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과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삶(질문, 대답, 설명) 03/14/26 > 교과토의 자료

본문 바로가기

운영진
x


교과토의 자료 보기

교과토의 자료

제11과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삶(질문, 대답, 설명) 03/14/26

페이지 정보

작성자 김명호 작성일26-03-06 13:11 조회59회 댓글0건

본문

제11과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삶

(3월 14일 안식일 / 일몰: 오후 6시 38분)

  

연구 범위: 골로새서 3:1-17, 로마서 1:18, 로마서 6:1-7, 에베소서 4:22-24, 신명기 7:6-8, 사무엘상 16:23

 

기억절: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골 3:14).

 

너무 하늘만 바라보지 말라고, 그러다가 이 땅에서 아무런 유익도 얻지 못한다고 흔히들 말한다. 어떤 면에서는 맞는 말이다. 하지만 바울은 골로새서 3장에서 동일하게 중요한 다른 면을 강조한다. 우리가 너무 이 땅의 것만 생각한다면 주님 앞에서 하늘에 적합하지 못한 자가 될 것이다. 

바울은 오직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골 3:1)은 자들만이 이해할 수 있는, 하늘에서 주어진 실용적이고 현실적인 삶의 원칙들로 우리의 주의를 이끈다. 

바울의 권면은 교회 안만 아니라 우리의 모든 관계를 향상시킬 매우 현실적인 원칙들이다. 

예수님은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마 5:44, 45)라고 말씀하셨다. 실현이 불가능해 보이는가? 인간적으로 보면 그렇다.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을 위해 살기 위해서는 먼저 죽어야 한다. 이 땅에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조금이라도 유익한 삶을 살기 원한다면 하늘을 중심으로 하는 마음을 가져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번 주에는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삶이 지금과 영원한 삶까지 어떤 차이를 만들 수 있는지 살펴보자.  

 

학습 목표

깨닫기: 더 높고 순결한 새 생명의 특성은 그리스도와 연합한 마음에서만 솟아날 수 있다. 

느끼기: 우리가 더 고상한 생애를 살 수 있는 이유는 더 높은 왕국의 시민이기 때문이다. 

행하기: 새 생명을 받았지만 여전히 위협이 있기에 위의 것을 찾으며 땅의 것을 죽여야 한다. 

 

TMI 위로

2. 하나님 안에 새 생명을 받았음에도 왜 매일 위의 것을 찾기로 선택해야 합니까?(골 3:1)

*답: 세상이 유혹하고 싸움을 걸어오기 때문이다.

3. 위의 것을 찾기 위해 우리는 어떻게 땅의 것을 죽일 수 있습니까?(골 3:5)

*답: 세상적 사도방식과 세상적 쾌락과 욕망을 버려야 한다.

4. 창조주의 형상을 따를 때 지식까지 새로워진다는 것은 어떤 의미입니까?(골 3:10) 

*답: 예수 그리스도의 지식으로 채워진다는 뜻이다.

5. 어떻게 하면 새 생명의 특성이 당신의 삶에서 나타날 수 있겠습니까?(골 3:12) 

*답: 말씀이 전적으로 자아를 다스리게 하고 성령님께 굴복해야 한다.

6. 새 생명을 살아가는 데는 어떤 요소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까?(골 3:16) 

*답: 그리스도의 말씀이 주장하고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와 감사하는 정신.

7. 선악의 싸움 가운데 있는 우리에게 절실하게 필요한 것은 어떤 것이겠습니까? 

*답: 성령님의 도우심과 역사하심이다. 6:17. 

 

결론: 우리는 새 생명을 받았지만 유혹에서 안전하지 않고, 멸망당할 수 있다. 매일 “위의 것을 찾”기를 선택해야 하며 그분의 영적 생명과 능력을 통해 땅의 것을 죽여야 한다. 세상의 생각이 많고 하늘을 적게 생각하는 오늘의 우리에게 절실히 필요한 것은 더 높고, 더 순결하며, 더 고상한 생애의 능력이다. 변화된 삶이 민족적, 지리적, 사회적 한계를 넘어서게 하는 것은 우리가 더 높은 왕국의 시민이기 때문이다. 새 생명의 특성은 그리스도와 연합된 마음에서만 솟아날 수 있다. 그 평화는 밖에서부터 주어지지 않고 우리 안에서 다스리시는 그리스도의 평화이다. 

 

3월 8일(일) 하늘을 향한 마음

 

골로새서 3:1-4을 읽어보라. 바울은 우리가 하늘을 향한 마음을 갖기 위해 어떤 조건이 필요하다고 말하는가? 그것은 무엇을 의미한다고 생각하는가?

[골3:1~4]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2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3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음이라 4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

*답: 땅의 것을 생각하지 않고 위의 것을 찾고 생각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산 정상에서는 우리를 둘러싼 광활한 풍경을 바라볼 수 있다. 태고부터 산은 하나님과 더 가까이 교제하기 위해 사람들이 찾던 곳이다(시 121:1, 2 참조). 사람이 만든 인공산 지구라트도 이교도들이 신들과 만나기 위해 비슷한 목적으로 세워졌다. 흥미롭게도 아브람이 떠나도록 명령을 받았던 우르성에는 땅끝에서도 보일만큼 거대한 지구라트가 있었다. 하지만 그저 조금 더 높이 올라간다고 해서 영적인 면에서 하늘에 더 가까워지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노력으로는 절대 불가능하다. 

오직 은혜의 기적, 곧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분과 함께 부활하는 것(침례로 상징됨, 골 2:12, 13)을 통해서만 하늘에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 

골로새서 3장이 시작부터 반복적으로 강조하는 위에 있는 것, 곧 하늘에 있는 것인 “위의 것,” “그리스도께서 … 앉아 계”신 곳,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그와 함께 영광 중에”(골 3:1-4)와 같은 표현을 주목하라. 

물론, 그리스도인의 삶에는 설명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다. 겉보기에는 아무런 변화도 없고 죽었다가 살아난 경우가 없는데, 어떻게 사람이 정말로 “죽었다가” “살아날” 수 있을까? 성령의 감화를 받지 않은 육신의 마음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것들이 많다. 그러나 영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새 마음을 받았기에 죄에 대해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사는 것이 진정한 실체가 된다. 찬미가 369장의 가사처럼 그분이 살아 계심을 어떻게 알 수 있냐는 질문에 우리는 “내 속에 살아계심을 나 밝히 믿”는다고 답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이 이것을 명령하는 이유는 우리의 영적인 삶이 항상 새롭게 되어야 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고후 4:16 참조). 

우리는 실제로 떨어져 나갈 수 있고, 멸망할 수 있다. 이 땅의 삶 속에서 우리는 유혹으로부터 결코 안전하지 않다. 

그러므로 우리는 매일 “위의 것을 찾”(골 3:1)기를 선택해야 한다. 우리의 영원한 생명은 안전하게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골 3:3)어졌지만, 그 생명이 살아 있음은 결코 감추어질 수 없으며 세상에 드러나게 될 것이다.

 

<교훈> 새 생명을 받았지만 우리는 유혹으로부터 안전하지 않으며 떨어져 나갈 수 있고, 멸망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매일 “위의 것을 찾”기를 선택해야 한다. 

 

<부가설명> 새 생명을 받았어도 유혹에 안전하지 않은 실례는 여자가 뱀의 유혹에 걸린 사건에서 명백하게 드러냈다. 그때 그곳은 에덴동산이었고 환경이 완전하고 죄로 더럽혀진 일이 없었다. 그런데도 유혹이 있었고 여자나 남자가 다 유혹에 빠졌다. 그들이 받은 유혹이 엄청난 것도 아니다. 아주 가벼워 보인다. 금지한 나무 실과 하나 따 먹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세상을 죄가 주장하고 있다. 사탄이 세상 임금이다(요14:30). 지구 전체 환경 상태는 죄가 충일하다. 그러므로 새 생명을 받았어도 받은 그 자리부터 유혹의 분위기에 둘려 있다. 그러니 위엣것에 눈을 고정해야 한다. 위엣것은 성경 말씀에 있다. 말씀에 고정해서 생각하고 깨닫고 결정하고 실행해야 한다. 거기에 생명을 유지하는 능력과 비결이 있다. 어떻게 성경 말씀을 먹지 않고 새 생명의 삶을 유지할 수 있겠는가? 

 

3월 9일(월) 세속성을 끝내라

 

오늘날 우리는 “전쟁을 끝내라!” “환경 파괴를 끝내라!” “핵무기를 끝내라!” 등 구호의 홍수 속에 산다. 하지만 아마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구호가 있다면 “세속성을 끝내라!”일 것이다. 이 구호는 이 세상의 가치관과는 맞지 않는 듯하다. 다른 구호들이 틀렸다거나 그들의 주장이 잘못되었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영원한 세계가 가까이 있는 것을 생각할 때 그것들은 매우 제한적일 뿐이다. 우리의 초점은 더 높은 곳, 영원한 높은 곳을 향해야 한다. 

 

골로새서 3:5, 6을 읽어보라(롬 6:1-7 참조). 자기 자신과 땅의 것에 대하여 죽고 “위의 것”(골 3:1)에 대해 사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어떻게 경험할 수 있겠는가?

[골3:5,6]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욕정)과 악한 정욕(갈망, 충동)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6 이것들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느니라.

*답: 음란, 사욕, 악한 정욕, 탐심을 죽이고 버리는 것이다.

 

우리가 영적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을지라도, 우리의 “지체” 곧, 우리 몸과 마음이 우리에게 제시하는 유혹들도 죽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 명령과 관련해 두 가지를 깨달아야 한다. 첫째, 골로새서 3:1에서 바울이 사용한 헬라어 형태는 우리가 실제로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했음을 전제 한다. 둘째, 골로새서 3:5의 명령은 앞에서 말한 그 사실의 결과(“그러므로”)이다. 우리가 땅의 것들(음행, 부정, 정욕, 악한 욕망, 탐욕 등)을 죽일 수 있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 받았고, 이런 것을 마음과 삶에서 제거할 수 있는 그분의 영적 생명과 능력을 가졌기 때문이다.  

흥미롭게도, 골로새서 3:6에 기록된 “하나님의 진노”라는 헬라어 표현이 정확히 같은 형태로 성경에서 다시 등장하는 유일한 구절은 로마서 1:18이다. 

하나님이 사람들을 그들의 악한 길에 그대로 두셨기에, 그분의 진노는 “불순종의 자녀들에게”(골 3:6, 흠정역) 임한다(계 6:16, 17 참조). 로마서 1:18에서 바울은 “경건치 않음과 불의”를 언급하며, ‘더러움’(골 3:5과 동일한 헬라어)을 “마음의 정욕대로 … 몸을 서로 욕되게 하”(롬 1:24)는 자들로 매우 구체적으로 연결한다. 

그들은 어떻게 자기 몸을 서로 욕되게 하였는가? 첫째, 그들은 창조주를 인정하지 않았고, 둘째, “마음의 정욕대로” “곧 그들의 여자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 그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자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 일듯 하매 남자가 남자와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롬 1:26, 27)였다. 

 

<교훈> 땅의 것을 죽일 수 있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 받았고, 이것을 마음과 삶에서 제거할 수 있는 그분의 영적 생명과 능력을 가졌기 때문이다. 

 

<부가설명> 아담 자손으로서 사람은 생명이 없는 자들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없는 자는 생명이 없는 자라고 분명히 계시했다(요일5:11,12). 생명이 없으니 썩는다. 이것을 구습(舊習)이라고 했다(엡4:22).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어진 새 사람이 되지 않으면 구습은 자연스럽다. 이것이 땅에 있는 지체들이다. 이 지체가 죽어야 하는데, 그것이 아담 안에서 죽은 자아다(고전15:22). 예수님을 믿는 것은 아담 자손으로 있는 육체의 생명이 죽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아담이신 예수님으로부터 새롭게 출생하는 것이다(요1:12,13). 이것을 거듭나는 것이라고 계시했다. 거듭났지만, 에덴동산 같은 환경이 아닌 사망의 부패만 가득한 세상을 환경으로 가진 거듭난 사람들은 사망의 세력의 유혹과 공격을 호흡마다 당한다. 그래서 호흡마다 걸음마다 주님께 숨고 생명의 성령께서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해 주시도록(롬8:2) 위엣것을 생각하고 바라봐야 한다.

 

3월 10일(화) 지식에서 새로워짐

 

골로새서 3:6-11을 읽어보라. 바울은 생각을 어떻게 연결해 나가고 있는가?

[골3:6~11] 이것들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느니라 7 너희도 전에 그 가운데 살 때에는 그 가운데서 행하였으나 8 이제는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벗어 버리라 곧 분함과 노여움과 악의와 비방과 너희 입의 부끄러운 말이라 9 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하지 말라 옛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버리고 10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니라 11 거기에는 헬라인이나 유대인이나 할례파나 무할례파나 야만인이나 스구디아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 차별이 있을 수 없나니 오직 그리스도는 만유시요 만유 안에 계시니라.

*답: ‘이제는’이라는 말로 전에 행했던 모든 것에서 돌이켜 새 사람이 된 지점을 지적하며 논리를 이어간다. 

 

골로새서 3:8의 “이제는”이라는 첫 단어는 죽음에서 생명으로의 극적이고 결정적인 변화를 나타낸다. 이제라는 표현에는 헬라어의 강조형이 사용되었다. “이제”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여 위의 것을 추구하기 때문에 현재 삶은 과거의 삶과 현저한 대조를 보여야 한다는 것이다. “땅에 있는 지체”(골 3:5)를 죽였으므로, “이제는 너희가 … 분함과 노여움과 악의와 비방과 너희 입의 부끄러운 말”(골 3:8) 같은 과거의 모든 것을 벗어버려야 한다.

분함과 노여움은 모두 죄에 대한 하나님의 의로운 반응을 묘사할 수 있으며, 예수님에게도 적용된다(막 3:5, 계 6:16). 이와 달리 우리에게는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하라 사람의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라”(약 1:19, 20)라는 권면이 주어졌다. 악의는 다른 사람의 불행을 바라는 마음이다. 비방은 명예를 훼손하기 위한 것이다. 바울은 또한 욕설과 음란한 말을 정죄한다. 마지막으로,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버”(골 3:9)렸기에 서로에게 거짓말하는 것이 금지된다(레 19:11, 18 비교). 

 

바울이 “새 사람”과 대비하여 “옛 사람”을 언급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롬 6:6, 엡 4:22-24 참조). 

[롬6:6]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엡4:22~24]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23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24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답: 이제는 새사람이 되었으니 새사람답게 생활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바울이 이같은 옛 것에서 새 것으로의 변화를 표현하는 데 사용한 동사들은 마치 낡고 더러운 옷을 벗고 새 흰 옷을 입는 것(슥 3:4 참조)을 연상하게 한다. 이와 같은 옛 것과 새 것의 구별은 옛 언약과 새 언약에 대해서도 이루어지는데, 각각 율법의 외적인 자구와, 성령으로 마음에 새긴 율법으로 특징지어진다(고후 3:4-18). 

이러한 은유들은 바울이 “새로운 피조물”(고후 5:17)이라고 부르는 회심과 그 결과를 묘사한다. 우리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이신(골 1:15)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골 3:10)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얻으므로 우리는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고후 3:18)른다. 이 변화는 우리가 모든 민족적, 지리적, 사회적 한계를 넘어서게 한다(골 3:11), 이는 우리가 더 높은 왕국의 시민이기 때문이다. 

 

<교훈>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얻으므로 이른 변화는 모든 민족적, 지리적, 사회적 한계를 넘어서게 한다, 이는 우리가 더 높은 왕국의 시민이기 때문이다. 

 

<부가설명> 오직 예수님만 빼고 이 세상의 사람들은 다 아담의 자손들이다. 아담의 자손이라는 말은 아담으로부터 생명을 이어받았다는 뜻이다. 아담은 이 지구 인류의 오직 한 사람인 시조다. 그래서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들었다고 분명히 계시했다(행17:26,27). 지구에 사는 사람들은 이 설명에서 제외될 수 없다. 그래서 조상으로부터 이어받은 그 생명으로 존재하고 생활하는데, 그 아담이 선악과를 먹어서 정녕 죽은 사람이 되었다(창2:16,17). 문제는 그렇게 죽어서 존재 자체가 없어지면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창조주의 명령이 이루어질 수 없다(창1:26~28). 그래서 하나님은 종신한다는 선고를 하시고 종신할 때까지 생육하고 번성할 수 있도록 육체의 생명을 주셨다(레17:11, 창6:3). 원래 아담은 하나님의 생명을 받았다(엡4:18 참고). 그러나 언약을 어기고(호6:7) 선악과를 먹어서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고 육체의 생명을 유지하게 되었는데, 그것은 종신하는 것이다. 종신하면 존재가 없어진다(창3:17~19). 그래서 종신할 때까지 유지되는 삶은 썩는 삶이다. 그것을 죄를 짓는다고 표현한다. 새 사람이 되는 것은 옛사람이 예수님 안에서 종신하고 예수님의 부활의 생명을 받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나는 것이다(요1:12,13, 롬6:2~7). 그렇게 하나님의 생명을 받았으면 이제는 하나님의 생명으로 살게 된다. 그래서 이제는이라는 표현을 했다. 

 

3월 11일(수) 새 생명의 특성 

 

그리스도께 나아갈 때 제거되고 버려야하는 나쁜 습관과 부정적인 특성들을 설명한 바울은 마치 어둠에서 빛으로 옮겨가는 것처럼 이제 긍정적인 측면으로 나아간다. 

 

골로새서 3:12-14을 읽어보라. 이 구절은 믿는 자들을 어떻게 묘사하며, 그것은 그들이 “입어야”할 특성과 어떻게 관련이 있다고 생각하는가? 

[골3:12~14]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이 택하사 거룩하고 사랑 받는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 13 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14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

*답: 하나님의 자녀로 사랑받는 자처럼 자비, 경손, 온유, 인내로 옷 입고 서로 용납하고 용서하고 사랑을 더하여 온전하게 매도록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믿는 자들의 특성이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특별한 백성으로 부르시고 그분의 성품을 반영하게 하신 이스라엘처럼, 예수님을 믿는 자들은 “하나님의 택하신”(골 3:12) 자이다. 하지만 모두가 이 부르심을 따라 사는 것은 아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다(마 22:14; 마 24:22, 24, 31 비교). 택함을 입은 자들에 대한 바울의 언급도 비슷한 의미를 지닌다(롬 8:33, 딤후 2:10). 또한 이스라엘과 마찬가지로 믿는 자들은 하나님의 “사랑하”는 존재이며 거룩한 백성이다(신 7:6-8). 이 특권에는 중요한 책임이 따른다. 곧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벧전 2:9)하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 사는 삶을 통해 이것을 실천한다. 

바울이 언급한 여덟 가지 자질은 꽤나 긴 목록이다. “긍휼, 자비, 겸손, 온유, 오래 참음, 서로 용납하며 피차 용서하는 것, 그리하고 이 모든 것 위에 사랑”(골 3:12-14)을 더해야 한다. 이것들은 오직 그리스도와 연합된 마음에서만 솟아날 수 있다. 왜냐하면 이것들은 그분의 성품과 그분이 우리를 어떻게 대하셨는지를 나타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과 같이” 다른 사람을 용서해야 한다(골 3:13). 사랑은 “온전하게 매는 띠”(골 3:14)이다. 우리를 그분께 묶어주고 다른 이를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게 하는 것은 바로 우리를 향한 그분의 사랑이다(요일 4:11, 12). 

이러한 자질들은 두 가지 방식으로 우리의 관계에 영향을 미친다. 첫째, 다른 사람들에게 사랑, 자비, 친절, 용서를 베푸는 것은 우리 자신과 상대방 모두에게 복이 된다. 이것은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축복하는 것을 이행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대개 우리에게 같은 방식으로 친절하게 반응하고, 우리는 계속해서 하나님의 자비와 용서를 받는다(마 5:7, 마 6:14). 두 번째, 보다 더 중요한 점은,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의 능력을 보여주기 때문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다른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고 따르도록 격려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인간의 영혼을 둘러싼 그 어떤 영향력도 이기심 없는 생애의 감화력만큼 강력하지 않다. 복음을 위한 가장 강력한 논증은 사랑을 실천하고 또 사랑받을 만한 그리스도인이다”(치료봉사, 470). 

 

<교훈> 새 생명의 특성은 그리스도와 연합된 마음에서만 솟아날 수 있다. 왜냐하면 이것은 그분의 성품과 우리를 어떻게 대하셨는지를 나타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부가설명> 생명은 특성을 가지고 있다. 사람의 생명은 사람으로 살아가는 특성이 있고 짐승의 생명은 짐승으로 살아가는 특성이 있다. 이 특성이 그 생명이 주장하는 생물의 성품을 결정한다. 생명의 능력은 동일한지 모른다. 그러나 그 생명이 작용할 존재의 기계적 구조가 그 생명이 작용하는 특성을 결정한다. 하나님은 사람을 자기 형상대로 창조하셨다. 그 형상에 하나님의 생명이 들어갈 때 하나님의 성품이 나타난다. 전기기기로 설명하면 쉬울까? TV의 기계적 구조에 전력이 들어가면 TV의 기능이 나타나고 컴퓨터에 전력이 들어가면 컴퓨터의 기능이 실현된다. 스마트폰도 역시 그렇다. 그런 특성을 나타내는 기계적 장치를 유전자라고 하는지 모르겠다. 나는 이런 점에는 문외한이기 때문에 설명을 적확(的確)하게 하지 못했는지 모르지만 무슨 말인지는 알았을 것이다. 창조주께서는 아담을 창조하실 때 하나님의 DNA를 주셨다고 표현하는 지나친 것일까? 그래서 하나님의 형상이 드러나게 된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생명을 잃었을 때 이것은 깨어졌고 사망의 형상이 드러나게 되었다. 그러나 예수님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면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되게 되어 있다.

 

3월 12일(목) 새 삶을 사는 것

 

교회 안의 평화와 화합을 위하는 바울의 마음은 골로새서 3장의 마지막 구절들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평안에 대해 자세히 살펴보았다(7과 참조). 로마의 평화(pax Romana)와 달리 그리스도의 평화(pax Christi)는 밖에서부터 주어지는 평화가 아니라 우리 안에서, 우리를 다스리는 평화이다. 이는 오직 그리스도께서 다스리실 때만 가능하다. 

 

골로새서 3:16, 17을 읽어보라. 구체적으로 그리스도께서 다스리시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무엇이며, 이 모든 일에서 노래는 어떤 역할을 하는가?

[골3:16,17]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17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

*답: 그리스도의 말씀이 다스리는 것이고, 이 말씀을 우리 속에 풍성하게 하는 방법 중에 찬미와 신령한 노래가 능력의 역사를 한다.  

 

이 구절은 그리스도의 말씀이 우리 안에 거처를 마련하는 모습을 매우 서술적으로 그려낸다. 이 일은 우리가 하나님의 지혜를 듣고 배우기 위해 성경을 주의 깊게 읽을 때 이루어진다. 헬라어 원문이 모호한 면이 있지만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골 3:16)는 데 노래가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모든 음악이 그런 것은 아니다. 바울은 이 구절과 에베소서 5:19에서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라는 매우 구체적인 용어를 사용한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여기서는 기존의 구약의 시편 모음과 새로 더해지는 신약의 찬송 모음 사이에 구분이 있는 것 같아 보인다. “신령한 노래”는 영적 생활이나 교회 생활과 관련된 모든 찬송을 가리키기보다 일반적인 용어일 수 있다. 찬양의 가사는 진리를 가르치고 그리스도인의 새 삶을 사는 방법에 대한 지침을 제공하는 수단이다. 지난 수 세기 동안 많은 위대한 찬송들은 우리를 너무 쉽게 낙심하게 만드는 세상에서 매우 필요한 강력하고, 고양하는 소망과 확신의 기별을 전했다. 

음악의 영향력은 강력하다. 다윗이 수금을 연주할 때 사울 왕의 분노가 진정되는 효과가 있었다(삼상 16:23). 그러나 다윗이 경쟁자가 되자 사울의 분노와 원한이 치밀어 올랐다(삼상 18:10, 11). 

잔잔하고 훌륭한 음악은 불안감을 줄이고, 뇌 기능을 최적화하며, 긴장을 풀어주고, 통증 완화, 사회성 향상에 도움을 주는 효과가 임상적으로 입증되었다. 

좋든 나쁘든 음악이 우리의 감정과 생각에 강력한 영향력을 미칠 수 있음을 경험해 보지 않은 이가 어디 있겠는가? 음악, 올바른 음악은 영성을 높이는데 도움이 된다. 

 

<교훈> 새 생명이 주는 평화는 밖에서부터 주어지는 평화가 아니라 우리 안에서, 우리를 다스리는 평화이다. 이는 오직 그리스도께서 다스리실 때만 가능하다. 

 

<부가설명> 그리스도인이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인답게 생활한다는 것은 그리 쉬운 것이 아니다. 세상이 말하는 도덕적 삶도 쉽지 않다. 사회환경은 그리스도인이 성경대로 살지 못하기에 알맞은 현실이다. 그런데도 그리스도인은 성경 말씀이 가르치는 대로 살아야 한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인의 그리스도인 다운 삶은 치열한 투쟁이 된다. 대쟁투가 달리 없다. 그리스도인이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이 대쟁투의 삶이다. 그래서 바울은 믿음의 싸움이라고 표현했다. 그 싸움은 선한 싸움이다. 이 싸움의 전략 전술서는 성경이고 군가가 찬미와 신령한 노래다. 바울은 땅엣것을 생각하지 않고 위엣것을 생각하고 실천하는 삶을 위하여 영적 생활의 생활지침이 성경 말씀이고 그 생활을 위하여 용기를 북돋우고 힘을 주는 것이 찬미와 신령한 노래라고 지적한 것이다. 우리는 이 싸움이 어려원도 이 원칙을 따라 생할하도록 성령의 도우심 속에 최선의 힘을 다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새 생명을 가진 새사람이 되었기 때문이다. 

 

3월 13일(금) 더 깊은 연구를 위하여

 

“하나님의 성령께서 생각과 마음을 지배하실 때, 회개한 영혼에게서 새 노래가 터져 나온다. 이는 자신의 경험 가운데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었고, 자신의 허물과 죄가 용서되었다는 것을 깨닫기 때문이다. 그는 하나님의 율법을 범한 것에 대하여 하나님께 회개하였고 인류로 의롭다 하심을 받게 하기 위하여 돌아가신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을 나타냈다. 그는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롬 5:1) 얻었다. 

그러나 이러한 경험을 했다고 해서 자기를 위해 성취된 일에 만족하며 손을 놓고 있어서는 안 된다. 영적인 왕국에 들어가고자 결심한 사람은 거듭나지 못한 본성의 모든 능력과 정욕이 어둠의 왕국 세력의 지원을 받아 자신을 대적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할 것이다. 그는 날마다 헌신을 새롭게 하고, 악과 맞서 싸워야 한다. 옛 습관들, 악으로 기울어지는 유전적 기질은 언제나 지배권을 쥐려고 분투할 것이다. 이것들에 대항하여 그리스도인은 언제나 경계하며 승리를 위한 그리스도의 능력을 간구해야 한다.

… 우리에게 절실히 필요한 것은 더 높고, 더 순결하며, 더 고상한 생애의 능력이다. 세상은 우리의 생각을 너무 많이 차지하며 그에 비해 하늘나라는 매우 작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에 대한 하나님의 이상에 도달하려고 노력하는 가운데 어떤 것에도 절망하지 말아야 한다. 도덕적·영적 완전이 그리스도의 은혜와 능력을 통하여 모든 사람에게 약속되어 있다. 예수님은 능력의 근원이시요 생명의 샘이시다. …그분은 우리를 위하여 전능한 하늘의 대리자를 움직이고 계신다. 매 발걸음마다 우리는 그분의 살아 계신 능력과 연결된다“(사도행적 476-478). 

 

함께하는 토의를 위하여 

1.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았다”는 약속을 어떻게 경험하고 있는가? 이 놀라운 약속은 삶을 어떻게 변화시켰는가? 이 약속은 당신이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 받았다는 개념과 어떻게 연결되는가?

*답: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은 것은 예수님의 부활의 생명을 받은 것을 뜻한다(롬4:23~25). 이 생명은 말씀 양식으로 성장하고 강해진다. 

2. 위의 것을 생각한다는 것은 당신에게 어떤 의미인가? 그것은 이 땅의 선을 행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가? 어떻게 균형을 잡을 수 있겠는가?

*답: 위엣것을 생각하는 것은 거듭난 생명의 본질이다. 그것은 도덕적 성경적 선한 열매를 맺게 되어 있다.

3. 당신의 삶이 다른 사람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생각해 보라. 이것을 개인적 영향력의 맥락에서 생각하는 경향이 있지만 우리가 교회로서 가지고 있는 영향력은 어떠한가? 당신의 교회는 지역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가?

*답: 각자 대답해 보자.

4. 골로새서 3:11을 읽어보라. 이 말씀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가져야 할 연합에 대해 무엇을 말해 주는가? 

*답: 그리스도안에 인종이나 지식이나 지위의 고하를 막론하고 하늘 사상으로 통일되고 연합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해 준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대총회 북아태지회 한국연합회 성경통신학교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 한국연합회 선교부 | 고유번호증번호: 204-82-62040 | 대표자: 강순기 | 부서장: 신광철
Copyright © 2014 안식일학교·선교부 All rights reserved.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