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과 오직 그리스도 안에 있는 확신(질문, 대답, 설명) 02/0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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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명호 작성일26-01-30 09:46 조회224회 댓글0건본문
제6과 오직 그리스도 안에 있는 확신
(2월 7일 안식일 / 일몰: 오후 6시 2분)
연구 범위: 빌립보서 3:1–16; 로마서 2:25–29; 요한복음 9:1–39; 에베소서 1:4, 10; 고린도전서 9:24–27
기억절: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빌 3:10, 11).
우리에게는 율법의 행위와 관계없이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받는다는 것을 여전히 의심스러워하는 무언가가 있다. 즉, 어떤 이유에서인지 우리는 마치 율법의 행위가 구원에 무언가를 기여할 수 있는 양 행위에 의지하려는 경향이 있다. 바울은 할례가 구원에 필수적이라고 고집하는 사람들을 향한 강력한 논쟁을 통해 이 문제를 상당히 인상적인 방식으로 다룬다.
할례와 같은 스스로의 행위가 구원에 역할을 한다고 생각할 가능성을 막기 위해, 의는 율법이 아닌 믿음으로 말미암아 받는 선물로서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것임을 바울은 분명히 한다. 오늘날 할례가 더 이상 쟁점이 아닐 수 있지만, 그 문제를 대하는 원리는 분명 유효한 주제이다.
개신교 종교개혁 자체가 바로 이 쟁점, 즉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의 경험에서 믿음과 행위의 역할에 관한 문제에서 시작되었다. 결국 그리스도는 우리의 모든 것이며,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히 12:2)시다. 우리의 우선순위가 바르게 세워진다면, 우리는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빌 3:3)는 가운데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확신을 가지고 살며, 지금 이곳에서도 구원의 약속을 누릴 것이다.
학습 목표
깨닫기: 구원의 모든 계획은 예수 안에 있으며 육체의 일을 버리고 그분을 알고 닮는데 집중해야 한다.
느끼기: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그분을 믿는 믿음을 통해 그리스도의 믿음으로 사는 것을 말한다.
행하기: 육체의 일을 신뢰하지 않으며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하고 구원의 약속을 누린다.
TMI 위로
2. 교회가 직면한 도전에 대한 답으로 바울은 무엇을 강조합니까?(빌 3:1)
*답: 주 안에서 기뻐하라고 강조한다. 그것은 생명을 얻은 기쁨이다.
3. 바울은 왜 자신의 삶의 귀한 가치였고, 유익하게 여겼던 것을 해로 여깁니까?(빌 3:7)
*답: 그것은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을 얻는데 엄청난 방해가 되기 때문이다.
4. 바울의 손익계산법이 다르게 변한 이유는 어디에 있다고 생각합니까?(요 9:39)
*답: 하늘을 분명히 봤기 때문이다.
5. 바울이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려 한다는 말은 무엇을 의미하고 있습니까?(빌 3:9)
*답: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확보하고 생명의 나라로 달린다는 의미다.
6. 다른 어떤 일보다도 우선하여 바울이 집중했던 한 가지는 어떤 일이었습니까?(빌 3:13)
*답: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는 것이고 영원한 부활의 생명의 날로 달리는 것이다.
결론: 율법의 행위가 구원에 무언가 기여할 수 있는 듯 행위에 의지하려는 경향이 있다. 바울은 자신을 돌아보며 율법이 육신의 행위보다 더 깊은 것을 요구함을 역설한다. 구원의 모든 계획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며 그분을 믿는 믿음을 통해 이루어진다. 육체의 일을 버릴 수 있는 것은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중요하기 때문이며 그분을 알고 닮아가는 것이 바로 우리가 집중해야 할 일이다. 예수를 사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않으며 하나님 사랑을 확신할 때 구원의 약속을 누릴 수 있다.
2월 1일(일) 주 안에서 기뻐함
빌립보서 3:1-3을 읽어보라. 바울은 여기서 어떤 긍정적, 부정적 어조를 보이며, 이 둘은 어떻게 연관되어 있는가? 그는 신자들을 어떻게 묘사하고 있는가?
[빌3:1~3] 끝으로 나의 형제들아 주 안에서 기뻐하라 너희에게 같은 말을 쓰는 것이 내게는 수고로움이 없고 너희에게는 안전하니라 2 개들을 삼가고 행악하는 자들을 삼가고 몸을 상해하는 일을 삼가라 3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가 곧 할례파라.
*답: 몸을 상해하는 할례는 개들고 행악자가 하는 일이라고 표현하고 예수로 자랑하며 육체의 행위를 신뢰하지 않는 자가 참 하례파라고 했다.
바울은 매우 긍정적인 어조로 시작하며, 마치 편지를 마무리하는 듯한 인상을 준다. 그러나 그의 권면은 계속되며 이 서신의 주요 주제 중 하나인 “주 안에서 기뻐하라”로 돌아간다. 그는 여기서 여러 이유를 제시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가 자신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신뢰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빌 3:3)한다. 우리 중 누구라도 이런 방식 혹은 저런 방식으로 육체를 신뢰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힘들게 배우지 않은 사람이 있겠는가?
세 번이나 반복된 “삼가”라는 강력한 경고는 성경의 다른 어떤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것이다. 빌립보 신자들은 바울이 언급한 위협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이 경고는 세 가지 서로 다른 문제라기보다는 거짓 선생의 무리를 세 가지 다른 방식으로 묘사한 것으로 보인다.
이스라엘에서는 악하거나 신앙을 반대하는 사람들을 때때로 “개들”이라고 불렸다(빌 3:2; 시 22:16; 사 56:10; 마 7:6; 벧후 2:21, 22 참조). 거짓 교사들은 “악한 일꾼들”(흠정역)이라 묘사하기에 적절하다. 그들을 “손할례당”(빌 3:2, 개역) 또는 “살을 베어 내는 자”(흠정역)라고 부르는 것은 갈라디아와 다른 지역에서처럼 예루살렘 총회의 결정(행 15 참조)에 반하여 이방인 신자들에게 할례를 강요하려 했음을 말해준다.
흥미롭게도, 거짓 가르침의 확산을 포함한 여러 영적 도전에 대한 해결책은 “주 안에서 기뻐하”(빌 3:1; 빌 4:4 참조)는 것인 듯하다.
우리가 기뻐하는 모든 것은 우리에게 즐거움을 가져다준다. 하나님은 우리가 기뻐하기를 원하시며, 그분의 말씀은 일종의 참된 즐거움과 지속적인 기쁨을 위한 지침서라고 할 수 있다. 이것에는 주의 긍휼을 받는 것(시 31:7), 주를 신뢰하는 것(시 5:11), 구원의 복을 받는 것(시 9:14), 안식일을 포함한 하나님의 법을 삶의 방식으로 삼는 것(시 119:14, 사 58:13, 14), 그분의 말씀을 믿는 것(시 119:162), 경건한 자녀로 양육하는 것(잠 23:24, 25) 등이 포함된다.
<교훈> 영적 도전이 있지만 그리스도를 신뢰하므로 주 안에서 기뻐할 수 있다. 하나님은 우리가 기뻐하기 원하시며, 말씀은 참된 기쁨을 위한 지침서라 할 수 있다
<부가설명> 우리는 행함이라는 표현을 바르게 이해할 필요가 아주 절실하다. 이 행함에 관해서 오해가 교회를 꽉 채우고 있는 것 같다. 구원받기 위한 인간의 행위는 절대로 필요없다. 이유는 내가 쓴 부가설명을 꾸준히 읽은 분을 알 것이다. 구원은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는 것이다(요5:24,25). 죽은 자가 살아나기 위하여 무슨 행위를 할 수 있다는 말인가? 구원받기 위하여 우리가 무엇인가 행해야 한다는 것은 죽은 자가 스스로 살아나기 위하여 무엇을 해야 한다는 말과 똑같다. 어떻게 가능하겠는가? 이것을 우리에게 실물교훈으로 가르쳐주신 사건이 나사로를 살리신 것이다. 죽은지 나흘이나 되어서 썩은 냄새가 나는 나사로가 스스로 노력해서 살아나겠는가? 생명이신 예수님이 생명을 주셔서 불러내시니 걸어나오는 행위가 이러난 것이다. 예수님은 또 사람들에게 수의를 풀어놓아서 다니게 하라고 하셨다. 이렇게 걸어나오고 다니는 것은 살아난 사람의 삶이다. 성경이 가르치는 행위는 이것을 말한다. 구원받았으니, 즉 살아났으니 삶을 이어가라는 것이다. 사람들은 이 행위와 구원받는 것은 연결하여 생각한다. 절대로 답을 얻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야고보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고 했다. 이 말은 살아있는 사람은 행할 수밖에 없다는 표현이다. 믿음과 행함의 관계는 산 사람과 행함의 관계와 같은 것이다. 아무쪼록 오해가 없기를 기대한다. 자신에게 말씀을 따라 사는 행함이 있으면 구원받은 증명이다. 기쁠 수밖에 없지 않은가? 나사로의 기쁨이 어땠겠는가? 이 행함과 기쁨이 없으면 아직 죽은 자로 있는 것이다. 바울은 이 진리를 말하고 있다.
2월 2일(월) 바울의 “과거”
바울이 빌립보서 3장에서 그렇게 한 것처럼 그리스도교로 회심한 신자들이 자신의 삶을 예수님을 받아들이기 전과 그 이후로 구분해서 생각하는 것은 공통된 경험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옳든 그르든 우리는 때때로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을 “선한 사람”이라고 말하곤 한다. 세상의 기준으로만 본다면, 실제로 많은 이들이 그러하다. 그러나 하나님의 표준으로 누구도 그렇지 않으며, 그리스도인도 마찬가지다.
빌립보서 3:4-6에서 바울은 한때 자랑스러워했던 자신의 삶의 여러 모습을 언급한다. 그것들은 어떤 것인가? 당신은 자신의 삶의 과거와 현재에서 어떤 것을 '선한' 것이라고 말하겠는가?
[빌3:4~6] 그러나 나도 육체를 신뢰할 만하며 만일 누구든지 다른 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 5 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6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
*답: 바울은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육체의 자랑이 가득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예수님을 믿고 아는데 해로운 것임을 알았다. 그래서 배설물로 버렸다. 그리스도를 알고 그분 안에 있는 것만이 선한 것이다.
바울은 거짓 교리를 퍼뜨리는 유대인 신자들과, 구원을 위해 오직 그리스도만 전적으로 의지하고 인간의 행위에 불과한 할례 같은 것을 결코 의지하지 않는 할례 받지 않은 신자들을 은연중에 대조한다(히 6:1, 히 9:14 참조; 롬 2:25-29 비교). 바울의 혈통과 과거의 삶이 동족 유대인에게는 상당히 인상적이었겠지만 이러한 것들은 그의 구원에 아무런 기여도 하지 못했다. 오히려 이것들은 한동안 그에게 그리스도가 얼마나 필요한지를 볼 수 없게 했기에 구원에 방해가 되었다.
바울은 단순히 할례받은 것이 아니라 “팔일 만에 할례” 받은 자였다. 즉, 그는 나면서부터 이스라엘 사람이며 언약의 백성에 속한 자로서 태어난 지 정확히 팔일에 할례를 받은 정통 유대인이었다. 게다가 그는 이스라엘의 가장 중요한 도성들을 포함하고 있는 베냐민 지파 출신이며, 히브리 사상을 아는 정도가 아니라, 랍비 가말리엘의 제자(행 22:3, 26:4, 5)이며 바리새인이었기에 율법에 대한 지식과 적어도 유대 전통이 율법을 어떻게 해석하는지에 정통했을 것이다.
바울은 율법에 대한 열심이 지나쳐, 그 율법이 규정하는 유대인의 삶의 방식을 위협하는 것처럼 보였던 교회를 박해했다. 흥미롭게도, 바울은 사람이 만든 “의”의 측면에서 “흠이 없”었지만, 율법이 실제로는 자신의 생각보다 훨씬 더 깊고 많은 것을 요구한다는 것과, 그리스도 없이는 율법 앞에 정죄 받은 자일 수 밖에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교훈> 바울은 사람이 만든 의의 측면에서 흠이 없었지만, 율법은 그보다 더 깊은 것을 요구하며 그리스도 없이는 그 앞에 정죄 받은 자일 수 밖에 없음을 깨달았다.
<부가설명> 성경에 율법이라는 표현은 범위가 넓고 다양해서 많은 착각과 오해를 불러낸다. 율법하면 가장 먼저 십계명을 떠올린다. 그래서 율법을 폐했다는 표현이 나오면 십계명 무용론이 나오는 것이다. 십계명은 율법인 것이 맞다. 그러나 성경 자체에서 십계명을 율법이라고 직접 표현한 곳이 없다. 계명과 율법이라고 해서 구분하는 듯한 표현도 있다. 그러나 십계명리라고 앞에 10이 붙어있는 상태로 그것을 율법이라고 표현한 곳은 성경에 없다. 성경은 우리가 십계명이라고 표현하는 것을 <언약의 열 말씀들>이라고 기록했다(출34:28, 신4:13, 10:4). 그것은 언약서이다. 그래서 그 돌비를 넣은 궤를 언약궤라고 하고 돌비를 언약의 돌판(신9:9,11,15)이라고 했고 다른 말로는 증거판(출16:34, 25:16,21, 31:18, 40:29)이라고 했고 그 궤를 증거궤라고 했다. 법궤라는(레16:2) 말은 원어에는 없다. 원어는 그냥 ‘궤=아론’다. 이것은 율법이기 전에 언약서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언약은 체결한 양방이 서로 동의 하기전에는 고칠 수 없다. 이방적으로 폐기할 수도 없다. 언약관계가 있는 한 영원하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율법이라고 하는 것은 언약을 유지하는 일상생활에 드러내어야 하는 생활 원칙들이고 구원의 생명을 유지하는 성소와 그 봉사에 관한 것이다. 생명을 유지하는 법을 가르친 성소봉사 법은 예수님 십자가와 함께 성취되었으므로 우리가 세상에 성소봉사가 필요 없으므로 폐한 것이다. 혼동하지 않는 지혜가 필요하다.
2월 3일(화) 중요한 문제
어제의 연구에서 말했듯이 이전에 바울이 자랑스럽게 여겼던 것들이 실제로는 믿음의 장애물이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바울에게 그리스도를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보지 못하게 했기 때문이다. 바울은 믿기 이전 자신의 영적 회계장부에 대해 설명하기 위해 상업 용어인 이득과 손실(흠정역)을 사용한다. 비록 우리가 즐겨 생각하는 주제는 아니지만, 모든 사람은 ‘영적 장부’를 가지고 있다. 과거 바울은 예수께서 가르치신 성경의 가치관이 아닌 당시 유대교의 가치관에 따라 장부를 평가하였다.
회심 후에 그의 영적 장부는 매우 달라진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가치 척도가 유대교의 "통화"에서 "하늘의 통화"로 극적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하늘에서 내려오신 그분은 하늘에 대해 말씀하실 수 있으며, 당신의 형상과 표식을 새긴 하늘의 통화가 어떤 것인지 바르게 제시하실 수 있다. 사람들을 타락에서 끌어올려 당신의 보좌 옆으로 높이려고 오신 그분은 그들이 처한 위험을 아신다. 그분은 쓸모없고 위험한 대상에 애정을 쏟는 위험을 지적하신다. 그분은 우리가 전적으로 헛된 것들에 시간과 재능과 기회를 낭비하지 않도록 우리 마음을 땅의 것에서 하늘의 것으로 이끌고자 하신다"(애드벤트 리뷰 앤드 사바스 헤럴드, 1890.7.1.).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영화로운 예수님의 모습을 보고 눈이 멀어(행 9) 영적 시력이 교정되고 분명하게 보게 되기 전까지 바울은 1세기 유대교 세계에서 급부상하던 유명 인사였다.
요한복음 9장은 눈먼 사람이었다가 예수님을 분명하게 본 또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예수께서는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소경 되게 하려"(요 9:39)고 세상에 오셨다고 말씀하셨다. 이 원리는 당신의 삶에 어떻게 적용될 수 있는가?
*답: 진정으로 거듭나면 이런 상태에서 살아가게 될 것이다.
새 하늘과 새 땅에서의 영원한 삶보다 더 가치 있는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그러나 세상의 가치들은 많은 사람이 이 현실을 보지 못하게 한다. 이 세상에서 가치 있게 여겨지는 것들(마 13:22, 눅 4:5-6, 요일 2:16 참조)과 하늘이 가치 있게 여기는 것들, 곧 그리스도를 닮고 영혼의 구원을 얻는 일 사이에는 피할 수 없는 충돌이 있다.
<교훈> 이 세상에서 땅의 가치와 하늘의 가치가 충돌하며, 세상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이 많지만 새 하늘과 새 땅에서의 영원한 삶보다 더 가치 있는 것은 없다.
<부가설명> 오늘날 재림성도들은 구원의 진리를 성경적으로 올바르게 깨닫는 회개가 필요하다. 구원은 일상적인 생활에서 선하게 살지 못한 행위의 죄에서 건져내어 깨끗하게 씻어주는 것이 아니다. 죄는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이다(요16:9). 왜 그것이 죄인가?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은 생명이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요일5:11,12). 생명이 없는 것은 죽은 것, 곧 사망이다. 삼위일명 여호와 하나님은 생명이시다. 사망은 생명과 공존할 수 없다. 사망은 사망의 땅으로 보내고, 이곳이 불 못이다. 생명은 생명의 땅으로 보낸다. 그곳이 새 하늘과 새 땅이다. 이것이 마지막 심판이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어서 생명을 얻지 못했으면 아무리 도덕적으로 선하고 율법으로 흠이 없어도 생명이 없는 사망의 존재이기 때문에 사망의 땅으로 보낼 수밖에 없다. 우리가 예수님의 생명으로 출생했다면(중생) 위엣 것을 생각하며 하늘 사람으로 생활하게 되는 것이다. 생활하는 것이 아니고 되는 것이다. 생명이 하늘 생명이기 때문이다.
2월 4일(수) 그리스도의 믿음
바울의 핵심 요점을 놓쳐서는 안 된다. 그는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자신의 율법 중심적이었던 이전의 삶을 그리스도의 임재로 바꾸는 놀라운 전환을 경험했다. 이는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빌 3:8, 9)었다.
“그 안에서," 곧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된다는 것은 흥미로운 표현이다. 에베소서 1:4, 고린도후서 5:21, 골로새서 2:9, 갈라디아서 2:20을 읽어보라. 바울은 ‘그리스도 안’이라는 개념으로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엡1:4]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고후5:21]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골2:9]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
[갈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답: 그리스도께서 모든 것이라는 개념이다. 우리가 그분 안에 있을 때 비로소 생명으로 존재한다.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바울의 표현은 널리 논의된 주제이다. 이에 대해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엡 1:10)는 가장 적절한 듯한 설명이 바울에게서 나오는 것도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이것이 처음부터 하나님의 목적이었다. 바울은 그것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도 분명하게 말한다.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고전 1:30).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구원의 계획에 담겨 있는 모든 것을 포괄하는 말이다. 그것은 영적 지성(지혜)의 시작부터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칭의), 하늘을 위한 준비(성화), 그리고 마지막으로 재림 때의 영화(구속)까지를 포함한다. 구원은 처음부터 끝까지 우리를 위해서 그리고 우리 안에서 이루시는 그리스도의 사역이다. 따라서 그리스도를 얻음으로써 우리는 필요한 모든 것을 갖게 된다.
빌립보서 3:9을 읽어보라. 바울이 대조하는 두 가지는 무엇이며, 이 대조는 왜 항상 기억해야 할 만큼 중요한가?
[빌3:9]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
*답: 율법과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대조하고 있다. 율법을 행하는 것은 성소봉사를 중심으로 이해해야 하는 표현이다. 예수님은 성소봉사의 모든 것을 성취하셨다. 그래서 그분 안에서 우리는 생명과 의가 된다.
바울이 깨달은 것과 같이, "자기 의"를 갖는 것은 진정한 의가 아니다. 율법은 생명을 줄 수 없기 때문이다(갈 3:21, 22 참조).
오직 그리스도만이 믿음을 통해 생명을 주실 수 있다. 또 아무 믿음이나 생명을 줄 수 없다. 마귀들도 믿고 떤다고 하지 않았는가(약 2:19). 구원하는 유일한 믿음은 "그리스도의 믿음"이다. 오직 예수의 믿음만이 완전히 순종하였고, 순종할 수 있다. 믿음을 뜻하는 헬라어 피스티스(pistis)는 충성도 의미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고 그분이 우리 안에 살아 계시면(갈 2:20), 우리는 그분을 믿는 믿음을 통해 그리스도의 믿음으로 사는 것이다.
<교훈> 구원은 처음부터 끝까지 우리를 위해서, 우리 안에서 이루시는 그리스도의 사역이다. 따라서 그리스도를 얻음으로써 우리는 필요한 모든 것을 갖게 된다.
<부가설명> 성경은 두 가지 ‘안에’에 관하여 분명히 계시한다. 하나는 ‘아담 안에’이고 다른 하나는 ‘그리스도 안에’이다. 지구상에 모든 사람은 이 ‘두 안에’에 의하여 구분된다. 아담 안에서는 모든 사람이 죽었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모든 사람이 산다(고전15:22). 그리스도 안에 있지 않으면 그는 생명이 없다(요일5:11,12). 바울은 아니 성경은 이 ‘두 안에’에 관하여 자주 말한다. 그런데 신학은 이것을 죄와 구원에 관하여 잘 적용하지 않는 것 같이 느껴진다. 이것을 분명히 깨달았다면 어슬프게 아담 대표론 같은 이론을 만들지 않을 것이다. 그런 이론은 도덕론이 핵심에 있는 이론이다. 죄를 인간 행위에 근거하는 이론이다. 성경은 죄=사망으로 분명히 계시했다(롬5:17,21절 대조). 아담 안에서 죽은 것, 곧 아담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잃어버린 상태가 죄다. 그래서 모든 아담 후손은 사망한다. 성경은 이 사실을 분명히 지적하고 예수 그리스도가 생명이며 그의 부활로 생명과 썩지 않을 것을 드러내시고(딤후1:10) 그분을 믿고 그분 안에 있으면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긴다고 가르친다(요5:24,25). 그래서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를 그렇게 강조한다. 만물이 다 그리스도 안에 있다(골1:17). 당연히 생명도 그리스이시다(요1:4, 11:25,26, 14:6).
2월 5일(목) 오직 한 일 - 그리스도를 아는 것
빌립보서 3:10-16을 읽어보라. 이 구절에서 바울이 강조하는 주요 내용은 무엇인가?
[빌3:10~16]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11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12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13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14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15 그러므로 누구든지 우리 온전히 이룬 자들은 이렇게 생각할지니 만일 어떤 일에 너희가 달리 생각하면 하나님이 이것도 너희에게 나타내시리라 16 오직 우리가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그대로 행할 것이라.
*답: 한 일 곧 부활에 참여하는 목표를 향하여 앞으로 달음질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아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 이는 마지막에 그분이 우리를 알고 아버지 앞에서 우리를 인정하실 것을 보장하기 때문이다(마 7:21-23; 마 10:32, 33 참조). 우리는 그분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첫 번째 길은 그분의 말씀, 곧 성경을 읽고 실천하는 것이다. 우리는 제자들처럼 그분을 직접 대면해서 알 수는 없다. 그러나 흥미롭게도 제자들은 그렇게 알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분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다. 이것은 우리에게 성령의 인도하심이 필요함을 강조한다(요 16:13 참조). 우리가 그분을 더 많이 알수록 우리는 그분께 더 가까이 나아간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분의 “부활의 권능”(빌 3:10)에 참여할 때, 이 능력은 우리를 “새 생명”(롬 6:4) 안에 살게 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예수님께 더 가까이 다가가는 두 번째 길은 “그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빌 3:10, 흠정역)이다. 우리가 겪는 모든 시련과 견뎌내는 모든 고통은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겪으신 일을 더 잘 알고 감사하게 하며, 그분과 그분의 뜻을 더 분명히 이해하게 도와준다.
예수님께 다가가는 세 번째 길은 “푯대를 향하여”(빌 3:14) 나아가는 것이다. 이 푯대는 무엇인가? 푯대는 신약성경에서 오직 여기에만 사용된 헬라어 skopos(스코포스)를 번역한 것이다. 그것은 경주의 결승선, 그리고 승자에게 주어지는 상을 가리킨다. 바울은 그것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이라고 부른다(빌 3:14). 그리스도께서 죽음과 부활을 통해 하늘로 올라가신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에게도 동일한 하늘의 상, 곧 영생을 받으라고 부르신다.
분명, 우리는 아직 그것을 얻지 못했다. 우리의 “낮은 몸”이 그분의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화될 때까지 우리는 가장 완전한 의미의 온전함을 이루지 못할 것이다(빌 3:21). 그러나 그분을 알고 매일 우리의 삶에 그분의 임재를 초대함으로써, 우리는 이곳에서 가능한 모든 면에서 예수님을 닮아가는 목표를 향해 전진한다.
이것이 바로 바울이 집중했던 ‘한 일’이다. 마치 경주를 하는 선수처럼(고전 9:24-27 참조), 우리는 이미 지나온 길이나 누가 우리를 뒤에서 좇아오는지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의 유일한 초점은 우리 앞에 놓인, 우리를 기다리는 하늘의 상에 있다. 바울은 모든 근육을 긴장시키고 앞으로 몸을 기울이며 결승선에 도달하기 위해 경주자가 목표에 온전히 집중하는 모습을 생생하게 그린다.
<교훈> 그분을 알고 매일의 삶에 그분의 임재를 초대함으로 가능한 모든 면에서 예수를 닮아가는 목표를 향해 전진하는 것이 바로 바울이 집중했던 ‘한 일’이다.
<부가설명> 달리는 사람은 생명이 있는 사람이다. 나사로가 살아났을 때 예수님은 풀어놓아 다니게 하라고 하셨다. 생명을 회복해서 살아났으니 다니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것이 행함이 있는 믿음이라고 말한 것이다. 죽은 자는 결코 다니지도 달리지도 못한다. 예수님을 아는 것이 영생이라고 하셨다(요17:3). 그래서 바울은 예수님을 아는 것이 가장 고상한 지식이라고 했다. 그것이야말로 영생을 아는 것이고 얻는 것이다. 이 사람들은 생명의 나라로 달려간다. 생명을 가지고 사망의 나라에 살아가는 것은 고역이다. 썩는 냄새가 등천하는 세상이다. 그래도 몸에 배는 그 냄새를 날마다 예수님의 손길에 씻음을 받으면서 생명의 나라로(시27:13) 푯대를 향하여 달려간다. 우리 낮은 몸이 그리스도의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될 때까지 달리는 것이다. 뒤돌아보지도 말고 옆 사람과 견주지도 말고 오직 주님만 바라보면서 달린다. 생명이 있기 때문이다. 구원받았기 때문이다. 아멘.
2월 6일(금) 더 깊은 연구를 위하여
“강하고 균형잡힌 품성을 건설하려고 하는 사람, 온전한 그리스도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그리스도를 위해 모든 것을 바치고, 모든 것을 하여야 한다. 구주께서는 불완전한 봉사를 받지 않으실 것이기 때문이다. 날마다 그는 자기를 포기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배워야 한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고 그 뜻을 배우고 그 교훈에 순종해야 한다. 그와같이 하여 그는 그리스도인의 탁월한 표준에 도달할 수 있다. 하루, 하루 하나님께서는 그와 함께 일하시고 최후의 시험의 때에 설 수 있는 품성을 완성시키신다. 신자는 복음이 타락한 인간들을 위하여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숭고한 실험을 사람들과 천사들 앞에서 날마다 행하고 있는 것이다”(사도행적, 483).
“신랑의 오심을 기다리는 자들은 백성들에게 “너희 하나님을 보라”고 외쳐야 한다. 세상에 비칠 마지막 자비의 빛 곧 세상에 전파되어야 할 마지막 긍휼의 기별은 하나님의 사랑의 품성을 드러내는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야 한다. 그들은 저희의 생애와 품성을 통하여 저희를 위하여 행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나타내야 한다. 의의 태양 광선이 선행 곧 진실한 말과 거룩한 행실을 통하여 비춰지도록 되어 있다”(실물교훈, 415).
함께하는 토의를 위하여
1. 주 안에서 기뻐하라는 이 주제에 대해 더 깊이 생각해 보라. 말씀은 시련 속에서 기뻐하라가 아니라(그것도 성경의 표현이지만) 주님 안에서 기뻐하라고 말하고 있음을 주목하라. 주님과 그분의 선하심, 능력, 사랑, 구원을 항상 우리 앞에 두는 것이 왜 그렇게 중요한 것인가? 그렇게 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삶의 시련 속에서 당신에게 어떻게 큰 유익이 되겠는가?
*답: 나사로는 죽었다가 살아났다. 그 기쁨을 측량할 수 있겠는가? 시련이 와도 살아있다는 기쁨은 빼앗을 수 없다.
2. 위의 인용문이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가 행하는 “선한 일”을 이루는 데 은혜의 역할을 어떻게 묘사하는지 주목해 보라. 그리스도의 임박한 재림을 고대하는 우리에게 은혜의 이 역할이 그렇게 중요한 이유는 무엇인가? 선한 행위로 구원받는 것은 아니지만, 선한 행실이 없다면 우리는 정말 구원받은 사람이 맞는가?
*답: 이미 부가설명에 말한 대로 산 자만이 행실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하자.
3. 육체를 신뢰하지 않는다는 개념에 대해 더 깊이 묵상해 보라.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육신을 신뢰하지 않아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우리의 육신은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이 아닌가?
*답: 육신은 사망의 세력에 약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날마다 죽여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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