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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과 교만 대 겸손(질문, 대답, 설명) 04/1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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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명호 작성일26-04-11 00:38 조회12회 댓글0건

본문

제3과 교만 대 겸손

(4월 18일 안식일/일몰:오후 7시 10분)

 

● 연구 범위 요일 2:15-17, 눅 18:9-14, 요일 1:9, 히 11:24-26, 눅 22:24-27, 빌 2:3-8

● 기 억 절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눅 14:11).

 

우리 모두는 자존심이 강한 사람들, 자신은 절대 틀리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겪어 본 적이 있다. 또 군림하려 하며 가르침이나 건설적인 비판을 결코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을 알고 있을 수도 있다. 더러는 끝없이 갈등을 일으키거나 남을 깎아내리는 데 능숙한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마음속에 누군가가 즉시 떠올랐을 수 있지만 진정 중요한 질문은 이것이다. 내 자신은 어떠한가? 다른 이를 비난하면서 정작 자신에게 있는 교만은 부인하고 있지 않은가? 그것은 스스로를 기만하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교만과 싸워 왔다. 우리는 적어도 어떤 면에서는 자신이 주변 사람들보다 낫다고 여기기 때문에 때로는 그렇게 보이려 하고 행동하고 말하거나, 으스댔던 순간들을 경험한 적이 있을 것이다. 교만이란 자신의 삶이 가치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어하는 욕망에서 비롯되었다는 말이 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셨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돌아가셨기 때문에 이미 우리의 삶이 가치가 있는 삶인 것을 알고 있어야 한다.

이번 주는 자존심이 하나님과의 관계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 살펴보고 다른 사람들 앞에서 그리고 무엇보다 하나님 앞에서의 겸손에 대해 성경이 무엇이라 말하는지 살펴볼 것이다.

 

※ 학습 목표

 깨닫기 : 교만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막는 큰 요인이기에 그분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며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느끼기 : 교만은 가장 극복하기 어려운 죄이기에 예수님의 겸손과 자신이 죄인임을 기억해야 한다.

 행하기 : 영원을 생각하면서 겸손할 때 예수와의 관계에서 성장할 수 있다.

 

TMI 위로

➋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라고 하셨는데 자신을 생각하는 것이 교만한 일입니까?(막 12:31)

*답: 자신을 사랑하지 않으면 이웃 사랑할 수 없다. 다만 사랑하는 자신은 거듭난 자신이다. 

➌ 예수께서 자신을 낮추는 자를 높여 주시는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눅 18:14)

*답: 자신을 낮추는 것은 자기의 실상을 깨달은 사람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➍ 모세가 모든 영화를 버리고 자신을 낮출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이었습니까?(히 11:26)

*답: 예수님과 그분의 약속만 바라봤기 때문이다.

➎ 하나님은 우리의 어떤 것을 가장 불쾌하게 여기시며 그 이유는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답: 교만, 그것은 자기가 피조물인 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탄이 그랬다.

➏ 우리가 어떻게 해야 예수와의 관계에서 성장할 수 있겠습니까?(눅 22:27)

*답: 섬기는 자의 자리에 겸손히 설 때다.

 

결론: 성경은 합당한 자기 사랑을 말하지만, 항상 이타적인 사랑을 말한다. 우리의 모든 가치는 하나님께 근거한 것이기에 교만할 이유가 없다. 이 땅의 부귀, 권세는 영원을 생각할 때 아무것도 아니다. 주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며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깨달을 때 우리는 죄를 자백하며 용서를 구할 것이다. 교만에 사로잡히면 자신을 평가하려 하지 않기에 가장 극복하기 어려운 것이며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맺지 못하게 하는 가장 큰 요인이다. 열린 마음으로 예수님에 대해 배우고 그분의 말씀을 깨달을 때 우리는 자신이 얼마나 교만하고 비참한지 알게 된다. 그렇게 겸손할 때만 예수와의 관계에서 성장할 수 있다.

 

4월 12일(일) 교만의 움켜쥔 손아귀

교만, 이 말을 생각하면 아마도 오만한 정치인, 부자나 유명인, 혹은 공작새가 생각날 것이다. 교만은 자신이 다른 사람들보다 더 중요하거나 낫다고 느끼는 것이다. 실제로 교만은 감정일 뿐이며 의지할 수 없고 거기에 기대서도 안 되는 것이다.

교만은 하나님을 가까이 섬기던 덮는 그룹 천사 루시퍼에게서 처음 시작되었다. 언제 어떻게 해서 그런 이기적인 생각이 그의 마음에 스며들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 생각이 우주를 우리가 지금도 겪고 있는 대쟁투로 몰아넣은 것은 분명하다. 우리는 사탄이 하나님과 정반대인 것을 본다(사 14:12–14, 빌 2:5-11 참조). 사탄이 아담과 하와의 마음에 의심을 심고 그들을 유혹하여 하나님보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신뢰하도록 유혹한 이후로 이 세상은 죄의 결과와 싸우고 있다.

 

요한일서 2:15-17을 읽어보라. 이 구절은 교만과 세상을 사랑하는 것에 대해 어떤 세 가지 교훈을 주는가?

[요일2:15~17]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16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17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답: 육신의 정욕, 아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이 세상에 있는 것이다. 이것은 다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고 지나가고 만다. 이런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고 경고했다.

 

교만에도 긍정적인 면이 있을까? 우리가 아는 맥락에서는 그렇지 않을 것이다. 물론 자존심에도 긍정적인 면이 있으며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와 능력을 인정하고 감사하면서 탁월함을 추구하는 것이 반드시 교만한 것은 아니라는 점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마가복음 12:31에서 예수님은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라고 말씀하신다. 성경 말씀대로 합당한 종류의 자기 사랑이 존재하지만 이것은 항상 이타적인 사랑을 말한다. 또한 삶에 하나님이 임재 하시고 목적이 분명한 방향성을 가진 (딤전 3:1 참조) 사람은 교만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삶 가운데 행하시는 일에 대해 그분께 영광을 돌리지 않을 때 그 사람은 교만한 것이다.

우리의 소유, 능력, 성취가 우리의 가치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우리의 가치는 항상 하나님께 근거한 것이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가진 모든 것 심지어 교만으로 이끄는 것들조차 결국은 오로지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기 때문이다. 이 사실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교훈: 성경은 합당한 자기 사랑을 말하지만 항상 이타적인 사랑을 말한다. 우리의 가치는 하나님께 근거한 것이며 교만으로 이끄는 것조차 우리의 것이 아니다.

 

<부가설명> 성경은 마귀를 정죄한 죄가 교만이라고 기록했다(딤전3:6). 사람이 교만하면 마귀편에 선 것이고 같은 정죄에 빠지는 것은 분명하다. 남을 무시하는 것이나 잘난 체하는 것이나, 사람을 업신여기는 것 등등. 모두가 교만이다. 그러나 성경은 교만의 성경적 신앙적 정의를 했다. “주의 법을 따르지 아니하는 교만한 자들이 나를 해하려고 웅덩이를 팠나이다”(시119:85). 하나님의 법을 따르지 않는 것이 교만이다. 그러므로 성경의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는 다 하나님 앞에 교만한 자들이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해도 성경이 계시한 하나님의 법을 따르지 않고 무시하며 자기 해석을 주장하는 것도 성경이 지적하는 교만이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도덕이 말하는 교만, 성경이 기록한 교만 모두에서 해방되어야 한다. 성경은 예수님 안에서 성령으로 거듭난 새로운 피조물이 된 자기를 잘 지키라고 한다. 이 자기가 없으면 자기 몸과 같이 이웃을 사랑하는 자기도 없다. 이 말을 바르게 이해하기 바란다. 온 천하를 얻고 자기 목숨을 잃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그래서 영생을 얻은 자기를 예수님 안에서 잘 지켜야 한다. 그것은 교만이 아니다.

 

4월 13일(월) 자신을 알라

두 사람이 기도하러 교회에 갔다. 한 사람은 존경받는 장로로, 예배 시작 전 모든 회중이 볼 수 있도록 앞에 서서 큰 소리로 기도하며 자신이 가진 좋은 것들을 하나님께 감사했다. 다른 한 사람은 사회 변방의 소외된 사람으로, 교회 맨 뒤에 서 있다. 죄의 무게로 인해 눈물이 그의 눈을 가린다. 교회 뒤쪽 구석진 곳에서 그는 무릎을 꿇은 채 간절하고 나지막하게 기도한다. “주님, 저와 같은 죄인에게도 자비를 베풀어 주옵소서!”

 

누가복음 18:9-14을 읽어 보라. 이 두 사람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예수님은 이들을 어떻게 생각하셨는가? 이것이 우리에게 주는 중요한 교훈은 무엇인가?

[눅18:9~14] 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10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11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12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13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14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답: 자기를 올바르게 알고 회개하는 사람을 의롭다고 하셨다. 

 

우리는 매우 쉽게 자신을 높인다. 때로는 자신의 업적과 자신이 얼마나 훌륭한지를 자랑하는 것이 본능처럼 자연스럽고 당연해지기도 한다. 하지만 하늘의 관점에서 볼 때 이런 것들 자체만으로는 우리의 평판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사실 이것은 실제로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정반대이다. 왜냐하면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눅 18:14)기 때문이다. 또한 예수께서는 가장 낮은 자리에 앉으라고 권하시며 주인이 원할 때 우리를 높이게 하라고 권면하셨다(눅 14:8-10). 예수님이 가르치신 이 거꾸로 된 나라는 우리가 기대하는 것과 정반대다. “그리스도께서는 자기 자신이 죄인임을 아는 자만을 구원하실 수 있다”(실물교훈, 158).

우리가 죄인이라는 실제적 상태와 그리스도가 절실히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을 때에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요일 1:9)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담대하게 그분께 나아갈 수 있다.

우리가 그리스도께 가까이 나갈수록 우리는 자신의 죄악과 무가치함을 더욱 깨닫게 된다. “자신의 진정한 상태를 알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이다. 사람들이 자기의 의를 그처럼 높이는 까닭은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실물교훈, 159). 그렇다면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어떻게 생각하시는가? 베드로전서 5:5은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신다고 분명히 말한다.

 

교훈: 주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지만 겸손한 자에게는 은혜를 주신다.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때만 우리는 죄를 자백하며 그분에게 용서를 구할 것이다.

 

<부가설명> 사람이 자기 분수를 바르게 알고 있다는 것은 은혜요 특권이다. 지구에 사는 사람들은 아무도 스스로 자기 분수를 바르게 알 수 없는 것 같다. 살아서 활동하며 도덕적으로 선을 행하고 학문적으로도 훌륭한 상태가 많기 때문이다. 물론 사람들 중에는 도덕적으로 악한 사람, 학문적으로 잘못 된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저 그런대로 살아간다. 그런데 세상적으로 아무리 탁월하고 훌륭해도 사람의 본질을 바르게 아는 사람이 없다. 그것은 사람은 예외없이 모두 죄인이라는 것이다. 도덕적으로 죄를 지어서 죄인이 아니다. 출생하면서 죄인이다. 아니 태초에 아담이 선악과를 먹은 때부터 아담에게서 출생하는 모든 사람은 죄인인데, 사형수들이다. 이것을 성경은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었다’(고전15:22)라고 계시했다. 사람은 살다가 그냥 죽는 것이 정상인줄 아는 사람에게 이 사실은 인정하기 어려운 진실이다. 그래서 사람은 자기 분수를 바르게 아는 일이 어렵다. 성경에서 이 진리를 깨달을 때 비로소 죄인이며 사형수라는 것을 인정하고 생명의 주님 앞에 ‘나는 죄인입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다. 그때 하나님은 그에게 생명을 허락하신다. 성경은 이것을 생명 얻는 회개라고 했다. “그들이 이 말을 듣고 잠잠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 하니라”(행11:18). 사람이 이 진리를 깨달을 때 회개하고 겸손해질 수 있다.

 

4월 14일(화) 겸손한 종 모세

애굽 궁전의 웅장한 홀은 사치와 쾌락, 안락함을 뽐내었다. 모세는 “애굽 사람의 모든 지혜를 배워 그의 말과 하는 일들이 능하”(행 7:22)였다. 권력과 부, 명성을 누리는 삶이 그의 손에 있었지만 모세는 전혀 다른 길을 선택했다. “역사가, 시인, 철학자, 군대 장관, 입법자로서 그와 견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온 세계가 자기 앞에 있었으나 그는 부와 존귀와 명예라는 달콤한 전망을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게 여겼다(부조와 선지자, 246).

 

모세가 왜 다른 길을 선택하고 자신을 낮추었는지에 대해 히브리서 11:24-26은 무엇이라고 말하는가?

[히11:24~26]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하고 25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26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답: 더 큰 재물, 곧 하나님께서 주시는 상을 바라봤기 때문이다.

 

그가 어떤 배경에서 자랐으며 얼마나 권세 있는 사람이었는지를 생각할 때 모세가 보인 후기의 겸손한 삶은 놀랍다. 그날의 충동적인 범죄(출 2:12) 이후 그는 자신감과 자족감을 잃었다. 산과 광야의 교실에서 교만을 벗어버린 모세는 40년 동안 하나님께로부터 한 민족을 노예 생활에서 이끌어 내어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기 위해 필요한 것을 배웠다. 애굽에서 그가 누릴 수 있었던 부귀와 권세는 영원을 생각할 때 아무 것도 아니었다. 하나님은 그를 매우 구체적으로 부르셨고 모세는 그 부르심에 순종했다.

그의 겸손에 대한 가장 중요한 기록으로 보이는 민수기 12:3은 이렇게 말한다.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 성경의 위대한 족장 중 하나인 모세는 겸손과 온유함으로 잘 알려져 있다. 불타는 떨기나무, 애굽의 재앙, 홍해를 건넌 것, 하늘에서 내린 만나,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대화, 십계명을 받음, 바위를 친 후 하나님께 말씀을 들은 것 등의 그의 삶의 중요한 사건에 교만이 깃들었다면 그의 삶과 지도력은 얼마나 달라졌겠는가.

죄가 우리 삶에 밀착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예수님이 꼭 필요하다. 우리는 스스로의 힘으로 겸손해질 수 없다. 당신의 삶을 생각해보라. 모세가 그랬던 것처럼 누군가 당신의 삶을 평가할 때 “겸손하다”거나 “온유하다”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교훈: 모세는 권세 있는 사람이었으나 자신을 낮추고 함께 고난받기를 택했다. 애굽에서 그가 누릴 수 있었던 부귀, 권세는 영원을 생각할 때 아무것도 아니었다.

 

<부가설명> 죄는 우리 삶에 밀착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아담 자손으로서 인간 자체가 죄 자체다. 도덕적으로나 성경 율법적으로 죄를 짓지 않아도 아담 안에서 선고된 사형수에서 벗어날 수 없다. “첫째 아담과의 관계에서 인류가 그에게서 받은 것이란 죄와 사형 선고밖엔 없다.”(새자녀 지도법 475.3). 모세는 아마도 미디안으로 도망한 후에 그가 죄인이라는 것을 깨달았을 것이다. 그는 겸손해질 수밖에 없었다. 사형선고 아래 있는 죄인인 것을 깨닫고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머리를 들고 잘랐다고 할 수 있을까? 예수님의 구속이 없으면 한 사람의 예외도 없이 다 사망으로 종신한다. 아담이 언약을 어겼을 때 ‘종신’한다는 선고를 받았다(창3:17~19). 그래서 아담의 모든 자손은 다 아담 안에서 종신수가 되었다. 사람이 죽는 것은 종신형이 집행되는 것일 뿐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죄 자체가 되셔서(고후5:21, 소망755) 사람이 죄 자체가 아니면 대속자가 죄 자체가 되어야 할 이유가 없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2ㅚ 자체로 종신하셨다. 그리고 부활하셔서 사망을 폐하심으로(딤후1:10) 아담 자손들을 종신형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하셨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은 여전히 종신수 죄 그 자체다. 죄가 밀착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죄 그 자체라는 것을 깨닫고 그것을 시인하는 것이 근본적인 회개다. 어떻게 교만할 수 있겠는가?

 

4월 15일(수) 가장 큰 죄

당신이 예수님의 열두 제자 중 한 명이었다고 생각해 보라. 예수님과 함께 다니고 먹고 그분 가까이에서 잠들고 수많은 사람의 삶을 변화시키시는 그분에게서 배우며 당신의 삶도 변화된다. 셀 수 없는 사람들이 그분을 향해 몰려드는 것을 보며 그분의 가장 가까운 제자 중 한 명으로 선택되었다는 것이 얼마나 특별한 일인지 감격하게 된다. 그러다가 문득 궁금해진다. 모든 제자 가운데 가장 큰 제자는 과연 누구일까?

 

누가복음 22:24-27에서 제자들이 누가 큰지에 대해 논쟁할 때 예수께서 어떻게 답하셨는지 읽어 보라. 이 구절에서 예수님의 가르침의 핵심을 가장 잘 나타내는 말씀은 무엇인가?

[눅22:24~27] 또 그들 사이에 그 중 누가 크냐 하는 다툼이 난지라 25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방인의 임금들은 그들을 주관하며 그 집권자들은 은인이라 칭함을 받으나 26 너희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큰 자는 젊은 자와 같고 다스리는 자는 섬기는 자와 같을지니라 27 앉아서 먹는 자가 크냐 섬기는 자가 크냐 앉아서 먹는 자가 아니냐 그러나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

*답: 예수님은 섬기는 자로 계신다고 하셨다. 

 

이렇게 오랜 시간 예수님과 가까이 지냈으니 제자들은 이런 논쟁에 관심조차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는가?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자신들의 부르심에 만족하기보다 각자 자신이 다른 제자들보다 낫다고 생각하는 자만심이 제자들의 마음속에서 일어났다. 우리도 쉽게 이런 생각에 사로잡히곤 한다. 그러나 영감의 말씀은 말한다. “교만과 자만심만큼 하나님께 더 가증스럽고 사람의 심령에 더 위험한 것은 없다. 모든 죄 중에 가장 절망적이고 가장 고치기 어려운 죄는 교만이다”(실물교훈, 154).

교만은 매우 심각한 문제이다. 우리의 교만은 그 어떤 것보다 하나님을 노엽게 하며 우리가 자주 그 실체를 제대로 보지 못하기 때문에 극복하기 어려운 특성이다. 자만심에 사로잡히면 교만이 그 왕좌에 앉아 있기 때문에 우리는 스스로를 평가하려 하지 않는다. 우리는 잠시 멈춰서 자신을 살펴보고 하나님께서 우리의 진정한 상태를 볼 수 있게 눈을 열어 주시기를 기도해야 한다. 왜냐하면 교만이야말로 오늘 우리가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맺지 못하게 하는 가장 큰 요인일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멈춰 서서 자신을 살피는 정직한 기도를 드려야 한다. “주여, 저는 제 마음을 당신께 드릴 수 없사오니 당신이 제 마음을 취하소서. 제 마음은 당신의 소유물이옵니다. 저는 당신을 위하여 그것을 보존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당신이 그것을 깨끗이 보존하옵소서. 비록 제가 연약하고 그리스도와 같지 않을지라도 저를 구원하여 주옵소서. 저를 재창조하사 당신의 사랑이 저의 심령 속을 통하여 흐를 수 있도록 순결함과 거룩함 가운데로 저를 이끌어 올리소서”(실물교훈, 159).

 

교훈: 교만에 사로잡히면 자신을 평가하려 하지 않기에 가장 극복하기 어려운 성격의 성품이며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맺지 못하는 가장 큰 요인일 수 있다.

 

<부가설명> 이미 말한 대로 교만은 마귀의 본질적이 죄다. 루시퍼는 자기가 피조물인 것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집회의 산에 자기 자리를 펴고 지극히 높으신 분과 동등하겠다고 했다(사14:12~14). 이것이 마귀 루시퍼가 정죄된 이유다. 그가 지극히 높으신 여호와 하나님과 동등하겠다는 것은 자신도 스스로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려면 그것을 증명해야 한다. 여호와께서 창조해 준 자기 존재를 창조주께 반납하고 스스로 존재하면 된다. 가능한 일이 아니다. 그래서 하늘에서 도망한 것이다. 그는 지구로 직행한 것이 아니다. 우주를 떠돌아다녔다(유1:13). 그러나 있을 곳을 얻지 못하자 마지막으로 창조된 지구로 와서 순진무구한 아담 부부를 속이고 지구를 자기 왕국으로 만들었다(눅4:5,6). 그래서 지구는 사형수의 종신하는 감옥이 되었다. 여기서는 종신하지 않으면 탈옥할 수 없다. 종신하기 전에 예수님을 믿을 때 그분이 부활한 그 생명을 얻어서 비로소 의가 된다. 우리는 죄 자체가 되었듯이 예수님 안에서 의 자체가 된다. 고후5:21을 자세히 읽어보라.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4월 16일(목) 그를 보라

누가복음 22:27을 다시 읽어보라. 이 구절에 담긴 그리스도의 모든 제자들에게 주어진 핵심 기별은 무엇인가?

[눅22:27] 그러나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

*답: 남을 섬길 수 있는 겸손한 사람이 되라는 기별이다.

 

“그러나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눅 22:27)라고 하시며 겸손의 진정한 본보기로서 제자들의 우월하고자 하는 욕망, 옆에 있는 사람보다 자신이 낫다고 믿었던 것과 극명한 대조를 보이신 예수님을 보라. 예수께서는 사랑으로 가득하셨고 무리를 목자 없는 양떼같이 바라보셨기 때문에 매일 주변의 어려움 가운데 있는 이들에게 날마다 자신을 주셨다. 이 단순한 진리를 깨닫는 이는 거의 없었지만 그분은 인류의 삶에 그 무엇보다도 당신이 필요하다는 것을 아셨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당신의 은혜의 사역을 이해하고 당신과 관계를 맺으라는 초청에 응답하기를 바라시면서 하늘을 버리고 인류의 죄를 위해 죽으셨다.

 

빌립보서 2:3-8을 읽어 보라. 이 구절은 십자가의 빛 안에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무엇을 말해주는가?

[빌2:3~8]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4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 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답: 예수님의 삶을 바라보면서 섬기는 겸손으로 살라고 말한다.

 

예수께서 모든 것을 이루셨다. 그분이 모든 짐을 지셨다. 우리가 시간을 내고 멈춰서 그분을 참되고 온전하게 바라볼 수 있다면 우리는 자신의 부정함과 추함 그리고 오늘날 우리 삶에 그분이 얼마나 절실히 필요한지 깨달을 것이다.

그분을 바라볼 때 다른 모든 것, 특히 우리 자신이나, 스스로 대단하다고 여기던 것들이 완전히 그 빛을 잃고 무의미해질 것이다. 예수님이 어떤 분이시며 그분이 하신 일 그리고 그분이 피조물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가 가장 중요하고 우선이 되며 그분을 바라볼 때 자아는 분명히 사라질 것이다.

예수, 얼마나 아름답고 능력 있는 이름인가. 그분은 겸손의 극치이시다.

열린 마음으로 그분에 대해 배우고 그분이 우리를 위해 무엇을 하셨는지 이해하며 그분의 생명의 말씀이 우리 마음에 젖어들 때, 우리는 자신이 얼마나 교만하고 비참한 존재인지 깨닫게 된다. 그분과 함께 생활하고 그분에게서 배운 제자들조차 교만과 싸워야 했다면 우리는 그들과는 다르다고 스스로 기만할 수 없다. 우리가 겸손할 때만 우리는 예수님과의 관계 가운데서 성장할 수 있다.

 

교훈: 열린 마음으로 그에 대해 배우고 그 말씀을 깨달을 때, 자신이 얼마나 교만하고 비참한지 깨닫게 된다. 우리가 겸손할 때만 예수와의 관계에서 성장할 수 있다.

 

<부가설명> 성경에 바라봐야 할 것만 바라보라는 표현의 단어가 히브리서에 두 개 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히11:26). 여기 ‘바라봄’이라는 말이다. 이것은 헬라어로 ‘아포블레포’인데 ‘모든 다른 것에서 눈을 돌려 한 대상만 보다’ 모세는 그렇게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분의 약속만 바라보았다. 애굽의 보화가 보이지 않았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12:2). 여기 ‘바라보자’는 ‘아포라오’인데, ‘다른 것들로부터 눈을 돌려 바라볼 것만 주목하다’를 뜻한다. 이 단어는 빌2:23에 한 번 사용되었는데 히브리서의 뜻과는 다르게 쓰였다. ‘내가 봐서 보낼게’라고 말할 때 쓰였다. 아무튼 모세에게 사용한 말이나 12:2에 쓰인 단어는 눈을 예수님께 고정시키라는 뜻이다. 그러면 자아가 없어지고 바울처럼 오직 예수께서 내 안에 사는 경험에 이를 것이다. 이것이 남은 자들의 눈이어야 하지 않을까? 그래서 라오디게아교회에 안약을 사서 발라 보게 하라고 하신 것이 아닌까?

 

4월 17일(금) 더 깊은 연구를 위해

“우리가 예수님께 가까이 나아갈수록, 그분의 성품의 순결함을 더 분명히 분별할수록 자신이 지극히 죄악 된 것을 더 분명하게 깨달으며 자신을 높이고자 하는 마음은 줄어들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거룩하다고 인정하는 자들은 결코 자신의 선함을 드러내려 하지 않을 것이다”(실물교훈, 160).

“영광 앞에 겸손이 있다. 사람들 앞에서 높은 자리를 차지할 사람을 세울 때 하늘은 침례 요한과 같이 하나님 앞에서 낮은 자리를 취하는 사람을 선택한다. 가장 어린아이와 같은 제자가 하나님의 사업에는 가장 효율적인 사람이다. 하늘의 천사들은 자신을 높이려 하지 아니하고 영혼을 구원하고자 힘쓰는 자와 협력할 수 있다. …사람들이 자기를 높이고 하나님의 크신 계획의 성공에 저들이 필수적이라고 느낄 때 주께서는 그들을 물러나게 하신다.

예수의 제자들이 그리스도와 나라의 본질에 대한 가르침을 받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그 나라의 원칙과 조화를 이루게 할 마음의 변화였다. …어린아이와 같은 단순함, 자기 부정, 신뢰하는 사랑은 하늘이 가치 있게 여기는 속성이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위대함의 특징이다. …진실하고 통회하는 사람은 하나님 보시기에 귀중하다. 하나님은 사람의 지위나 재산이나 지적 위대함이 아닌 그리스도와의 하나됨 위에 당신의 인을 찍으신다”(시대의 소망, 436).

 

함께하는 토의를 위해

➊ 마태복음 23:12; 시편 25:9; 시편 149:4; 야고보서 4:6, 10을 읽어 보라. 이 구절은 교만과 겸손에 대해 어떤 통찰을 더해 주는가?

*답: 온유하여 자기를 낮추는 자에게 갈 길을 보여주시고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게 된다.

➋ 솔직히 생각해 보라. 마지막으로 자신의 선함을 뽐냈던 적은 언제였는가? 이것이 하나님과의 관계나 당신을 과시해 보였던 사람들과의 관계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

*답: 각자 스스로 대답할 문제다.

➌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강화하기 위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려면 당신의 삶에서 무엇을 바꾸어야 하겠는가?

*답: 자기 주장을 강하게 내미는 습관이 없는가? 버려야 할 것이다.

 

요약: 교만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성장하는 데 가장 큰 장애물 중 하나가 될 수 있다. 우리가 자만심에 빠져 이 관계의 필요성을 깨닫지 못한다면 결코 그것을 추구하지 않을 것이다. 반대로 예수님은 이 땅에서 가장 겸손하신 분이셨으며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맺는 방법에 대한 가장 완벽한 본보기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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