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과 사나 죽으나(질문, 대답, 설명) 01/17/26 > 교과토의 자료

본문 바로가기

운영진
x


교과토의 자료 보기

교과토의 자료

제3과 사나 죽으나(질문, 대답, 설명) 01/17/26

페이지 정보

작성자 김명호 작성일26-01-09 09:25 조회1,081회 댓글0건

본문

제3과 사나 죽으나

(1월 17일 안식일 / 일몰: 오후 5시 39분) 

   

연구 범위: 빌립보서 1:19-30, 고린도전서 4:14-16, 고린도후서 10:3-6, 요한복음 17:17-19, 미가 6:8, 사도행전 14:22

 

기억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빌 1:21). 

 

죽음은 삶의 일부일 뿐이라는 말을 흔히 듣는다. 그것은 거짓말이다. 죽음은 삶의 반대이며, 생명의 적이다. 자동차가 파손되기 위해 제작되는 것이 아닌 것처럼 죽음도 삶에 내포되어있는 것이 아니다. 바울은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히 2:14, 15)기 위해서 그리스도께서 죽으셨다고 강조한다. 

그리스도를 위해 죽을 준비가 되어 있었던 바울은 장차 그에게 주실 상급을 확신하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 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그의 삶, 혹은 죽음을 통해서라도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고 가능한 한 많은 사람에게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었다. 아마도 이것이 우리가 바울의 이름이 담긴 많은 서신을 가지게 된 이유일 것이다. 그는 편지를 통해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곳을 포함하여 많은 사람과 여러 곳에 다가갈 수 있었다.

인생은 짧다. 그렇기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시간 안에 하나님 나라를 위해 가능한 최대의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 영향력의 상당 부분은 우리가 "믿는 일에 하나"되는 것을 장려하는 것에 사용해야 한다. 이번 주부터 살펴보겠지만, 이 주제는 바울이 빌립보 성도들에게 편지를 쓴 가장 중요한 이유였다. 

 

학습 목표

깨닫기: 사나 죽으나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고 많은 이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 바울에게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느끼기: 바울은 주님과 연결되어 있었기에 고난과 죽음의 두려움 없이 승리하신 분과 함께 행했다. 

행하기: 주님 그리고 교회와 연합하여 행할 때 말씀에 합당한 삶을 살며, 사명을 완수할 것이다. 

 

TMI 위로

2. 열악한 상황에서도 자신을 내어줄 만큼 바울에게 중요한 문제는 무엇이었습니까?(빌 1:20) 

*답: 그의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는 것이었따.

3. 어떤 일 앞에서도 바울이 생명을 내어줄 수 있었던 중요한 이유는 무엇입니까?(빌 1:21) 

*답: 사는 것이 그리스도였으므로 그를 위하여 죽는 것도 유익하게 생각했다.

4. 바울이 말한 것처럼 그가 죽으면 바로 그리스도와 함께 거하게 되는 것입니까?(빌 1:23)

*답: 아니다. 그가 죽으면 수고에서 쉼을 얻을 수 있다. 그것은 유익한 것은 아니었다.

5. 복음에 합당한 삶과 한마음으로 하나 된 삶은 서로 어떻게 연결되어 있습니까?(빌 1:27) 

*답: 교회가 함께 복음에 합당하게 살면 당연히 한마음으로 하나가 될 수 있다.

6. 교회의 사명을 이루기 위해서 연합이 필수적인 이유는 무엇입니까?(요 17:21)

*답: 그래야 교회가 예수님을 올바르게 드러낸다.

7.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에게 연합이 있을 수 밖에 없는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답: 함께 예수님 안에 있기 때문이다. 

 

결론: 바울에게 중요한 것은 그의 삶, 또 죽음을 통해서라도 예수를 영화롭게 하고 많은 이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었다. 이 일로 옥에 갇히고 핍박 받았지만 바울은 자신까지 내어줄 각오가 되어 있었다. 예수께서 승리하셨기에 그분과 연결되어 있는 한 패할 수 없으며 그는 자신을 주님께 맡겼다. 그는 그분과 함께 고난과 죽음을 겪었으며 이를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것으로 묘사했다. 이런 약속에 합당한 삶은 겸손히 주님과 함께 행하며 하나로 연합하는 것이다. 진리 안에 연합할 때 두려움은 사라지고 우리의 사명을 완수하게 될 것이다.

 

1월 11일(일) 그리스도께서 높임 받으실 것

 

빌립보서 1:19, 20을 읽어보라. 바울은 자신의 재판 결과와 관련해 어떤 것을 기대하는 것처럼 보이는가? 바울은 자신의 무죄 판결보다 무엇을 더 중요하게 여기고 있는가?

[빌1:19,20] 이것이 너희의 간구와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의 도우심으로 나를 구원에 이르게 할 줄 아는 고로 20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답: 자기에게서 예수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는 것이었다. 

 

바울은 범죄자가 아니었지만, 감옥에 처음으로 갇힌 것도 아니었고 박해도 자주 경험하는 일이었다. 고린도에 보내는 편지에서 그는 여태껏 겪은 고난을 상세히 기록했다.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는데 일 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고후 11:23-27). 

그러나 이러한 고난이 그의 마음속에 가장 크게 자리잡은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도록 바울은 즉시 이렇게 덧붙인다. “모든 교회를 염려하는 염려가 날마다 내 마음을 누르고 있습니다”(고후 11:28, 새번역). 

 

고린도전서 4:14-16; 데살로니가전서 2:10, 11; 갈라디아서 4:19; 빌레몬서 1:10을 읽어보라. 바울은 자신이 세운 교회, 또 그리스도를 따르게 만든 사람들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 

[고전4:14~16]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고 이것을 쓰는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내 사랑하는 자녀 같이 권하려 하는 것이라 15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버지는 많지 아니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내가 복음으로써 너희를 낳았음이라 16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권하노니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

[살전2:10,11] 우리가 너희 믿는 자들을 향하여 어떻게 거룩하고 옳고 흠 없이 행하였는지에 대하여 너희가 증인이요 하나님도 그러하시도다 11 너희도 아는 바와 같이 우리가 너희 각 사람에게 아버지가 자기 자녀에게 하듯 권면하고 위로하고 경계하노니,

[갈4:19]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

[몬1:10] 갇힌 중에서 낳은 아들 오네시모를 위하여 네게 간구하노라.

*답: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맺고 있는 말씀들이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아무것도 아끼지 않으셨던 예수님처럼, 바울은 동료 신자들을 위해 “자신마저도 기꺼이 희생할”(고후 12:15, 쉬운말) 각오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한 사람의 행동이 예수님을 닮아갈수록, 어떤 사람들에게서는 더 사랑받지 못하고 감사하게 여겨지지도 않게 된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딤후 3:12). 그러나 신실한 그리스도인이야말로 여전히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복음의 진리를 드러내는 가장 강력한 방법일 것이다(빌 1:7 참조). “오랜 부당한 감금의 기간에 바울의 인내와 명랑함, 그의 용기와 신앙은 끊임없는 설교였다”(사도행적, 464). 

 

<교훈> 감옥에 갇히고 핍박 당하지만 바울의 관심은 자신의 문제보다 그리스도가 존귀히 여김받게 되기를 바라며 동료들을 위해 자신을 내어줄 각오가 되어 있었다.  

 

<부가설명> 바울은 자기가 어떤 상태에 있든지 예수께서 바울 자신으로 인하여 높임 받기를 바랐다. 이것이 바울의 삶의 방식이었다. 왜냐하면, 바울 안에 예수께서 사시기 때문이다(갈2:20). 바울은 교회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분명히 증거했고 신자들은 그 몸의 지체들이라고 분명히 기록했다(고전12장, 롬12장). 지체가 건강하지 않으면 몸이 아프다. 바울은 자기가 어떤 형편에 있든지 건강한 지체로서 활동했다. 그래야 몸이 건강다하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오늘날 교인들도 이 진리를 확실히 깨닫고 성도가 되어야 할 것이다. 지체는 다양하다. 그러나 다 몸의 정상적인 기능을 수행하는 기관이다. 머리(뇌)가 몸을 주장한다. 머리가 지체들을 움직이게 한다. 그래서 교회의 머리는 예수님이라고 분명히 계시했다(엡1:20~23). 예수님의 대리자는 성령이신데 성령님은 기록된 말씀으로 교회를 인도하신다(요16:13~15). 그래서 바울은 에베소 교회 장로들을 불러놓고 그들을 말씀께 부탁했다. 지체들은 이 말씀이 지시하는대로 움직여야 한다. 그것이 예수님의 몸의 지체의 역할이기 때문이다. 이 시대는 정말 이 진리를 깨닫고 따라야 할 시대다.

 

1월 12일(월)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실감하지 못하고 있을 수 있지만 우리 모두, 특별히 믿는 자들은 각자의 주변, 그리고 자기 자신 안에서도 격렬하게 벌어지는 대쟁투의 한 가운데 있다. 우리 모두는 어떤 식으로든 이 우주적 쟁투의 현실을 경험하며 각자가 언제 어떤 모습으로든 죽음에 이르는 그때까지 그런 상황을 겪게 될 것이다. 

 

고린도후서 10:3-6을 읽어보라. 우리 앞에 펼쳐진 영적 전쟁은 어떤 성격이며, 우리의 무기는 무엇인가? 

[고후10:3~6] 우리가 육신으로 행하나 육신에 따라 싸우지 아니하노니 4 우리의 싸우는 무기는 육신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어떤 견고한 진도 무너뜨리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모든 이론을 무너뜨리며 5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무너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하니 6 너희의 복종이 온전하게 될 때에 모든 복종하지 않는 것을 벌하려고 준비하는 중에 있노라.

*답: 육신에 속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을 무너뜨리며 모든 생각을 그리스도께 복종하게 하는 싸움이다.

 

가장 강력한 영적 무기는 생각이며, 좋은 생각, 나쁜 생각 모두 해당된다. 사탄은 비판, 배신, 당혹감, 두려움, 동료의 압력, 그리고 그와 유사한 수많은 도구들, 곧 그리스도인은 결코 사용해서는 안 되는 도구들을 사용한다. 우리는 대신 사랑, 자비, 평화, 온유, 오래 참음, 친절, 절제로 무장해야 한다. 신중하게 사용하기만 한다면 우리의 가장 강력한 무기는 성령이 휘두르는 “하나님의 말씀”(엡 6:17)이다. 왜냐하면 오직 하나님만이 사람의 마음에 진리가 자리 잡게 하실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단순히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그분이 사용하시는 도구일 뿐이다. 

 

빌립보서 1:21, 22을 읽어보라. 우리는 바울이 말하는 바를, 특히 대쟁투의 맥락에서 어떻게 이해해야 하겠는가?

[빌1:21,22]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22 그러나 만일 육신으로 사는 이것이 내 일의 열매일진대 무엇을 택해야 할는지 나는 알지 못하노라.

*답: 그리스도 안에서 자아가 죽을 때 거룩한 삶의 열매가 열린다. 육신으로 살지만 그리스도를 위하여 죽는 마음으로 사는 것이다. 

 

이 싸움은 영적 전쟁이기에 우리는 생각과 가치의 전쟁 가운데 있다. 하지만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승리를 거두셨기에, 우리가 그분과 연결되어 있는 한 죽임을 당한다 할지라도 결코 패배하지 않는다. 바울은 이 땅에서 자신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며, 그것이 아무리 부당해도 자신의 생명까지 내어주었다. 그 이유는 자신의 생명과 미래를 더 높은 정부에 맡겼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자신의 권리를 위해 싸우기를 마치 옳은 일을 위해 싸우듯 해서는 안된다. “힘 있는 자가 옳은 것이” 아니라 “옳은 자가 힘이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은 존귀한 일이며 분명, 우리에게 주어진 전쟁에서 승리하는 유일한 길이다. 바울이 빌립보서 2장에서 분명히 밝히는 것처럼 예수님이야말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신 가장 완전한 모본이시다. 

 

<교훈> 예수께서 승리했기에, 그분과 연결되어 있는 한 죽임 당해도 패할 수 없다. 이 땅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도 그는 자신을 더 높은 정부에 맡기고 생명까지 주었다. 

 

<부가설명> 그리스도인은 죄를 짓는 사람이 아니다. 성경은 하나님께로 난 자들은 죄를 짓지 못한다고 분명히 계시하였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그도 범죄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났음이라”(요일3:9). 그들은 죄에 대하여 죽은 자이기 때문에 죄와 함께 살 수 없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롬6:1,2). 그리스도인은 죄와 싸우는 전사들이다. 싸우다보니 상처도 받고 넘어지기도 한다. 이것을 그리스도인이 짓는 죄라고 말한다. 요한 이것은 사망에 이르는 죄가 아니라고 했다(요일5:17). 이 상처나 더러워진 것들은 예수께 나가면 치료해주시고 씻어주신다. 이것을 회개라고 말한다. 회개하는 그리스도인은 상처를 싸매주심으로 다시 건강하고 힘을 얻는다. 그래서 또 죄와 싸울 힘과 용기를 얻는다. 문제는 진정으로 주님 앞에 상처를 내어놓지 않는데 있다. 가장 강한 원수가 생각을 지배하는 것이다. 그래서 모든 생각을 사로잡에 그리스도께 복종시키라고 하신 것이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생활이다. 

 

1월 13일(화) 확신하는 삶

  

빌립보서 1:23, 24을 읽어보라. 바울이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더욱 좋으나”라고 말한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빌1:23,24] 내가 그 둘 사이에 끼었으니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 그렇게 하고 싶으나 24 내가 육신으로 있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

*답: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수고로움을 쉬는 것이 자기에게는 좋지만, 유익한 것은 아니라는 표현이다. 죽은 것은 수고를 쉰다는 뜻이 내포된 표현이다. 

 

이 구절은 오랜 세월 동안 크게 오해되어 왔다. 이번 주에 연구하는 본문에서 바울은 삶과 죽음을 대조하고 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를 위해 살며, 심지어 그분을 위해 죽을 수도 있다. 그런 의미에서 죽는 것도 “이득”인 것은 우리의 증언이 그만큼 더 강력하고 설득력 있게 되기 때문이다(빌 1:21). 믿음을 위해 기꺼이 죽을 각오가 된 사람의 믿음은 의심의 여지없이 분명한 것이다. 

그와 함께 우리는 죽은 자들이 실제로 죽은 상태임을 또한 인식해야 한다. 그들은 “아무것도 모르며” 부활의 때까지 무덤에서 쉬고 있다(전 9:5; 요 5:28, 29 참조). 그렇기에 예수께서 죽은 나사로에 대해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요 11:11)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만약 사람이 죽을 때 즉시 천국에 간다면, 나사로의 경우는 어떠했을지 생각해 보라. 나사로가 낙원에서 나흘간 즐겁게 지내고 있는데 천사가 와서 안 좋은 소식을 전한다. “나사로, 미안하지만 예수께서 너를 땅으로 다시 부르신다. 낙원에 더 이상 머물 수 없다.” 

오류를 다룰 때 그것의 논리적 결론까지 가보면 그것의 심각성을 알 수 있다. 죽음은 꿈도 꾸지 않는 잠과 같으며,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에 당신의 충성스러운 종들을 그 잠에서 깨우실 것이다. 그런 다음 그들은 살아 있는 성도들과 함께 하늘로 올라가서 예수님과 영원히 함께하게 될 것이다(살전 4:16, 17 참조). 

바울이 현재의 삶에서 “떠나” 그리스도와 함께한다는 것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빌 3:11)기 위해 그분과 함께 고난과 죽음을 겪는 것을 의미한다(딤후 4:6). 바울은 자신도 죽음으로 눈을 감을 것이며, 그다음에는 잠시 잠깐 후면 그를 모든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사랑하는 자들을 위해 마련하신 곳으로 데려가실(요 14:3, 고전 2:9) 예수님을 보게 될 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리스도를 위해 기꺼이 죽을 각오가 되어 있었지만, 바울은 자신이 “육신에 거하는 것이” 빌립보 성도들에게 더 유익할 것을 알았다(빌 1:24). 바울의 이야기처럼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것이 더 나은지, 아니면 그분을 위해 죽는 것이 더 나은지를 말하는 것은 분명 쉽게 답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바울은 살아서 남을 것인지 무덤에서 쉴 것인지의 두 가지 사이에 “끼어 있는”듯한 고통을 겪었다(빌 1:23). 

 

<교훈> 바울이 현재 삶에서 “떠나” 그리스도와 함께한다는 것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기 위해 그분과 함께 고난과 죽음을 겪는 것을 의미한다.

 

<부가설명> 참된 그리스도인은 세상에 살고 있어도 세상에 속한 사람이 아니다. 그들은 하늘에 속한 사람으로 세상을 나그네로 지나가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들이 본향인 하늘에 가는 것이 제일 좋은 일이다. 그러나 그 하늘나라는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 그분과 함께 들어간다. 바울은 이 하늘나라에서 예수님과 함께 있는 것이 가장 좋다고 했다. 우리도 같은 생각 아닌가? 문제는 ‘세상을 떠나서’라는 표현이다. 하늘나라에 가려면 이 세상을 떠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것은 예수님 재림하실 때 이루어지는 것이므로 죽을 때 영혼이 가는 곳이 아니다. 사람이 죽어도 그 영혼을 죽지 않는다는 말을 사탄의 새빨간 거짓말이다. 죽는 것은 기억이 멸절되는 것이다. “그들은 죽었은즉 다시 살지 못하겠고 사망하였은즉 일어나지 못할 것이니 이는 주께서 벌하여 멸하사 그 모든 기억을 멸절하였음이니이다”(사26:14). 기억이 멸절되는 것이 죽는 것인데 좋고 나쁜 감정이 생길 수 없다. 그런데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다는 감각도 없다. 그런데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좋은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이것은 몸이 죽은 후에 영혼이 예수님과 함께 있는 것을 뜻하는 말일 수 없다. 세상에서 복음 전하는 수고로움에서 쉬는 상태를 나타낸다. 성경은 이렇게 말한다. “또 내가 들으니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 이르되 기록하라 지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이 이르시되 그러하다 그들이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그들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하시더라”(계14:13). 바울은 이것을 말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바울이 맡은 사명과 연결할 때 유익한 것은 아니다. 바울은 좋은 것이 아니라 유익한 것을 택했다. 우리도 삶에서 주님을 위하여 유익한 것을 택할 줄 알아야 할 것이다. 

 

1월 14일(수) 하나되어 굳게 서라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위해 하신 마지막 기도는 가장 중요한 핵심 주제로 가득 차 있었다.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은 십자가 너머에 있는 아버지와의 재회, 그리고 우리와의 재회를 바라보셨다.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 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저희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요 17:24).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당신의 자녀들을 지켜 주셔서 “우리가 하나인 것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소서”(요 17:11, 우리말)라고 기도하셨다. 또 그분은 분열이 초래하는 비참한 결과를 역설하시며 그들의 분열이 많은 이들이 믿지 않는 이유가 된다고 하셨다. 예수님은 이 짧은 기도 가운데 두 번이나 우리와 예수님, 그리고 아버지와의 하나됨을 강조하시며 이는 “세상으로 … 믿게 하”려 함이며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요 17:21, 23)라고 하셨다. 

 

빌립보서 1:27을 읽고 요한복음 17:17-19과 비교해 보라. 예수님과 바울 모두 교회의 연합에 필수적인 것이 무엇이라고 말했는가? 

[빌1:27]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이는 내가 너희에게 가 보나 떠나 있으나 너희가 한마음으로 서서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는 것과,

[요17:17~19] 그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18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 같이 나도 그들을 세상에 보내었고 19 또 그들을 위하여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오니 이는 그들도 진리로 거룩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이다.

*답: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는 것이다. 진리, 곧 하나님의 말씀으로 하나되어 말씀대로 생활하는 것이다.

 

“합당하게 생활하라”로 번역된 헬라어는 폴리튜오마이(politeuomai)로 “시민으로 살다”라는 뜻이다. 이는 세상 나라의 사람이 아닌 하늘나라의 시민으로 사는 것을 의미한다. 산상수훈은 하늘 아버지의 자녀이자 그분의 나라의 백성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름답게 그려낸다. 곧 심령이 가난하고, 온유하며, 의에 주리고 목마르고, 긍휼히 여기고, 마음이 청결하며, 화평하게 하는 자가 되는 것이다. 또 오른 뺨을 돌려 대고, 원수를 사랑하며, 우리를 저주하는 자를 축복하고, 자신을 미워하는 자에게 선을 행하는 것이 그 모습이다. 요컨대, 이는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미 6:8)을 의미한다. 그런 사람에게 화내거나 분노하기는 어렵다. 그런데 정말 그런가? 때로 우리는 너무 착해 보이는 사람에게 오히려 반감을 느낀다. 심지어 깎아내리거나 그들이 겉보기만큼 훌륭하지 않음을 증명하려고 약점을 찾아내려 하는 것은 그렇게 함으로 스스로 불편함을 덜고 싶은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하기보다는, 우리가 얼마나 더 사랑할 수 있는지, 얼마나 너그러울 수 있는지, 얼마나 더 긍휼히 여기며, 겸손할 수 있는지를 생각해 보는 것은 어떨까? 엘렌 화잇은 “하나님과 진리를 사랑하는 것보다 세상과 그 유익을 더 사랑하”는 자에 대해 말했다(교회증언 5권, 277). 

매우 자주 교만 때문에 교회 안에서 분열이 일어난다. “교만과 세속적 야망을 품음에 따라 그리스도의 정신은 떠나가고, 경쟁의식과 불화와 다툼이 들어와서 교회를 괴롭히고 약화시켰다”(교회증언 5권, 240). 우리 각자가 예수님께서 모본으로 보여주신 겸손과 온유를 배우는 것은 얼마나 중요한가! 그렇게 된다면 우리 교회는 얼마나 달라질 것인가? 

 

<교훈> 예수님은 마지막 기도 가운데 연합을 강조하시며 예수님, 아버지와 연합할 것을 기도하셨다. 우리의 분열은 세상으로 믿지 못하게 만드는 이유가 된다. 

 

<부가설명> 성도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그들은 이 세상에서 하늘나라를 사는 사람이다. 시민권은 하늘에 있고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다(골3:1~3). 그렇게 살아가려고 할 때 사탄은 성도들의 생각을 공격한다. 이 공격에 넘어가면 가룟 유다처럼 된다. 마귀는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님을 팔 생각을 넣었다(요13:2). 가룟 유다는 이 생각을 굳게 잡았다. 결국 예수님을 팔았고 그도 소망 없이 죽었다. 사탄은 지금도 우리의 생각을 공격한다. 그래서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께 복종시켜야 한다. 하늘을 생각하면서 땅의 것을 덜 생각해야 한다. 땅의 것을 생각하는 한도는 이 세상에서 하늘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것에 국한되어야 할 것이다. 이것이 하늘 시민으로 사는 하늘 백성의 방법이다. 그렇게 살아가는 원칙을 기록된 진리의 말씀 성경이다. 그래서 진리로 하나가 되어 진리로 거룩하게 되어야 한다. 성령께서 우리 마음에 역사하셔서 이렇게 살도록 능력으로 복 주시기를 기도한다.

 

1월 15일(목) 하나되어 두려움 없이

 

빌립보서 1:27-30을 읽어보라. 우리의 연합과 “복음의 믿음을 위하여 한마음으로 함께 싸우”는 것은 두려움이 없는 것과 어떻게 관련되어 있는가?

[빌1:27~30]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이는 내가 너희에게 가 보나 떠나 있으나 너희가 한마음으로 서서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는 것과 28 무슨 일에든지 대적하는 자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이 일을 듣고자 함이라 이것이 그들에게는 멸망의 증거요 너희에게는 구원의 증거니 이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이라 29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 30 너희에게도 그와 같은 싸움이 있으니 너희가 내 안에서 본 바요 이제도 내 안에서 듣는 바니라.*답: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말씀으로 하나가 되면 하나된 연합의 힘을 두려움을 없앤다. 사탄과 대적할 때 싸우는 힘의 동력이 된다.

 

사탄의 전략은 분열시키고 정복하는 것이다. 분열은 치명적이다. 예수님은 “만일 집이 스스로 분쟁하면 그 집이 설 수 없”다고 말씀하셨다(막 3:25). 우리가 이 단순한 원리를 잊을 때 사탄은 기뻐한다. 우리의 연합은 “영원한 복음”을 “여러 나라와 족속과 방언과 백성에게”(계 14:6) 선포하는 성경 예언에 나타난 남은 자로서(계 12:17) 역할을 이룰 수 있도록 돕는다. 하나님께서 주신 기별을 전파하는 우리의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서 연합은 필수적이며, 요한복음 17장의 예수님의 기도는  하나님 말씀의 “진리”를 연합을 위한 가장 중요한 열쇠로 강조한다(요 17:17, 19). 우리의 기별은 우리의 사명이나 연합과 분리될 수 없다. 

이 세 가지는 함께 서거나 함께 무너진다. 이 세 개의 열쇠 중 하나라도 없다면 우리는 성공할 수 없다. 그러나 이 세 가지가 모두 제자리에 있다면 두려워할 것이 없다. 우리는 “대적하는 자(를) … 두려워하지” 않아야 한다(빌 1:28). 사탄은 패배한 대적이다. 설령 우리가 믿음 때문에 죽임을 당한다 하더라도, “선한 것을 따르는 자”(벧전 3:13)가 된다면 어떤 것도 우리를 해칠 수 없다. 마귀는 하나님의 진리가 전진하는 것을 막을 힘이 없다. 

 

마태복음 10:38, 사도행전 14:22, 로마서 8:17, 디모데후서 3:12을 읽고 이 구절들의 공통된 주제를 간략히 요약해 보라. 

[마10:38]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행14:22]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머물러 있으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

 

[롬8:17]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딤후3:12]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

*답: 그리스도인에게는 환난이 따르게 되어 있다. 

 

이 타락한 세상에서의 삶은 심지어 ‘가장 선한’ 사람에게도 힘든 것이다. 

욥은 의로운 사람이었으며, 성경은 그가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라고 말한다(욥 1:1). 그런데 하룻밤 사이에 그와 가족에게 재앙이 닥쳤다. 개인적인 경험이나 다른 사람에게 일어난 일을 보면서 이 세상의 삶은 마치 벼랑 끝에 서 있는 듯하며, 언제 그 끝으로 떨어질지 알 수 없다는 것을 모르는 이가 어디 있겠는가? 우리 모두는 어느 정도의 고난을 겪게 된다. 그러나 결국, 다른 어떤 이유가 아닌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 받는 것이 더 나은 것이다. 

 

<교훈> 우리의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서 연합은 필수적이며, 요한복음 17장의 예수님의 기도는 하나님 말씀의 “진리”를 연합을 위한 가장 중요한 열쇠로 강조한다. 

 

<부가설명> 마귀가 혼신의 힘으로 하나님의 복음 사업을 막으려고 해도 하나님은 자신의 일을 진행하시고 이루신다. 사탄은 이미 패배한 원수다.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이유가 없다. 그런데 우리는 주님의 승리를 믿고 보는 대신에 나의 연약함과 사탄의 강함을 본다. 그러면 두려움이 덮이고 용기는 사라진다. 그래서 순간마다 호흡마다 주님을 생각하고 능력의 말씀을 붙들어야 한다. 호흡마다 걸음마다 기도로 주님과 연합하는데 말씀 안에서 연합해야 한다. 모든 사람이 말씀으로 거듭나서(벧전1:23) 말씀의 사람이 되면 말씀으로 하나가 될 수밖에 없다. 말씀을 사람은 말씀으로 살 수밖에 없지 않은가? 역사의 종말 시기에 살고 있는 재림 성도들은 이 진리를 잘 깨닫고 진리를 따라 예수님 안에서, 진리의 말씀 안에서 충성하여 주님의 오심을 위하여 세상을 준비시키는 그 일을 잘 감당해야 할 것이다. 이렇게 전진할 때 사탄은 더욱 강하게 공격할 것이다. 그러면 고난이 닥친다. 그러나 말씀의 능력으로 예수님의 승리를 우리의 승리가 되게 해야 할 것이다.

 

1월 16일(금) 더 깊은 연구를 위하여

 

“고문대와 화형주와 감옥에서, 토굴과 동굴에서 순교자들의 승리의 함성이 그의 귀에 들린다. 그분은 비록 궁핍과 고통과 고문을 당하면서도 ‘나의 의뢰한 분을 내가 안’다고 두려움 없이 믿음을 증거하는 확고부동한 영혼들의 엄숙한 증언을 들으신다. 믿음을 위하여 자기 생명을 버린 이들은 저희가 신뢰해 온 그분께서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다고 세상에 선포한다”(사도행적, 512). 

“오늘날처럼 기독교계에 신앙이 엄청나고 다양하게 존재한 적은 없었다. 초기 교회의 연합을 지키는데 사도, 선지자, 복음 전하는 자, 목자, 교사(엡 4:11-13)의 은사가 필요했다면, 지금 하나됨을 회복하는 데는 얼마나 더 필요하겠는가! 마지막 때에 교회의 연합을 회복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은 예언이 분명하게 증거한다. 우리는 주께서 다시 시온을 회복하실 때 파수꾼들이 서로 의견을 일치할 것이라고 확신한다. 또한 마지막 때에 지혜로운 자들은 깨달을 것이다. 이 예언이 성취될 때, 하나님께서 지혜롭다고 여기시는 모든 사람 사이에는 믿음의 일치가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실제로 바르게 이해하는 자들은 분명히 같은 이해를 가질 것이기 때문이다. … 이러한 점들을 고려할 때, 여기 예언된 교회의 완전한 상태는 여전히 미래에 있을 것임을 분명히 알 수 있다. 따라서 이 은사의 목적은 아직 완전히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코트렐, R. F. Cottrell, 초기문집 서문, 140). 

 

함께하는 토의를 위하여 

1. 위의 코트렐의 글에 비추어 볼 때, 오늘날 하나님의 교회 가운데 성령께서 연합을 주시기 위해 교회에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예언의 선물을 통해 주어진 권고를 실천하는 것은 교회 연합에 얼마나 중요한가?

*답: “묵시가 없으면 백성이 방자히 행하거니와 율법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느니라”(잠29:18). 말씀을 바르게 깨닫고 말씀으로 연합하도록 예언의 선물을 주셨다. 이 권고를 교회는 바르게 깨달아 받아들여야 한다.

2. 바울과 다른 죽은 그리스도인들이 지금 하늘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다고 믿는 친구에게 죽음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을 어떻게 설명하겠는가?

*답: “무릇 산 자는 죽을 줄을 알되 죽은 자는 아무 것도 모르며 다시는 상도 받지 못하는 것은 그 이름이 잊어버린 바 됨이라”(전9:5). “그들은 죽었은즉 다시 살지 못하겠고 사망하였은즉 일어나지 못할 것이니 이는 주께서 벌하여 멸하사 그 모든 기억을 멸절하였음이니이다”(사26:14).

3. 이 세상에서 겪는 고통의 끔찍한 현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이 모든 것을 이해하는 데 대쟁투 주제가 크게 도움이 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이 가장 충만하게 나타난 모습으로 바라보며, 가장 힘든 때에도 그분을 신뢰하는 법을 배워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답: 하나님의 백성이 적국인 사탄이 주장하는 세상에(눅4:5,6) 살고 있기 때문이다. 사탄은 하나님의 백성을 색출해서 공격한다. 그러나 예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고난의 싸움을 싸우면 마침내 성도들이 나라를 얻게 된다(단7:21,22).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대총회 북아태지회 한국연합회 성경통신학교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 한국연합회 선교부 | 고유번호증번호: 204-82-62040 | 대표자: 강순기 | 부서장: 신광철
Copyright © 2014 안식일학교·선교부 All rights reserved.
top