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과 하나님을 아는 것(질문, 대답, 설명) 04/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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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명호 작성일26-04-03 07:46 조회34회 댓글0건본문
제2과 하나님을 아는 것
(4월 11일 안식일/일몰:오후 7시 3분
● 연구 범위 창 3:1-5, 레 20:26, 삼상 2:2, 요일 4:7-19, 창 1:1; 2:7, 마 1:23; 28:20
● 기 억 절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 17:3).
하나님의 성품을 분명하게 이해하는 것은 그분과의 굳건한 관계를 맺는 데 필수적이다. 그래서 이번 주에는 성경이 하나님의 성품에 대해 말하는 바를 주의 깊게 살펴볼 것이다. 동시에 이것을 명심해야 한다. “이 세상을 덮고 있는 어둠은 하나님께 대한 오해의 어둠이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지식을 점점 더 잃고 있다. 하나님의 품성은 오해되고 잘못 해석되어 왔다. 이러한 때에 감화력과 구원의 능력으로 빛나는 하나님께서 주신 기별이 전해져야 한다. 하나님의 성품이 널리 알려지게 해야 한다. 이 어두운 세상에 하나님의 영광의 빛 곧 그분의 인자와 긍휼과 진리의 빛이 비춰져야 한다. …세상에 전파되어야 할 마지막 긍휼의 기별은 하나님의 사랑의 성품을 드러내는 것이다”(실물교훈, 415).
하나님을 충분하게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하겠지만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성경이 그분에 대해 무엇이라고 말하는지 보여주는 것이다. 하나님의 놀라운 성품에 대해 배우려 할 때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없으며 지금은 더욱 그렇지만 하나님에 대해 더 많이 알아갈수록 그분에 대한 우리의 이해와 사랑이 깊어지기를 기도하자. 그리할 때 우리는 궁극적으로 그분의 사랑과 성품을 다른 이들에게 비추기 위해 그분을 더 닮아 가며 성장하고자 할 것이다.
※ 학습 목표
깨닫기 : 하나님의 성품을 바르게 알기 위해서 예수님을 알고 그분의 말씀을 읽어야 한다.
느끼기 : 선하시고 사랑이신 그분의 품성을 이해하면서 더 깊은 관계에 들어가기를 바란다.
행하기 : 세상에 가득한 하나님의 품성의 대한 오해에 맞서 그분의 사랑을 실천하며 나타낸다.
TMI 위로
➋ 성경은 하나님을 어떤 다양한 모습으로 묘사하고 있습니까?
*답: 하나님의 전능하심, 전지하심, 공의로우심, 자비하심, 인자하심, 오래 참으심, 지혜, 은혜, 용서하심, 우리의 삶을 향한 그분의 뜻, 죽음을 이기시는 능력, 왕권, 영원하심, 거룩하심 등등.
➌ 하나님의 가장 중심이 되는 속성은 무엇이며 왜 그렇다고 생각합니까?(삼상 2:2)
*답: 거룩하심. 그분은 창조주이시고 우리와 우주 만상은 피조물이기 때문이다.
➍ 하나님이 사랑이시라는 말은 당신의 형상을 닮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합니까?(창 1:27)
*답: 우리도 사랑의 산물이며 사랑을 실천하라는 기별이다.
➎ 하나님께서 흙으로 사람을 빚으신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창 2:7)
*답: 사람에게 생기를 불어넣으심으로 하나님과 가까이 있도록 하려는 것으로 저자가 설명했다.
➏ 성경이 같은 주제를 다루면서 표현 방식이 같지 않은 이유는 무엇 때문이라고 생각합니까?
*답: 하나님을 다양하게 이해하도록 하기 위한 사랑의 배려다.
➐ 인간의 지성과 노력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얼마만큼 깨달을 수 있겠습니까?
*답: 모래 한알 만큼이나 깨달을까?
결론: 하나님의 품성은 오해되어 왔다. 세상에 하나님의 사랑의 성품을 드러내야 하는 우리는 사탄의 곡해에 대항해 그분을 분명하게 보여야 한다. 그분의 거룩하심은 그분의 속성의 중심이기에 공격의 대상이요 가장 오해받는 특성이다. 선하시고 사랑이신 하나님은 우리를 당신의 형상대로 창조하셨고. 예수님은 완전한 사랑을 보이시며 모두를 주께로 이끄신다. 초월해 계시고 가까이 계시는 하나님의 다양한 모습 속에 우리는 균형 잡힌 이해를 갖기 위해 성경 전체를 읽어야 한다. 이를 통해 다양한 필요를 채우며 예수에 대한 지식을 더 깊게 하고 하나님을 더 잘 알 수 있다. 그분을 더 알수록 더 사랑하며 깊은 관계를 갈망하게 될 것이다.
4월 5일(일) 하나님에 대한 더 분명한 그림
성경은 하나님에 대해 가장 진실하고 명확하며 일관되게 진술한다. 성경의 모든 책은 우리가 보는 세상과 보이지 않는 세상 사이에 놓인 보이지 않는 장막을 걷어내어 우리가 어디에서 왔고 어디로 가는지 그리고 궁극적으로 세상을 누가 다스리며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보여주려고 한다.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성경에서 우리는 말씀과 성육신하신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당신을 우리에게 알려주시는 유일하신 참하나님을 발견한다. 거기에는 하나님의 전능하심(욥 1:12), 모든 것을 아시는 그분의 전지하심(사 46:9, 10), 공의로우심(사 30:18), 자비하심(신 7:9), 인자하심과 오래 참으심(롬 2:4), 지혜(고전 2:7), 은혜(고후 12:9), 용서하심(마 6:14), 우리의 삶을 향한 그분의 뜻(렘 29:11), 죽음을 이기시는 능력(요 11:25), 왕권(시 47:8), 영원하심(신 33:27) 등 우리가 그분을 사랑하고 지속적인 관계를 맺어야 할 충분한 이유가 되는 많은 본성이 나타난다. 우리가 하나님과 그분의 본성에 대해 더 많이 알수록 우리는 그분을 더 사랑하며 그분과 친밀하고 지속적인 관계를 갈망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성품을 처음으로 의심한 것은 루시퍼였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에 대한 그의 의심은 결국 우주 역사상 가장 큰 충돌로 이어졌다.
그 이후로 “사탄은 사람들의 마음을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얻지 못하게 하는 것들로 채우기 위해 끊임없이 연구하고 있다”(교회증언 5권, 740). 사탄은 범신론이든, 다신론이든, 이신론이든 우리를 잘못 이해하게 할 수만 있다면 우리가 하나님을 어떻게 이해하든 개의치 않는다.
창세기 3:1-5을 읽어보라. 하와와 대화하는 사탄의 목표는 무엇이었는가? 그는 하나님의 성품에 대해 어떤 거짓말을 했는가?
[창3:1~5] 그런데 뱀은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하니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이르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2 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열매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3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4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5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답: 하나님은 인색하고 무자비한 무서운 분이라는 인상을 주고 거짓말한다는 주장을 전했다.
사탄이 하와에게 한 말의 궁극적인 의미는 이것이다. 하나님은 너에게 비밀을 숨기고 있다. 하나님은 너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지 않는다. 그분은 신뢰할 수 없다. 엘렌 화잇은 “대쟁투가 시작된 이래로 하나님의 성품을 왜곡하고 그분의 율법에 대한 반역을 부추기는 것이 사탄의 목적이었다”(부조와 선지자, 338)라고 이것을 더 자세히 설명한다.
교훈: 사탄은 세상에 하나님을 왜곡하여 보이지만 성경은 그분의 분명한 그림을 보여준다. 우리가 그분을 더 알수록 더 사랑하며 깊은 관계를 갈망하게 될 것이다.
<부가설명> 성경의 하나님 여호와는 그 이름이 ‘스스로 존재하는 자’라는 뜻이다. 어떻게 스스로 존재할 수 있는지는 이 세상 사람의 이해로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스스로 존재하시기 때문에 그분이 참 신, 곧 하나님이시라는 것이다. 스스로 존재하지 않으면 존재할 수 없는 존재는 그를 존재하게 한 선재(先在)하는 어떤 존재가 있는 것이다. 그러면 그 선재하는 그가 하나님이다. 그러므로 참으로 하나님이시라면 스스로 존재하는 자여야 한다. 성경의 하나님은 출3:14,15에서 친히 ‘나는 스스로 있는 자’라고 하셨다. 그리고 이름은 여호와라고 가르쳐주셨다. 스스로 존재하시는 그 생명은 본질이 사랑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성경은 선언했다(요일4:8,16). 사탄도 여호와 하나님의 창조물이다. 그런 그가 자기는 피조물이기를 거절하는데서 사망이 시작되었다. 피조물이 피조물이기를 거절하면 창조주께 자기 존재를 반납하고도 존재할 때만 피조물이 아니라는 증명이 된다. 루시퍼는 그렇게 할 수 없기 때문에 반납하지 않으려고 하늘에서 도망쳤지만 우주에 충만하신(렘23:24). 여호와를 피할 수 없다. 하나님이 여호와가 아니라는 것을 우주에 퍼뜨리다가 그는 탈타로스에 빠지고 마침내는 불 못에서 존재를 영원히 상실하게 될 것이다. 재림성도의 의식에 우리가 경배하는 여호와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확실히 증거할 말씀의 지식이 필요하다. 우리가 예수님 안에서 생명을 얻으면 사랑으로 그것이 드러나게 되어 있다. 그것을 연구하여 간직하고 증거하자.
세상에서 하나님의 성품은 어떻게 왜곡되고 있습니까? 그보다 당신은 때때로 다른 이들에게 그분의 성품을 어떻게 왜곡해서 보였을 수 있습니까?
4월 6일(월) 하나님은 거룩하시다
거룩하다는 말은 사람들이 일상에서 흔히 사용하는 말이 아니다. 그것은 아마도 우리 삶과 주변에는 거룩한 것이 거의 없기 때문일 것이다. 안식일은 시간 가운데 거룩한 날이며 하나님은 분명히 거룩하시다. 하나님을 제외한다면 우리의 일상에서 거룩함을 찾기는 어렵다. 하나님의 성품과 가장 자주 연관되는 속성을 살펴보면 하나님 존재의 중심이 거룩함인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거룩함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가?
레위기 20:26, 사무엘상 2:2, 이사야 57:15, 에스겔 38:23은 하나님을 어떻게 묘사하고 있는가?
[레20:26] 너희는 나에게 거룩할지어다 이는 나 여호와가 거룩하고 내가 또 너희를 나의 소유로 삼으려고 너희를 만민 중에서 구별하였음이니라.
[삼상2:2] 여호와와 같이 거룩하신 이가 없으시니 이는 주 밖에 다른 이가 없고 우리 하나님 같은 반석도 없으심이니이다.
[사57:15] 지극히 존귀하며 영원히 거하시며 거룩하다 이름하는 이가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높고 거룩한 곳에 있으며 또한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있나니 이는 겸손한 자의 영을 소생시키며 통회하는 자의 마음을 소생시키려 함이라.
[겔38:23] 이같이 내가 여러 나라의 눈에 내 위대함과 내 거룩함을 나타내어 나를 알게 하리니 내가 여호와인 줄을 그들이 알리라.
성경이 하나님을 거룩함의 완전한 본보기로 묘사할 때 이것은 그분에게 악과 죄가 전혀 없으시며 그것에서 완전히 분리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끝까지 100% 선하시다.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그분의 다른 모든 속성의 중심이다.
말하자면 하나님의 사랑은 순수하고 거룩한 사랑, 그 어떤 이기심이나 자기중심적 동기가 전혀 없는 사랑이다. 그분의 전지하심은 거룩한 전지하심이며 악한 의도가 전혀 없다. 만약 전지하신 하나님이 거룩하지 않으시다면 우리가 그분을 신뢰할 수 있겠는가? 절대 그럴 수 없다. 우리는 그분을 두려워할 것이며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나님의 전능하심은 거룩한 전능하심이다. 하나님이 전능하지만 거룩하지 않은 분이라면 어떻겠는가? 강하지만 악한 폭군이 될 수 있다. 오직 하나님의 거룩하심만이 우리가 그분을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게 한다. 그것은 그분이 처음부터 끝까지 선하시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거룩하심이 하나님의 성품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특징인 이유이다. 하지만 거룩함이야말로 가장 오해받는 특성이기도 하다. 모세, 이사야, 에스겔, 다니엘, 요한과 같은 하나님의 임재 앞에 섰던 성경 인물들을 생각해 보라. 그들의 처음 반응은 어떠했는가?
*답: 지극히 거룩하시다고 묘사하고 그분 만이 그룩하시다고 묘사했다.
그들은 신발을 벗거나, 얼굴을 가리고 죽은 것처럼 엎드렸다. 인간으로서 우리는 죄 가운데 있고 전혀 거룩하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의 임재 앞에 서 있을 수 없다. 하나님의 얼굴을 보는 사람은 누구든지 살 수 없다. 그들처럼 엘렌 화잇도 환상을 볼 때면 자주 “영광 … 영광 … 영광”이라고 외쳤는데 이는 그 말만이 그녀가 본 것을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단어였기 때문이다. 네 생물 역시 밤낮으로 쉬지 않고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여 전에도 계셨고 이제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시라”(계 4:8)라고 말한다.
교훈: 하나님은 온전히 선하시며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그분의 모든 속성의 중심이 된다. 이것이 가장 중요한 특성이기에 공격의 대상이며 가장 오해받는 특성이다.
<부가설명> 거룩하다는 말은 종교적 용어다. 특히 성경 용어다. 기독교 용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성경 용어라고 말하기를 좋아한다. 거룩하다는 것은 성품 이야기가 아니다. 거룩함을 성품으로 이해하면 거룩함을 결코 모를 것이다. 그것은 본질을 말하는 것이다. 거룩하다는 말의 뜻이 무엇인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뜻은 구별되었다는 것이다. 무엇이 구별되었다는 말인가? 거룩한 것은 일반적인 것과 본질이 구별된 것이다. 하나님이 거룩하신 것은 그 이름이 거룩한 것이다. 우주 만상 중에 스스로 있는 것이 무엇이 있는가? 오직 그 이름이 여호와이신 성경의 하나님 창조주 뿐이시다. 그래서 그분이 거룩하신 것이다. 거룩하다는 것을 도덕적이거나 성품적인 것이나 종교적인 것으로 해석하거나 설명하려고 하지 않는 것이 성경적이 아닐까하고 나는 생각한다. 오직 그분만이 자존하시는 분이시다. 그래서 그분은 여호와이시고 하나님이시고 그분이 창조한 모든 피조물에게 경배받으실 유일한 분이시다. 그분을 믿음으로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들은 성도(聖徒), 곧 거룩한 무리이다. 왜? 아담의 모든 후손은 사망의 존재인데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예수님 안에서 영생을 얻은 생명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생명 있는 자와 죽은 자는 얼마나 다른가?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성도, 곧 거룩한 자들이다. 창조주는 피조물과 전혀 다르다. 거룩하신 분이시다. 그리스도인은 영생의 생명을 가졌기 때문에 거룩한 사람이다. 그래서 생명 있는 사람처럼 생활해야 한다. 마치 생명 없는 사람이 썩는 것처럼 썩는 삶을 살 수 없다. 그래서 거룩하게 살아야 하는 것이다. 아멘.
4월 7일(화)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사랑은 아마도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성품을 묘사할 때 가장 익숙하게 사용하는 용어일 것이다. 이는 요한일서 4:8에 기록된 하나님의 정체성에 관한 선언 곧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라는 말씀 때문일 것이다. 요한은 “하나님은 사랑하신다”라고 말하지 않고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고 말한다. 사랑은 하나님의 성품이며 그분의 본질 그 자체이다. 많은 사람에게 있어 하나님의 모습은 항상 왜곡되고 불완전한 인간적인 사랑의 정의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우리의 사랑에 대한 정의 자체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와 당신이 거룩한 말씀으로 자신에 대해 어떻게 계시하는지에 따라 정의되어야 한다.
요한일서 4:7-19은 사랑에 대해 우리에게 무엇을 설명해 주는가?
[요일4:7~19]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8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9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10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11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12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지느니라 13 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므로 우리가 그 안에 거하고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아느니라 14 아버지가 아들을 세상의 구주로 보내신 것을 우리가 보았고 또 증언하노니 15 누구든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시인하면 하나님이 그의 안에 거하시고 그도 하나님 안에 거하느니라 16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시느니라 17 이로써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루어진 것은 우리로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 주께서 그러하심과 같이 우리도 이 세상에서 그러하니라 18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19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답: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를 살리려는 것이다. 그래서 독생자를 보내사 우리 대신 죽음을 취하시고 그분의 생명을 우리에게 주신 것이다.
요한일서에서 “하나님 안에 거하”라는 거듭되는 권면에서 볼 수 있듯이 하나님의 사랑은 완전하고 자유로우며 매우 관계적인 특성을 지닌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요일 4:16)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며 그분은 우리가 사랑하고 사랑을 갈망하도록 당신의 형상대로 창조하셨다(창 1:27). 사랑을 나타내는 가장 주요한 히브리어 단어는 “헤세드(ḥesed)’”이다. 이 단어는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언약적 사랑을 묘사하며 충성, 보호, 변함없음 그리고 다정함 같은 특성을 포괄한다. 고대 히브리어와 헬라어는 하나님을 지칭하는 다양한 이름을 사용하며 그 이름들은 하나님의 아름다운 성품의 여러 측면을 보여주고 밝혀준다. 여기 두 가지 예를 보라.
아도나이(Adonai): 영원히 다스리시는 만물의 주님, 언약과 관련된 이름(창 15:2, 삿 6:15, 말 1:6, 시 97:5). 여호와 이레: 주께서 예비하시리라(창 22:13, 14).
하나님의 사랑의 가장 위대한 표현은 당신의 아들을 이 땅에 선물로 보내시고(요 3:16) 죄인들을 위해 죽으신(롬 5:8) 것을 통해 궁극적으로 나타났다.
하나님은 이 선물을 인류에게서 거두실 수도 있었지만 당신의 관대하고 강하며 지극히 이타적인 사랑 때문에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셨다. 이는 우리를 대신하신 당신의 대속의 죽음을 통해 드러난 그분의 사랑에 자유롭게 응답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예수님은 죄가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가져온 단절을 연결해 주셨을 뿐만 아니라(사 59:1, 2), 하나님의 완전한 사랑의 성품을 보여 주시고(요 14:9, 히 1:3) 모든 사람을 당신에게로 이끌기 위해(요 12:32) 우리에게 오셨다.
교훈: 하나님은 사랑이며 우리를 사랑하고 사랑을 갈망하도록 당신의 형상대로 창조하셨다. 예수님은 완전한 사랑을 보이시고 모든 이를 주께 이끌기 위해 오셨다.
<부가설명> 성경이 계시하는 사랑은 도덕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도덕성은 사랑이 드러내는 표현이지 본질이 아니다. 거룩하다는 것이 본질을 뜻하는 말인 것처럼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은 사랑이라고 하는 것도 본질에 연결된 표현이다. 성경의 하나님 본질은 자존하신 존재이다. 즉 존재 자체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 이름을 여호와라고 선포하셨다. 그분은 존재자이시다. 이 이름은 생명 자체라는 것을 드러낸다. 그분이 여호와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이시다. 이 생명의 본질이 사랑이다. 여호와 하나님은 사랑이 드러나지 않을 수 없는 생명 자체이시다. 그분은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는데, 곧 자기 생명을 나누어 주셔서 사람도 생령이 되게 하신 것이다. 이 생명을 얻는 사람은 이 생명의 본질인 사랑이 생활로 드러나게 된다. 그것을 집중적으로 표현한 것이 고전13장이다. 그래서 비록 있는 것을 다 구제하고 자기 몸을 불사르게 내어줄지라도 사랑이 없을 수 있다고 계시한다(고전13:3). 생명을 주지 못하는 구제와 살신성인(殺身成仁)은 도덕적으로는 대단한 의로운 행위이지만 성경이 말하는 사랑은 아니다. 그 안에 영생의 생명을 주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고전13:3을 잘 읽어보라. 우리는 예수님의 희생이 생명을 주시는 사랑인 것을 깨달아야 한다. 예수님 안에서 이 생명을 얻었는가? 그러면 사랑이 드러날 것이다.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거하느니라”(요일3:14). 생명이 연결된 것을 그분 안에 거하는 것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4월 8일(수) 창조에 나타난 하나님
“태초에 하나님이”로 시작하는 성경의 첫 구절을 기억 못하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여기서 하나님의 이름에 사용된 히브리어는 엘로힘(Elohim)이다. 이 단어는 다른 거짓 ‘신들’을 지칭할 때 사용되기도 하지만 유일하신 참하나님을 가리킬 때에는 모든 피조물을 다스리는 전능하고 권능이 충만한 창조주, 우리의 이해 너머에 계시며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초월적인 하나님을 의미한다. 그분의 권능은 너무 강력해서 말씀만으로도 창조 사역이 이루어졌다.
다음 장인 창세기 2장에는 야훼(Yahweh)라는 하나님의 다른 이름이 등장한다. 이 이름은 엘로힘(야훼 엘로힘)과 연결되며 동일한 전능하신 하나님을 가리킨다. 그런데 야훼라는 이름은 유일하신 참하나님의 더 인격적인 이름으로 이것은 하나님이 창조된 백성과 사랑의 관계를 맺으신 언약의 하나님이심을 강조하기 위해 자주 사용된다.
창세기 1:1과 2:7의 하나님에 대한 묘사를 비교해 보라. 무엇이 눈에 띄는가?
[창1: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창2:7]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답: 창1:1에는 하나님(엘로힘), 2:7에는 여호와 하나님으로 기록되었다.
창세기 2:7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무릎을 꿇고 직접 흙으로 첫 사람을 만드시는 모습을 상상할 수 있다.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이것은 우리에게 가까이 다가오시는 하나님의 모습이다. 그분은 아담의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실 만큼 매우 가까이 오신다. 야훼라는 이름은 하나님의 모습을 더 친밀하게 묘사하며 모세는 하나님의 이 두 가지 특성을 우리에게 설명하기 위해 성경 첫 두 장에서 이 두 이름을 모두 사용한다.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우리는 창조 이야기에서 엘로힘을 통해 우리에게서 초월해 계신 하나님을 그리고 야훼를 통해 하나님의 내재성 곧 우리에게 가까이 계신 하나님의 모습을 본다. 하나님의 성품의 두 측면 곧 만물을 주관하시고 또 우리에게 가까이 계시는 것을 함께 생각하는 것은 얼마나 좋은 일인가! 이것은 바울이 아레스의 언덕에서 아테네 사람들에게 말한 것과 같다.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계시지 아니하도다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존재하느니라”(행 17:27, 28).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성장하기 위해서는 성경이 하나님의 성품에 대해 알려주는 바에 근거하여 명확하고 균형 잡힌 하나님의 모습을 계속해서 찾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기에 성경의 한 부분에만 집중하는 것보다 전체를 읽는 것이 필요하다. 참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성품을 더 많이 알수록 우리는 그분을 더 사랑하게 될 것이다.
교훈: 창조 가운데 초월해 계시고 또 가까이 계시는 하나님의 두 모습이 나타난다. 성경에 근거해 균형잡힌 그분의 모습을 찾기 위해 우리는 전체를 읽어야 한다.
<부가설명> 하나님은 보통명사다. 교과 저자가 말한 것처럼 이방 신을 말할 때도 엘로힘을 사용했다. 이방 엘로힘도 개별적인 고유이름을 가지고 있다. 바알, 다곤, 마르둑, 등등. 그러나 성경의 엘로힘은 그 이름이 여호와이시다. 여호와는 스스로 존재하시는 분이라는 뜻이다. 이방의 모든 신들은 사람들이 만든 신들이고 만들어 붙인 이름들이다. 그러나 여호와는 여호와 하나님 당신께서 친히 선포하신 이름이다. 그분이 이 이름을 선포해서 사람에게 알게 하기 전에는 사람이 몰랐다. 선포하여 성경에 기록했으므로 우리가 안다. 그 이름 여호와 안에 여호와 하나님의 모든 것이 함축되어 내포되어 있다. 그러므로 여호와 하나님은 성경 여러 곳에서 ‘여호와를 알리라’라는 말씀이 있고 ‘힘써 여호와를 알자’(호6:3)라는 말씀도 있다. 이 이름의 신앙적 신학적 복음적 의미를 깨달으면 그 이름이 거룩한 것을 깨닫게 되고 그 이름이 사랑이며 생명인 것을 깨닫게 된다. 이 기쁨이 교과 공부하는 모든 분에게 충만하기를 바란다.
4월 9일(목) 임마누엘,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
만약 기독교인이 아닌 사람에게 하나님의 성품을 성경이 어떻게 묘사하고 있는지를 전하고 싶다면 어디에서 시작하겠는가? 물론 가장 좋은 답은 예수님일 것이다. 성경은 예수께서 하나님을 나타내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보여 주신다고 말한다. 이를 설명하는 많은 성경 구절이 있지만 가장 간결하고 분명하게 설명하는 것은 요한복음 14:9이다. 예수님은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고 말씀하신다. 하나님 아버지가 어떤 분이신지 더 잘 알고 싶다면 예수님을 보고 그분의 말씀, 행동, 태도, 죽음과 부활 가운데 나타난 인류를 향한 그분의 위대한 사랑을 살펴보아야 한다.
아버지의 사랑과 돌보심은 아들 예수 안에서 가장 분명하게 나타난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생애에 대한 네 개의 복음서를 통해 당신의 어떠하심을 풍성하고 더 온전히 이해할 수 있게 하셨다는 점은 성경의 묘미이다. 유대인 마태가 유대인을 위해 기록한 마태복음에서 우리는 오랫동안 기다려 온 메시아, 약속을 성취하신 예수를 만난다. 마가복음의 예수님은 봉사하며 희생하는 활동적인 삶을 사시면서 항상 다른 사람들을 생각하셨고 언제나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셨다. 누가복음을 통해 우리는 인성을 입으시고 긍휼하신 예수의 마음이 어떠했는지를 볼 수 있으며 우리가 읽는 이 기록이 진실임을 확신할 수 있다(눅 1:3, 4). 요한복음은 성육신하신 하나님의 아들을 보여 주며 예수께서 말씀하신 그분이심을 믿도록 초대한다. 이를 통해 우리의 영적 삶이 새롭게 회복될 수 있다. 모두 같은 주제를 다루지만 “표현하는 방식은 동일하지 않다. 각 기자는 그들만의 경험을 가지고 있으며 이러한 다양성은 다양한 사람들의 필요를 충족시킬 수 있도록 지식을 더욱 폭넓고 깊게 만든다”(원고, 105, 1900).
마태복음 1:23에서 예수께 주어진 특별한 이름은 하나님의 성품을 이해하는 데 왜 그렇게 중요한가? 마태복음 28:20을 함께 비교해 보라. 무엇을 발견하였는가?
[마1:23]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마28: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답: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항상 함께 하시는 하나님, 곧 임마누엘 하나님.
우리는 하나님의 성품이라는 거대한 주제의 극히 일부분만을 보았을 뿐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헤아릴 수 있는 것보다 훨씬 위대하고 놀라우시며 우리는 영원토록 그분에 대해 배우게 될 것이다.
교훈: 성경의 여러 책은 다양한 필요를 채우며 예수에 대한 지식을 더욱 깊게 만든다. 무엇보다 예수님의 행적, 부활을 통해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더 잘 알게 한다.
<부가설명> 성소를 지으라고 모세에게 명하실 때 “내가 그들 중에 거할 성소를 그들을 시켜 나를 위하여 지으라”(출25:8)라고 말씀하셨다. 성소의 목적은 ‘임마누엘’이다. 그 성소는 모형과 그림자다(히8:5). 그 성소의 실상 본체는 하늘에 있는 어떤 건물 성소가 아니라 성육신(成肉身)하신 예수님 자신이다. “그러나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요2:21). 성소 구조와 봉사는 예수께서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몸소 행하실 구원의 길을 시청각교재로 구상화(具象化)한 비유적 건물이다(히9:9). 이 성소가 가르치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겠다는 사랑의 진리다. 그것을 화목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성경은 예수님을 회목제물로 보내셨다고 한다(요일4:10, 롬3:25), 화목제는 하나님과 제물을 바친 사람과 그것을 집행한 제사장이 제물로 드린 짐승의 고기를 나누어 먹는 것으로 일체 된 것을 나타낸다(레7:11~21). 하나님은 자기 형생대로 창조한 사람이 하나님과 일체 되기를 간절히 바라신다. 예수께서 요17장에서 하신 기도의 핵심 내용이 하나되는 것이다. 그 방법은 예수님을 믿고 거듭나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께로서 나는 것이기 때문에 일체가 된다(요1:12~13, 요일3:9). 우리는 진정으로 거듭난 그리스도인인가?
4월 10일(금) 더 깊은 연구를 위해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이 그분의 성품을 나타내도록 부르시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먼저 그분을 알아야 한다. 죄로 흐려진 인간의 눈이 너무나 자주 하나님의 거룩하고 완전한 길을 오해하지만, 그분을 분명하게 볼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연구하는 것이다. “대대로 인간의 마음이라는 통로를 거쳐 내려온 모든 부성애, 사람들의 심령 속에 솟아난 모든 온정의 샘들은 하나님의 무한하고 다함없는 사랑과 비교하면 끝없는 대양 앞의 작은 시냇물에 불과하다. 그것은 말로 묘사할 수 없고 붓으로도 표현할 수 없다. 그대는 매일의 생애에서 그 사랑을 묵상할 수 있고 그것을 이해하기 위하여 부지런히 성경을 연구할 수 있다. 하늘 아버지의 사랑과 긍휼을 깨닫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그대에게 주신 모든 능력과 재능을 동원하여 노력할 수 있다. 그럼에도 그것은 여전히 그 너머에 있는 무한한 사랑이다. 그대는 오랜 세월 동안 그 사랑을 연구할 수 있지만 세상을 위하여 아들을 내어 주시고 죽게 하신 하나님의 사랑의 길이와 넓이와 깊이와 높이를 결코 완전히 헤아릴 수 없을 것이다. 영원조차도 그것을 결코 완전히 드러낼 수 없다. 그러나 우리가 성경을 연구하고 그리스도의 생애와 구속의 계획을 묵상할 때 우리는 이 위대한 주제들을 차츰 이해하게 될 것이다”(교회증언 5권, 740).
함께하는 토의를 위해
➊ 이번 주 살펴본 하나님의 속성 가운데 어떤 속성이 하나님을 이해하는 데 큰 영향을 주었으며, 그분과의 관계를 강화하기 위해 당신이 살펴볼 수 있는 다른 속성은 어떤 것이 있는가?
*답: 각자가 대답할 질문이다. 생명 자체이신 이름 여호와를 이해하는 것이 핵심이 아닐까? 그 이름이 바로 생명이며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➋ 『정로의 계단』 1장을 보고 토의해 보라. 이 장을 통해 하나님의 성품과 예수님에 대해 어떤 새로운 통찰을 얻었는가?
*답: 각각 읽고 토의해 보자. 천연계가 다 하나님은 사랑이라고 한다.
➌ 많은 사람이 하나님을 왜곡된 모습으로 이해하기에 예수께서 이를 바로잡으러 오셨다. 주변 사람에게 하나님에 대한 명확한 모습을 전하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답: 예수님의 사랑으로 사랑을 나타내는 것이 아닐까?
➍ 우리는 죄인이며 거룩하지 않지만 성경은 하나님의 백성이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한다. 베드로전서 1:13-16, 로마서 6:22, 히브리서 12:14을 보라. 하나님은 거룩하시며 우리도 거룩하라고 부르신다. 그러면 거룩한 삶을 사는 것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가?
*답: 거듭나서 예수님의 생명이 우리 생활을 주장하게 하는 것이다. 갈2:20에서 바울은 이런 경험으로 산다고 고백했다.
요약: 창세부터 하나님은 우리와 친밀한 관계를 맺기 원하셨다. 비록 우리가 하나님의 성품을 오해하도록 사탄이 공격하고 있지만 하나님은 성경과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통해 가장 분명하게 자신을 드러내신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더 깊어지기를 원한다면 하나님의 모습을 명확하고 바르게 이해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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