 그의 은혜만 이 죽은 심령의 기능에 생기를 주어서 그것을 하나님께로 즉 거룩한 데로 이끌 수 있는 것이다.

구주(救主)께서 말씀하시기를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요 3:3)
즉 사람이 새 마음과 욕망(慾望)과 새 목적(目的)과 새 동기(動機)를 받아 그것들로 새 생애(生涯)에 들어가지 아니할 것 같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요 3:3)다고 하셨다. 본성적으로 사람에게 잠재(潛在)하고 있는 선을 계발시키기만 하면 족하다는 관념은 치명적(致命的) 오해이다. “육(肉)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聖靈)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靈的)으로라야 분변(分辨)함이니라”(고전 2:14).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요 3:7).
또한 그리스도에 대하여 성경에 기록하기를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요 1:4).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행 4:12)고 하였다.

하나님의 자애(慈愛)를 깨닫고 그의 품성(稟性)의 인자(仁慈)하심과 자부적(慈父的) 온정(溫情)을 깨달아 아는 것만으로는 넉넉지 않다.
하나님의 율법(律法)의 지혜(智慧)로움과 공의(公義)로움을 깨닫고 그 율법이 사랑의 영원한 원칙 위에 세워진 것을 아는 것만으로도 넉넉지 않다.
사도 바울도 이 모든 것을 깨닫고 부르짖기를 “내가 이로 율법의 선한 것을 시인하노니”(롬 7:16).
“이로 보건대 율법(律法)도 거룩하며 계명(誡命)도 거룩하며 의(義)로우며 선(善)하도다.”(롬 7:12)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는 여기에 첨가하여 심령의 고민과 절망 중에 말하기를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렸도다.”(롬 7:14)라고 하였다.
그는 스스로 얻을 수 없는 순결(純潔)과 의(義)로 갈망(渴望)하여 부르짖기를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4)고 하였다.
이러한 부르짖음은 어느 곳에서나 어느 시대에나 죄의 짐에 눌린 자들의 마음에서 발하는 부르짖음이다.
이런 모든 부르짖음에 대한 대답은 다만 하나뿐이니
곧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을 보라”(요 1:29) 함이다.”(정로, 18-19)

◎ “회개(悔改)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 앞에 옳은 자가 될 수 있을까?
죄인(罪人)이 어떻게 의롭게 될 수 있을까?
오직 그리스도로 말미암아서만 우리는 하나님과 거룩함에 조화(調和)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그리스도께로 나아갈 것인가?
많은 사람은 오순절 날에 허다한 무리가 죄를 깨닫고 “우리가 어찌할꼬.(행 2:37) 하고 질문한 것과 같은 질문을 하고 있다. 이에 대한 베드로의 대답의 첫마디는 “회개(悔改)하라”(행 2:38)는 것이었다.
그런지 얼마 후에 그는 말하기를 “회개(悔改)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행 3:19)고 하였다.

회개(悔改)라는 것은 죄를 슬퍼하고 죄에서 떠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우리가 죄가 얼마나 악한 것인지 깨닫지 못하면 죄를 버리지 않게 될 것이요,
또한 진심으로 죄에서 떠나지 아니하면 우리 생애에 진정한 변화가 있을 수 없을 것이다.
회개의 참 뜻을 이해하지 못하는 자들이 많다.
많은 사람은 저희의 악행이 저희 자신에게 고통을 미치게 할까 두려워 저희가 범죄한 것을 후회하고 혹은 외모(外貌)적 변화를 나타내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상 의미(意味)로서는 회개가 아니다.
저들은 죄 그것보다도 그 고통을 슬퍼함이다.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영구히 잃어버린 것을 알게 되었을 때에 슬퍼한 것이 그런 것이다.
발람은 칼을 빼어들고 자기의 가는 길에 선 천사를 보고 두려워서 자기 생명을 잃을까 염려하여 자기 죄를 자백하였다.
그러나 그는 진정으로 죄를 회개하지도 않았고 목적을 변하지도 않았고 악을 미워하지도 않았다.
가룟 유다도 자기의 주를 판 후에 부르짖기를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마 27:4)고 하였다.
이 고백은 정죄에 대한 무서운 생각과 심판에 대한 두려운 공포로 말미암아 그의 범죄한 심령에서 어찌할 수 없이 나온 것이다.
그에게 임할 결과가 그에게 공포심을 주었다.
그러나 그는 흠없는 하나님의 아들을 팔고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를 배반한 사실에 대하여 충심으로 마음을 찢는 애통을 느끼지는 않았다.
바로가 하나님의 형벌(刑罰)로 재앙(災殃)을 당할 때에 형벌(刑罰)을 더 받지 않기 위하여 자기 죄를 자복하였으나 그 재앙이 그치자마자 다시 하나님을 거역하였다.
이것들은 다 죄의 결과를 두려워한 것뿐이요 죄 그것을 슬퍼한 것이 아니다.”(정로, 23-24)

◎ “자복(自服)”
“자기의 죄를 숨기는 자는 형통(亨通)하지 못하나 죄를 자복(自服)하고 버리는 자는 불쌍히 여김을 받으리라.”(잠 28:13). 하나님께 불쌍히 여기심을 받는 조건(條件)은 단순(單純)하고 공정(公正)하고 합리적(合理的)인 것이다.
주께서는 우리가 죄의 사유(赦宥)를 받기 위하여 무슨 괴로운 일행하기를 요구하지 않으신다.
우리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은총(恩寵)을 받기 위하여 또는 우리의 죄과(罪過)를 속하기 위하여 멀고 지리한 순례(巡禮)나 또는 고통스러운 고행(苦行)을 할 필요는 없다.
다만 죄를 자복(自服)하고 버리는 자는 불쌍히 여기심을 받을 것이다.

사도는 말하기를 “너희 죄를 서로 고하며 병(病)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약 5:16)고 하였다.
그대들의 죄를 사유하실 수 있는 하나님께 그대들의 죄를 자복하고 또는 그대들의 잘못을 피차에 자복하라.
만일 그대가 그대의 친구나 이웃에게 허물이 있으면 그대는 그 잘못을 사과해야 할 것이다.
그대를 쾌(快)히 사유(赦宥)하여 주는 일은 그가 할 일이다. 그 다음으로 그대는 하나님의 사유(赦宥)하심을 구(求)할 것이니 이는 그대가 손해를 입힌 그 형제는 하나님의 소유요 그대가 그에게 손해를 입히므로 그의 창조주와 구속자에게 죄를 범한 까닭이다. 그러므로 이 사건(事件)은 홀로 참되신 중보자 되시는 우리의 대제사장 앞에 내어 놓을 것이니, 그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試驗)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히 4:15)고, 또한 “우리 연약(軟弱)함을 체휼(體恤)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온갖 불의(不義)의 더러운 것을 깨끗하게 씻어 줄 수 있는 자이시다.
자기의 죄를 자복(自服)함으로써 하나님 앞에 저희 마음을 겸비(謙卑)히 하지 아니한 자들은 아직 하나님께 기뻐 받으시는 첫째 조건도 이행(履行)하지 아니한 자들이다.
만일 우리가 다시 회개할 것 없는 회개를 경험(經驗)하지 아니하고 죄를 미워하는 가운데서 심령의 참된 겸비와 통회하는 정신으로 우리의 죄를 자복하지 아니하였을 것 같으면 우리는 아직 진정으로 죄의 사유를 구한 것이 아니요 또한 우리가 진정으로 구하지 아니하였으면 우리는 아직 하나님의 평강을 얻지 못한 자이다.
우리가 과거(過去)의 지은 죄의 사유함을 받지 못하는 오직 한 가지 이유는 우리가 우리 마음을 겸비(謙卑)하기를 즐기지 아니하고 진리(眞理)의 말씀에 응종(應從)하기를 원(願)치 아니하는 까닭이다” (정로, 37-38)

◎ 이사야는 거룩하신 거울이 되시는 "하나님"을 뵌 후에 자신의 죄를 자백하지 않을 수 없었고 또한 자신의 죄를 용서(사(赦)함)받은 후에는 하나님의 종으로 도구로 쓰임 받는 자가 되었습니다.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의 성도님들이시여 오늘 다시 한 번 금번의 교과공부를 마치기전에 우리 모두 나의 모습을 거울이 되시는 성경 말씀에 비추어 봅시다. 그리고 더러운 나의 모습을 이사야가 경험한 것처럼 핀 숯으로 정결함을 받읍시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지금보다 더 귀한 역사(役事)와 사역(使役)과 선교사(宣敎師)로 사용 하실 것입니다.

화(火) 9월23일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사 6:8)>
◎ 훌륭한 군인(軍人)을 만들기 위해서는 소정의 교육을 받게 되며 그 훈련(訓練)의 강도(强度)가 혐난(險難)하거나 난이도(難易度)가 높으면 높을수록 그의 수행(遂行)할 임무(任務)도 또한 매우 높은 것이다.
예를 들어서 값이 비싼 전투(戰鬪) 비행기나, 군함(軍艦)이나, 탱크 등등의 고가(高價)의 장비를 조종(操縱)할 조종수 들이라면 훈련을 대충해서 그 임무 수행을 부여하지 않을 것이다.
이들은 아주 그 누구도 견디기 힘든 반복된 훈련을 받은 후에 그에 운전(運轉)을 할 수 있는 특권(特權)이 부여 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도 하나님의 선지자나 제사장들이나 사역자들 모두를 아주 강도 높은 삶의 훈련을 필(畢)한 후에 하나님께서 아주 귀하게 그 들을 쓰셨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잘 아는 다니엘과 그의 세 명의 친구를 비롯해서 오늘 공부하는 이사야 선지자들과 히브리서11장에 나오는 모든 사람들은 보통 사람들이였지만 그들 모두는 비범(非凡)한 생애를 살았다는 점을 우리는 명심해야 할 것이다.

◎ 예수님께서도 형편없는 제자들을 택하셔서 쉽게 적당히 사도행전에 나오는 제자로 만드신 것이 아니다.
베드로와 요한을 비롯해서 예수님의 사도로 쓰임 받은 사도바울도 참으로 감당하기 힘든 역경과 훈련을 통해서 그들의 삶이 사도행전을 기록한 것임을 우리는 기억해야 할 것이다.
이사야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사 6:8)라고 대답했다.
우리 모두도 이 마지막 시대에 세 천사의 기별자로서 이사야와 같은 사역에 특권을 누려봅시다.

수(水) 9월24일
<이사야의 호소(呼訴) (사 6:9-10)>
◎ 우리가 잘 아는 E. G. 화잇부인께서 아사야서의 글을 영감의 글에서 수십 번 인용하여 말씀하고 계시며 특히 이사야서 53장의 예수님의 오심과 생애를 , 이사야서 58장의 영육간(靈肉間)의 건강 법칙을 그 토록 많이 강조하시고 기록한 것을 우리는 다시 한 번 명심하여야 하겠습니다.

◎ 하나님께서 이사야를 통하여 그토록 전달한 메시지를 유다 백성들은 그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아니 하고 패역하였던 이유를 다시 한 번 우리 자신에게 적용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이 말세(末世)를 사는 이 시대(時代)에도 디모데후서 3:1-5절의 현실이 지금 우리는 이사야 선지자가 외친 그 때와 똑 같다는 사실을 기억해야겠습니다. 그러므로 금번의 교과를 통해서 나 자신에게 적용하는 우리 모두가 됩시다.

◎ “나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을 정결케 하시고, 그 가치를 입증하고 계심을 보았다. 그분께서는 그들을 금처럼 연단하시되, 찌끼가 태워지고 그들 속에서 그분의 형상이 반영될 때까지 하실 것이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극기의 정신과, 어려움을 견디고 진리를 위하여 고난을 받고자 자원하는 마음이 없다. 그들의 의지는 굴복되지 않고, 그들은 하나님께 자기 자신을 완전히 바치지 않고, 그분의 뜻을 따르는 것을 가장 큰 즐거움으로 삼고자 하지 않는다. 목사들과 신자들은 영성과 참된 경건이 부족하다. 흔들릴 수 있는 것은 모두 흔들릴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가장 크게 시험을 받는 처지에 놓이게 될 것이므로, 모든 사람은 진리 안에서 안착하고, 뿌리를 내리고 굳게 서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분명히 미끄러질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당신의 능력의 임재로써 심령을 위로해 주고 고무시켜 주시면, 그들은 비록 길이 어둡고 험악할지라도 참고 견딜 수 있을 것이다. 어둠은 미구에 사라지고 참 빛이 영원히 비칠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우리나라의 현실적 상태를 묘사해 주는 말씀으로서 이사야 58장, 59장 1-15절, 예레미야 14장 10-12절을 보라는 지시를 받았다. 이 나라의 백성들은 하나님을 버리고 잊어버렸다. 그들은 다른 신들을 택하고, 하나님께서 그들에게서 돌아서실 때까지 그들 자신의 타락한 길을 따라갔다. 지상의 거민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짓밟고 그분의 영원한 언약을 깨뜨렸다.”(1증언, 355)

목(木) 9월25일
<이방(異邦)의 빛 (사 42:6-7)>
◎ 우리나라 대한민국의 수난(受難)은 참으로 주변(周邊)나라들로부터 많은 외세(外勢)의 침략을 받았고 지금도 그러한 위협(威脅)속에서 살고 있다. 특히 예수님의 복음이 이 땅에 들어오기 전(前)까지와 복음이 이 땅에 들어오고 나서의 변화와 차이는 말로 표현키 어려울 정도임을 부인(否認)치 못할 것이다.
이 나라 대한민국에도 선교사들을 통하여 복음의 씨가 떨어져서 이 만큼 교회의 성장과 복음의 증거로 많은 생명의 빛이 발산하고 있다.
미개(未開)한 나라와 못사는 나라는 거의가 우상숭배(偶像崇拜)와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예수님을 알지 못하고 불쌍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
이들의 대부분은 남녀차별과 인종 차별과 손으로 꼽기 힘들 정도의 차별과 억압과 궁핍(窮乏)속에서 속절없이 살아가고들 있다.
비근한 일예로 우리들도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았을 때에는 이사(移徙)한번 갈려고 하면 손 없는 날을 택일(擇日)을 해야 되고 시집 장가를 가려고해도 사주팔자를 보아야 하고 온갖 부적(符籍)을 돈을 주고 구입해야하고 그 많은 귀신들에게 일일이 신고를 하고 동티나지 않도록 거스르지 않게 하기 위해서 참으로 많은 시간과 재물과 정신적인 지배를 받고 살아보지 않으셨습니까?
우리 주위에 그토록 어두운 세상에서 고생하며 살고 있는 이웃들에게 이방인(異邦人)들에게 사랑과 생명의 빛을 전하시는 동기유발자로 남은 생에를 분발해보시지 않으렵니까?

<초점(焦點)>
1. 선지자는 죄와 타락을 지적해야하며 공의와 의로움을 옹호해야하는 인기 없고 인정받지 못하는 사명을 하나님으로 받는다.
2. 그러나 선지자는 아무나 스스로 되는 것이 아니라 준비되어 보냄을 받게 된다.
이와 같은 소명을 받은 이사야를 통하여 오늘날 우리 모두도 여전히 보냄을 받은 사명자로 결심과 실행을 감당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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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미부록(末尾附錄)>
1. “이사야”는 여호와께서 구원(救援)하셨다. 라는 뜻이다.
잘 알려지지 않은 선지자 아모스가 아닌 아모스의 아들이며 그의 봉사기간은 약 60년간이었다.
(기원전 759-690)

◎ 이사야 : [희망과 복음의 선지자]
'이사야'는 '여호와는 구원(救援)' 이란 뜻이다.
이사야의 부친(父親)은 아모스이며 예루살렘에서 출생하였고(사1:1). 여선지자(女先知者)와 결혼하여 아내(사 8:3, 18)와 두 아들 스알야숩(“남은 자가 돌아 올 것이다”사7:3절),과 마헬살랄하스바스(“약탈은 빠르고, 먹이는 서두른다.”사 8:3,18)를 두었고. 남(南)유다의 귀족(貴族)출신 선지자(先知者)로서, 주로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활동하며 사역을 하였고.
이사야는 B.C.742-700년경 웃시야, 요담, 아하스, 히스기야 4대에 걸쳐 활동을 했으며, 북(北)왕국(王國) 이스라엘이 이 시기(時期)에 멸망(滅亡)했다.
B.C.722년 사마리아는 결국 앗수르에 함락(陷落)이 된다.
이사야는 B.C.770년경 태어나 B.C.680년경 므낫세왕에게 순교(殉敎)를 당하였고.
B.C.742-734년경 선지자로 소명(召命)을 받고(사6:1-13) 유다의 부패(腐敗)상과 죄악(罪惡)을 한탄(恨歎)하며 여호와의 날을 예언(豫言)하였다.
B.C.734-715년경, 아하스의 앗수르 동맹을 경고하며 이스라엘과 유다의 멸망(滅亡)을 예언(豫言)하였다.
B.C.715-701년경, 애굽과 동맹(同盟)하려는 히스기야에게 경고(警告)를 하며 이방국가(異邦國家)들의 멸망(滅亡)을 예언(豫言)하였다. (사13:1-23:18).

이사야는 하나님의 소명(召命)에 믿음으로 순종하였고. 3년 동안 벗은 몸과 발로 다니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담 대(膽大)하고 진실(眞實)하게 전한 참선지자요 애국자였다.
이사야는 정치적, 사회적 부패(腐敗)상을 예리(銳利)하게 고발(告發)하며 주의 메시지로 견책하였으며. 동시에 믿고 소망하는 자에게 주어질 미래의 복과 하나님의 구원인 메시아적적 복음을 선포하였다.

이사야는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이것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한 이사야의 열심 있고 적극적인 태도(態度)다. 오늘날도 주님께서는 추수할 일꾼을 찾고 계신다.
이사야는 사랑하는 조국(祖國)이 하나님 앞에서 범죄(犯罪)하는 모습과 그로 인한 하나님의 진노(震怒)앞에 견딜 수 없는 안타까움과 사랑을 가지고 온 힘을 다해 그들의 잘못을 지적하고 패역(悖逆)함을 책망(責望)하여 애끓는 경고(警告)를 선포(宣布)했다.
이사야는 동족의 오해(誤解)를 살 만큼 획기적(劃期的)인 발언(發言)과 행동(行動)을 서슴지 않으며 조국의 패역을 고발하고 멸망을 경고했으며, 또한 장차 도래(到來)할 희망과 구원(救援)을 노래했다.

2. 이사야의 배경(背景)과 사업(事業)
웃시야의 치세가 끝나려고 하며 요담이 이미 많은 국사의 책임을 맡고 있을 때에 왕족(王族)인 이사야는 아직 청년(靑年)이였으나 선지자의 임무에 부르심을 받았다.
이사야가 수고해야할 때에 하나님의 백성에게 특별한 위험이 따르고 있었다. 선지자는 북방이스라엘과 앗수르의 연합군이 유다를 침범(侵犯)하는 것을 목격해야 하였다.
그는 나라의 중요한 성읍들 앞에 진 친 앗수르 대군(大軍)을 바라보아야 하였다.
그의 생시에 사마리아는 함락되고 이스라엘 열 지파는 열국중에 분산(分散)될 수밖에 없었다.
유다는 거듭거듭 앗수르 군대의 침략(侵略)을 받았고 예루살렘은 포위(包圍)를 당하여 만일 하나님께서 기적적(奇蹟的)으로 개입(介入)하시지 않으셨다면 함락(陷落)되었을 것이었다. (선지 291)

그러나 적(敵)들에게서 오는 위험(危險) 가장 큰 어려움은 아니었다. 주의 종들에게 가장 심도 높은 우울증(憂鬱症)을 가져다 준 것은 고집스러운 사람들이었다. 반역(叛逆)과 배도(背道)로 그들은 하나님의 심판(審判)을 자초(自招)하고 있었다. 그 젊은 선지자는 그들에게 경고(警告)의 기별(寄別)을 전(傳)하라고 부름을 받았다. 그는 완고한 반대자(反對者)들을 만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 그의 생각에 그의 임무는 거의 희망이 없어 보였다. 그가 만약 절망 중에 그의 사명을 버리고 이스라엘을 떠났더라면 그들은 마음 편히 우상숭배(偶像崇拜)를 하였을 것이다. (교회증언 5권750)

3. 이사야는 하나님의 형상(形象)을 봄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에게 기별(寄別) 전하시고자 이사야를 보내려하실 때에 먼저 그 선지자로 하여금 성전(聖殿)안에 있는 지성소(至聖所)의 묵시(黙示)를 보게 하셨다.
갑자기 성전문과 그 안의 휘장이 들리는 듯 걷히는 듯 하더니 감히 발이라도 들여놓을 수없는 지성소의 내부를 눈여겨 볼 수 있도록 허락(許諾)되었다
그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寶座)에 앉으셨는데 그 영광(榮光)의 옷자락은 성전(聖殿)에 가득하였고 그 보좌(寶座)주위에는 스랍들이 그 크신 임금을 호위(護衛)하고 있었고 그들은 둘러싼 영광(榮光)으로 빛나고 있었다.
또 그들이 경배(敬拜)하여 찬양(讚揚)의 노래를 합창(合唱)할 때에 성전문(聖殿門)기둥들이 마치 지진(地震)에 흔들리듯 요동(搖動)하였다.
천사(天使)들이 죄(罪)로 더럽혀지지 않은 입술로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만군의 여호와여 그 영광이 온 땅에 충만 하도다.”하며 하나님을 찬양(讚揚)하였다.
보좌를 둘러있는 스랍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주목(注目)하는 때에 경외심(敬畏心)이 그들의 마음에 가득하여 잠시(暫時)라도 저들 자신을 존귀(尊貴)하게 여기지 아니하고 만군의 여호와를 찬양(讚揚)하였다. (복음 17-18)

나는 우리 모든 동역 자들에게 이사야6장을 주목(注目)해보라고 호소(呼訴)하는 바이다.
그 선지자가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 옷자락이 성전(聖殿)에 가득하였던” 주를 보았을 때의 경험을 읽으라……. 그 때 그 가 말하기를 “화(禍)ㅏ 나여 망(亡)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不淨)한 자(者)로서”. 이것이야 말로 우리 모든 기관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 필요(必要)한 경험(經驗)이다. 그들은 하나님과의 필요불가결(必要不可缺)의 연합을 지속(持續)하지 못할 위험(危險)이 있다. 이렇게 함으로 그들은 진리(眞理)의 힘을 느끼지 못하고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을 식별할 능력(能力)을 잃게 된다. (저자와 편집자에게 보내는 권면91)

이사야1장은 "하나님"을 섬기노라고 공언(公言)하나 금지(禁止)된 길로 행(行)하는 사람들을 묘사(描寫)하고 있다. (원고 29. 1911)

우리들은 단순한 믿음과 의심(疑心)없는 순종의 가치(價値)를 과대평가(過大評價)할 수가 없다.
품성이 완전하게 되는 것은 단순(單純)한 믿음 가운데서 순종(順從)의 길로 따라 나아감으로서 되는 것이다. (원고 5a. 1895)

이사야는 다른 사람들의 죄를 통박(痛迫)하였으나 그는 이제 자신이 다른 사람에게 선포(宣布)하였던 것과 꼭 같은 정죄(定罪)하에 있음을 보게 된다. "하나님"께 경배(敬拜)드릴 때 그는 차갑고 생명(生命)없는 의식(儀式)으로 만족(滿足)하였다. 그는 주님에 관한 계시(啓示)가 그에게 주어졌을 때야 비로소 이것을 알게 되었다. 그가 성소의 거룩함과 엄위(嚴威)하심을 보았을 때 그의 지혜와 재능들이 얼마나 보잘 것 없는 것으로 보였는지 !
거룩한 봉사를 위해서는 자신이 얼마나 무자격(無資格)하고 부적합(不適合)하다는 것을 느꼈는지 !
이사야에게 주어진 이상(異像)은 말세(末世)에 사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상태(常態)를 나타난다.
그들은 믿음으로 하늘 성소에서 진행되고 있는 일을 볼 수 있는 특권(特權)을 받았다.
만약 그들이 이사야같이 주께서 마음에 끼치시기를 계획하셨던 감명을 받는다면 만약 그들이 그들의 영혼을 하나님 앞에 겸비(謙卑)히 할 것 같으면 그들에게는 희망이 있다.
언약의 무지개가 보좌에 둘려있다. 이사야에게 일어났던 그 일이 그들 속에서도 일어날 것이다. 하나님께서 통회(痛悔)하는 자의 마음에서 나오는 탄원(歎願)에 응답하실 것이다. (R & H 1896. 12. 22)

4. 핀 숯불
핀 숯은 정결케 함의 상징이다.
그것이 입술에 닿으면 깨끗지 못할 말이 입에서 흘러나오지 않을 것이다.
핀 숯은 또 주의 종들의 노력의 효력을 상징(象徵)한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냉냉(冷)함이나 속된 것이나 값싼 노력을 증오(憎惡)하신다. 주님의 사업에서 받으실 만하게 일하는 사람들은 틀림없이 열렬하게 기도(祈禱)하는 사람들이며 그들의 일은 하나님 안에서 이루어진다. 그들은 그들의 기록에 결코 부끄러운 것을 남겨 놓지 않을 것이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에 넉넉히 들어감을 얻을 것이며 상(賞)을 받을 것인데 ……. 곧 영생(永生)의 상(賞)이다. (R & H 1888. 10. 16)

5. 그리스도를 뵈옴
이사야는 그리스도께서 사람들의 찬송과 기쁨 중에 승리로 예루살렘에 입성(入城)하시는 광경(光景)을 보았다.
이사야 40:9-11에 나타난 그의 예언적(豫言的) 말씀들은 단순하고도 웅변적이다. 이 같은 영적인 기록 가운데에 그리스도의 사업이 나타나있다. 이사야서 마지막 부분의 여러 장(章)들을 부지런히 연구하여야 한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이것들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오시는 구주(救主)에 관해서 충분히 가르침을 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원고 151, 1899)

6. 오늘날 우리의 기별(寄別)
나의 형제들이여, 그대들은 이사야58장을 보다 주의 깊이 연구할 필요가 있다.
이사야 58장은 우리들이 완전하게 따라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을 표시해준다. “크게 외치라, 아끼지 말라 네 목소리를 나팔같이 높여 나의 백성들에게 그 허물을 야곱의 집에 그 죄를 고(告)하라.”....
그들이 어디에서 잘못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라 그들의 위험을 그들 앞에 보여주라. 죄를 범하고 있으면서 동시에 그들이 스스로 의(義)롭 다고 자랑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주라. 그들은 분명히 하나님을 찾고 있으면서도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있다. 그분의 사랑과 동정과 오래 참으시고 선(善)ㅏ신 하나님이심을 잊어버리고 있다.
세속적 정책이 그들의 사업과 신앙생애(信仰生涯)에 잠입(潛入)해들어 왔다.
그들의 마음은 진리로 깨끗해지지 않았다. 하나님께서는 엄숙한 조롱꺼리로서 행하는 그들의 외적인 겸손예식(謙遜禮式)을 내려다보고 계신다. (편지 76, 1902)

이제 우리 사업은 백성들을 깨우치는 일이다.
주께서 그분의 백성들을 위한 하나의 기별을 갖고 계신다. 사람들이 그것을 받아들이든지 거절(拒絶)하든지 간에 이 기별은 전해질 것이다. 그리스도 당시와 같이 그것은 흑암의 권세자(權勢者)들 에게는 음모(陰謀)의 표적이 될 것이지만 그 기별은 부드러운 말과 고운 언변(言辯)으로 그 소리를 죽여서는 안 되며 하나님에게서 돌아서고 있는 사람들에게 평화가 없는데 “평화‘ ”평화“를 외쳐서는 안 된다.
“악인(惡人)에게는 평강이 없도다.”라고 하나님은 말씀하셨다. (원고 36, 1897)
그러한 죄들이 발견되는 곳이 어디든지 간에 금식과 기도의 시간이 참으로 필요하지만 반듯이 진지한 회개와 결정적인 개혁이 따라야 한다. 이러한 영혼의 통회가 없이는 그런 금식(禁食)과 기도시간은 죄지은 사람의 죄를 증가(增加)시킬 뿐이다. (R & H 1891. 10. 13)

7. 참 개혁자(改革者)들의 특징(特徵)
여기에 개혁자들이 될 특징들이 주어져있다.
그들은 세 천사의 깃발을 들고 있을 것이며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백성이라고 공언(公言)하는 사람들,
그리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온 우주(宇宙)가 지켜보는 가운데서 무너진 데를 보수(補修)하는 일을 열심히 하는 사람들이다. (R & H 1891. 10. 13)

8. 이사야의 기별은 헛되지 않았음
살아계신 하나님을 바라보고 당신의 은혜로우신 제의(提議)를 받아들이라고 선지자가 유다에게 한 권고(勸告)는 헛되지 아니하였다. 그 권고를 열렬히 유의하고 저희 우상(偶像)들을 버리고 여호와를 예배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저희 조물주(造物主)의 사랑과 자비(慈悲)와 친절한 동정을 배워 알았다. 유다 역사상에 다가오는 암흑시대(暗黑時代) 곧 남은 자만이 그 땅에 있을 수 있었던 시대에 선지자의 말은 결정적인 개혁의 열매를 맺고 있었다. 이사야는 선언하기를 “그 날에 사람이 자기를 지으신 자를 쳐다보겠으며 그 눈이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를 바라보겠고 자기 손으로 만든 단(壇)을 쳐다보지 아니하며 자기 손가락으로 지은 아세라나 태양신(太陽像)을 바라보지 아니할 것이”라고 하였다.
많은 사람들은 아주 사랑스러운 많은 사람 중에 뛰어난 자를 바라보아야 하였다.
“너의 눈은 그 영광(榮光)중의 왕을 보”리라 (사 33:17)하는 것은 그들에게 보낸 은혜로운 약속(約束)이었다.
그들의 죄악들은 용서(容恕)받겠고 그들은 하나님만을 그들의 자랑으로 삼을 것이다.
그들은 우상숭배에서 구속(救贖)함을 받은 그 기쁜 날에 부르짖을 것이다.
“여호와께서는 거기서 위엄(威嚴)중에 우리와 함께 계시리니 그곳은 마치 ……. 넓은 하수(下水)나 강이 둘림 같을 것이라. 대저 여호와는 우리 재판장(裁判長)이시오. 여호와는 우리에게 율법(律法)을 세우신 자시오, 여호와는 우리의 왕(王)이시니 우리를 구원(救援)하실 것임이니라.” (사 33:21-22) (선지 304-305)

9. 그의 죽음
주께로부터 놀라운 사실들을 보도록 허락을 받았던 이사야는 유대나라의 죄를 충성(忠誠)되이 책망(責望)하였기 때문에 톱질을 당하여 두 토막으로 켜진 채 죽임을 당하였다.
“돌로 치는 것과 시험(試驗)과 칼에 죽는 것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遊離)하여 궁핍(窮乏)과 환란(患亂)과 학대(虐待)를 받았으니.” (히 11:37). ........ 그들은 이 세상이 별로 가치(價値)없게 생각했던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잔인(殘忍)한 대접(待接)을 받았고 세상에서 추방(追放)을 당하였다. (특별증언 1898, 2, 17)


<2008년 제3기 한기동안 방문해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 주님안에서 평안하시옵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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